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렌카, 당신에게 말하고 싶은 건, 인간이란 마치 자신의생활 전체를 직접 쓴 것 같은 책을 바로 옆에다 놓고도 모른채 살아가는 경우가 있다는 겁니다. 
이전엔 몰랐던 모든 것을,바로 지금 이 책을 읽으면서 조금씩 생각하고 발견하고 깨닫게 되었습니다.  - P109

 가난한 사람들은 변덕스러워요. 태어날 때부터 그렇습니다. 전에도 그렇게 느꼈지만, 지금은 훨씬 더 통감하고 있습니다. 가난한 사람은 성격이 까다롭습니다. 그는 이 세상을 남과 다르게 보고, 지나가는 사람들을 흘끔흘끔 곁눈질하고, 당혹스러운 시선으로 주변을 둘러보고, 혹시 누가 자기 말을 하진 않는지 말 한 마디 한 마디에 귀를 곤두세웁니다. 

예컨대, 저 사람은 왜 저렇게 볼품이없을까? 저 사람은 도대체 무엇을 느낄까? 이쪽에서 보면 어떻고, 저쪽에서 보면 어떨까? 바로 이런 거죠. 바렌카, 삼류 문사들이 글을 어떻게 쓰든 가난한 사람이 쓰레기만도 못한 취급을 받고, 누구한테도 존경받지 못한다는 점은 모두가 아는 사실입니다! 
삼류 문사들이 무엇을 쓰든 가난한 사람의 모든상황은 언제나 똑같을 겁니다. 어째서 늘 똑같을까요? 그들의 견해에 따르면, 가난한 사람은 모든  속내를 속속들이 뒤집어서 보여 줘야 하고, 또 가난한 사람은 성스러운 뭔가를, 그 어떤 자존심도 가져선 안 되기 때문입니다! 
- P1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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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해2. 국경이 통제 불능 상태다.
..
우선, 이입이 통제 불능 상태에 접어들 거라는 증거가 없다. 서구 사회가 경험한 이입과 정착의 수준이 수십 년 전 우리 대부분이 예상한것보다 더 높았던 것은 사실이다. 
하지만 대체로 노동력 수요에 따라 증가한 합법적 이입이었다. 노동력 수요와 합법적 이주 통로 사이에 커다란 틈이 있고, 이 틈 때문에 불법 이입이 상당수 발생했지만, 많은사람이 생각하는 만큼 대규모는 아니다.

하지만 우리가 주목할 가장 중요한 점은 이입이 우리에게 닥친 것(감내된 이입)이 아니라 대체로 이주 노동자를 모집한 정부와 기업의 적극적 노력에 기인한 것(선택된 이입)이라는 사실이다. 이주 노동자들이 공식적으로 ‘불청객‘이라는 누명을 쓰지만, 증거에 따르면 합법 이입과 불법 이입은 호전적으로 ‘불법 이주와 싸움‘이나 ‘밀입국과 싸움‘을 주장하는 정치적 수사가 암시하는 것보다 훨씬 더 ‘우리가 원한‘ 것이다.

현대 이주 노동자와 그 가족, 난민의 이입은 500년 넘게 무자비한 군사력을 앞세워 외국 땅을 침입해 점령한 유럽 식민주의자들의 침략이나 모험과 단순히 비교할 수 없다. 이런 비교에서 적나라하게 드러나는 것이 침략당한다는 오해다. 
이는 공황과 공포를 조장하려고 의도적으로 계획된 일종의 선동이다. 정부와 언론, 이주 기관은 서구가 포위되었다는 생각을 적극적으로 꾸며내고 재활용했다. 불법 이주를 논의하는 방식뿐 아니라 불법 이주 묘사 자체도 문제다.
- P7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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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소의 판단을 들은 이누카이는 어느 정도 동의했지만일말의 불안을 떨칠 수 없었다.
자진해서 불구덩이로 뛰어들려는 사람은 분명 적을 것이다. 그러나 발등에 불이 떨어지면 상식 밖의 행동을 보이는것 또한 사람이다. 그리고 사람은 욕심이 얽히면 대개 상식을 포기하기 마련이다. - P2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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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직 가정의 근거조차 갖추지 못했기에 이누카이는 입을 다물었다.
하지만 실행범 외에 범행을 유발한 장본인은 짐작이 간다. 닳고 닳은 통설지만 이번만큼 그것을 통감한 적은 없었다.

범인 중 하나는 틀림없이 ‘가난‘ 이었다. - P2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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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307 옮긴이의 글

1860년대의 과학적 토대에서 1960년대의 파리를 상상하고 쓴 소설을 2020년대에 서율에서 읽는다.

저자의 미래와 우리의 과거가, 상상 세계와 실제 세계가 ,하구와 리얼리티가 기억과 정보를 바탕으로 교차되고 결합된다.

[12장 여자에 대한 캥소나의 견해]
..
"그러니까 여자란 이미 사라진 종족이라는 당신의 원래 견해를 철회할 수 없다는 거군." 미셸이 빙긋 웃으며 말했다.

"이봐, 미셸. 19세기의 위대한 모럴리스트들은 이런 재난 상황을 예견했어. 그걸 알고 있던 발자크는 스탕달에 게 보내는 유명한 편지에다, 
‘여자는 열정이고 남자는 행동이다. 남자가 여자를 숭배하는 것은 바로 그 때문‘이라고 썼지. 
그런데 오늘날에는 여자와 남자 둘 다 행동이야.
프랑스에는 더 이상 여자가 없어."
- P200

"캥소나, 당신은 그러니까 결혼에 반대한다는 거지?"

"난 그저 이렇게 말할 수밖에 없어. 가정이 붕괴되고,
가족 구성원 각각의 이해관계가 서로를 흩어지게 하고 무슨 수를 써서든 부자가 되어야 한다는 요구 때문에 다정한 감정이 죽어버리는 이 시대에 결혼 같은 건 불필요하다고 말이야. 

지난 시대 작가들에 따르면 당시의 결혼은 전혀 다른 것이었던 듯해. 옛 사전을 뒤적여보면 가정이니 본가니 집이니 거처니 인생의 동반자니 하는 말들이 툭툭 튀어나오는 것에 놀라지 않을 수 없어. 
하지만 이런 표현은 이제 그 의미와 더불어 사라진지 오래야. 이제 사람들은 더 이상 그런 걸 필요로 하지 않아. 과거에는 ‘부부‘이 단어 역시 의미를 잃고 말았지가 친밀하게 생활을 공유했어. 다들, 여자의 충고는 대단한 게 아니지만, 미치지 않고서는 무시할 수 없다는 산초‘의 말을 기억하고 있었다고! 당시 사람들은 그런 말을 귀담아들었어.

 하지만 이제 얼마나 달라졌는지 봐. 오늘날에는 남편이 아내와 떨어져 살아. 모임에 참석해 거기서 점심을먹고 일을 하고 거기서 저녁을 먹고 거기서 즐기고 거기서 잠을 자. 아내는 아내 나름대로 일을 하고, 두 사람이 길에서 부딪치면 마치 남인 것처럼 인사를 나눈다고. 남편은 이따금 아내를 방문해, 월요일이나 수요일에 들르는 거지. 아내는 때때로 저녁 식사에 남편을 초대하고, 드물게는 저녁을 함께 보내. 

요컨대 오늘날 부부들은 거의만나지도 보지도 대화하지도 마음을 터놓지도 않아. 그저 자식을 낳아야 하기 때문에 서로를 필요로 하는 것뿐이지!" - P2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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