잘 살아가겠구나!

 

 ■ 고병권에 대한......

 

 책을 읽다가 문득, 생각했다. 그는 잘 살아가겠구나…. 그렇겠구나. 

  사촌이 땅을 사면 배가 아프다는 속담이 존재함을 과시하듯 좀 멀리 사는 이웃 사촌 덕분에 나는 갑자기 아프기 시작했다. 그렇지만 분명 그것은 질투와 부러움의 배아픔은 아니었다. 다만……좀 서글퍼졌을 뿐.

  삶의 온갖 어려움이 내게 기댈 때 우리는 철학자가 되어 간다. 그리고 철학은 진리를 찾는 것이라 말하는 만큼 삶에 대한 길잡이가 되어 주노라 말하기도 한다. 그러니까, 삶의 복잡성이 그에게는 명쾌한 논제로 풀리지 않을까. 철학자가 아니라고 말하는 그의 일상이 철학적이기에 또한 단순 이론적인 떠벌임으로 머물지 않기에, 아주 편안하고 행복해 보이기에 비록 피상적으로 엿보는 그의 삶을 환하게 하고 있었다. 그의 글을 읽어 가면서 느낀 자기 연민이 나의 철학적 지식의 모자람에 대한 것이었을지도 모른다. 지식이 삶을 더욱 더 명확하게 만들어주는 것은 아니지만 삶의 혼란을 명쾌하게 해주는 것은 아니지만, 어쨌든 그의 철학적 지식이 그의 삶을 보다 더 밝은 곳으로 이끌고 있다는 생각은 변하지 않았다.

  별로 흔들려 보지 않았을 듯한 얼굴을 하고 있는, 결코 선한 거짓말도 해보지 않았을 듯한 얼굴을 하고 있는, 조용하고 담백한 얼굴의 사진을 쳐다보며 나는 그에게 묻고 있었다.

  어떻게 세상을 살고 있으신가요.

 

   그에 관한 객관적인 자료는 그가 그동안 쓴 저서와 그의 학력이 전부였다. 그것이 그의 삶을 말해주는, 아니 이 세상에서 특히 우리나라에서 개인의 정체성을 말해주는 것은 직업과 학력이란 것을 알기에 뭐, 이 정도면 다 알았지 싶다. 다시 보니 그는 철학 전공자가 아니었다. 학부는 화학이었고 대학원에서는 사회학을 공부했다. 그러니까, 철학은 그의 관심사였던가. 아니, 철학이라고 하기에도 그렇지 않은가. 그는 니체에 관한 논문을 썼고 니체에 관한 책들을 썼다. 사람들은 그를 니체 전문가라 말하고 그는, 자신을 철학자가 아니라고 말한다.

어쨌든 그는 수십년 동안을 재야연구소에 머물며 연구하고 강의해 왔다. 그가 오래 도록 활동하고 있는 연구공동체 <연구공간 수유+너머>에서는 추장, 이른바 공동대표를 맡기도 했다. 그곳에서 그는 니체뿐만 아니라 마르크스, 스피노자, 들뢰즈 등의 철학을 공부했고, 민주주의와 사회운동에 대해서도 글을 써서 공저와 번역서를 포함한 그의 저서는 25권이 넘는다.

   저자 고병권은 가난한 농사꾼의 아들이었다. 초3때 보이스카우트 캠프에 가고 싶었으나 어머니가 허락하지 않았는데, 그의 어머니는 거기에 내는 돈이 부담되기도 하고 꼭 가야 한다고 생각하지 않았던 듯하지만, 어린 그는 길에서 구르며 울었다고 한다. 그래서 그가 그 캠프에 갔는지는 잘 모르겠다.

   그는 어릴 적 야구를 좋아했다. 그가 초등학교 5학년일 때 우리나라에 처음 야구가 생겼고 전남 출신인 그는 해태 타이거즈 팬이었다. 그가 야구를 좋아하는 만큼 그는 야구와 관련된 모든 기록들을 찾아 읽었다. 친구들 앞에서 아는 척하기 위해 정말 공부를 많이 한 것인데, 초등학생임에도 어른들이 보는 신문, 잡지, 책을 가리지 않고 읽었다.

서른 넘어서는 인라인스케이트를 배웠다. 친구들과 한강시민공원에서 인라인을 타다 한남대교 근처에서 돌멩이에 바퀴가 걸리며 쓰러진 적이 있다. 머리에 피가 흐르고 얼굴이 부어 오른 채 공사용 철재 밑에서 기어 나왔다고 하는데 아마도 그곳에 철재가 없었으면 한강에 빠졌을 것이다. 그리고 그는 사고 후 인라인을 그만뒀단. 같이 배운 그의 친구들은 지금 인라인에 고수가 되어 있다고.

   성인이 되어 대부분을 재야연구소에서 보낸 그는 학부 4년, 석사 2년, 박사 2년의 기간, 8년을 대학에 적을 두고 공부했고 15년 동안 대학 언저리를 맴돌았지만 대학이 싫단다. 그래서 가급적이면 대학 강의를 가급적 하지 않으려 한다. 이유는, 재미가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먹고 사는 게 쉬운 일이 아니니 그나마 그거라도 해야 할 것인데 줄이는 이유는 다행히 강의를 줄여도 먹고살 수 있는 공동체적 기반을 갖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무엇보다 불쾌한 기억 때문에 그는 강의를 줄이고 있다 한다. 6-7년 전쯤 교양과목 첫 시간에 강의 계획서를 나눠주며 내용을 간략히 소개하는 시간에 맨 뒷줄에 앉은 세 명이 가방을 책상에 올려놓고 엎드렸다. 그는 첫 시간이고 강의 시작하기 전이라 무시할까하는 생각에 그대로 두었다가 강의 내내 신경이 쓰여 결국 바로 앉으라고 말했다. 그랬더니 “이래도 다 들려요.” 그때 그는 화가 났고 그 자리에서 강의를 위해 서 있어야 하는 것이 서글펐다고 한다. 그래서 그 이후로 강의를 하지 않으려 노력한다. 이 노력은 대학 강의를 말한다. 대학이라는 곳에 들어와 비싼 등록금을 내고서 공부하는 이들의 열정이나 태도에 대해 그는 실망하지만 결코 강의 자체에 대해 회의를 느낀 것은 아니다. 여전히 그는 대학이 아닌 곳에서 강의를 하고 있다. 수유너머, 교도소나 야학에서 강의를 지속하고 있다. 그리고 그들에게 강의를 하면서 대학에서 강의하는 것보다 더욱 많은 느낌을 가진다.

   그가 강의를 하게 하는 토대인 연구소 수유너머는 연구하는 이들이 모인 공동체다. 그는 이곳에서 많은 시간을 보내며 살아왔고 살아갈 것이다. 그가 여기서 공동대표를 맡았기에 공동대표는 추장이라 부르기에 그는 ‘고추장’이라 불린다. 그는 이 공간에서 공부할 수 있었던 것을 동료들에게 감사하며 행복해하고 있다. 결코 혼자서 행복할 수 없다는 친구들과 함께여서 행복하다는 그의 행복론은 공동체 연구공간인 수유너머의 삶에서 터득한 것이다. 그래서 그는 또한 자신에게 끊임없이 삶에 대한 철학과 정치와 앎의 가치를 되묻도록 해준 이들에게 감사하며 사유하고 행동하기 위해 여전히 연구하고 강의하며 살아가고 있다.

    

참고 자료

 

•고병권, 생각한다는 것, 너머학교, 2010.

•고병권, 살아가겠다, 삶창, 2014.

•니체는 자신을 어떻게 변신시켰는가, 오마이뉴스, 2003.2.27

•뉴 파워라이터, 수유너머R 연구원 고병권, 경향신문 인터뷰, 2014.2.17

•http://navercast.naver.com/contents.nhn?rid=254&contents_id=574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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버트란트 러셀의 생애와 세 가지 열정, 서양의 지혜

   

 

“단순하지만 누를 길 없이 강렬한 세 가지 열정이 내 인생을 지배해왔으니,

사랑에 대한 갈망, 지식에 대한 탐구욕, 인류의 고통에 대한 참기 힘든 연민이 바로 그것이다.

 이러한 열정들이 나를 이리저리 제멋대로 몰고 다니며

 깊은 고뇌의 대양 위로, 절망의 벼랑 끝으로 떠돌게 했다.”

 

■ 버트란트 러셀의 생애

 

    셀은 20세기를 대표하는 지성인이자 저술가로 알려져 있다. 그의 지성은 철학을 넘어 그의 저작에까지 이르러 그를 문학가에게 수상하는 노벨문학상 수상자로 만들어 주었다. 러셀은 1950년 권위와 개인이라는 작품으로 노벨 문학상을 수상한다. 그러나 그는 작가이기보다는 철학자이자 수학자이었던 사람이다. 아니, 윤리학, 사회학, 교육학, 역사학, 정치학, 논쟁술 등에 관한 40 여 권 이상의 책을 썼으니 대단한 작가라고 할 수 있겠다. 

 

    그는 1872년 영국 웨일스에서 태어났다. 그의 이름에서 보듯이 Bertrand Arthur William Russell, 3rd Earl Russell은 귀족 가문, 백작의 작위를 물려받았다. 그의 할아버지는 존 러셀은 빅토리아 여왕 시절 두 번의 총리를 지냈다. 그러나 어린 시절의 러셀은 할머니 손에서 자라야 했다. 그의 부모는 일찍 사망했고 1878년에 할아버지 존 러셀도 사망했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그의 할머니의 특별한 교육방침과 원칙이 러셀의 삶 전반에 영향을 미쳤다. 그녀는 삶의 원칙이 분명한 사람이었고 공교육을 거부했다고 한다. 러셀의 좌우명은 그녀의 할머니가 즐겨 외우던 출애굽기(23:2)의 성경구절 ‘다수의 사람들이 잘못을 저지를 때에도 그들을 따라가서는 안 되며, 다수의 사람들이 정의를 굽게 하는 증언을 할 때에도 그들을 따라가서는 안 된다’가 되었다.

   그가 할머니로부터 받은 이 영향으로 그는 사회의 부정의에 대해 끊임없이 저항했는데, 그것은 그가 98세로 사망할 때까지 이어진 할머니로부터의 가르침이었다. 러셀은 아무리 많은 사람들이 옳다고 하거나 아무리 큰 권력의 행위라 하여도 정당화될 수 없는 행위에 대해서는 논리적으로 비판하였으며, 그것이 비판에 그치지 않고 실천적 행동으로 옮겨져야 한다는 일관성을 견지하였다. 바로 이러한 지적 정직성을 갖고 러셀은 핵무기와 베트남 전쟁을 비판하였다. 대중의 편견에 흔들리지 않고 진실을 지켜야 한다는 러셀의 태도는 이미 고대의 철학자 소크라테스와 공자도 누누이 강조한 바가 있었다.

   러셀은 1차 세계대전을 겪으면서 실천적 지식인으로 변모해 갔다. 전쟁 중인 1916년에는 징병 반대 문건을 쓴 혐의로 벌금형을 선고받았으나 납부를 거부하여 트리니티 칼리지에서 강의권을 박탈당했고, 2년 후에는 전쟁에 반대하는 글을 썼다는 이유로 6개월간 투옥되기도 했다. 2차 세계대전 이후에는 핵무기로 인한 인류의 파멸을 막고자 ‘러셀-아인슈타인 선언’을 조직했고, 아흔의 나이에도 시민 불복종 운동에 앞장섰다.

또한 러셀은 아인슈타인, T. S. 엘리엇, 디킨슨, 케인스, 화이트헤드, 조지프 콘래드, 비트겐슈타인 등 한 세기를 풍미한 위대한 사람들과 교류함으로써 20세기 지성사에서 그의 자리를 확고히 했다. 지칠 줄 모르는 지적 정열로 하루 평균 3,000단어 이상의 글을 썼고, 화이트헤드와 함께 10년에 걸쳐 『수학 원리』를 집필하는 등 수학과 철학, 사회학, 교육, 종교, 정치, 과학 분야에 걸쳐 70여 권의 저서를 남겼다. 특히 생의 마지막에 출간한 자서전은 정직하고 명쾌한 문체로 자신의 인생을 놀라운 통찰로 그려 내어 오늘날까지도 자서전의 전범으로 평가받고 있다. 1970년 2월 2일 밤, 98세의 나이로 웨일스에서 사망했다.

 

■ 사랑에 대한 갈망

 

   러셀은 매우 고독한 사춘기를 보냈고 몇 번의 자살 충동을 느꼈다고 한다. 그는 자신의 회고록에서 주된 관심사가 종교와 수학이었고, 그가 자살을 하지 않은 것은 조금이라도 수학에 대해 알고 싶은 마음이었다라고 적고 있다.

   러셀은 1890년 가정교사로부터 교육을 받고 나서 1890년 케임브리지 대학교의 트리니티 칼리지에 장학생으로 들어가 공부를 하게 된다. 그곳에서 그는 자신보다 어린 조지 에드워드 무어를 만났고 17세에는 퀘이커 교도였던 앨리스 페어살 스미스와 만났으며, 그녀의 가족과도 친밀한 관계가 되었다. 그리고 러셀과 앨리스는 사랑에 빠져 할머니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1894년 12월 13일 결혼했다. 그러나 곧 그들은 1901년 파경을 맞고 1921년 이혼을 한다. 그의 어린 시절 사랑이자 아내인 앨리스와의 파경이 이유는 그가 자전거를 함께 타다가 그녀를 더 이상 사랑하지 않는다고 고백했기 때문이며 그 이유 중의 하나는 그녀의 장모가 잔인하게 그를 조종하는 것을 싫어하기 때문이기도 했다. 이후 그들이 이혼하기 전까지 별거기간 동안 러셀은 오톨린 모렐, 배우 콘스턴스 말레슨 등 여러 사람들과 열애 관계였다.

   그러나 사랑이란 무엇일까. 보통은 사랑은 이성간에 생기는 감정으로 얘기한다. 그의 인생을 지배한 사랑에 대한 갈망을 러셀은 얘기한다. 그것이 지식에 대한 갈망이 아니라 순수하게 이성간에 대한 사랑을 말한다면, 정말 그런듯하다. 그의 98년의 생애에 대해 많은 것을 알지 못하지만 그가 적어도 4번은 결혼했고 3번을 이혼했다는 것을 안다. 이십대, 사십대, 오십대를 지나 마지막 결혼은 그가 65세일 때였다. 그는 자신의 체험담을 담아 결혼과 도덕에 관한 책을 썼고, 그 책은 남녀 모두에게 억압적이지 않는 성, 사랑, 결혼의 방정식을 찾고자 노력하는 내용이다.

 

 ■ 서양의 지혜에 대하여

    

  저자인 러셀은 이 책의 목적에 대해 다음과 같이 말한다.

 

“철학이 무엇인가를 알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스스로 철학을 해보는 것뿐이다.
그러므로 과거 사람들이 철학을 어떻게 해왔는가를 보여주려는 것이

이 책의 주된 목적이다”

 

   러셀은 위와 같은 목적을 가지고 그동안 철학이 전개되어 온 흐름에 따라 그 흐름을 주도한 철학자의 주장과 생애를 서술하고 있다. 간간히 철학가들이 주장하는 이론에 대해 러셀 자신의 개인적 평가를 담는 것도 잊지 않고 있다.

   처음 철학적인 질문이 제기된 것이 언제였는지, 무엇 때문이었는지, 누가 그것을 제기하였는지에 대해 시작하며 러셀은 철학에 관한 사유와 논증들이 변화되고 이어져 가게 되는 시대적인 배경을 살펴보는 것도 잊지 않고 있다. 인간의 삶에 대한 질문들은 어느 시대에나 있어 왔지만 특정 시대에 특정 철학사조가 나타나는 이유는 당대의 사회문화적인 상황과 연계되어 있다고 볼 수 있다. 따라서 이러한 사회문화적인 상황들 속에 나타나는 철학사조의 전개가 철학가들의 개인적인 특성과 관심과 맞물려 이루어나가게 되는지를 러셀의 생각을 통해서 보게 된다.

   전반적으로 시원하지 못하다는 느낌을 받고 있어서인지 어떤 장이 감동적이었다고 해야 할까. 이 책은 10개의 장으로 구분되어 있고 각 장의 내용전개는 동일한 패턴으로 흐르고 있기에 딱히 어떤 장절을 감동적이라 꼽기는 애매하다. 아마도 감동적이라 꼽는다면 특정한 철학가나, 특정한 철학사조에 대한 매력이 그 이유가 될 것이다.

어쨌든 철학의 흐름이 당대의 사회적 상황과 무관하지 않음으로 그러한 배경을 이야기하고 철학가들의 개인의 생애에 대한 아주 약간의 이야기들을 곁들이고, 그들이 제기한 주장에 대해 자신의 논평을 곁들여 이끌어 가는 것은 그 의견에 대한 수용을 떠나 보다 흥미로울 수 있는 부분이라고 생각한다.

   보기도 좋은 떡이 먹기도 좋다라는 말이 생각난다. 먼저 편집에 관하여 얘기하자면, 이 책은 1990년 출간되고 현재까지 계속 재판이 이루어지고 있다. 그런데 여전히 판본의 변화를 주고 있지 않다. 두드러진 여백의 미는 좋아 보이긴 하지만 그로 인한 작은 글씨체나 정리되지 않고 나열된 그림의 배치가 개인적으로는 책의 가독성을 높이는데 방해가 되었다. 교과서를 읽은 지 오래 되었지만, 마치 학생들 교재용 참고서라고 할까, 그런 느낌을 받는 책이었다. 내가 서양의 지혜에 대한 지식을 좀 더 흥미롭게 얻을 수 있는 책이라는 느낌이 들 수 있는 편집에 대한 아쉬움이 있다.

   중요한 것은 내용이다. 사실, 러셀에 대한 기대가 많아서 이 책에 대한 기대도 있었다. 나에게 서양철학에 대한 이해를 잘 이끌어 주리라는 기대. 그는 20세기 대표적인 지성이라 불리고 무려 40권이 넘는 책을 저술했고, 노벨문학상까지 받은 사람이다. 그러니 그의 사고나 문장들에 잔뜩 기대를 가졌다. 아마도 기대 때문이었을 것이다. 만족도가 덜 하다는 것은. 고등학교 때 배운 국민윤리 이상의 느낌을 가지지 못한 것은 나의 이해의 부족이 크게 자리할 것이다. 그 점을 감안하고라도!

   20세기의 지성이라는 러셀의 저작에 대해 감히 어떤 문제점을 찾아내고 그에 대한 보완을 말할 수 있을까. 그러나, 분명히 말할 수는 없지만 무언가 부족하다는 느낌을 지울 수가 없었다. 러셀이 과거의 사람들이 철학을 어떻게 해왔는가라는 것을 보여주려는 것이 목적이라는 말이 책을 덮고 나서야 확실히 알게 되었다. 그러니까 이 책을 통해서 나는 특정한 철학에 대한 깊이 있는 이해보다는 흘러가는 대로의 철학가들을 소개받기만 한 것이다. 아마도 부족함은 여기에서 오는 것일 게다. 좀더 깊이 있게 들어가고 싶은 부분에 대해서 더 이상 논의가 되지 않으니까 답답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철학가들의 주장인 듯 러셀 자신의 주장인 듯 덧붙여진 의견에 대해서도 좀더 명확하게 분리가 되었으면 하는데 이 역시 철학가들을 명확히 알지 못하기에 정확히 분리한다거나 다른 의견을 덧대지 못한다는 점이 있었다. 이 책 한권으로는 철학이 전개되어 온 흐름에 대한 윤곽을 잡아보기는 하겠지만 러셀이 드문 드문 보태는 자기 의견에 동조가 되지 않는 점은 분명하다. 만약 흡입력이 있었다면 러셀의 주장 모두를 고개를 끄덕이며 수용하고 있지 않았을까. 철학가들의 이론을 요약하고 정리하고 있기 때문에 그 철학가들의 사상에 대해 부족하게 이해된 점이 있을 것이다. 하지만, 그런 이해까지 해주도록 러셀에게 바랐다면 지나친 것일까. 다만 이 책은 보다 깊이 있게 내용을 파악하기 위한 전단계로서의 개론서의 역할에는 충분했다고 본다. 다른 철학가들과 그들의 사상에 대해 찾아 읽어보기를 재촉한다는 점에서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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흔들의자 위의 노인 윌 듀란트의 철학이야기

 

 

 

   철학이야기는 철학사에 이름이 남은 15명의 철학자들의 사상과 그들의 생애를 기술하고 있다. 저자 스스로 “이야기”라는 제목을 달았듯이 이 책은 철학가들이 얘기하는 철학을 설명하고 해석하는 것보다는 철학가들의 생애와 그들의 철학적 주제에 이르게 되기까지의 영향과 과정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다. 어쩌면 그가 ‘이야기’라고 하게 된 이유는 이 책은 월 듀란트의 강연 원고를 기초로 제작되었기 때문일 것이다.

   저자가 이야기를 풀어 가는 철학자 15명, 플라톤, 아리스토텔레스, 베이컨, 스피노자, 볼테르, 칸트, 쇼펜하우어, 스펜서, 니체, 베르그송, 크로체, 러셀, 산타야나, 제임스, 듀이다. 월 듀란트는 이들 철학자들이 철학사에 영향을 준 인물이라는 점을 전제하고 이들을 중심으로 당대 철학사조와 배경을 설명하고 철학사상에 대해 언급한다. 그리하여 오랜 철학의 역사 속에 달랑 15명의 철학자들은 너무 적은 것 아닌가 생각하기 전 간간히 철학사에 이름을 내민 이들의 이야기가 소개되고 있다. 그리고 역시 15명의 철학자들의 생애를 중심으로 그리고 그들이 저술한 책을 중심으로 각각의 철학자들의 철학에 대해 이야기를 풀어 나간다. 그리고 이들에 대한 비판으로 마무리 짓고 있다.

  월 듀란트의 문체로 철학이야기를 읽는 맛은 각 개별 철학자들이 주장하는 철학에 대한 이해를 높여 주었다. 저자가 이렇게 적절하게 철학자들의 논리를 이어주는 것이 좋았다. 물론 철학자 개인에 대한 선호도에 따라 관심도가 달라지는 장이 없다고는 못하겠다. 그러나 전체적으로 동일한 패턴으로 철학자들의 이야기를 풀어 나가고 있기에 특정한 장이 좋았다 말하는 것보다는 전체적으로 좋았다라고 하는 것이 좋을 듯하다.


   특히 저자가 밝혔듯 ‘이야기’들이 좋았다. 철학자들의 생애에 대해 알지 못한 것을 따로 찾아보지 않고 소개를 해주고 있고, 특히 철학사조의 탄생과 저술과도 연계시켜 주고 있기에 나름 공감이나 이해가 더 빨랐다는 생각이 든다. 그저 이 책을 저술하기까지의 노고를 어떤지를 아는 터라 이렇게 쉽고 편하게 이해할 수 있도록 내용을 엮어 가는 저자에게 놀란다. 모든 장이 저자의 각고의 노력이 숨쉬고 있는 장이다. 개별 철학자들의 생애를 더욱 더 궁금하게 만들고 그들의 철학책을 읽고 싶도록 만든다. 도대체 무슨 말인지 이해가 안되어 찾아보자라는 느낌이 아니라, 감탄과 함께 찾아보고프게 만들기에 저자에게 이 책이 많은 부와 명예를 주었던 것을 의심하지 않게 된다.

  책을 읽어가며 서양의 지혜에 비해 편하게 읽힌다는 느낌이었다. 이것은 서양의 지혜를 읽은 후 반사이익일까. 러셀의 문제일까, 월의 능력일까, 나의 문제일까. 아니면 번역의 덕일까. 하나의 책이 여러 번역가들에 의해 번역된 경우 어떤 책을 선택할 지에 대한 고민을 해결해 주는 것 중의 하나가 출판사와 번역가에 대한 것이다. 보통 여러 번역본을 비교하고 끌리는 문장에 따라 책을 선택한다. 책을 선택한 것은 아니고 주어진 것이긴 하지만, 잠시 다른 번역본을 살펴보니 이 책의 번역이 편했다. 정영목 번역가가 번역한 책들을 여러 번 읽어서인지 그의 번역체에 익숙해졌는지도 모른다. 어쨌든 내가 하고픈 이야기는 결국, 이 책을 편하게 읽었다는 것이다. 그리고, 이 책이 월 듀란트의 이후의 삶을 경제적으로 편하게 해준 이유가 아마도 그것의 힘도 있을 것이다. 또한 이미 많은 출간이 이루어진 책이 왜 또 번역되어 출간되는지도 알 수 있을 듯싶다. 어쩌면, 인간은 늘 수많은 철학문제를 인생에서 뗄 수 없는 모양이다. 거기서 나름 인생의 지혜와 위안을 얻는 모양이다. 좀 더 쉽고 편하게 써내려간 철학이야기가 삶에서 철학을 가까이 하고 싶어 하는 이들의 손을 잡아 주었다.


   이 책은 월 듀란트가 성인노동자들에게 강의한 내용을 바탕으로 이루어졌다. 그렇기에 그는 보다 쉽고 재미있고 의미있는 내용이 전달되도록 주력하였을 것이다. 사변적인 철학보다는 이들 철학자들의 생활들에 대한 이야기로써 철학을 이야기하는 형태의 구성이 되었을 것이다. 상당히 매끄럽게 책이 읽혀지는데 저자는 이 책을 쓰기 위해 아주 많은 시간 노력했기 때문이다. 각 철학자들의 철학 원전을 500번이 넘도록 읽고 이것을 집필하는데도 3년이 소요되었다고 하니 오랜 시간 동안 쌓아온 그의 지식과 이것을 사람들과 나누고픈 그의 열정과 애정이 보다 잘 전달될 수 있었던 듯하다. 각 철학자들이 주장하는 철학이론들이 어떠한 배경에서 나올 수 있었고, 그것이 철학가들의 삶과 어떻게 연관이 되는지를 파악할 수 있어 철학책을 소설책 읽듯이 읽을 수 있게 만드는 것이 이 책의 장점이라 본다.

  그러면서도 모든 철학자들의 철학사상에 대한 비판을 얻고 싶은 이 기분은 뭘까. 그렇기에 비판의 장이 나오면 나도 모르게 흥분이 된다. 그런데 월 듀란트는 몇몇 장에서 이것을 생략하고 있다. 그에게 특히 애정을 준 철학자라도 비판은 필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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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본형의 그리스인 이야기

- 신화가 된 영웅들의 모험과 변신, 그리고 사랑

    

구본형, 생각정원, 2013.

 

  

 이 책은 ‘신화가 된 영웅들의 모험과 변신, 그리고 사랑’이라는 부제를 달고 전체 3부 9장으로 구성되어 있다. 1부는 ‘신화 속의 인간’이란 제목으로 고대 그리스의 문명의 시작과 전성기 문명 속의 인물들을 살펴보고 있고 2부는 ‘트로이 전쟁, 겨루는 자들의 함성’이라는 제목으로 트로이 전쟁 전장의 인물들을 다루고 있다. 마지막 3부는 ‘혹독한 귀환’이란 제목으로 트로이 전쟁이 종결하고 전쟁에서 살아남은 자들의 귀환과 새로운 터전을 찾아가는 여정 속의 인물을 담고 있다.

   1부에서는 미케네, 크레타, 아테네, 테베의 각 1, 2, 3, 4장으로 나뉘어 각 문명 속의 대표적인 인물들의 이야기를 다루고 있다. 2부는 아테네에서 트로이로 출항하는 여정과 격돌의 현장인 트로이의 각 5, 6장으로 나누었다. 3부는 7장 ‘아테네-운명의 굴레에서’, 8장 트로이→이타카-승리한 자의 고난‘, 9장 ’트로이→로마-위대한 로마의 탄생‘의 각 3장으로 구성되고 있다.

   각 장에서는 특정한 인물들의 이야기를 다루고 있다. 어떤 특정한 사건을 중심으로 거기에 얽힌 사람들을 풀어가고 있는 것이 아니라, 특정 인물이 겪는 사건들과 그들의 인간관계, 그들의 고뇌와 방황 등을 얘기하고 있는 것이다. 대표적으로 1부에서는 미케네의 페르세우스, 크레타의 미노스 왕, 아테네의 테세우스, 테베의 오이디푸스를 중심으로 한 인물들의 이야기를 구성했다. 2부에서는 전쟁에서의 대결을 중심으로 아가멤논, 아킬레우스, 오디세우스, 헥토르, 파리스 등의 이야기를 하고 있다. 3부에서는 전쟁에서 승리한 오디세우스가 자신의 고향 이타카로 향하면서 겪게 되는 고된 여정 속의 인물들과 전쟁에서 패한 후 떠돌다 로마를 건국하게 되는 아이네이아스를 중심으로 한 인물들의 이야기를 담고 있다.

   이러한 이야기를 하면서 중간중간 그 인물이 겪은 사건을 그림으로 그려낸 화가들의 명화를 삽입하거나 인물들의 조각상을 삽입하여 보다 생생한 느낌을 북돋우고 있다. 또한, 각 인물들을 이야기하면서 그들의 이야기를 한편의 시로서 읊고 있다. 이야기로서 인물의 삶을 들려주는 것에서 나아가 긴 여운을 남기게 하며 각 인물의 삶을 읊조리게 하고 있는 것이다. 이것은 인물의 삶에 대해 보다 공감의 요소를 더하도록 작용하는 듯하다.

저자는 그리스인의 모험과 변신과 사랑을 다루고 있는데 이들의 이러한 이야기는 결코 신과의 관계를 떠나지 못한다. 그리스인의 이야기에서는 그리스신화의 신들의 이야기가 빠질 수가 없는 것이다. 그러므로 영웅들의 모험담에 빠지지 않고 나오는 대표적인 신과 괴물들을 Tip으로 분류하여 각 장마다 적절하게 배치하고 있다. 이를 통해 신과 괴물들의 특징을 설명하고 인물들과 연계된 이야기를 하고 있어 보나 내용의 이해를 높이고 있다.

   앞서도 이야기하였듯이 각 인물들의 이야기를 하면서 그들 모두에게 시를 부여한 것은 이 책의 대표적인 특성이자 장점이라고 할 것이다. 각 인물의 삶을 전체적으로 정리하고 이들의 삶의 여정을 이야기하는 것은 신화를 다루는 저작물 속에서(물론 각자 나름의 시각에서 의미를 부여하겠지만) 사실 반복되는 패턴이라 할 것이다. 그러나 저자는 그들의 이야기를 하나의 시로 재창조해냄으로써 인물들에게 새로운 느낌을 부여한다. 이러한 작업은 인물들의 삶에 대한 온전한 이해와 공감에서 비롯되는 것이기에 저자의 인물들에 대한 애정을 볼 수 있다. 또한, 각 인물들에서 섣부른 교훈이나 억지적인 감상을 설득조로 강요하지 않고 그가 이해한 바를 보여주고 있다는 점에서 독자 마다마다에게 전해질 감상은 배가되고 확장될 수 있으리라 본다.

   그 외 전체적인 책 속에서 가장 좋아하는 부분은 1부의 4장이야기다. 4장의 제목은 “가장 비참하고 장엄한 자의 탄생”이다. 나는 여기서 특히 안티고네의 이야기가 가장 인상적으로 남는다. 사실, 비극이 가지는 그 무게감에도 끌림이 있으니 가장 무거운 운명을 지닌 자의 이야기에서 시작하는 이 ‘비극’이 정녕 카타르시스를 경험케 한다.

    비극에 대한 저자의 말을 빌어보자.

 

   비극이란 주인공의 극적인 투쟁을 담고 있다. 투쟁을 통해 인간 본성이 지닌 힘을 확장하여 한계의 벽까지 밀어붙인다. 그러므로 모든 비극은 평범한 인간을 영웅으로 끌어올리는 투쟁과 모험을 담고 있다. 비극의 주인공들은 시속 300킬로미터로 질주하는 카레이서들이다. 그들은 자신의 궤도를 탄환처럼 달린다. 그리고 벽에 부딪혀 충돌하고 파멸한다. 그 벽 너머에는 인간 세상이 아닌 신의 영역이 존재한다.

    신은 인간이 자신의 영역으로 넘어오는 것을 좋아하지 않는다. 그래서 그리스 신들은 인간에게 우호적이지 않다. 그리스 비극의 위대함은 이제까지 듣도 보도 못한 용기와 믿음으로 스스로를 넘어섬으로써 인간의 한계를 저 멀리 밀어낸 사람들의 추락과 파멸을 다룬다. 미지의 세계에 대한 지평은 바로 이런 영웅들의 부딪힘에 의해 알려진다. 어느 영웅이 넓혀놓은 경계는 다른 영웅이 나타남으로써 다시 조금 더 확장된다. 모든 영웅의 공통점은 그때까지 알려진 인간의 한계를 넘어서는 척후병이라는 점이다. 그렇게 우리는 인간의 변방을 넓혀왔다. 끝까지 간 사람들, 그들이 영웅들이다. 그들은 원래 평범했으나 삶을 통해 자신을 영웅으로 만들어간다. 그러므로 물로는 비극을 쓸 수 없다. 비극은 눈물과 피로 쓰일 수밖에 없다(p185~186).

 

   이 책의 각 인물이야기는 저자가 이야기해주듯 말하고 있다. 간혹 나오는 대사라도 이것은 인물의 독백으로 그저 뱉어내어질 뿐이다. 4장에서만큼 인물들의 대화가 자세히 묘사된 장은 없다. 심지어 인간의 극한 대립이 치닫는 전장을 묘사하는 2부에서조차도 전쟁하는 그들의 맞선 상황에서도 대화는 없다. 그러나 인간의 비극이 치닫는 이 장에서는 인물들 간의 극명한 대화가 나타나고 있다. 이들의 대화가 없이 그저 이들의 이야기가 묘사되었다면 이 내용의 느낌은 얼마나 반감될까.

   비극적 인물의 묘사, 인물들간의 대화 이것 외에 이 장이 나에게 다가오는 의미는 또 다른 데 있다. 바로 여성 ‘안티고네’이다. 부제의 신화가 된 ‘영웅’이란 말을 곱씹으며 책을 읽어가다 문득, 아니 여성은 어디있어? 왜 없어? 여성은 영웅거리의 이야기가 없나? 이런 생각이 든 것이다. 분명 그리스시대에도 여성은 존재하지만 이야기들 속에 여성에 대한 인상이 너무 없었던 차에 우리가 일반적으로 특히나, 옛날 옛적이라면 더더욱 강조하는 ‘여성이미지’를 벗고서 나타난 안티고네의 이야기는 나를 매우 기쁘게 만들었다. 그 어떤 것에도 흔들림없는 신념과 곧은 정신의 소유자. 어찌 보면 신화속에 나오는 이들과 같은 격렬한 감정의 풍랑이 없다고 할지 모르나, 그와 같은 사고를 갖기까지, 그 사고에 따라 행동하기까지 얼마나 무수한 고뇌의 풍랑을 겪었을 것인가. 그리스인이야기 속의 영웅들, 특히 남성들은 외부의 여러 사건들 속에서 모험하고 방랑하고 영웅으로 성장하고 그들의 행동적인 면이 강조되었다. 반면 안티고네는 사건을 바라보는 그의 사고 속에서 영웅으로 성장한다. 새로운 영웅의 모습을 발견한다.

 

   신화는 신들의 이야기라고 한다. 따라서 신화를 읽으면서 우리는 ‘신’이라 불리는 그들의 막강한 힘과 능력에 감탄하며 절대적인 그들의 위치에 경탄한다. 그러면서 절대적인 위치의 그들이 내보이는 저차원적인 분노와 질투에 흥분하고 그들의 놀음에 운명지어진 그리스인들의 슬프고 고된 운명을 보며 비탄해한다. 그렇게 신들은 우리에게 조롱의 대상이기도 하고 경탄의 대상이기도 했다. 하지만, 신들은 신이기에 알 수 없는 경외감으로 그들을 바라본다.

   그러나, 그리스인이야기에서 주인공은 신이 아니다. 바로 인간을 다루고 있다. 신들이 그려놓은 모습으로의 ‘인간’이 아니라 자아를 가지고 성장하고 역사가 되고 있는 인간을 다루고 있다. 신이 창조한 인간이 아니라 그들 스스로의 삶을 이뤄가는 그들의 삶에 신이 조연처럼 따른다. 그러므로 같은 인간으로서 바라보는 그들의 분노와 질투, 사랑이야기는 신들의 그것과는 다르게 다가온다. 이러한 점이, 이 그리스인들을 동일한 시각으로, 좀 더 내 이웃의 이야기로 편안하게 바라볼 수 있는 힘을 가지게 하는 것 같다.

   그러나 한편, 왜 이들인가?라는 질문을 해 본다. 신화가 된 영웅들의 모험과 변신, 그리고 사랑이라는 부제를 놓고 다루는 인물들 중 왜 이들을 다루고 있는가를 생각해 보는 것이다. 그러면서 이미 익숙하게 ‘영웅’으로 알려진 이들이 각 장의 중심점으로 나오면서 독립적인 이야기를 부여받지 못한 인물들을 중심으로 한 또다른 관점의 이야기를 만들어 보는 것도 좋을 듯하다는 생각을 해본다. 같은 맥락에서, 전체적인 틀에서 보면 1부와 3부에 비해 2부에서 다루는 인물이 적게 나타난다. 2부에 중첩되는 인물들이 3부로 빠져 귀환의 여정에서 다루어지고 있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파트로클로스, 아이아스, 메넬라오스 등 트로이 전쟁의 인물들이 독립적으로 다루어지고 있지 않기 때문이기도 하다.

   또한, 여성들의 삶은 영웅의 조력자로서 혹은 영웅을 괴롭히는 여인으로 등장한다. 영웅을 사랑하고 기다리다 배신당하여 스스로 목숨을 끊거나 그들에게 복수하는 삶이 주가 되고 있다. 각 장마다의 영웅 이야기 속에 스테레오타입으로 나타나는 모습이 아니라 안티고네와 같은 여성의 이야기를 보다 찾아내 이야기하는 것은 어떨까 싶다.

   각 장마다 신들의 이야기를 Tip으로 하여 인간들의 이야기 속에 등장하는 신들의 특징들을 설명하고 있다. 이 신들의 이야기가 각 장에서 신이 등장하면 그에 맞추어 배열이 되면 좋을듯하다. 12신의 이야기를 먼저 배치하고 이후 신화 속 기괴한 괴물들, 동물들, 3대 마녀들, 신화에 등장하는 반인반수들, 신화 속 예언자들의 이야기를 각 장마다 나누어 나타나는 것이 좋을 듯하다. 또한 각 장의 이야기 속에 다수의 신이 등장하기도 하지만 주요하게 다뤄지는 신이 있는 경우에 Tip에서 그 신의 이야기를 배열하였으면 한다. 예를 들어 1장에서는 대표적으로 제우스와 포세이돈이 나타나므로 두 신을 다루고 헬레네 이야기 다음에 헤라와 아르테미스 신을 Tip으로 다루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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변신 이야기 1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1
오비디우스 지음, 이윤기 옮김 / 민음사 / 1998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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변신이야기 Metamorphoses


오비디우스, 이윤기 옮김, 민음사, 1998.



  변신이야기는 서사시로 천지창조에서부터 작가인 오비디우스 시대에 이르기까지의 변신이야기를 다루고 있다. 작가는 전체 작가는 그리스신화뿐만 아니라 당시에 떠돌던 소아시아 설화, 트로이아 전쟁사, 로마 건국 신화까지를 두루 섭렵하여 전체 15권의 이야기로 엮어 내었다. 1~5권은 신들에 관한 이야기를, 6~10권은 영웅에 관한 이야기를, 11~15권은 역사적 인물들에 관한 이야기를 다루고 있다. 천지창조에서부터 거인족의 시대를 거쳐 신과 인간들이 사는 세상을 이야기하면서 주로 신이나 인간이 동물, 나무, 식물 등으로 변신하는 이야기가 초점이 되고 있다. 그러나 후반부로 갈수록 신들과 신들에 의해 ‘변신’된 인간의 모습보다는 전쟁을 거쳐 그리스 문명이 끝나고 트로이 유민들이 로마를 건국하는 과정과 케이사르와 아우구스투스를 다루며 이야기를 맺고 있다.

  이 책은 이야기를 서술하는 방식이 순간 순간 바뀌는 특징을 가진다. 묘사에 치중하며 작가가 이야기를 서술하다가 등장인물이 자신의 이야기를 하거나 제3자의 이야기를 들려주는 형태로 서술되고 있다.

  또한 변신이야기는 연대기 순으로 신과 인간의 대립을 담고 있다. 늘 신에게 당하는 인간들의 이야기는 안타깝고 연민을 자아내기에 충분하다. 그것을 묘사하는 오비디우스의 탁월한 능력 덕분이다. 작가가 수사학을 배웠다고 하는데 그가 내 앞에서 말하고 있지 않아도 책을 통해 그의 언변이 어떠했을지 짐작이 가고도 남는다.

   실체적이지 않은 사물에 대하여 구체성을 더하는 묘사들, 안타까움과 사랑을 토로하는 말들, 타인을 설득하는 논리적인 언어 구사 등, 작가의 상상력과 필력에 존경을 보내게 된다. 그러므로 보통 책에 대해 글귀에 대해 ‘감동적’이라 할 때, 특히 이와 같은 이야기를 읽어 나갈 때의 감동을 무엇으로 정해야 할지에 대한 고민을 덜하게 해준다.

   그러니까 내가 감동받는 것이 단지 스토리인지, 작가의 묘사인지를 정하는 것에 고민이 되는 것이다. 문학에 관해서는 스토리도 무시할 수 없는 부분이다. 그러나 그것을 어떻게 엮어 내느냐가가 필시 중요한 부분일 것이다. 그러므로 변신이야기 속의 다양한 이야기들을 그 내용에 대한 감정이 아니라 글 자체로만 파악하여 감동적인 부분을 찾고자 한다. 그렇게 생각하고 보면 역시 작가의 탁월하고 세밀한 묘사력이라고 할 수 있다. 잠의 신에 대한 묘사, 복수의 신에 대한 묘사, 질투에 대한 묘사 등. 실체하지 않는 것에 대하여 구체적이고 생생하게 마치 그것이 실제로 존재하는 양 적확한 묘사가 놀라웠다. 또한, 구구절절하게 자신에 대한 변명들을 늘어놓는 주인공들의 그 언변들도 놀라움을 안겨줬다. 생각하면 황당한 발언에 답답한 부분도 없지 않았지만 그렇게 수려하게 자기의 심정을 고백할 수 있다는 것도 놀라운 힘 아니겠는가.  


  책을 몇 페이지 읽자마자 ‘그리스로마 신화’이야기를 굳이 ‘변신이야기’라 제목을 바꿔서 다루고 있는가 의아했다. 어떤 차별성을 가지고 감히 그리스로마 신화이야기를 또 떠들어대는가 싶었다. 그리고 이내 신화 속에서의 ‘변신’에 관한 이야기가 주제임을 알고는 넘쳐나는 신들과 인간의 이름에 지쳐, 명칭의 표기 차이에 지쳐 연대기 순이 아니라 일목요연하게 식물도감 동물도감과 같은 형태로 이야기를 끌고 가면 어떨까 하는 생각을 했다.

  첫 번째, 변신을 당하는 자가 아니라 변신을 시키는 자를 중심으로 한 구조이다. 변신을 시키는 이들이 신들이므로 각각의 신들이 누구를, 무엇을, 어떻게 변신시켰는지를 중심으로 이야기를 전개해 나가는 방법은 어떨까. 그리하여 가장 많이 인간을 변신케 한 신은 누구인지도 파악해 보고.

  두 번째, 변신의 형태별로 다루는 구조이다. 동물, 식물, 광물, 무생물로 변신하였는가. 그 중에서도 동물 변신이라면 포유류, 조류, 파충류로 변신하였는가, 식물이라면 꽃과 나무 각각 어떤 꽃과 어떤 나무로 변신하였는가 하는 식이다. 마치 식물도감의 꽃을 다루듯이 그 이야기를 다루는 형태를 생각해 보았다.

 이러한 두 가지 형태의 이야기로 짜여진다면 좀더 ‘변신’에 초점을 맞춘 일목요연한 내용으로 다루어지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었다. 그러나, 이 변신이야기의 본질이 변신을 다루는 것이 아니라 ‘아우구스투스’를 신격화하는, 신의 위치로 격상하기 위한 의도를 가진 책이라면 작가가 정리한대로 연대기적인 서술 형태가 가장 바람직하리라는 생각이 든다.

  다만 어찌되었든 일관되지 않은 시점은 산만한 느낌이었다. 그의 탁월한 묘사력과 상상력이 아니었다면 참아내기 힘들었을 것이다. 번역자가 2인칭으로 된 것을 읽기 편하게 바꾸었다고 하는데 원문을 읽지 못하기에 그러한 번역의 영향인가 싶기도 하다. 기록에 의하면 변신이야기는 작가가 추방되기 훨씬 전부터 쓰여졌다. 그리고 이 작품을 쓰는 동안 오비디우스는 추방된 것으로 나타난다. 변신이야기의 흐름이 후반부로 갈수록 변화를 겪는 것이 이와 무관하지 않은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아마도 작가는 작가의 마음이 가는대로 그가 많이 다루었던 사랑과 애욕의 변신 모티브를 뽑아내어 이야기를 다루고자 했을 것이다. 그렇게 이야기를 전개시키고 있던 어느 날, 그는 추방되었고 유배지에서 마무리되는 책의 내용이기에 번역가 이윤기의 말처럼 ‘용비어천가’가 되지 않았을까. 그러니 그가 유배되지 않았다면 이 이야기의 마무리는 어떤 식으로 전개되었을까 생각하며 작가의 처음의 의도대로 완성되지 못한 것이 아닌가 하는 안타까움이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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