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인주의자 선언 - 판사 문유석의 일상유감
문유석 지음 / 문학동네 / 2015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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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인이 먼저 주체로 서야 타인과의 경계를 인식하여 이를 존중할 수 있고, 책임질 한계가 명확해지며, 집단 논리에 휘둘리지 않고 자기에게 최선인 전략을 사고할 수 있다. 25쪽


어려운 일이다. 내가 먼저 주체로 서야 한다는 것도, 존중하고 휘둘리지 않을 자신이 없다. 카페에서 혼자 차를 마시며 유유자적 책을 보고 있으면서도 다른 사람이 날 어떻게 생각할지, 타인의 시선에서 자유로울 수 없는 나이기에 ‘타인과의 경계’조차 애매모호해지는 것이다. 나 역시 ‘내 삶이 우선인 개인주의자고, 남의 일에 시시콜콜 관심이 없으며, 누가 뭐라 하던 내 방식의 행복을 최대한 누리며 살’고 싶을 뿐이다. 그런데 이게 나만 노력한다고 해서 되는 일이 아님을 누구나 알고 있을 것이다. 관계를 맺고 살아가자면 어떤 식으로든 개인주의를 숨기는 게 편하다는 걸 여러 번 경험했기 때문이다.

남들보다 뒤처지는 것, 남들과 다르게 비치는 것, 튀는 것에 대한 공포. 이 집단주의 문화로 인한 만성적인 긴장과 피로는 경제성장에도 불구하고 우리에게 행복을 안겨주지 않았다. 36쪽


보통의 인간으로, 평범하게 살아간다는 것이 얼마나 힘든 일인지 나이를 먹을수록 체감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틈바구니에서 어떻게 하면 나만의 행복을 만끽할 수 있을지 고민하게 된다. 자극적인 뉴스, 처절한 경쟁시대, 나만 아니면 된다는 이기심이 팽배한 사회를 두려움으로 바라보다 결국 도피하기 일쑤인데 그럼에도 모든 것을 개인의 탓으로만 돌리는 건 아닌 것 같단 생각이 들고 있다. 책을 좋아하는 나는, 책을 읽으면서 만나게 되는 수많은 사람들과 상황 속에서 내가 좀 더 노력하면 언젠가는 사회도 변화하고 희망을 품을 수 있다 생각했다. 그래서 책을 읽고 후기를 남기면서도 항상 깨달음, 뉘우침, 희망을 빼먹지 않았는데 어느 순간 굉장히 좁은 사고 속에 갇혀 있단 생각이 들었다.


개인의 성공과 실패에 영향을 미치는 사회 구조 문제를 언급하면 ‘환경 탓이나 하는 투덜이’로 간주한다. 사회는 어쩔 수 없으니 개인이 변해야 한다는 자기계발 논리의 폐해다. 115쪽


평소라면 이 문장이 모호하고 뭐 어쩌라는 말이냐고 지난한 시선으로 바라봤을 것이다. 하지만 개인의 변화에도 꿈쩍 않는 사회구조와 갈수록 삭막해져가는 현재를 바라봤을 때 사회 구조를 다시 한 번 생각해보지 않을 수 없다. ‘환경 탓이나 하는 투덜이’로 남았더라면 정권 교체도, 그럼에도 불구하고 희망을 품기 위해 용기 있게 나서는 사람들도 없었을 것이다. 무조건적인 투덜이가 아니라 정당한 권리를 요구하는 투덜이가 행동하고 합쳐질 때 사회가 변화되는 것을 경험했다. 그럼에도 집단주의에 휩쓸려 타인의 시선만 신경 쓰며 살아갈 것인가? 이 책을 읽는 내내 개인이 존중받고 자존감이 높아질 때 삶의 만족도와 행복감이 높아지며, 여전히 삭막한 세상인데도 사회도 발전하고 변화할 수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연구 결과 행복감을 예측하는 가장 중요한 문화적 특성은 개인주의고, 북미나 유럽 국가들의 행복감이 높은 이유는 높은 소득보다 개인주의적 문화 때문으로 본다. (중략) 행복의 원동력은 넘치는 자유, 타인에 대한 신뢰, 그리고 다양한 재능과 관심에 대한 존중이라는 것이다. (중략) 집단주의로 인한 압력에 짓눌리지 않고 각자 제 잘난 맛에 사는, 서로 그걸 존중해주는 개인주의 문화의 강력함이다. (56쪽)


최근에 북유럽 국가에 관한 책을 읽으면서 과연 우리 사회에서 상상할 수 없는 것들이 허용되고 존중받는 게 너무 먼 나라 얘기처럼 느껴져서 오히려 낯설었던 경험이 있다. 저자의 말처럼 ‘현실을 조목조목 따져보면 모든 사회는 나름의 문제를 안고 있고 나름의 특수성이 있다. 그대로 가져다가 베끼면 되는 정답 같은 건 없다.’는 말에 공감한다. 하지만 적어도 개인을 존중해주고, 타인에 대한 신뢰를 보내고, 성적과 스펙으로 줄을 세우지 않고 다양한 재능이 존중되어주는 사회가 되었으면 하는 바람은 여전하다. 그 모든 걸 가르치고 지원해주는 공교육이 이뤄질 때 불안한 미래가 아닌, 내 아이에게 행복한 세상을 기대하게 만들 수 있을 것 같았다. 3부에 걸쳐 저자의 ‘개인주의’와 타인의 삶을 지켜보는 정직한 시선, ‘세상의 불편한 진실과 마주하’는 용기를 보며 어제까지만 해도 미미했던 내 존재가 존중받는 기분이 든 것도 비단 다르지 않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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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인주의자 선언 - 판사 문유석의 일상유감
문유석 지음 / 문학동네 / 2015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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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인이 존중받을 때 사람은 훨씬 행복하다는 사실을 알려주는 책. 무조건적인 선진국을 베끼는 것이 아니라 우리나라 정서에 맞게 변화가 일어나길 간절히 바라는 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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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글 대동여지도
김정호 지도, 최선웅 도편, 민병준 글 / 진선북스(진선출판사) / 2017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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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은 밟아볼 수 없는 북녘의 땅만 봐도 가슴이 뭉클해집니다. 그래서 이 책이 더 의미있고 소중하지 않을까 생각됩니다. 이렇게 하나로 이어졌을 때 우뚝 솟은 대한민국을 볼 수 있다는 것 자체가요. 입체적으로 볼 수 있다는 게 정말 매력적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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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전에서 길어 올린 한식 이야기 식사 食史
황광해 지음 / 하빌리스 / 2017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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처음 이 책을 읽기 시작했을 때 역사 사료들이 잔뜩 등장해서 음식에 관한 책이 아닌 줄 알았다. 그래서 조금 읽다 책을 덮었고 한참이 지나서 다시 펼쳤는데 이상하게 잘 읽혔다. 책이 잘 읽히지 않을 땐 묵히는 버릇이 있는데 잊지 않고 다시 꺼내 들어 재밌게 읽은 건 참 다행이란 생각이 든다.


처음과 달리 왜 이렇게 재밌게 읽혔을까? 여러 이유들이 있겠지만 우리가 흔히 접하고 있는 음식에 대한 새로운 사실과 오류들이 속속 드러나서 재정립하는 시간이 되었기 때문이 아닌가 싶다. 예를 들면 고려가요 <쌍화점>의 쌍화는 만두라는 것, 그러므로 쌍화점은 만두전문점이었다는 사실과 제갈공명이 처음 만든 것도 아니며 만두라고 칭하는 종류가 엄청나다는 사실들이었다. 또한 대구탕은 대구가 들어가는 것이 아니라 대구 명물 육개장(쇠고기+개장국)이 대구탕으로 불렸다는 것들이다. 미나리는 또 어떤가. 더러운 물에 산다고 천대하던 미나리는 ‘충성과 겸양의 상징이’며 미나리는 성균관의 아이콘이었으며, ‘미나리를 캔다’는 표현은 ‘성균관에서 공부한다’는 뜻이었다고 한다. 그동안 오해하고 몰랐고, 관심도 없었던 이런 이야기들이 역사 속에서 속속 드러나고 지금까지 이어지는(방향이 잘못되었다 하더라도) 것을 보니 재미있지 않을 수가 없었다. 많이 변형되었다 하더라도 옛 사람들도 먹고 같은 이름으로 불렸다는 사실이 기분을 묘하게 만들었다.

순조는 한 한밤중에 냉면이 먹고 싶어 신하를 시켜 ‘냉면 테이크아웃’을 하는가 하면, 조선 시대에도 ‘수유’라는 버터 혹은 치즈가 있었고 군역을 면하기 위해 그 부락으로 숨어드는 멀쩡한 사람도 있었다고 한다. 귤이 너무 귀해서 제주에서 진상되면 궁궐에서는 과거를 치렀다고 한다. 그런데 그걸 서로 받겠다고 싸우기도 하고 그런 사정이다 보니 정작 제주에서는 ‘귤나무를 일일이 세어 장부에 기록하고, 열매가 맺을 만하면 열매숫자를 기록’하는 일도 있었단다. 지금은 풍족하고 대량생산되는 시대에 살고 있고, 시대도 변해서 이런 이야기들이 상상이 되질 않지만 그에 따른 고충은 고스란히 전해져온다.

당시의 생활 모습이 생생하게 담겨 있어 마치 그 시대가 눈앞에 펼쳐지는 듯한 착각이 일기도 한다. 지금까지 이어 내려오는 음식들이 신기하기도 하고 현재 우리가 먹는 음식과 비교하면 씁쓸해지는 것도 사실이다. 정치적으로 얽힌 이야기를 읽고 있으면 더 그렇다. 임금이 받는 수라는 민심과 정치적인 상황을 받아들여 수시로 바뀌곤 하는데 연산군의 여지(리치) 사랑에 관한 이야기는 기가 찰 정도다. 내게는 뷔페에서 만나게 되는 과일로 인식되어 있는 만큼 자주 접하고 먹는 과일이 아님에도 조선시대에 그 과일에 빠져 무리하게 요구한 군주가 연산군이라고 하니 음식에도 폭군이 있나 싶어 씁쓸했다. 그가 강화도로 쫓겨난 후에야 국가 체면을 떨어뜨리는 여지 구입이 끝났다고 한다. 예나 지금이나 술과 관련된 문제가 다양했다는 점도 그렇고 나라의 국력이 타국에 쏠려 있을 때 관련 음식들도 슬프게 기억된다는 것에 많은 생각을 하게 된다.

그러면서 과연 현재 우리가 먹는 음식들이, 시대를 거쳐 가면서 변화되고 변형되어 다음 세대에는 얼마나 남아 있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다음 세대들은 음식과 현재를 어떻게 기억하게 될까? 잘 상상이 되질 않지만 이 책을 읽으면서 하나의 바람이 생겼다. 좀 더 건강한 음식을 남길 수 있었으면 싶었다. 지금도 건강한 음식을 먹고 있다는 인식이 부족한데 다음 세대는 캡슐 하나로 식사를 끝내는 건 아닌가 하는 쓰잘머리 없는 상상까지 하게 된 것이다. 음식과 얽힌 다양한 이야기를 알다 보니 내가 현재 먹고 있는 음식, 구입하고 만들어 먹고 누군가와 함께 먹는 음식이 즐겁게만 기억되어도 좋겠다는 바람이 생겼기 때문이다. 옛 사람들은 무엇을 먹고 살았는지에 대한 궁금증이 이런 의미까지 끌어올릴 줄은 몰랐다. 좀 생뚱맞긴 해도 오늘 먹는 한 끼니에 최선을 다해야겠단 생각이 불쑥 올라온다. 저녁 시간이 다가온다. 주부로서, 엄마로서의 역할을 해야 할 시간이다. 항상 고민과 귀찮음이 동반되는 이 일이 오늘은 좀 더 진중하게 느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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콜럼바인
데이브 컬런 지음, 장호연 옮김 / 문학동네 / 2017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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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00쪽에 달하는 두툼한 책을 모두 읽고 덮었을 때 현실감각이 없었다. 머릿속에는 책 속의 상황이 생생하게 펼쳐져 나 혼자 낯선 곳에 덩그러니 놓여 있는 것 같았다. 혼란스런 상황을 정리할 필요가 있을 것 같아 곧장 외출을 했다. 사람들 사이에 적당히 섞여 그들을 바라보니 이상한 생각이 들었다. 내 눈에는 지극히 평범해 보이고 그저 우연히 한 공간에 있는 사람들이었다. 그런데 누군가는 이런 사람들을 내면의 분노로 인해 없애버리고 싶은 대상으로 생각했다고 하니 소름이 돋았다. 그리고 실제로 실행했다. 13명의 사망자와 24명의 사상자를 낸 총기사건으로 기억하고 있지만 진실이 밝혀지면 밝혀질수록 ‘사실 총기사건이 아니었다. 실패로 끝났지만 폭탄 테러사건이었다.’는 저자의 말에 점점 공감할 수밖에 없었다.


섬뜩했다. 1999년 4월 20일. 내가 고 3때였고 범인들은 나와 태어난 해가 같았다. 당시 내가 총격사건에 대한 뉴스를 접했는지 기억이 나지 않았다. 그럼에도 어렴풋이 캐시 버넬의 순교에 관한 이야기는 들은 기억이 났다. 이 책을 통해 많은 부분이 미화되었다는 사실을 알기 전까지 그 인물이 콜럼바인 총기 사고의 희생자였다는 사실도 몰랐다. 그럼에도 섬뜩한 기분을 떨쳐버릴 수가 없었다. 1999년의 나는 진로에 대한 고민과 번뇌만 잔뜩 짊어지고 있었는데, 지구 반대편에 나와 나이가 같은 에릭 해리스는 사건 일 년 전부터 ‘자신이 받은 학대의 상징’인 학교를 향해 대학살을 계획하고 있었다. 그리고 딜런 클레볼드와 함께 사제폭탄과 총을 들고 학교로 들어가 사람들을 죽이고 다치게 했다. 나와 에릭과 딜런의 차이점을 말하려는 것이 아니다. 왜 그런 생각을 하고, 실행을 하고, 많은 사람들을 끔찍한 고통 속으로 들여놨는지 공백을 전혀 좁힐 수가 없었다. 완전히 다른 존재라서? 아니면 그들이 정상이 아니었기 때문에? 사건이 터진 후 모두가 그들의 동기를 찾으려고 온갖 것들을 목표로 삼았지만 가장 중요한 ‘왜?’에 대한 이유는 찾지 못했다. 그리고 이 책은 저자가 약 10년 동안 조사하고 있는 그대로를 기록하면서 ‘왜?’에 대한 많은 사실을 드러낸다.

저자는 자료 출처에 대해 ‘내가 멋대로 지어낸 문장은 없다.’고 했다. 차라리 사실이 아니었음 싶은 이 사건은 있는 그대로의 일이었다. 사건을 바라보는 시선이 너무나 생생하고 촘촘해서 당시 상황을 들여다보고 있는 착각이 들었지만 당혹스러웠다. 에릭과 딜런의 행동은 어떤 식으로든 이해를 요구할 수 없지만 충동적인 게 아니었다는 사실 때문이었다. 영민함을 범죄로 끌어들인 에릭은 많은 기록을 남겼다. 홈페이지와 일지에 세상에 대한 분노와 심지어 살인에 대한 예고까지 서슴지 않았다. 그 사실을 알게 된 한 학생의 부모가 끈질기게 에릭을 예의 주시할 것을 경찰에 알렸지만 방관했다. 그리고 사건이 터졌을 때 관련 기록을 삭제했고 은폐하려 했다. 나중에 그 모든 사실이 밝혀졌지만 적어도 그런 살상이 일어나지 않게 조금은 예방할 수 있었다는 안타까움이 내내 마음에 맴돌았다. 하지만 총격 직 후 에릭과 딜런이 자살함으로써 책임과 비난을 향할 대상이 없어져 버렸다. ‘콜럼바인 사태의 경우, 총기 제공자를 제외하고는 재판을 받을 사람이 없었다.’는 사실처럼 사건은 혼돈 그 자체였다. 언론과 경찰, 유가족과 부상당한 학생과 부모, 가해자의 부모까지 모두 얽혀들어 진흙탕 싸움이 끊이질 않았다. 결국 이 사건의 책임은 붕 떠버렸다. 혼란 속에서 많은 사람들이 고통당하고 있는데도 ‘왜?’ 에 대한 답은 여전히 없었다.

 

그런 와중에 ‘FBI 요원으로 왔지만 임상심리학자로서 더 중요한 역할을 하게’되는 퓨질리어가 에릭과 딜런이 남긴 기록을 보며 순차적으로 ‘왜?’에 접근해 가는 과정이 흥미로우면서도 섬뜩했다. 그는 에릭과 딜런이 남긴 모든 기록과 자료를 반복해서 보며 날카로운 분석을 한다. 에릭이 분노와 우월감으로 사이코패스의 전형적인 과정을 밟으며 서서히 범죄자로 발돋움 하는 것과 달리 딜런이 강한 우울증을 겪고 있었지만 실천력이 없었던 아이였다는 것. 여러 과정을 거쳐 결국 둘은 총을 들고 학교로 들어가 대학살을 실행했고 엄청난 결과를 만들어 버렸다는 사실에 다다랐다.

그들이 1999년 4월 20일로 점점 향해가는 과정과 사건 전 후의 수많은 사람들의 증언과 혼란이 이 한 권의 책에 촘촘하고도 낱낱이 드러나 있다. 비극의 보고서이면서, 잘 짜인 소설처럼 흡인력 있게 정점을 향해가는 이 기록 앞에 당황스러웠던 것도 사실이었다. 사건이 터졌을 때 다양한 사람들의 심리 변화와 제각각의 대응을 지켜보는 것만으로도 인간군상을 철저히 경험했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중요한 사실들이 은폐되고 혼란을 야기시켰다. 사람들은 믿고 싶은 대로 믿었고, 기억하고 싶은 대로 기억했으며 그 틈을 이용하려는 기회주의자들도 있었다. 그런 와중에도 부상자를 비롯해 수많은 사람들은 고통 받고 있었다(원치 않은 부상을 입고도 자신의 삶을 잃지 않으려 했던 패트릭의 이야기는 이 비극을 경멸이 아닌 숙연함으로 만들기도 했다.) 왜 이런 일이 일어났을까? 오랜 시간이 흐른 지금 사람들은 이 사건의 진실을 제대로 알고 있을까?  처음에는 사건 자체가 궁금했다. 그러다 이 일이 일어난 이유를 알고 싶었다. 그리고 정점을 향해 가는 이 보고서가 어떻게 마무리 될지 궁금했다. 그럴 수 없다는 걸 알면서도 사건에 대한 명확한 결론을 이 책이 알려주길 바랐다.

저자는 탄탄한 구성 속에 냉철한 기록이 섬세하게 녹아들도록 이 사건을 기록하면서 ‘철저한’ ‘자기반성’을 이끌어 내고 있다. 두 소년의 마지막 모습으로, 남겨진 사람들의 소식을 전하는 것으로 이 책은 끝이 나지만 수많은 질문과 상상, 그리고 남겨진 메시지가 이를 대변한다. 이 사건을 면밀히 관찰한 내 마음에 가장 깊이 새겨진 메시지는 ‘도와줘야 한다.’였다. 이 사건을 마주하고 수많은 내면의 변화를 겪었는데 내게 남겨진 메시지에 나 역시 놀랐다. ‘FBI는 구체적인 경고 신호의 목록을 작성’했고 ‘한 가지 사항을 지적했다. 거의 모든 경고 신호를 보이는 아이는 공격을 계획하기보다는 우울증이나 정신질환을 앓고 있을 가능성이 더 높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기준에 딱 들어맞는 아이는 가둬둘 것이 아니라 도와줘야 한다.’는 부분이 강렬하게 새겨졌다. 어쩌면 딜런은 에릭과 같은 사이코패스가 아니었기에 도와줬다면 달라졌을 지도 모른다. 에릭의 경우는 더 복잡하다. ‘에릭은 정상적인 사람이 아니었고 미친 것도 아니었다. 사이코패스는 이와는 다른 별개의 범주’ 라고 말한 것처럼 이런 증상을 보인 아이들을 어떻게 도와야 할지 여전히 어렵다. 에릭이 남긴 섬뜩한 기록을 보고 있으면 과연 도움이라는 것이 통할지 확신할 수도 없었다.

분명 강력한 원인은 에릭의 사이코패스와 딜런의 우울증 때문이지만, 그 하나의 원인만 사건의 동기로 단정 짓기는 어렵다. ‘결정적인 고비가 된 사건이 있었’지만 그 이면에는 복잡다단한 이유 혹은 본성, 환경, 시스템 그리고 유려하지 않았던 상황도 포함되기 때문이다(이는 퓨질리어의 냉정한 분석을 받아들였 뿐, 두 소년의 행동에 대한 이해와 공감의 동의어는 아니다.). 또한 누군가 그들에게 관심을 더 기울였다면 끔찍한 일이 일어나지 않았을 거라고 말하기도 어렵다. 몇몇은 그들의 위험을 감지했고 알렸다. 하지만 결과는 참혹했다. 이 사건을 통해 많은 부분이 재조명되고 정비되었지만 이후에도 총기 사고는 일어났고 현재에도 일어나고 있다. 내 주변에서도 일어날 수 있는 이 일을, 적어도 조금은 알아차릴 수 있다고 저자는 말하고 있다. 에릭과 딜런을 봐도 가능한 이야기다. 하지만 여전히 나와 우리가 그런 이들과 마주했을 때 할 수 있는 일은 충분치 않다. 많은 변화와 노력이 따라야 한다. 그것은 누군가의 일이 아니라 우리 모두의 일일 때 제대로 된 도움을 줄 수 있을 것이다. 이 말들이 모호하다는 것을 안다. 그리고 이 사건을 이야기하는 내 시선 또한 그럴 수 있다는 것도 말이다.

그럼에도 더 이상의 관찰자와 방관자가 되고 싶지는 않다. 적어도 ‘도와야 한다’는 메시지가 들어왔다면 도울 준비를 마련해야 한다. ‘폭력으로 향하는 과정은 여기저기 놓인 표지판을 따라가는 점진적인 길이’라면 그 표지판을 선한 것들로 바꾸고 때론 단속하고 도움의 손길도 내밀어야 한다. 우리가 개입할 수 없는 영역이 있다는 것을 안다. 그 사실을 인정하되 방치하지는 말아야 한다. 그렇게 된다면 적어도 극단적인 ‘왜?’로 향하는 길목을 차단할 수 있지 않을까? 내면의 분노가 타인의 생명을 해하지 않도록 방향을 틀 수 있지 않을까? 여전히 모호하고 어려운 일이다. 그럼에도 남겨진 이들이 해야만 하는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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