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빛의 제국 ㅣ 김영하 컬렉션
김영하 지음 / 문학동네 / 2006년 8월
평점 :
구판절판
'검은꽃' 을 읽고 단박에 김영하님의 팬이 되어 버렸다.
그래서 김영하님의 작품이 나올때마다 관심을 갖고 있었지만 '검은꽃' 이후로 장편이 나오지 않아 내심 기다리고 있던 차에 '빛의 제국'이 나와 얼마나 반가웠는지 모른다.
그래서 바로 구입하고 읽었는데 나는 잠시 멈칫 해진다.
책을 읽은 느낌을 쓴다는게 애매해지고 난해해지는 느낌이다.
민감한 남북관계의 묵직함 때문일까?
아니면 '검은 꽃'의 여운을 떨쳐버리지 못함이였을까?
그 어떤것도 이 느낌의 잔상이 아니라는걸 인정하지 못한채 나는 그렇게 빛의 제국 속으로 빨려 들어간다.
한남자가 있다.
남파간첩으로 내려왔지만 활동이 없었던 10년만의 메세지가 귀환이라니...
이미 자신에게 연결된 선도 끊어졌고 자신이 간첩이라는 사실을 망각했다 해도 과언이 아닐 평범한 삶을 살고 있는 그였다.
그는 어떠한 결정을 해야 할지를 모른다.
북으로 돌아가야 하는지,이대로 남아야 하는지,아니면 제 3국으로 도망을 칠것인지, 혹시 숙청 되는 건 아닌지 수많은 고민과 걱정속에 아무런 결정을 못하는 가운데 그려진 하룻동안의 이야기다.
책이 두꺼운 반면 쉽게 읽혀질 것 같은 분위기였는데 책장을 넘기는 손길에 자꾸 미련이 남았다.
책장을 넘기면서도 생각하게 되고 서서히 다가가는 결론에 조바심이 날법도 한데 오히려 결론을 만나고 싶지 않은채 이대로 머무르고 싶은 느낌들이 밀려왔다.
기영이 선택한 결론의 너머에 무엇이 도사리고 있을지 난 두려웠다.
그래서 자꾸 기영의 주변을 멤돌았는지도 모르겠다.
한 아이의 아빠, 자기만의 일을 가지고 있고 애정이 깊진 않지만 아내도 있는 평범한 생활의 연속이였다.
그런 상황에서 자신이 간첩이고 이젠 북으로 돌아가야 한다고 가족에게 말했을땐 과연 어떤 반응이 나올까.
결국 딸에겐 말하지 못했지만 부득이 하게 말하지 않을 수 없었던 아내 마리는 냉담하다. 과연 15년동안 살을 섞고 살았나 하는 생각이 들 정도로 현실을 직시하며 젊은 애인과의 정사를 드러내고 난 이런 여자라고 말하는 아내.
그는 배신감 보다 혼란스럽다.
그런 아내를 보아도 도무지 어떠한 결정을 해야할지 알 수가 없다.
하룻동안의 시간속에 오로지 자신의 결정만이 모든걸 뒤집을 수 있었을 상황임에도 기영은 결국 좁은 선택의 폭 속에서 갇히고 만다.
책의 끝을 맞이해야 하기에 어쩔 수 없이 만나고 마는 결론은 조금은 허무했다.
그가 하루종일 용을 쓰고,머리를 굴리고,정보를 모으고 고민하던 과정을 봐왔기에 기영이 당면하게 되는 위기와 결론은 팽팽한 풍선이 바람이 빠지는 듯한 허무였다.
기영은 또 다른 삶을 살아가야 하는 것이다.
마리도 알아버렸고 이제 자신의 존재를 알아버린 정보기관이 있는한 그 전의 평범은(간첩이라는 사실을 덮어두더라도) 기대할 수 없을 것이다.
이젠 평범을 가장한 평범을 연출해야 할지도 모르겠기에 그는 제 3의 국면을 맞이한 것이다.
단 하룻동안의 이야기라고 하기에 속도감을 기대했던것도 사실이였다.
하루라는 시간속에 느낄 수 있는 많은 것들을 만나리라 기대하며 펼친 빛의 제국은 하루라는 시간이 전혀 느껴지지 않았다.
긴박함 속에 수많은 것을 펼쳐놓은 하루가 아닌, 하루이면서 10년 20년의 세월을 담고 있는 듯한 느낌이였다. 이런 느낌의 가운데에는 결코 쉽게 넘어가지 않을 수 없는 분단의 역사가 있었다.
서로 다른 길을 가고 있는 민족의 비애가 현실속에 때로는 무덤덤하게 때로는 실감나게 다가와서 넘어가면서도 찜찜한 느낌들이 담겨 있었다.
기영이 남파하던 80년대와 2000년대는 분명 차이가 나지만 분단의 사실은 변함이 없다.
그에 대응하는 방법이 달라졌을뿐 그 사실은 변함이 없기에 그런 무게감이 짓눌렀는지도 모르겠다.
저자 또한 긴박하게 흘러감이 아닌, 절제가 보였기에 충분히 감지할 수 있는 무게감이였다.
한층 더 묵직하고 신중하게 다가온 빛의 제국은 저자의 다음 작품에서의 노련함을 기대하고 기다리게 되는 아쉬움을 담고 있었지만 진보의 과정이라 생각한다.
한 작가의 그런 과정을 만끽하고 같은 시대를 살아가는 것이 얼마나 큰 행복인지 알기에 기꺼이 동참하려고 한다.
저자가 바라보고 향하는 방향으로의 동행이 그래서 즐거운지도 모르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