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누구의 글을 읽고 있는 것일까


   


세계 최고의 여행기 열하일기, 박지원 지음, 고미숙・길진숙・김풍기 엮고 옮김


  이 책의 글 하나하나를 써나간 자는 연암 박지원이다. 그러나 18세기 연암의 문체를 오늘날의 언어로 번역하고 책의 전체적인 뼈대를 정리한 것은 편역자이다. 물론 그에 앞서 연암의 글들을 모아 정리한 것은 연암의 자제들이다. 따라서 글, 문장 하나하나에 대해서는 연암에 대한 감상이겠지만 책이라는 틀에 대한 논의는 글들을 정리하고 뼈대를 세운 편역자들에 대한 당부이다. 

  열하일기는 6개월의 여행의 기록이다. 시간의 흐름과 장소의 이동에 따라 글을 적고 있다. 가는 여정에 따라 제목을 붙여 총 7편으로 분리하여 기록하고 있으며 어떤 기록에는 서장을 첨부하여 그에 대한 부언을 첨부하고 있다. 

  장소를 이동하는 여정 속에서 연암은 생활과 풍경에 대한 묘사와 감흥에서 나아가 그곳에서 만남 사람들과의 필담, 청나라 문물에 대한 묘사를 기록하고 있는데 일기에 적은 것 이외에 따로 좀 더 자세한 글들을 정리하고 있으며 일기에 소개하고 있다. 따라서 연암이 쓴 글들이 일기와 맞물려 읽고 싶은데 편역자들이 이를 적절하게 배치하여 일기 속에 언급한 이야기들을 연결되도록 구성하여 흐름이 끊이지 않도록 연결될 수 있게 하였다.  

  한편, 내가 연암이라 6개월 간의 여정을 일기로 쓴다면 어떤 방식일까를 생각해 본다. 그날 그날 겪은 일들에 대한 감상을 나열할까. 아니면 뚜렷한 목적을 가진 내용을 다룰까. 연암의 일기는 비교적 연암처럼 그 당시 생경한 경험을 여행기 속에 기록하되 보다 청의 문물에 대한 묘사와 자신의 사상을 설파하고 뒷받침하는 것이 주된 형태였던 것으로 보인다. 이러한 관점에서 목적을 가지고 하나의 주제를 가지고 사물을 바라보며 그에 대해 기록하는 것도 좋은 방식으로 보인다. 사실, 감흥이란 그 장소에서 그 때에서야 느낀 감정일 수 있으나 되돌아 보면 그곳이 아닌 다른 곳에서도 충분히 맞닥뜨릴 수 있다는 점에서 여행기의 기록은 감상적이기보다는 조금 더 그 나라와 생활에 대한 묘사와 설명이 이뤄지는 형태가 와 닿는다.


  연암의 문체는 읽으면 읽을수록 빨려가는 듯하다. 그리하여 어느 한 구절만을 달랑 뽑아낼 수 없다. 그리하여 벽돌에 대한 묘사이든, 수레에 대한 의견이든, 그 논쟁적으로 접근하는 글귀에도 문장 전체에 집중하게 된다. 또한 여행기로서 중국 문화와 습속에 대한 묘사 이외에도 가는 여정에서 느끼는 풍경과 그 속에서 느끼는 연암 자신의 마음들에 대한 묘사가 인상적이다.

  여행기에 대해서는 한편으론 감상적이 되기도 하여 호곡장에 대한 서술, 도와 경계 사이의 대화, 아홉 번 강을 건너며 보고 느끼는 감상이 기억에 남겨진다. 어려운 내용도 아니거니와 나 또한 어느 곳 어디에선가 깊은 깨달음으로 맞닥뜨릴 수 있는 감정이라 쉬이 감정이입이 되어 편안하게 다가오기 때문일 것이다.

 몇 구절을 뽑아서 실어본다면 막북행정록에서의 이별에 대한 묘사와 다음의 묘사가 생각난다. 아마도 이 부분은 글보다는 분위기가 자아내는 느낌 탓에 기억이 더 날 터였다. 밤에 홀로 성 밑에 앉아, 별빛 아래서 먹을 갈아 글을 쓰고 보자니, 먹을 갈 물이 없어 술통의 물을 부어 글을 쓰는 그 상황에 눈 앞에 그려지면서 웃음과 또한 애잔함이 묻어난다.


 세 겹의 관문을 나온 뒤, 말에서 내려 장성에 이름을 새기려고 패도를 뽑았다. 벽돌 위의 짙은 이끼를 긁어내고 붓과 벼루를 행탁(행장을 넣은 여행용 전대나 자루) 속에서 꺼냈다. 꺼낸 물건들을 성 밑에 주욱 벌여 놓고 사방을 둘러보았으나 물을 얻을 길이 없었다. 아까 관내에서 잠깐 술을 마실 때 몇 잔을 더 사서 안장에 매달아 두었던 것을 모두 쏟아 별빛 아래에서 먹을 갈고, 찬 이슬에 붓을 적셔 크게 여남은 글자를 썼다. 이때는 봄도 아니고 여름도 아니요 겨울도 아닐뿐더러, 아침도 아니고 한낮도 아니요 저녁도 아닌, 곧 금신(金神)이 제때를 만난 가을철인 데다 이제 막 닭이 울려는 새벽녘이니, 이 모든 것이 어찌 우연이기만 하겠는가.

 - 막북행정록 -


 또한, 연암 스스로 도를 알았다고 서술한 ‘하룻 밤에 아홉 번 강을 건너다(일야구도하기)’ 편은 그 상황과 맞물려 글에서 자아내는 느낌과 글이 좋게 다가온다.


    “낮에는 강물을 볼 수 있으니까 위험을 직접 보며 벌벌 떠느라 그 눈이 근심을 불러온다. 그러니 어찌 귀에 들리는 게 있겠는가. 지금 나는 한밤중에 강을 건너느라 눈으로는 위험한 것을 볼 수 없다. 그러니 위험은 오로지 듣는 것에만 쏠리고, 그 바람에 귀는 두려워 떨며 근심을 이기지 못한다.

    나는 이제야 도를 알았다. 명심(冥心, 깊고 지극한 마음) 이 있는 사람은 귀와 눈이 마음의 누가 되지 않고, 귀와 눈만을 믿는 자는 보고 듣는 것이 더욱 섬세해져서 갈수록 병이 된다. 지금 내 마부는 말에 밝혀서 뒷수레에 실려 있다. 그래서 결국 말의 재갈을 풀어 주고 강물에 떠서 안장 위에 무릎을 꼰 채 발을 옹송거리고 앉았다. 한번 떨어지면 강물이다. 그땐 물을 땅이라 생각하고, 물을 옷이라 생각하고, 물을 내 몸이라 생각하고, 물을 내 마음이라 생각하리라. 그렇게 한 번 떨어질 각오를 하자 마침내 내 귀에는 강물 소리가 들리지 않았다. 무릇 아홉 번이나 강을 건넜건만 아무 근심없이 자리에서 앉았다 누웠다 그야말로 자유자재한 경지였다.“

 - 하룻 밤에 아홉 번 강을 건너다(일야구도하기)-


  열하일기를 읽는 순간부터 처음에 맞닥뜨린 건 이질감이었다. 현대적 언어에 익숙하다 할지라도 당연 18세기의 저서를 읽으면 어려움이 있을 것이고 18세기의 그 느낌을 얻을 거라 생각했는데 그렇지 못한 것이다. 나는 너무도 평탄하게 글을 읽고 있었다. 순간 지금 이 글이 연암의 문체가 맞는가, 얼마만큼 현대적인 문체로 번역되었는가, 이런 것이 생각나면서 읽어보지도 못하겠지만 연암이 쓴 문장 자체를 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기도 하였다.

 동시에 이 책의 대상이 청소년들이라는 문장을 보는 순간 성인을 대상으로 한 책이 필요해라는 어이없는 생각까지도 하게 되었다. 낯선 시간의 기록을 진입하는 과정에서 교과서를 보는 듯한 기분이 들었기 때문이다. 물론, 지난 시대의 기록을 위한 사전 배경 설명이 있다는 것은 본문을 이해하는데 길잡이가 되어 도움을 줄 수 있다. 하지만 만화 속 캐릭터 같이 사행단 멤버들의 성격과 행동을 서두에서부터 명확하게 명시해 본문 속에서 그들의 관계와 특징을 찾아가는 묘미를 상쇄시키고 있다는 점이 매우 아쉽다. 굳이 친절한 안내로서 등장인물의 특징을 정의하는 것이 필요하다면(이 부분은 삭제되어도 무방하다고 보지만) 하권에 연암의 일기가 끝난 뒤에 배치하였으면 한다.

  본문 중에 따로 찾아보지 않아도 되게끔 삽화와 부연 설명을 통해 내용의 이해를 덧붙여 주고 있는 점은 글을 읽는 입장에서는 매우 편한 부분이다. 그러나 본문의 많은 삽화와 부연 설명이 있는 것에 비해 전체적인 부연 설명, 즉 당시의 시대적 상황에 대한 개략적인 설명이 부가되었더라면 더 좋았을 듯하다. 당시의 시대가 혼란과 격동의 시기였던 것만큼 당시 조선시대의 분위기와 더불어 국외, 서양의 상황은 어떠했는가라는 분위기를 조금이라도 읽을 수 있었으면 박지원의 일기와 글들에 대한 이해도 전체적인 견지에서 어울려 생각할 수 있지 않았을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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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존하는 독일 최고의 책

    

저자 요한 페터 에커만 


  이 한권을 위해, 아니 엄밀히 말하면 출판사에서 2권으로 출간하였으니, 2권을 위해 전생애를 바친 요한 페터 에커만의 생애가 기억이 남는다. 그의 생애가 요즘으로 따지면 을의 인생, 열정페이를 강요받는 느낌이 들었는데 이 책의 제목이 『괴테와의 대화』임에도 저자가 괴테라고 생각하는 사람이나 여전히 괴테만 기억하는 사람에게 꼭 이 책의 저자는 요한 페터 에커만이라고 외치고 싶다!


  니체가 “현존하는 독일 최고의 책”이라고 평한 『괴테와의 대화』는 민음사 판 전2권으로 되어 있다. 저자가 괴테와의 만남에서 있었던 대화를 기록한 것으로 1권에는 1부와 2부, 2권에는 3부가 연도별로 정리되어 있다. 그러나 2권에 연도가 중복되어 나타난다. 저자는 괴테 사후 약 10년 동안 천 번의 만남을 통해 괴테와 대화한 내용을 메모하여 기록한 것으로 1836년 1부와 2부를 출간하였다. 이후 인기가 좋아 1848년 괴테와의 대화를 기억하여 출간한 것이 제3부이므로 연도가 중복되어 나타나고 있다. 또한 3부는 저자 이외 오랜 동안 괴테와 교류한 제네바 출신의 자유로운 공화주의자 소레가 괴테와의 만남을 일기에 적은 내용이 첨부되어 있다. 소레가 그가 기록한 내용들을 연대순을 편입해 달라고 부탁했고 저자는 소레가 기록한 것을 보충하고 거기서 빠진 공백들을 채워 넣으며 3부를 완성하였다. 특히 소레의 내용을 상당히 활용한 부분은 구분하기 위하여 따로 표시하고 있는데 1824년에서 1829년에 이르는 부분, 1830년, 1831년, 1832년이 그러하다. 전체적인 내용이 괴테와의 대화를 중심으로 기록하고 있다면 3부의 초기 년도에서는 사건을 나열한 듯한 인상을 받았는데 그것이 소레의 일기를 바탕으로 한 부분이었다.

  이 책은 괴테와 저자 사이의 대화 내용이 주가 된다. 그리고 괴테의 가족과 친구들, 괴테가 만난 예술가와 학자 등-나폴레옹, 헤겔, 실러, 베토벤 등-와 나눈 대화가 수록되어 있다. 이들 대화는 일상적인 대화를 넘어 다양한 내용을 담고 있는데 그것은 괴테 자신의 작품에 대한 내용, 세계 문학대가들에 대한 괴테의 생각과 해석, 정치에 대한 관점, 당대의 문학과 예술에 대한 관점, 종교에 관한 관점, 자연과학에 대한 관점, 삶의 지혜에 관한 생각 등 괴테의 삶과 철학이 담겨 있다.


  대화는 상호간에 주고받는 말이다. 대화에서는 화자와 청자의 역할이 나뉘며 담화의 내용에 따라 역할을 달리하게 된다. 『괴테와의 대화』는 괴테와 저자의 10년 동안의 만남 속에서 이루어진 대화가 주 내용을 이루고 있는데, 상호간의 대화가 무색할 만큼 괴테의 일방적인 언행들이 주를 이룬다. 괴테의 말에 대해 저자는 호응하거나 혼자 감탄하거나 하면서 괴테가 전하는 내용들을 기록하고 있다. 그러나 연도가 지날수록, 그러니까 세월이 지날수록 이러한 형태의 대화는 조금의 변화양상을 보인다. 괴테의 일방적인 말씀 전하기가 아니라 저자 또한 일정 부분 대화의 주도권을 가진다는 것이다. 괴테의 논리에 반박하며 자기 주장을 펼치며 의견을 피력하고 자신의 견해를 서술하기도 하는 것이다.

  같은 문학을 꿈꾸는 자로서 또한 시집을 낸 시인으로서 저자는 대문호 괴테에게 가려져 아무런 꽃을 피우지 못한 듯이 보였다. 니체가 최고의 작품이라 평했지만 저자에 대한 명성이나 문학적인 찬사가 아니라, 그저 ‘괴테’를 더욱 더 알 수 있는 연구로서 이 책이 세상에 기억되고 있다. 그렇기에 저자에 대한 안타까움과 서글픈 감정이 지속되었는데, 저자 자신이 괴테를 사랑하고 존경하고 있고 그 오랜 기간 동안 스스로도 괴테의 영향 아래서 정신적으로도 더욱 성숙하고 자신의 관점을 정립하게 된 듯하여 이것이 매우 뜻깊게 다가왔다.

  뿐만 아니라 그 자신도 문학에 대한 열정을 가지고 있었기에 괴테의 작품을 정리하는 일을 도우면서 그 자신의 관점과 문학적인 열성으로 괴테의 작품을 정리하고 새롭게 조언하는 내용을 보게 되는 것이 기쁘기 그지없었다. 그러니까, 저자 또한 시간의 흐름과 함께 성장하고 있었던 것이다. 아마도 그것을 가장 잘 보여주는 것이 에커만이 여행길에서 괴테에게 보내는 편지가 아닌가 한다. 그것은 진실로 에커만이 자신의 내면을 들여다보고 자신의 갈망을 표출하며 자신과 마주한 모습이었다. 그리고 결과를 떠나 자신의 목소리를 괴테에게 전달했던 또 하나의 표현이었다. 그러니까 이 책 전반에 나타난 괴테의 지식과 혜안들에 놀라지만, 지극히 조심스럽고 경외감으로 표현된 에커만의 어조들을 보는 것이 은근히 기억에 머물게 된다. 이 책을 쓰게 된 내용, 그가 괴테와 만나기까지의 과정 등, 그 기록들 속에서 저자 에커만을 마주할 수 있어서 좋다.

 괴테의 말들은, 그의 수많은 작품 속에서도 우리가 알 수 있었을지 모른다. 그러나 작품을 통해서도 알지 못하는 많은 공백들을 저자가 10년 동안 대신 물어 줌으로써 괴테를 통해 그 작품들이 창작되고 그에 대한 여러 감흥들을 엿볼 수 있던 것 또한 좋은 부분이었다. 결국, 아닌 듯해도 이 작품은 괴테라는 넘을 수 없는 바위를 조금씩 조금씩 두들겨 대는 저자를 통해 사람들 가까이로 바위가 이끌려 올 수 있었던 것이 아닐까.


  이 책은 연도순으로 괴테와의 대화를 기록하고 있다. 처음부터 일기 형태로 기록되었기도 하였고 괴테와의 만남의 순간들에 대한 기록이기에 어찌 보면 연도순의 일기 형태가 가장 무난한 구성인 듯 보인다. 그리고 이 형태로 구성된 것은 당시의 이야기의 맥락에 따른 내용이해를 제고할 수 있다는 점이 주요하다고 저자는 말하고 있다.

  그러나 이 작품에서 이러한 연도별 기술에서 1부와 2부의 나뉨은 어떤 의미가 있는가. 서술 형태의 변화가 있는 것도 아니고, 괴테와의 만남에서 극적인 사건 변화로 구분지은 것도 아니다. 대화의 주제에 따른 구분도 아니다. 단순히 연도상이 절반 정도를 나눈 것으로 밖에 보이지 않는다. 그렇다면 이러한 부의 나뉨은 별 의미가 없다. 물론 3부는 1, 2부 후에 또한번 출간된 것이라 전체적으로 기록하지 못했던 날들에 대한 추가적인 성격을 가지고 있다고 하니 예외로 한다고 해도 역시, 거기에다가 3부로 덧붙이는 것은 좀 어색하다. 차라리 3부의 내용이 다른 서술 형태이라면, 주제를 달리한 묶음이라면 어땠을까 하는 생각이다. 그렇기에 3부의 내용들은 1부와 2부 사이에 연도와 날짜에 맞추어 각각 삽입한다면 전체적인 전개가 매끄럽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다. 물론 3부에서 참고한 소레의 기록에 대한 표기도 하면서 말이다.

  저자는 인쇄되지 않은 괴테의 편지와 일기 등을 연도별로 검토하면서 편집과 출판에 관한 사항들을 정리하며 다양한 방안을 고려하고 있다. 그는 모든 편지들을 다 실어야 한다고 주장하며 그 이유로 “중요한 의미를 가지는 개별적인 구절들은 선행하고 있는 구절들이나 나중에 나오는 구절들에 의해서 비로소 그 진정한 가치가 드러나고 확연하게 이해되기 때문”이라고 주장하고 있다. 그러나 전체를 출판하기에 무리가 따른다면 부분 부분 베껴 해당 연도별로 묶는 방법도 제시하고 있다. 또한 수신인과 연도별 정리 방법 중에서 연도별을 선호하는데 그 이유는 같은 시간대에 활동했던 이들의 관계를 드러내고, 그 편지를 쓴 이들이 처한 상황과 일을 여러 측면에서 조명할 수 있기 때문이라고 한다. 결국 그가『괴테와의 대화』에서 사용하고 있는 연도별 기록은 이러한 자기 의견을 적용한 책인 것이다.   

  하지만, 이 책 자체가 연도별 구성으로 이루어져 있기에 또 다른 형태의 구성을 제안해 본다. 바로 주제별로 대화의 내용을 분류하는 방안이다. 아마도 이것은 『괴테와의 대화』라는 제목에 부제를 달아야 할 지 모르지만 그 이야기가 나온 맥락의 이해를 떠나, 주제에 대한 심층적인 이해를 할 수 있다는 점에서 고려될 만하다. 특히 『괴테와의 대화』가 담고 있는 괴테의 무수한 생각들을 총합적으로 정리하여 볼 수 있다는 점에서 아주 유용하리라 본다. 여기에 에커만이 생각한 바 있는 정리 방식이 유용한 지지를 해준다.


      결국 우리는 다음과 같이 견해의 일치를 보았다. 예술과 관련된 모든 경구들은 예술에 관한 글을 모은 책에다가 자연과 관련된 글들은 모두 자연과학 편에, 그리고 윤리와 문학을 다룬 글들은 마찬가지로 또 그런 것들만을 모은 책에 포함시키기로 했다. (『괴테와의 대화』1권, p725)

 

   이러한 형식을 고려한다면 다방면의 주제로 이야기가 이루어진 만큼 다양한 주제로 나눠질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큰 카테고리 나뉜다면 다음과 같은 형태로 할 수 있을 것이다.


 첫째, 문학, 철학, 자연과학, 정치학, 종교학

 둘째, 괴테의 문학과 자연과학에 대한 소고

 셋째, 고전론, 희극론, 배우론, 작가론, 시론, 정치론, 괴테의 작품비평


  특정한 주제어를 발췌하여 그에 따라 서술하면 다음과 같은 내용을 선별하여 논의를 전개할 수 있을 것이다.


      고전적인 것과 낭만적인 것

      개별적인 것과 보편적인 것

      데몬적인 것과 오성

      작가의 생산성과 창조력

      이념과 소재

      정신과 자연과학

      인간 존재와 신


  이와 같은 내용이 반복적으로 이루어지고 있어 이를 중심으로 세부적인 내용들을 전개하면 핵심 내용들을 이해하는데 보다 유용하지 않을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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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로틱 아이러니에 빠질 시간

 

  타인의 독서록을 읽는다는 것은 그의 일기를 읽는 것만큼이나 짜릿하다. 어떤 문장과 단락을 좋아하는지 비교해 보기도 하고 세상에 대해 가지는 그의 생각을 읽을 수 있다. 선택하는 책에서 취향을 읽어내기도 한다. 그러하기에 읽어보지 못한 책에 대해서는 “아하, 이런 책이었어?“라는 생각을 읽은 책에서는 ”음, 그렇군“ 하고 읽게 된다.

  구본형의 마지막 수업은 동서양의 문학과 철학 17개의 고전을 다루고 있다. 이를 크게 두 부분, 욕망과 도전으로 나누어 분류하고 각각에 또다른 키워드를 제시하면서 책의 내용을 풀어나간다. 제1부 ’무엇을 욕망할 것인가’에는 젊음, 배움, 도전, 고뇌, 성장, 자유, 정의, 성, 사랑이라는 9개의 키워드를 제2부 ‘모험을 선동하라’는 인생, 지혜, 사랑, 전통, 선택, 여행, 운명, 화해와 공존이라는 8개의 키워드를 핵심으로 선정하고 있다.

  고전 속에서 인생의 의미를 되새김하며 풀어나가는 책으로 고전을 소개하는 내용으로도 무방하다. 따라서 순서대로 읽어나간다거나 할 필요없이 목차를 보고 ‘필’이 오는 제목을, 책을 선택하여 각 장을 독립적으로 읽어도 내용을 이해하는데 전혀 어려움이 없다.

  고전에서 발췌한 부분, 그에 따른 사유의 연결이 이어지며 특히 어느 부분만이 감동적이다라고 하기 어렵게 전반적으로 마음에 와 닿았다. 좋아하던 책은 좋아하였기에, 읽어보지 못한 책을 그렇기에 감동적이다. 그간 저자의 책에서 많이 다루어 익숙한 신화를 제외하고 동양의 고전과 접목한 화두는 또 다르게 다가왔다.

  젊은 시인에게 보내는 릴케의 편지도 좋았고, 자유를 외치는 그리스인 조르바도, 고뇌에 가득찬 베르테르와 라스콜리니코프도, 안티고네 이야기도 좋다. 그들의 이야기가 좋고 거기에 따른 생각 또한 좋다. 오디세우스와 오이디푸스는 익숙함인지 그들의 운명과 인생에 대한 애잔함 때문인지 자꾸 들여다보게 되기도 한다.

  그런데, 프롤로그에서 석가가 아난에게 최후의 순간까지 법을 설하는 장면이 나온다.

  “아난아, 울지 마라. 이별이란 우리에게 피할 수 없는 것이라고 내가 이미 말하지 않았느냐. 태어나고 생겨나고, 조건 지어진 것은 모두 그 자체 안에 사멸할 성질을 품고 있다. 그렇지 않을 수 없다.”

  태어나고 생겨나고, 조건 지어진 것은 모두 그 자체 안에 사멸할 성질을 품고 있다....이 문구로 저자가 떠올려지며 마음이 아릿해지지 시작했다. 그러고 나서 제일 먼저 나온 책이 <젊은 시인에게 보내는 편지>였다. <구본형의 마지막 편지>가 떠오르며 마음이 먹먹해지며 첫 장을 들어가는데 미적거리게 만들어서인지 또한 글쓰기에 대한 글들이 이어져서인지 기억에 남는 장이 되었다. 그 중 한 부분이다.

  

    자기 안으로 침잠하십시오. 그리고 당신에게 글을 쓰게 하는 그 근거를 캐보십시오. 그 근거가 당신의 마음 가장 깊은 곳에 뿌리를 내리고 있는지 살펴보시고 글쓰기가 좌절되었을 때 죽을 수밖에 없는지를 스스로에게 물어보십시오. 깊고 조용한 밤에 스스로 자문해보십시오. 나는 글을 써야 하는가? 답을 찾아 내면으로 깊이 파고드십시오. 그리고 그 답이 긍정적이라면, 당신이 그 진지한 의문에 대해 강력하고 확고하게 ‘써야만 한다’고 대답할 수 있다면 당신의 생애를 그 필연성에 따라 세우십시오. 당신의 삶은 아주 하찮고 무심한 순간이라도 이 충동에 대한 증거가 되어야 합니다. 그런 다음 자연에 다가가 보고, 체험하고, 사랑하고, 잃어버린 것들을 말로 표현해보십시오. 제가 당신에게 해줄 충고는 이것밖에 없습니다. 


 왜 하필 이 책인가?

 

  제일 먼저 떠오른 것은 고전의 선정 기준이었다. 왜 하필 이러한 책들일까? 책으로부터 저자가 강조하는 변화경영의 화두를 이끌어 내는 방식은 익숙하다. 그러므로 인간의 성장과정에서 겪게 되는 다양한 고민과 가치들을 어떤 책에서 이끌어 내느냐는 이 책의 핵심이기도 하다. 책의 선정 기준을 보니 저자가 마지막까지 방송했던 EBS FM 라디오 「고전읽기」에서 방송한 내용을 책으로 엮으며 저자가 남긴 칼럼과 편지들에서 내용들을 취합했다.

  라디오 「고전읽기」에서 소개한 책은 거의가 책에 실려 있다. 빠진 부분은 <박문수전>, <주생전>, <박씨부인전>, <할아버지의 기도>이다. <할아버지의 기도>는 2000년대에 출간되어 고전이라고 하기엔 애매한 근간이므로 제외되었다 하더라도 우리나라 고전만 빠진 것 같아 아쉽다. 특히나 주로 신화속에서 변화경영을 이끌어 내는 저자였던 만큼 저자가 늘 이야기하던 책에서는 안정감과 익숙함으로 편안하게 내용을 이해하게 되고, 우리나라 고전이야기에서 다루는 화두는 어떨까라는 호기심과 낯섬에서 설레임을 일으킨다는 점에서 이 책들이 제외된 것이 조금 아쉽다. 그러므로 익숙하지 않은 책들에서 익숙하지 않은 화두를 읽어내는 혜안들로서 저자가 읽은 다른 책들, 그의 제자들과 함께 호흡하며 읽어 내려간 다른 더 많은 책들에서 이야기를 이끌어낼 2탄을 기대한다. 


 왜 이 키워드인가?

 

  책을 읽기 전 목차를 통해서 먼저 본 것은 어떤 책이 있는가였고 두 번째는 왜 이렇게 나누었을까, 그 다음으로는 키워드였다. 크게 욕망과 도전으로 분류하였고 내면의 가치들에 따른 키워드를 제시하고 있는데 왜 이렇게 분류하고 정리하였을까라는 생각을 거듭 했다. 어떻게 보면 어느 책에서든 저자가 제시한 다른 키워드, 내면적 가치들을 대입해도 별 무리가 없어 보였기 때문이다. ‘사랑’을 한번 보자. 저자는 저자는 도전에서 에리히 프롬의 <사랑의 기술>에서 ‘사랑’을 제시하고 있다. 그러나 이 사랑은 베르테르의 사랑에서도 데카메론, 향연에서도 와 닿는다.

 - 고뇌에 찬 사랑, <젊은 베르테르의 슬픔>

 - 에로틱한 사랑, <데카메론>

 - 관념론적 사랑, <향연>

 - 방법적 사랑, <사랑의 기술>

  그러므로 큰 주제를 두고서 그 주제에 대한 다양한 관점과 형태로 얘기하는 책들을 배치하여 또다시 다양한 시각으로 그 주제에 대해 생각해 보는 방법 또한 흥미로울 듯하다. 인간의 삶에서 요구되는 가치는 다양하고 그 가치에 대한 관념과 사유는 다르기에.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가치들을 어떻게 이끌어 내서 내게로 적용해야 할 지 모르는 많은 이들을 위해서 말이다.


 고전읽기 선동가의 말을 끝으로.....


  우리는 오래도록 고전읽기를 강요받고 있다. ‘고전이 그래서 고전이다’는 말을 만들어낼 정도로. 하지만 고전을 면치 못하면서도 고전을 읽기를 바라는 수많은 마음들이 왜 그런지 생각해 볼 일이다. 내가 당한 것을 너도 당해봐, 하는 심정도 있으려나....아무튼 오래도록 사람들에게서 추천받고 있다면 그 나름의 이유를 맛보는 것이 마냥 나쁘다거나 귀찮은 일은 아니겠지. 그리고 나만의 끌림을 찾지 못한다면 어쩔 수 없는 거고. 매력에 빠져서 헤어 나오지 못한다면 그것 또한 어쩔 수 없는 거고.

  여기, 이 책은 고전에 대한 끌림을 이렇게 말해주고 있다.  

    고전은 바로 불완전한 인간에게 작가가 진실한 언어의 창을 던지는 것이다. 깊은 상처를 입힌다. 그것은 다시 태어나게 하는 사랑의 창이다. 불완전한 인간을 찔러 그 피로 다시 태어나게 하는 것이다. 토마스 만은 이것을 ‘에로틱 아이러니’라고 불렀다. 고전은 나를 바꾸는 지독한 유혹이 아닐 수 없다. 그것은 삶에 기쁨을 쏟아주는 위대한 이야기다. 내면의 가치를 잃었다고 느낀다면 바로 고전을 읽을 시간이다. 삶의 지표를 잃었다고 생각한다면 지금이 바로 고전을 읽을 시간이다. 삶의 황홀을 맛본 지 오래되었다면 내 영혼을 위해 바로 지금이 고전을 읽을 시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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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의 이름은 119104입니다



     


•빅토르 E.프랑클 저, 박현용 옮김, 책에 쓰지 않은 이야기, 책세상, 2012.

•안나 S. 레드샌드, 황의방 옮김, 빅터 프랑클 -죽음의 수용소에서 삶의 의미를 찾다, 두레, 2008.



■ 그의 생에서 ‘강제수용소’는 어떤 의미였을까


  ‘죽음의 수용소에서’라고 번역된 책을 읽으며 이의 저자에 대해서 의사라는 이에게 가지게 되는 일반적이고 고정적인 이미지를 생각했다. 일견 건조해 보이고, 합리적이며, 다른 것에 관심두지 않는 모범생의 이미지. 폭발적이고 격정적인 감정과는 거리가 멀어 보이는 냉철한 이성주의자. 투철한 직업관을 가진 성실한 의사.

  하지만 그 자신이 90세에 써내려간 회고록 『책에 쓰지 않은 이야기』와 안나 S. 레드샌드가 쓴 『빅터 프랑클』을 보면서 ‘의사 빅터 프랑클’이 아니라 한 사람의 빅터 프랑클을 만났다. 그러니까 그의 저서 ‘죽음의 수용소에서’는 원제가 ‘삶의 의미를 찾아서’인 만큼 빅터 프랑클의 인생을 좀더 생생하게 담고 있지 못하고 있었다. 그렇지 않겠는가. 빅터 프랑클은 고작 3년 수용소에서 살았을 뿐이다(이렇게 말하는 것을 이해하고 용서해 주시길! 그 기간이 결코 짧다고 말하는 것이 아니다. 그의 고통이 짧았다고 말하는 것이 아니다). 그의 92년의 생애에서 3년이란 기간은 지극히 한 부분이란 것이다. 물론 그의 생에 전반에 걸쳐 삶의 의미를 찾고자 하며 로고테라피 이론을 창시하게 된 것은 수용소 체험이 절대적이며 그의 삶을 지배하는 부분이지만, 거기서는 의사이자 정신분석가인 빅터 프랑클의 모습을 너무나 잘 보여주었을지언정, 인간 빅터 프랑클을 얘기하기에는 많이도 부족하다.

  그래서 92년의 생애에서 아우슈비츠에서의 3년은 매우 작게 느껴졌고, 수용소의 삶 또한 그가 선택한 것처럼 여겨졌다. 그러니까 그 수용소는 히틀러에 의해 자행된 학살의 장소가 아니라 빅터 프랑클이 그의 로고테라피 이론을 정립시키기 위해 그가 선택한 일종의 정신병원처럼 여겨질 정도였다. 모든 것을 하나로 보는 것은 무리이고 과장임을 안다. 그럼에도 끊임없이 강조되는 ‘의미찾기’에 대한 그의 주장은 수용소의 삶과 경험이 그에게 의미를 준 게 아니라 그의 의미찾기의 일환으로 수용소의 삶이 주어진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 정도이다.

  어쩌면 그가 수용소를 선택한 것은 맞는 말이다. 많은 이들이 강제수용소로 끌려가기 이전부터 그는 미국 이민 비자를 신청했고 1941년 수락 통보를 받았다. 많은 유대인이 강제수용소로 끌려간 시점에서 나이 많은 유대인이 먼저 끌려갔으므로 그는 자신의 부모 역시 끌려 가리라는 것을 알았다. 그리고 그들을 보호해줄 사람 역시 자신뿐이라는 것을, 로스차일드 병원의 신경과장이라는 직책이 그의 부모를 보호하고 돌봐줄 수 있으리란 생각을 했다. 그는 떠날 것이냐 남을 것이냐의 고민 끝에 성당에서 기도하였으나 아무런 응답을 얻지 못하고 돌아왔다. 그 날, 그의 식탁 위에는 대리석 조각 하나가 놓여 있었다. 그의 아버지에 의하면 그것은 유대인 교회에서 나온 조각으로 히브리 문자 한 글자가 새겨져 있었다 한다. “너희 부모를 공경하여라. 그래야 너희의 하느님 야훼가 준 땅에서 오래 살게 될 것이다.”

 그리하여 빅터 프랑클은 남았다. 그리고 다음 해, 수용소로 끌려갔다.


■ 프로이트와 마주하다


  프로이트는 어린 시절의 부모로부터의 양육경험이 개인의 성격을 결정짓는다는 생각을 가진다. 이 프로이트의 사고로 접근한다면 프랑클은 부모로부터 어떠한 양육을 받았기에 그의 성격을 형성하게 되었을까.

 1905년 오스트리아 빈, 유대인 부모에게서 태어났다. 어머니는 랍비 집안이었고 부모 모두 유대교 교리를 엄격히 지켰다. 아버지는 의사를 꿈꾸었으나 돈 때문에 중퇴하여 공무원이 되었다. 어머니가 감성적이고 선하고 자애로운 성격을 가졌다면 아버지는 스파르타적인 인생관과 그 반대의 성격을 지닌 원칙주의자였다. 훗날 그가 심리테스트를 받은 결과 극단적인 합리주의에서 예민한 감정주의에 이르는 폭넓은 기진을 가진 사람으로 나타났는데 각각 아버지와 어머니로부터 영향 받은 것으로 보인다.

 세 살 때부터 의사가 되기를 소원했던 프랑클은 철학과 심리학 서적을 읽고 프로이트를 만나면서 정신과 의사로 진로를 정하게 된다. 그리고 학창 시절, 당대 명성이 자자했던 프로이트에게 서신과 논문을 보냈다. 프로이트는 즉각 답장을 해 주었고 그의 논문을 정신분석학회지에 발표하도록 했다. 그리하여 17세에 쓴 그의 논문, 「긍정과 부정에 대한 연구」가  19세이던 1924년 전문적인 국제 학술잡지에 발표되었다. 그리고 의대생 시절 우연히 그는 프로이트를 만나게 된다. 그때 프로이트는 프랑클의 집 주소를 그대로 외쳤다 한다. 그들의 서신 왕래를 기억하는것이다. 다만, 이때는 프랑클이 아들러의 지도를 받을 때였다. 프랑클은 정신분석에 대해 차츰 비판적이 되었고 정신분석의 몇 가지 부분들-무의식에 존재하는 성적, 공격적 충동이 인간 행동을 결정한다-에 의문을 품고 다르게 접근하는 아들러 정신분석에 흥미를 갖게 된 것이다.


■ 아들러에게서 배우다  


  체르닌가세 6번지에서 태어난 프랑클의 집 맞은편에 개인심리학(사회심리학)자의 창시자인 아들러가 살았었다 한다. 그와 아들러의 운명은 이렇게 연결고리를 가지고 있었다. 아들러의 이론을 주창하는 이들은 아들러 학파로 불리며 그들의 이론-사회적으로 우월해지려는 욕구가 인간의 행동을 결정짓는 힘-을 발전시켰다. 1925년 아들러 학파의 정식 회원이 되어 논문을 발표하거나 기조연설을 하는 등의 활동을 했다. 그러나 곧 이 이론에 대한 의문점으로 일부분을 비판하였기에 이들 개인심리학협회로부터 쫓겨났다. 그리고 그 후 아들러는 다시는 빅터와 얘기하려 하지 않았고 빅터의 노력에도 모른 체 했다. 그러나 빅터는 늘 프로이트와 아들러는 그의 이론을 정립하는데 도움을 주었다고 얘기한다. 무엇보다 제일 큰 영향은 프로이트였으며 그리고 아들러였다.


■ LOGOS


 “존재와 인생이 나에게는 하나의 꿈이 되었네“


  열 다섯 살 무렵 쓴 그의 시의 한 구절이다. 그에게 의미란 중요한 것이었다. 네 살 땐 언젠가 죽을 것이라는 생각이 스치자 잠들기 직전 놀라 일어나게 되었는데 그것은 죽음에 대한 공포가 아니라 삶의 허무함이 인생의 의미를 파괴하지 않을까에 대한 것이었다고 한다. 이처럼 어린 나이에서부터 ‘삶의 의미’와 관련한 질문에 매료되었던 그는 의과대학에 다니고 있을 때 로고테라피 원고를 정리하기 시작했다. 프로이트의 정신분석과 아들러의 사회심리학으로부터 영향을 받았지만 그들의 일부분에 동의하지 않고 진정한 자아, 의미있는 삶을 찾고자 하는 욕구에 대한 관심이 깊었던 그이기에  사람들이 그들의 삶에서 의미를 찾아내도록 도움으로써 정서적 고통을 치료하는 그의 이론, ‘로고테라피’를 발전시켜 가고 있었다. 그리고 24세 무렵에는 이미 로고테라피를 위한 세 가지 주요한 방법까지 생각할 정도로 그의 이론은 이르게 정립되고 있었다. 이러한 자기 생각을 실제로 이용하는 방법을 궁리하며 빅터는 청소년 상담센터를 세워 정신과 의사, 심리학자, 성직자들이 봉사하도록 했다. 당시 청소년 자살율은 매우 높았으나 센터 설립 2년째 빈에서 학생 자살자가 한 명도 나오지 않았을 정도였다. 그리고 그가 뒷날 회상하듯 우연히 광장공포증을 가진 게슈타포와의 대화 도중 자신의 로고테라피 이론 중 역설적 의도를 사용하였던 것이 유효하여 그의 수용소로의 강제 징집이 1년간 유예될 수 있었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수용소에서 그는 자신의 로고테라피 이론을 적용해 볼 수 있는 기회가 되었고 이는 수감자뿐만 아니라 카포, 당원들에게도 유효하게 적용될 수 있었음을 확인했다.

  그리고 그에게 있어 수용소에서 견딜 수 있었던 삶의 의미는, 그가 잃어버린 「의료 성직자」를 다시 쓰려는 의지 때문이라고 확신하고 있다. 그는 실제 마흔 살 생일에 그의 동료가 준 몽당연필과 두 어 장의 작은 친위대 서식 용지에다 원고를 다시 써 내려 갔다. 청소년 시절엔 단편소설을 쓰고 싶다는 꿈을 꾸었는데 사라진 노트를 열병에 걸린 사람마냥 찾아다니는 주인공에 관한 내용이었다는데 마치 수용소에서 잃어버린 원고로 상심하다 다시 작은 종이 조각에 그것을 쓰고 있는 빅터의 모습이 그려진다.

  정신과 의사가 된 후에는 빈 정신병원의 여성 자살미수자 병동을 책임졌으며, 1942년 체코의 테레친 수용소에 수감될 때까지 의사로서의 책무를 다하며 수많은 환자들이 나치의 안락사 계획에 희생되는 것을 막고 그 자신의 이론으로 수용소에서 많은 이들에게 희망을 불러 일으키도록 도왔던 그, 그는 진정 학자였으며 또한 확고한 신념을 밀고 나가는 사람이었다.


■ 그의 이름은 119104입니다


  빅터는 서른 다섯 살에 로스차일드 병원의 간호사인 틸리 그로서를 만났고 결혼을 원했다. 그러나 유대인들의 결혼을 허가하는 관공서는 따로 설치되어 있었고 아이를 낳을 수도 없었다. 임신이 확인되면 강제수용소로 호송되었던 것이다. 전쟁 중 빈에서 결혼을 허가받은 마지막 사람이 되는 그나마의 행운은 있었지만, 틸리는 태중에 있던 아이를 희생시킬 수밖에 없었다. 그의 저서 <의미를 향한 소리없는 절규>는 그 아이에게 헌정한 책이었다.

 이렇게 수용소 아닌 곳에서도 그 어떤 자유도 누리지 못하던 유대인 빅터의 가족은 1942년 아우슈비츠 수용소로 끌려 갔다. 그러나 가족들은 뿔뿔히 흩어졌다. 그의 아버지는 테레지엔슈타트 수용소에서, 어머니는 아우슈비츠로 이송된 뒤 가스실에서, 형은 아우슈비츠 부속 수용소로 이송된 뒤 광산에서 숨을 거두었다. 그의 아내 틸리는 베르겐-벨젠 수용소에서 죽었다. 그의 아내는 스물 다섯이었고 그와 결혼한지 일년도 되지 않았던 때였다. 그리고 그는 수용소에서 석방되고 난 몇 개월이 지난 1945년 가을에서야 그의 아내 틸리의 사망 소식을 듣게 되었다. 그리하여 그의 가족을 다시 만나리라, 자신보다 15살이나 어린 아내가 살아남았으리라는 희망이 무너져 버린 경험으로 많은 이들이 자살을 하지 않을까 걱정할 정도가 되었다.

  실제 수용소에서 빅터는 의사도 아니었고 그저 유대인으로서 119104였다. 노예노동을 하며 그의 가족들을 그리워하며 죽음에의 공포 속에서 생활하면서 그에게 힘이 되는 것은 미래에 대한 생각이라고 깨달았다. 그리고 삶의 의미를 가지고 있던 이들이 살아 남으며 시련 속에서도 의미를 찾으면 그 시련을 견디어 냄을 알았다. 그는 수용소에서도 사람들과 대화를 하게 되면 그들에게 희망을 주려고 노력했다. 그리고 잃어버린 자신의 원고를 쓰는 작업이 또한 그의 생명을 부지하는 데 도움을 주었다.


■ 당신의 삶은 긍정이었습니까?


  프랑클의 책 제목 중에 “그럼에도 불구하고 삶에 대해 yes라고 말하라”가 있다. 그는 그의 삶에서 늘 긍정적이었다. 그것은 그의 의지의 산물이기도 했을 것이고, 그의 천성이기도 했다. 그의 삶에서 항상 의미를 찾으려고 했던 그는 가족 모두가 수용소에서 사망한 것을 알게 된 그 때에도, 그 시련 속에서도 그에게 주어진 의미를 찾으려 했다. 스스로도 밝혔듯이 그는 천성 자체가 삶을 즐기는 편이었다고 회고하고 있다. 누군가가 좋은 행동을 하면 잊지 않지만, 나쁜 행동을 하면 담아두지 않는다고 했다. 그리고 마음이 상하거나 괴로운 일을 대부분 잘 이겨낸다고. 사소한 괴로움에는 화를 냈지만 큰 문제들에는 불평하지 않았다고 한다. 85세 어느 날인가 눈이 멀었음을 알았을 때에도 불평하지 않았다 한다. 그는 단지 이렇게 말했다 한다. “엘리, 나 장님이 됐어.”

 그는 92세까지 살았고, 90세에 그의 회고록을 썼다. 그렇다면 그는 실명을 한 채로 글을 썼다는 것이 된다. 그 때에 할 수 없었던 것은 그가 좋아하는 암벽 등반이었을 뿐이다. 27개의 명예박사 학위보다 알프스 암벽 두 곳을 최초로 오른 뒤 ‘프랑클의 비탈길’이라는 이름을 받은 것을 더 좋아한 그였다. 67세에 첫 비행을 했고 이듬해 솔로 비행을 감행한 그였다. 삶의 많은 부분에 관심을 가지고 있었고 이렇듯 열정적이었다. 단지 공부와 책만 아는 조용하고 학자적인 기질만이 넘쳐나는 사람은 아니었던 듯하다. 또한, 빅터 스스로도 유머러스하다고 하며 강연에서나 대화에서나 언제든 유머와 재치를 활용한다고 한다.

  다양한 분야에 관심이 많아 넥타이에도 관심이 많고 안경테 전문업체가 시리즈를 출시하기 전 초안을 보여줄 정도로 안경테 디자인에도 일가견이 있다고 한다. 그에 의하면 작곡도 좀 할줄 안단다. 그가 작곡한 비가는 공식 오케스트라 연주로 공연되기도 했고 탱고 음악은 텔레비전에서도 사용되었다고 하고, 드라마도 좀 썼고 연기도 한 적 있고....이렇게 그는 다방면에 관심과 재주를 가지고 있었다고 하는데 문득, 이러한 관심들이 그가 수용소에서 겪었던 일들, 수용소에서 가족을 잃었던 그 기억들로 인한 것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본래적으로 그의 천성이 그러할 수도 있지만, 깊은 고통의 기억 속에서 다양한 분야에 눈을 돌리며 관심을 흩뜨리는 이들의 모습이 생각나서다.

  수용소의 기억은 쉽게 사라지지 않을 것이지만 그의 아픈 기억들을 조금씩 치료해줄 새로운 여성이 나타난다. 그렇기에 그의 삶은 또한 긍정이었다. 수용소에서 홀로 살아남아 그 경험에 관한 책을 쓰던 1946년 2월, 그는 빈 폴리클리닉 병원에 신경과 과장으로 취임했다. 수용소의 경험과 가족을 잃은 슬픔은 그에게도 우울증을 주었고 또한 그 자신의 성급한 기질로 언성을 높이는 일이 더러 있었다 한다. 그로 인해 사람들이 그에게 부탁하는 것을 두려워하기도 했는데 그 때, 그의 아내가 된 엘레오노레 슈빈트를 만났다. 그녀의 나이 20세였고 그 병원의 간호사였다. 그는 그녀에게 첫 눈에 반했고 빅터에게 그녀는 수용소의 경험, 인생의 목표 등을 이야기할 수 있는 상대였다. 틸리의 공식적인 사망진단서가 없어 그들은 결혼하지 못하다가 1947년 7월 16일 공식적인 사망 통보를 받고 7월 18일 간단히 결혼식을 올렸다. 빅터는 유대인이었고 엘리는 가톨릭 신자였기에 아무도 이 결혼을 주재할 수 없었다 한다. 어찌 보면 수용소에서 나오고, 그들 가족의 생사를 확인하고, 엘리를 만나고 결혼하기까지의 기간이 너무 빠른 것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 슬픔과 고통을 경험하고 그것에 무뎌지기까지 말이다. 그러나 그 자신이 정신의학과 교수이며 학자이니, 그 나름의 치료 방법을 찾았을 것이라 생각한다. 어쩌면 그가 슬픔에서 빨리 벗어나도록 엘리라는 의미가 주어진 것은 아닐까. 시련에서 사랑으로 그를 살아나게 한 의미인지도, 그 무수한 고통을 경험하고 슬픔과 고통 속에 있는 이들에게 그의 로고테라피를 전파시켜 의미를 찾도록 도와주라는 의미였을지도. 전쟁을 겪은 그들에게 보다 큰 의미이자 희망이 될 아기가 탄생했다. 빅터의 나이 마흔 두 살이었다. 그가 92세로 심장마비로 사망하기까지, 그는 엘리의 도움과 사랑 속에서 그리고 많은 이들에게 로고테라피를 통해 삶의 의미를 찾도록 독려하며 그의 삶을 마쳤다. 손가락 하나 까딱으로 이뤄지는 선별 심사에서 어쩌면 가스실로 끌려 갈 뻔한 그 상황에서 스스로 움직여 가스실을 벗어난 그이다. 어떤 상황에서도 삶의 의미를 찾으려 하고 의지를, 책임감을 가지려던 그이다. 그러니, 그의 삶 곳곳에서 yes라고 말하지 못할 것이 무엇이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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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럼에도 불구하고 삶에 대해

YES! YES! YES!


 "인생을 두 번째로 살고 있는 것처럼 살아라. 그리고 지금 당신이 막 하려고 하는 행동이 첫 번째 인생에서 이미 그릇되게 했던 바로 그 행동이라고 생각하라.“

    - 로고테라피 행동강령


  이 책은 나치의 강제수용소에서 겪은 죽음의 공포 속에서도 인간의 존엄성을 잃지 않으며 삶의 의미를 추구한 프랑클 박사의 체험 수기다. 이 시대의 체험수기가 수용소에서 느낀 감정이나 생활들에 대한 사실적인 기록과 그에 대한 생각들을 바탕으로 한 것이라면 프랑클 박사는 그가 창시한 정신분석방법을 구체적인 사례를 들어서 전개하고 있다.

  이 책의 한국 번역본의 제목이 수용소라는 곳에서의 경험을 부각시킨 <죽음의 수용소에서>이다. 그러나 저자가 지은 제목은 그의 로고테라피 이론과 연결되는 ‘삶의 의미를 찾아서’이다. 물론 여러 나라에서 번역되어 여러 판이 나오면서 <인간의 의미 탐구>로 번역된 책도 있으나 모두 그의 이론을 부각시킨 ‘의미’를 제목으로 하고 있다.

  독립적이었을 각 장들은 서문을 쓴 고든 알포트에 의해 첨가되었다. 제1부는 프랑클의 대표적인 저서로 그의 수용소 체험을 토대로 한 강제수용소에서의 체험, 2부는 그가 창시한 로고테라피에 대한 개념과 이를 설명하는 내용, 3부는 비극 속에서의 낙관으로 로고테라피 세계대회에서 발표한 내용을 바탕으로 정리한 내용을 담고 있다.

  프랑클은 1부 수용소에서의 체험을 그가 겪은 시간의 순서로 엮으면서 그 때의 체험들을 그가 주창하는 로고테라피의 이론을 정립하는 형태로 이끌며 기술하고 있다. 2부의 로고테라피 개념은 그 제목이 개념이듯이 그의 이론에서 제기하는 개념들을 설명해 나가고 있다.  각각 내용을 이어가는데 간략한 표제어를 두고 있다. 이 표제어만으로도 전체적인 내용이 이어질 정도로 매우 상세하게 제시되어 있다. 그만큼 내용의 명확성을 더하도록 서술하고 있다.


인간의 삶에서 의미를 빼앗아가는 것은 고통만이 아니다. 죽음도 그렇다. 하지만 나는 인생에서 정말로 무상한 것이 있다면 그것은 잠재 가능성이라는 말을 입이 닳도록 해왔다. 가능성은 그것이 실현되는 순간 바로 현실이 되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것은 곧 과거로 옮겨간다. 이렇게 과거 속으로 들어감으로써 일회성을 탈피해 영원한 실체로 보존될 수 있다. 그런 의미에서 과거 속에는 돌이킬 수 없는 상실이라는 것은 있을 수 없으며, 그 속에서는 모든 것이 고정된 상태로 보존된다. p197


  읽어가면서 ‘삶의 의미’라는 단어는 확실히 각인되었다. 그것이 저자가 말하고자 하는 핵심이었고 화두이니 말이다. 그러나 내가 감동적으로 느끼는 것은 그의 생각인지 그의 경험인지가 대두된다. 내가 경험하지 못한 그의 체험의 사례들에서 이어가는 그의 사고는 분명 감동적이고 존경스럽다. 끊임없이 삶에의 의미를 찾으려 하고 의지를 찾으려는 일관된 그의 삶의 태도는 존경스럽다. 그리하여 운명에 대한 얘기, 수용소에서 타인의 삶들을 관찰하며 조심스럽게 그들에게서 자신의 이론들을 찾아내는 서술들 또한 마찬가지다. 그의 사례와 이론을 적용함에 적절히 자리한 니체나 도스토예프스키의 말들도 그의 글들을 이해하고 감동을 더하는데 크게 자리한다. 또한, 스멀스멀 피어오르는 것은 ‘테헤란의 죽음’이란 부분이다. 이것이 그의 삶에서도 분명 적용되는 기분이다. 이러한 운명론적인 얘기를 보며 수용소에서 맞닥뜨린 그 많은 그의 운명들과 비교해 보며 다시 한번 인간의 운명과 의미에 대해 숙연하게 고뇌하게끔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삶에 대해 yes라고 말하라”는 인생관은 그의 삶을 들여다보면 볼수록 놀랍다. 그의 삶은 가늠할 수 없을 정도의 그럼에도를 가지고 있으니까. 


 대부분의 수감자들은 열등의식에 시달렸다. 그것은 복합적인 형태를 띠고 있었다. 우리는 모두 과거에 ‘대단한 사람’이었거나 혹은 스스로 ‘대단한 사람’이었다는 환상을 가지고 있었다. 그런데 지금 우리는 하찮은 존재로 취급되고 있다. 일반적인 수감자들은 무의식적으로 스스로 계층이 하락했다는 것을 느꼈다. p115~116


 미래의 목표를 찾을 수 없어서 스스로 퇴행하고 있는 사람들은 과거를 회상하는 일에 몰두한다. 앞에서 우리는 이와는 다른 의미에서 수감자들이 공포로 가득 찬 현재를 덜 사실적인 것으로 만들기 위해 과거를 회상하려는 경향이 있다는 얘기를 했었다. 그러나 실제 존재하는 현실에서 현재를 박탈하는 행위에는 어떤 일정한 위험이 도사리고 있다. 사실 수용소에서도 긍정적인 그 무엇인가를 얻을 수 있는 기회는 분명히 있다. 하지만 대부분은 그것이 기회인 줄 모르고 그냥 지나쳐버린다. 자신의 ‘일시적인 삶’을 비현실적인 것으로 간주하는 것이 삶의 의지를 잃게 하는 중요한 요인이 된다. 그 앞에 닥치는 모든 일이 무의미한 것으로 여겨진다. p129~130


  그는 왜 이 책을 썼을까? 그가 경험한 수용소에서의 삶을 보여주기 위해서? 아니면 로고테라피 이론이 무엇인가를 알리기 위해서?

  그의 경험을 바탕으로 정신분석의 내용을 전개한다는 특징 외에 이 책은 작은 의미의 단락으로 내용을 전개하고 있다. 그러니까 대분류, 중분류, 소분류의 체계적인 분류로 내용을 전개하지 않고 있는 것이다. 그렇다고 내용의 연결이 지극히 부자연스럽거나 하지는 않다. 오히려 작은 표제어 속에서 그 내용과 의미를 명확히 한다는 장점을 가진다. 반면 이것이 단점으로도 작용한다. 큰 체계를 두고 관련 내용들을 하위의 항목으로 두고 내용들을 정리하는 전개방식이 아니므로 전체적인 틀로서의 체계나 의미를 찾아내는 데는 조금 더딜 수 있다는 것이다. 즉, 나무를 보느라 숲이 무엇인지를 찾는데 약간은 방해로 작용하게 된다는 것이다. 한편, 그의 저술 방식으로 인한 특성이 이렇게 나타난 것이 아닌가 한다. 그는 세 명의 여성 속기사들에게 그의 구술을 받아쓰게 하여 원고를 작성했다. 자료 없이 오직 그 자신 안에 있는 것을 9일 동안의 구술로 정리한 것이다. 그의 체험으로 인해 생생한 묘사와 그의 생각들을 전하고 있다는 장점을 가지고 있지만 글로써 다듬어진 글의 느낌보다는 말로써 다음은 느낌이 강하다. 물론 그가 겪은 경험의 고통을 이토록 차분히 비교적 절제된 톤으로 말하고 있다는 점에서 놀랍긴 하지만 그의 수용소의 이야기, 경험들이 이론적인 연결로 인해 부족한 듯이 보인다. 나는 저자의 수용소의 체험 속에서 느끼는 생각의 전개가 더 보고 싶으니 말이다.

  일단 로고테라피에 대한 설명이 서문을 쓴 고든에 의해 요구된 것이라고 하니 이는 처음부터 같이 연결되어 묶을 의도가 있던 내용들은 아니었다. 2부가 첨부되고 이어서 3부가 첨부되어 이들 각각의 독립적인 내용들이 한 권의 책으로 묶여졌을 뿐이다. 저자는 서문에서 각각 1부와 2부가 서로 간의 신빙성을 보완하고 있다고 기술했고 1부는 자전적인 이야기이며 2부는 경험에서의 교훈을 요약한 것이라 서술하고 있다.

  제2부의 로고테라피의 개념의 표제어와 그의 체험의 표제어들이 별반 차이가 없다는 점에서 그리고 실제 그 내용에서도 큰 차이가 없다는 점에서 반복된 내용이 연이어 3장이 중복되어 있는 듯한 느낌이다. 이것이 저자의 수용소의 체험에 방점을 두었다면 수용소의 경험들이 조금 더 드러나는 것이 좋았을 듯하다. 그리고 로고테라피에 대한 개념과 이해에 방점이 있다면 그 개념에 대한 명쾌하고 체계적인 분류와 서술방식으로 내용이 전개되어야 할 것이다. 실제 저자는 로고테라피 대회에서 발표한 내용을 요약정리하여 3부로 첨가시켰는데 이론적인 결론을 갱신하기 위해 덧붙인 것이라 하고 있다. 그것이 발표된 자료로서는 그 의미를 더하였겠으나 1부와 2부에 연이어 첨부되어서는 오히려 2부의 내용들을 더욱 깔끔하게 체계화하여 정리하는 것이 이론적인 명확성과 완결성을 줄 수 있지 않았나 하는 아쉬움이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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