버려진 자들의 영웅 - 차별에 맞선 위대한 혁명가 빔 암베드카르 다른만화 시리즈 6
스리비드야 나타라잔, S. 아난드 지음, 정성원 옮김, 두르가바이 브얌, 수바시 브얌 그림 / 다른 / 2012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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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들은 우물에서 시원한 물을 마셔요. 짐승들도 여물통에 담긴 물을 배가 터질 때까지 마실 수 있죠. 하지만 내가 목을 좀 축이려고 하면 사방이 모두 사막으로 변해 버려요. 25쪽


인도의 사회운동가이자 혁명가인 암베드카르는 어릴 적 학교에서 물을 마실 수 없었다. 불가촉천민이라는 이유로 접촉하는 것을 꺼려하는 사람들 때문이었다. 불가촉천민에게 물을 주느니 쏟아붓겠다고 말한다. 그것뿐만이 아니다. ‘사람들은 물소 털을 빗질하고 염소 털을 깎아 줍니다. 하지만 불가촉천민 머리카락은 깎아 주질 않아요. 차라리 목을 잘라버리는 게 더 낫다고 생각’한다고 말한다. 읽는 내내 짜증과 분노 때문에 너무 답답했다. 당장 책을 덮어버리고 싶었지만 그런다고 불가촉천민들이 구제를 받는 것도 아니고, 같은 인간임에도 신분으로 차별하는 그들의 의식이 바뀔 리도 없다는 걸 알기에 왜 이러는지 이유라도 알고 싶었다.


1923년 봄베이 정부가 수돗물, 우물, 학교 등 공공 기금 등을 이용할 수 있게 발표하자 힌드교도들은 자신들의 특권을 유지하기 위해 반대하기 시작했다. 암베드카르는 불가촉천민 3천 명과 함께 4년 간 평화 시위를 한다. 그리고 지지자들과 함께 힌두교의 상징적인 마누 법전을 불태운다. 마누 법전은 카스트 제도를 옹호 하고 차별을 정당화하고 있기 때문이다. 종교의 법전에서 이렇게 차별을 대놓고 인정하고 있으니 신분이 다르다는 이유로 사람이 사람을 짐승만도 못하게 여기는 게 당연했는지도 모른다.

그들의 종교와 우리 종교가 같다면, 당연히 그들의 권리와 우리 권리도 같아야 합니다. 하지만 실제로 그런가요? 그렇지 않다면 그들은 도대체 무슨 근거로 우리가 힌두 사람으로 남아 있어야 한다고 주장하는 걸까요? 날마다 걷어 차이고 퇴자를 맞는데 말입니다. 53쪽

암베드카르는 세상을 떠나기 직전 불교로 개종한다. 불가촉천민으로 차별 받아온 그는 카스트 제도를 정당화하는 힌두교를 거부하기 위한 대안으로 불교를 택한다. 힌두교에서 벗어나야만 진정한 민주주의와 평등이 있다고 생각한 것이다. 그가 불교로 개종하자 50만 명이 함께 개종했다고 한다. 그와 같은 처지의 사람들이 얼마나 그를 따르고 존경해하는지 단적으로 알려주는 일이었다. 이런 암베드카르를 네루 수상은 초대 법무부 장관으로 임명했다. 헌법안의 첫 조항에는 ‘어떤 시민도 차별할 수 없다’라고 되어 있다. 거기다 여성들이 좀 더 공평하게 살 수 있도록 바랐다고 한다.

미국과 영국에서 교육을 받고 돌아왔지만 인도에서 그는 여전히 불가촉천민이었고 차별을 받았다. 그는 자신이 받은 교육으로 신분의 차별이 있지만 좀 더 편하게 살 수 있었음에도 약자의 편에 서서 사회운동을 한다. 그가 평화적으로 시위를 했음에도 불가촉천민들이 저수지를 이용했다는 이유로 돌아온 것은 폭력과 오물로 뒤덮인 저수지였다. 그럼에도 그는 끝까지 인간이 인간답게 사는 것을 바라며 행동했다.

저는 우리의 정의가 지는 걸 본 적이 없습니다. (중략) 여기엔 물질적이거나 사회적인 것은 개입하지 않습니다. 우리는 부나 권력을 쟁취하기 위해 싸우는 게 아닙니다. 우리는 자유를 위해 싸우는 것입니다. 우리의 싸움은 인간 존엄성 회복을 위한 싸움입니다. 91쪽

이 책을 읽기 전까지 암베드카르에 대해 전혀 모르고 있었다는 사실이 부끄럽기까지 했다. 어려운 상황에서도 희망을 잃지 않고 인간이 인간에게 행하는 차별을 위해 노력했다는 사실이 숙연하게 만들었다. 또한 이 책의 그림과 글은 무척 독특하다. 인도 곤드족의 예술로 표현되었다고 하는데, 글의 경계가 없어 읽기에 조금 불편하기도 했지만 그만큼 이 책에서만큼은 차별받고 나뉘질 않길 바랐다. 그림들이 신비하다 못해 낯설기까지 한데, 인도의 카스트제도가 우리에게 와 닿는 것은 이것 이상으로 낯설었다.


과연 이러한 차별이 인도에서만 벌어지고 있을까? 우리는 지역, 출신, 경제적 능력 등 보이는 것들로 차별하지 않으며 살고 있을까? 사람과 사람이 함께 더불어 가는 것이 무엇인가에 대해 진지하게 생각해 보는 계기가 되었다. 하지만 지금도 18분마다 불가촉천민들은 범죄에 희생되고 있다고 한다. 암베드카르가 활동했던 시대와 별반 다를 게 없어 보이지만 인도에서도 조금씩 인식의 변화가 일어나고 있다고 하니 나아지리라 기대해 보는 수밖에 없다. 암베드카르의 노력이 현재까지 이어지고 있다고 믿고 있다. 그리고 그 노력이 헛되지 않음을 보여줬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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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 필립 로스가 별세했다. 내게는 <에브리맨>으로 단번에 기억됐던 작가였다. 아무런 정보 없이 읽은 <에브리맨>은 필립 로스의 팬이 되겠다고 다짐하게 되는 소설이었다. 이후 그의 소설을 조금씩 모으며 다 읽어가겠다고 다짐했는데, 내가 소장하고 있는 그의 책을 다 읽기도 전에 별세 소식이 들려왔다.


내가 나이를 먹어간다는 증거일까? 좋아하는 작가들의 별세 소식이 들려올 때마다 마음이 쿵하고 내려앉는다. 만난 적도 없고 그저 작품으로 만난 것이 전부지만 동시대를 살아가고 있다는 것만으로도 위안이 되었다. 저자가 생존해 있는 것과 별세한 것은 큰 차이가 있다. 이 세상엔 이제 작품만 남아 있다는 게 위안이 되면서도 작품밖에 만날 수 없는 고아가 된 기분이다.


마음이 조금은 허해서 그의 작품을 당장은 읽지 못할 것 같다. 마음이 조금 추슬러지면 '미국 3부작'을 순서대로 읽어볼 생각이다. 이미 <휴먼 스테인>을 꽤 읽었지만 <미국의 목가>부터 다시 시작해 보려고 한다.


부디 평안하시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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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엄마가 좋은 10가지 이유 꼬마 그림책방 29
최재숙 지음, 문구선 그림 / 미래엔아이세움 / 2010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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병설유치원에 다니는 첫째는 재량휴일로 오늘 유치원에 가지 않았다. 둘째는 어린이집에 등원을 해서 오롯이 둘만의 시간을 가지게 되었다. 며칠 전부터 둘이서 무엇을 하며 놀까 하다 도서관에 가서 그림책 보고 돈가스를 먹고 오자고 했다. 아침에 둘째를 등원시키고 바로 도서관에 가서 큰 아이 도서대출증을 만들었다. 미성년자라서 만드는 방법이 좀 복잡했는데, 집에서 미리 가입을 하고 아이디를 만들어서 사진만 찍고 바로 카드를 발급받았다. 내 도서대출증이 10년도 넘은 거라 새로 발급하라 권유하기에 나도 다시 만들었다. 똑같은 카드를 만든 뒤 책도 보고, 돈가스를 먹고 버스를 타고 집에 왔다. 오늘 해본 게 다 처음이라는 첫째는 너무 재밌었다고 했다.

둘째는 말을 배우고 있는 중이라 얼마 전에 알려준 “엄마, 사랑해”를 잠들기 전에, 잠에서 깨자마자 해준다. 아직 표현 방법이 다양하지 않은 둘째에 비해 첫째는 기분과 상황에 따라 “엄마, 사랑해.” “엄마, 미워.” “엄마, 나 속상해.” 등 다양하게 말한다. 그럼에도 늘 부족한 엄마에게 사랑 표현을 더 많이 하는 편인데 그럴 때마다 고맙고 미안한 마음이 든다. 언제 이렇게 컸나 싶기도 하고, 더 잘해주고 싶은데 나도 엄마가 처음이니 실수하면서 함께 성장하고 있다. 그래서 이 책을 읽으면서 첫째에게도 내가 좋은 이유가 10가지 이상 될까, 싶었다. 주인공은 매일매일 뽀뽀해 주고, 맛있는 밥을 해주고, 형이 뺏어간 장난감도 도로 빼앗아주고, 예쁘다는 다양한 이유로 엄마를 좋아한다. 반면 친구 앞에서도 뽀뽀하고, 아줌마들이랑 웃을 때는 정말 시끄럽다며 엄마를 있는 그대로 표현하기도 한다.

주인공은 엄마가 그림책을 읽어주며 잠 재워줄 때도 좋다고 했다. 엄마가 읽어주는 <아기돼지 삼형제>의 내용이 덮고 있는 이불위로 펼쳐지는 부분에서 행복한 잠으로 빠지기 직전이라는 걸 알 수 있었다. 아이들이 듣고 있는 책 내용이 그렇게 이불 위에 펼쳐진다는 상상력이 참 좋았다. 그러나 이내 책 속의 동물들과 배경이 뒤엉켜서 모두 날아가는 장면에서 ‘그래도 중간에 빼먹고 읽지는 마, 응?’ 하는데 순간 너무 공감이 가서 빵 터졌다. 나도 너무 피곤할 때 슬그머니 두 장씩 넘기거나 글씨를 빼 먹고 읽는데, 그럴 때마다 첫째가 여기 빼먹었다고 친절히 알려주면 마지못해 읽어준 경험이 있기 때문이다.

책을 읽다 먼저 잠들어버린 엄마를 보며 ‘그런데 사실은…… 난 엄마가 우리 엄마라서 그냥 좋아.’ 라고 말하는 주인공을 보며 나도 모르게 행복한 웃음이 배어나왔다. 여러 가지 이유가 있겠지만 ‘우리 엄마라서 그냥 좋아.’라는데 굳이 설명이 필요할까 싶었다. 내가 낳은 아이들이니 그냥 사랑스러운 것처럼 아이들도 내가 엄마라는 이유로 좋아해주면 그것보다 더 기쁜 게 있을까 싶다. 부모가 된 뒤로 삶을 살아가는 수많은 이유가 아이들이 되어가는 것. 그것이 때론 힘들 때도 있지만 행복할 때가 더 많다는 걸 조금씩 느끼고 있다. 우리 부모님도 그랬다고 생각하면 마음이 뭉클거리면서도 내 아이들을 키울 힘이 더 난다. 그렇게 사랑은 대물림이 되나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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변신, 카프카 단편선 세계의 클래식 9
프란츠 카프카 지음, 권세훈 옮김 / 가지않은길 / 2011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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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프카의 작품집을 대부분 소장하고 있음에도「변신」을 이제야 읽었다. 줄거리를 익히 들어서 익숙한 것도 있었고, 인간이 벌레로 변해버리는 잔인한 상황을 피하고 싶었던 마음도 있었다.「변신」이외에「선고」와「요제피네, 여가수 혹은 쥐의 종족」도 실려 있지만「변신」이 단연 돋보였다. 그만큼 비극적이었고, 씁쓸했고, 모든 걸 포기하고 굶어 죽어가는 그레고르 잠자가 그저 안타까웠다.


세 편의 작품을 읽는 내내 모호하고, 알 수 없고, 혼란스럽다는 느낌이었다. 조금이라도 딴 생각을 하게 되면 흐름을 알 수 없어 무엇을 말하고 있는지 답답하기까지 했다. 그러다 저자의 삶을 되돌아보면서 그의 작품 속에 내재되어 있는 혼란을 조금은 들여다 볼 수 있었다. ‘20세기의 불안하고 불투명한 세계를 예리하게 꿰뚫어 본 작가’라는 수식어처럼 그의 삶이 순탄하지 않았음을 알 수 있다. 성공과 결혼에 대한 압박, 아버지의 절대적인 권위가 그를 얼마나 숨 막히게 했는지 생각만 해도 답답해진다. 그렇게 벗어나고 싶었던 프라하와 아버지의 곁을 죽기 직전까지 이루지 못한 카프카. 그가 남긴 문학이 현실과 먼 이상이 되었을지언정 그 안에서만큼은 탈출구가 되길 간절히 믿고 싶었다.

이런 저자의 삶을 인지하고 작품을 대하면 극단적인 선택을 강요하고 그에 따르는「선고」의 인물들,「변신」에서 벌레로 변해버린 그레고르와 보이는 그대로 벌레취급 해버리는 가족들,「요제피네, 여가수 혹은 쥐의 종족」의 갈등에도 불구하고 해결되지 않은 문제들이 현실의 괴리를 만들어 내지 않을 수도 있다는 섬뜩함이 느껴지기도 했다. 그럼에도「변신」의 그레고르는 쉽게 간과할 수 없었다. 온 가족이 그의 경제활동으로 편하게 살아가지만 정작 그는 그 일을 하고 싶어 하지 않았다. 그래서 어느 날 아침, 벌레로 변한 자신을 보면서도 직장과 가족 걱정을 하고 자고 나면 다시 괜찮아질 거란 생각이 그가 맞이하게 될 죽음에서 제발 멀어졌으면 싶었다. 어찌 보면 진정한 해방을 맞이했을 수도 있는 변신으로 인해 그는 더 지독한 구속으로 이어져 방에서 벗어나지 못한 채 죽음을 맞는다.

가족의 부양자에서 한 순간에 쓸모없는 존재가 되어 버린 그레고르는 자신이 벌레로 변신해 버린 참담한 현실보다, 가족들의 냉대와 무관심에 더 깊은 상처를 받고 굶어죽기에 이른다. 냉대와 무관심. 여기서 섬뜩했다. 우리가 무심코 보내는 그러한 시선으로 얼마나 많은 사람들을 상처 입히고 내면에 갇히게 했는지 말이다. 가깝다고 예외가 있을까? 경제활동을 할 수 없는 그레고르가 당면하게 되는 현실이 너무 처절해서 정말 그가 원하는 게 무엇일지 혼란스럽기 까지 했다. 그는 다시 인간으로 돌아가 다시 부양자의 굴레로 돌아가고 싶었을까? 어떤 것도 섣부른 단정을 지을 수가 없었다. 스스로 자살을 택할 만큼 그의 고통이 컸다는 사실과 그가 죽은 뒤 온 가족은 큰 짐을 덜어낸 듯 소풍을 갔다는 사실만이 무력하게 만들 뿐이었다.

저자의 작품 속에는 저자 자신이 깊숙이 내재되어 있지만 현실과의 괴리도 느껴진다. 하지만 나의 바람처럼 작품 속에서 온전한 자유와 해방, 완전한 이상을 추구하지 못했다는 사실이 안타깝게 느껴진다. 창작활동이 그에게 숨통을 준 것 같으면서도 복잡하고 답답한 현실을 완전히 벗어나지 못했다는 기분이 드는 건 왜일까? 저자에 대한 깊은 연구와 이해가 없기에 단면만 보고 이런 판단을 했을지라도, 그가 남긴 작품 곳곳에서 절절함이 느껴져 이런 마음이 드는지도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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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도 소망 - 인생의 밤이 길고, 상처가 깊을 때
케이티 데이비스 지음, 정성묵 옮김 / 두란노 / 2018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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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은 우리의 고통을 다 보고 계신다. 우리의 상처가 얼마나 넓고 깊은지 다 보고 계신다. 그리고 그 상처를 사용해서 우리를 사랑해 주신다. 하나님은 무조건 고통을 피해 가게 하시지 않고, 고통 속에서 우리가 예수님을 닮아 가도록 성장시킨다. 142쪽


초반에 집중이 되질 않아 책을 덮었다, 펼쳤다 계속 반복했다. 입양한 딸들이지만 열세 명의 엄마라니. 사역자로 우간다에 왔다지만 결혼도 하지 않은 상태에서 열세 명의 딸을 키우고 있다는 사실에 얼마나 수많은 일들이 일어날지 상상이 되질 않아 답답했다. 그리고 그렇게 며칠을 보냈다. 아마 답답했던 상황은 나보다 8살이나 어린 그녀가 열세 명의 아이들을 수고롭고 힘들지만 기꺼이 키워내는 상황에서, 두 명의 내 아이들을 힘들다고 티를 낼 수가 없어서였는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딸들을 키우는 것만이 그녀의 일이 아니라 가난하고 병든 사람들을 돌보고, 갈 곳이 없는 사람들에게 언제나 집을 내어주는 일을 마다하지 않았다. 그렇다보니 모든 것이 엉망일 게 빤한데도 그녀는 기쁘게 그 모든 일을 감당했다. 그 사실이 나를 좌절하게 만들었다. 나는 그러지 못하다는 절망감이 아니라, 모든 상황을 주님과 함께 하는데 나는 그러지 못하고 있다는 사실이 자꾸 나를 작아지게 만들었다.

무엇보다 이런 고통과 슬픔, 상실의 한복판에서 인간의 이해를 초월하는 기쁨과 평안을 맛보게 될 줄 몰랐다. 처참한 현실이 나의 장밋빛 낙관을 무참히 깨 버림으로써, 그 낙관이 진짜 소망을 흉내 낸 싸구려 모조품에 불과했음을 깨달았다. 23쪽

그녀가 하는 일은 주님이 없어서는 절대 할 수 없는 일 투성이다. 많은 아이들을 남겨 놓고 죽어가는 엄마를 돌보고, 남겨진 아이들을 걱정하고 맡아줄 사람을 찾는 일. 그런 일들이 반복될수록 하나님께 따져 묻기도 했다. 왜 엄마가 필요한 아이들에게서 엄마를 지켜주지 않냐고 말이다. 주님께서 구해 주실 거라 믿지 않으면 그 모든 과정을 감당할 수 없었다. 그럴 때마다 주님께 투정도 부리고, 상심도 하고, 울기도 하지만 언제나 주님은 곁에서 모든 걸 예비하고 계심을, 인간의 생각보다 더 깊은 뜻이 있음을 깨닫고 앞으로 나아가는 그녀가 너무 은혜로웠다.

딸아, 네가 고단한 걸 잘 안다. 하지만 나는 피곤하지 않다. 나는 지치지 않는다. 절대 피로해지지 않는다. 내게 기대라. 네가 약할 때 내가 강하니. 175쪽

혼자서 감당할 수 없는 사역 속에서 그녀는 피곤하다고 주님께 말하면 주님은 이런 음성을 주셨다. 이런 음성을 들을 수 있는 믿음과 마음이 있다는 사실 앞에 숙연해졌다. 주님께 기대지 않고 내 의지대로, 기분대로, 멋대로 해석하고 풀었던 나의 과오가 부끄러웠기 때문이다. ‘영원한 불에서 꺼내 주신 분이 이 짧은 삶의 고난에서도 당연히 구해 주시지 않겠는가.’ 이 사실을 믿지 못하고 있기에 내 삶에 윤기가 하나도 없고 다른 사람과 비교만하는 어리석음을 범하고 있었다.

사역은 하나님의 부름 받은 사람들이 하는 거라고 믿고 있다. 그리고 그녀를 보면서 정말 그렇다는 걸 다시 한 번 깨달았다. 늘 자신이 부족하다고 말하면서도 삶의 모든 걸 주님께 맡기고 그 안에서 뜻을 찾으려는 그녀의 모습만 봐도 평안했다. 우간다에서 그녀가 만나고 돕는 사람들은 절망에 빠져 있는 사람들이었지만, 그 사람들이 주님을 알고 새 삶을 찾아 갈 때 그녀는 모든 영광을 주님께 돌렸다. 그야말로 주님의 은혜가 풍성한 삶이었다. 불확실한 미래로 불안해하지 않았고 모든 현실을 자책하지 않았으며, 좌절하지 않았다. 주님께 생명이 있고, 구원 받았다는 확신이 있었기 때문에 가능했다.

그래서 그녀를 통해 보살핌을 받는 사람들이 다행이면서도, 우리가 돕고 하나님을 알려줘야 할 사람들이 많음을 보았다. 언제까지 내 신앙에 갇혀 자책만 하고 더 나아가지 못할 것인가! ‘세파에 시달려 만신창이가 되고 무엇 하나 내놓을 것이 없는 우리지만, 예수님은 그것과 상관없이 사랑으로 우리를 바라보며 웃어 주신다.’는 사실을 잊지 않으려 한다. 그녀 같은 사역을 못해서 내가 작아지는 게 아닌, 내 믿음을 키우고 내가 할 수 있는 복음을 전하는 게 내가 실천하는 길이라는 것을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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