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공회대에서 노경실 작가와의 만남이 있어서 마들역에서부터 온수역까지 1시간 20분 지하철을 타고 성공회대 강의실에 도착하였다. 어제 눈이 온 터라 미끄러워서 얼마나 긴장하고 걸었던지....
도착해 보니 벌써 강의가 시작되고 있었다. 다행이도 작가님의 대표작들을 읽어 주는 시간이라서 휴~ 하고 안심이 되었다. <아빠는 1등만 했대요><얼굴>이라는 그림책을 다른 분들이 읽어 주셨다. 다음은 가장 애지중지 하신다는 얼마 전 출간한 그림책 <아빠와 함께 세상 구경>을 작가님이 직접 읽어 주셨다.

작가님의 진짜 이야기이고 주인공 이름도 30년 만에 처음으로 자신의 이름을 그대로 사용하셨다면서 수줍게 웃으셨다. 작가님은 그 유명한 58년 개띠로 나랑 띠동갑이셨다. 아버지와의 남다른 추억이 많고 아버지를 많이 사랑하셨다면서 이 책은 돌아가신 아버지에게 바치는 책이라서 더 애정이 간다고 하셨다.
작가님이 학교 들어 가기 전, 아버지와 같이 전차를 타고 나들이를 했던 그 날에 보고 듣고 느꼈던 모든 일들을 아주 생생하게 전해주는 따뜻한 그림책이었다. 나 또한 이 책을 마음에 두고 있었지만 아직 사지는 않았었는데 이 책이 만들어진 배경과 비하인드 스토리, 그리고 그림에 들어간 정성-그림작가가 일일이 촛농에 물감을 떨어뜨려 마치 수도를 하는 기분으로 하나하나 작업함-을 들으니 꼭 사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와는 12년의 차이가 있지만 작가가 들려 주는 이야기는 낯설지 않았고 친근하기만 했다. 아버지와 구경을 끝내고 손을 꼭 잡고 돌아오는 길에 갑자기 시커먼 손이 튀어나오며 어린이가 구걸하는 장면, 나환자들이 많이 돌아다니던 것 까지 흡사하였다. 마지작 장면은 작가의 철학이 담겨 있는 심오한 장면이라면서 설명을 해 주셨다. 특별히 그림 작가님께 하룻동안 본 모든 것들이 다 들어갈 수 있도록 주문 하셨다고 한다.

작가가 그토록 마지막 장면에 애착을 가졌던 이유는 그날 하루 경실이가 봤던 세계를 보여줌으로써 경실이가 살아갈 세상이 판타지 같기도 하지만 또 100% 현실이란 걸 보여 주고 싶었다고 하신다. 이제 세상 속으로 나가야 하는 우리 어린이들에게 세상은 판타지처럼 멋진 장면이 펼쳐질 수도 있지만 또 때론 갑자기 튀어나온 걸인처럼 힘들고 슬픈 장면을 볼 수도 있는 곳임을 알려 주고 싶었다는 작가님의 설명이었다. 그래서 제목이<세상 구경>이 되었구나 싶었다. 세상은 화려하고 좋은 것만 존재하는 게 아니고 어둡고 힘들고 나쁜 일도 존재하는 곳이므로.
아빠와 함께 한 행복한 나들이를 잊어버리지 않고 고스란히 기억 속에 간직했다가 이렇게 끄집어 내어 50년이 지난 지금 한 편의 흑백 영화처럼 멋지게 만들어 우리에게 들려 주는 작가의 섬세함이 느껴지는 좋은 작품이었다. 본인 아이큐가 129라고 하시던데 취학전 일을 이렇게 자세히 기억하고 계신 걸 봐서 기억력이 굉장히 좋으신 것 같다. 유달리 아빠와 관련된 작품이 많은 이유는 아버지와 큰딸로서 정말 유대감이 강하셨다고 한다. 아버지는 아버지로 존재하는 것으로만도 충분하다는 작가님의 말씀이 마음에 와닿는다. 재벌 아버지, 부자 아빠. 능력 있는 아빠가 아니더라도 나의 아버지이므로 그것만으로 충분하다는 것. 딸에게 그런 고백을 듣는 작가님의 아버지는 저 하늘 나라에서도 행복하실 것 같다.
잠시 쉬는 시간! 기회가 왔다 싶어 준비해 간 <열네 살이 어때서?>를 들고 가서 작가님게 사인을 부탁했다. 흔쾌히 사인을 해 주시고 이름을 잘못 쓰셨다면서 책 한 권을 선물로 주셨다. (물론 같은 노씨라는 말도 잊지 않고 해 드렸다. ) 작가님이 주신 책은<철수는 철수다>로 청소년 소설이었다. -읽어 보니 엄청 재밌다.- 작가님은 요즘 들어 청소년 소설 쪽을 많이 쓰시는 것 같다. 지금도 교보문고에 청소년 소설을 연재한다고 하시니 한 번 가봐야 겠다.
다음 시간은 질문과 응답 형식으로 이어졌다. 미리 오신 분들이 포스티 잇에 질문을 적어 놓으신 걸 하나 하나 읽으시면서 거기에 대한 답을 해 주셨다. 작가님의 진솔한 삶의 이야기들을 들을 수 있어서 값진 시간이었다.
이혼하시고 혼자 사신다는 말씀 쉽지 않으셨을텐데 당당히 말씀해 주시고, 작가가 되었던 과정도 숨김 없이 말씀해 주셨다. 특히 고등학교 때 셋째 여동생이 작가님의 품안에서 생을 마감하셨다는 얘기는 정말로 가슴이 아팠다. 자신의 품안에서 죽어가는 동생을 보고 그 뒤로 많이 힘들었고 방황도 많이 하셨다고 한다. 원래는 퀴리 부인 같은 과학자가 되려고 하셨지만 동생의 죽음 이후 그 동생의 이야기를 언젠가 꼭 써야 한다는 생각이 들어 진로를 작가로 바꾸셨다고 한다. 그래서 서울 예대 소설창작과에 들어가셨다고 한다.
그 뒤 우연히 쓴 처녀작이 신춘문예에 당선되어 그 길로 작가 본연의 길에 들어섰다고 하셨다. 등단 후 박완서 님, 권정생님과 소중한 인연을 갖게 되었고 아버지가 돌아 가신 후로는 가장으로서 생계를 유지하기 위해 글을 쓰셨다고 하신다. 그 후로 동화보다 소설을 쓰고 싶어서 소설도 몇 편 쓰셨고 이혼 후에는 우울증도 앓고 몸이 굉장히 안 좋아지셨다고 한다. 그래서 마지막 끈을 잡기 위해 출판사를 찾아가 정기적으로 출근할 수 있게 기획실에 넣어 달라고 부탁을 해서 출판쪽 일도 하시게 되었고 지금은 출판사 사장님도 하시고, 번역도 하시고, 아트 디렉터도 하시고 이 쪽 분야에서 안 해 본 일이 없다고 하셨다. 그래도 소설이 아니라 동화를 쓰는 게 진짜 다행이라고 생각하신다고 하신다.
특히 영어권 책 번역도 자주 하시는 데 거기에 얽힌 이야기는 귀감이 될 만한다. 영어를 제대로 배운 적도 없으신데 번역이 엉망인 책들이 많아서 영어 공부를 하기 위해 영어로 된 <죄와 벌>을 사서 무조건 읽었다고 한다. 그렇게 시작한 영어가 이제는 번역을 할 정도가 되었다니 작가님의 열정과 끈기를 알 수 있는 에피소드였다. 참고로 작가님이 가장 좋아하는 작가는 도스토예프스키이고 <가난한 사람들><죄와 벌> 그리고 <까라마조프의 형제들>을 가장 좋아한다고 하셨다.
작가가 되고 싶어하는 어린이들이 있다면 무조건 많이 읽고, 보고, 써야 한다는 조언을 해 주셨다. 그리고 항상 감각이 예민해 있어야 삶에서 주제를 잡아 스토리를 구성할 수 있다고 하셨다. 그리고 이야기는 캐릭터 설정이 아주 중요하단 말씀도 해 주셨다. 작가님은 만나는 사람, 사물, 사건,풍경 등을 그냥 지나치지 않고 메모를 꼼꼼히 해 두셔서 나중에 그 작은 기억 하나로 이야기를 만들어 내신다고 하셨다. 모든 일상의 삶이 이야기의 테마가 된다는 말씀. 명심해야지. 아! 그리고 작가라는 직업이 하루 종일 엉덩이를 붙이고 앉아 글을 써야 하기 때문에 자기관리가 철저해야 한다고 하셨다. 안 그러면 우울증도 걸리고 금세 몸이 망가져서 안 된다고 하셨다. 그래서 시간관리, 건강관리, 감정 관리 이 세 가지를 꼭 잘해야 한다는 말씀!!! 감정관리가 잘 안 된 작가들의 말년이 비참하게 끝난 경우가 많다고 들었다. 버지니아 울프는 돌을 몸에 달아 호수에 빠졌다고 하고 도스토예프스키도 도박 중독에 빠졌다고 한다. 그만큼 작가라는 직업이 고독한 작업이므로 자기관리가 굉장히 중요한 것 같다.
마지막 질문 시간이 있어서 작가님께 질문을 드렸다. <상계동 아이들>을 감명 깊게 읽어서 그 아이들이 어떻게 되었는지 궁금하고 혹시 후편을 쓸 계획은 없으신지 물어 봤다. 그런데 작가님이 들려 준 이야기는 안타까운 소식뿐이었다. 그 상계동 아이들 중에서 윤아만 동시통역사를 하고 있고 만화가를 하겠다던 형철이는 잘 풀리지 않았고, 정신박약아였던 형일이는 어머니가 아들을 목졸라 죽이고 그 어머니 또한 세상을 떠난 상태라서 그들의 이야기를 쓸 수가 없다고 하셨다. 그들이 어딘가에서 희망을 잃지 않고 잘 살고 있기를 바랐는데 안타까운 소식을 들으니 정말 마음이 착잡하다. 그런데 더 착잡한 것은 작가님 앞으로 상계동 사람들이 항의를 그렇게 많이 한다는 거다. 상계동에서도 판사, 검사, 의사 나오는데 왜 이리 못 사는 가난한 동네로 책에 쓰냐면서 댓글을 단다고 말이다. 참~ 어이가 없다. 상계동 아이들의 아픔을 이해하기는 커녕 자신들이 사는 곳의 이미지가 실추될까 봐 아님 부동산 값이 하락할까 봐 그런 항의를 하는 집단 이기주의에 사로잡혀 사는 사람들은 마이클 샌델의 <정의>특강을 꼭 한 번 들어봤음 한다. 그런 논리로 말한다면 우리 나라가 가난했던 시대의 이야기는 한 편도 나오면 안 되고 식민지 시대의 이야기는 교과서는 물론 어디에도 나오면 안되겠네. 왜? 그런 이야기 해 봤자 우리 나라 이미지 실추되고 지금은 통신강국 대한민국으로 잘 사니까 옛날 암울했던 시대의 이야기는 굳이 하지 않아도 된다는 이 논리 아닌가?. 정말 어처구니가 없다.
작가님의 글을 쓰는 1차적 원동력은 바로 가족이라고 하셨다. 그리고 둘째 문서 선교사에 대한 비전이 있다고 하셨다. 그리고 꼭 쓰고 싶은 책은 바로 CS루이스의 소설<나니아 연대기>같은 판타지 소설을 우리 나라에 맞게 쓰고 싶다고 하셨다. 어린이들을 위해서 말이다.
3시간 가까이 진행된 작가와의 만남이 전혀 지루하지가 않았다. 서문에서 작가님의 생각과 삶을 짧게 짧게 만나긴 하지만 이렇게 직접 얼굴을 맞대고 작가의 육성으로 들려 주니 작가가 바로 내 이웃이 된 기분이 들었다.
강의가 끝나고 작가님이 가져 오신 책을 선물로 주신다고 하셔서 시후에게 어울리는 그림책 <얼굴>과 시아에게 어울리는 < 엄마, 내 마음 아세요?> 라는 책을 골랐다. 당연히 작가님의 친필 사인을 받아 왔지.
마들역에서 온수까지 먼길이었지만 오며 가며 전철 안에서 책을 읽을 수 있어서 행복했고 작가님의 들려 주신 자신의 삶의 이야기를 통해 나도 안테나를 세우고 모든 것을 지나치지 말아야 겠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지금 내가 하는 일 서평 쓰는 것 또한 아주 소중한 일임을 작가님이 격려해 주셨다. 현재 어린이책 평론가가 없다고 한다. 그래서 평론가가 나와야 어린이책 분야가 살 수 있다고 하셨다. 평론가는 아니지만 이렇게 리뷰라도 열심히 해서 어린이책이 부흥할 수 있도록 기여하고 싶다.
집에 오는 지하철 안에서 <철수는 철수다><얼굴><엄마, 내 마음 아세요?>를 모두 읽어 봤는데 진짜 재밌다. 그 리뷰도 얼른 올려야지. 그게 내가 할 수 있는 최선의 길이니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