처음처럼을 들이키며!
20-20-20
내가 그를 만났다!
언제였던가. 스무살. 그때였다.
<감옥으로부터의 사색>을 읽고 이십대에 감옥으로 끌려가 20년이 넘는 세월을 감옥에서 생활한 그의 강연을 듣는 날. 스무살은 어찌 해도 방방뛰는 나이였으니 앉아서 그의 강연을 들을 때만 해도 ‘지루해’라는 느낌이 들려고 했다. 혁명투사의 이미지, 투옥될 정도의 혁명가의 이미지로 '투쟁' '투쟁' 할 거라 생각을 했던 건지도 모른다. 강연은 좀더 큰 목소리로 외치는 것에 익숙했기 때문인지 그의 조용조용하고 차분한 음성의 말들이 흘러가는 것이 내 뛰는 심장의 속도와 일치하지 않았던 것이다. 그렇게 강연이 끝나고...되돌아가는 길, 그리고 집으로 돌아와서부터 내 심장이 다르게 뛰기 시작했다. 그제야 나는 귓전에 울리는 그의 목소리, 그의 숨소리, 그의 몸짓, 그의 글들이 생각나기 시작한 것이다. 그렇게 조용한 그의 음성은 차분히 나를 뒤따라와 아주 오래도록 머물렀다.
아버지로부터
또한 그 시절의 많은 청춘들이 그러했듯이 나는 신영복 또한 시골 출신의 가난한 농군의 아들인 줄 알았다. 흔히들 하는 말로 소팔고 논팔아 서울로 공부하러 보낸 가난한 농사꾼의 아들. 그리하여 그들 부모님은 어떻게 되었을까. 얼마나 놀라고 무서웠을까, 걱정하게 되는 그런.
그러나, 다행이라고 해야 할지, 그의 부모는 아들의 수감에 잘 견디어냈을 듯했다. 아마도 신영복의 가치와 신념이 그의 아버지로부터 전해졌을 테니 말이다. 신영복의 아버지 역시 지식인이었다. 그의 아버지 신학상은 대구사범학교를 나온 교사로 평생 교직에 몸담았다. 한때 국회의원 선거에 출마하기도 했지만 천생 학자로 늘 책상에 앉아 무언가 집필하고 있었고 여든둘에 <사명당의 생애와 사상>, 여든다섯에 <김종직의 도학사상>이라는 책을 펴냈다. 그의 아버지는 1995년 여든여덟 나이로 타계하셨으니 돌아가시기 전까지도 책을 쓰셨던 것이다.
신영복의 고향은 경남 밀양으로 밀양과 의령에서 어린시절을 보냈다. 그의 아버지가 교장으로 근무한 경남 의령의 간이학교 사택에서 태어났고 유년시절은 아버지의 고향인 밀양에서 고등학교는 부산에서 졸업했다. 그러니까 그는 가난한 농군의 아들은 아니었던 것이다. 그의 아버지는 밀양교육감을 역임했고 국회의원에 출마했다가 낙선하면서 가세가 기울긴 했지만 말이다.
청춘의 시절에
가세 때문인지 그는 부산상고에 진학하고 한국은행 면접시험 대신 서울대에 시험을 봤고 합격했다. 당시국어 선생님의 권유였다. 그렇게 들어간 대학에서 1, 2학년 때는 가정교사 일로 바빴고 공부따라 가기 바빴다. 그러다 4.19와 5.16을 겪으며 그가 본격적으로 학생운동에 발을 들여놓게 된 것은 3학년, 1961년이다. 군사정권이 들어선 현실에서 장기적인 학생운동의 필요성을 절감하며 서울 상대에 독서 동아리를 만들게 된다. 경우회, CCC 산하 경제복지회, 동학연구회, 고대연대 학생 동아리 세미나 등에 참석하고 마오쩌둥, 마르크스, 케인스, 슘페터, 고리키들의 책을 읽었다. 대학원을 마치고 1965년 무렵에는 숙명여대 강사로 경제학을 가르쳤다. 강사로 있으면서 <청맥> 잡지의 예비 필자 모임 새문화연구회 모임에 안병직 등 선배를 따라갔다가 선배인 김질락을 만나게 되었다. <청맥> 은 통일혁명당의 핵심인물들이 당의 합법 기관지로 설정한 잡지로, 종종 반미적인 논설이 실렸다. 어느날 김질락과 이진영 등이 신영복에게 혁명을 지지하느냐 물었고 그렇다고 대답하면서 따로 만나게 되었는데 이것이 나중에 통혁당 산하의 민족해방전선으로 발표된 모임이라 한다. 통혁당 사건으로 김종태, 이문규, 김질락 등은 사형되었고 무기징역을 받은 신영복이 살아 있는 사건 관련자 중 가장 핵심적인 인물이 되는데 신영복은, 사건이 일어날 때까지 핵심 간부들이라 불리는 이들을 한번도 만난 적이 없다고 한다. 심지어 김종태는 이름도 들어보지 못했다 한다. 그리고 김질락과 이진영이 따로 만난 것은 5번 정도라고 한다.
<더불어 숲(신영복 홈페이지) http://www.shinyoungbok.pe.kr>
그렇게 신영복은 통일혁명단 사건의 주동자로 엮이게 된다. 모진 고문을 받았고 그가 활동했던 모든 행적들이 조직적인 관곌 규정되어 수사 기록으로 남겨졌다. 고문을 받으면서 그는 ‘원숭이 엉덩이는 빨개’라는 노래가 생각났다고 한다. 수사기관의 논리, 무엇이든 갖다붙여 벗어날 수 없는 수사기관의 연상법 놀이.
‘통일혁명단(통혁당사건)’은 1968년 일어난 대규모 간첩사건이다. 거물간첩 김종태가 운수업으로 위장하여 북한노동당의 재남지하당인 통일혁명당을 조직하고 전(前)남로당원·혁신적 지식인·학생·청년 등을 대량 포섭하여 결정적 시기가 오면 무장봉기하여 수도권을 장악하고, 요인암살·정부전복을 기도하려고 하다가 일망타진된 사건이다. 이 사건에 관련되어 검거된 자는 158명으로 문화인·종교인·학생 등이 다수 포함되어 있었다. 이들 중 73명이 송치(23명은 불구속)되었는데, 김종태는 1969년 7월 10일 사형이 집행되고, 이문규 등 4명은 9월 23일 대법원에서 사형이 확정되었다. 당시 그는 1966년부터 육군사관학교에서 경제학과 교관으로 활동하던 중이었기에 군사재판에 회부되었는데 1심에서는 사형, 대법원에서는 무기징역을 선고 받았다가 최종 무기징역을 선고받고 안양과 대전, 전주교도소에서 복역했다.
성폭력, 살인 등으로 감옥에 가는 이들의 형량이 10년을 넘는 것을 보지 못했다. 허접한 수사와 당연한 귀결로 결론맺은 이 사건으로 무기징역 선고도 개탄받을 일이긴 하지만 무려 20년이 지나서야 가석방으로 감옥문을 열고 나올 수 있었다. 청춘의 그가 중년이 되어 세상을 밟았다. 당연, 세상을 어떻게 살아야 할까에 대한 걱정이 없을 리 없다. 다행히 그는 한한기 후에 성공회대학교에서 교편을 잡을 수 있었다.
휴지와 봉함엽서 속의 살아있는 글
그는 오래도록 살았다. 감옥에서. 언제 끝날지 모르는 수감 생활. 무기징역이라는 선고를 받고 감옥에 갇힌 젊은 청년의 심경은 어떠했을까. 그 시대가 수많은 젊은 청춘을 감옥에 몰아넣었다. 그 시대의 특정한 이들이 많은 이들의 영혼을 억압하고 신체를 억류할 권리를 부여받은 듯이 행동했다. 그리고 다시, 그것들이 활개를 치고 있다.
그는 감옥에서 책을 읽었고 글을 썼다. 그러나 읽을 수 있는 책 수는 제한적이었고 글을 쓸 종이도 없었고 검열도 당했다. 20년하고도 20일의 시간 동안 그는 부모님, 형수, 제수에게 편지를 썼고 그렇게 그가 옥중에서 쓴 편지들이 책으로 엮이게 되었다. 그는 휴지와 봉함엽서 속에 가족에게 보낼 글들을 띄웠던 것이다. 그렇게 1976년부터 1988년까지 감옥에서 그가 감옥에서 휴지와 봉함엽서 등에 써내려간 글들이 『감옥으로부터의 사색』이다. 어떻게 그러한 힘든 일을 겪고도 사람의 마음이 고요하고 예쁠 수가 있는지를 보여주는 산문집이다.
그리고 그 상황 속에서도 글을 쓸 수 있다는 것도. 그는 사형선고를 선고 받고 곧 글을 쓰기 시작했다. 첫 번째 책이 바로 <청구회 추억>이다. 1966년 봄 서오릉으로 가는 소풍길에서 만나 약 2년 동안 우정을 나눈 여섯 어린이들과의 추억을 담은 글이다. 이 글 역시 교도소 두루마리 휴지에 볼펜으로 기록한 것이다. 그의 글들은 이렇게 흐물흐물 사라질지도 모르는 아주 얇은 휴지 속에 위태롭게 기록되어 있다. 그렇기에 더욱 애잔하다.
교도소의 생활들을 어떻게 한마디로 표현할 수 있으랴. 다만 그의 책의 제목처럼 그에겐 그 긴 시간이 ‘사색’의 장소가 되었다. 그가 그렇게 만든 것이다. 물론 그는 다른 장소에서도 역시 ‘사색’하는 인간이었을 것이다. 교도소에서 그는 다양한 사람들과 많은 책들을 만났다. 대전교도소 복역 시절에는 남파공작원 출신 한학자 노촌(老村) 이구영(李九榮)과 4년간 한 방을 쓰면서 한학과 서예를 익혔다. 이구영 선생과의 만남은 그를 동양고전에 대한 깊이 있는 독서를 가능하게 했다고 한다. 그리고 그렇게 동양고전을 접하면서 ‘관계의 철학’에 대한 보다 깊은 사유를 할 수 있었다고 한다.
그가, 감옥생활을 하면서 자살하지 않은 것은 두가지 이유라고 한다. 햇빛과 그가 죽으면 슬퍼할 가족, 친구들이다. 그가 있었던 방은 북서향으로 2시간쯤 햇빛이 들어오는데 가장 햇빛이 클 때가 신문지 펼쳤을 때 정도였다 한다. 그 햇빛을 무릎에 올려 놓고 앉아 있을 때 정말 행복했다고 한다. 내일 햇빛을 기다리고 싶어 안죽었다고, 그는 그렇게 말한다.
처음처럼을 마신다!
원샷! 원샷!
소주회사는 처음처럼이라는 도수 낮은 소주를 내놓았다. 이름은 처음처럼. 이 처음처럼이란 글자, 어딘가 낯설지 않다. 세상에, 신영복 글씨란다. 세상에, 신영복 선생님이 소주회사에 글씨를 넘겼단 말이야? 놀라고. 놀라고.
성공회대학교 퇴임 무렵 두산에서 브랜드명과 상표 글씨체로 시 <처음처럼>의 제목과 글씨를 사용할 수 있게 해달라고 했단다. 그래서 그는 수락하고 1억 원을 받는데, 성공회대학교에 기부했다 한다.
그의 그림과 글씨체는 이미 유명하다. 그는 감옥에 서예반이 생기면서 만당(晩堂) 성주표(成周杓)와 정향(靜香) 조병호(趙柄鎬)에게 지도를 받았다 한다. 그는 자신만의 서체를 구사하고 많은 글씨와 그림들을 창작한다. 그리고 그의 붓글씨는 '신영복체', '어깨동무체', '협동체, '연대체'로 불리며 곳곳에 그의 흔적을 남기고 있다.
참고 자료
•신영복의 60년을 사색한다 -한겨레21[2006.05.16 제609호]
•한길사 '사회와 사상 제 15호':대담/인터뷰 통일혁명당사건으로 20년 만에 가석방된 신영복씨 - 월간 '사회와 사상' 1989년 11월 통권 제15호
•다음 백과사전, 신영복(브리태니커)
•네이버 지식백과, 통혁당사건(두산백과)
•더불어 숲(신영복 홈페이지) http://www.shinyoungbok.pe.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