발로 차 주고 싶은 등짝
와타야 리사 지음, 정유리 옮김 / 황매(푸른바람) / 2004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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왠지 지금 학창시절로 돌아간다면 공부도 열심히 하고 나의 꿈을 향해 불철주야 노력하며 잘할 수 있을 것 같은 생각이 든다.

그래서 꿈 속에서의 나는 고등학교 시절을 벗어날 수 없는 것 같다.

지각하고, 스쿨버스 놓치고, 시간표대로 교과서와 준비물을 챙기지 않는 꿈은 여전히 단골이 되어가고 그런 꿈을 꾸고 나면 그 감정의 응어리는 여전히 나를 엄습해 학교를 다시 다니라고 한다면 '싫다'라는 말이 저절로 나올 정도다.

그러나 어느새 그런 느낌은 잊어 버리고 학교를 갈망하는 나를 발견할 때면 그렇게 아쉬움이 많이 들었나 돌아보게 된다.

그랬기에 꿈 속의 우울이 풍겨나오는 이 책은 학창시절의 나를 떠올리게 했다.

 

하츠는 혼자다.

그리고 분명 학창시절의 친구들이 있었음에도 나역시 혼자다.

창가에서 혼자 밥을 먹는 하츠, 친구들과 재잘대며 밥을 먹고 있음에도 나만의 두려움이 풍겨 나오던 나.

왠지 닮아 있었다.

그러나 하츠가 훨씬 쿨하다는 생각이 든다.

적어도 하츠는 자신을 감추지 않은채(감추지 않으려 해도 아무도 알아주지 않아 감추는 꼴이 되어 버렸지만) 궁상 맞지는 않았다.

그에 반해 나는 나를 감춘채 궁상을 떤적이 무척 많았고 두려운 적은 거의 매일이였다.

고독했지만 하츠에게서 두려움은 느껴지지 않았다.

무료하다 느끼며 말을 아꼈을 뿐.

그러한 사실이 다른 아이들과 달라 늘 혼자였지만 별로 개의치 않는다. 자기와 조금은 비슷한 니나가와가 있다 생각했기 때문일까?

니나가와가 하츠에게 그런 위안 거리가 된 적이 있었던가?

올리짱이 나오는 잡지를 보고 있는 니나가와에게 그 사람을 본적이 있다고 말하기 전까지 말이다.

올리짱의 팬이였던 니나가와와의 대화는 그렇게 시작되었다.

그것을 계기로 니나가와 집에 초대받는 하츠는 현실의 올리짱은 잊은채 자신만의 올리짱 세계에 갇혀 있고 다른 아이들처럼 자신을 의식하지 않는 니나가와가 순간 꼴보기 싫어진다.

펀치 수준이였다며 등짝을 채인 니나가와의 당황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그만 가봐야 겠다며 태연히 말하는 하츠는 움츠린 니나가와의 등짝을 통해 조금씩 다가가게 된다.

 

그냥 달리고 싶어 하는 육상처럼 움츠린 등짝이 그냥 차고 싶어 바라보게 된 니나가와의 등짝은 하츠에게 조금씩 자신만의 세계를 열어 보이는 변화를 가져온 것이다.

그 변화의 결과는 드러나지 않지만 그 시작은 하츠에게 어떠한 의미가 될지 상상해보는 희미한 연결 과정도 있었다.

어느 순간 학창시절의 두려움과 고독은 잊은채 하츠의 세계를 여행하는 나를 보고 있자니 혼란스러웠다.

그 혼란의 중심에는 하츠의 깨어남과 동시에 더이상 학창시절의 회귀가 아닌 지금의 나의 모습이 있었기 때문이다.

과거의 나를 후회하고 짓눌려 있는 모습이 아닌 있는 그대로의 나자신이였다.

하츠가 그랬던 것처럼 있는 그대로의 니나가와를 좋아하듯 나는 나를 바라보고 있었고 하츠 또한 자신을 조금씩 발견해가고 있다.

그리고 주변 사람들의 마음을 조금씩 헤아려가고 자신이 늘 거부하던 진실에 대한 긍정도 하게 된다.

그러한 변화는 더디게 그리고 저자의 문체에 익숙해져 있어 지나치기 십상이지만 지나온 후에 그러한 감정이 밀려드는 것 또한 하츠에게 다가오는 느낌들처럼 거부할 수 없다.

너무 고독한 고등학생, 삶의 재미 또한 너무 일찍 상실해버린 고등학생이라는 생각이 짙었던 것도 사실이다.

그러나 누구한 한번쯤 10대 때를 돌아보자면 상실감과 고독이 덮칠때의 느낌을 겪어보지 않는 사람이 없을 것이다.

하츠는 순간적 고독이 아닌 익숙한 고독이였기에 하츠만의 세계가 짙었지만 나와는 동떨어짐을 느낌과 동시에 공감을 사는 이유는 인간에게 나오는 감정이기 때문인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특정한 사건이 있는 것이 아닌 일상에서 만날 수 있는 평범함이라 한바탕 꿈처럼 느껴져 잠시 제목과의 연관성을 망각해 버릴때도 있었다.

사건이 없는 평범함이 지극히 평화롭다는 것을 앎에도 등짝을 통해 서서히 변해가는 하츠의 내면을 말하고자 함일지도 모를 일이다.

그랬기에 시원하게 니나가와의 등짝을 발로 차는 하츠의 모습은 단순한 감정의 표현이 아닌 그 순간 자신의 벽 속에 갇힌 나를 깨트리고 나오는 시작에 불구한 것이였으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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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텍쥐페리의 전설적인 사랑
알랭 비르콩들레 지음, 호세 마르티네스 프룩투오조 자료협조, 이희정 옮김 / 이미지박스 / 2006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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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텍쥐페리하면 '어린왕자'를 떼어 놓을 수 없을 것이다.

나 또한 읽었음에도 사람들이 어린왕자에 열광하는 이유를 깊이 새겨 보지 않았고 그런 작가로만 인식하고 있던 생텍쥐페리의 사랑이라. 너무 유명해서인지 무조건 궁금했다.

내가 아는건 어린왕자 밖에 없기에 어린왕자의 그림자가 짙을거라 생각했다. 어린왕자 얘기가 빠질수가 없지만 이 책의 주류는 제목처럼 사랑이였다.

콘수엘로라는 부인이 있었음에도 철저히 외면당한채 그들의 사랑은 묻혀져 있어 그 사랑을 알리고자 쓴 책이였다.

 

그러나 책장을 넘길때마다 편집이 상당히 불편했다.

콘수엘로가 가지고 있는 자료의 대부분이여서인지 편지,사진,발췌글등이 상당히 많은 부분을 차지해서 글을 읽어나갈때 문장의 끊김을 파고들며 그런 자료들이 실려 있었기 때문이다.

자료들의 풍부한 공개는 좋았으나 그런 편집에 대해서는 조금 못마땅했다. 그런대다 어린왕자라는 거대한 작품의 작가로만 알고 잇던 생텍쥐페리의 내면을 조금씩 알아갈때마다 한 인간으로써의 생텍쥐페리를 만나긴 했으나 환상속에 존재하던 환상이 깨어감이 당황스러웠다.

끊임없이 방황하고 콘수엘로를 사랑한다면서 대놓고 외도를 하고 그러면서도 채워지지 않는 무엇으로 인해 괴로워하는 생텍쥐페리가 낯설었다.

그 사실을 알면서 생텍쥐페리의 곁을 떠나지 않는 콘수엘로는 생텍쥐페리에게 온 마음을 다했음에도 무언가 벽이 가로 막고 있었다.

그녀를 온전히 동정할 수 없고 이해할 수 없는 무엇.

그야말로 부부의 삶은 '무엇' 투성이였다.

떨어져 있을 때는 그리워 하며 애틋하지만 곁에 있으면 견디지 못하는 그들을 보고 있자니 참으로 다양한 사랑의 양상이구나 그런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보통 사람들과 크게 다르지 않는 사랑.

그러나 범접할 수 없는 그들 사이의 연결됨은 제 3자로써 유추만 할 수 있을 뿐 온전히 받아들일 수는 없었다.

책을 읽으면서도 그들의 삶이 편집되고 있다는 느낌과 하나가 되지 못하는 나뉨은 늘 나를 따라다녔다.

이런 사랑이 과연 전설적인가 하고.

새로운 자료와 사랑이라는 매개체로 어린왕자의 덕을 보려함이 아닌가 하는 얄팍한 생각까지 들었다.

그만큼 그들은 분열되고 있었고 쉽게 끊어질 수 없는 질긴 사랑도 동시에 존재하고 있었다.

 

불꽃같은 사랑을 했기에.

그리고 생텍쥐페리가 너무나도 유명 했기에 라는 전제하에도 나의 눈에는 아름다워 보이지 않았다.

그들의 사랑이 너무 솔직했을까? 아님 내가 너무 메말라 버린 것인가!

다행이 그런 의문을 잠식시켜 주었던건 그들의 편지였다.

끊임없이 서로를 갈구하는 모습. 그리고 시적인 표현들로 그득한 언어.

생텍쥐페리가 실종되고 사망으로 공식화된 후에도 계속 써내려간 콘수엘로의 편지는 비틀어진 나의 마음을 안정시켜 주었다.  사랑하는 남편을 잃고 끊임없는 세상의 비판속에서 한 남자만을 사랑하고 그리워한 콘수엘로를 보고 있자니 그녀의 아픔이 전해져왔다.

예술적 감각과 아름다움 그리고 충분한 매력을 지니고 있음에도 온전히 생텍쥐페리만 사랑하며 살아가는 콘수엘로의 모습은 사랑의 위대함을 생각해 보게 되었다.

세상의 시선과 비난이 괴로웠지만 자기 자신의 사랑을 지켜나가고 그녀의 마음의 소리에 늘 귀기울이는 콘수엘로는 그래서 전설이 되지 않았나 싶다.

생텍쥐페리는 그가 갈망하는 삶과 문학속의 어린 왕자처럼 전설이 되었고 콘수엘로는 그러한 남자를 바라보며 전설이 되었다.

 

생텍쥐페리와 콘수엘로의 사랑이야말로 사랑의 다양함을 보여주는 불꽃같은 삶이라 하겠다.

그들은 알았다.

늘 무언가를 채우지 못해 무언가를 갈망하지만 그 무언가는 서로라는 것을.

그 길이 쉽지 않아 기나긴 방황을 했지만 이제는 온전히 서로에게 정착해 평안함을 느끼고 있을 거라 믿고 싶다.

세상 사람들에게겐 전설을 남겨둔채.

그렇게 생텍쥐페리와 콘수엘로를 기억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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빈센트 반 고흐 - 춤추는 별을 그린 화가 내 손안의 미술관 5
토마스 다비트 지음, 노성두 옮김 / 랜덤하우스코리아 / 2006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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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흐의 책이라면 무조건 갖고 싶고 무조건 읽고 싶다.

미술에 문외한인 내게 시야를 틔워주고 관심을 갖게 해주었던 고흐의 그림들은 그래서 무척 소중하다.

그의 수많은 그림들을 홈페이지에 올리면서 그를 다시 보게 되었고 그의 내면의 소리에 귀를 기울이게 되었다.

그래서 내가 단정하고 있던 고흐에서 업그레이드 된 고흐 그리고 이제는 나의 삶의 일부가 되어 버린 듯한 고흐로 바뀌어 버렸다.

고흐의 그림들과 그런 고흐를 이야기하고 있는 책을 통해서였다.

그러나 이 책은 뭔가가 다르다. 기존의 고흐를 알리고자 하는 책들과 느낌이 확연히 다르다.

그러나 그 다른 느낌은 썩 좋은 느낌만은 아니다. 무언가 고흐를 오해하고 있는 듯한 느낌, 그리고 고흐를 깍아 내리고 있는 듯한 느낌을 지울수가 없다.

내가 오히려 고흐를 오해하고 있었던 것일까?

 

저자는 이 책을 쓰기 위해 나보다 고흐 그림을 많이 보았을 것이고 많은 삶으 흔적을 좇았을 것이다. 고흐를 좋아하긴 하나 고흐의 모 든것을 알수 없듯이(당연한 말이다) 저자도 그런 고흐를 다 알아서 이 책을 썼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이 책을 읽으면서 가장 확연하게 드는 느낌은 시선이였다.

많은 사람들이 고흐의 그림과 테오 그리고 그가 그림을 그리게 되면서 들여놓은 화가의 삶에 중점을 맞추어 고흐를 알려 왔다면 이 책의 저자는 그런 고흐의 바깥 부분을 중점으로 쓴 것 같은 느낌이 든다. 모두의 시선이 쏠려 있는 곳에서 홀로 떨어져 다른 각도에서 그 모든걸 지켜본 듯한 느낌.

이 책의 고흐는 그래서 낯설었다.

 

어쩜 너무나 솔직해서 내가 안착시킨 내 안의 고흐를 인정하기 싫어서인지도 몰라 이런 생각을 품는다 할수도 있겠지만 최소한 이 책에서의 고흐는 그림에 대한 열정이 묻어나는 화가로 그려지지 않는다.

그의 삶에서 그림 그리는 것을 뺀다면 별볼일 없는 평범함이 잔뜩 묻어나지만 그는 그림 그리는 일에 빠졌기에 별볼일 없는 삶을 이끌어 갔는지도 모를 일이다.

그의 마음을 그의 행위와 테오와의 편지로 추측할 순 있어도 속속들이 알 수 없듯이 그의 그림을 보며 그를 상상하고 그의 세계를 꿈꾸는게 전부일 수 밖에 없다.

저자도 나름대로 고흐의 삶과 고흐의 그림들을 꿈꾸며 정리했다.

그러나 그러한 정리가 팩션이라는 느낌이 들 정도다.

그 시대의 고흐의 뒤를 좇는 듯한 느낌, 하지만 고흐는 잠시 밀쳐둔채 주변의 풍광과 분위기에 너무 쏠려 고흐가 오히려 허구가 되어 버린 듯한 느낌이였다.

 

이 책의 시리즈격인 '렘브란트'에서도 밝혔듯이 온전히 렘브란트에 조명을 맞춘 것이 아닌 그 시대의 배경등 두루 두루 살핀 것 같다는 느낌을 밝힌 바 있다.

이 책에서의 고흐는 좀더 많이 벗어난 것 같다.

외톨이가 되어 버린 것 같은 느낌. 방황하는(실제로도 그러했지만..) 고흐로 밖에 보이지 않았다.

 

왜 나는 이렇게 비약이 심한 것일까.

왜 고흐를 옹호하려고만 하는 것일까.

안타까움 때문이다.

고흐에 대해서 많이 알지 못하지만 나름대로 구축한 고흐는 이런 소소함이 아니다. 주변의 풍광에 동화되어 가는 자연스러움도 아니지만 적어도 이렇게 소극적은 아니다.

고흐에 빠진 네가 어떻게 그렇게 단정지을 수 있냐고 반문할지도 모르지만 나의 시선은 고흐를 다 감싸안을 수 있는 고흐에 환장한 사람이라고 객관성이 부족하다고 할 수 있겠으나 그림에 환장한 고흐를 알리지 못해 그 사실이 더 안타깝다.

 

그림에 환장한 고흐를 알아가다 보면 그의 광기, 열정, 상처, 죽음까지도 만날 수 있는데 그의 주변만 돌고 있는 것 같아 너무나 속상하다. 내가 알지 못하던 고흐를 만났다는 생소한 호기심이 아닌 씁쓸한 마음이 올라오는건 무엇일까.

어쩜 내 안의 고흐를 깨트리지 못함이라는 고정관념과 편견일 수 있다. 어정쩡한 앎에서 오는 오만일 수 있다.

그러나 가장 기본적인 애정이 결여된 것 같은 느낌을 지울수가 없다.

한발자국 더 다가가서 고흐를 지켜봐 주었으면.

그를 이해하려함이 아닌 있는 그대로의 고흐를 바라봐 주었으면.

아쉬움이 많이 남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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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든
헨리 데이빗 소로우 지음, 강승영 옮김 / 이레 / 2004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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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판절판


이 책을 알게 된건 폴 오스터의 '뉴욕 3부작'에서 였다.

자신이 감시 하는 사람이 늘 이 책을 읽었기에 주인공은 이 책을 사서 본다. 그러나 이내 재미 없고 따분한 이런 책을 왜 읽는지 모르겠다는 푸념이 나온다.

구미가 당겼다. 책 속의 책. 그리고 지루하고 재미없다는 책.

이상하게 재미가 없다는대도 관심이 쏠렸다.

그래서 월든을 사려고 검색하자 여러 출판사의 책이 떴다.

양장본도 제쳐둔채 이 책을 고른 이유는 개정판이라는 문구 때문이였다. 번역에 민감한 터라 개정판 하나만 믿고 구입했었는데 두툼한 책을 보고 있자니 약간의 두려움도 생겼다.

시작하면 언젠가는 끝내겠지 하는 마음에 책을 읽기 시작했지만 뉴욕 3부작의 그 처럼 진도가 잘 나가지 않았다.

괜한 호기심을 품은걸까 하는 마음이 들어 한참을을 덮어 놓은 책이였다. 아무리 낑낑대도 집중이 안되는 책.

그래서 올 추석 큰 맘을 먹었다. 이 책을 끝내기로.

욕심만 잔뜩 머금은채 긴 연휴만 믿고 읽을 책을 다섯권정도 가져갔다. 월든이 잘 읽히지 않을 경우를 대비한 셈인데 오히려 그 반대였다. 이유를 생각해 보니 현장 독서의 힘이 있었다.

월든의 소로우 처럼 인적이 드문곳은 아니였지만 내가 자란 시골은 두메산골이여서 어느 정도의 분위기는 형성하고 있는 셈이였다.

도심 속에서 읽으려고 애쓰고 낑낑대던 월든이 시골집에서는 술술 잘 읽혔다. 고요했고 온갖 벌레들의 침략(?)과 자연의 소리가 가까웠기에 여기가 월든 숲은 아닐까 하는 착각이 들때도 있었다.

비록 호수나 저수지 같은 웅덩이는 없고 작은 개울이 있었지만 어려서부터 시골에서 자라 소로우의 표현이 아니더라도 월든 숲의 분위기를 파악할 수 있었다.

그러나 분위기는 파악했을지라도 나와 소로우에게선 큰 차이점이 있었다. 내 자의로 두메산골에서 자란게 아닌 반면 문명의 해택을 받고 대학 공부까지 한 소로우는 스스로 월든 호수로 들어온 것이다. 2년여후 소로우는 월든을 떠나지만 내가 학교때문에 직장 때문에 도시로 나간 것과 소로우의 떠남은 확연히 달랐다.

 

나는 환경에 의한 어쩔 수 없음이라고 해도 소로우는 월든에서의 생활에 이젠 미련이 없다고 봐도 된다. 근원적인 차이에서 오는 도시속의 흡수는 그래서 다른 것이다.

문명 사회를 따라 가고자 하는 이들과 그러한 문명에서 잠시 떨어져 새로운 통찰을 하고 단순한 따라감을 하지 않겠다는 소로우의 의지는 신선한 것이다.

경험하지 않고 깨달을 수 있다면 그것 보다 더 큰 결과는 없을 것이나 소로우를 보자면 경험에 의한 것 또한 특별하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러한 경험을 월든에 옮겨 놓았기에 소로우의 생각들은 우리에게 더 와 닿는다.

손수 농사를 지으며 기본적인 욕구부터 인간의 가장 꼭대기층에 있다고 말할 수 있는 이상 실현을 위한 가능성까지 월든 호수에서 모든 것을 짚어낸다.

가장 원초적이고 이상적이 되어 버린 자연속의 삶에서 말이다.

 

단순히 자연예찬만을 하는 것이 아닌 숲 속의 경제, 숲을 통한 의식 속의 통찰 등 욕망은 잠시 제쳐둔채 돌아봄으로써 나아갈 방향을 제시하고 있었다.

깊이 뿌리 박혀 있던 관념의 변화를 유도하면서 이제는 이렇게 변해보는 것도 좋지 않겠느냐는 깨달음이 있었다.

현세에 절고 절어 버린 우리를 과연 어떻게 변화시켜 갈 것인가. 우리 모두가 숲으로 들어가 그러한 성찰을 하기 바라는 것은 아닐터이나 그러한 유혹 또한 없는 것도 아니였다.

그러나 소로우의 2년여의 생활을 돌아 보자면 모든 것을 제쳐둔채 숲으로 들어 갔다고는 하나 우리가 단순히 판단할 수 있는 무념, 무상의 삶은 아니였다.

오히려 숲으로 들어간 소로우를 의아하게 생각하며 귀찮게 하는 사람도 있었고 비웃는 사람도 있었다.

손수 집을 짓고 농사를 지었다고는 하나 다른 사람들과 문명 세계가 없었다면 스스로 할 수 없었을 것이다. 단순한 숲에서의 생활이 아닌 지리적인 문명과의 떨어짐이였을뿐 숲은 나름대로의 또 다른 세계였다. 그랬기에 현장 독서의 절묘한 짜릿함 속에서 온전히 즐길수만은 없었다.

 

소소한 월든의 이야기를 들려주는 소로우의 세계 속으로의 여행은 이래서 다양했다.

때론 나를 돌아보게 하고 때론 욕망이 없게 만들었다가 평안함을 던져주며 몽상가가 되기도 하고 사색적이 되게도 하면서 이 삶은 한번쯤은 살아볼만한 가치가 있다라는 희망을 갖게 해주었다.

아름다운 월든 호수와 숲 가운데에서만이 아니라 현재 내가 살아가고 있는 도시에서도 충분히 그러한 가능성을 끌어안고 살아가도록 이끌어 주었다.

그랬기에 시골집에서 탐독했던 월든과의 시간은 무척 소중하다.

한바탕 꿈을 꾼 것인냥 그런 잊혀짐이 아닌 오래도록 그 시간이 남아있길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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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람이 바람을 불러 바람 불게 하고 문학과지성 시인선 15
최석하 지음 / 문학과지성사 / 1981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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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시집을 사게 된건 순전히 호기심에서였다.

마음이 황량한 날에 잔잔히 불어 주는 바람을 좋아한터라 제목이 무척 마음에 들었다. 그리고 이 책의 발행일이 나의 주민등록상의 생일과 똑같았다. 1981.9.25(이 책은 초판 6쇄본이지만)

25년전의 시는 과연 어떠할까.

오래된 책은(왜 내용도 케케하다 생각하는 것일까) 좋아하진 않지만 그러한 이유로 마주하게 된 시집은 세월을 담고 있었다.

타자기 글씨체인듯한 시는 그 자체만으로도 세월이 느껴졌다.

제일 처음엔 그 사실이 별로 달갑지 않았지만 읽으면 읽을수록 그 글씨가 정겨워졌다.

 

그 시대를 담고 있는 것이 시이고 그 시대의 흐름을 느낄 수 있는 것이 시라면 25년전의 시대는 내게 까마득하기에 시원스레 읽어나갈 수는 없었다. 특히 경상도 사투리가 많이 들어가 있어 해독불가의  어휘를 마주할때마다 그러한 경계심은 더해갔다.

거기다가 심심찮게 나오는 한자들까지.

겨우 이행의 시 '바다'를 읽고 감탄할 정도였다.

 

<검고 긴 머릿단 푸는 바다 / 검고 긴 머릿단 빗는 바람>

 

이 시를 읽고 캬아~ 하며 맞다! 맞다! 며 소리칠 뿐이였다.

 

시 쓰는 것을 어렵게 생각하는 가운데 예전에 한 선생님이 그런 말씀을 하셨다. 시의 소재는 일상속에 널리고 널렸다고.

그 일상 가운데 시의 소재로 생각하고 편하게 써보라고.

최석하님의 시에는 그런 일상의 소재들이 그득하다.

이런게 시가 될 수 있을까 하고 생각할 정도로 일상을 기록한 시들이 있었다. 시인의 눈에는 모든게 시의 소재로 보여야 함이 당연하기에 이해한다 치더라도 25년전의 일상이 진하게 배어 나오는 시는 내가 완전히 이해하기에는 무리지 않나 싶다.

 

편안하게 읽었지만 그 편안함이 그래서 민안할 정도였다.

시는 문학의 기초라 했으나 시집을 읽을때마다 드는 '나는 기초가 없구나' 이런 생각을 언제 물리칠 수 있을까.

우선은 시를 많이 읽어보는 수밖에 없는 것 같다.

시를 읽는 이유가 문학의 기초 성립이 되겠냐만은 시인들의 언어, 일상을 뒤집어 놓는 그들의 시각, 평범하면서도 특별함이 묻어나는 그들의 세계를 조금은 가까이하고 싶은 이유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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