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
거제 해금강에 다녀왔다.
스티븐 나이들러의 "스피노자" 5장, 6장까지 읽고 책을 책장에 꽂아 두었다.
컬리판 The Collected Works of SPINOZA 중 "형이상학 단편"을 읽기 시작했다.
스티븐 베이커의 "뉴머러티"를 읽고 있다.

1.
곧 이곳 거제를 떠난다. 떠나기 전에 거제 이곳 저곳을 둘러 보고 싶어 해금강에 다녀왔다. 신선대와 바람의 언덕이 좋았다. 유람선은 나중을 기약하기로 했다.

해금강은 바다 색깔부터 달랐다. 신선대의 괴암들을 바라보다 문득, 저것들이 어떻게 생성되었을지 궁금해 졌다. 신선대는 화성암(맞나?)인 것 같은데 부위 별로 색깔이 달랐다. 또 두꺼운 편리(맞나?) 같은 게 겹쳐 있었다. 생성 기원이 다른 것처럼 보이는 거대한 암석 덩어리가 나란히 서 있기도 했다. 언어가 없어 답답했다. 지질학 공부를 하고 싶어 졌다. 시어리어슬리.






2.
스티븐 나이들러의 "스피노자"에 대한 흥미가 되살아나지 않는다. 나중에 필요할 때 다시 보겠지 싶어 책장 안으로 퇴장시켰다. 간단한 리뷰를 여기에 쓰기로 한다. 좋은 얘기를 하게 될 거 같지 않아 따로 리뷰 카테고리에 리뷰를 쓰게 되지는 않을 것 같다.

번역 상태가 좋지 않다. 굉장히 서둘러 번역한 느낌이 난다. 특히 스피노자의 철학 부분을 서술하는 부분에 약점이 많다. 그냥 그러려니 하다가 역자의 프로필을 보고나니 생각이 많아졌다. 역자는 이미 스피노자의 "신학 정치론", "정치론"을 번역해 낸, 말하자면 나름 스피노자 권위자다. 그런데 마치 스피노자라는 철학자를 처음 대하는 사람인냥 번역을 해놓았다. 화가 난다기보다는 미스테리를 느낀다. 악역으로 이름 높은 "새로운 과학 사상"의 경우도 마찬가지였다. 프로필을 보면 역자는 바슐라르에 대한 논문과 책을 쓴 바슐라르 전문가다. 그러나 번역된 책을 보면 마치 바슐라르를 처음 대하는 것처럼 번역을 해놓았다. 어떻게 이런 일이 있을 수 있는지 나는 이해할 수가 없다. 화가 난다는 뜻이 아니라 그 이유에 대해서 지적 호기심을 느낀다는 말이다.

편집적인 부분을 보자. 이 책의 한국어판 제목은 "스피노자 철학을 도발한 철학자"이다. 그리고 번역 대본은 "Spinoza by Steven Nadler"로 되어 있다. 나는 스티븐 내들러가 "Spinoza: A Life" 외에 "Spinoza"라는 제목의 또 다른 책을 썼나 싶어 잠시 혼란을 느꼈다. 한국어판 책 제목을 달리 하더라도 원 대본의 서지 정보는 정확히 해주었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개중에는 나같이 바보같은 독자도 있을 수 있으니까 말이다.

사소한 부분 몇 가지를 더 말하자. 책 앞 부분에 도판이 몇 개 있다. 올덴버그도 있고 므나세도 있다. 그런데 스피노자는 없다. 결과적으로 이 책에는 스피노자의 초상이 하나도 없다.
그리고 쪽수 번호가 책 안쪽 접히는 부분에 적혀 있다. 색인과 해당 페이지를 왔다 갔다 하다보니 그게 사용자 경험을 고려한 방식은 아닐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이런 말 하기가 좀 그렇긴 한데 한번 물어 보자. 도대체 "철학을 도발한 철학자"란 말이 무슨 뜻인가? 스피노자를 야만적 별종이니 탈주자니 전복자니 하는 수식어로 광고하는 경우를 흔히 본다. 내게는 그저 말장난으로 들릴 뿐이다. 스피노자에게 저런 타이틀을 붙인다고 책이 얼마나 더 팔릴까 싶기도 하다.
어떤 책에는 이렇게 되어 있기도 하다. "...이러한 신학-정치적 탄압에 저항하기 위해 그는 레인스뷔르흐, 포르뷔르흐, 레이든 등지에 은둔해, 암스테르담에서 그를 지지했던 '스피노자 서클'과 함께 지하 활동에 들어간다. 발리바르의 표현에 따르면, 스피노자는 민족 해방 투쟁의 후계자이자 시민적 자유와 양심의 자유, 지식인의 자율성을 옹호한 투사였다." 제발!! 이러지 말자.

이제 원저작자쪽으로 방향을 틀어보자. 솔직히 내들러의 책은 지루하다. 일반적으로 철학자의 전기는 철학자의 사상에 접근하기 쉽도록 짜여진 입문서 역할을 한다. 철학자의 개인사와 당시의 정치 사회적 역학 관계, 철학자가 영향을 주고 받은 지적 환경 등등이 적당히 버무려져서 철학자의 사상에 맥락을 제공해 주는 것이다. 그런데 내들러의 책은 당시의 시대적 상황에 대한 서술과 유대 관련 자료가 과도하게 많은 페이지를 차지하고 있다. 내가 편집자라면 적어도 1/3은 잘라내려 했을 것이다. 내들러가 섭렵한 자료들의 방대함, 그 철저한 고증에는 거의 경외감마저 들지만 정작 중요한 스피노자의 삶과 사상의 변증법은 대체로 평면적이고 생기없게 취급되고 있다. 요는 내들러의 관심과 기획이 내가 기대하던 것과는 달랐다는 얘기일 것이다.

그러면 내들러의 편집자는 어떻게 했는가? 나같은 독자는 뭣 모르고 내들러의 책을 구입했다가 꾸벅꾸벅 졸면서 책을 읽다가, 의무감에서 읽다가, 결국 치워 버리기도 한다. 이러한 사태를 내들러의 편집자는 충분히 예상하고 있었을 것이다. 그러면 내들러의 편집자는 어떻게 했는가? "철학을 전복한 철학자"라는 아무 알맹이 없는 수사로 어떻게 해서든 눈먼 독자들의 지갑을 열려고 했을까? 책 맨 앞부분을 보면 양식이라는 것이 어떤 것인지 잘 알 수 있다. 참으로 부러웠고 그러한 것을 소중히 여기는 사람(조직)이 있다는 사실에 기뻤다.

다음은 (아마도) 이 책의 편집자가 이 책에 대해 소개한 글이다. 맨 첫 페이지에 있다.

"이 책은 각종 언어로 쓰인 스피노자의 전기 중 최초의 완전한 전기이며, 상세한 기록들에 대한 조사를 바탕으로 한다. 그렇다고 스피노자의 생애에 대한 이야기를 단순히 열거하지 않는다. 이 책은 17세기에 유대인이 살고 있던 암스테르담의 중심부로, 그리고 유대교에서 발생한 스피노자의 추방 사건을 포함한, 초기 네덜란드 공화국의 동요하는 정치적, 사회적, 지적, 종교적 세계의 한 가운데로, 독자들을 이끈다.
이 책은 철학자들, 역사가들, 유대 사상을 연구하는 학자들에게 소중한 자료가 될 수 있겠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철학, 유대 역사, 17세기 유럽의 역사 또는 네덜란드 황금기의 문화에 깊은 관심을 가지고 있는 일반적인 독자 대중을 위해 쓰였다."

정확하고 솔직한 소개글이다. 더할 것도 덜 것도 없다. 그리고 이런 것이 양식이라고 본다.

3.
컬리판 "스피노자"로 "데카르트 철학의 원리" 부록으로 달려 있는 "형이상학 단평"을 읽기 시작했다. 내 느낌에는 스피노자를 이해하는데 부록"들"만큼 적당한 분량에, 상대적으로 쉽고 명료한 서술을 하고 있는 문헌이 없는 것 같다. 이제 첫 장을 읽었지만 스피노자의 명료한 사고와 논리에 감탄하고 있는 중이다. 번역을 해서 올려볼까 하는 생각을 하고 있다. 그만한 실력이 되기만 한다면. 이제 시간은 핑계가 아닐테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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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
스티븐 내들러의 "스피노자" 제7장, 8장을 읽었다.
스티븐 베이커의 "뉴머러티"를 읽기 시작하다.

1.

lifting

공장 철제 기둥에 붙어 있던 포스터다. 어제 점심 시간에 아이폰으로 찍어 놓았다. 포스터 아래의 손자국은 물론 나의 것이다. 포스터 아래가 말려 있어서 펴느라고 손을 좀 댔다.

포스터 문구를 보면 영어로 되어 있는 것은 매우 구체적인데 한국어로 되어 있는 것은 두리 뭉실하고 추상적이다. 한국어 문구를 읽고 나서는 사고를 한번 더 해야 한다. "어떻게 드는 것이 바른 자세로 드는 거지요?" 비경제적이다. 왜 저렇게 번역했는지 이해를 못하겠다.

난 한국인들은 매우 추상적인 종족이라고 생각한다. 여러 예를 들 수 있겠으나 딱 하나만 들겠다. 지금 내 앞에 놓여 있는 책의 한국어판 제목은 "구글노믹스"다. 그리고 원서 제목은 "What would Google do?"다. 더 얘기할 필요가 없을 것이다.

작가 박상륭도 비슷한 얘기를 한 것 같다. 동양의 고전은 너무 추상적이라서 읽기가 매우 어렵다. 그래서 영문판으로 읽었더니 이해하기가 쉽더라. 공감.

추상이란 약어이며 기호이다. 그것은 사태들을 조망할 때, 그리하여 새로운 연결을 발견할 때 강력한 힘을 발휘한다. 그러나 추상이 의미가 있으려면 언제든 구체적인 사태를 가리킬 수 있어야 한다. "바른 자세로 든다는 것이 무슨 뜻입니까?" 하고 물었을 때 언제든 "허리를 꼿꼿하게 펴고 무릎을 구부려 물건을 들라는 얘기입니다."라고 답을 할 수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구체화될 수 없는 추상이란 완전히 무용하다. 사태와의 연결을 찾을 수 없는 개념은 말장난일 뿐이고 말장난에서는 모든 것이 가능하기 때문이다. 

물리학자 파인만도 비슷한 말을 했다. 파인만은 어떤 개념에 대한 자신의 이해를 점검할 때 물리학의 문외한(예컨대 나이는 들었지만 여전히 혈기왕성한 숙모)에게 그 개념을 알기 쉽게 설명할 수 있는지를 기준으로 삼았다고 한다. 파인만의 설명을 듣고 그 문외한이 고개를 갸우뚱하며 눈길을 살살 피하면 파인만은 "내 차라리 난로에 대고 이야기하는 게 낫겠구먼..."이라고 혀를 차는 것이 아니라 "이 개념에 대한 나의 이해가 아직 부족한가 보군..." 하고 결론 내렸다는 것이다.

추상을 최대한 일상의 영역으로 끌고 내려온다. 다시 말하면 일상어로 번역한다. 그렇게 해서 살아남은 개념은 힘을 갖고 있는, 적법한 개념이다.

후기 비트겐쉬타인이 왕성하게 토해내던 실험들이 그런것 아니었는지?

추상은 벼랑끝에 걸린 바위와 같다. 그것은 언제든 땅으로 떨어져 내리려 한다. 그것은 자연스럽게 구체로 향한다. 추상이 내려 앉을 저 땅, 그것이 진리의 영역이다. 그러나 추상을 좋아하는 사람은 진리를 좋아하지 않는다. 자신이 움켜쥐고 있는 추상이 구체와 아무런 연결을 맺고 있지 않아서 그런 것인지, 사람들과 함께 진리를 향유하는 것이 싫어서 그러는 것인지는 모르겠다. 어쨌든 추상을 좋아하는 사람은 진리를 좋아하지 않는다. 그래서 그런 사람들은 추상이 벼랑 아래로 떨어져 내리는 걸 막으려 한다. 그래서 그런 사람들은 이런 말을 좋아한다. "질문 금지!"

제도 교육이 고도로 발전시킨 기술은 바로 "질문 금지!"를 명시적이지 않게 학생들에게 주입하는 것이었다.

정치에 있어서도 똑같은 얘기를 할 수 있다. 그러므로 추상이란 주제로 시작한 이 이야기는 하나의 삶의 방식, 즉 민주주의라는 삶의 방식을 결정적으로 가리키게 될 것이다. 그것은 자유롭게 의심하는 것이며 질문하는 것이며 진리의 바닥까지 내려가 보는 것이며 진리의 바닥에서 몸소 길어온 것을 표현하는 것이다. 권위는 오로지 진리의 바닥에 기반하는 것이어야 할 것이다.

아래는 들뢰즈의 어떤 단편의 첫 문단이다.

   
 

Philosophy is the theory of multiplicities, each of which is composed of actual and virtual elements.

철학은 다양체들(multiplicities)에 관한 이론이다. 다양체들은 (현상)현실적인 요소들과 잠재(활력)적인 요소들로 구성된다.

Purely actual objects do not exist. Every actual surrounds itself with a cloud of virtual images.

현실적이기만 한 대상들은 존재하지 않는다. 모든 현실적인 것은 그 주위를 잠재적인 이미지들의 구름이 둘러싸고 있다.

This cloud is composed of a series of more or less extensive coexisting circuits, along which the virtual images are distributed, and around which they run.

이 구름들은 그 외연의 크기가 다른, 일련의 공존하는 회로들로 구성되어 있다. 이 회로들을 따라 잠재적인 이미지들이 분포되어 있으며 이 이미지들은 그 회로들을 돈다.

These virtuals vary in kind as well as in their degree of proximity from the actual particles by which they are both emitted and absorbed.

이 잠재적인 것들은 그 종류에 있어서만이 아니라 현실적인 입자들과의 거리에 있어서 서로 다르다. 현실적인 입자들은 잠재적인 것들을 방출하는 동시에 흡수한다.

They are called virtual in so far as their emission and absorption, creation and destruction, occur in a period of time shorter than the shortest continuous period imaginable; it is this very brevity that keeps them subject to a principle of uncertainty or indetermination.

이 방출과 흡수, 창조와 파괴가 상상할 수 있는 가장 짧은 연속적 시간보다 짧은 시간에 일어나는 한에서 이것들은 잠재적이라고 불린다. 잠재적인 것들을 불확실성 혹은 비결정(indetermination)의 원리에 종속된 상태에 놓는 것은 바로 이 짧음이다.

The virtuals, encircling the actual, perpetually renew themselves by emitting yet others, with which they are in turn surrounded and which go on in turn to react upon the actual: 'in the heart of the cloud of the virtual there is a virtual of a yet higher order...every vitual particle surrounds itself with a virtual cosmos and each in its turn does likewise indefinitely.‘

현실적인 것을 둘러싸고 있는 잠재적인 것들은 또 다른 잠재적인 것들을 방출함으로써 스스로를 영속적으로 갱신한다. 이 새로이 방출된 것들이 다시 [원래의] 잠재적인 것들을 둘러싸며 그 다음으로 현실적인 것에 작용하게 된다. ‘잠재적인 것의 구름의 중심부에 더 높은 등급의 잠재적인 것이 있다...모든 잠재적인 입자는 그 주위를 잠재적인 우주가 둘러싸고 있으며, 이런 식으로 무한하게 이루어져 있다.’

It is the dramatic identity of their dynamics that makes a perception resemble a particle: images, distributed on increasingly remote, increasingly large, moving circuits, which both make and unmake each other.

지각(perception)으로 하여금 입자를 닮게 만드는 것은 바로 그 동력학의 극적인 동일성이다. 현실적인 지각은 그 주위를 잠재적인 이미지들의 구름이 둘러싸고 있는데, 이 이미지들은 갈수록 멀어지고 점점 더 커지는 움직이는 회로들 위에 분포되어있으며, 이 회로들은 서로를 만들었다, 없앴다 한다.

These are memories of different sorts, but they are still called virtual images in that their speed or brevity subjects them too to a principle of the unconsciousness.

이것들은 서로 다른 종류의 기억들이다. 그러나 이것들은 그 속도와 짧음으로 인해서 무의식의 원리에도 종속된다는 점에서 여전히 잠재적 이미지들이라고 불린다.

 
   
(출처는 http://trustsun.net/xe/?mid=bookreading&page=2&document_srl=811이며 내가 이 포스팅에서 하고 있는 말은 원글 작성자에 대한 비평을 전혀 포함하지 않는다)

저 글을 읽고 혐오감을 느꼈다는 사실을 숨기고 싶지 않다. 들뢰즈는 저런 식의 표현을 쓴 것에 대해서 정당성을 추궁받아야 할 것이다. 나로서는 이러한 경우를 생각해 줄 수 있다. "나는 원래 현대 물리를 전공한 사람입니다. 그래서 나의 사고가 과도하게 현대 물리적 언어로 표현되는 경향이 있다는 걸 잘 인식하고 있습니다. 저런 표현을 쓴 것은 제게 발생한 사고를 빠르게 포착하기 위한 방편이었다는 점을 양해해 주셨으면 합니다..." 들뢰즈가 이러한 경우에 속하는지?

우리에게 분명한 것은 들뢰즈의 저러한 표현들이 어떤 사태를 가리키는지 매우 불분명하다는 것이다. 가능성은 두가지다. 들뢰즈 사상의 심오함, 아니면 말장난. (물론 심오함과 말장난은 종이 한 장 차이일 수 있고 나는 그러한 예들을 더러 알고 있다고 말하겠다.)

심오함과 말장난 사이를 가르는 기준을 우리는 갖고 있다. 바로 앞서 소개한 파인만의 원칙이다. 들뢰즈의 해설자이든지 스피노자의 해설자이든지 학교 교사이든지 기업 사장이든지 그게 누구든 어떤 주장을 말하는 사람이라면 파인만의 원칙을 기꺼이 자신의 것으로 받아들여야 할 것이다. 내 생각에는 그것만이 우리의 안전을 보장해 줄 수 있다. 즉, 탈선과 위선, 오도로부터 우리를 보호해 줄 수 있다.

횡설수설은 여기까지 하자. 방법론은 끝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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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여로 2015-03-07 21:47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추상적인 말을 풀어서 설명하지 못하면 이해를 못한게 아닌가 에세이를 쓰면서 고민하던 생각이었는데 명료해졌습니다 감사해요

weekly 2015-03-10 03:20   좋아요 0 | 수정 | 삭제 | URL
말씀 감사합니다. 덕분에 저도 예전에 제가 쓴 글을 다시 읽어 보게 되었네요.:)

지금 다시 읽어 보니... 무엇보다도 들뢰즈에 대한 언급이 조금 걸립니다. 어쩌면 들뢰즈의 철학을 가장 응축적으로, 가장 효과있게 표현한 것일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기도 하네요...
 

0. 스티븐 내들러의 "스피노자" 9장, 10장을 읽었고 지금은 7장을 읽고 있다.

1. 회사 그만 두기 전날. 매주 수요일은 이 지역의 모든 공장이 잔업이 없는 날이다. 삼성중공업의 본을 따라 모두 그렇게들 한단다. 동료와 저녁 식사를 하러 시내에 나갔더니 똑같은 옷(삼성중공업의 사복을 거의 모든 삼성 하청업체들이 자사 유니폼으로 채택했다)을 입은 사람들로 거리와 식당이 붐볐다.

갈비탕집에 빈 자리가 있어 거기서 갈비탕을 시켜 먹었다. 옆 자리에는 남자 셋과 여자 하나가 밥을 볶아 먹고 있었다. 그네들의 목소리가 들린다. "퇴근하고 기숙사에 있다가 시간이 아까와서..." 시간이 아까와서 밖으로 나가 동료들과 술도 먹고 그런다는 이야기다. 그러다 보면 자정을 넘기기 일쑤고 아침에 일어나기 힘들어 지고... 그러나 퇴근하고 나면 또 "시간이 아까와서..."의 반복.

맞은 편 여자가 "책 읽으면 되잖아요..." 라고 말한다. 나도 그걸 선택했다. 그냥 자기에는 시간이 아까와서...

공장 노동자들은 종속노동이 무엇인지를 몸으로 느낀다. 종속노동이라는 개념 자체가 공장 노동을 염두에 두고 만들어진 것일 게다. 한국의 거의 모든 공장들은 잔업이 기본이기 때문에 노동자들은 보통 하루 12시간을 공장에서 보내게 된다. 그 12시간에다가 출퇴근 시간과 잠자는 시간 등의 생리적 용도의 시간을 더해 보라. 무엇이 남을까? 우리가 생활이라고 부를 수 있는 것을 위해 남겨진 시간은 없다. 그러므로 생리적 용도의 시간을 줄여서라도 "생활"을 위한 시간을 갖고자 하는 것이다.

시간이 아까와서... 라는 말의 의미는 이런 것이다.

2. 회사 그만 두던 날. 그러니까 어제. 내가 일하는 업종은 이직이 비교적 자유롭다. 그래서 그만 두는 날에 통고하거나 아예 아무 말도 없이 그만 두는 사람도 많다. 나는 인수인계를 생각해서 이주 전에 미리 이야기를 했었다. 반장에게 당분간 비밀로 해달라 했지만 다음날 오전부터 사람들은 내게 어떻게 된 일이냐고 묻기 시작했다.

그래서 지난 이 주는 길었고 내 마음은 펄럭였다. 드디어 그만 두는 날. 나는 작업 종료 시간보다 이르게 토치를 내려 놓고 사람들을 찾아 다니며 작별 인사를 하고 악수를 나누었다. 가는 귀가 먹은 노인도 있고 캄보디아 사람도 있고 조선족도 있다. 필리핀 친구 하나가 캔음료 하나를 건네 주어서 받아 왔다.

친구가 문자로 이제 새로운 장(chapter)로 넘어가는 거냐고 물어왔다. 내 느낌이 정확히 그랬다. 이제 인생의 새로운 장으로 넘어가는가 보다. 새로운 장은 아직 쓰여 지지 않았다. 나는 초등학교에 입학하는 어린 아이마냥 왼쪽 가슴에 작은 손수건을 달고 가방 필통엔 전날 밤에 누나가 정성스레 깍아준 연필을 가득 담아 놓았다. 글쎄 뭔가 집에 빠뜨리고 온 것이 있긴 할거다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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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 스티븐 내들러의 "스피노자" 제9장을 읽고 있다.

1. (이하는 "미디어랩"에서의 인용)
-폴은 그의 저서 "자유의 기술(Technologies of Freedom)"에서 그 문제를 추적했다. "저작권의 인정과 로열티의 지불은 인쇄매체와 함께 생겨났다. 전자 출판의 도래로 이를 실천하기가 어렵게 되었다. 전자출판은 18세기의 인쇄소보다는 오히려 저작권법이 적용된 적이 없는 구두 커뮤니케이션과 유사하다."
-정보의 대가로 무엇을 청구하며 어떻게 그를 거두어들일 것인가? 정보의 질에 대한 대가는 지불되지 않을 것이다. 시시한 전화 한 통도 중요한 전화와 같은 값이다. 좋은 책이나 나쁜 책이나 가격은 같다. 꼼꼼히 읽히는 신문도 곧바로 아무렇게나 쓰이는 신문과 같은 가격에 팔린다. BBC가 방영하는 수준 높은 새로운 드라마도 재방, 삼방되는 통속 연속극과 비용의 차이가 없다. 이 중 어느 것도 불만스럽다고 해서 환불을 받을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제작자들은 정보의 질에 대해서도 청구하지 않을 것이다.
-정보의 질에 대한 대가는 지불되지 않는데 그 이유는 그에 대한 평가가 소급적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정보원의 질에 대해서는 대가를 지불하게 되는데, 그것은 정보원의 신뢰도에 따라 정보의 가치가 어느 정도 예측가능해 지기 때문이다.
-...이러한 업체들은 현재가 아닌 과거의 가치를 보상받게 되어 정보원으로서의 신뢰도의 상승을 기대해 볼 수 있는 것이다.
-독서의 가치는 읽는 구절의 의미를 제대로 끌어내는가에 달려 있다. 정보의 경우 그 가치는 그를 쓰고 말하는 사람의 평판과 전문지식에 의해 결정된다. 이것은 내가 어린 시절에 누가 그것을 말하든 지혜는 지혜라고 믿고 싶었던 것과는 상충되는 것이다.

2. 예를 들어 어떤 정보를 접했을 때 우리는 곧장 그 정보의 신뢰도를 확인하려 든다. 만약 그 정보의 최종 출처가 어떤 개인의 블로그라면 그것을 토대로 진지한 대화나 사고를 벌이는 건 우스운 일이다. 만약 뉴욕 타임스라면? 우리는 진지해진다. 우리는 뉴욕 타임스를 신뢰성 있는 정보원으로 인식하기 때문이다.

3. 뉴욕 타임스가 신뢰성 있는 정보원으로 자신을 가꾸는 노력의 일단은 http://estima.wordpress.com/2011/05/28/nytpublished/ 에 소개되어 있다(한국어 사이트다).

4. 우리가 뉴욕 타임스를 신뢰할 수 있는 정보원이라고 인식한다는 의미는, 궁극적으로 그리고 비트겐쉬타인적으로 표현하면, 언어가 실재에 잣대처럼 맞닿아 있기 때문일 것이다. 그 의미는 직접성이다.

5. 그러므로 확실성의 한 요소에는 직접성이 포함되어 있을 것이다. 그 직접성의 공간으로 신체를 말하든 실존을 말하든. 어떻든 그 공간은, 말하자면 언어와 실재, 사유와 연장... 등등이 직접 만나는 곳일테다.

6. 웹 콘텐츠 시장의 현황은 악화가 양화를 구축하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사람들은 이제 더 질 좋은 콘텐츠에 지갑을 열 준비가 되어 있을까? 그런 틈새가 존재한다는 것은 분명하다. 그러나 그걸 현실화시키는 것은 정치인도 아니고 사상가도 아닌 기업가다. 예를 들면 스티브 잡스나 머독.

7. 스티브 잡스는 애플이라는 게이트를 통해서만 음악을 구할 수 있는 꽉 막힌 구조의 기기인 아이포드를 시장에 내놓으며 음악을 훔치지 말고 우아하게 즐길 것을 권했다. 우아하게.

8. (아래는 "미디어랩"에서의 인용)
-"경제학자에게 있어 공공재란 부가되는 분배와 관련된 한계비용이 본질적으로 없는 것을 말한다. 가장 좋은 예가 TV 방송이 된다. 일단 고정된 제작비용이 발생하고 그 프로그램이 전파로 송출되면 그를 한 가구가 보든 2천1백만 가구가 보든 방송사에는 비용의 차이가 없다."(벤자민 콤페인의 "Who owns the Media?"에서)

9. 그러므로 음악을 훔친다와 우아하게 즐긴다는 도덕적, 법적 범주에서 크게 다름이 있는 것은 아닐테다. 다시 말하면 그것은 소유권이나 저작권과 관련하여 다름이 있는 것은 아닐 테다. 우아함이란 생태계, 혹은 문화적 토양의 고양과 관련 있는 말일 것이다. 예컨대, 음악을 우아하게 즐긴다는 것은 음악 생산의 문화적 토대에 기여하면서 음악을 즐긴다는 것을 뜻하는 것일 게다.

10. 다시 말하면 우아함이란 전체로서의 삶의 질과 관련있는 말이다. 예를 들면 나는 후손에 DNA를 전해준다. 이것은 생식, 혹은 생존 차원의 문제다. 그 이상의 가치, 그 이상의 질, 그 이상의 문화적 토대를 전해주는 현재 나의 행위는 전체로서의 나의 삶의 우아함을 정의한다.

11. 그것이 바로 젊은 날의 스티브 잡스가 한 말의 의미다.

"지적 탐구 부문에서 흥미로운 부분이 한 가지 있어요. 우아하게 늙어가는 겁니다. 너무나 빨리 상황이 변해서 80년대 후반 쯤 되면, 근본 통찰부터가 최고의 통찰이 될 다음 세대에게 넘겨주고 싶겠지요. 계속 이어갈 수 있도록이요. 우리의 어깨를 타고 미래를 보는 겁니다. 흥미롭지 않습니까? 우아하게 늙어가는 겁니다." (출처는 http://www.albireo.net/forum/showthread.php?t=13617&highlight=%BD%BA%C6%BC%BA%EA+%C0%E2%BD%BA)

12. 그러므로 선이란 그러한 가치의 생산이다. 그러므로 악이란 그것의 반대다. 그리고 선도 악도 가치도 모두 사회성이란 맥락 안에서 의미를 갖는다.

13. 그리고 그것이 바로 스피노자의 윤리학의 발단이다. 스피노자의 윤리학은 코나투스에서 시작하여 참된 것으로 나아간다. 어떻게 그렇게 될 수 있을까? 인간의 심리가 그렇게 짜여져 있으므로. 에티카는 매슬로의 욕구 5단계설에 따라 설명될 수도 있을 것이다(낮은 단계의 욕구가 충족되면 다음 단계의 욕구로 옮겨간다).

(아래는 "플랫폼 전략"에서의 인용)
1). 생리적 욕구
2). 안심 안전의 욕구
3). 애정이나 소속의 욕구
4). 남에게 인정받고 싶은 욕구
5). 이상적인 자신이 되고 싶은 자아실현의 욕구

14. 그러므로 다시 질문. 진리 안에 있다는 것이 무슨 뜻인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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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관심을 갖고 있는 이슈 중 하나는 웹 컨텐트의 품질에 관한 것이다. 그래서 이런 주제를 다루고 있는 기사가 있길래 물어왔다.

http://www.infoworld.com/t/cringely/the-web-fast-cheap-and-getting-worse-the-minute-276?page=0,0


웹 컨텐트의 양은 전에 없이 커가고 있지만 실제 읽을 가치가 있는 것들은 줄어들고 있다는 이야기. 결론이 뭘까 싶어서 빠르게 읽어내려 갔지만 결론이 있을 자리에 질문 하나가 덩그란히 놓여 있다: 우리는 이제 저널리즘의 질을 추구하는 쪽으로 방향을 틀어야 하는가? 라는.

   
  Fast and cheap is the rule.  
   
"빠르고 값싸게 - 이것이 웹을 지배하는 게임의 법칙이다."

   
  Back when I was only an ink-stained wretch, as many as seven different pairs of eyes would look at everything I wrote before it got published. Now one other person checks my stuff before it goes live -- and that's one more person than many other online publications use.  
   
"예전에 인쇄 매체형 저널리즘에 종사할 때는 내가 쓴 기사를 검토하는 사람이 7 명은 되었다. 지금은 온라인 매체에서 근무하는데 검토하는 사람이 한 명 뿐이다. 그나마 나은 것이 검토자가 한 명도 없는 온라인 언론사도 허다하다."

얼마 전에 겪은 일. 한국의 IT 관련 온라인 매체에서 애플의 아이클라우드 관련 기사를 하나 읽었다. 글의 대부분 영문 기사를 번역한 것이었는데 해석을 정반대로 해놓은 것이 있었다는 것. 그 매체는 댓글을 받지 않기 때문에 나는 메일로 기자에게 어서 고치라고 알려주었다. 그리고 다른 어떤 분도 (아마) 트위터로 우회하는 댓글로 문제를 지적해 주었다. 그 매체는 검토자가 단 한 명도 없는 경우에 속하는가 보다. 나는 즐겨찾기에서 그 사이트를 지웠다.

   
  By and large, Web publishing follows the fast and cheap model. Because I like to pick on it, let's take the Huffington Post as an example. Arianna likes to boast about how she has a staff of 148 editors, which sounds like a lot until you compare it to an operation like the New York Times, which has a staff of 1,100. Moreover, most of Arianna's staffers are wet-behind-the-ears newbies who are repackaging other peoples' stories as fast as they possibly can; the Times' staff is full of seasoned (that is, older, better paid) journalists doing mostly original reporting.  
   
"대부분의 온라인 언론사들은 빠르고 값싸게 기사를 뽑아내는 방식을 택한다. 허핑턴 포스트의 예를 들어보자. 허핑턴의 회장인 아리아나는 스탭이 148명이나 된다고 자랑한다. 많아 보이지만 뉴욕 타임스는 1100명이다. 게다가 허핑턴의 스탭들은 대부분 초보들로 다른 사람이 쓴 기사를 재빨리 편집하여 사이트에 올릴 뿐이다. 반면 뉴욕 타임스의 스탭들은 오리지널 기사를 작성하는 노련한 기자들이다."

나는 포털에서 주로 IT 관련 기사를 본다. 거의 다 외국 기사들 재편집해 올린 것이다...

아래 인용을 읽어보라. AOL에 근무하며 기사를 쓰던 사람의 고백이다. 한국의 포털 사이트에 기사를 제공하는 언론사들의 풍경이 머리에 그려질 것 같다.

   
 

I was given eight to ten article assignments a night, writing about television shows that I had never seen before. AOL would send me short video clips, ranging from one to two minutes in length -- clips from "Law & Order," "Family Guy," "Dancing With the Stars," the Grammys, and so on and so forth. ... My job was then to write about them. But really, my job was to lie. My job was to write about random, out-of-context video clips, while pretending to the reader that I had watched the actual show in question. ...

That alone was unethical. But what happened next was painful. My "ideal" turnaround time to produce a column started at 35 minutes, then was gradually reduced to half an hour, then 25 minutes. Twenty-five minutes to research and write about a show I had never seen -- and this 25-minute period included time for formatting the article in the AOL blogging system and choosing and editing a photograph for the article. Errors were inevitably the result. But errors didn't matter; or rather, they didn't matter for my bosses.

 
   
"한번도 본 적이 없는 텔레비젼 프로그램에 관한 기사를 하룻밤에 8 ~ 10 개 정도 써야 했다. 내 일은 AOL이 보내주는 비디오 클립을 보고 기사를 작성하는 것이었는데 사실상 거짓말을 하는 것과 다를 바가 없었다. 독자들에게는 내가 프로그램을 다 보고나서 기사를 쓰는 척 했지만 사실은 임의로 편집된 1 ~ 2분 짜리 짧막한 비디오 클립을 보고 기사를 쓰는 것이었다.

문제는 거기서 끝나지 않는다. 기사를 쓰고 AOL의 블로그 시스템에 맞추어 편집하고 적당한 사진을 잘라 붙여서 기사를 내보내는 출판 시간이 35분에서, 30분으로, 다시 25분으로 계속 짧아졌다. 그러니 오류는 피할 수 없는 일이었다. 그러나 오류는 문제가 아니었다. 적어도 우리 팀장에게는 말이다."

   
  Web publications are under tremendous pressure to crank out as much material as they can as quickly as possible. More stories equals greater Google juice and more traffic; more traffic equals more ad impressions and clicks, and thus more revenue. That's the formula. And it's getting worse.  
   
"온라인 언론사들은 가능한 많은 기사를 가능한 빨리 출판해야만 한다. 더 많은 기사는 구글 검색에 더 많이 노출된다는 것(구글 쥬스)을 의미하고, 그러면 더 많은 트래픽이 생길 터이다. 더 많은 트래픽은 더 많은 광고와 클릭을 의미하며 그것이 곧 돈이다. 이것이 웹의 생존 공식이다. 그리고 웹의 품질이 점점 악화되어 가는 원인이다."

제프 자비스의 책 "구글노믹스" 제3장 "새로운 개방성"을 참고하라. 제프 자비스는 이러한 현상을 긍정적인 시각에서 그리고 있다. 내 생각에 이 사람은 긍정적인 면과 부정적인 면을 동시에 볼 수 있는 사람이 아닌 것 같다. 다시 말하면 장사꾼같다.

   
 

That is why we see the rise of content factories like Demand Media and AOL's Seed that use algorithms to determine what stories to publish based on Google trending topics. The economics of Web publishing demand cheaper and cheaper methods of producing content, editorial ethics be damned (see publishers and cobras, above).

 
   
"구글의 트랜드에 맞춰 어떤 기사를 출판할지를 결정하는 알고리즘을 이용한 서비스들이 뜨고 있는데는 이런 이유가 있는 것이다. 컨텐트 출판 비용을 가능한 싸게 하라. 언론 윤리 따위는 엿바꾸어 먹어라."

   
  I keep wondering if the Web has a bottom and if we've hit it yet. Will readers finally say "enough" to the crap and demand a return to quality and accuracy? I hope so, but I can't say with any confidence I think it will happen. What do you think?  
   
"온라인 언론의 품질은 이제 바닥을 친 것일까? 이제 독자들은 기사의 품질과 정확성을 요구할 단계에 와 있는 것일까? 모르겠다."

나도 궁금하다. 앞으로 어떻게 될까?

(그런데 나 역시도 남의 기사를 살짝 가공하여 포스트를 쓰고 있다. 이래도 되는 걸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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