게토의 색 산하세계문학 7
아리네 삭스 지음, 카릴 스첼레츠키 그림, 배블링북스 옮김 / 산하 / 2014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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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파시즘은 죽은 것이 아니다. 단지 가면을 쓰고 모습을 숨기고 있었을 뿐이다. 파시즘은 새 옷을 입고 다시 나타나기 위해 변신을 꾀하고 있다.” 그의 비판은 참혹한 피해자의 입장에서 어느새 가해자가 된 이스라엘이나, 과거를 부정하며 재군사화를 서두르고 있는 일본 등 모든 국가에 해당된다. 171쪽

유대인이라는 이유로 모든 걸 잃은 채 개인은 철저히 무시된 채 차별과 집단이 되어야 했던 사람들의 이야기는 언제나 숙연하게 만든다. 어른의 시선이 아닌 어린 아이인 미샤의 시선으로 그려지는 이 책은 그래서 더 비참하고 인간이란 과연 무엇인지를 끊임없이 생각하게 만든다. 독일군에게 바르샤바를 점령당한 뒤 게토 안에서만 거주하게 된 유대인들의 삶은 비참했다. 그들에게 인권은 없었으며, 부족한 식량으로 인해 굶어 죽기 시작했다. 미샤의 아버지는 의사여서 그동안 진료비로 음식을 받을 수 있었지만 그마저도 끊겨서 먹을 게 부족해졌다. 미샤의 어머니는 ‘손가락 사이로 빠져나가는 모래알처럼 무너져’ 내리고 있었고 어린 동생 야니나를 위해서라도 음식을 구해야 했다.


미샤는 하수구를 통해 게토 밖으로 나갔고 닥치는 대로 음식을 훔쳐왔다. 한동안은 그 음식들로 인해 가족이 생명을 유지할 수 있었지만 병사들이 그렇게 몰래 밖을 오가는 사람들을 잡아들이기 시작했고 미샤는 위험을 느낀다. 그러다 어떤 남녀가 맨홀로 들어간 뒤 독일군들이 구멍 속에 불길을 집어넣는 것을 보고 미샤는 더 이상 밖으로 나가지 못한다. 유대인들이 겪었던 폭력과 인권유린은 그것으로 그치지 않았다. 어린 아이를 벽에 던지고 엄마를 총살하는가 하면, 미샤 대신 음식을 구하러 갔던 야니나도 돌아오지 못했다. 이런 상황에서도 살아내야 했던 사람들의 처절함이 가늠되지 않아 처참한 기분이었다. 왜 인간이 이렇게 인간을 이렇게 학살하는 것인지 회의감이 들었다.

그럼에도 미샤는 살아있기에 먹을 것을 구해야 했다. 그러다 우연히 모르드카이라는 청년을 만나게 된다. 그에게 독일군에 맞서 싸우고 있는 비밀 조직의 이야기를 듣게 되고 가만히 앉아 죽기를 거부하고 그를 따라간다. 그곳에서 군사 훈련을 받는 등 미샤도 죽음만 기다리던 아이가 아닌 독일군을 맞서 저항하는 힘을 조금씩 기르게 된다. 그러다 히틀러의 생일을 맞아 게토를 쓸어버린다는 계획이 들려온다. 조직 대원들은 독일군을 상대로 이긴다는 것이 어려운 만큼 명예로운 죽음을 택한다. 그렇게 독일군에 맞서 치열하게 싸웠지만 대부분 죽고 은신처까지 뺏기게 된다. 미샤는 모든 걸 포기한다. 희망이 없다 여겨 강제 수용소에 끌려가거나 총에 맞아 죽어도 상관없다고 말이다.

그렇게 절망하게 있을 때 다른 조직원인 프롬카가 게토 밖으로 나가서 동지들이 용감하게 싸우다 죽었다는 사실을 알려야 한다고 말한다. 미샤는 절망하고 잠시 망설이지만 그들의 죽음을 헛되이 하지 않기 위해 프롬카와 함께 게토 밖으로 나가는 것으로 소설은 끝이 난다. 끔찍한 역사의 소용돌이에서 살아 있는 것조차 버거운 상황에서 끝까지 포기하지 않고 용기를 잃지 않는 사람들을 보며 마음이 뭉클해졌다. 용감하게 나라를 지켜주는 사람들이 있었기에 현재 우리가 이렇게 살아가고 있다는 사실도 말이다. 정의를 위해, 자유를 위해, 나라를 위해 목숨을 바친 이름 모를 이들에 대한 감사함에 마음이 먹먹해진다. 뻔한 감정이라고 여겨왔던 이런 고백이 이 책을 읽으면서 진심으로 우러나고 있었다. 그들에게 어떻게 감사함을 전해야 할까? 그들을 위해 잠시 묵념을 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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곧, 주말
시바사키 토모카 지음, 김미형 옮김 / 엘리 / 2018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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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에는 읽고 싶은 책도, 읽어야 할 책도 너무 많아서 그 안에서 헤매다 보면 종종 새로운 작가와 작품을 놓칠 때가 있다. 한 권의 책을 읽는 것도 운명이라 여기는 나에게는 그렇게 새롭게 다가오는 책들이 소중하게 느껴진다. 하지만 내가 알고 있는 저자와 작품에 익숙하다 보면 새로움을 놓칠 때가 많다. 그래서 단순하게 표지가 마음에 든다거나, 제목이 끌렸다거나 하는 이유로 정보가 전혀 없는 책들을 종종 마주하곤 한다. 이 책도 역시나 그랬다. 그래서 단편집인 줄도 몰랐고, 젊은이들이 등장하는 소설의 내용이 비슷비슷하면서도 나 또한 여전히 헤매고 있는 삶의 회한들을 만날 때마다 마음이 쿵, 하고 떨어질 때도 있었다.

다만 지금은 내가, 거기가 아니라 여기 있을 뿐. 여기 있고 거기 없을 뿐. 그야 나는, 여기와 거기에 동시에 존재할 수 없고, 또 어디에도 존재하지 않을 수는 없으니까. 62쪽

하루하루 일하며 살아가며 하는 생각들이 그래도 건강하다 여기며 안심했다. 우리의 소소한 일상이 그렇듯 특별한 일이 없어 특별할 것 같지 않게 생각했던 순간들이 얼마나 많았던가! 시간이 흐른 뒤 그렇게 아무 일 없이 평범하게 살아간다는 것에 감사하게 되었지만, 한참 예민하던 시기에는 이렇게 세상에 묻혀 버리는 건 아닌지 조바심을 낼 때도 있었다. 그래서 무슨 일들이 벌어질 것 같다 갑자기 뚝 끊겨버리는 소설에 ‘이게 뭐야!’ 하는 당황함이 터져 나오지 않았다. 뭐랄까, 지극히 현실적이라고나 할까? 소설 깊숙이 들어 있는 문화와 정서의 공감은 모두 얻어내지 못하더라도 이렇게 끝나버리는 게 우리의 일상과 삶과 닮아 있어서 더 그랬는지도 몰랐다.

모른다는 것 자체를 모르니까 괜찮아. 217쪽

타인을 배려하지 않고, 자신을 무마시키려는 게 아닌 순수하게 모르는 것에 대해 인정하는 것은 얼마나 마음 편한지! 이런 문장을 만날 때마다 눈에 띄는 사건이 없고, 특별한 인물도 없지만 상황을 세밀하게 녹여낸 묘사와 어우러지는 분위기가 좋았다. 나와 비슷한 연령대의 누군가가 이렇게 툭, 하고 던져준다면. 그것이 무시와 비하하는 것이 아닌 있는 그대로의 인정이라면 마음 한 켠이 안심이 될 것 같았다. 자꾸 삐뚤어진 시선으로 보지 않길 바라는 마음에 핑계 거리가 많아지는데, 그럼에도 삶을 좀 더 심플하게 바라볼 필요가 있음을 느꼈다.

언제나, 나는. 아무것도 변하지 않는다. 변하려고 하지 않는다. 25쪽

이런 문장 앞에서는 찔리고, 좌절하고, 현재의 내 모습을 말하고 있는 것 같아 부끄러워지기도 한다. 하지만 이렇게 스스로에게 말할 수 있는 건 스스로를 잘 관찰하고 있다고 본다. 자신을 관찰도 하지 않은 채 외면한다면 이런 내면의 소리가 나올 여지가 없을 때도 있다. 이와 비슷한 감정에 휩쓸려 오랜 시간을 좌절과 절망에 빠져 있던 시기가 있어 젊은 시절로 돌아가고 싶진 않다. 하지만 주말을 배경으로 한 8편의 단편을 보면서 나름 열심히 생각하고 살아가고 있음을 느껴 더 현실적으로 받아들였는지도 모르겠다. 최근의 나의 주말은 피곤의 연속인데, 오히려 이 소설을 통해 다양한 주말을 경험하고 쉼을 느꼈던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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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몸은 악기 말랑말랑 호기심 3
서선연 글, 배유정 그림 / 한솔수북 / 2010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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딸 아이에게 이 책의 첫 장의 ‘튜바’라는 악기를 보여주며 뭐처럼 보이냐고 물어봤다. 단박에 음식이 꼬불꼬불 내려가서 응가로 나오는 것처럼 보인다고 했다. 한껏 목소리를 높여 어떻게 알았냐고, 엄마도 그렇게 보인다고 말하자 쑥스러운지 씨익 웃었다. 이 책의 제목처럼 우리 몸에서 나는 소리를 악기에 비유해서 알려주는데 배고플 때, 소변을 눌 때, 음식을 먹을 때, 방귀가 나올 때 등 창의적으로 표현되어 있다. 그림의 색감은 화려하지만 또렷하게 보이는 것은 아니라서 정확한 사물 인지보다는 느낌 위주로 딸 아이에게 물어보고 읽어줬다.

역시나 아이라서 그런지 방귀를 표현하는 부분을 가장 좋아했다. 방귀라고 말만 해도 웃고, 책을 읽는 도중에 실제로 딸 아이가 방귀를 뀌는 바람에 둘이서 함께 큰 소리로 웃었다. 몸에서 나는 소리를 각각 알아보면 우리 몸에서 나는 소리를 전체로 알아보는 부분이 나온다. 읽은 내용을 정리해보기도 하고 한 눈에 알아보는 부분이었는데 역시나 방귀 소리와 응가를 하는 부분을 짚어줄 때 좋아했다. 또 엄마와 아이가 심장을 맞대고 있는 그림에서는 심장 소리가 어떻게 들리는지 물어보았다. 그랬더니 딸 아이는 아기의 모습이 내 배속에 들어 있는 자신의 모습 같다고, 심장 소리가 쿵쾅쿵쾅 들리는 것 같다고 했다. 33주 만에 태어난 아이어서 그런지 태어날 때 어땠는지, 인큐베이터에서 어떻게 컸는지를 종종 얘기해 주었는데 그 영향인지 아이 모습만 보면 작았던 자신의 모습을 투영시키는 것 같다.

그렇게 힘들게 태어난 아이는 이제 6살이 되었고, 점점 아이의 기억과 내면에 추억과 이야깃거리가 쌓이는 것을 느낀다. 스키마가 다양하게 형성되는 과정이라 생각하는데, 처음에는 사물만 인지하다가 점점 그것에 관련된 이야기가 늘어나는 것을 느끼고 있다. 내가 해준 이야기 일 때도 있고, 유치원에서 경험한 것을 이야기 할 때도 있고, 만화 영화에서 본 것과 연결 지을 때도 있다. 그래서 보는 것, 듣는 것, 경험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느끼면서도 내가 힘들다는 이유로 휴일이면 집에서 텔레비전만 틀어주는 것이 갑자기 미안해졌다.

마지막으로 이 책에서 말하고 있는, 우리 몸이 무엇인지에 대해 아이에게 물었다. 우리 몸은 악기라고, 몸에서 소리가 나니까 악기 같다고 했다. 아이의 대답에 칭찬을 해주면서 이 책의 마지막 구절인 ‘우리 몸이 튼튼하게 건강하게 자라는 소리야!’ 를 덧붙여 주었다. 우리 몸을 악기에 비유해서 다양한 소리를 알아보고, 우리의 몸속이 어떤 구조로 이뤄져 있는지도 알아 볼 수 있어서 재미와 정보전달을 동시에 느꼈던 책이었다. 아이가 몸에서 나는 소리를 자연스럽게 받아들이고 또 이 책을 통해 경험과 정보가 더 쌓였길, 즐거운 독서가 되었길 바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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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진기 : 청소년이 진짜 들어야 할 기독교 - 단단한 신앙생활을 위한 청소년 필수템
곽상학 지음 / 두란노 / 2018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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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배는 우리의 인격처럼 지성의 말씀, 감정의 기도, 의지의 찬양이 온전히 연합해 주님께 나아가는 것이랍니다. 하나님의 우리의 ‘지정의’를 아시고, ‘말(말씀)-기(기도)-찬(찬양)’이라는 요소를 균형 잡아 디자인하신 것이 바로 예배인 거예요. 134쪽


청소년이 진짜 들어야 할 기독교의 줄임말인 이 책의 제목을 들었을 때부터 나에게 필요한 책이라는 느낌이 들었다. 믿음을 떠나 내가 알고 있는 기독교에 대한 지식의 부족함을 알기 때문이었다. 주변에 청소년도 있지만 내 아이들도 언젠가 자라서 청소년이 될 텐데, 과연 내가 잘 설명해 줄 수 있을지 걱정이 되었다. 이런 이유로 읽게 된 책이었는데, 정말 많은 은혜를 받았다. 분명 설교시간에 들은 것 같은데 잘 몰랐던 것들과 궁금한데 물어보지 못하고 넘어가 버린 것들을 속 시원하게 알려주었다. 4장에 나눠 성경에 대한 오해, 차마 물어볼 수 없는 궁금증과 기독교의 핵심, 내 삶의 나침반이 왜 성경인지를 낱낱이 알려주고 있다. 무엇보다 철저히 성경 안에서 이뤄지는 궁금증에 대한 답들이 그렇게 명쾌할 수가 없었다. 그러면서 내가 성경을 제대로 읽지 않았구나, 정말 제대로 모르고 있구나를 인정한 셈이었지만 부끄러움보다 안도가 되었다. 이제라도 제대로 알고 인지하며 평생 공부하자고 다짐할 수 있었다.


기도할 때 ‘나를 위한 것’을 먼저 구하지 말고 ‘하나님 나라’와 그분이 원하시는 것이 무엇인지를 고민하며 ‘하나님의 마음’을 구하는 것이에요. 148쪽

너무 많은 정보가 쏟아져서 혼란스러울 때도 있었다. 하나님의 이름 뜻부터 예배의 의미, 삼위일체 등 내가 제대로 알고 있는 게 별로 없었다. 그래서 그 모든 사실에 감사하면서도 내가 온전히 받아들일 수 있을지 고민도 되었다. 그동안 믿음을 더 중요하게 생각했으면서도 그 믿음을 온전히 키우지 못한 게 사실이다. 그럼에도 기본적인 용어의 뜻과 하나님과 연결되는 모든 의미와 계획에 대해 잘 알지 못해서 지루해하고, 습관처럼 예배와 말씀을 받아들였던 건 아닌가란 생각도 들었다. 그리고 하나하나 짚어가며 알아갈 때마다 영안이 밝아지는 기분이었다. 무지했기에 지루했다는 사실을 인정하자 알게 되면서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이 한꺼번에 몰려왔다.


누군가 내게 ‘기독교가 뭐예요?’ ‘하나님은 진짜 있어요?’ ‘십일조를 안 하면 벌 받아요?’ ‘어떻게 해야 천국가요?’ ‘기독교에서 동성애를 왜 반대해요?’ 이런 질문을 한다면 대답이 막막했던 게 사실이다. 하지만 이 책을 읽고 나서 질문에 대한 이유를 명확히 알게 되었고, 믿음과 은혜와 결부시켜 설명할 수 있을 것 같다. 그만큼 오랫동안 하나님을 믿는다고 했으면서도 모르거나 잊어먹고 중요하게 생각하지 않았던 사실들이 이 책을 통해 모조리 해갈되었다. 또한 삶을 살아가면서 찾아오는 이런 저런 두려움 앞에 ‘나는 여전히 이 땅에 두 발을 딛고 서 있지만 결국에는 하늘에 속한 사람’이라는 정체성을 가질 때 세상 것들에 연연하지 않길 바랐다.


믿음은 절대 우리에게서 먼저 나오는 것일 수 없어요. 믿음은 온전히 하나님의 선물이며, 은혜의 소산이에요. 또한 그 출처가 하나님이시기에 절대 실패할 수 없어요. 161쪽

내가 본격적으로 하나님을 알고 교회에 나간 게 20대 초반이었으니 거의 15년 정도 된 것 같다. 그런데도 스스로 느끼기에도 나의 신앙은 어린 아이 수준이거나 그보다 못하다 여겼다. 기복이 심했고, 내 안에 주님보다 내 자신과 세상의 것들이 더 들어차 있었다. 그러다 이 책을 비롯해 신앙 서적을 매달 읽게 되면서 그동안의 신앙을 뒤집는 일들을 경험하고 있다. 가장 큰 경험은 주님이 이런 나도 아무런 대가 없이 은혜로 구원하셨고, 율법을 오해하고 있었으며 율법이 구원의 수단이 아니라는 사실이었다. 기독교의 가장 큰 특징이고 기본적인 내용임에도 난 왜 이제야 깨달았을까? 이 모든 게 우연 같지만 다 하나님의 계획하심이고 때라는 걸 어렴풋이 깨닫고 있다. 그래서 나에 대한 하나님의 계획이 궁금해진다. 그리고 어떤 상황에서도 순종하기를 간절히 기도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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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음이 급해졌어, 아름다운 것을 모두 보고 싶어
마스다 미리 지음, 권남희 옮김 / 이봄 / 2018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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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아직도 미혼이었다면 하고 싶은 걸 맘껏 하면서 살고 있을까? 결혼한 뒤로 그런 상상을 정말 쉴 새 없이 해봤지만 늘 답은 똑 부러지게 나오지 않는다. 그건 어디까지나 가정 하에 할 수 있는 상상의 한계였기에 그야 말로 ‘만약에’로 끝나버린다. 여행도 좋아하지 않고, 혼자서는 멀리 가본적도 없으면서 저자가 패키지 투어로 다녀온 곳들을 보면서 놀랐다. 41살부터 48살까지 북유럽 오로라 여행(스웨덴, 노르웨이, 덴마크), 크리스마스 마켓 여행(독일), 몽생미셸 여행(프랑스), 리우 카니발 여행(브라질), 핑시 풍등제(타이완) 여행을 다녀 온 기록을 읽으면서 글로 표현되지 못한 더 아름답고 멋진 것들을 보고 왔다는 사실이 느껴졌다.


저자의 여행 동선을 따라가면서 나름대로 나만의 경로를 짜보기도 했다. 오로라 여행은 그대로 따라가고, 프랑스는 남부로, 브라질 대신 파타고니아로 가겠다며 혼자서 상상의 나래를 펼쳤다. 저자가 브라질 여행을 하면서 패키지 투어 덕에 여자 혼자서도 이렇게 다닐 수 있다며 안심하는 모습에서, 어쩌면 여행을 하기도 전에 걱정이 더 많아 시도조차 해보지 않다는 생각이 들기도 했다. 무엇이든 처음 한 번이 어렵지, 그 다음에는 좀 더 용기고 자신감이 생기지 않을까 하고 말이다. 아무리 경험해도 그렇게 되지 않은 것들이 있기 마련이지만 여행은 쌓이면 쌓일수록 더 즐겁고 느긋해질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여행을 좋아하지 않는다고 선언을 했기에(그렇다고 여행을 아예 안 가겠단 뜻은 아니지만), 저자의 기록을 읽으면서 간접체험하고 상상해보고 느껴보는 것이 좋았다. 여행지가 어디쯤인지 지도를 보고, 그곳에서 본 풍경과 맛있는 음식들, 기념품들을 꼼꼼히 보다 보면 마치 내가 과거에 그곳을 여행한 착각이 들 때도 있었다. 그러다 타이완의 지우펀 사진을 보고 낯이 익어 기억을 더듬어 보니 올 초에 타이완에서 교환학생을 마치고 온 조카가 준 엽서가 생각났다. 내가 지브리 애니메이션을 좋아한다고 사다주었는데 정작 나는 받아놓고도 잊어 먹고 있었다. 그러다 <센과 치히로의 행방불명>의 무대가 되었다고 하자 그제야 생각이 났다(지브리 스튜디오 홈페이지에는 지우펀이 무대가 되었다고 확실히 언급하지 않았다고 한다). 책장 앞에 세워져 있는 엽서와 책에 실린 사진을 나란히 비교해보니 기분이 묘해져서 웃음이 나고 말았다.

아무래도 저자가 2011년~2017년 사이에 여행한 기록이어서 그랬는지 모르겠지만 그 기간에 난 무얼 하고 있었는지를 떠올려 보니 더 그런 기분이 들었나보다. 결혼을 하고 육아만 하던 시기라 나에 대한 기억이 없는 시기에 여행한 저자의 글이라 훌쩍 떠나고 싶기도 했다. 가족과 나의 자잘한 걱정과 근심은 덜어놓고 훌쩍 다녀올 수 있는 여행. 상상만 해도 마음이 편하지 않아서 출발도 못할 것 같지만 만약 미혼이었다면 한번쯤 미친 척 하고 실행했을 수도 있을 것 같다. 패키지 투어라는 안전하고 편리한 장치가 있으니 혼자라는 두려움을 떨치고 말이다. 저자 또한 혼자 여행하면서 전혀 주눅 들지 않고 ‘나는 나의 한 번뿐인 인생에서 아름다운 것을 만나러 온 것이다.(85쪽)’라고 했으니 못할 것도 없다 싶었다.

세계 곳곳의 아름다운 것을 보고 맛있는 것을 먹을 수 있는 것. 많은 사람들이 이상적으로 생각하는 소망이기도하고 나 역시 그런 바람이 마음 한 구석에 자리 잡고 있다. 하지만 당장 그럴 수 없기에 그런 소망은 더 소중하고, 타인의 여행을 질투로 바라보지 않고 언젠가 떠날 나의 여행으로 대입해보는 것. 그것이 여행을 행복하게 기다리는 방법이 아닐까? 거기다 내 주변의 아름다움을 발견하는 시야를 가진다면 더할 나위 없는 일상의 여행이 될 것이다. 오래전부터 나는 그렇게 믿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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