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비에르는 가끔 이렇게 말하곤 했다.
"저들은 행복해. 자기가 하는 일을 사랑하니까. 내가 혹독하게 군 덕분에 저들이 자기 일을 사랑하게 된 거지."
어쩌면 그들을 고통스럽게 했는지도 모르지만, 리비에르는 그들에게 강렬한 기쁨도 주었다.
‘그들이 강렬한 삶을 향해 나아가도록 밀어줘야 해.‘ 그는 생각했다.
‘고통과 기쁨을 동시에 불러오는 강렬한 삶으로 나아가도록. 그런 삶만이 중요하니까.‘ - P35

"자네가 내말을 알아들었다면 그렇게 하게, 로비노 자네는 부하를 사랑해야 하지만 그들에게 사랑한다고 말해서는 안 되네." - P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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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항인이란 누구인가? "아니요"라고 말하는 사람이다. 그에게 거부란 포기하지 않는 것을 의미한다. 그러므로 그는 반항의 시초부터
‘예‘라고 말하는 사람이기도 하다. 평생 명령을 받아온 한 노예가돌연 새로운 명령을 받아들일 수 없다고 판단한다. 이 ‘아니요‘의 내용은 무엇인가?

이를테면 그것은 "이런 일이 너무 오래도록 계속되었소", "거기까지는 좋소, 하지만 그 이상은 안 되오", "이건 지나친 일이요" 또는
"당신도 넘지 말아야 할 선이 있소"를 뜻한다. 요컨대 ‘아니요‘는 어떤 경계선의 존재를 긍정한다. 두 권리가 맞서 서로를 한정하는 이경계선 너머까지 상대편이 침범한다는 반항자의 느낌, ‘이건 좀 지나치다‘라는 반항자의 느낌 속에서 바로 한계의 관념이 발견된다. 반항운동은 참을 수 없다고 판단되는 침해에 대한 절대적 거부에 근거하는 동시에, 정당한 권리에 대한 막연한 확신, 좀 더 엄밀히 말하면 반항자가 가지는 ‘...할 권리가 있다‘라는 느낌에 근거한다. 반항은 어떤식으로든, 어떤 곳에서든 스스로 옳다는 감정 없이는 일어나지 않는다. 반항하는 노예가 ‘아니요‘와 ‘예‘를 동시에 말하는 것은 이런 의미에서다. 그는 경계선을 인정하는 동시에, 경계선의 이편에 유지하고자 하는 모든 것을 긍정한다. 그는 자기 속에 ‘할 만한 가치가 있는‘
무엇인가. 사람들이 유의해야 할 무엇인가가 있다는 사실을 고집스레 증명하려 한다. 어떤 의미에서 그는 자신을 핍박하는 명령에 자신이 인정할 수 있는 범위 이상으로 핍박받지 않을 권리를 대립시킨다.
- P35

형이상학적 반항이란 인간이 자신의 조건과 창조 전체에 항거하는운동이다. 그것은 인간과 창조의 목적에 이의를 제기하는 까닭에 형이상학적이다. 노예는 자신의 신분에 주어진 조건에 항의한다. 형이상학적 반항자는 인간으로서 자신에게 주어진 조건에 항의한다. 반항하는 노예는 자신의 내면에 무엇인가가 있어서 주인이 자기를 대하는 방식을 받아들일 수 없다고 단언한다. 형이상학적 반항자는 창조에 의해 기만당했다고 선언한다. 어느 경우든, 단지 순수하고 소박한 부정만 문제가 되는 것은 아니다. 두 경우 모두에서 우리는 하나의 가치판단을 발견하게 되는데, 반항자는 이 가치판단의 이름으로 자신의 조건에 동의하기를 거부한다.

주인에 항거하는 노예가 인간 존재로서의 주인을 부정하는 게아니라는 사실에 유의하자. 노예는 주인으로서의 그를 부정한다. 노예는 주인이 당연히 노예를 부정할 권리를 갖고 있다는 사실을 부정한다. 노예의 요구를 소홀히 여기고 노예의 요구에 응하지 않는 만큼주인은 실격된다. 만일 개인이 만인에 의해 인정되는 공통 가치를 누릴 수 없다면, 그때 개인은 다른 개인에게 불가해한 존재가 된다. 반항하는 자는 그 가치가 자기에게도 응당 인정되기를 요구한다. 이와같은 원칙 없이는 무질서와 범죄가 세계를 지배하리라는 사실을 알고 있기 때문이다. 반항 운동은 그에게 명중성과 통일성의 요구로 나타난다. 가장 초보적인 반역일지라도, 그것은 역설적으로 질서에 대한 갈망을 표현한다. - P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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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명의 주요 특징 중 하나가 절연성이라는 것을 누가 전에 이미 지적했는지는 모르겠다. 피부라는 막이 우리를 둘러싸고 있지 않다면, 우리는 죽는다. 인간은 주변 환경으로부터 분리되어 있는 한에서만 존재한다. 두개골은 우주여행자의 헬멧이다. 안에 머물러 있지 않으면 소멸된다. 죽음은 안을 벗는 것. 죽음은 밖에 닿는 것. 풍경과 섞인다는 것이 원더풀할지 모르겠지만, 그것은 연약한 자아의 끝이다.
불쌍한 프닌이 경험한 감각은 그렇게 안을 벗는 느낌, 그렇게 밖에 닿는 느낌과 아주 비슷했다. 구멍이 숭숭 뚫리는느낌, 공격당한다면 무너지리라는 느낌이었다. 그는 땀을흘리고 있었다. 겁에 질린 상태였다. 월계수 사이의 돌 벤치가 보도에 쓰러지는 것을 막아주었다. 그것이 심장 발작이었을까? - P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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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글을 쓰고, 잘라내고, 다듬고, 정화을 기하고, 가까이 다가서고, 표명한다. 그런 것이 나의 기쁨이다.
작가들은 ‘삭제‘ 혹은 ‘재단‘ 이라고 말한다.
정신분석가들은 ‘발음장애‘ 혹은 ‘거세‘ 라고 말한다.
생물학자들은 ‘세포의 자살suicides cellulaires‘ 이라고 말한다.
자연과학자들은 ‘식물의 세포 자살apoptoses végétales‘ 이라고말한다. 

문제는 늘 창조적 죽음, 다시 말해 끊임없이 재구성되는 삶, 즉 열기에 들떠 끓어오르는 위태로운 활동이며, 그것에 의해 삶은 마치 죽음이 삶 내부의 도구인 것처럼 열정적으로 죽음에 의존한다.

삶은 죽음으로 삶을 해석한다. - P113

나는 침묵 속에서 독서한다.
그리고 글을 쓴다. 글쓰기란 침묵 속애서 계속 책을 읽는 일이다.

글쓰기란 더 이상 우리에게 들리지 않는 그 무엇의 침묵 속에서 우리가 보지 않는 무엇을 읽는 일이다.

밤마다 나는 침묵 속에서 꿈을 꾼다.
새벽마다 나는 침묵 속에서 몽상에 잠긴다.
이것이 나의 위험한 삶이다.
........


나는 아침마다 허물을 벗믄다 - P1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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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니데이 2023-12-05 20:34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스텔라님, 올해의 서재의 달인과 북플마니아 축하드립니다.
따뜻한 연말 좋은 시간 보내세요.^^

스텔라 2023-12-05 21:18   좋아요 1 | URL
감사합니다. 풍요롭고 행복한 연말연시 보내세요♡

yamoo 2023-12-13 09:42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인용된 문구가 좋아서 눌러보니 키나르네요...
음...키냐르 작품 다 갖고 있는 줄 알았는데...
이건 최근 나온건가 봅니다.
얼른 방바구니에 넣었습니다!ㅎㅎ
 

책이 열린다.
독서는 싦을 향한 통로를, 삶이 지나는 통로를, 출생과 더 불어 생겨나는 느닷없는 빛을 더 넓게 확장한다.
독서는 자연을 발견하고, 탐색하고, 희끄무레한 대기에서 경험이 솟아오르게 한다. 마치 우리가 태어나듯이. - P13

fur(도둑)

‘세 글자로 불리는 사람‘, 이것이 도둑을 칭할 때 로마인들이 에둘러 사용했던 표현이다. 라틴어로 도둑이라는 명사는fur였다. 그런데 고대 로마인들은 자신이 언급하는 행위로부터 스스로를 지키려는 의도가 있는 한 감히 노골적으로 그 단어를 입에 올리지 못했다. 왜냐하면 그들은 고대 이탈리아 숲에서 멧돼지와 맞서 싸우며 살았고, 늑대들의 도움을 받았으며 심지어 암늑대들의 온정으로 최초의 두 왕이 생존했으므로 높은 하늘에서 맹금들이 말없이 자신들의 운명을지배했을 뿐만 아니라, 자신들이 지극히 미신을 믿는 나라를 세웠기 때문이다.

오직 고대 신부들만이 왕정시대에, 즉 숲의 시기에, 다시 말해 늑대와 멧돼지들이 출몰하고 맹금들이 선회하는 숲으로 뒤덮인 일곱 구릉시대에 의례적인 속담으로 그 단어를 말하곤 했다. "사고, 죽음, 행복, 사랑, 욕망, 꿈, 황홀경, 이런 것들은 시간의 흐름 속에서 밤의 도둑처럼 솟아오른다."
Sicut fur in nocte(밤의 도둑처럼).
왜냐하면 시간의 왕국들에서는, 다름 아닌 죽음만이 옛날에 유일한 왕이었기 때문이다.
죽음은 여전히 왕으로 남았다.

죽음은 세월의 왕이다. 

사람들의 거처로 찾아와 ‘furfurtif(은밀한 도둑)‘처럼 세상에서 노획물을 거둬들이고, 한밤중에 별장, 오두막, 궁전, 저택, 대성당, 교회, 지성소로 침입하는 Rex saeculorum (세월의 왕)이다.
나중에 신부들은 진짜 도둑에게 당할까 두려운 나머지 속담을 없애버렸다.
혹시라도 재물을 훔치는 자를 가리키는 단어를 계속 입에올리면 자신의 재물을 빼앗기게 될까봐 전전긍긍했기 때문이다. - P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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