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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바생’ 아니고 ‘알바노동자’입니다 - ‘최저임금 1만원’을 외친 사회운동가 권문석을 기억하다
오준호 지음, 사회운동가 고 권문석 추모사업회 기획 / 박종철출판사 / 2018년 6월
평점 :
수능을 치르고 두어 군데에 지원서를 넣어두고
초조하게 결과를 기다리며
처음으로 ‘알바생‘이 된 곳은
다니던 학교근처의 주유소였다.
꽤 오래전 일이라 이제는 흐릿하지만
당시 기억에 의존하면, 주유소를 여럿 운영하던 사장이
문어발식으로 주유소를 늘린 탓에
경영은 어려워졌고,
나와 내 친구 둘은 처음으로 스스로 노동하여 번
두달치의 임금 중 한달치 정도를 떼이고 말았다.
지금 같으면, 고용노동부든 주유소 본사든 어디든
체불된 임금을 받으려 노력했겠지만,
세상공부에 들어간 밑천 쯤으로 여기고
원하던 학교의 합격통보를 받고
차츰 잊혀진 기억이 되었다.
(세월이 지나 남은 것은 셀프주유소에서
아주 능숙하고 멋지게 ‘총질‘을 한다는 거
아무도 알아주지 않는 그 능력 하나. )
다음 기억. 제법 상권이 발달한 국립대 앞 노래방
시급 1500원에 저녁식사로 컵라면 하나 제공.
바야흐로 노래방의 시대에 투입된 현장.
카운터에서 시간을 넣어주고,
놀다간 방의 마이크와 탬버린을 정리하고
음주가무의 흔적, 종종 만취음주가무의 현장을 수습하고
받았던 돈.
그 전과 후로 십여개 정도의 알바를 했고
가장 단기간에 관둔 일이었지만,
컵라면 하나 웃돈을 내어 제공한다며
‘알바노동자‘에게 생색을 냈던 사장 내외가 기억에 남는
노래방.
. . .
권문석,
대학시절부터 학생운동에 뛰어들어
알아주는 이 얼마없는 진보적 노동운동에 헌신한 인물.
급성 심장마비로 죽기 전날까지
알바노조 대변인으로서 최저시급 1만원이,
왜 당연히 우리나라 알바노동자들이 받아야만 함을
알리기 위해 동분서주한 사람.
때로 그 자신의 완벽주의가 동료활동가에게 상처를 주어
제법 일상의 안티들과 공생했던
신화와 같이 미화될 리 없어서 더욱
인간적이었던 인물.
그와 같은 사람들의 헌신이 있었기에
갖가지 반대논리와 협박에도 불구하고
최저임금과 기본소득의 개념이 한국사회에서
조금씩 자리잡고 있는 것이 분명하다.
그가 서른 다섯이하는 안타까운 나이에 세상을 등지고
그를 기억하는 사람들에 의해
노란색 표지의 이 책이 세상에 나와
이 새벽에 공연히
‘알바였던‘ 추억을 끄집어 내본다.
인간 권문석을 추모하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