버스데이 걸
무라카미 하루키 지음, 카트 멘쉬크 그림, 양윤옥 옮김 / 비채 / 2018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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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무 살 생일. 아무리 떠올려 봐도 기억이 나질 않는다. 누구와 함께 보냈는지, 그때는 어떤 마음을 품고 있었는지 실마리조차 떠오르지 않는다. 아마 창고 어딘가에 20살 때 쓴 다이어리가 있을 텐데 이 밤에, 창고에 가서 다이어리를 꺼내기는 너무 귀찮다. 20대 때는 그날은 나만의 날인 것 같아서 생일을 은근 기다렸는데, 30대에 접어들면서는 거의 신경 쓰지 않게 되었다. 이상하게 생일이 더 우울하고, 한 살 더 먹었다는 부정적인 느낌이 강했다. 그리고 결혼을 한 뒤로는 정말 무감감각 해져버렸다. 생일을 까먹기도 하고, 겨우 생각이 나면 엄마에게 낳아줘서 고맙다고 전화 한통 하는 게 전부다. 그러니 나에게 스무 살 생일은 너무 먼 얘기 같다.


자네의 인생이 보람 있는 풍성한 것이 되기를. 어떤 것도 거기에 어둔 그림자를 떨구는 일이 없기를. 34쪽

스무 살 생일. 남자친구와도 다퉜고, 아르바이트를 대타를 구하지 못해 일을 하며 평범한 하루를 보내고 있을 때, 예상하지 못한 사람에게 축하와 함께 이런 말을 듣는다면 기분이 어떨까? 갑작스럽고, 말투 자체가 고리타분한 것처럼 느껴지기도 하지만 특별하다고 생각해야 할 생일에, 이렇듯 특별한 말을 듣는다면 어느 정도 위안이 될 것 같기도 하다. 이미 남자친구와 다툰 뒤 생일에 대한 기대도 없던 그녀에게 이런 말을 들을 수 있었던 계기는 그야말로 우연히 일어났다. 이탈리안 레스토랑에서 아르바이트를 하는 그녀는 매니저가 갑작스런 복통을 일으키는 바람에 같은 건물의 사장에게 저녁 식사를 대신 배달해야 했다.

늘 치킨 요리를 메인으로 하는 사장의 저녁을 매니저는 저녁 8시에 배달했다. 다른 직원들은 사장을 만난 적도 없었고 그다지 궁금해 하지도 않았다. 그런데 스무 살 생일 저녁, 그녀는 사장에게 저녁을 배달하는 일을 우연히 맡게 된 것이다. 그리고 짧은 대화 가운데 나이를 묻는 사장에게 오늘이 생일이라고 말을 하게 되었고, 그녀는 사장에게 좀 특이한 축하를 받게 되었다. 그리고 사장은 소원 한 가지를 들어주겠다고 한다. 지금의 나는 세속화 되어서 소원이 뻔하지만 20살의 생일에 누군가 나에게 소원 한 가지를 물었다면 뭐라고 대답했을지 가늠이 되질 않는다. 어쩌면 좀 허무맹랑한 것이었을 수도 있다. 그때의 나라면 말이다.

‘나’에게 그녀는 정말 있었던 일이라고 그때의 이야기를 해주는데, ‘나’는 그녀의 이야기를 듣고 두 가지 질문을 한다. ‘그 소원이 실제로 이루어졌느냐는 것. 그리고 그것이 무엇이었던 간에 당신이 그때 소원으로 그것을 선택한 것을 나중에 후회하지 않았는가’ 를 물었다. 그녀의 대답은 애매모호하다. 첫 번째 질문에 대한 대답은 예스이자 노라고 하는가 하면 두 번째 질문에 대해 현재 어떤 생활을 하고 있는지 대답한다. 다만 ‘바싹 마른 미소의 흔적이 그 입가에 떠 있었’지만 ‘그것은 나에게 고요한 체념 같은 것을 느끼게 했다.’고 모호한 추측을 하게 만들 뿐이었다.

결국, 그녀가 어떤 소원을 말했는지 드러나지 않는다. 사장은 ‘자네의 소원은 이미 이루어졌어.’라고 했고, 그녀는 ‘나’에게 시간이 걸리는 소원이라고 정도만 말했다. 처음엔 그렇게 책이 끝나버려서 ‘이게 뭐야!’ 싶었다. 적어도 무슨 소원인지에 대해 말하지 않아서 ‘나’가 두 번째로 질문했던 후회에 대해 왈가왈부 하지 않아도 될 것 같다고 말이다. 그러다 곰곰 생각해 보면, 그 소원으로 인해 인생이 예측하지 못하게 달라졌다거나 후회를 하게 된다면 없으니만 못할 수도 있을 것 같다. 그녀는 ‘만일 실제로 이루어져버리면 그 결과 나 자신이 어떤 식으로 변해갈지, 저는 잘 상상이 안 돼요. 오히려 감당을 못하게 되고 말지도 모르죠.’ 라고 하는 부분에서 이 생각에서 벗어나지 않은 소원을 말했을 거라는 추측 정도만 할 수 있었다.

저자는 생일이 ‘모든 사람이 일 년 중에 딱 하루, 특별한 하루를 소유하게’ 되는 것에 ‘매우 공평하다.’고 했다. 나이가 들어감에 따라 나는 저자와 거의 반대되는 생각을 갖고 있지만, 과연 그녀가 빌었던 소원이 반전을 가지고 있을지 아닐지에 대해서는 잘 모르겠다. 통째로 독자에게 판단을 넘겨버렸기도 하고, 그녀의 태도로 보아 눈이 동그랗게 커질 만큼 반전이 일어났을 것 같지도 않다. 스무 살 생일, 특별한 소원에 대해 얘기하고 있지만 그것을 추측해야 하는 상황. 인생의 불확실성에 대해서 말하고자 하는 것인지도 모르겠지만 어쨌든 결국 각자도생해야 한다는 생각만 굳혀진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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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어의 온도 (100만부 돌파 기념 양장 특별판) - 말과 글에는 나름의 따뜻함과 차가움이 있다
이기주 지음 / 말글터 / 2016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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처음에 ‘너’를 알고 싶어 시작되지만 결국 ‘나’를 알게 되는 것, 어쩌면 그게 사랑인지도 모른다. 43쪽


누군가에게 호감이 생기고, 좋아하게 되고, 사랑하게 될 때의 첫 과정은 상대방이 궁금하다는 것이다. 별거 아닌 행동에도 의미를 부여하고 제멋대로 해석하고 상상의 나래를 펼치는 것. 좀 철딱서니 없는 나는 누군가를 좋아할 때마다 그런 과정을 거쳤다. 그러다 결국엔 나를 더 들여다보게 되고 상대방에게 바라는 게 많아지는, 이기적인 내가 남을 때가 있다. 사랑일 식어버릴 때다. 대부분 그럴 때 사랑은 끝이 난다. 현재의 나는 어떤 사랑을 하고 있는지 생각해보니 쉽게 입이 열리지 않는다.

할아버지가 그랬듯, 상대를 자신의 일부로 여길 수 있는지 여부가, 진실한 사랑과 유사 사랑을 구분하는 기준이 될지도 몰라. 37쪽

내 일부로 여길 수 있는지가 진실한 사랑이라면, 현재 나의 사랑이 명확해 진다. 내가 정말 사랑하고 있는 것들이 무엇인지 말이다. 사랑하게 된 계기와 과정을 생각해보면 마음을 기울이고 있는 이유도 명확해진다. 하지만 정확하게 경계를 그을 수 없듯이 시시때때로 변하는 게 사랑이다. 이런 얄팍한 사랑도 사랑이라 부를 수 있을지 모르겠지만 한번쯤 진실한 사랑을 품고 살았으면 하는 바람이 일었다.

인간은 얄팍한 면이 있어서 타인의 불행을 자신의 행복으로 종종 착각한다. 하지만 그런 감정은 안도감이지 행복이 아니다. 얼마 못 가 증발하고 만다. 303쪽


행복을 싫어하는 사람이 있을까? 아마 우리가 살아가는 대부분의 이유는 잡히지 않는 행복 때문인지도 모른다. 그런데 그 행복이란 것이 나만 마음을 다잡는다고 해서 쥐어지는 것이 아니다. 끊임없이 남과 비교하고, 타인을 경계하고 우위에 서면서 그것을 행복이라고 착각할 때가 많다. 나보다 더 나은 사람을 보면서 현재를 불행하다 판단하고, 나보다 못한 사람들을 보면 ‘안도감’으로 ‘착각’하는 것이다. 정작 주체로 서야 할 나의 행복과 삶의 방향은 잃어버린 채 이리저리 휘둘리는 것은 아닐까? 너무나 익숙한 모습이라 이 생각조차 ‘얼마 못 가 증발하고’ 말 것 같은 두려움이 생긴다.

흔히들 말한다. 상대가 원하는 걸 해주는 것이 사랑이라고 하지만 그건 작은 사랑인지도 모른다. 상대가 싫어하는 걸 하지 않는 것이야말로 큰 사랑이 아닐까. 25쪽

상대가 싫어하는 것조차 파악하지 못한 사랑이라면? 나의 일상을 돌아보니 상대방을 배려하기보다 내 감정을 토로하기 바빴다는 생각에 얼굴이 화끈해 진다. 그것도 내가 가장 사랑한다는 가족들에게 말이다. 세상에 존재하는 많은 말들, 그 안에서 찾은 언어의 온도, 말이 전해지는 것과 떨어지는 것의 경계. 그 안에서 나의 생각은 수없이 뻗어 나갔다. 내게 올라온 일부의 말들만 들춰냈지만 내가 하는 말들의 의미를 신중하게 할 필요를 느꼈다. 말들이 온도를 지니고 있다면 듣는 이에게 어떤 식으로 전해질지 모르니 내 안에 머무르는 언어들이 적절하게 각각의 온도를 가졌으면 좋겠다고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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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자책] 오래된 빛 : 나만의 서점 - 나만의 서점
앤 스콧 지음, 강경이 옮김, 이정호 그림, 안지미 아트디렉터 / 알마 / 2013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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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형서점이 없는 소도시에 살고 있어 서점에 대한 추억은 갈수록 얕아져 간다. 온라인으로 주문하는 게 더 편해져버린 요즘, 하루 만에 뚝딱 배송 오는 책들을 보면 더 서점에 안 가게 되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서점에 관한 추억이 갈수록 얄팍해져 가지만 그렇다고 아예 없는 건 아니다. 온라인으로 책을 사는 것이 낯설었던 시절에는 서점에 굉장히 자주 갔다. 빽빽이 꽂힌 책등을 보며 목록 구경만 해도 좋았고, 말미에는 한 권씩 골라 사오는 재미도 쏠쏠했다. 아직도 종종 내가 자주 갔던 서점의 풍경 혹은 공기가 느껴지는 듯하다. 지금 그 서점에 간다면 굉장히 어색할 것 같은데, 그렇게 꺼내놓기엔 내 안에 쌓인 서점에 관한 이야기가 별거 없는데, 이 책을 읽고 있으면 없던 추억도 쥐어짜서 꺼내고 싶을 지경이다.

 

책과 서점을 찾아다니는 탐험가. 저자가 들려주는 책과 서점 이야기를 듣고 있으면 정말 잘 어울리는 표현이란 생각이 든다. 주거지를 옮기고, 여러 가지 이유 때문에 들른 서점을 보면서 이야기를 쏟아놓는 것. 사적일 수도 있는 이야기가 책을 좋아하는 사람들에겐 거대한 세계의 이야기로 받아들이는 건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그런 이유 때문에 나도 이 책을 꺼내들었고, 처음엔 내가 생각했던 방향의 이야기가 아니라서 갸우뚱 했던 것도 사실이었다. 서점의 현재 이야기 보다 대부분 과거의 이야기였고 언급된 책들은 생소하고 관련된 에피소드와 역사에 대해 들려주니 좀 고리타분했던 것도 사실이다. 오래 된 서점을 거의 만난 적이 없는 문화의 다름에서 오는 이질감이 가장 큰 이유였는데, 간접경험의 영역으로 넘겨버리자 굉장히 흥미로운 이야기가 되었다.

 

내 옆에 나란히 서서 책을 읽는 사람이 나와는 또다른 세상을 거닐고 있는, 이 서점이라는 곳이 가늠할 수 없을 정도로 기이한 공간이라는 사실이었다. 19쪽

 

서점에서 책을 보고 있을 때 옆에 사람은 무슨 책을 보고 있는지 궁금할 때가 있다. 그리고 ‘또다른 세상을 거닐고 있는’ 사람 혹은 그런 공간이 되어주는 서점이 기이하게 느껴질 때도 있었다. 저자는 자신이 만났던 서점과 책 속에서 그런 이야기를 꺼내주었다. 그냥 오래된 서점과 역사를 가진 곳으로 추측하고 마는 것이 아니라 서점에 얽힌 이야기를 책과 함께 자연스레 풀어놓는다. 한 권의 책으로 기억되는 서점, 서점이 만들어낸 새로운 출판 흐름, 작가를 발굴하고, 작가를 발견하는 일까지 지금이라면 생소한 역할을 해 내는 곳이 서점이었다는 사실이 신선했다. 그러면서도 그런 기억을 간직하고 있는 서점들이 아직까지 존재하는 것에 대한 경이로움과 역사의 흐름 속으로 사라져 버린 것에 대한 씁쓸함이 묘하게 교차했다.

 

우리의 모든 탐색의 끝은 우리가 시작했던 곳에 도달하는 것 그리고 그곳을 처음으로 이해하는 것이다 <리틀 기딩> 중

 

흐름을 거스를 순 없다. 잡을 수도 없고 아쉬워만 하고 있기엔 다가올 날들에게 미안해진다. 단순히 책과 서점 얘기인 줄 알았다 의외의 깊이를 발견한 기분이다. 한 줄의 시에 감탄하고, 다른 시간과 공간 속에 살아간 사람들을 경이롭게 바라보고, 그들이 남긴 작품들이 남겨져 있는 것에 감사한 삶. 한 권의 책이란 시시때때로 변해서 어떻게 다가올지 몰라 그 설렘만으로도 충분히 대단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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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게혜윰 2018-05-10 17:1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 책이 출간되었을즈음 현장에 있지 읺았나요?^^

안녕반짝 2018-05-11 15:15   좋아요 0 | URL
아니요~ 그때는 한참 전이예요^^
 
신의 카르테 1 - 이상한 의사 아르테 오리지널 6
나쓰카와 소스케 지음, 채숙향 옮김 / arte(아르테) / 2018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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밤 9시가 넘은 시각. 아이들을 재워야 함에도 불을 환하게 켜놓고 베개에 비스듬히 누워 책을 읽었다. 아껴 읽었음에도 막바지에 다다라서 마저 읽고 잠들고 싶었다. 책을 읽으면서 혼자서 큰소리로 웃고, 핑 도는 눈물을 감추려 콧물을 훌쩍였는데 이런 나를 보면서 아이들이 내 옆에 각자 자리를 잡았다. 첫째는 한글 쓰기에 여념이 없고, 둘째는 평소 좋아하는 책을 가져오더니 읽어달라고 보챈다. 몇 번 읽어주니 알아서 책을 보고 있는 시간이 참 평화로웠다. 서두르지 않고 천천히 책을 마저 읽고 아이들을 힘껏 안아준 뒤 함께 잠이 들었다. 아이들과 함께 시간을 보낼 수 있다는 사실이 유난히도 감사한 밤이었다.


 

서울살이가 힘들다는 친구에게 딱하나 부러운 게 있다면 바로 의료시설이라고 했다. 응급상황이 발생했을 때, 근처 대학 병원으로 바로 갈 수 있다는 사실이 부럽다고 말이다. 그만큼 지방에 살수록 골든타임을 놓치는 경우가 많다는 사실을 인지하고 있는 셈인데, 이 책을 읽으면서 나는 과연 내가 살고 있는 근처 병원의 의사를 얼마나 신뢰하는지 생각해봤다. 첫째를 낳을 때, 죽음 직전까지 갔던 나는 더 빨리 내 상태를 파악하지 못하고 더 일찍 큰 병원으로 보내지 못했던 일을 경험한 뒤, 병원은 물론 의사에 대한 신뢰도가 급격히 하락했다. 뭔가 조금만 맘에 들지 않아도 의심하고 비방했음은 물론 심지어 내가 살고 있는 곳이 소도시기 때문에 이렇다는 한탄도 서슴지 않았다. 하지만 간호사나 동료 의사들로부터 ‘괴짜 의사’라고 불리는 구리하라 이치토를 보면서, 이런 의사가 가까이 있다면 언제 닥칠지 모르는 응급한 상황에 대해 불안해하지 않을 수도 있겠다는 좀 어이없는 안심이 들었다.


 

건강검진으로 우연히 담낭암이 발견된 72세 아즈미 씨. 혼자 된 지 오래고 마땅한 가족도 없는데 혹시 몰라 대학병원으로 보냈지만 무참한 답변만 듣고 온 환자. 다시 구리하라에게 진료를 받으면서 이 병원으로 돌아와도 되냐고 물었을 때, 그러라고 손을 잡고 마음을 다독여 주는 부분에서 괴짜지만 의사로서 최선을 다하고 있다고 인정하게 되었다. 실력이 없는 것도 아니었고, 지방 병원의 살인적인 스케줄을 소화하고 있으며, 환자를 세심히 관찰하고 배려하는 마음이 있었다. 그래서 나쓰메 소세키의『풀베개』를 수시로 읊어대도, 다른 의사들에게 별명을 붙여 유머를 불러내도, 옛 여관이었던 곳에 신혼생활을 하며 자신만큼이나 괴짜인 사람들과 교류하는 것도 구리하라답다고 여겨졌다.

 

의사로서의 재능과 열정, 거기에 풍류까지 알고, 내면의 따뜻함을 잊지 않은 의사. 많은 환자들이 그를 만날 수 있어서 행운이라고 말하지만 도리어 환자들에게 더 위로받고 감사하다는 인사를 잊지 않는 모습에서 이 소설을 읽고 있는 것 자체가 고마웠다. 그러면서도 대학병원 의국으로 들어가야 하나 말아야 하는 고민과 함께 얽혀가는 환자에 대한 생각들과 더불어 시스템에 대한 고민도 함께 한 것 같다. 나 역시 그런 시스템을 좇아가기 바빴고, 무조건 큰 병원을 신뢰했다. 환자만큼이나 이렇게 고민하는 의사가 있다는 것. 이제야 구리하라를 만나서 행운이라는 환자들의 심정을 조금은 알 것 같았다.

 

아즈미 씨가 남긴 편지를 보며, 독특한 방법으로 그를 위로하고 정곡을 찔러대는 선배, 동료 의사들을 보며 그는 이 병원에 남기로 결정한다. 그 결정이 최선의 판단인지 스스로도 확신하지 못하지만 적어도 ‘맞는 일과 안 맞는 일’ 사이에서의 갈등은 끝냈다고 할 수 있었다. 그의 곁에는 실력도 있고 마음까지 맞는 의료진이 있었다. 감상적이고, 유머도 알고, 실력에 마음까지 따뜻한 의사를 만날 수 있어서 나 역시 행복한 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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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방 안에 든 게 뭐야? 징검다리 그림책
김상근 글.그림 / 한림출판사 / 2015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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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방을 멘 귀여운 표정의 개구리가 있는 표지부터 궁금증을 일으킨다. 정말 가방 안에 든 게 뭐냐고 물어보고 싶어진다. 개구리는 작은 웅덩이를 보고 서둘러야겠다며 가방에 무언가를 담고 뛰기 시작한다. 표정이 자못 심각한 게 중요한 일을 맡고 있는 것 같다. 빨간 가방을 메고 달려가는 개구리를 보며 동물들은 궁금증이 생긴다. 가방에 든 게 무엇인지 상상하면서 각자 좋아하는 것들을 떠올린다. 다람쥐는 도토리를, 토끼는 홍당무를, 원숭이는 바나나, 곰은 연어를 상상한다.


 

임무를 맡은 것 같은 진지한 표정의 개구리와 달리, 자신들이 좋아하는 음식을 상상하는 동물들의 표정은 생생하다. 나라면 무얼 상상했을까? 배가 고프다면 맛있는 스파게티를, 식후라면 달콤한 디저트를 생각했을 것 같다. 따스한 색감의 그림과 터치가 정말 가방 안의 물건이 상상하는 것이 되길 바랄 정도다. 동물들은 가방에서 좋아하는 음식의 냄새가 난다고 착각까지 한다. 그래서 각자 상상한 음식이 들어 있다 생각하고 모든 동물들이 줄을 지어 개구리의 가방을 쫓아간다. 개구리는 그런 동물들을 아랑곳하지 않고 열심히 이동했고 절벽 같은 곳에서 가방을 던진다.

 

음식을 상상하며 따라왔던 동물들은 개구리가 가방을 던지자 모두 먹고 싶었던 음식의 이름을 외친다. 바나나, 도토리, 홍당무, 연어를 외치며 개구리를 붙잡아 보지만 이미 늦었다. 동물들도 가방과 함께 떨어지고, 가방 안에서는 뭔가가 튀어 나오고 있었다. 가방에서 튀어 나온 건 작은 올챙이들이었다. 동물들이 놀라서 올챙이를 잡으려 안간힘을 쓰는 모습이 웃기기도 하고 뭉클하기도 하면서 모두 함께 웅덩이에 풍덩 빠진다. 그들의 몸에 달라붙어 있는 올챙이들이 너무 귀여워서 보고만 있어도 푸근해진다.

 

드디어 올챙이들은 집을 찾았고, 올챙이들을 구하려 했던 동물들에게 보상이라도 하듯, 그곳에는 동물들이 각자 먹고 싶었던 음식들이 있었다. 그리고 각자 음식을 들고 달아나는 동물들의 뒤를 개구리가 빨간 가방을 멘 채 ‘나도 줘!’하면서 쫒아가는 모습에 역전당한 듯한 동물들의 표정이 귀엽다.

 

빨간 가방 안에 든 게 올챙이라는 사실이 밝혀지고, 올챙이들이 집을 찾고, 동물들도 원하는 음식을 찾는 장면이 참 좋았다. 절로 따뜻한 웃음이 배어나고, 자연스레 색감에 젖어드는 멋진 이야기였다. 무엇보다 동물들의 표정이 생생해서 함께 동화되어 가는 과정이 즐거웠다. 동물들이 각자 먹고 싶었던 음식을 상상했던 모습을 떠올리니, 갑자기 배가 고파진다. 오늘은 무얼 먹어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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