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편과 함께 영화를 본다는 것은 예전에 포기했다.
방학 때나 아이들 맡기고 한 번씩 보면 그나마 다행이다.
혼자 영화 보는 것은 아직까지 용기가 없어서 못 한다.
주로 내가 볼 수밖에 없는 영화는 수퍼남매와 함께 보는 애니메이션이다.
어떤 맘들은 아이들만 극장에 데려다 주고 쇼핑을 하거나
다른 볼 일을 보기도 하더구만.
아직까지 수퍼남매가 못 미더워서 셋이 함께 보곤 한다.
내년쯤에는 둘만 극장에 들여보낼 수 있겠지?
하여튼 나에게 어울리는 영화를 보기는 일 년에 고작 한두번
그런데 어제가 그런 날이었다.
나에게 어울리는 내가 보고 싶은 영화를 본 것이다.
입소문을 타고 흥행가도를 달리고 있다는 <써니>가 바로 그 행운의 주인공이다.
딱 386아줌마 세대를 겨냥한 영화였다.
여자판 <친구>라고 이해하면 될 것이다.
80년대 중학교,고등학교를 다녔던 세대들은 아마 이 영화를 보면서 자신의 중학교, 고등학교 시절을 떠올리게 될 것이다.
김나미와 하춘화라는 가수 이름을 가진 여고생들이 써니라는 불량써클(?)을 만들어 생활하는 이야기를 담아내고 있는데
중간중간 폭소를 자아내고,
추억에 젖게 만들고,
눈물도 흘러내리게 만든다.
<과속 스캔들>을 만든 감독이라고 하니, 그 감독님은 대중의 마음을 잘 아는 것 같다.
적당히 웃기고, 적당이 울리는 재주를 지니셨다.
가장 재미 있었던 신은 유호정(나미)의 친정어머니가 입원한 병실에서
일일연속극을 보면서 대사 하나하나에 일희일비 하는 아주머니들의 모습이다.
일일연속극을 매일 시청하는 분들은 보면 정말 등장인물이 내뱉는 대사 하나하나에 맞장구를 치신다.
얼마 전 <동해야~>연속극도 시청률 40%가 넘은 걸로 알고 있다.
온갖 억지 스토리에 막장으로 치달아도 그것에 일희일비하는 시청자들이 있기에 일일연속극이라는 장르가 존재하는 것 같다.
우리 외할머니, 우리 어머니도 정말 일일연속극 좋아하신다.
매일매일 봐야한다는 것이 난 지겹더만....
고등학교 시절 누구나 한 번 들었을법한
전설로 떠돌던 불량써클 칠공주 이야기를 맛깔스럽게 잘 버무렸다.
그녀들이 쓰는 무기가 바로 그 무시무시한 면도칼이라는 것도 익히 소문으로 들리던 것들이다.
욕 싸움은 나도 초등학교 6학년 때 목격한 적이 있다.
그때 우리 친구들이 여덟명이었는데 남자 아이들과 한판 붙었다.
그때는 왜 남자들과 여자들이 사이가 나빴는지 모른다.
그런데 그 중에서 한 친구가 남자 대표와 철길을 사이에 두고 욕 싸움을 했었다.
우리 중에서 키가 제일 작은 친구였었다.
그때 세상에 태어나서 가장 많은 욕을 들었던 것 같다.
나미의 고향이 바로 벌교(고막의 고장)
나미가 소녀시대파와 벌교 사투리로 빙의들린 욕지거리를 퍼붓는 장면은 이 영화의 하이라이트가 아닐까 싶다.
생전 듣도 보도 못한 욕들이 무자비하게 쏟아져 나왔다.
모두 다 귀에 익은 음악들
눈에 익은 모습들이 영화 전편에 나오기에
참 편안하게 나의 추억을 되새기며 즐겁게 본 영화다.
부족함 없이 편안하게 살고 있던 나미가 -하지만 왠지 무료하게 보이는 나미-
말기 암환자 춘화를 만나면서 춘화가 보고 싶어하는 옛 써니를 하나하나 수소문하면서
꿈도 꾸지 않고 살던 자신의 인생도
예전에는 그런 역사가 있었던 나라고 말하는 장면은 마음이 짠했다.
꿈 많던 여고시절에는 무엇이나 가능하고 무엇이나 될 것 같았다가
이제 중년이 되어
주름이 하나하나 늘어나고,
남편은 대면대면하고,
아이들은 엄마에게 속사정을 말도 안 하고,
그렇게 혼자 외톨이가 되어 가는 것 같았던 나미.
지금 한 사람의 아내로서
아이들의 어머니로서만 존재하고
자신의 이름과 자신의 꿈을 잊은 채 어쩌면 나미처럼 무료하게 살아가는 우리 중년 여성들에게
예전에 가졌던 꿈을 다시 한 번 가져 보라고 격려해 주는 것 같다.
그리고 더불어
누구나 이 영화를 보면서 자신의 소중했던 친구들을 떠올려 볼 것 같다.
나의 중학교, 고등학교 시절 역사책을 함께 메워 줬던 그 친구들은 지금
무엇이 되어 있을까? 그녀들의 꿈을 이루었을까? 건강하게 잘 살고 있을까?
그녀들이 보고 싶다.
아쉬운 점이 있다면
역시나 돈이면 뭐든지 해결할 수 있다는 깔대기 같은 결론
춘화가 어머어마한 유산을 친구들에게 물려준다는 점
춘화 대신 새로운 써니의 리더가 된 나미가 굉장한 부자 사모님이라는 것과 얼굴또한 이쁘다는 것 등은
식상한 인상을 남긴다.
오래된 중학교, 고등학교 앨범을 꺼내 보고 싶게 만든 영화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