치욕을 이겨내며 써내려간 기록, 사기열전史記列傳


  사마천의 사기는 역사서. 기전체 역사서의 효시.

  내 기억 속에 이렇게 자리한 사기다. 역사서인데, 더구나 남의 나라다. 게다가 현재, 근대도 아닌 까마득한 날의 역사서를 내가 부러 선택하여 읽을 일은 없었기에 책을 읽으며 느낀 반응은, “이거 역사서 맞아?”였다. 내게 역사의 기록이란 의미가 사건, 사고 중심의 연대기적인 서술이다라는 것이 바탕에 깔려 있었나보다. 아무튼, 내가 읽는 부분은 사마천의 사기 중 일부라는 사실을 다시 한번 확인하며 그냥 소설책을 읽듯이 책을 읽었다. 그러면서 아, 이런 사람들이 실존 인물이란 말이지?를 되뇌며.


  그렇게 읽어 내려갔기에 각 인물의 사연에 감동한 부분과 사마천의 해석 부분에 감동한 부분 등이 나뉘어진다. 우선, 전반적으로 시대와 사건 속에서 행한 인물들의 행적에 대해 사마천은 자신의 의견을 피력하고 있다. 춘추전국시대의 제후국 가운데 최후까지 살아남은 전국 칠웅 진한위제초연조의 흥망성쇠를 주축으로 하며 수많은 인물들의 이야기인 사기열전은  열전의 70편과 세가에 포함된 공자와 진섭을 포함하면 72편이 된다. 세가는 28편으로 별자리 28수와 일치하여 이는 천지와 음양의 수, 진법을 기초한 구성으로 파악하기도 한다. 열전의 마지막에 <태사공자서>가 삽입되어 있는데 여기서 사기를 집필한 목적과 의도를 밝히고 있다. 그러니까 이 마지막이 사기 전체의 서문이라 할 수 있으며 구성과 각 편의 서술 이유, 자신의 가계 및 학문적 배경과 경력을 기술하고 있다. 각 열전마다 ‘태사공은 말한다’라는 부분이 사마천의 의견인 것이다.

  그 속에서 인물에 대해 느끼는 그의 평이 역사서로서는 객관성을 상실하는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도 들게 했지만, 괜찮았다. 그리고 간간히 인물들에게 자신의 감정을 대입한 것이 그가 겪은 고통과 울분을 느끼게 해주어 아린 마음도 들었다. 어쩌면 글쓰기는 자신을 정립하는 과정과 함께 자신을 변호하는 과정이란 생각도 들었다.

  다양한 인물들에 대한 관찰, 평면적이지 않은 묘사를 통한 그들의 행적에 대한 해석. 아, 이 사람이 이러한 기록을 하기까지 얼마나 많은 노력을 기울였을까를 생각하니 나는 왜 글보다도 그가, 사마천이 감동으로 다가올까. 사마천의 초상화가 보이기에 나는 그가 정말로 아주 오래 산 사람이라고 생각했다. 너무 늙어 보였으니까. 정확한 그의 생몰연대를 알 수 없다. 하지만 대략 50대 후반 즈음이 그의 생애의 마지막이었다. 지금 기준으로 보자면 젊지 않은가. 늘 작가에 대한 자료가 없을 때마다 아쉬움이 느껴지지만 실로 궁금하지 않을 수 없었다. 사마천은 결혼을 했는가. 자식이 있는가. 사마천이 사기를 완성한 후, 그리고 딸을 출가시킨 후 자살을 했다는 설도 있다 한다. 사형당한 것이 아니라면, 그가 생을 이어간 것은 정말로 사기 저술을 위해서였던 것인가.

  사마천의 아버지 사마담은 욱하는 성질이 있는 사람인 모양이다. 역사서 편찬자에 대해 가지는 선입견은 뭔지 모르게 조용한 인내력을 생각게 하는데, 제사 의식에 참여하지 못한 울화통으로 세상을 떠났다 하니 말이다. 반면 사마천에게선 차분한 이미지가 더 느껴진다. 그는 글로서 그의 억울함을 피력하였다. 아버지의 기질을 물려받았다면 그는 사기를 저술하기도 전에 아버지와 같은 운명을 겪었으리라.


  번역자인 김원중의 번역의 원칙은 이러하다.


“번역은 원전 뜻을 자구 하나하나 따져 가며 번역하고 난 다음 그에 수반되는 전고나 논의의 근거를 찾아 다시 그것을 원전의 문맥에서 구현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각주는 독자가 원전을 읽는데 걸림돌이 되지 않는 것은 물론 원저자의 의도가 무엇인지에 관심을 갖는 데 장애가 되지 않도록 주의해야 한다고 본다. 각주가 사족이 되지 않으려면 그 활용이 적절해야 하므로 원전의 단어 하나 지구 하나를 우리말로 표현하는 데 온 심혈을 기울여야 한다. 번역에 이념이 개입되는 일이 있어서는 안 된다고 감히 생각한다.”


  번역에 대한 원칙으로 수긍이 가기도 한다. 그러나, 열전을 기록하면서 사마천은 태사공으로 분해 개인적인 견해를 밝히고 있듯이 열전에 대한 다양한 해석도 충분히 논의될 수 있는 부분이라고 생각한다. 열전의 편마다 소제목을 붙여 내용을 분류하여 놓은 것처럼 말이다.

  일단 2천년 전의 사마천에게 말한다. 춘추전국 시대의 혼란스러운 상황에서 이 이야기는 개인의 삶을 얘기한 것이긴 하지만 가만 보면 나라를 세우는데 대한 이야기가 좀더 주가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는 것이다. 전쟁이라는 혼란의 장에서 여러 나라를 전전하는 유세가들의 이야기를 보며 각 인물들의 활동에 따라 어떤 나라가 남느냐, 하는 느낌을 받았다.

  그렇기 때문에 한 열전에서 주인공으로 나온 인물이 다른 열전의 조연으로 나오기도 하는데, 나라도 많고 인물도 많다 보니 그 동일인물인지 헷갈리는 면도 있었다. 그런 까닭에 특정한 나라에서 활약한 인물들 별로, 서로 대립하던 인물들 별로 이야기가 정리되면 하는 생각도 가지게 되었다. 일목요연하게 이러한 내용이 정리된 ‘연표’가 덧붙였으면 하는 생각이다.

 작가는 열전의 순서를 도덕적 기여도가 높은 인물들을 먼저 하였다고 하는데 작가가 말하는 도덕적 기여도라는 것이 무엇인지 생각하게끔 하였다. 그런 방면으로 따지면 열전의 순서에서 의아한 부분도 있었다. 그리고, 인물들을 본인이 직접 만나고 경험한 부분도 있지만 전해 듣거나 그들의 삶을 문헌 등의 자료로만 파악한 사람이 적지 않다. 그의 자료가 얼마나 정확할까 하는 생각도 덧붙여 하게 된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5)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댓글저장
 

 

 

 

다시 살아나기를 소명하며!

 

 

  『니체, 천 개의 눈, 천 개의 길』은 니체의 ‘철학’에 대한 이야기다. 저자는 니체가 가진 사상을 헤르메스가 되어 해석해주고 있다.  

  니체를 해석한다는 것은 니체가 천 개의 눈으로 보는 것과 같이 다양할 것이다. 니체를 해석한다는 것은 결국 누군가의 ‘의도’이고 그의 생각을 말하는 것이다. 따라서 니체가 말한 그대로를 토스하여 주는 역할이 아니라 니체가 말한 것을 두고 니체를 재창조하고 있다고 보는 것이 좋을 것이다. 니체의 글을 해석하고 있지만 그 많은 니체의 글들 중 자신이 전달하고자 하는 바를 찾아 내어 그것에 대한 설명과 해석을 하고 있으니 결국 니체의 이야기가 아니라 니체를 통해 말하고자 하는 저자의 이야기가 아니겠는가.

  이 책은 니체에 관한 해석을 담고 있는 1부와 논문 형태의 글을 추린 베버의 정치학과 차이의 정치학을 담고 있는 2부로 나뉜다. 일단 이 책의 핵심인 1부는 저자 자신이 니체에 대해 가지고 있는 애정을 드러내듯 니체의 생각들을 잘 뽑아내어 전달하고 있다. 총8장으로 구성하여 1장 니체와 철학의 관계, 2장 니체의 계보학으로 도덕과 윤리의 문제, 3장 니체의 해석학과 니체에 대한 해석학, 4장 니체의 근대 정치 비판을 다루고 있다. 5장과 6장은 권력의지와 영원회귀, 7장은 초인 등의 니체 철학의 주요 개념을 다루고 있다. 마지막 8장은 니체 자신이 어떻게 변화하였는지를 니체의 저작을 토대로 말하고 있다.

  니체에 관한 총8장의 내용 중에서 가장 흥미롭게 읽었던 것은 2장이다. 니체의 계보학으로 도덕과 윤리에 관한 내용이다. 이 장에서는 특히 도덕과 관련하여 강자와 약자의 개념을 이야기하고 있다. ‘도덕’에 대해 평소 갖고 있는 생각과 맞물려 성큼성큼 다가온 부분이다.

 

니체의 철학에 대한 비판은 분명히 사유로부터 삶을 구원하기 위한 것이다. 염세적 사유의 굴레로부터 삶을 구원하는 것이야말로 니체의 비판이 지향하고 있는 바다. 그러나 이는 ‘철학을 비판하는 철학’으로서 니체 철학의 절반일 뿐이다. 왜냐하면 삶을 속박하는 사유가 비판받아 마땅한 것처럼 사유를 속박하고 있는 삶 역시 비판받아야 하기 때문이다. 삶이 구원되어야 한다면 같은 이유에서 사유 역시 구원되어야 한다. 더구나 순수한 사유의 체계가 거짓 연극에 불과한 것처럼 순수한 생이라는 것도 공상에 불과한 것이다(p49)

 

도덕학자나 도덕철학자에 대한 니체의 불만은 그들이 도덕을 형이상학적으로 다루고 있다는 데에 있다(p61)

 

도덕은 자신의 행동 기준이 되지만, 동시에 타인에 대한 요구이기도 하다. 타인이 동의하지 않는 도덕은 타인이 동의하지 않는 진리보다도 훨씬 위험하다. 전쟁에 대한 공포나 공포 속에서 치러진 전쟁을 통해서 도덕은 일반성의 극대화를 요구한다. 도덕은 항상 ‘만인’을 대상으로 한다. 니체는 이렇게 말한다. “도덕 교사들의 허영심–도덕 교사들은 너무나 기꺼이 만인에 대한 처방전을 주려고 한다.”(p63 )

 

   이 시대의 가치가 어떻게 만들어지는지, 마냥 필요하고 당연한 것으로 여겨지던, 그 자체로서 중요한 도덕에 대한 비판적 시각, 그것이 어떻게 억압이 되는지를 볼 수 있는 장이다. 그리고 또한 그동안 강자는 위험하고 약자에 대해서는 이른바 선한 것이라 대비되던 이러한 관념들이 어떻게 ‘고정’관념이 되는지를 파악한다. 도덕이 노예가 되는 개념을 살펴보는 장, 그로 인해 약자들의 논리로 강한 자를 바라볼 수 있는 관점은 깊은 생각을 던져주기도 했다.

   절판된 이 책을 찾기 위해 중고서점을 비롯하여 온-오프라인을 뒤져봤지만 찾을 수가 없었다. 당장 내 주위에선 10명이나 되는 사람들이 그리고 지난 10년 동안 변경연 사람들은 이 책들을 찾았을 텐데 소명출판사는 재판 작업의 욕구가 없을까 생각했다. 기사를 보니 소명출판사가 창립된 이후부터 가장 많이 팔린 책이 이 책이라 한다. 우와, 놀랍지 않은가. 음, 역시 책이 잘 읽히더라니 생각했는데, 가장 많이 팔린 이 책의 부수는 6,000권이라고 한다.

   어떤 책으로의 인도는 철저한 전도자가 있어야 한다는 점에서 이렇게 절판되고 세상에 많이 퍼지지 않은 이 책으로 인도받은 것은 어떤 의미가 있는가를 생각해 보게 된다. 확실히 니체가 이 세상에 미친 영향은 크다. 많은 이들이 니체를 ‘해석’하고 있고 다양한 니체 관련 저서들이 끊임없이 출간되는 것을 보면 알 수 있다. 그러나 니체가 말하고자 하는 바가 정확히 ‘그것’이었다고 우리는 정확히 알 수 있을까? 심지어 니체의 초인은 히틀러의 철학 도구로 활용되기도 하였으니 어떠한 생각이 누군가에게 어떻게 읽혀지는지는 니체가 스스로 자신의 철학이 무엇인지를 말하는 것만큼 중요한 문제로 보인다.

그러나 이 책을 읽으며 저자의 시선을 따라 가다가 불편한 느낌을 받지 못했다. 그건 ‘니 생각일 뿐이야’라거나 ‘어떻게 이것을 이렇게 생각할 수 있지?’하는 거리감을 느끼지 못할 만큼 충분히 자연스럽게 저자의 해석에 녹아들었다. 세상을 바라보는 천 개의 시선과 주름들이 있듯이 이 책도 니체에 관한 다양한 ‘관점’과 ‘해석’ 중의 하나이겠지만 니체의 입을 빌려 전하고 있는 저자의 생각들을 불편하지 않게 동조하게끔 하고 있다는 점이 일단 좋았다. 그리고 그것을 위해 또다른 철학자들을 중구난방으로 끌어들이고 있지 않다는 점, 핵심적인 부분들만을 추려서 개념과 철학의 전달이 간명해서 좋았다.

원저자의 책을 해석하고 있다고 하기에 니체의 글의 ‘원문’들이 많이 인용되어 있지 않다는 느낌이었다. 아마도 그래서 이것은 니체에 관한 해석이란 느낌보다는 저자의 생각들을 주장하는 것이란 느낌을 더 가진 듯도 하다.

   다만, 읽고 나서 ‘불충분하다’는 느낌을 지울 수 없었는데 그것은 아마도 원체 니체가 써내려간 글들이 많기에 말 그대로 ‘모자라다’는 느낌의, 다른 부분도 필요하다는 점이 우선적으로 작용했을 것이다. 책의 구성이 뭔가 다르게 되었으면 하는 생각도 들었는데 그에 대한 구체적인 것은 아직 어렴풋하다. 사실, 읽는 글에 대해서는 명료하게 받아들였는데 책의 구성적인 면에 대해서는 니체의 방대함 때문인지, 명료함은 덜 느꼈다. 니체에 대한 전체적인 조망에서 구체적이고 핵심적인 내용으로 파고들어가는 형태이든 개념을 잡고 전체적인 조망을 보는 형태이든 니체의 윤리학, 정치학, 니체의 해석학, 니체의 종교학, 니체의 자연학 등으로 그의 철학을 정리 요약하여 이해하고픈 욕구로 마치 리포트를 쓰듯이 니체의 사상과 철학의 핵심 개념들을 이런 형태로 정리하고픈 생각이 들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4)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댓글저장
 

잘 살아가겠구나!

 

 ■ 고병권에 대한......

 

 책을 읽다가 문득, 생각했다. 그는 잘 살아가겠구나…. 그렇겠구나. 

  사촌이 땅을 사면 배가 아프다는 속담이 존재함을 과시하듯 좀 멀리 사는 이웃 사촌 덕분에 나는 갑자기 아프기 시작했다. 그렇지만 분명 그것은 질투와 부러움의 배아픔은 아니었다. 다만……좀 서글퍼졌을 뿐.

  삶의 온갖 어려움이 내게 기댈 때 우리는 철학자가 되어 간다. 그리고 철학은 진리를 찾는 것이라 말하는 만큼 삶에 대한 길잡이가 되어 주노라 말하기도 한다. 그러니까, 삶의 복잡성이 그에게는 명쾌한 논제로 풀리지 않을까. 철학자가 아니라고 말하는 그의 일상이 철학적이기에 또한 단순 이론적인 떠벌임으로 머물지 않기에, 아주 편안하고 행복해 보이기에 비록 피상적으로 엿보는 그의 삶을 환하게 하고 있었다. 그의 글을 읽어 가면서 느낀 자기 연민이 나의 철학적 지식의 모자람에 대한 것이었을지도 모른다. 지식이 삶을 더욱 더 명확하게 만들어주는 것은 아니지만 삶의 혼란을 명쾌하게 해주는 것은 아니지만, 어쨌든 그의 철학적 지식이 그의 삶을 보다 더 밝은 곳으로 이끌고 있다는 생각은 변하지 않았다.

  별로 흔들려 보지 않았을 듯한 얼굴을 하고 있는, 결코 선한 거짓말도 해보지 않았을 듯한 얼굴을 하고 있는, 조용하고 담백한 얼굴의 사진을 쳐다보며 나는 그에게 묻고 있었다.

  어떻게 세상을 살고 있으신가요.

 

   그에 관한 객관적인 자료는 그가 그동안 쓴 저서와 그의 학력이 전부였다. 그것이 그의 삶을 말해주는, 아니 이 세상에서 특히 우리나라에서 개인의 정체성을 말해주는 것은 직업과 학력이란 것을 알기에 뭐, 이 정도면 다 알았지 싶다. 다시 보니 그는 철학 전공자가 아니었다. 학부는 화학이었고 대학원에서는 사회학을 공부했다. 그러니까, 철학은 그의 관심사였던가. 아니, 철학이라고 하기에도 그렇지 않은가. 그는 니체에 관한 논문을 썼고 니체에 관한 책들을 썼다. 사람들은 그를 니체 전문가라 말하고 그는, 자신을 철학자가 아니라고 말한다.

어쨌든 그는 수십년 동안을 재야연구소에 머물며 연구하고 강의해 왔다. 그가 오래 도록 활동하고 있는 연구공동체 <연구공간 수유+너머>에서는 추장, 이른바 공동대표를 맡기도 했다. 그곳에서 그는 니체뿐만 아니라 마르크스, 스피노자, 들뢰즈 등의 철학을 공부했고, 민주주의와 사회운동에 대해서도 글을 써서 공저와 번역서를 포함한 그의 저서는 25권이 넘는다.

   저자 고병권은 가난한 농사꾼의 아들이었다. 초3때 보이스카우트 캠프에 가고 싶었으나 어머니가 허락하지 않았는데, 그의 어머니는 거기에 내는 돈이 부담되기도 하고 꼭 가야 한다고 생각하지 않았던 듯하지만, 어린 그는 길에서 구르며 울었다고 한다. 그래서 그가 그 캠프에 갔는지는 잘 모르겠다.

   그는 어릴 적 야구를 좋아했다. 그가 초등학교 5학년일 때 우리나라에 처음 야구가 생겼고 전남 출신인 그는 해태 타이거즈 팬이었다. 그가 야구를 좋아하는 만큼 그는 야구와 관련된 모든 기록들을 찾아 읽었다. 친구들 앞에서 아는 척하기 위해 정말 공부를 많이 한 것인데, 초등학생임에도 어른들이 보는 신문, 잡지, 책을 가리지 않고 읽었다.

서른 넘어서는 인라인스케이트를 배웠다. 친구들과 한강시민공원에서 인라인을 타다 한남대교 근처에서 돌멩이에 바퀴가 걸리며 쓰러진 적이 있다. 머리에 피가 흐르고 얼굴이 부어 오른 채 공사용 철재 밑에서 기어 나왔다고 하는데 아마도 그곳에 철재가 없었으면 한강에 빠졌을 것이다. 그리고 그는 사고 후 인라인을 그만뒀단. 같이 배운 그의 친구들은 지금 인라인에 고수가 되어 있다고.

   성인이 되어 대부분을 재야연구소에서 보낸 그는 학부 4년, 석사 2년, 박사 2년의 기간, 8년을 대학에 적을 두고 공부했고 15년 동안 대학 언저리를 맴돌았지만 대학이 싫단다. 그래서 가급적이면 대학 강의를 가급적 하지 않으려 한다. 이유는, 재미가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먹고 사는 게 쉬운 일이 아니니 그나마 그거라도 해야 할 것인데 줄이는 이유는 다행히 강의를 줄여도 먹고살 수 있는 공동체적 기반을 갖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무엇보다 불쾌한 기억 때문에 그는 강의를 줄이고 있다 한다. 6-7년 전쯤 교양과목 첫 시간에 강의 계획서를 나눠주며 내용을 간략히 소개하는 시간에 맨 뒷줄에 앉은 세 명이 가방을 책상에 올려놓고 엎드렸다. 그는 첫 시간이고 강의 시작하기 전이라 무시할까하는 생각에 그대로 두었다가 강의 내내 신경이 쓰여 결국 바로 앉으라고 말했다. 그랬더니 “이래도 다 들려요.” 그때 그는 화가 났고 그 자리에서 강의를 위해 서 있어야 하는 것이 서글펐다고 한다. 그래서 그 이후로 강의를 하지 않으려 노력한다. 이 노력은 대학 강의를 말한다. 대학이라는 곳에 들어와 비싼 등록금을 내고서 공부하는 이들의 열정이나 태도에 대해 그는 실망하지만 결코 강의 자체에 대해 회의를 느낀 것은 아니다. 여전히 그는 대학이 아닌 곳에서 강의를 하고 있다. 수유너머, 교도소나 야학에서 강의를 지속하고 있다. 그리고 그들에게 강의를 하면서 대학에서 강의하는 것보다 더욱 많은 느낌을 가진다.

   그가 강의를 하게 하는 토대인 연구소 수유너머는 연구하는 이들이 모인 공동체다. 그는 이곳에서 많은 시간을 보내며 살아왔고 살아갈 것이다. 그가 여기서 공동대표를 맡았기에 공동대표는 추장이라 부르기에 그는 ‘고추장’이라 불린다. 그는 이 공간에서 공부할 수 있었던 것을 동료들에게 감사하며 행복해하고 있다. 결코 혼자서 행복할 수 없다는 친구들과 함께여서 행복하다는 그의 행복론은 공동체 연구공간인 수유너머의 삶에서 터득한 것이다. 그래서 그는 또한 자신에게 끊임없이 삶에 대한 철학과 정치와 앎의 가치를 되묻도록 해준 이들에게 감사하며 사유하고 행동하기 위해 여전히 연구하고 강의하며 살아가고 있다.

    

참고 자료

 

•고병권, 생각한다는 것, 너머학교, 2010.

•고병권, 살아가겠다, 삶창, 2014.

•니체는 자신을 어떻게 변신시켰는가, 오마이뉴스, 2003.2.27

•뉴 파워라이터, 수유너머R 연구원 고병권, 경향신문 인터뷰, 2014.2.17

•http://navercast.naver.com/contents.nhn?rid=254&contents_id=57437

 


댓글(0) 먼댓글(0) 좋아요(6)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댓글저장
 

 

 

버트란트 러셀의 생애와 세 가지 열정, 서양의 지혜

   

 

“단순하지만 누를 길 없이 강렬한 세 가지 열정이 내 인생을 지배해왔으니,

사랑에 대한 갈망, 지식에 대한 탐구욕, 인류의 고통에 대한 참기 힘든 연민이 바로 그것이다.

 이러한 열정들이 나를 이리저리 제멋대로 몰고 다니며

 깊은 고뇌의 대양 위로, 절망의 벼랑 끝으로 떠돌게 했다.”

 

■ 버트란트 러셀의 생애

 

    셀은 20세기를 대표하는 지성인이자 저술가로 알려져 있다. 그의 지성은 철학을 넘어 그의 저작에까지 이르러 그를 문학가에게 수상하는 노벨문학상 수상자로 만들어 주었다. 러셀은 1950년 권위와 개인이라는 작품으로 노벨 문학상을 수상한다. 그러나 그는 작가이기보다는 철학자이자 수학자이었던 사람이다. 아니, 윤리학, 사회학, 교육학, 역사학, 정치학, 논쟁술 등에 관한 40 여 권 이상의 책을 썼으니 대단한 작가라고 할 수 있겠다. 

 

    그는 1872년 영국 웨일스에서 태어났다. 그의 이름에서 보듯이 Bertrand Arthur William Russell, 3rd Earl Russell은 귀족 가문, 백작의 작위를 물려받았다. 그의 할아버지는 존 러셀은 빅토리아 여왕 시절 두 번의 총리를 지냈다. 그러나 어린 시절의 러셀은 할머니 손에서 자라야 했다. 그의 부모는 일찍 사망했고 1878년에 할아버지 존 러셀도 사망했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그의 할머니의 특별한 교육방침과 원칙이 러셀의 삶 전반에 영향을 미쳤다. 그녀는 삶의 원칙이 분명한 사람이었고 공교육을 거부했다고 한다. 러셀의 좌우명은 그녀의 할머니가 즐겨 외우던 출애굽기(23:2)의 성경구절 ‘다수의 사람들이 잘못을 저지를 때에도 그들을 따라가서는 안 되며, 다수의 사람들이 정의를 굽게 하는 증언을 할 때에도 그들을 따라가서는 안 된다’가 되었다.

   그가 할머니로부터 받은 이 영향으로 그는 사회의 부정의에 대해 끊임없이 저항했는데, 그것은 그가 98세로 사망할 때까지 이어진 할머니로부터의 가르침이었다. 러셀은 아무리 많은 사람들이 옳다고 하거나 아무리 큰 권력의 행위라 하여도 정당화될 수 없는 행위에 대해서는 논리적으로 비판하였으며, 그것이 비판에 그치지 않고 실천적 행동으로 옮겨져야 한다는 일관성을 견지하였다. 바로 이러한 지적 정직성을 갖고 러셀은 핵무기와 베트남 전쟁을 비판하였다. 대중의 편견에 흔들리지 않고 진실을 지켜야 한다는 러셀의 태도는 이미 고대의 철학자 소크라테스와 공자도 누누이 강조한 바가 있었다.

   러셀은 1차 세계대전을 겪으면서 실천적 지식인으로 변모해 갔다. 전쟁 중인 1916년에는 징병 반대 문건을 쓴 혐의로 벌금형을 선고받았으나 납부를 거부하여 트리니티 칼리지에서 강의권을 박탈당했고, 2년 후에는 전쟁에 반대하는 글을 썼다는 이유로 6개월간 투옥되기도 했다. 2차 세계대전 이후에는 핵무기로 인한 인류의 파멸을 막고자 ‘러셀-아인슈타인 선언’을 조직했고, 아흔의 나이에도 시민 불복종 운동에 앞장섰다.

또한 러셀은 아인슈타인, T. S. 엘리엇, 디킨슨, 케인스, 화이트헤드, 조지프 콘래드, 비트겐슈타인 등 한 세기를 풍미한 위대한 사람들과 교류함으로써 20세기 지성사에서 그의 자리를 확고히 했다. 지칠 줄 모르는 지적 정열로 하루 평균 3,000단어 이상의 글을 썼고, 화이트헤드와 함께 10년에 걸쳐 『수학 원리』를 집필하는 등 수학과 철학, 사회학, 교육, 종교, 정치, 과학 분야에 걸쳐 70여 권의 저서를 남겼다. 특히 생의 마지막에 출간한 자서전은 정직하고 명쾌한 문체로 자신의 인생을 놀라운 통찰로 그려 내어 오늘날까지도 자서전의 전범으로 평가받고 있다. 1970년 2월 2일 밤, 98세의 나이로 웨일스에서 사망했다.

 

■ 사랑에 대한 갈망

 

   러셀은 매우 고독한 사춘기를 보냈고 몇 번의 자살 충동을 느꼈다고 한다. 그는 자신의 회고록에서 주된 관심사가 종교와 수학이었고, 그가 자살을 하지 않은 것은 조금이라도 수학에 대해 알고 싶은 마음이었다라고 적고 있다.

   러셀은 1890년 가정교사로부터 교육을 받고 나서 1890년 케임브리지 대학교의 트리니티 칼리지에 장학생으로 들어가 공부를 하게 된다. 그곳에서 그는 자신보다 어린 조지 에드워드 무어를 만났고 17세에는 퀘이커 교도였던 앨리스 페어살 스미스와 만났으며, 그녀의 가족과도 친밀한 관계가 되었다. 그리고 러셀과 앨리스는 사랑에 빠져 할머니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1894년 12월 13일 결혼했다. 그러나 곧 그들은 1901년 파경을 맞고 1921년 이혼을 한다. 그의 어린 시절 사랑이자 아내인 앨리스와의 파경이 이유는 그가 자전거를 함께 타다가 그녀를 더 이상 사랑하지 않는다고 고백했기 때문이며 그 이유 중의 하나는 그녀의 장모가 잔인하게 그를 조종하는 것을 싫어하기 때문이기도 했다. 이후 그들이 이혼하기 전까지 별거기간 동안 러셀은 오톨린 모렐, 배우 콘스턴스 말레슨 등 여러 사람들과 열애 관계였다.

   그러나 사랑이란 무엇일까. 보통은 사랑은 이성간에 생기는 감정으로 얘기한다. 그의 인생을 지배한 사랑에 대한 갈망을 러셀은 얘기한다. 그것이 지식에 대한 갈망이 아니라 순수하게 이성간에 대한 사랑을 말한다면, 정말 그런듯하다. 그의 98년의 생애에 대해 많은 것을 알지 못하지만 그가 적어도 4번은 결혼했고 3번을 이혼했다는 것을 안다. 이십대, 사십대, 오십대를 지나 마지막 결혼은 그가 65세일 때였다. 그는 자신의 체험담을 담아 결혼과 도덕에 관한 책을 썼고, 그 책은 남녀 모두에게 억압적이지 않는 성, 사랑, 결혼의 방정식을 찾고자 노력하는 내용이다.

 

 ■ 서양의 지혜에 대하여

    

  저자인 러셀은 이 책의 목적에 대해 다음과 같이 말한다.

 

“철학이 무엇인가를 알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스스로 철학을 해보는 것뿐이다.
그러므로 과거 사람들이 철학을 어떻게 해왔는가를 보여주려는 것이

이 책의 주된 목적이다”

 

   러셀은 위와 같은 목적을 가지고 그동안 철학이 전개되어 온 흐름에 따라 그 흐름을 주도한 철학자의 주장과 생애를 서술하고 있다. 간간히 철학가들이 주장하는 이론에 대해 러셀 자신의 개인적 평가를 담는 것도 잊지 않고 있다.

   처음 철학적인 질문이 제기된 것이 언제였는지, 무엇 때문이었는지, 누가 그것을 제기하였는지에 대해 시작하며 러셀은 철학에 관한 사유와 논증들이 변화되고 이어져 가게 되는 시대적인 배경을 살펴보는 것도 잊지 않고 있다. 인간의 삶에 대한 질문들은 어느 시대에나 있어 왔지만 특정 시대에 특정 철학사조가 나타나는 이유는 당대의 사회문화적인 상황과 연계되어 있다고 볼 수 있다. 따라서 이러한 사회문화적인 상황들 속에 나타나는 철학사조의 전개가 철학가들의 개인적인 특성과 관심과 맞물려 이루어나가게 되는지를 러셀의 생각을 통해서 보게 된다.

   전반적으로 시원하지 못하다는 느낌을 받고 있어서인지 어떤 장이 감동적이었다고 해야 할까. 이 책은 10개의 장으로 구분되어 있고 각 장의 내용전개는 동일한 패턴으로 흐르고 있기에 딱히 어떤 장절을 감동적이라 꼽기는 애매하다. 아마도 감동적이라 꼽는다면 특정한 철학가나, 특정한 철학사조에 대한 매력이 그 이유가 될 것이다.

어쨌든 철학의 흐름이 당대의 사회적 상황과 무관하지 않음으로 그러한 배경을 이야기하고 철학가들의 개인의 생애에 대한 아주 약간의 이야기들을 곁들이고, 그들이 제기한 주장에 대해 자신의 논평을 곁들여 이끌어 가는 것은 그 의견에 대한 수용을 떠나 보다 흥미로울 수 있는 부분이라고 생각한다.

   보기도 좋은 떡이 먹기도 좋다라는 말이 생각난다. 먼저 편집에 관하여 얘기하자면, 이 책은 1990년 출간되고 현재까지 계속 재판이 이루어지고 있다. 그런데 여전히 판본의 변화를 주고 있지 않다. 두드러진 여백의 미는 좋아 보이긴 하지만 그로 인한 작은 글씨체나 정리되지 않고 나열된 그림의 배치가 개인적으로는 책의 가독성을 높이는데 방해가 되었다. 교과서를 읽은 지 오래 되었지만, 마치 학생들 교재용 참고서라고 할까, 그런 느낌을 받는 책이었다. 내가 서양의 지혜에 대한 지식을 좀 더 흥미롭게 얻을 수 있는 책이라는 느낌이 들 수 있는 편집에 대한 아쉬움이 있다.

   중요한 것은 내용이다. 사실, 러셀에 대한 기대가 많아서 이 책에 대한 기대도 있었다. 나에게 서양철학에 대한 이해를 잘 이끌어 주리라는 기대. 그는 20세기 대표적인 지성이라 불리고 무려 40권이 넘는 책을 저술했고, 노벨문학상까지 받은 사람이다. 그러니 그의 사고나 문장들에 잔뜩 기대를 가졌다. 아마도 기대 때문이었을 것이다. 만족도가 덜 하다는 것은. 고등학교 때 배운 국민윤리 이상의 느낌을 가지지 못한 것은 나의 이해의 부족이 크게 자리할 것이다. 그 점을 감안하고라도!

   20세기의 지성이라는 러셀의 저작에 대해 감히 어떤 문제점을 찾아내고 그에 대한 보완을 말할 수 있을까. 그러나, 분명히 말할 수는 없지만 무언가 부족하다는 느낌을 지울 수가 없었다. 러셀이 과거의 사람들이 철학을 어떻게 해왔는가라는 것을 보여주려는 것이 목적이라는 말이 책을 덮고 나서야 확실히 알게 되었다. 그러니까 이 책을 통해서 나는 특정한 철학에 대한 깊이 있는 이해보다는 흘러가는 대로의 철학가들을 소개받기만 한 것이다. 아마도 부족함은 여기에서 오는 것일 게다. 좀더 깊이 있게 들어가고 싶은 부분에 대해서 더 이상 논의가 되지 않으니까 답답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철학가들의 주장인 듯 러셀 자신의 주장인 듯 덧붙여진 의견에 대해서도 좀더 명확하게 분리가 되었으면 하는데 이 역시 철학가들을 명확히 알지 못하기에 정확히 분리한다거나 다른 의견을 덧대지 못한다는 점이 있었다. 이 책 한권으로는 철학이 전개되어 온 흐름에 대한 윤곽을 잡아보기는 하겠지만 러셀이 드문 드문 보태는 자기 의견에 동조가 되지 않는 점은 분명하다. 만약 흡입력이 있었다면 러셀의 주장 모두를 고개를 끄덕이며 수용하고 있지 않았을까. 철학가들의 이론을 요약하고 정리하고 있기 때문에 그 철학가들의 사상에 대해 부족하게 이해된 점이 있을 것이다. 하지만, 그런 이해까지 해주도록 러셀에게 바랐다면 지나친 것일까. 다만 이 책은 보다 깊이 있게 내용을 파악하기 위한 전단계로서의 개론서의 역할에는 충분했다고 본다. 다른 철학가들과 그들의 사상에 대해 찾아 읽어보기를 재촉한다는 점에서 말이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3)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댓글저장
 

 

흔들의자 위의 노인 윌 듀란트의 철학이야기

 

 

 

   철학이야기는 철학사에 이름이 남은 15명의 철학자들의 사상과 그들의 생애를 기술하고 있다. 저자 스스로 “이야기”라는 제목을 달았듯이 이 책은 철학가들이 얘기하는 철학을 설명하고 해석하는 것보다는 철학가들의 생애와 그들의 철학적 주제에 이르게 되기까지의 영향과 과정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다. 어쩌면 그가 ‘이야기’라고 하게 된 이유는 이 책은 월 듀란트의 강연 원고를 기초로 제작되었기 때문일 것이다.

   저자가 이야기를 풀어 가는 철학자 15명, 플라톤, 아리스토텔레스, 베이컨, 스피노자, 볼테르, 칸트, 쇼펜하우어, 스펜서, 니체, 베르그송, 크로체, 러셀, 산타야나, 제임스, 듀이다. 월 듀란트는 이들 철학자들이 철학사에 영향을 준 인물이라는 점을 전제하고 이들을 중심으로 당대 철학사조와 배경을 설명하고 철학사상에 대해 언급한다. 그리하여 오랜 철학의 역사 속에 달랑 15명의 철학자들은 너무 적은 것 아닌가 생각하기 전 간간히 철학사에 이름을 내민 이들의 이야기가 소개되고 있다. 그리고 역시 15명의 철학자들의 생애를 중심으로 그리고 그들이 저술한 책을 중심으로 각각의 철학자들의 철학에 대해 이야기를 풀어 나간다. 그리고 이들에 대한 비판으로 마무리 짓고 있다.

  월 듀란트의 문체로 철학이야기를 읽는 맛은 각 개별 철학자들이 주장하는 철학에 대한 이해를 높여 주었다. 저자가 이렇게 적절하게 철학자들의 논리를 이어주는 것이 좋았다. 물론 철학자 개인에 대한 선호도에 따라 관심도가 달라지는 장이 없다고는 못하겠다. 그러나 전체적으로 동일한 패턴으로 철학자들의 이야기를 풀어 나가고 있기에 특정한 장이 좋았다 말하는 것보다는 전체적으로 좋았다라고 하는 것이 좋을 듯하다.


   특히 저자가 밝혔듯 ‘이야기’들이 좋았다. 철학자들의 생애에 대해 알지 못한 것을 따로 찾아보지 않고 소개를 해주고 있고, 특히 철학사조의 탄생과 저술과도 연계시켜 주고 있기에 나름 공감이나 이해가 더 빨랐다는 생각이 든다. 그저 이 책을 저술하기까지의 노고를 어떤지를 아는 터라 이렇게 쉽고 편하게 이해할 수 있도록 내용을 엮어 가는 저자에게 놀란다. 모든 장이 저자의 각고의 노력이 숨쉬고 있는 장이다. 개별 철학자들의 생애를 더욱 더 궁금하게 만들고 그들의 철학책을 읽고 싶도록 만든다. 도대체 무슨 말인지 이해가 안되어 찾아보자라는 느낌이 아니라, 감탄과 함께 찾아보고프게 만들기에 저자에게 이 책이 많은 부와 명예를 주었던 것을 의심하지 않게 된다.

  책을 읽어가며 서양의 지혜에 비해 편하게 읽힌다는 느낌이었다. 이것은 서양의 지혜를 읽은 후 반사이익일까. 러셀의 문제일까, 월의 능력일까, 나의 문제일까. 아니면 번역의 덕일까. 하나의 책이 여러 번역가들에 의해 번역된 경우 어떤 책을 선택할 지에 대한 고민을 해결해 주는 것 중의 하나가 출판사와 번역가에 대한 것이다. 보통 여러 번역본을 비교하고 끌리는 문장에 따라 책을 선택한다. 책을 선택한 것은 아니고 주어진 것이긴 하지만, 잠시 다른 번역본을 살펴보니 이 책의 번역이 편했다. 정영목 번역가가 번역한 책들을 여러 번 읽어서인지 그의 번역체에 익숙해졌는지도 모른다. 어쨌든 내가 하고픈 이야기는 결국, 이 책을 편하게 읽었다는 것이다. 그리고, 이 책이 월 듀란트의 이후의 삶을 경제적으로 편하게 해준 이유가 아마도 그것의 힘도 있을 것이다. 또한 이미 많은 출간이 이루어진 책이 왜 또 번역되어 출간되는지도 알 수 있을 듯싶다. 어쩌면, 인간은 늘 수많은 철학문제를 인생에서 뗄 수 없는 모양이다. 거기서 나름 인생의 지혜와 위안을 얻는 모양이다. 좀 더 쉽고 편하게 써내려간 철학이야기가 삶에서 철학을 가까이 하고 싶어 하는 이들의 손을 잡아 주었다.


   이 책은 월 듀란트가 성인노동자들에게 강의한 내용을 바탕으로 이루어졌다. 그렇기에 그는 보다 쉽고 재미있고 의미있는 내용이 전달되도록 주력하였을 것이다. 사변적인 철학보다는 이들 철학자들의 생활들에 대한 이야기로써 철학을 이야기하는 형태의 구성이 되었을 것이다. 상당히 매끄럽게 책이 읽혀지는데 저자는 이 책을 쓰기 위해 아주 많은 시간 노력했기 때문이다. 각 철학자들의 철학 원전을 500번이 넘도록 읽고 이것을 집필하는데도 3년이 소요되었다고 하니 오랜 시간 동안 쌓아온 그의 지식과 이것을 사람들과 나누고픈 그의 열정과 애정이 보다 잘 전달될 수 있었던 듯하다. 각 철학자들이 주장하는 철학이론들이 어떠한 배경에서 나올 수 있었고, 그것이 철학가들의 삶과 어떻게 연관이 되는지를 파악할 수 있어 철학책을 소설책 읽듯이 읽을 수 있게 만드는 것이 이 책의 장점이라 본다.

  그러면서도 모든 철학자들의 철학사상에 대한 비판을 얻고 싶은 이 기분은 뭘까. 그렇기에 비판의 장이 나오면 나도 모르게 흥분이 된다. 그런데 월 듀란트는 몇몇 장에서 이것을 생략하고 있다. 그에게 특히 애정을 준 철학자라도 비판은 필요하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4)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댓글저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