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늘의 제자도 - 내 안에 충만하신 그리스도를 드러내는 삶
마이클 웰즈 지음, 정성묵 옮김 / 두란노 / 2018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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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타깝게도 우리는 모든 것을 달라고 아우성치면서, 정작 꼭 필요하면서도 이미 거저 받은 것은 보지 못한다. 그것은 바로 우리가 지금 누리는 하나님과의 깨지지 않는 관계다. 65쪽


오늘도 나의 마음은 몇 번씩 들쭉날쭉 했고, 슬그머니 잘못을 타인의 탓으로 돌리려 했다. 또한 나보다 더 가진 자들을 잠시 질투했고, 나의 현재를 한탄했다. 그것이 편하고 익숙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내게 허용된 소중한 시간과 내가 누릴 수 있는 감사함을 잊을 뻔 할 때 이 말씀을 만났다. 그리고 정신이 바짝 들었다. 내가 왜 이렇고 있는 걸까, 복음을 제대로 받아들였다고 믿으면서, 율법에서 자유로워졌다 여기면서 왜 그 마음을 유지하지 못하고 육신의 끌림대로만 살아가려는 것일까? 깨닫는 순간은 하나님을 바라보며 살겠다 다짐했으면서도 ‘우리 인생의 진정한 초점은 우리 자신과 안위가 아니라 십자가 위의 인자시다.(310쪽)’란 말을 잊었기 때문일 것이다.

끊임없이 나를 생각한다. 그리고 거기서 조금 벗어나면 우리 가정, 가족, 가까운 지인들까지 뻗어나가지만 매일매일 이렇게 나 아닌 타인의 평안과 안위를 위해 기도하지는 않는다. 내 자신이 부족한 것 투성이라 내 안의 선하지 않는 것들이 드러나지 않게 애쓰느라 여력이 다한 탓도 있다. 그리고 이 책에서 내가 어떤 부류의 신자였는지 낱낱이 보고 말았다. 인정하기는 싫었지만 나와 너무 닮은 유형의 신자들의 모습을 보면서 “파괴와 변명을 멈추고 자신의 진정한 상태를 인정해야 한다. 그러면 ‘그 배에서 생수의 강이 흘러나오리라’(요 7:38)라는 진리를 경험할 것이(288쪽)”라고 했다. 나의 연약함을 인정하고 변명 하지 않길 원하지만 ‘변명하지 않고 있는 모습 그대로 가감 없이 하나님 앞에 서’게 해달라고 기도했다. 내게 필요한 문구를 만날 때마다 아멘으로 화답했고 필요할 때는 짤막하게 기도했다. 그것이 내가 가장 먼저 할 수 있는 실천이라 여겼다.

그분을 떠나서는 아무것도 할 수 없고, 그분에게 적용되는 것이 우리에게도 적용되며, 옛 사람, 옛 본성, 옛 삶은 이제 십자가에 못 박혔다는 사실을 먼저 깨달아야 한다. 277쪽

분명 나도 이 사실을 알고 있다. 그리고 이 사실을 명확하게 알았을 때 내 안에 찾아왔던 자유도 기억하고 있다. 하지만 삶의 이런저런 일들에 부딪히다 보면 희미해지고, 옅어지며, 어쩔 때는 의심하기도 한다. 저자는 사역의 현장에서 만난 사람들의 모습을 풍부하게 들려준다. 그리고 그 사례들이 낯설지 않음을 느낀다. 내가 거쳐 온 과정도 있었고, 내 고민거리와 일치하고, 저런 과정은 겪고 싶지 않다거나 혹은 저런 믿음을 가졌으면 좋겠다고 여기는 일들도 있었다. 좀 더 생생하게 들렸던 이유는 현재 이 사회에 만연한 문제(마약, 술, 섹스, 외도, 이혼 등)를 안고 있는 사람들의 이야기가 더 많아서 그랬는지도 모르겠다. 어쩌면 이런 이야기들이 반복되어 거북할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거북하다고 이 문제들을 외면할 수 있는지를 생각해 보면, 우리가 정작 거북해야 할 대상은 자꾸 죄의 구렁텅이로 끌어들이는 악의 유혹임을 잊지 말아야 한다.

그리스도 안에서 새로 태어나기 전까지 자신의 노력으로 하늘의 삶을 살 수 없었건만, 왜 우리는 그리스도 안에서 새로 태어난 뒤에도 자신의 노력으로 그 삶을 이를 수 있다고 생각하는가? 251쪽

끊임없이 하나님께 구해야 한다. 개인적인 바람보다 하나님 안에서 살아갈 수 있도록, 이 땅에서 편히 사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자녀, 하늘의 제자로 살아갈 수 있도록 기도하고 모든 것을 주님께 맡겨야 한다. 저자는 복음을 받아들이고, 하나님을 제대로 안다면 그리스도인의 삶이 굉장히 단순하다고 말하고 있다. 믿지 않는 자들이 의심할 정도로 단순하지만 단, 장기전이라고 경고한다. 장기전을 견디지 못해 쓰러지기도 하고, 원망하기도 하고, 하나님을 떠나기도 하지만 우리는 그분 없이는 아무것도 할 수 없음을, 아무런 존재도 아님을, 보혈을 흘려 기꺼이 생명을 불어넣어 주신 분임을 잊지 말아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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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랫집 윗집 사이에 고래뱃속 창작그림책
최명숙 글.그림 / 고래뱃속 / 2014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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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관문을 열어놓으면 제법 선선한 바람이 들어오는 요즘인데 우리 집은 현관문을 열 수가 없다. 마음대로 되지 않으면 소리를 질러대는 둘째 때문에 온 방문은 물론 때론 베란다 문을 닫고 있을 때도 있다. 그리고 정말 안 되겠다 싶을 때는 안방에 들어가 아이와 한바탕 한다. 아이는 울고, 나는 울지 말라고 소리 지르고, 그것도 안 되면 아이의 발바닥을 때린다. 이내 곧 후회를 하지만 정말 소리를 질러대는 아이를 어찌해야 할지 난감할 때가 너무 많다. 분명 내가 이렇게 한바탕 아이와 싸우면 아랫집에 들리지 않을 리가 없다. 방음이 잘 되지 않는 아파트라 우리 집에서도 윗집의 소리가 다 들리는데 아랫집은 오죽할까 싶었다. 그럼에도 아랫집에서 한 번도 항의한 적이 없다. 그래서 어느 순간부터 의심하기 시작했다. 아랫집에 사람이 살지 않거나 천사가 살 거라고 말이다.


 

이 책은 글이 없다. 그럼에도 충분히 흐름을 알 수 있고 어떤 상황인지를 알며 의미하는 바가 무엇인지까지 유추할 수 있다. 우리 집과는 달리 책에서는 아이들이 떠들면 아랫집 할아버지는 부리나케 올라와서 고함을 친다. 한 번은 생일파티 때 할아버지가 올라와 분위기를 망친 적이 있다. 분명 공동주택이니 주의해야 하지만 조금만 소음이 나면 올라오는 할아버지 때문에 윗집은 항상 가시방석이다. 항상 조심한다고 하지만 엄마가 외출하고 아이들만 둘이 남겨졌을 때 역시나 시끄럽게 떠들었고 이내 할아버지가 쫓아올 거라 생각하고 잔뜩 겁을 먹고 있었다. 하지만 당연히 올라와야 할 할아버지는 올라오지 않았고 심지어 잠잠했다. 아이들은 엄마에게 사실을 알렸고, 아래층에 내려가 보니 할아버지는 쓰러져 있었다. 다행히 구급차에 실려 할아버지는 병원에 이송되었고 얼마 뒤에 아이는 공을 갖고 놓다 엘리베이터에서 할아버지를 만난다. 아이는 또 할아버지에게 혼이 날까 잔뜩 겁을 먹고 있지만 할아버지는 다정하게 공을 주워준다.

예민했던 할아버지는 사건이 있은 후 달라졌다. 아이들 덕분에 고비를 넘겼고, 그런 아이들이 다르게 보였음은 당연하다. 아이들도 그런 할아버지에게 서서히 마음을 열게 될 거라 기대하게 되었다. 그러던 중 윗집에 새로운 이웃이 놀러오고 음식을 들고 인사갔던 엄마는 그 집에도 아이들이 있음을 알고 친하게 지낸다. 그리고 집이 아닌 밖으로 나가 공동주택에서 지켜야 할 예의와 배려를 자연스레 알려준다. 함께 잘 사는 게 분명 어렵지만 어쩌면 그렇게 어렵지 않을 수 있음을 이 책을 보면서 느낀다. 조금만 배려하고, 그럴 수도 있지 하고 이해해주면 얼굴을 붉힐 일이 그렇게 많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다 나와 같은 마음의 사람들이 있는 것도 아니고, 생각과 삶의 방식이 다르기 때문에 고집을 부릴 수도 없다. 그럼에도 다툼과 이견 차이가 발생하겠지만 함께 살아가기 위해서는 지켜야 할 건 지켜야 한다. 나 역시 아이를 키우면서 그게 쉽지 않음을 느끼지만 그렇기에 늘 조심하고 미안한 마음을 가지며 언제든 반대의 입장이 될 수 있다고 여기고 있다.

얼마 전 서재방에서 창문을 열어놓고 책을 읽고 있는데 싸우는 소리가 들렸다. 시간은 새벽 2시. 싸우는 소리가 너무 크게 나서 복도 창문으로 살펴보니 6층에서 싸우고 있었다. 무슨 큰 일이 나지 않을까 염려될 정도로 심한 드잡이가 오가더니 결국 경찰이 와서 아줌마 두 명을 데려갔다. 모든 상황을 지켜보고 있었음에도 싸움의 원인은 알 수 없었지만 저렇게 앞 뒤 가리지 않을 정도로 큰 싸움을 벌일 일이 뭐가 있었을까 싶었다. 오죽하면 그랬을까 싶다가도, 새벽 2시라는 의아함과 함께 이내 곧 잊어버렸지만 때론 내 감정을 쉽게 드러내지 못한 공동주택이 답답하게 느껴지는 경험이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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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터 래빗 전집
베아트릭스 포터 지음, 황소연 옮김 / 민음사 / 2018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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뒤늦게 <피터 래빗>에 입문했다. 책을 소장해서 읽고 싶었을 때는 단행본 뿐이어서 얇은 책을 일일이 구입해 읽고 리뷰를 남겼다. 그렇게 <피터 래빗>을 잊고 있었는데 전집 출간 소식에 망설임 없이 구입했다. 그리고 전집을 사길 잘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분명 처음에 <피터 래빗> 시리즈를 읽었을 땐 좀 어색한 부분들이 있었다. 개연성을 따지며 이상하다 여겼고 종종 잔인한 표현에 어리둥절하며 진지하게 들어가지 못했다. 그러다 <베아트릭스 포터의 집>을 읽고 저자를 좀 더 알게 되었다. 어릴 때부터 동물을 사랑하는 문학소녀였고, 가정교사의 어린 아들이 아프다는 말을 듣고 위로하기 위해 지은 동화가 <피터 래빗 이야기>라는 사실을 말이다.

<피터 래빗> 전집을 읽으면서 깨달았다. 시리즈를 읽을 때와는 달리 정말 이런 동물들의 세계가 있을 것 같고 너무 아기자기해서 읽는 순간이 행복해 졌다고 말이다. 100년도 전에 쓰인 이야기가 여전히 사랑 받는 이유가 아닌가 싶었다. 동물을 잘 관찰하고 애정 어린 시선이 아니라면 절대 나올 수 없는 그림들도 좋았고, 의젓하게 옷을 차려 입고 티타임을 갖거나 예의바르게 초대를 응하며 당시의 문화가 동물세계에 스며든 것도 흥미로웠다. 이름을 갖고 있고, 자신만의 생활 터전이 있으며, 동물들끼리 어울리기도 하지만 때론 다른 동물들에게 혹은 인간에게 위협을 당하고 골탕을 먹이며 살아가는 모습에서 유년시절이 많이 떠올랐다. 시골에서 자란 나는 놀 거리가 없어 온 동네를 쏘다니고 말썽을 부리다 혼나는 경우도 많았다. 책 속 만큼 다양한 동물은 없었지만 때론 동물을 괴롭히기도 하고, 집에서 기르던 개를 아직도 기억하기도 하고 잊혔던 추억들이 이 책을 읽는 동안 우수수 떨어졌다.

저자가 아픈 가정교사 아들을 위해서 쓴 책이지만 내가 어렸을 때 이 책을 읽었더라도 특별하게 다가왔을 것 같다. 종류는 좀 다르지만 시골이라 동물을 흔히 만날 수 있었고 거부감도 없었다. 그런 동물들이 책 속에서 꼬물거리고 이야기를 만들어 간다면 분명 내가 마주하고 있는 현실이 다르게 보였을 거다. 학교가 파하면 가방을 던져놓기 무섭게 놀러 다니느라 바빴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남아도는 시간을 어찌 할 줄 몰라 학급도서를 모두 읽었다. 하지만 기억나는 책은 ‘충효사상대전집’ 외에는 없다. 그때 이런 책을 만났다면 어땠을까? 동물들의 세계가 촘촘하고 섬세하게 묘사되는 이 책을 읽고 있으면 잃어버렸던 어린 시절을 되찾은 기분이 든다. 이렇게 구구절절하게 옛 기억을 떠올릴 정도로 말이다.

글이 더 많은 이야기도 있지만 따뜻한 느낌의 그림을 보고 있으면 활자중독자임을 자처하는 나도 그림에 마음을 뺏기게 된다. 계속 이 세계에 파묻혀 있고 싶어 책을 덮고 싶지 않은 마음. 따뜻한 이불 속에 몸을 파묻고 이야기에 빠져 있던 순간들이 정말 행복했다. 이 책을 떠올릴 때면 이 기억이 가장 먼저 떠오를 것 같다. 지금도 이불 속으로 들어가 재미난 책을 읽으며 간식을 먹고 싶은 마음이 간절할 정도로 기분 좋은 추억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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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디세이아 생각하는 힘 : 진형준 교수의 세계문학컬렉션 2
호메로스 지음, 진형준 옮김 / 살림 / 2017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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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마 전에 벼르고 벼르던 <일리아스> <오뒷세이아> 원전번역 세트 도서를 구입했다. 정말 읽고 싶고 소장하고 싶었지만 번번이 기회가 닿지 않았다. 하지만 막상 구입해놓고 보니 이 책을 언제 읽을지 장담할 수 없었다. 그러다 우연한 기회에 청소년이 읽을 수 있게 축약본으로 나온 <오디세이아>를 먼저 읽고 생각보다 너무 재미있어서 원전번역 <오뒷세이아>를 읽어볼 마음이 생겼다. 구입할 당시만 해도 언제 읽을지 장담할 수 없었기에 이렇게 마음이 생겼을 때 읽어보자 싶었다. 그리고 부끄럽게도 <율리시스>가 오디세이아의 영어 이름이라는 사실을 알고는 소름이 돋았다.


한 때 독자들 사이에 퍼졌던 <율리시스>에 관한 우스갯소리가 있었다. 이 책을 소장하고 있는 사람은 많지만 읽은 사람을 주변에서 찾기 힘들다는 말이었다. 이 책을 소장하고 있는 사람들이 갖는 나름대로의 완독 불가능 이유를 들었는데, 하룻밤 이야기라면서 1,324쪽은 너무 하지 않냐는 말을 듣고 나 역시 격하게 공감했다. 11년 전에 구입해 놓았음에도 여전히 책장에 장식처럼 꽂혀 있고, 여전히 읽을 계획이 없어 그 핑계를 착실하게(?) 실천하고 있는 중이다. 하지만 이렇게 구입해 놓은 책들이 연결된다는 사실이 놀라웠다. 그리고는 오랫동안 묵혔으니 이제 읽을 때가 되었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조만간 <오뒷세이아>든 <율리시스>든 읽어보자고 다짐했다. 이렇게 계기가 될 때, 동기부여가 될 때 읽는 독서가 즐겁다는 사실을 알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폭풍이 휘몰아치듯 이 책을 읽어버리고 원전 번역까지 읽을 생각을 하게 된 이유는 뭘까? 우선은 익히 알고 있는 트로이 전쟁에서 승리한 뒤 그리스 군들은 모두 무사히 돌아왔지만 오디세우스와 그의 일행만이 돌아오지 않고 있는 이유가 궁금했다. 고향 이타카로 돌아오고 싶지만 포세이돈의 방해로 돌아오지 못하고 있었고, 이타카 궁에서는 100명도 넘는 청혼자들이 오디세우스의 아내 페넬로페에게 한 명을 골라 결혼하라고 협박하고 있는 상황이었다. 20년 째 집에 돌아오지 않는 아버지를 찾기 위해 텔레마코스는 결단하고 아버지를 찾으러 간다. 우여곡절 끝에 아버지를 만나고 이타카 궁을 되찾기 위해 잠입하고 청혼자들을 처단하는 장면은 내 손에 땀이 날 정도로 긴장되었다.

10년은 전쟁을 하고, 10년은 바다를 헤매다 돌아오지 못한 아버지를 찾아나서는 일. 쉽지 않겠지만 오디세우스가 그간 경험한 이야기와 텔레마코스가 재회하고 다시 이타카 궁을 탈환할 거란 이야기만 유추해 봐도 이 책의 원전은 왜 두꺼운지 짐작할 수 있었다. 게다가 바다를 떠돌 수밖에 없었던 가장 큰 원인을 제공한 키클롭스들의 이야기가 흥미로우면서 긴장이 되었고, 도무지 예측할 수 없는 복잡한 성격을 가진(이건 우리도 마찬가지겠지만) 오디세우스를 보면서 경솔한 모습에 답답해하면서도 동질감을 느꼈는지도 모르겠다. 그도안 이 이야기는 나에게 이렇게 재밌는 줄 모른 채, 여전히 나에겐 읽어야 할 짐으로 느껴졌었다. 그래서 오디세우스가 괜한 호기심과 욱 하는 성격 때문에 집으로 돌아오지 못하고 복수에 복수를 당하면서 온갖 모험하는 이야기를 또 다시, 하지만 이번엔 제대로 느껴보고 싶어졌다.

또한 삶이 어디로 흘러갈지 알 수 없는 상황을 매일 마주하며 살아가는 현대인들에게 오디세우스는 분명 메시지를 던져준다. 물론 오디세우스는 신들의 미움을 받기도 하지만 보호를받고 있다. 그래서 그렇게 무모하게 사고(?)를 치는지도 모르겠지만 우리가 일상에서 마주하는 다양한 문제들을 만났을 때 오디세우스를 보며 나름대로의 비판적 사고를 가동해 도움을 받는 부분이 분명 있었다. 거기에 흥미로운 사건들과 인물들이 끊임없이 등장해 다른 생각 할 틈을 주지 않으니 재미있을 수밖에 없다. 오디세우스를 제대로 비판(?)하고, 동조하고, 짜릿함을 느끼면서도 어이없어 하려면 빠른 시일 다짐을 실천할 수 있길 바래본다. 그리고 이제라도 내게 다가와준 이 이야기가 그저 고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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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무는 참 좋다! 춤추는 카멜레온 115
바바라 레이드 글.그림, 서소영 옮김 / 키즈엠 / 2013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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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용한 아이들에게는 정다운 친구가 되어요.’ 라면서 나무에 앉아 있는 아이를 보자 어릴 적 나름대로의 피난처였던 소나무가 생각났다. 내가 살던 시골 마을의 당산나무 근처에 꽤 두툼한 소나무가 한 그루 있었는데 그 중 가지 하나가 좀 낮았다. 어린 내가 나무 기둥을 타고 올라가 앉을 수 있을 정도로 특이한 나무였는데, 높이가 적당해서 그곳에 앉아 있으면 마음이 편했다. 속상한 일이 있거나, 심심하거나, 그냥 생각할 일이 있으면 그 소나무에 자주 올라갔다. 그때부터 나는 조용한 아이었는지 모르겠지만 이미 나무가 주는 편안함을 오래전부터 알고 있던 셈이었다.


얼마 전, 집 앞 사거리 횡단보도 앞 가로수 한그루가 뽑혀 나가는 걸 보았다. 신호대기 할 때 나무 아래 있으면 햇빛도 피할 수 있어서 유용했는데 왜 뽑아내는지 이해할 수 없었다. 미리 알았더라면 항의라도 해봤을까? 그러진 않았을 것 같지만 최근에야 나무를 뽑아낸 이유를 알 수 있었다. 나무를 뽑아내고 횡단보도와 경사면을 만든 후 그곳은 자전거 전용 보도라고 떡 하니 새겨 놓았다. 동네사람이 아니라면 그곳에 나무가 있었는지 모를 수 있지만 오랫동안 그 나무의 존재를 알게 된 나는 그저 씁쓸하기만 했다. 자전거와 사람을 구분하자고 오래된 나무를 뽑아내는 일. 안전을 위해서는 당연하지만 과연 그게 최선의 방법이었는지는 잘 모르겠다. 이제 여름이 되면 그 횡단보도에서 신호를 기다리는 게 고역이 될 것임이 빤히 보였기 때문이다.

나무가 뽑혀나간 고통까지는 아니더라도 햇빛을 가려줄 수 없다는 이유로 나도 어쩌면 나무를 그저 편의로만 보고 있는지도 몰랐다. 이 책에서는 ‘나무는 요술쟁이’라면서 하늘로 뻗어나가는 나뭇가지, 나무와 사람과 묘하게 닮아 있는 모습, 터널도 되고 바다가 되는 나무숲을 보여준다. 물론 동물과 사람이 함께 어우러지는 모습도 볼 수 있다. 내가 나이를 먹어가는 것처럼 나무도 나이를 먹어가고 무엇보다 계절을 가장 빨리 알 수 있게 해주는 것도 나무라고 말이다. 책 속의 나무를 보며 인간과 나름대로 함께 어우러지는 모습을 볼 수 있어서 좋았는데, 순식간에 뽑혀나간 횡단보도 앞의 나무를 생각하니 좀 우울해졌다. 몇 년 전에 시골집 뒷마당을 정비한다고 큰 오빠가 그곳에 있는 나무를 모두 뽑았을 때는 무척 허무했다. 내 어릴 적 추억이 고스란히 담긴(유독 홍시가 맛있는 감나무가 있었고, 단감이 맛있는 나무도 있었다. 그리고 키우던 고양이가 죽자 그 나무 아래 묻고, 벌들이 떼죽음을 당하자 순수했던 나는 벌들을 모아 묻어줬던 기억도 있다.) 공간이 사라져버렸다고 여겨졌기 때문이다.

아이를 등원시키면서 보았던 벚꽃나무, 가을이면 우수수 떨어지는 낙엽, 겨울이면 앙상해지는 가지로 충분한 이야깃거리를 만들 수도 있었다. 하지만 ‘나는 나무가 참 좋아요!’ 라고 말하는 아이 앞에서 마냥 행복한 웃음을 지을 수 없는 이유가 추억이 담긴 나무가 영원할 수 없다는 사실을 알게 되어버렸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가끔 몇 백 년 씩 나이를 먹은 나무를 볼 때마다 그 아래 머물렀던 사람들의 모습이 영상처럼 스쳐지나가는 느낌이 들 때가 있다. 그곳에 있는 나무는 얼마나 많은 일들을 보고, 많은 일을 겪었을까 싶다가도 외롭진 않았는지, 좀 사색이 깊어질 때가 있다. 그 정도까지는 아니더라도, 추억이 담긴 나무와 함께 커간다는 것. 그 소중함을 지켜주고 싶은 마음에 쓰잘머리 없는 이야기만 길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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