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솔로몬의 선택>이란 글제목으로 제법 길게 '내가 알라딘마을의 논쟁에 참여하지 않는 이유에 대하여' 썼다가 이 역시 귀찮은 일이란 생각에서 접어버렸다. 그냥 간단하게 몇 마디 적겠다고 했던 것이 쓰다보면 길어지는 내 고질병 때문에 20매가 넘어버렸고, 원래 하고 싶은 말을 나름 다듬어서 쓰려면 100매는 써야겠기에 (정말 병이다. 논쟁에 참가하지 않는 이유가 간단하게는 '귀찮아서' 인데, 100매 쓰는 일은 귀찮지 않았단 말인가. 하여간) 이왕 버린 지랄이라 쪽팔림을 무릅쓰고 그냥 나도 내키는 대로 적어 치우기로 한다.
하여 먼저 써논 글도 아까우니 그냥 올려버린다.(그러니까 처음엔 꼭 요로코롬 쓰려고 했단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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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솔로몬의 선택>이란 TV프로그램이 있다. 일상생활에서 맞닥뜨릴지 모르는 갈등상황을 설정해놓고 일반 연예인들로 구성된 패널이 꾸며진 갈등상황을 살펴본 뒤 나름의 근거를 이야기하며 유무죄를 평결한 뒤, 이번엔 전문가라 할 수 있는 변호사들이 법적 근거를 들어 실제 적용이 어떠한지를 최종적으로 이야기하는 방식으로 진행된다. 가끔 우연치 않게 보고 있노라면 우리의 사소한 일상이 사실은 갈등의 연속이며, 법이라는 규범이 일상의 구석구석까지 얼마나 면밀한 연관 속에 놓여있는지를 생각하게 만든다. 동시에 외관상 이토록 명확해보이는 수단인 법 역시 보는 시각에 따라서는 얼마든지 다르게 적용될 수도 있다는 사실을 잘 보여준다.
이 프로그램이 제공하는 기본적인 재미란 일반 배심원이 벌이는 논쟁의 수준, 각각의 패널들이 주장하는 입장 차이에 따라 내린 평결을 전문가 집단의 평결과 비교해 보는 것에서 발생한다. 법에 있어서는 일반인과 다를 바 없는 연예인 배심원의 판결이 엇갈리는 것처럼 때때로 전문가 집단의 평결 역시 유죄와 무죄를 놓고 팽팽하게 엇갈린다. <솔로몬의 선택>은 일반인들의 법 감정과 전문가들의 법률 지식 사이의 차이를 보여줌으로써 우리들의 상식(법 감정)과 법률의 차이를 인식시켜준다.
이 프로그램이 법률이라는 나름대로 민감한 내용을 방송하기 때문에 만들어낸 나름의 안전판은 무엇보다 전문가 집단의 인원을 짝수로 배분하여 미묘한 판결에 대해 동수가 나올 수도 있도록 했다는 것이다. 즉, 갈등을 빚어낼 수 있는 판결에 대해서는 전문가 집단 조차 최종적인 판단을 내리는 대신 실제 법정에서 최종적으로 다루도록 유보한 것이다. 역설적으로 이 프로그램이 만든 안전판은 법이 결코 최후의 판단근거가 될 수 없는 사실을 잘 말해준다.
사형제도의 존폐 논쟁이 보여주듯 법은 현실적인 최종 판단의 근거가 되지만 법의 심판 이전에, 그 이후에도 여전히 개인의 양심과 자유까지 법에 의해 규정할 수는 없기 때문이다. 한 마디로 한 인간에게 죄값을 물어 그의 물리적 생명을 끊어놓을 수는 있어도, 법이 물었던 죄에 대한 책임이나 양심의 가책까지 법이 강제할 수는 없다. 법은 때때로 한 인간의 양심과 사상의 자유를 침해할 순 있어도 그의 사상이나 양심을 궁극적으로 변화시키거나 변경시킬 수는 없다. 검열(법에 의한)과 자유의 대결에서 궁극적으로 법이 승리하지 못하는 까닭도 거기에 있다. 그러므로 한 인간의 내면 속에 숨겨진 양심까지 승복시키기 위해 필요한 것은 법이 아니라 설득이다.
법이란, '법의 정신'이란 궁극적으로 사회를 이루고 있는 공동체가 도달한 상식에 의해 결정된다는 점에서 고도의 정치의식이다. 마키아벨리가 중세와 근대를 구분하는 중요한 근거점, 표지 인물이 될 수 있었던 것은 그가 인간을 근본적으로 선하거나 악한 품성의 존재로 보았기 때문이 아니라 인간을 이기주의에 따른 합리적 선택을 내리는 존재로 보았기 때문이다. 그의 인간관에 따르면 어떤 인간도 궁극적으로 보편적 진리와 절대선을 담보하는 주장을 펼 수 없으며, 다만 이기주의적 입장의 충돌에 따른 끝없는 정치투쟁이 있을 뿐이다. 그런 점에서 근대법은 절대 진리를 실현해내기 위한 수단인 고대의 율법과 구분되며 근대법의 최종 목적 또한 개종에 있지 않다.
얼핏 마키아벨리의 주장은 다수에 의한 폭정을 허용하는 듯 보이지만 누구도 진리를 독점할 수 없다는 점에서 마키아벨리의 주장은 소수의 주장 역시 경청할 필요가 있음을 말하고 있다(마키아벨리의 묘미는 거기에 있다).
최근 알라딘 서재마을에서는 몇몇 논쟁들이 진행되었고, 진행 중에 있는 것으로 안다. 민주주의 사회에서 권리와 의무를 가진 자(시민)들은 각자 다른 이해관계와 그에 따른 입장을 가지고 있기에 언제나 자신의 이해관계에 따른 입장에 따라 경합한다. 그러므로 민주사회에서 논쟁은 끊임없이 생산되고, 논쟁이 반드시 합의된 결론을 도출하지 못한다 할지라도 그 자체로 공동체의 여러 갈등과 입장을 표출한다는 점에서 유의미하다. 그러나 논쟁의 과정에서 반드시 염두에 둘 것은 설령 A란 사람의 입장이 다수의 지지를 얻고 있다 하더라도, 그것은 단지 그가 속한 공동체에서 다수를 차지하고 있을 뿐 그의 주장이 옳다는 것을 절대적으로 입증해주는 것은 아니란 점이다. 반대로 B란 주장이 비록 숫적으로는 소수를 차지하고 있다 하더라도 이 역시 존중받을 가치가 있다는 뜻이 된다.
본의든 아니든 알라딘 마을에 몸담고 있는 한 구성원으로서 몇 차례에 걸쳐 진행된 논쟁 아닌 논쟁에 대해 때때로 본의아니게 당사자가 되기도 했으나 거의 대부분의 경우 무심한 관찰자 이상으로 나선 적이 없었다. 아무리 아름답게 시작된 논쟁도, 서로의 인격을 존중하고, 인격과 텍스트를 동일시하지 않는 태도를 끝까지 관철시키기 어렵고, 어려운 시도가 성공한다 하더라도 끝에는 감정적 앙금만 남길 뿐 해결 방법도, 해결 수단도 남지 않았던 경험이 꽤 여러 차례 있었다.
특히 알라딘 마을이라는 인터넷 공동체는, 10년 정도 되는 나의 사이버 세계 경험에 비추어 보더라도 논쟁이 거의 생산되지 않는 특이한 공간이다. 알라딘 마을에서 논쟁이 생산되지 않는 이유는 논쟁 자체를 꺼리는 커뮤니티 구성원들의 암묵적인 합의가 존재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 같은 합의는 알라딘 마을 내부에 비밀결사체가 존재하기 때문이 아니라 알라딘 마을의 구조 자체가 만들어낸 것이다. 알라딘마을이 일종의 취향의 공동체라면, 그 물적 토대를 제공하는 것은 기본적으로 인터넷 서점 알라딘이다. 알라딘마을 커뮤니티의 호불호를 떠나 이 같은 물적 토대를 떠나 생각하는 것은 어렵다.
알라딘 커뮤니티의 주요 구성원들은 알라딘이란 인터넷 서점의 소비자 집단이 다수를 차지할 수밖에 없으며, 책이라는 문화상품(콘텐츠)의 소비계층이라는 점에서 다른 사이버커뮤니티에 비해 계급, 계층적으로 균일한 집단성을 지닌다. 이런 점은 알라딘마을의 강점이자 한계로 작용한다. 알라딘마을과 가장 흡사한 집단을 어디에서 찾을 수 있을까? 그것은 아마도 자식을 대안학교에 보낸 학부모 그룹이나 지배계급에 포함되지 못했거나 자발적 포기 집단(과연?)이라 할 수 있는 중간계급이 몰려 사는 서울 외곽 변두리 아파트촌, 신도시 주민들에서 찾을 수 있을 것이다.
이들은 영리하다. 자신들이 무엇을 할 수 있고, 무엇을 할 수 없는지 잘 알고 있으며 끼리공동체에 속할 수 있는 사람과 그렇지 않은 사람들을 귀신같이 구분해낼 줄 안다. 흔히 속되게 표현하는 중산층의 허위의식이 가장 잘 관철되고 있는 공간이 알라딘 마을이며, 그 사실조차 이곳에 머물고 있는 사람들은 대체로 누구나 알고 있다. 그러므로 중산층의 허위의식에 대해 힐난하는 일은 무의미하다. 그것은 얼마전 벌어졌던 중복 리뷰 논쟁을 주도했던 당사자들 역시 큰 범주에서는 벗어나기 어렵다. 최소한 인터넷을 할 수 있는 시간적, 물적 토대가 구축되어 있는 계층에 속한다는 사실 말이다.
중복리뷰 논쟁을 무슨 정치적인 차원에서의 입장 논쟁으로 승격시키고 싶어했던 이들도 있었던 것으로 안다. 하지만 아무리 잘 봐줘도 알라딘마을이 주요구성원은 중산층 집단이고, 그 같은 허위의식과 동료의식이 작동하는 공간이란 사실, 이미 누구나 알고 있는 사실을 반복입증한 것 이상의 의미는 없어 보인다. 설령 그 같은 문제의식을 잘 표현했다 하더라도 우리 사회가 허용하는 현재의 상식으로 중복 리뷰는 거의 전혀(법적으로는 더욱더) 문제가 되지 않는다. 즉, 중산층의 허위의식이나 알라딘커뮤니티의 폐쇄상, 진입장벽에 대한 문제제기로 별로 적합해보이지 않았다.
그보다는 이런 문제가 있을 때, 혹은 <오마이뉴스>처럼 본인이 직접 저술한 기사에 한해 중복게재를 허용한다는 식으로 알라딘서점측이 미리 밝혀두거나 원칙을 제시하라고 요구하는 편이 보다 합리적이었을 거다. 그러나 알라딘에서 그렇게 하지 않은 이유는 추측컨대 알라딘에서 그것을 허용한다, 하지 않는다고 말할 권한 자체가 없기 때문이다. 일반적으로 잡지에 실리는 외부 필자의 원고에 대해 잡지사는 저작권을 갖고 있지 않으며, 다만 게재권을 가진다. 신문사의 경우엔 게재된 기사가 신문사와 고용관계에 있는 경우에만 기자의 원고(사진을 포함해서)에 대한 저작권을 신문사가 소유하는 것으로 알고 있다.
알라딘 서평의 경우, 서평자는 알라딘과 고용관계를 맺은 것이 아니기 때문에 비록 알라딘에 올려진 서평이라 할지라도 그 소유권은 서평자에게 있으며, 여러 군데 올린다고 해서 법적으로 아무 문제가 없다. 물론 도의적인 책임을 묻고자 할 수는 있다. 그런데 이것이 특정 몇몇 사람에게는 마치 좌파적인, 진보적인 듯 포장된 논리에 의해 비상식적이고, 심지어는 비양심적인 행위로 규탄의 대상이 되었다. 이런 공세가 가능했던 이유의 심층에는 알라딘 구성원들 사이에 존재하는, 양심을 지키고 살고 싶다는 일말의 윤리의식이 비자본주의적 방식의 소통을 주장하는 이들의 논리 표면에 번들거리고 있기에 이런 말도 안 되는 논쟁이 흥행이 되는 거다. 위키는 지식의 민주주의고, 아무런 대가없이(혹은 지극히 얄팍한) 생산되는 리뷰는, 문화실천 행위라 할 수 없는가?
한 마디로 말해 알라딘 사람들은 '차카게' 살고 싶어서 안달 난 사람들이다.
1.
솔로몬의 선택이란 TV프로그램을 보면 알겠지만 법이란 다수가 채택한 원칙을 규범화해놓은 것일 뿐 그 자체가 양심과 사상의 자유까지 규정지을 수 없다. 마키아벨리가 중세와 근대를 구분하는 중요한 근거점, 표지 인물이 될 수 있었던 것은 그가 인간을 근본적으로 선하거나 악한 품성의 존재로 보았기 때문이 아니라 인간을 이기주의에 따라 합리적 선택을 내리는 존재로 보았기 때문이다. 즉, 그의 인간관에 따르면 어떤 인간도 궁극적으로 보편적 진리와 절대선을 담보하는 주장을 펼 수 없으며, 다만 이기주의적 입장의 충돌에 따른 끝없는 정치투쟁이 있을 뿐이다. 그런 점에서 근대법은 절대 진리를 실현해내기 위한 수단인 고대의 율법과 구분된다
2.
알라딘에서 벌어지는 논쟁은 대개가 한가하다. 알라딘에서 논쟁다운 논쟁이 거의 존재하지 않는 이유는 소비공간이 제공한 사이버공간에서 비교적 균일한 소비, 사회계층의 구성원들이 만들고 진행하기 때문이다(하여간 알라딘 마을의 평온한 분위기가 우리가 꼭 사수할 만한 것인가에 대해서도 의문이긴 하다).
3.
지극히 한가로운 논쟁임에도 불구하고, 그 논쟁을 둘러싸고 펼쳐보이는 주장과 근거들은 거창하기 이를 데 없어 때때로 이를 지켜보는 사람들을 민망하게 만든다.
4.
어차피 길게 할 말도 없으니 시나 한 편 올릴란다.
미들클래스 블루스
- 한스 마그누스 엔첸스베르거(Hans Magnus Enzensberger)
우리는 불평할 수 없다.
우리는 할 일이 있다.
우리는 배부르다.
우리는 먹는다.
풀이 자란다.
지엔피가 자란다.
손톱이 자란다.
과거가 자란다.
거리는 한산하다.
종전 협상은 완벽하다.
방공경보는 울리지 않는다.
다 지나갔다.
죽은 이들은 유언장을 썼다.
비는 그쳤다.
전쟁은 아직 해명되지 않았다
그것은 급할 것이 없다.
우리는 풀을 먹는다.
우리는 지엔피를 먹는다.
우리는 손톱을 먹는다.
우리는 과거를 먹는다.
우리는 감출 것이 없다.
우리는 늦출 것이 없다.
우리는 할 말이 없다.
우리는 있다.
우리는 무엇을 아직도 기다리고 있는가?
시계가 다시 돌아간다.
상황은 정돈되었다.
접시는 씻겼다.
마지막 버스가 지나간다.
버스는 비어있다.
우리는 불평할 수 없다.
우리는 무엇을 더 기다리고 있는가?
다시 말해 알라딘마을의 커뮤니티에서 벌어지는 논쟁은 현재까지 살펴본 것에 따르면 미들클래스 블루스가 제격이다. 가끔 그 놈의 중산층 허위의식이란 것에 정내미 떨어지면서도, 그것이 어디 적당한 재산가이며, 적당한 가난뱅이들만의 문제이랴 싶다. 대한민국에서 중산층으로 산다는 것이 얼마나 위태로운가를 조금이라도 생각해 본 사람은 그것이 근로빈곤계층과 단지 종이 한 장 차이일 뿐이며, 어느 순간엔 운명의 장난에 해당한다는 것이라는 것도 느낄 수 있다. 가령 대한민국에서 중산층으로 산다는 것은 집안의 가족들 중 누구 하나라도 사회적으로 비용이 많이 들어가는 대소사들, 가령 의료비가 무척이나 많이 지불되어야 하는 병을 앓게 된다던지 하는 일없이 그야말로 죽을 때까지 큰 소리 한 번 내지 않고, 크게 한숨 쉬지도 못하고 그렇게 얌전히 살다 갈 때에만 비로소 가능한 일이기 때문이다.
그 작은 것이나마 지키고 살려면 허위의식이니 뭐니 하는 비판 따위에 고개 돌릴 여유같은 것도 애시당초 없는 것이다. 중산층의 허위의식이란 그래서 범고래를 관찰하기 위해 과학자들이 수면 아래를 관찰하고 있을 때, 범고래 역시 과학자를 관찰하기 위해 고개를 빼꼼이 내밀고 과학자를 쳐다보는 행위와 비슷하다. 그 겸연쩍음. 나는 지난 번에 중복 리뷰 논쟁을 보면서 범고래를 관찰하는 과학자와 과학자를 관찰하는 범고래 사이의 행위와 흡사하단 생각이 들었다. 누군가 문장 뒤에 말 줄임표를 많이 쓰는 사람을 주의하라고 경고했다. 뭔가 불만많은 불안하고 심약하며 혹은 우쭐하고 우울하며 공격적인, 저 기만적이고 허위로 가득한 폐를 헐떡이며 성공의 지름길을 달려가는 중산층의 저 사내. 할 일이 있으므로 불평할 일이 없고, 우리는 배부르게 먹는다. GNP를 먹고, 과거를 먹어치운다.
언제나 뒤돌아보며 반성하면서도 실제로는 전혀 변하지 않으며 깨달음을 실천으로 옮기지 않는 것이 미들 클래스의 특징이다. 바로 그런 덕분으로 서울에 거주하는 시민의 20%가 자신은 중산층이라고 믿고 산다. 바로 나 자신이 내가 흉보는 그 아줌마고 아저씨다.
5.
체셔의 페이퍼가 문제인가? 가끔 야리꼬리하긴 하지만 그게 논쟁거리가 되는 일 자체가 민망하다. 그런데 그걸 가지고 이러쿵저러쿵 하시는 분들, 가만히 한 번 돌이켜 생각해보시라. 어쩐지 스스로 매달 아파트 반상회 있으니 나오라고 쫓아다니는 아줌마 같지 않은가. 불참할 시엔 5,000원 벌금이고, 우리 아파트 공동체의 안전과 위생을 염려하여 아파트 내부의 작은 마당에 침 뱉으면 벌금 2,000원이다. 성질 꼬장꼬장하고 더러운 여편네나 수위에게 재수없이 걸리기 전까진 누가 봐도 시비거는 사람 하나 없다.
왜냐하면 이 조그만 아파트촌에 살면서 서로 시비걸어 좋을 것이 없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걸면 걸린다. 왜? 우리는 알라딘 아파트에 같이 사니까. 옆집 혼자 사는 여자네 집에서 가끔 이상한 신음소리가 들린다. 오며가며 마주쳐도 나와는 인사도 제대로 안 하는 싸가지 없는 것이 남정네들에겐 인사도 잘 하고, 눈웃음도 살살 치는 것이 이것이 사람 잡을 '뇬'이다. 뿐더러 우리 집 남정네가 그 여자 누구냐고 관심도 보인다. 가만 보아하니 가끔 낯모르는 남정네들도 다녀가는 눈치다.
내가 이렇게 아파트에 비유해서 이야기하는 것이 못마땅하다고 치자. 블로그가 아파트냐고? 아니다. 그렇다면 당신은 왜 같은 아파트 사는 사람처럼 시비냐? 우리가 알라딘 아파트에 분양받아 같이 사는 처지니까, 알게 되고, 오며가며 부딪친다고 시비 거는 거 아니라면 여자 혼자 산다고 우습게 보는 꼴밖에 더 되나? 블로그는 공공의 공간인가? 아니면 사적인 공간인가? 솔직히 블로그엔 이 두 가지 속성 모두 있는 거 아닌가? 아파트처럼 혹은 고시원 벌집처럼... 우리가 언제 알라딘에 주민 자치위원회 만들고 누군가에게 완장 채워준 적 있나? 없다!
6.
체셔의 서재에 대해 야하다느니 어린 친구들도 들어오니까 자제해야 한다면서 불만을 말하는 사람들도 있다. 그렇게 말하지만 아파트 정문만 벗어나면 자동차 옆 운전석마다 외로와서 안달난 남자들을 꼬시는 예쁜 언니들 명함이 빼꼭하게 꽂혀있다. 아파트 정문 안에서 누가 붙이면 욕하고 수위 아저씨 부르고 난리겠지만, 정문만 벗어나면 아무 일 없다. 그래서 난 그 사람들 솔직하다고 본다. 거기에 대고 표현의 자유니 뭐니 이야기하며 대신 변명해주는 사람들도 있다.
솔직히 이거 그런 식으로 거창하게 말할 필요도 없는 일이다. 체셔가 서재의 유명인이고 즐겨찾는 사람이 많은데다 가끔 댓글이랑 추천이 넘쳐서 알라딘 서점의 화제 페이퍼로 올라가서 문제인가? 그래서 고작 한다는 소리가 댓글 수 조절하는 법, 화제의 페이퍼로 오르지 않는 법을 강의 받아야 하는가? 이거 꼭 아파트 반상회에서 밤늦게 세탁기 돌린다고 성토대회 하는 거 같지 않은가 말이다. (정, 문제를 삼고자 한다면 서재를 운영하는 개인에게 돌릴 일이 아니라 화재의 서재 글에 오르길 원치 않을 수 있도록 선택할 수 있는 기능을 제공하라고 알라딘에게 요구할 일이다. 블로그 메타사이트에 오르지 않길 바란다고 번번이 클릭하는 일도 솔직히 짜증나지 않는가 말이다.)
이건 아무리 많이 봐줘도 그냥 촌티 팍팍 내는 거밖에 안된다. 거기에다 대고 표현의 자유 운운하는 거 역시 돼지 목에 진주 걸어주는 거다. 자꾸 그런 식으로 별것도 아닌 거 가지고 거창하게 폼잡으면서 토론하자, 논쟁하자고 하니 알라딘마을이 재미있는 건지도 모르겠다. 그런데 이렇게 재미나게 놀고들 있으면서 누군가는 누구 편든다고 또 시비다. 그러면서 지난 논쟁 들척거리며 알라딘은 이런 끼리끼리 의식이 문제란다. 사실 따지고보면 그렇게 문제제기한 사람 자신도 그 끼리끼리주의 때문에 문제제기한 거다. 사실 그때 논쟁의 결론은 하나였다. 그래서? 니 맘대로 생각해!
7.
나도 알라딘 사람이라 가끔 엇박자로 돌아가는 세상에 휘둘리긴 마찬가지인 불쌍한 중생이다. 마지막 버스가 지나갔고 우리는 다음 버스를 기다리지만 솔직히 우리는 기다릴 것도 없다. 그래서 결론이 뭐냐고? 없다. 그냥 이렇게 지지고 볶고 놀자. 하지만 한 가지는 분명하다. 눈에 좀 거슬려도 참아라! 나도 네가 꼭 마음에 드는 건 아니니까. 어차피 알라딘의 평화란 건, 어느 순간 미친 놈 하나만 작심하고 뛰어들면 금방 망가질 정도로 위태로운 거 아닌가? (마태님 잠적하고, 또 상처 받은 사람들 몇몇은 나 이제 서재질 안 해. 하면서 놀이터에 안 온다. 그렇게 튀는 애들, 재미난 애들 한둘 보내고 나면 놀이터 정말 재미없다.) 한 사람 바보 만들고 놀면 처음엔 재미는 있다. 그런데 그런 식으로 몇 번 놀고나면 싸한 분위기 오래간다. 미안하다, 짜증내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