페코로스, 어머니의 보물상자 페코로스 시리즈 2
오카노 유이치 글.그림, 양윤옥 옮김 / 라이팅하우스 / 2015년 12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응답하라 1988>란 드라마를 보고 있으면 고작 여덟 살 때라서 많은 추억을 공유할 수는 없지만 종종 텔레비전에서 나오는 노래가 기억나는 걸 보면서 신기할 때가 많다. 나는 이제  서른 다섯살이 되었고 애 엄마가 되어 저런 드라마를 보면서 과거를 추억하고 그래도 예전이 좋았다며 미화하고 있다. 그때도 미래에는 좀 더 나아질 거라는 희망을 안고 살았을 텐데 그런 미래를 살고 있는 나의 현재를 돌아보면 글쎄, 당시에 내가 꿈꾸던 미래에 가까운지 확실하게 대답을 할 수가 없다.


 

  이렇듯 내가 살아온 과거의 나를 끄집어내는 게 점점 더 희미해지고 있다. 이제 35년을 살았을 뿐인데 벌써부터 이렇게 희미해진다면 내 수명이 길어져 50년 60년 전의 일을 기억하려 한다면 과연 어떤 기억들이 남겨질까? 상상도 가지 않는다. 그때쯤이면 내가 경험한 일들이 마치 꿈인듯, 어디선가 읽은 소설의 내용인듯 착각할지도 모르겠다. 마치 치매에 걸린 어머니의 기억상자처럼 상자속의 내용이 시도 때도 없이 튀어나올 뿐, 그 내용으로 보자면 누구에게나 자신만 기억하고 있는 상자가 하나쯤은 있는 것처럼 말이다.


 

  전작 <페코로스, 어머니 만나러 갑니다>에서 치매에 걸린 어머니를 귀엽게 그려낸 저자의 이야기를 많은 생각을 하며 읽었었다. 그 이후에 이야기도 궁금하다는 찰나에 이 책이 출간되었지만 집필하는 도중에 어머니가 돌아가셨다고 한다. 그래서인지 전작에서와 달리 많이 여위고 기운이 떨어진 어머니의 모습이 나올 때마다 마음이 찡했다. 아들과 함께 더 많은 추억을 꺼내주었으면 싶었는데 점점 기력이 없어지고 세상과 하직하려는 듯이 자신의 살아온 이야기를 다 끄집어내는 느낌이 들었다. 과거와 현재의 경계가 더 자주 무너졌고 그만큼 어머니의 의식은 더 흐려지는 듯했다.


 

  특히 과거의 이야기나 아버지를 목도하고 함께 한 이야기들은 저자라는 매개물 없이 어머니의 의식 세계로 바로 들어가는 듯한 착각이 일 정도였다. 그런 추억이 차라리 미화되어 좋은 기억이 더 많았다면 행복했을까? 이런 추측이 들 정도로 전쟁을 겪었고 술버릇이 고약한 남편 곁에서 고생스런 세월을 보냈으며 두 아들을 키워냈다. 10남매의 장녀인 저자의 어머니가 짊어졌을 짐을 생각하면 감히 어느 한부분도 이해한다 말할 수 없었다.


 

  자연스레 우리 엄마가 생각났다. 역시나 한량에 술고래인 아버지 곁에서 악착같이 9남매를 키워낸 우리 엄마. 젊은 시절의 엄마는 왜 저리 드셀까 싶을 정도로 다정함이 없었다. 나도 엄마가 되어보니 남편은 아무것도 도와주지 않으면서 농사일과 아이들을 길러내는 모든 일을 혼자 감당해야 했다면 그럴 수밖에 없었다고 생각한다. 나라면 절대 버텨내지 못했을 세월을 감당해내고 종종 치가 떨리듯 과거의 일을 이야기하는 엄마를 보고 있으면 측은하다 못해 마음이 아프다.


 

  이 책을 통해 저자 어머니의 의식에 떠오른 과거를 보고 있자니 내 엄마도 생각나고 내가 지나온 보잘것없는 삶의 궤적도 되짚다보니 몹시 쓸쓸해졌다. 그때의 시간, 그때의 추억, 그 시절 함께 했던 사람들이 곁에 없는 지금의 나는 과연 잘 살고 있는 건지, 괜찮은 건지 물어보고 싶을 정도다. 저자는 자신이 그려낸 어머니의 모습을 통해 비슷한 환경에 놓은 사람들에게 조금이나마 위로가 되었으면 하는 바람이라고 했지만 치매라는 기억의 무너짐을 통해 멀쩡히 잘 살아가고 있다고 다짐하는 내 스스로를 돌아보는 계기도 되었다. 한편으로는 누군가를 이렇게 관찰하고 그리고 추억하고 기록하는 것이, 그것이 나의 부모님이라면 한번쯤 되짚어 보는 것에 의미가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앞으로 나와 얼마의 시간을 함께 할 수 있을지 모를 나의 엄마. 엄마의 과거를 듣고 보듬어주고 싶은 건 비단 나뿐만이 아니라 이 책을 읽는 모든 사람들의 마음이 아닐까 싶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1)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청춘불패 - 이외수의 소생법
이외수 지음, 정태련 그림 / 해냄 / 2009년 5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제목에서 풍기는 분위기로는 요즘 젊은이들을 위로하는 책으로 보이겠지만 6년 전에 출간 된 책이다. 그래서 놀랐다. 어쩜 지금과 같은 팍팍한 시대에 읽어도 변함이 없는지, 왜 이런 충고들이 들어맞도록 갈수록 사는 게 힘들다는 소리만 들려오는 요즘인지 그런 미묘한 감정들이 뒤섞인 채 지루함 없이 읽었다. 청춘을 위로하는 다른 책들을 읽어보지 않았지만 이 책의 말투는 친절하지 않다. 직설적이고 풍자하는 듯한 문체가 종종 비위를 건드릴지 모르겠으나 헛된 희망을 야기하지 않는다는 점에서 어느 정도 수긍했던 것 같다.


나는 과거라는 시간 속에서 그대의 나이를 경험했고 그대는 미래라는 시간 속에서 나의 나이를 경험할 것이다. 그리고 우리는 지금 현재를 공유하고 있다. 나는 그대보다 젊은 날을 먼저 소멸시켜 버린 늙은이로서 허심탄회하고 솔직담백하게 그대에게 고백하고 싶다. (29쪽)


  <청춘불패>라고 해서 청춘들에게만 국한되어 있는 건 아니다. 나보다 먼저 삶을 살아낸, 그것도 팍팍하게 살아낸 저자의 경험에 비추어 인생을 돌아보듯 이야기하고 있다. 자신에 대해, 부모에 대해, 친구에 대해, 외모에 대해, 자살과 공부 등등 인생을 살아가는 누구라면 한번쯤 고민했던 주제들을 때로는 어르듯, 때로는 따끔하게 혹은 능청스럽게 이야기한다. 먼저 삶을 살았다고 으스대는 것도 아니고 각자의 인생은 각자에게 달려 있으므로 저자의 이야기를 참고정도만 해도 충분히 자신에게 주어진 인생에 대해 생각해 볼 여지가 있었다. 그럼에도 자꾸 되돌아보게 되고 곱씹어 보게 되는 건 그냥 흘려버리기엔 현실이 너무 삭막해서가 아닌가 싶다.


잔인하다 세월이여. 동서남북 분주하게 이력서를 던졌건만 종무소식. 쥐구멍에도 볕들 날이있다는 속담도 이제는 단물이 다 빠져버린 츄잉껌이 되었다. (87쪽)


  이런 문장 앞에서 깊은 공감 혹은 좌절할 수 있는 사람이 있을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저자는 서두르지 말라고 한다. 아직 세상으로 타락하지 않았기에 오히려 그대가 자랑스럽다고 말하고 있다. 좀 오글거릴지는 모르겠으나 저런 상황을 당한 사람 앞에서 과연 무어라 위로할 수 있을까. 팍팍한 현실을 빗대어 채찍질을 할 수도 없고, 입에 바른 말들로 희망만 심어줄 수도 없는 노릇이고. 아직 젊음이라는 터널을 지나고 있어서인지 모르겠으나 미심쩍어도 앞서간 선배들의 충고를 따르는 수밖에. 오글거리게 청춘을 위로하는 책들에 거부감을 가졌으면서도, 이 책은 좀 더 직설적으로 말하고 있다 평했으면서도 결국엔 위로의 글 앞에 긍정과 희망으로 점철시킬 수밖에 없나 보다.


  최근에 애덤 스미스의 <도덕 감정론>을 풀어쓴 책을 읽었다. 내 안의 공정한 목소리에 귀 기울이며 양심적인 삶을 살라는 주제였는데 이 책 또한 결국엔 바른 길(?)로 인도하는 책이 아닌가 싶다. 이런 충고조차 귀 기울이지 않는 사람이라면 이미 자신 안에 있는 목소리에도 귀를 기울이지 않을 것이고 자신의 생각과 달리 행동하고 살아가는 사람이 아닐까? 그것에 대한 판단은 타인보다는 이미 자기 자신이 잘 알고 있을 터이고 종종 타인의 한마디가 내면에 변화를 만들듯이 삐뚤어져 있는 나를 고치라는 뜻보다 익숙하고 고정화 되어 있는 내 자신을 돌아보기 위한 책으로 받아들이면 좋을 것 같다. 어떠한 말이든 생각이든 받아들이는 건 오로지 자신의 몫이므로 마음을 한껏 열고 이 책을 만나봤으면 하는 바람이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3)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도남의 날개 십이국기 6
오노 후유미 지음, 추지나 옮김 / 엘릭시르 / 2015년 11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그야말로 <십이국기>에 빠져 있던 나날이었다. 시리즈를 연달아 읽다 때맞춰 도착해 준 6권을 순식간에 읽었다. 너무 재미있어서 책이 다 읽히는 게 아쉬울 정도였고 나만 알고 있는 세계가 있는 것처럼 오랜만에 환상 속의 공간을 그려보았다. 현실로 인식하고 그 세계의 이야기가 더 읽고 싶어졌지만 아직 출간 소식이 없어서 아쉬울 뿐, <십이국기> 다음 이야기가 간절하게 기다려지는 요즘이다.


  이번에는 공국의 이야기였다. 왕좌가 오랫동안 공석이 되자 백성들은 살기 힘들어졌고 요마는 들끓었다. 하지만 왕은 나타나지 않았다. 기린이 직접 왕을 선택하기도 하지만 일 년에 한 번 열리는 봉산에 들어가면 왕의 기운이 느껴지는 이를 역시나 기린이 선택한다. 그러나 살아가기가 힘겹고 봉산에 들어가는 길이 험하다는 이유로 그렇게 왕이 되려는 사람은 드물었다. 그도 그럴 것이 공국에서 봉산에 들어가려면 요마가 나오는 길을 가로질러 가야 하기 때문에 굳이 확실하지도 않는 길을 가려는 자가 많지 않았다.


  이제 열두 살인 소녀 슈쇼는 그런 어른들이 마땅치 않았다. 도전도 해보지 않고 언젠가는 나라가 안정되겠지 기다리는 어른들을 이해할 수가 없었다. 그래서 자신이 직접 봉산에 들어가기로 한다. 거상의 딸로 태어나 부족한 것 없이 자랐지만 그랬기에 세상 물정도 모르는 면도 있었고, 같은 나이의 아이가 하녀라는 이유로 헐벗고 못 먹는 것이 이해가 되지 않았다. 그래서 자신이 그런 세상을 바꾸고 싶어서 봉산에 오르려는 당찬 포부를 가진 소녀였다.


  열두 살 아이가 이런 다짐을 했을 때에는 왕이 되는 여지가 충분하기에 그럴 거라는 추측도 잠시 봉산에 오는 길이 만만치 않음을 알고는 초조해졌다. 이유는 다를지라도 슈쇼가 생각하는 것처럼 봉산에 오르는 걸 두려워하지 않는 사람들이 있었고 왕이 되는 건 둘째 치고 봉산까지 무사히 갈 수 있을지 의문이었다. 그야말로 요마가 활개를 치고 다니는 공간으로 인간무리가 들어가는 셈인데 위험이 닥칠 때마다 조마조마한 가슴을 부여잡느라 혼났다. 그 험한 길을 슈쇼 혼자 가는 게 무리라는 걸 알고 있었지만 슈쇼는 무모할 정도로 영특했다. 우연히 만난 간큐를 봉산까지 가는 길잡이로 삼고 또 다른 인연으로 만난 정체를 알 수 없는 리코의 도움까지 받게 된다.


  봉산에 가려면 황해로 들어가야 한다. 그곳을 경험한 자의 도움이 없으면 들어가고자 하는 이의 안위를 장담할 수 없다. 간큐는 황해에서 길들일 수 있는 요마를 사냥하는 사람이었기에 그나마 황해를 알고 있었다. 봉산에 오르려는 무리들과 섞여 가면서 굳이 자신이 알고 있는 지식을 공유하지 않으려는 이유 때문에 슈쇼와 다투고 슈쇼는 그 길로 다른 무리에 합류해 버린다. 슈쇼가 합류한 이는 척 봐도 왕의 기운이 느껴지지 않는, 그 만한 성품을 가진 사람이 아니었다. 그랬기에 데리고 온 가솔들을 희생시키고 무모하게 전진하느라 요마를 인간의 무리에 끌고 오는 위험까지 저지른다. 간큐가 무조건 옳다고 할 수도 없고 슈쇼의 입장에 동의하는 것도 아니지만 슈쇼가 다른 무리에 합류해서 여행을 지속할 땐 정말 답답하고 화가 났다. 영리하고 똑 부러져서 어리다고 무시하는 마음이 전혀 없었는데 그때만큼은 알밤이라도 콩 놔주고 싶을 정도로 섣부르다는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그런 일들을 겪으면서 간큐와 빚었던 갈등과 자신이 왕이 된다면 감내해야 할 책임이라는 것에 대해 슈쇼는 많은 것들을 깨달아간다. 일련의 훈련이라고 할 수 있을 정도로 이런저런 일을 겪으면서 성숙해져갔다. 아이답지 않은 영특함이 때론 기가 눌리게 할 때도 있지만 잘못을 인정하고 반성하며 무모하더라도 옳은 길로 가려는 인성에 왕이 되기에 충분하다는 느낌이 들었다. 그렇게 봉산으로의 여행은 많은 깨달음과 많은 이의 도움으로 무사히 마칠 수 있었다. 그리고 정체를 숨기고 자신을 도왔던 리코의 정체가 밝혀졌을 때 뭔가 짜릿한 기분이 들어 이 책을 읽고 있는 순간이 더 즐거워졌다. 다음 이야기가 언제 나올지 알 수 없는 가운데 출간일을 기다리는 기분. 그나마 올해 읽은 시리즈물 중에서 기다리는 보람과 기쁨을 함께 느끼는 책이 아닌가 싶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7)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평범한 나의 느긋한 작가생활 마스다 미리 만화 시리즈
마스다 미리 지음, 권남희 옮김 / 이봄 / 2015년 12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고요한 이 시간이 좋다. 아이는 평온히 잠들어 있고 나의 책상은 책들이 어지럽게 흐트러져있지만 무언가를 할 수 있는 이 시간이 좋다. 그러나 종종 나는 무엇을 하고 있는지, 무엇을 하고 싶은지 잘 모를 때가 있다. 그 생각이 마음 속 깊이 들어와 버리면 아무것도 못하고 며칠을 끙끙 앓을 때가 있지만 그렇게 시간이 지나고 나면 괜찮아진다. 그리고 여전히 나는 내가 무엇을 하고 싶은지 알지 못하지만 그래도 괜찮다는 생각이 든다. 꼭 무언가가 되지 않아도 된다는 생각. 무엇이 되어야 한다는 압박감이 알게 모르게 내면에 가득했는데 책을 읽으면서, 나와는 다르지만 있는 그대로의 자신의 모습을 받아들이는 사람들을 보면서 그 생각을 스르르 떨쳐버리고 나니 내가 더 잘 보이기 시작했다.

 

사람에게는 못하는 일과 하고 싶지 않은 일 하려고 했다가 실패한 일 그것도 역시. 그 사람을 만드는 거죠. (99~100쪽)

 

마스다 미리의 만화가 좋아서 모두 소장하고 있는데 특히 이 만화는 자전적인 이야기가 가득해서 저자와 좀 더 가까워진 기분이 들었다. 내가 무엇을 할 수 있을지 구구절절 늘어놓았던 이유는 저자의 이야기를 읽으면서 나와 비슷한 부분이 많다는 동질감 때문이었다. 주로 편집자들과 만나고 그들과 나눈 이야기들과 책이 만들어지는 과정, 만화를 그리게 된 이야기들이 실려 있었다. 하지만 현재의 저자를 만들기 전, 어린 시절과 학창 시절의 모습을 보면서 나와 너무 비슷해서 놀랐다. 결국 저자는 그림을 그리고 글을 쓰는 사람이 되었다는 질투심도 없이 나는 좀 더 인내해야 한다는 엉뚱한 생각까지 들었다.

 

공부도 못하고 내성적이고 자신의 의견을 말하지 못하고 발언이라도 할라치면 심장이 쿵쾅거리고. 학창시절의 내가 딱 그랬다. 그래서 늘 후회했다. 면전 앞에서 한 마디도 못한 것을 후회했고 그렇게 억울함이 쌓이다보니 집에 돌아와서 마치 상대방이 앞에 있는 것처럼 시원스레 할 말을 다 하는 내 모습을 보면서 어이가 없었지만 타고난 성정이라 어쩔 수가 없었다. 일단 친해지면 내 속을 다 드러내는데 첫 만남이 어렵다. 그렇다고 외모가 눈에 띄는 것도 아니고 그야말로 나는 소심하고 지극히 평범한 아이로 자랐다. 공부는 못하면서 책은 좋아해서 공부와 상관없는 책을 읽어대면서도 쓸데없이 생각이 많아서 늘 공상이 머릿속에 넘쳐났다. 그걸 표현해내려는 생각 같은 건 하지도 못했기 때문에 나와 비슷한 점이 많아서 놀랐다던 저자의 도전과 용기가 위대해 보이기까지 했다.

 

그런 저자가 잘하는 것이 있었으니 바로 광고 문구를 만드는 거였다. 응모해서 티셔츠를 한아름 받기도 하고 라면회사 문구를 만드는 데 뽑혀서 상금도 받고 부상으로 라면을 트럭으로 받았다는 데서는 박장대소하고 말았다. 그러면서도 그런 용기와 능력(?)이 부러웠다. 어린 시절의 나는 시골집에서 늘 틀어박혀 자괴감에 빠져 허우적대느라 나를 조금이나마 벗어난다는 건 어림도 없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저자가 스스로 다독이고 열심히 하는 모습을 보면서 지금의 나를 돌아보니 어린 시절과는 좀 더 달라진 나를 발견할 수 있었다. 어떤 계기가 되었는지 모르겠지만 여전히 심장은 쿵쾅거려도 다른 사람들 앞에서 내 의견을 말하는 데 용기를 낼 수 있고, 책을 더 좋아하게 되었고 잘 쓰지는 못하지만 책을 읽고 내가 느낀 점을 그럭저럭 말할 수 있다. 그리고 나의 외모에 대한, 내 존재에 대한 자괴감을 많이 떨쳐냈고 결혼까지 하고 나와 닮지 않은 예쁜 아이들(?)을 낳았다는 사실만으로도 나도 무언가를 해냈다는 뿌듯함이 갑자기 밀려온다.

 

저자가 여러 사람의 편집자를 만나는 모습을 보여줄 때 분명 든든하고 믿음직스런 편집자를 만날 수 있을 거란 확신이 있었다. 실제로 그러했고 그림을 그리고 글을 쓰고 책을 만드는 일에 열심인 저자를 보면서 나도 누군가에게 저런 존재가 되고 싶단 생각이 문득 들기도 했다. 꼭 타인에게 그런 존재가 되지 못하더라도 내 자리에서 내가 할 수 있는 일을 묵묵히 감내하고 있을 때 나에게도 기회가 올지도 모른다는 생각. 이 생각이 너무 허황되지 않기를 바랄 뿐이다. 신칸센을 타고 도쿄로 상경한 저자가 일반기차를 타지 않았던 걸 후회했던 것처럼 나도 지금 이 순간을 기억할 날이 있을까?^^


댓글(2) 먼댓글(0) 좋아요(9)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cyrus 2015-12-04 18:2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도 어렸을 때 내성적이라서 실컷 놀 수 있는 용기가 부족했어요. 부모님 눈치 때문에 즐거운 추억을 남길 기회가 적었어요.

안녕반짝 2015-12-15 22:20   좋아요 0 | URL
저는 동네에서는 활개를 치고 놀았는데 학교에서 특히 수업시간에는 늘 소극적이고 눈치보고 타인의 시선을 보느라 어깨를 제대로 펴지 못한 아이였답니다 ㅜㅜ
 
명화 보기 좋은 날 - 내 가방 속 아주 특별한 미술관
이소영 지음 / 슬로래빗 / 2015년 11월
평점 :
절판


나의 하루의 시작은 큰 아이를 어린이집에 보내고 둘째를 재운 다음 커피 한 잔을 마시면서 블로그를 기웃거리는 것이다. 블로그에 일상을 올리기도 하고 리뷰를 쓰거나 다른 공간을 돌아다니면서 하루를 시작한다. 그렇게 뭔가 흔적을 남겨야 비로소 하루가 시작되는 것 같고 주부가 아닌 또 다른 나를 발견하는 것 같아서 애를 쓰고 있는지도 모르겠다. 이렇게 나의 하루의 시작을 얘기한 이유는 이 책을 읽으면서 매일매일 자신이 좋아하는 명화와 일상을 기록해갔던 저자 때문이었다. 가장 좋아하는 게 글을 쓰고 그림을 보는 것이라고 했듯이 그 둘의 만남은 타인에게도 잔잔함과 새로운 세계를 열어주었다.


  그림을 좋아한다고 하지만 아는 것은 없다고 늘 말한다. 그것이 자랑이 아님에도 어쩔 수 없는 건 그림에 관한 책을 읽으면서 그때는 수긍을 하지만 책을 덮고 나면 대부분 잊어버린다. 그렇기에 반복해서 보지 않으면 작가 이름과 그림 제목은 늘 헷갈리기 일쑤인데 그러다보니 내가 화가 이름과 제목을 알기 위해서 책을 읽는 것인지 헷갈릴 때가 있었다. 그래서 이 책은 그런 부분을 신경 쓰지 않고 편하게 매일 읽고 싶은 만큼 읽었다. 그러다보니 자연스레 집중해서 아껴 읽게 되었다. 여전히 화가 이름과 작품명은 또렷하게 기억나진 않지만 그에 얽힌 이야기와 그림들이 매일 매일 나의 일상을 풍요롭게 만들어 주었다.


  이 책의 가장 큰 매력을 묻는다면 잘 알지 못했던 작가에 대한 이야기가 많다는 점이다. 자신의 자리에서 혼신을 다해 그림을 그렸던 혹은 여전히 그림을 그리고 있는 화가들의 이야기가 있어서 좋았다. 새로운 화가를 알게 된데서 오는 흥분과 신선함이 유명한 작가들의 이야기와 균형을 맞추었고 그러다보니 지루함이 없었다. 저자의 일상과 그림 이야기가 얽혀 들어가는 구성이 조금 틀에 맞춘 듯 했지만 애정 어린 시선을 따라가다 보면 그림이 달리 보이는 게 신기했다.


  화가나 모델이 되어 편지를 쓰는 방식도 똑같은 틀의 글 속에서 지루함을 조금이나마 덜어주었고 열정적이고 치열한 화가들의 모습에서 경건함도 느꼈다. 예술가로 평생을 살아간다는 것이 결코 쉬운 일임을 알고 있기에 다른 시대에서 다른 삶을 살아가는 그들을 보고 있으면 평범하기 그지없는 내 삶도 반추하게 된다. 이렇게 매일 살아가는 것에 감사하며, 무언가를 남기지 않더라도 존재할 수 있는 자체에 의미를 두면서 말이다.


  창작물을 생산해 낸다는 경이로움 뒤에는 자신의 재능을 펼쳐내기 위한 인생의 흐름이 다양한 감정으로 이입되었다. 화려함 속에서 살아간 화가들, 고통과 어려움으로 반대로 평안함과 평범함으로 화가의 삶을 살아간 이들도 있었다. 그들의 그림을 보면서 항상 다르게 다가오는 감정들에 내 삶을 대입시켜보는 것. 동떨어진 그림이 아니라, 나와 다른 세계의 사람들이 아니라는 데서 오는 안도감 같은 것이 있었다. 나와 다른 삶을 살고 내가 절대 능력을 발휘할 수 없는 영역의 사람들이지만 저자의 글을 통해서 거리감을 좁힌 것 같아서 즐거운 마음으로 그들의 삶과 그림을 들여다 볼 수 있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8)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