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랑스의 모럴리스트인 라브뤼예르는 이런 말을 남겼습니다.
"우리는 외부에서 행복을 찾는 데에 그치지 않고 굴종적이고 올바르지 않으며 정의와는 동떨어진, 미움과 전횡과 편견으로 가득찬 인간들의 판단 안에서 행복을 찾으려 한다. 대체 이게 무슨 미친 짓인가!"  - P35

바로 라브뤼예르가 꼬집었던 것으로, 타인은 어디까지나 타인에 불과하며 그들이 우리를 평가할 때 우리 자신과는 아무 관계도 없는 오직 그들만의 문제인 수만 가지 요인에 의해 그 평가가 왜곡되고 부정적이 된다는 사실을 잊어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자기 결정적 삶은 이러한 낯섦도 견뎌낸다는 것을 뜻합니다. - P36

좀 더 복잡한 형태의 자기 결정을 구체적으로 말하면 다음과 같습니다. 
자기 자신에 대해 비판적 거리를 유지하기, 각자 차별화된 자아상 만들어가기, 그 자아상을 마지막 순간까지 끊임없이 새롭게 고쳐나가며 발전시키기, 자기 인식을 넓혀가기, 자신만의 생각과 감정과 기억을 갈고 닦기, 소리 없이 이루어지는 타자의 조종을 명료히 꿰뚫어 보고 방어하기, 그리고 자기 목소리 찾기.  - P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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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위자가 모든 행위에서 우선적으로 의도하는 것은,
자연적 필요에서 행위하는 자유의지에서 행위하는 상관없이 자기 이미지를 드러내는 것이다. 따라서 모든 행위자는 행위하는 한 그 속에서 기쁨을 얻는다. 존재하는 모든 것은 자신의 존재를 원하고,
행위에서 행위자의 존재는 다소 강렬해지기 때문에, 필연적으로 기쁨이 뒤따른다. 그러므로 자신의 잠재적 자아를 드러내 보이지 못하는 행위는 행위가 아니다.
・단테 - P273

노동 (Labour, Arbeiten): 인간의 생물학적 삶에 상응하는 활동, 인간의 개체보존과종족보존처럼 생존의 필연성을 충족하기 위해 인간에게 부과된 활동의 표현이노동이다. 그러므로 우리가 지상에서 생물학적 존재로 살아가기 위해서는 노동을 할 수밖에 없다. 노동의 특징은 두 가지다. 하나는 인간의 생명과정도 자연의순환운동의 한 부분인 까닭에 무한히 반복한다는 것이며, 다른 하나는 죽어야만끝나는 노고와 고통‘과 결합되어 있다는 점이다.

노동하는 동물 (aminal laborans): 인간은 이성을 가진 존재라는 라틴어 용어 ‘이성적 동물 (animal mationale)에 대비되는 용어로서 인간은 생물학적 필연성에 구속되어 있기 때문에 노동을 할 수밖에 없다는 사실을 뜻한다. 사람은 노동하는동안에는 다른 사람과 구별되는 개체이기보다는 인류라는 종의 일원일 뿐이다.
그러므로 정치적 관점에서 해석하면 생존이라는 이해관계만을 가진 사회의 구성원들은 노동의 단순한 기능만을 수행하는 동물의 종으로 퇴보할 가능성이 크다. - P448

인간의 조건(human condition): 인간이 지구 위에서 실존하는 데 필요한 근본조건을 의미한다. 인간이 지구로부터 탈출하여 화성과 같은 다른 행성에서 살게되면 전혀 다른 조건에서 살아야만 하는 것처럼 아렌트는 이 개념으로 인간은근본적으로 "조건에 의해 제한된 존재" (conditioned beings, bedingte Wesen)라는 사실을 강조한다. 전통철학이 "나는 무엇인가?"라는 물음으로 인간을 다른동물과 구별해주는 ‘인간본성‘ (human nature)을 알고자 했다면, 아렌트는 ‘인간의 조건‘ 이라는 개념으로 "나는 누구인가?" 라는 물음에 답하고자 한다. 그러므로 인간의 조건은 우리의 삶과 지속적인 관계를 가지는 실존조건이다.

작업 (work, Herstellen): 인간의 비자연적 세계성에 상응하는 활동, 작업은 글자그대로 주어진 자연을 변형하여 인간에게 필요한 인공적인 사물들을 만들고 제작하는 활동이다. 장인과 예술가의 작품처럼 작업의 산물인 인공세계는 인간의유한한 삶을 초월하여 비교적 오랫동안 영속하는 특징을 갖고 있다.
- P450

행위(action, Handeln):
 ‘보편적 인간‘ (Man)이 아닌 ‘복수의 인간들‘ (men)이 지구상에 살며 세계에 거주한다는 사실에 상응하는 활동으로서 사물이나 물질의 매개 없이 사람들 사이에서 직접적으로 이루어진다. 행위는 정치적 삶의 필요조건인 ‘다원성‘ (plurality)에 부합하기 때문에 행위는 곧 정치적 행위다. 이런 점에서 아렌드의 ‘행위‘는 이와 유사한 다른 사회학적 범주들, 즉 ‘행동‘
(behaviour), ‘역할 수행‘ (role-playing), ‘업무 수행‘ (doing a job) 등과 구별된다. 사람들이 함께 사는 곳이면 어디에서나 존재하는 인간관계의 그물망 속에서말을 통해 자신을 드러내고 행위를 통해 새롭게 시작함으로써 인간세계에 참여하는 활동이 바로 ‘행위‘다.
- P4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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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비자 또는 노동자의 사회에서 삶이 쉬워질수록, 이 사회적 삶을 추진하는 필연성의 충동이 있다는 사실을 자각하기가 더 어려워진다. 필연성의 외적 현상인 고통과 수고가 눈에 띄지 않기 때문에 더더욱 그렇다. 이런 사회의 위험은, 이 사회가 증가하는 다산성의 풍요에 현혹되고 끝없는 과정의 원만한 기능에 사로잡혀 삶이 더 이상 자신의 무상함을 인식할 수 없다는 데 있다. 이 삶의 무상함은 "노동이 끝난 뒤에도계속 존재하는 어떤 영속적 주체 안에서 삶이 확고하게 자리를 잡고 스스로 실현할 수 없다"는 것이다.  - P2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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능력주의의 승리에 따른 피해 중 하나로 ‘고학력에 대한 대중적 지지가 줄어든 것‘을 들 수 있을 것이다. 한때 기회의 문으로 널리 받아들여진 대학 학위는 이제 (적어도 일부에게는) 학력주의자의 특권과 능력주의 오만의 상징이 되어버렸다. 오로지 교육만이 불평등의 해답이라 하는 사회적 상승 담론은 부분적으로 비난받는다. 대학 학위가 품격 있는 직업과 사회적 명망의 조건이라는 생각을 근거로 정치를 하니 민주주의는 훼손될 수밖에 없다. 이런 생각은 비대졸자의 사회적 기여를 폄하하며 사회의 저학력 구성원들에 대한 편견을 부추긴다. 그리고 노동계급 전체를 대의정부에서 효과적으로 배제한다. 그 결과 정치적 반격을겪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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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근대는 이론적으로 노동을 예찬했고 결과적으로 모든 사회를 노동 사회로 변형시켰다. 소원은 동화에서처럼 소원 자체가 좌절되고 실패하는 순간에 이루어진다.
노동의 속박에서 해방되어야 할 것은 노동자 사회다. 그런데 이 노동자사회는 해방을 위해 투쟁할 만한 가치가 있는 더 높은 차원의 더 의미있는 활동을 알지 못한다. 사람들이 노동의 방식으로 함께 살아가기 때문에 평등해진 이 사회에는 인간의 다른 능력을 회복시킬 수 있는 정치적 귀족이나 영적인 귀족 또는 어떤 다른 계급도 남아 있지 않다. 대통령이나 왕, 수상조차 자신들의 업무를 사회생활을 위해 필요한 직업의 관점에서 생각한다. 지식인들 가운데 생계를 위해서가 아니라 작업의 관점에서 일을 한다고 생각하는 고독한 개인들이 있다. 

우리는 지금 노동이 없는 노동자 사회, 즉 인간에게 남아 있는 유일한 활동이 없는 사회가 가능할 수도 있다는 상황에 직면해 있다. 이것이 최악의 상황이라는 점은 분명하다.
(중략)

우리는 마치 하나의 해결책이 있는 양 이 문제를 다루어서는 안 된다.
(중략)
이는 명백히 사유의 문제이다. 사유하지 않음, 즉 경솔하고 무분별하며 완전히 혼란에 빠져 있거나 아니면 하챦고 공허한 ‘진리들‘을 자기만족을 위해 되풀이하는 것은 우리 시대의 뚜렷한 특징처럼 보인다.
.....
"우리는 무엇을 하고 있는가" 를 생각해보자는 것이다. - P8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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