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님을 하나님 되게 - '골라 믿던 신앙'을 떠나 '진짜 하나님'께 다가서기
J. D. 그리어 지음, 정성묵 옮김 / 두란노 / 2018년 6월
평점 :
절판


우리가 죄로 고통이나 굴욕을 당하는 것이 하나님의 진노처럼 ‘느껴질’ 수 있지만 사실 그것은 연민의 표현이다. 하나님은 죄가 원치 않는 결과를 낳는다는 걸 똑똑히 보여 줌으로써 우리를 깨우신다. 내 지인의 표현을 빌리자면, “하나님은 되갚아 주려는 것이 아니라 되돌리시려는 것이다.” 190쪽


최근 나에게 큰 변화가 예견되는 일들이 생겼다. 그런데 이상하게 두렵지 않았다. 분명 다른 때의 나였다면 화를 내고, 짜증을 내고, 왜 나에게만 이런 변화가 일어나는지 불평을 터트렸을 것이다. 하지만 갈수록 마음이 차분해졌고, 하나님 안에서 해석하려고 애썼다. 그리고 이 책을 읽으면서 깨달았다. 하나님께서 되갚아 주려는 것이 아니라 되돌리시는 것이라는 사실을 말이다. 내가 더 나락으로 떨어지기 전에 건져주시려는 사실을 겨우 깨달았다. 이 책에서는 내 멋대로, 내 편할 대로 하나님을 끌어다 꿰어 맞추지 하지 말라고 했지만, 나의 깨달음이 부디 그런 게 아니길 간절히 바랐다.

저자는 하나님을 섬기는 목회자지만 평신도라면 누구나 느끼고 고민했을 문제부터 접근해 이 책의 제목처럼 ‘하나님을 하나님 되게’ 믿어야 하는지 인도한다. 왜 나는 다른 사람들처럼 ‘예수님을 향한 뜨거운 사랑에 불타지 못했’는지, ‘희생은 짐처럼, 예배는 의무처럼’ 느껴지고 ‘그냥 믿는 것조차 그토록 벅찼’는지를 말이다. 목회자라면 고백하기 쉽지 않을 수 있는 문제부터 접근해 하나님을 진짜로 만났는지의 과정이 성령이 임하듯 당연하면서도 자연스럽게 들어온다.

나 역시 하나님을 늘 곁다리에 두고 편할 대로 믿으며, 여전히 내가 중심이고, 내가 좋아하는 것들을 우선순위로 두며 가지치기를 했다는 사실을 인정했다. 그렇기 때문에 예배를 열정적으로 드리지 못했고, 믿음이 넘쳐 자연스레 전도를 하지 못했다는 사실도 말이다. 모든 것이 의지로 되는 것이 아님에도 나는 여전히 내 의지대로 행하면서 내 맘대로 되지 않으면 그때마다 화를 내고 짜증을 냈다는 사실도 말이다.

내 문제를 하나님께 ‘말하는’ 게 아니라 그것을 하나님께 ‘믿고 맡기는’ 것이 기도의 핵심임을 늘 기억하려고 노력한다. 342쪽

나도 저자의 고백처럼 말을 많이 해야만, 내 모든 것을 다 털어놓아야만 기도가 응답이 되는 것처럼 굴 때가 있었다. 그리고 달라는 기도만 했던 순간들이 많았음을, ‘골라 믿던’ 선택적 신앙이 팽배했음을 말이다. 그 사실을 인정하고 변화를 해야겠다고 마음먹은 순간부터 이미 내 마음에 은혜가 들어와 있었다. 그리고 어느새 내가 낮아지고 하나님의 높아짐을, 평소에 하던 자잘한 걱정과 근심들이 작아지는 것을 느꼈다. 나의 존재가 작아졌는데도, 내가 내세울 것이 하나도 없고 연약한 죄인이 되었음에도 하나님 앞에서는 모든 게 상관없었다. 나에게 어떤 시련이 오던지, 내가 어떤 모습이던지 ‘예수님은 보장된다.’는 사실만 기억하면 되었다.

그렇다고 내 변화에 충만해, 내적인 평안에 취해 이 은혜를 만족하는 것에 그치지 말라고 말한다. ‘복음을 알고도 잃어버린 세상에 그것을 전하기 위해 아무것도 하지 않는 우리가 과연 정말로 구원을 받은 것일까?’ 라는 질문은 우리가 받은 은혜와 믿음을 한 단계 더 성장시키길 인도한다는 사실도 말이다. 내가 처음 하나님을 영접했을 때가 그러했듯, 누군가가 나로 인해 하나님 앞에 나올 수 있다면 이 땅에서 그것보다 더 큰 사명은 없을 듯하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5)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부시맨과 레비스트로스 - 문명과 야만의 진정한 의미 찾기, 최협 교수의 인류학 산책 비행청소년 5
최협 지음 / 풀빛 / 2014년 12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인류학을 공부한다는 것은 태초에서 현재에 이르기까지 모든 민족이나 종족에 대한 긴 안목을 배운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러한 견해를 배운다는 것은 인간의 행동과 관습의 다양성을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될 뿐만 아니라 오랜 진화와 변화, 그리고 발전 과정의 결과로서 자신을 인식하도록 해 준다. 21~22쪽

인류학의 설명을 들으면서부터 우리가 살아가는 것 자체가 학문이 될 수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그만큼 인류학에 대해 무지했지만 책을 읽는 동안 이미 알고 있는 사실들이 인류학의 일환이었다는 것도 말이다. 인류학을 살펴 볼 수 있는 수많은 사례와 연구들이 나오지만 이 책에서는 크게 문화의 속성 중에서 학습성, 공유성, 변동성, 총체성에 대해 살펴보고 있다. 그러면서 자연스레 문화를 이해하게 되고 다른 문화를 존중하고 함께 살아가는 방법을 알게 된다. 인간이 어떻게 살아가는 가를 알게 되면서 함께 살아가는 방법을 배우는 학문이 인류학이라고 생각하니 접근과 과정은 차치하고라도 중요한 학문이라 여겨졌다.

하지만 인류학의 최종 목적에 이르기까지는 갈 길이 멀다. 그동안 인류사에 행해져 왔던 문화적 제국주의의 극단성이 얼마나 많은 사람들을 고통스럽게 했는지 사례들을 보면서 마음이 무거워지기도 했다. 과거뿐만 아니라 현재에는 복잡하고 다양해진 사회와 문화에 따라 서로 존중하지 못하는 일들이 얼마나 많은가! 이렇게 혼란스런 사회에서 인류학을 조금 더 이해한다면 충분히 존중하며 살아갈 수 있을 것 같은데 그야말로 이상적인 바람일지도 모른다.

결과적으로 레비스트로스는 인류학의 목표란 인류 문화와 사회현상의 표면을 뚫고 그 이면에 숨어 있는 근본 구조를 찾아내는 것이라고 보았다. 241쪽

레비스트로스의 구조주의는 오늘날 문화 해석에 있어 가장 영향력이 있음과 동시에 비판을 많이 받고 있다고 한다. 즉 문화란 것은 인간의 심층 심리에 깔려 있는 구조가 겉으로 나타나는 것으로서, 심층까지 파고 들어가면서 그러한 문화 현상을 결정짓는 인간의 의식 구조를 발견할 수 있다고 주장하기 때문이란다. ‘결국 레비스트로스는 역사의 발전이 인간 사회를 더 좋은 상태로 인도할 것이라는 환상을 거부함과 동시에, 실존주의자들이 가정하는 인간의 자율성을 과대평가하지 않는다.’고 볼 수 있다. 구조주의와 실존주의가 부딪히는 부분을 이해하면서도 서로 절충하고 포용되고 섞일 때 이상적인 문화를 구현할 수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물론 많은 노력과 과정이 필요하다는 사실에 피부에 와 닿기까지 시간이 필요하겠지만 말이다.

앞으로는 현재보다 더 밀접한 세계화가 될 거라 생각된다. 다양한 문화를 가진 수많은 사람들이 함께 살아가려면 앞서 말했듯이 문화에 대한 기본적인 이해가 필요하다. 저자 또한 ‘역사적 경험이 보여 주는 교훈은 매우 단순하고도 분명하다. 즉 진정한 사회 문화적 발전은 문화적 다양성, 관용과 포용, 그리고 나눔이 그 중심에 자리하고 있다’고 말했다. 그럴 때에 다양한 문화가 더 생겨나고 그 안에서 공존하며 살아갈 수 있을 것이다. 부디 이러한 사실들이 먼 얘기가 아니길 바래본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5)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쿠루네코 1 - 고양이패밀리 좌충우돌 일상 다이어리
쿠루네코 야마토 지음 / 미우(대원씨아이) / 2018년 6월
평점 :
품절


고양이에 관한 책을 많이 읽은 건 아니지만 이 만화를 보는 동안 정말 고양이를 아끼고 사랑하는 마음이 고스란히 느껴져서 좋았다. 저자가 블로그를 시작한 것도 길 잃은 고양이들을 자꾸 주워오는 바람에 새로운 주인을 찾아주기 위해서였다고 한다. 아무리 고양이를 좋아하고 관심을 기울인다고 해도 이렇게까지 길냥이들을 만날 수 있을 것 같지 않은데 저자는 좀 특별했다. 동물 사랑이 가족 내력인지 각자 주인을 잃은 동물들을 주워왔다. 그래서 고양이를 아무렇지 않게 본가에 데려다 주기도 하고, 곤란한 고양이를 맡기도 하며, 좋은 주인을 찾아주기 위해 노력하는 모습이 일상처럼 자연스러웠다.

저자가 직장을 다니다가 젊은 청년들과 상대하기가 체력적으로도 힘들고 고양이들이 자꾸 눈에 밟히기도 해서 프리랜서로 전향했다는 사실 앞에서는 더 할 말이 없어졌다. 정말 고양이를 사랑하고, 함께 살아가는 것에 행복을 느낀다는 게 그대로 전해졌다. 만화에는 글도 많지만 고양이들의 행동이 세세하게 그려진 그림이 더 많다. 같은 공간에서 살아가지 않는다면, 사랑하는 마음으로 관찰하지 않는다면 나오지 않을 그림이라는 걸 단박에 알 수 있었다. 오랫동안 함께 사는 고양이도 있고, 눈도 뜨지 못하는 고양이들을 주워다 금이야 옥이야 키워서 분양을 보낸 고양이도 있었다. 그냥 보기만 해도 애틋하고 사랑스러운데 어떻게 분양을 보낼 수 있었을까 하는 마음도 있었다. 하지만 각자의 주인을 찾아주고 난 뒤, 고양이의 소식들이 들려오는 것을 지켜보며 그제야 감당이 안 되거나, 나만의 욕심이었다고 판단될 때면 더 사랑 받을 수 있게 새 식구를 찾아주는 게 현명하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고양이와 함께 한 시간들을 섬세하게 그려낸 이 책을 읽다 다양한 웃음을 드러내곤 했다. 고양이들이 완전한 식구가 되어 저자의 몸에 엉키거나 예상치 못한 애교를 부릴 때면 엄마 미소가 나왔다. 번개가 친다고 놀래 저자에게 꽉 안기거나, 예쁘게 장식한 전등을 완전히 부셔 놓을 때는 현실 웃음이 나왔다. 높은 천장에 매달았으니 고양이들이 건들지 못할 거라고 안심했는데, 마치 그런 마음을 비웃듯 바로 전등을 망가트리는 것을 보며 어이가 없어서 웃었다. 한 공간에 살아간다는 것이 많은 것을 감당해야 함에도 기꺼이 고양이들을 위해 이사도 하고, 서슴없이 안락한 공간을 내어주는 것. 보통의 사랑과 마음이 아니고서는 힘들 것이다.

저자가 키우고 있거나 손을 거쳐 간 고양이들의 이야기는 정말 아이를 키우는 것처럼 느껴졌다. 나 또한 아이를 키우는 입장에서 정말 매일 매일 힘이 들다가도 예상하지 못한 애교나 점점 커가고 있음을 느낄 때 모든 시름을 잊어버린다. 그리고 아이가 존재한다는 것만으로도 의지가 될 때가 있다. ‘너희들이 없었으면 무슨 재미로 살고 있었을까?’ 하는 혼잣말을 할 정도로 아이들이 커가는 것을 지켜보는 것은 소중하다. 그런 마음이 이 만화를 읽는 내내 느껴졌다. 오히려 내가 아이들을 관찰하는 것보다 더 깊고 섬세하게 고양이들을 살피고 표현해 내는 것을 보며 사랑은 이렇게 같은 방향을 바라보는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기도 했다.

고양이에 관한 책을 만날 때마다 어렸을 때 친구에게 얻어와 애지중지 키웠던 고양이가 늘 생각난다. 매일 고양이 응가를 치우는 것도 좋을 만큼 이불 속에서 함께 잠들었던 고양이. 어느 정도 크자 집을 나가 돌아오지 않았지만 그 뒤로 이불 속에서 함께 잠들 만큼의 애완 동물을 키운 적이 없었다. 그럼에도 종종 청소는 제쳐두더라도 고양이를 길러 보고 싶다는 소망이 들기도 한다. 아마 용기가 없어서 실현될 가능성은 없지만 아이들이 모두 커서 출가한 뒤라면 가능성이 있을 지도 모르겠다. 이 책을 통해 귀여운 고양이를 잔뜩 만나 이런 마음이 드는지도 모르겠다. 저자는 오랫동안 관찰하고 그린 만화겠지만 마치 내 옆에 생생히 살아 있는 듯한 착각이 일 정도로 생생했다. 그래서 너무 빠르게 읽어버린 감도 없지 않지만 그만큼 고양이들을 만난 시간 동안은 모든 시름을 잊고 푹 빠져들 수 있어서 좋았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5)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게토의 색 산하세계문학 7
아리네 삭스 지음, 카릴 스첼레츠키 그림, 배블링북스 옮김 / 산하 / 2014년 12월
평점 :
절판


“파시즘은 죽은 것이 아니다. 단지 가면을 쓰고 모습을 숨기고 있었을 뿐이다. 파시즘은 새 옷을 입고 다시 나타나기 위해 변신을 꾀하고 있다.” 그의 비판은 참혹한 피해자의 입장에서 어느새 가해자가 된 이스라엘이나, 과거를 부정하며 재군사화를 서두르고 있는 일본 등 모든 국가에 해당된다. 171쪽

유대인이라는 이유로 모든 걸 잃은 채 개인은 철저히 무시된 채 차별과 집단이 되어야 했던 사람들의 이야기는 언제나 숙연하게 만든다. 어른의 시선이 아닌 어린 아이인 미샤의 시선으로 그려지는 이 책은 그래서 더 비참하고 인간이란 과연 무엇인지를 끊임없이 생각하게 만든다. 독일군에게 바르샤바를 점령당한 뒤 게토 안에서만 거주하게 된 유대인들의 삶은 비참했다. 그들에게 인권은 없었으며, 부족한 식량으로 인해 굶어 죽기 시작했다. 미샤의 아버지는 의사여서 그동안 진료비로 음식을 받을 수 있었지만 그마저도 끊겨서 먹을 게 부족해졌다. 미샤의 어머니는 ‘손가락 사이로 빠져나가는 모래알처럼 무너져’ 내리고 있었고 어린 동생 야니나를 위해서라도 음식을 구해야 했다.


미샤는 하수구를 통해 게토 밖으로 나갔고 닥치는 대로 음식을 훔쳐왔다. 한동안은 그 음식들로 인해 가족이 생명을 유지할 수 있었지만 병사들이 그렇게 몰래 밖을 오가는 사람들을 잡아들이기 시작했고 미샤는 위험을 느낀다. 그러다 어떤 남녀가 맨홀로 들어간 뒤 독일군들이 구멍 속에 불길을 집어넣는 것을 보고 미샤는 더 이상 밖으로 나가지 못한다. 유대인들이 겪었던 폭력과 인권유린은 그것으로 그치지 않았다. 어린 아이를 벽에 던지고 엄마를 총살하는가 하면, 미샤 대신 음식을 구하러 갔던 야니나도 돌아오지 못했다. 이런 상황에서도 살아내야 했던 사람들의 처절함이 가늠되지 않아 처참한 기분이었다. 왜 인간이 이렇게 인간을 이렇게 학살하는 것인지 회의감이 들었다.

그럼에도 미샤는 살아있기에 먹을 것을 구해야 했다. 그러다 우연히 모르드카이라는 청년을 만나게 된다. 그에게 독일군에 맞서 싸우고 있는 비밀 조직의 이야기를 듣게 되고 가만히 앉아 죽기를 거부하고 그를 따라간다. 그곳에서 군사 훈련을 받는 등 미샤도 죽음만 기다리던 아이가 아닌 독일군을 맞서 저항하는 힘을 조금씩 기르게 된다. 그러다 히틀러의 생일을 맞아 게토를 쓸어버린다는 계획이 들려온다. 조직 대원들은 독일군을 상대로 이긴다는 것이 어려운 만큼 명예로운 죽음을 택한다. 그렇게 독일군에 맞서 치열하게 싸웠지만 대부분 죽고 은신처까지 뺏기게 된다. 미샤는 모든 걸 포기한다. 희망이 없다 여겨 강제 수용소에 끌려가거나 총에 맞아 죽어도 상관없다고 말이다.

그렇게 절망하게 있을 때 다른 조직원인 프롬카가 게토 밖으로 나가서 동지들이 용감하게 싸우다 죽었다는 사실을 알려야 한다고 말한다. 미샤는 절망하고 잠시 망설이지만 그들의 죽음을 헛되이 하지 않기 위해 프롬카와 함께 게토 밖으로 나가는 것으로 소설은 끝이 난다. 끔찍한 역사의 소용돌이에서 살아 있는 것조차 버거운 상황에서 끝까지 포기하지 않고 용기를 잃지 않는 사람들을 보며 마음이 뭉클해졌다. 용감하게 나라를 지켜주는 사람들이 있었기에 현재 우리가 이렇게 살아가고 있다는 사실도 말이다. 정의를 위해, 자유를 위해, 나라를 위해 목숨을 바친 이름 모를 이들에 대한 감사함에 마음이 먹먹해진다. 뻔한 감정이라고 여겨왔던 이런 고백이 이 책을 읽으면서 진심으로 우러나고 있었다. 그들에게 어떻게 감사함을 전해야 할까? 그들을 위해 잠시 묵념을 해본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곧, 주말
시바사키 토모카 지음, 김미형 옮김 / 엘리 / 2018년 5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세상에는 읽고 싶은 책도, 읽어야 할 책도 너무 많아서 그 안에서 헤매다 보면 종종 새로운 작가와 작품을 놓칠 때가 있다. 한 권의 책을 읽는 것도 운명이라 여기는 나에게는 그렇게 새롭게 다가오는 책들이 소중하게 느껴진다. 하지만 내가 알고 있는 저자와 작품에 익숙하다 보면 새로움을 놓칠 때가 많다. 그래서 단순하게 표지가 마음에 든다거나, 제목이 끌렸다거나 하는 이유로 정보가 전혀 없는 책들을 종종 마주하곤 한다. 이 책도 역시나 그랬다. 그래서 단편집인 줄도 몰랐고, 젊은이들이 등장하는 소설의 내용이 비슷비슷하면서도 나 또한 여전히 헤매고 있는 삶의 회한들을 만날 때마다 마음이 쿵, 하고 떨어질 때도 있었다.

다만 지금은 내가, 거기가 아니라 여기 있을 뿐. 여기 있고 거기 없을 뿐. 그야 나는, 여기와 거기에 동시에 존재할 수 없고, 또 어디에도 존재하지 않을 수는 없으니까. 62쪽

하루하루 일하며 살아가며 하는 생각들이 그래도 건강하다 여기며 안심했다. 우리의 소소한 일상이 그렇듯 특별한 일이 없어 특별할 것 같지 않게 생각했던 순간들이 얼마나 많았던가! 시간이 흐른 뒤 그렇게 아무 일 없이 평범하게 살아간다는 것에 감사하게 되었지만, 한참 예민하던 시기에는 이렇게 세상에 묻혀 버리는 건 아닌지 조바심을 낼 때도 있었다. 그래서 무슨 일들이 벌어질 것 같다 갑자기 뚝 끊겨버리는 소설에 ‘이게 뭐야!’ 하는 당황함이 터져 나오지 않았다. 뭐랄까, 지극히 현실적이라고나 할까? 소설 깊숙이 들어 있는 문화와 정서의 공감은 모두 얻어내지 못하더라도 이렇게 끝나버리는 게 우리의 일상과 삶과 닮아 있어서 더 그랬는지도 몰랐다.

모른다는 것 자체를 모르니까 괜찮아. 217쪽

타인을 배려하지 않고, 자신을 무마시키려는 게 아닌 순수하게 모르는 것에 대해 인정하는 것은 얼마나 마음 편한지! 이런 문장을 만날 때마다 눈에 띄는 사건이 없고, 특별한 인물도 없지만 상황을 세밀하게 녹여낸 묘사와 어우러지는 분위기가 좋았다. 나와 비슷한 연령대의 누군가가 이렇게 툭, 하고 던져준다면. 그것이 무시와 비하하는 것이 아닌 있는 그대로의 인정이라면 마음 한 켠이 안심이 될 것 같았다. 자꾸 삐뚤어진 시선으로 보지 않길 바라는 마음에 핑계 거리가 많아지는데, 그럼에도 삶을 좀 더 심플하게 바라볼 필요가 있음을 느꼈다.

언제나, 나는. 아무것도 변하지 않는다. 변하려고 하지 않는다. 25쪽

이런 문장 앞에서는 찔리고, 좌절하고, 현재의 내 모습을 말하고 있는 것 같아 부끄러워지기도 한다. 하지만 이렇게 스스로에게 말할 수 있는 건 스스로를 잘 관찰하고 있다고 본다. 자신을 관찰도 하지 않은 채 외면한다면 이런 내면의 소리가 나올 여지가 없을 때도 있다. 이와 비슷한 감정에 휩쓸려 오랜 시간을 좌절과 절망에 빠져 있던 시기가 있어 젊은 시절로 돌아가고 싶진 않다. 하지만 주말을 배경으로 한 8편의 단편을 보면서 나름 열심히 생각하고 살아가고 있음을 느껴 더 현실적으로 받아들였는지도 모르겠다. 최근의 나의 주말은 피곤의 연속인데, 오히려 이 소설을 통해 다양한 주말을 경험하고 쉼을 느꼈던 것 같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6)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