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활하다는 느낌이 들 정도로 넓다란 인천공항에 비해 홍콩공항은 엇갈려 움직이는 비행기들의 날개가 서로 닿지 않을까 걱정될 정도로 작아 보였다. 나를 태운 런던행 비행기가 지상을 천천히 달리다가 활주로 출발선 근처에서 멈추었다. 활주로를 힘차게 달리던 다른 비행기가 막 하늘로 날아오르는 광경이 보인다. 내가 탄 비행기는 계속 멈춰 있다. 기내의 작은 창문 시야 안으로 또 다른 비행기가 들어온다. 아직 우리 차례가 아닌 것이다. 그 비행기가 하늘로 떠나고 나자 우리 차례가 왔다. 비행기가 커다란 반원을 그리며 대기선으로 다가 간다. 그리고 다시 멈춘다. 숨을 한번 가다듬은 후 커다란 굉음과 함께 달리기 시작한다. 그런데 속도가 별로 나지 않는 것 같다. 이 정도 속도로 이 육중한 물체가 날아오를 수 있을까 의심하는 순간, 이런 순간은 언제나 결정적인 순간이다, 동체가 고개를 쳐드는가 싶더니 이내 뒷바퀴가 땅에서 벗어나는 느낌이 왔다. 동체에 위태롭게 붙어 있는 기다란 날개가 출렁이는 것이 보인다. 약간 떠올랐을 뿐인 것 같은데 고도가 더 오르지 않는다. 미세조정이었을까? 이내 가상의 비탈길을 힘있게 타고 오른다. 이제부터는 거칠 것이 없다.

과학은 마술임에 틀림없다. 이 크고 무거운 물체가 공중으로 떠오를 수 있다는 것은 전혀 과학적이지 않다. 뭔가 속임수가 있을 것이다. 누군가 마술을 부렸을 것이다. 만일 그 누군가가 신이라면 마술이란 곧 기적일 것이다. 나는 갈릴레오의 망원경을 통해 달의 분화구를, 목성의 위성을, 토성의 띠를 본 고전파 학자들이 내뱉었다는 말을 이제 이해한다. "나는 보았지만 믿지 않는다." 그것은 건전한 상식의 말이다. 그러나 우리가 본 것은 우리의 상식을 초월한다. 동체가 조금 흔들린다. 창 밖을 보니 온통 하얗다. 비행기가 얕게 떠있던 구름 무리를 빠르게 헤치고 있다. 곧 눈 아래로 구름들의 풍경이 펼쳐진다. 그 풍경의 광대함과 무한한 다양성은 나의 상상력을 초월한다. 나는 시인이 아니다. 저 무한함을 언어로 묘사할 힘을 갖고 있지 않다. 나는 화가가 아니다. 그러나 화가의 상상력이 저러한 자연을 낳을 수 있으리라고는 생각할 수 없다. 인간의 상상력과 창조력이 인간의 힘을, 그 능동성을 표현해 주는가? 그렇지 않다. 엄격한 의미에서 인간의 상상력과 창조력은 인간의 무능을 드러낼 뿐이다. 인간은 상상하고 창조할 수 없다. 우리는 우리가 본 것만을 상상하고 만들수 있을 뿐이다. 즉, 자연을 한껏 모방하는 것을 우리는 상상이라고 하고 창조라고 하는 것이다. 인간의 힘은 실재를 창조하는 데 있는 것이 아니라 실재를 재창조하는 데 있다. 그러므로 엄격한 의미에서 그것은 우리가 만들어 낸 것이 아니다. 우리가 우리의 피조물을 앞에 두고 놀라워 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내가 만든 스프지만 정말 맛있지 않아?" 그것은 마술과 같은 순간이다.

구름 지대를 지나자 홍콩의 세부가 눈에 들어온다. 가느다란 관들의 곳곳에 부풀어 있는 데가 보인다. 그 부풀어 있는 곳에 위를 향해 긴 육면체의 막대들이 촘촘히 심어져 있다. 인간의 언어로 빌딩이라고 부르는 것들이다. 홍콩에 기식하는 개체들의 밀도는 매우 높다. 그러므로 개체들을 수용할 표면적을 높이기 위해 빌딩들은 위로 길어져야 한다. 개체들에게 영양을 공급하기 위해서는 넓다란 녹색의 영역이 존재해야 한다. 인간의 언어로 그런 영역을 경작지라고 한다. 그런데 놀랍게도 홍콩에는 그런 영역이 존재하지 않는다. 그렇다면 저 밀집된 개체들은 도대체 어떻게 생존을 유지할까? 창 안으로 쏟아져 들어오는 햇빛이 부담스러워 창에 가리개를 했다. 이제 뭘 해야 하나? 비디오를 켰다. 리모콘을 이것 저것 눌러본다. 마땅한 것이 없다. 잠을 청하려 한다. 자리가 불편하다. 엉덩이가 아프다. 뒤척이다 비디오를 보다 기내식을 먹다 창을 열고 대기를 바라보다를 반복했다. 그러다 문득 창 아래로 수면과 평행하게 얇은 판처럼 보이는 희뿌연 수증기 덩어리가 빠르게 움직이는 것이 보였다. 그리고 그 아래로 희미한 구조물들이 보인다. 해면과 동일한 평면에 있는 것처럼 보인다. 아니, 얇은 수증기들의 판 아래에 있어서 물에 잠긴 것처럼 보인다. 녹색 영역과 옅은 갈색의 영역이 패턴을 이루며 짜여져 있다. 넓다란 다각형 형태다. 개체들의 밀집도가 높다고 알려진 구조물들도 보인다. 홍콩의 것들보다 밀집도는 높고 높이는 훨씬 낮다. 덴마크 상공을 지나고 있는 중인 것 같다. 어느새 구대륙이다. 오래된 대륙이란 뜻이다. 위를 향해 긴 육면체들이 높은 밀도로 나타나는 곳은 주로 신생 조직들이다. 예를 들면, 홍콩, 상하이, 싱가폴 그리고 서울과 같은. 영국은 구대륙에 있다. 여정이 얼마 남지 않았다.

길고 긴 낮이 계속되고 있었다. 서쪽을 향해 빠르게 날아가는 인간의 비행기를 태양이 미처 따라잡지 못하고 있다. 나는 미련하게도 자연의 힘을 믿었다. 결국 태양은 나를 따라잡으리라. 그러면 밤이 오리라. 그 밤은 짙을 것이고 그 짙음이 펼쳐주는 무대 위로 지상에서는 볼 수 없는 수많은 별들이 비싼 보석처럼 내 가슴으로 쏟아져 들어오리라. 그것은 운명과 같으리라. 우리는 운명의 검은 힘에서 무수한 찬란을 발견하게 되리라. 그러나 브리튼 섬에 상륙할 때 운명이 내게 보여준 것은 기울어져 가는 태양의 작은 선물, 오렌지 색깔로 휘날리는 옅은 수증기 덩어리였을 뿐이다. 둥근 지구의 윤곽을 이루는 수평선을 가리고 있는 구름들에 노을이 지고 있었고 아직은 충분한 빛 아래서 브리튼의 땅이 보였다. 다각형의 녹색 영역과 갈색 영역이 곳곳에 펼쳐져 있고 높이가 낮은 구조물들이 높은 밀도로 여기 저기 모여 있다. 구대륙의 전형적인 패턴이다. 비행기는 엔진을 끄고 오래된 도시를 향해 하강하기 시작했다.

이제 출입국 심사대만 통과하면 된다. 출입국 심사에서 입국을 거부당했다는 사람 얘기를 들은 적이 있어서 살짝 긴장이 되었다. 두툼한 외투를 입은 여자가 바닥에 내려놓은 가방을 향해 손을 내민다. 내 차례다. 나는 젊고 마르고 대머리인 남자를 향해 걸어갔다. 푸친같이 생겼다. "여기 오기 전에 뭘 했죠?" "용접이요." 그러자 푸친이 내 눈을 똑바로 쳐다보았다. "여기선 용접하면 안됩니다." 나는 어이없다는 듯이 너털거리며 "Of course..." 라고 했다. 사실은 "Of course ye..."까지 발음했고 s 발음을 급히 빨아들였다. 하마트면 "당연히 용접일 할 겁니다."라고 대답할 뻔 했다. 푸친은 나를 빤히 쳐다보더니 단호하게 내 서류 하나에 도장을 꽝 찍었다. 나는 그저 무심한 척 무거운 짐꾸러미를 들고 매고 입국 심사대를 빠져 나갔다. 입국장 라운지에는 m이 나를 픽업하기 위해 기다리고 있었다. 나는 "It's been a long time since we met and..." 하고 사이를 띄운 후 "...kissed." 라고 말할 참이었다. 그리고는 이렇게 덧붙이면 재미있을 것 같았다. "한국에서 출국할 때 튜브 용량이 100g이 넘으면 안된다고 치약을 뺏어갔어. 내 치약이 120g이었거든. 그래서 기내에서 20 시간 동안 세 끼 식사를 하면서도 양치질을 한번도 못했다." 그러면 m은 인상을 찌푸릴 것이고 나는 그걸 즐거워 하겠지. 그러나 m을 만나는 건 너무도 오랜 만이었다. 우리 사이엔 긴 비행에서 온 피곤함같은 어색함이 있었다. 주위를 둘러 보았다. m의 차를 타고 가면서도 그랬다. 영국은 오래된 건축물처럼 보였다. m은 실제로도 그렇다고 했다. 여기는 구대륙이 맞는 거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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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RINY 2011-08-19 22:2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영어의 부정문에 대한 답변은 늘 어렵습니다. 제대로 대답한 적이 거의 없는 거 같습니다.

weekly 2011-08-21 07:19   좋아요 0 | URL
예 부정문 잘못 사용했다가 입국 거부 먹을 뻔 했습니다.^^
 

홍콩이다. 아마 홍콩국제공항일 것이다. 영국 가는 길에 중간 경유지로 들른 차다. 두 시간쯤 있다가 런던행 비행기에 오를 것이다. 스케쥴이 약간 밀려서 조금 긴장되어 있는 상태다.

주위를 둘러본다. 공항 청사의 거대한 유리창 너머로 보이는 산들, 구름들, 그리고 하늘. 전혀 낯섬이 없다. 아이들이 장난치는 모습이나 그걸 염려한 아버지가 아이들에게 뭐라고 얘기하는 모습도 매우 낯익다. 젊은 여자들의 옷차림? 내가 한국을 떠나있다는 사실을 일깨워 주기엔 턱없이 부족하다. 

물론, 언어가 있다. 내가 이해하지 못하는 언어들이 구름을 이루며 떠다닌다. 그것들은 벽이나 간판에, 내가 앉아 있는 의자에 들러붙어 있다.

그러나 어쨌든 이곳은 중간 기착지일 뿐이다. 나는 사람들이 천천히 움직이는 모습, 비행기 동체에 칠해져 있는 조잡해 보이는 색깔들, 딱 한국 아이처럼 생긴 아이 입에서 튀어나오는 외국어들을 풍경처럼 바라본다.

그렇지만 역시 언어가 문제다. 더 정확히 말하면 영어다. 아까 비행기를 타고 있을 때 스튜어디스가 와서 식사로 무엇을 선택하겠느냐고 물은 것 같았다. 나는 한 마디도 알아듣지 못했다. 그래서 그냥 "누들?" 이라고 말했다. 그랬더니 스튜어디스가 "오, 누어들?" 이러면서 음식 꾸러미를 내 앞 테이블에 차려 주었다. 맛있게 먹었다.

조금 있으니 또 다른 스튜어디스가 와서 커다란 쥬스통들을 가리키며 뭐라고 했다. 오렌지 쥬스와 사과 쥬스가 내 눈에 들어왔다. 뭐라고 물었는지 전혀 알지 못했지만  또박또박 "오렌지"라고 대답해 주었다. 그러자 그 스튜어디스는 "오, 어뢴지." 하며 오렌지 쥬스를 내 잔에 따라 주었다.

조금 있으니 또 다른 스튜어디스가 왔다. 아마 커피 먹으라는 소리같았다. 나는 "Yes, please." 라고 했다. 스튜어디스가 커피를 따르려다 내가 차컵을 음식 먹느라고 이미 써버린 것을 보더니 "I will brought one."이라고 했다. 오늘 내가 처음 알아 들은 영어인데 문법이 심상치 않다. 물론 커피를 마실 수 있었으니 되었지만 말이다.

생각해 보니 영국에 건너간다 하면서도 영어 공부한 것이 거의 없다. 아이폰에 쓸만한 영어 사전 앱을 몇 개 다운로드받은 것이 영어와 관련하여 가장 집중력 있게 한 일인 것 같다. 지금은 슬슬 입국심사가 걱정이 된다. 조금 아까 웹에서 찾아보니 별 게 없긴 하더라. 물론, 음료를 어떤 것으로 할 것이냐를 묻는 말도 별 것 없는 것이었으리라.

내가 가장 잘 하는 일은 손으로 물건을 집고 코를 풀고 하품할 때 입을 가리는 것이다. 그런데 내가 갈 곳에서는 그걸 발로 하라고 요구한다. 그곳 사람들은 콧구멍을 팔 때 새끼 발가락을 사용하기 때문이다.

가장 중요한 것은 이제 손을 사용하지 않는 일일 것이다. 나는 기내에서 읽으려고 들고 다니던 괴테의 "파우스트"를 짐짝에 넣어버렸다. 그러나 이 블로그, 이 기록들만 예외로 하자는 유혹은 뿌리치기가 힘들다. 그렇지 않으면 내가 아예 벙어리가 될 것이므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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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BC 스페셜 "안철수와 박경철 2"를 보았다. 텔레비젼을 향해 고개를 잔뜩 내밀고 때로는 흐뭇한 미소를 지으며 때로는 껄껄 웃으며 그 시간을 즐겼다. 참으로 존경스러운 분들이다.

인상 깊은 장면들이 많았다. 지리산에 있는 어느 고등학교 학생들이 또박또박 질문하는 모습이 예뻤다. 어느 남학생이 이병철의 인재론을 얘기하자 두 분 중 한 분이 그 이면을 얘기해 주는 장면에선 부드러운 긴장감을 느꼈다. 이름만 직접 대지 않았지 이명박식의 하면 된다는 논리를 반박해 주는 장면에선 이 스페셜의 담당 PD의 용기가 고마왔다. 박경철씨가 딸과 부비부비 하는 사진들을 보면서는 그냥 꽉! 딸을 낳고 싶어졌다.^^

가장 좋았던 것.
보통 진보적(?)인 성향의 인사들은 비주류로 도는 경우가 많다. 그래서 많은 경우 비주류에서 비롯되는 찌질함이나 아마추어적인 모습이 심하게 노출된다. 비주류, 찌질함, 아마추어성 등에서 귀결되는 것은 현실적인 힘의 부재다. 그네들의 현실적인 영향력은 그네들만의 작은 동호회 안에서 부비부비로 끝나는 경우가 많은 것이다.

그런데, 특히 안철수씨의 가장 존경스러운 점은 그가 철저하게 자신의 경력을 관리해 왔다는 것이다. 이번 방송에서 보니 안철수씨는 서울대의 한 기술대학원의 장으로 취임했다고 한다. 그의 사고나 발언은 지극히 상식적이지만 한국의 주류 집단에서는 쉽게 찾아볼 수 없는 것들이다. 안철수씨는 주류 집단의 한가운데서 비주류의 목소리를 내고 있다. 비주류의 찌질함에 물들지 않은 신선한 목소리로 말이다.

안철수씨는 새로운 롤 모델을 제시하고 있다. 만약 우리가 진보를 꿈꾼다면 우리 자신을 쉽사리 비주류로 좌천시켜서는 안된다. 그것은 현실적인 힘을 포기하는 것과 같기 때문이다. 그러면 안철수씨가 스스로를 주류의 핵심 안으로 깊숙히 밀어넣을 수 있었던 힘은 무엇이었을까? 그것은 두 말할 필요없이 그의 실력일 것이다.

이상을 부르짖으며 제도의 벽에 좌절하다 비주류로 장을 옮겨 투쟁하는 것보다 주류 안에서 주류들 이상의 실력을 증명하면서 살아남아 발전해 가는 것이 훨씬 더 힘든 일일 것이다. 안철수씨는 훨씬 더 힘든 길을 갔고 그런 방식으로 성공(?)하는 모습을 보여주었다. 안철수씨와 같은 방식으로 성공하는 사람들이 더 많이 나올수록 우리 사회는 더 나아져 갈 것이라는 생각을 했다. 그것은 진보와 합리를 추구하는 사람이라면 더 높은 실력을 확보해야 함을 뜻하는 것일 테다. 더 이상은  아마추어리즘을 용납해서는 안된다. 더 이상은 찌질함을 용납해서는 안된다. 더 이상은 비주류적인 투덜댐을 용납해서는 안된다. 더 이상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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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내가 가장 좋아하는 형이상학에 대한 정의는 "형이상학은 정교한 시"라는 것이다. (출전은 기억나지 않는다) 형이상학은 일차적으로 시이기 때문에 형이상학은 제일철학일 수 없다. 그러므로 당연히 형이상학을 모든 학문의 주춧돌로 삼고자 하는 시도들은 유치하거나 순진하거나 시대착오적인 것이다. (라고 나는 생각한다)

그러나 형이상학은 정교하여야 한다. 가능한 세계의 구석 구석을 다 포괄하여야 하며 정합적이어야 하며 구체적인 현실 앞에서 힘을 잃지 말아야 한다. 그러한 것을 기준으로 우리는 형이상학에 대해 논할 수 있고 더 나은 형이상학을 선택할 수 있고 더 나은 형이상학을 꾸밀 수 있다. (물론 절대적인 의미에서 그렇다는 것은 아니다)

그럼에도 형이상학은 시다. 이 말의 의미는 형이상학이 궁극적으로 기반하는 것은 어떤 특정한 경험, 체험이라는 것이다. (당연히 감각적 경험을 말하는 것은 아니다) 나는 그러한 경험들을 형이상학적 경험이라고 부르겠다. 이 말이 너무 크다면 철학적 순간이라고 부르겠다. 그리고 일반적인 의미에서의 형이상학이란 형이상학적 경험을 절대화한 것이다. 내가 생각하기에 형이상학의 강력함은 형이상학적 경험의 보편성과 고유성에서 나오는 것 같다. 이 말에는 어폐가 있어 보인다. 그러나 전혀 그렇지 않다. 예를 들어 우리가 어떤 문학 작품에서 강렬함을 느낀다면 그것은 그 작품이 우리가 보지 못하던 새로운 장면을 제공해 주기 때문일 것이다. 이것이 그 작품의 고유성이다. 우리는 그 작품에서 강렬함을 느낄 뿐 아니라 그것을 나 자신의 경험으로 수용할 수도 있을 것이다. 작품의 이러한 설득력이 보편성이다.

그러므로 이론적 형이상학의 관건은 독특한 체험과 보편성 사이에 굳건한 다리를 놓는 것이다. 이 다리 놓음이 곧 형이상학의 정교함이다.

체험과 이론 사이에 다리를 놓는 작업은 보통 철학자가 한다. 이 작업은 굉장히 아슬 아슬하다. 철학자는 자기가 말할 수 있는 만큼만 말하여야 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보통은 실패한다.

2. 리처드 파인만은 대중적으로 가장 인기있는 과학자 중 한 명일 것이다. 그에 대한 나의 첫인상 중 하나는 그가 철학적으로 깊이 있는 물리학자라는 것이었다. 철학을 논하지 않는 물리학자의 글에서 철학을 발견한다는 것은 그 과학자가 지극히 철학적이라는 뜻이리라. 나는 파인만이 지극히 철학적이라고 생각했다.

오, 그런데 이정우씨는 전혀 반대로 생각하고 있었나 보다. 우연히 서핑을 하다가 읽게 된 글(http://blog.aladin.co.kr/799807193/1049435)을 보면 이정우씨는 리처드 파인만 등의 미국 과학자들을 거의 증오하는 것 같다.^^ (그럼 무엇이 그를 그토록 감정적으로 만들었을까? 절대로 철학적 이유는 아닐 것이다^^)

철학적 문제의 깊이를 파악하지 못하는 무능을 몰철학적이라 부른다면 파인만은 전혀 몰철학적인 사람이 아니다. 파인만은 단지 반철학적일 뿐이다. 그리고 반철학적인 것은 철학적인 것이다. 이 말에서 어폐를 느낀다면 그건 단어에 집착하기 때문일 것이다. 5초 동안 비트겐쉬타인이 철학의 영역에서 어떤 역할을 했는지 생각해 보는 것으로 족할 것이다.

3. 스티븐 호킹은 "시간의 역사"에서 창조의 순간에 신이 어떤 선택지를 갖고 있었는지 알고 싶다고 말한다. 우리는 단번에 고전적인 철학적 논쟁을 머리에 떠올리게 된다. 데카르트와 스피노자가 논쟁의 큰 축을 담당한. 스티븐 호킹은 스피노자의 진영에 속한다. 신은 창조의 순간에 어떤 선택지도 가질 수 없었다는 것이 호킹이 주장하고자 하는 바인 것이다. 아닌게 아니라 스피노자는 과학자들의 철학자다.

그러면 "시간의 역사"의 호킹을 철학적이라고 해야 할까? 내가 보기에는 철학적이라기보다는 상업적이라고 해야 할 것 같다. 호킹은 자신의 저작을, 대중들이 읽고 즐길 수 있도록 "신의 실체를 찾아서"라는 구도 하에 짜 놓았을 뿐이다. 호킹의 신은 그저 당의정일 뿐이다. (호킹의 이런 "철학"은 분명 그의 편집자를 기쁘게 하였을 것이다)

파인만이 호킹의 책을 읽는다면 어떤 반응을 보일까? 파인만은 축구공 안으로 굴러 들어가 버릴 것이다. 파인만의 손발뿐 아니라 허리도 오그라들어 버릴 테니까! (사실은 내 손발도 오그라들었었다)

4. 파인만이, 그리고 비트겐쉬타인이 반철학적이라는 말이 이들이 형이상학적 경험을 부정한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이 둘은 단지 형이상학적 경험을 절대화하고 체험과 이론 사이에 정교한 다리를 놓을 수 있다는 가능성을 부정하는 것이다. (혹은 비웃는 것이다) 모두들 인정하겠지만 이 두 천재의 주장은 지극히 정당하고 건전하다.

5. 철학은 말에 관한 것이 아니라 사상에 관한 것이다. 그러므로 그것은 그렇게 복잡할 수 없다. 인간의 체험이란 것이 그렇게 복잡할 수가 없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코를 푸는 방법을 언어로 설명하기는 쉽지 않다. 그래서 코를 푸는 방법을 설명하기 위해 복잡하고 미묘한 언어가 동원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그것이 코를 푸는 방법이 심오하다는 것을 뜻하는 것은 아니다. 철학적 개념들에 있어서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그리고 그런 한에서 그 철학적 개념은 건전한 것이리라. 철학은 말에 관한 것이 아니라 사상에 관한 것이기 때문이다.

6. 위에 걸어놓은 동영상에서 파인만은 "What I cannot create, I do not understand."라고 말한다. 나는 이런 것을 형이상학적 경험, 혹은 철학적 순간의 표현이라고 말한다. 보라, 얼마나 시적인가! 그리고 우리는 이 표현이 단지 말인 것이 아니라 어떤 사상을 표현하고 있다는 것을 느낄 수 있다. 예를 들면 파인만의 이 말을 이런 식으로 해설할 수도 있을 것이다. 내 자신이 셰익스피어가 되지 않고서는 그의 극을 충분히 이해할 수 없다고. (무한하게 다양한 버전이 가능할 것이다) 여전히 산문적인 서술은 아니지만 내가 (혹은 파인만이) 어떤 말을 하고 있는지는 충분히 알 수 있을 것이다. (할 수 있다면 파인만의 저 말을 산문적으로 해설해 보라)

파인만의 경우 말에 있어서는 일단 여기서 멈춘다. 그러나 철학자들은 형이상학적 경험을 계속 밀고 나간다. 철학자들은 이러한 경험을 단초로 하나의 인식론을 수립하기도 한다. 철학자들의 문헌에서 심란한 개념들의 숲을 맞닥뜨리게 되면 그 개념들이 어떤 사상을 표현하고 있는지를 먼저 파악해야 한다. 그리고 그 사상은 결코 복잡할 수가 없다. 앞서 말했듯이 코를 푸는 행위는 그렇게 복잡하지 않다.

7. 우리는 이렇게 말할 수 있을 것이다. 그림을 그린다는 것은 대상을 더 자세히 관찰하는 행위라고. 음악을 연주한다는 것은 음악을 더 섬세하게 듣는 행위라고. 무대에서 배역을 연기하는 것은 희곡을 더 세밀하게 읽는 행위라고. 아마 진정한 관찰, 진정한 들음, 진정한 읽음 등등은 이러한 실제적인 행위와 연관되어 있을 것이다. 즉, 진정한 이해는 이러한 실제적인 행위와 연관되어 있을 것이라는 이야기다. 파인만식으로 이야기하면 진정한 이해는 그것을 자신 안에서 다시 창조하는 실제적인 행위와 연관되어 있을 것이라는 것이다.

이것이 실재의 엄중함이다. 즉, 실재의 무한함이다. 아무도 진정한 이해들을 포괄하려는 시도를 할 수 없다. 그것은 단지 인간의 수명이 유한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철학자는 불가능하다. 철학이 세계에 대한 궁극적이고 포괄적인 이해를 도모하는 것이라면 철학자들은 시와 수학과 물리학 등등을 이해할 수 있어야 한다. 즉, 철학자는 시인, 수학자, 물리학자 등등이 되어야 한다. 그러나 이는 단순히 불가능하다. 그러므로 철학자는 불가능하다. 그러나 그것이 철학이 불가능하다는 의미는 아니다. 죽은 것은 철학자이지 철학이 아니다.

다시 말하지만 철학적 깊음은 말과는 아무런 상관이 없다. 그것은 형이상학적 경험, 혹은 철학적 순간의 힘과 동의어다. 그러므로 우리 시대의 철학자는 형이상학적 경험, 혹은 철학적 순간에 압도되는 삶을 사는 사람일 것이다. 철학의 진정한 의미는 이런 것이 아닐까? 우리는 이미 이해란 무언가를 창조하는 실제적인 행위와 동의어임을 알고 있다. 그러므로 세계에 대한 궁극적 이해는 이러한 행위 속에서 하나의 구도로 드러나는 것일 테다. 어쩌면 우리 시대야 말로 진정한 철학의 시대의 여명기일지도 모르겠다. 어쩐지 나는 그렇게 믿고 싶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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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근히 궁금하여 "우리집 여자들" 최근 방영분 몇 편을 온라인에서 스킵하면서 보았다. 물론 정은채 출연분 위주로^^. 소감을 말하자면 그저 그랬다. 스토리가 워낙 개연성이 없고 문맥에서 튀는 대사들이 남발되고 있기 때문이기도 하겠지만 정은채에게서 별 특별함을 찾을 수는 없었다. 오히려 이런 드라마에 최적화되어 있는 양희경의 연기가 탁월해 보이고, 그 선상에서 연기하는 윤아정이 더 흡입력이 있어 보인다. 정은채는 평범한 신인 배우로 보였다.

어떤 딜레마. 정은채가 맡은 역은 가난하지만 꿋꿋하고 능동적인 젊은 여성이고 상대역은 덜 떨어진 재벌2세인 듯 하다. 하이틴 로맨스에서 늘상 그렇듯 둘이 사귀게 되면서 그 당찼던 여성은 갑자기 소극적이 되고(여성적이 되고?) 어설펐던 남성은 믿음직하고 능력있는 왕자님으로 변신한다. 그런데 정은채는, 물론 크고 선한 눈망울을 가지고 있기는 하지만 그와 동시에 큰 키와 단호한 턱을 갖고 있다. 남자 주인공은 "나만 믿어", "두려워 하지마"라는 대사를 반복하지만 그 말은 매우 강한 휘발성을 갖고 곧장 대기 중으로 사라져 버린다. 정은채는 이미 단호하여 누구한테 기댈 생각도 없는 것 같고, 무언가를 두려워 하지도 않는 듯이 보이기 때문이다. 

이럴 경우 여자 주인공을 맡은 배우가 어떤 선택을 하는지 우리는 익히 보아 알고 있다. 즉, 갑자기 여리고 눈물 많은 여성으로 변신한다는 것을. 그러면 시청자들은 캐릭터가 일관성이 없다며 비판을 해댄다. 이에 반해 정은채는 처음의 캐릭터를 고수하는 연기를 하고 있는 것 같은데 그러자 이번엔 남자 주인공과의 화학적 결합이 어려워지는 문제가 생겨 버린다.

물론 이런 걸 딜레마라고 부르지는 않는다. 그에 응당한 이름이 따로 있기 때문이다. 즉, 극본과 연출의 실패라는. 다시 말하면 작품의 실패. 사실은 작품의 실패라는 말조차 사치다.  왜냐하면 지금은 일일 드라마가 가능하지 않은 시대이기 때문이다. 매일 매일 각본을 쓰고 촬영을 하고 연기를 하고 편집을 해야 하는 환경에서 제작된 상품을 도대체 이 시대의 누가 만족하며 즐길 것인가? 만드는 사람도 소비하는 사람도 그런 걸 기대하지 않는 것이 정신 건강에 좋은 것이다. 그러니 환경에 대한 불평일랑 집어치우자. 거기서 연기하든지 말든지, 그 드라마를 보든지 말든지, 오로지 선택만이 있을 뿐이다.

내가 생각하기에 좋은 가수의 절대적인 전제는 좋은 곡이고 좋은 배우의 절대적 전제는 좋은 영화다. 더스틴 호프만과 메릴 스트립은 "크레이머 대 크레이머"라는 위대한 작품에서 연기한 위대한 배우들이고 "크레이머 대 크레이머"는 이 두 배우 덕에 위대해졌다. "크레이머 대 크레이머"와 같은 작품 없이 더스틴 호프만(그리고 메릴 스트립)이 위대한 배우일 수는 없을 것이다. 내 말은 선택을 하여야 한다는 것이다. 예술가로서 위대한 영화를 만들든지, 연예인으로서 그럴 듯한 영화에 만족하든지. 너무 과도한 이분법일까? 글쎄, 그럴까? 최상의 제품을 만들고자 하는 열의와 에너지 투여 없이 최상의 제품이 만들어 질 수 있을까? 위대한 작품을 만들고자 하는 야심 없이 위대한 작품이 만들어질 수 있을까? 터무니 없는 소리다. 그저 선택을 회피하려는 소리일 뿐.

영화를, 음악을, 문학을, 그림을, 철학을 진지하게 여긴다면 그것을 진지하게 여겨야 한다. 많은 사람들이 "영도 다리를 건너다"에서 정은채를 발견하고 흥분을 했다. 그렇다면 정은채는 그 흥분에 값해야 한다. 왜? 그것이 윤리니까. 어떤 작가가 독특한 시각과 빼어난 표현력을 선보였다면 이제 그 작가는 자신의 재능에서 최선의 작품을 뽑아내는 것을 자신의 윤리로 삼아야 한다. 지금 보라, 한국의 문학 시장에서 읽을 만한 작가가 도대체 누가 있는지? (제발 김훈이라는 이름은 말하지 말자.) 이러한 황폐함의 원인은 어디에 있을까? 윤리의 부재! 그러니 나의 신경질적으로 심각한 어투를 탓하지 말자. 지금의 이 황폐함을 기꺼이 용납할 수 있는 사람이 아니라면 말이다. 그것이 문학이든 영화든 음악이든 철학이든 그 어떤 분야든지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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