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비디우스의 네 시대
변신이야기의 작가, 오비디우스에 대해여
변신이야기를 읽고 있노라면 작가에 휘둘린 나는 그의 언어를 따라가고 그가 표현해 낸 세계 속에서 한참을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그러다 부랴부랴 이러한 세계를 그려내는 작가의 실제적 모습을 찾아본다. 나름 머릿속에 그려지는 오비디우스의 자신감 넘치고 유려한 언변은 그의 발걸음마저 유쾌하고 활달했을 것이라 느끼게 한다. 바닥을 치고 끌고 가는 무거움과 진중함이 아니라 발뒤꿈치를 들고 엉덩이마저 약간 흔들며 걸어가는 모습이랄까. 기사 가문에서 태어나 관리직 교육을 받으며 자랐다는 남성의 발걸음으로는 어색하지 않으냐 할 지 모르나 내게 그 발걸음은 오비디우스의 언변에서 느껴지는 것과 같은 것이다. 쾌활함과 유쾌함 속에 본질적으로 스며있는 경박함이 코믹스럽기까지 하다. 안타깝게도 이러한 이미지는 유배지에서 쓸쓸히 생을 보내는 그의 모습에서도 지워지지가 않으니 그에 대한 첫 이미지가 너무나 각인된 탓이다. 명확히 알려지지 않은 채 여러 갈래로 나오는 추방 원인에 대한 이야기들 때문이기도 하다. 그리고 유배지에서 애타게 권력자에게 띄우는 그의 시와 서한때문이기도 하다. 또한, (그 스스로에게는 피말리는 생존의 문제였겠지만) 변신이야기의 종결이 결국 권력자에게 띄우는 아부적 메시지를 담고 있다는 점에서도 그렇다.
수천 년이 지나 여러 가지 떠도는 이야기들로만 그의 생애를 접한 나이기에 그 세월 동안의 오비디우스의 고통, 슬픔, 분노, 억울함에 대해서도 잘 알지 못한다. 내가 어찌 그것을 가늠한다 할 수 있으랴. 다만, 욕심에 그의 말년이 좀더 당당하고 덤덤했기를 바라는 것이다. 한 시대를 ‘오비디우스의 시대’라 칭송받던 그이다. 정말로 그의 추방 이유가 <사랑의 기술>에서 나타난 사랑에 대한 묘사때문이라면 후대뿐만이 아니라 당대에도 뛰어난 문학적인 역량을 칭송 받던 그이기에 <비가>에서 보여주는 바와 같이 ‘내가 잘못했소’, ‘다시는 그러지 않겠소’라며 아우구스투스에게 돌려보내달라고 애원하지 않았으면 하는 것이다. <변신이야기>의 끝을 아우구스투스에게 바치는 찬가로 둔갑시키지 않았으면 좋았을 텐데하는 아쉬움이다. 그것이 작가적 자존심 아니겠는가.
1) 황금시대 - 그의 문학은 봄이었다
오비디우스는 호메로스, 3대 비극시인인 소포클레스・아이스퀼로스・에우리피데스, 베르길리우스와 더불어 로마 시대를 넘어 중세와 르네상스, 현대에 이르기까지 대표적인 작가로서 명성을 드날리고 있다. 루드빅 트라우베라는 학자는 서양의 12~13세기는 오비디우스의 시대라 불릴 만큼 오비디우스의 영향력이 강렬했다고 얘기할 정도이다. 예술가들이 당대에는 주목을 받지 못하다가 후대에 이르러서야 칭송받는 것과 달리 오비디우스는 베르길리우스와 함께 로마의 황금기를 대표하는 시인이었고 그가 죽고 난 후에는 홀로 로마의 황금기를 대표하는 시인이 되기도 했다.
그가 시인으로서 금방 명성을 얻었다. 그의 탁원한 묘사력과 수사학이 그의 작품에 녹아 있으며 그의 작품은 상상력과 풍부한 독창력을 가지고 있었다. 그리스로마신화 뿐만 아니라 융을 비롯한 많은 작가와 화가, 예술가와 인문학자들이 오비디우스의 작품으로부터 영감을 얻고 그들 작품에 인용하거나 새로운 창작을 하기도 했다.
2) 은의 시대 - 계절이 생겨나 집을 만들다
사투르누스가 암흑의 타르타로스에 갇히고 세상의 지배권이 유피테르의 손으로 넘어가면서 계절이 생기고 인간들은 집으로 들어가고 곡식을 뿌렸다. 오비디우스는 이 시대를 은의 시대라 말한다. 오비디우스는 자기의 계절을 만들어 집에 정착을 했을까.
그는 이탈리아 펠리그니의 술모의 기사 가문에서 태어나 나름 유복한 생활을 했다. 대다수의 시인들이 아우구스투스로부터 경제적 후원을 받던 것과 달리 안정된 기반에서 작품 활동을 할 수 있었던 것이다. 물론 그의 어린 시절은 아버지의 뜻에 충실했다. 아버지의 바람대로 아테네로 유학하여 웅변술의 대가였던 아우렐리우스 푸스쿠스와 포르키우스 라트로에게서 수사학과 법률 공부를 했다. 관리가 되기 위한 공부였고 실제로 관리생활도 조금은 했다. 그러나 시간의 흐름에 따라 자식이 아버지를 이기는 시간이 오는 법, 그는 아버지의 반대에도 결국 관리가 되는 것을 포기하고 그가 하고 싶은 작품을 쓰는 것을 선택한다. 물론, 지금과 마찬가지로 정치가, 관료가 되는 것이 안정된 생활과 명예를 주는 직업이었을 것이다. 그러나 당시 로마는 문학을 핍박했던 시대가 아니라 아우구스투스에 의해 ‘팍스 로마나’가 꽃피던 시절이다. 화려한 문화예술의 번영은 현실적인 여건에 구애받지 않고 문학적 재능을 펼칠 수 있었다. 그의 아내 역시 유명한 여류 시인인 술피키아라고 한다.
이에 대한 개인적인 기록은 찾아보기 어려우나 그는 세 번 결혼을 했고 두 번 이혼을 했다고 한다. 그 당시에는 이혼이 어떤 인식이었는지 모르겠으나 술피키아가 그의 마지막 부인이라는 것만 전한다. 그리고 두 번째 부인과의 사이에서 딸었고 손자들을 둔 것으로만 알려졌다. 술피키아는 그처럼 문인 보호자인 메살라의 식객이었고 그가 유배로 인해 고통받을 때 정신적인 지주가 되어 주었다 한다.
3) 청동의 시대 - 무기를 쥐었으나 범죄와는 거리가 멀었다
오비디우스의 문학적 재능을 주목한 사람은 마르쿠스 발레리우스 메살라이다. 그는 시인이자 장군으로 당시 가난한 시인들의 정신적 지주이자 경제적 후원자였다고 한다. 그러나 오비디우스는 자신이 경제적으로 안정되어 있었기에 당대 아우구스투스로부터 경제적 후원을 받는 다른 작가들과는 그 작품의 경향에서 다소 차이를 보이고 있었다. 그 대표적인 것이 오비디우스의 작품은 연애와 사랑을 다루고 있으며 그 경향도 상당히 자유스러운 연애를 주창했다는 것이다.
4) 철의 시대 - 오로지 기만과 계략과 음모와 폭력과 저주받을 탐욕이 들어찼다
철의 시대에 인간은 순결, 정직, 성실성 같은 덕목을 기피하고 오로지 기만과 부실(不實)과 배반과 폭력과 탐욕만을 좇았다. 기간테스들이 신들에게 도전하자 유피테르는 대홍수를 내려 모든 인간들을 죽게 한다. 신실한 노부부 데우칼리온과 퓌라만 살아남아, 이들이 던진 돌에서 인간들이 다시 생겨난다. 철의 시대의 이 모양은 오비디우스가 겪은 말년의 사건과 유사하다. 이 때의 오비디우스는 아우구스투스의 입장에서 보건대 황제가 내린 율리아법을 무시하고 오로지 기만을 일삼으며 황제에게 도전했다. 그리하여 황제는 그에게 추방령을 내리고 그의 작품 역시 외면하였던 것이다. 그러나 오비디우스는 유배지에서도 그가 가진 필력으로 끊임없이 작품을 쏟아내어 후대에 이르러서도 그의 명성을 이어나갔다.
▷ 이 도시를 떠나라
추방이다. 원로원 재판이나 다른 정식 재판 절차는 없었다. 오로지 왕, 아우구스투스의 명령에 의해 집행되었고 그 희생자는 오비디우스였다.
로마로부터 멀리 떨어진 토미스, 지금의 루마니아에서 10여 년을 보내던 그는 귀향을 꿈꾸다 사라져갔다. 그곳의 야만인들 사이에서 생명의 위협을 느끼며 비참하고 쓸쓸한 만년을 보냈다고도 하고 나름 적응을 잘했다고도 전한다. 오비디우스의 시신 매장 장소는 정확이 알 수 없으나 토미스 인근 도시 카나라로 추정된다고 하다. 루마니아의 코스탄차 광장에 오비디우스 동상이 있는 것도 이러한 이유일 것이다.
아우구스투스의 이 추방원인은 아우구스투스가 율리아 법을 제정한 그 시기, 지나치게 외설적으로 표현한 그의 시 때문이라고 알려졌다. 윤리적인 문란을 바로잡으려는 황제에게 이러한 금서를 작성한 오비디우스는 당연히 죄를 물어야 할 것이었다. 그렇기에 금서를 작성한 오비디우스는 그의 작품의 경향 때문에 추방당한 것으로 알려졌다. 하지만 추방 원인에 대해서는 다양한 추론이 이루어지고 있다.
그리고 오비디우스는 끊임없이 황제에게 자비와 애정을 갈구하였다. 자신의 잘못을 뉘우치고 있다는 시들을 쓰고, 아우구스투스의 건국의 정당성을 강조하는 <변신이야기>를 쓰며 로마로 되돌아갈 수 있기를 간절히 염원했다. 그러나 그의 이러한 노력과 염원에도 불구하고 황제는 그를 다시 찾지 않았고 추방당한 오비디우스는 누구도 그를 아는 체하는 것은 위험한 일이었기에 유배지에서 10년을 보내다 혼자 죽어갔다고 전해진다.
▷ 네 작품도 함께 떠나라
그러면 표면적으로 추방의 원인이 된 그의 작품, <사랑의 기술>은 어떠한 내용들을 품고 있는가. 오비디우스의 작품의 전반적인 경향이 ‘사랑’을 다루고 있다. 오비디우스는 주로 자신의 경험을 바탕으로 사랑을 이야기했다. 그 사랑의 시는 고귀하다거나 진정성보다는 ‘유혹’과 ‘연애’에 중점을 두고 있었다. 초기 작품인 <사랑도 가지가지>나 <여류편지>에서도 여성을 중심으로 한 연애의 노래나 편지를 담고 있는데 상당히 자유로운 연애에 관해 이야기하고 있다.
그는 주로 자신의 경험을 바탕으로 ‘사랑’을 이야기 했고, 사랑에 대한 시를 많이 썼다. 그는 사랑의 고귀함이나 사랑에 대한 진정성 같은 것 보다는 사랑의 ‘유혹’에 대한 부분에 중점을 두어 작품을 써내려 갔다. 율리아간통법은 간통한 자는 서로 다른 섬에 추방하고 재산의 일부를 몰수하며 아버지는 간통한 딸과 상대를 죽일 수 있는 내용의 법이었다. 아우구스투스는 이러한 법을 제정하면서 당시 보수적이고 엄격한 기강을 세우고자 했다고 전해진다.
"여자의 남편을 네 편으로 만들려고 애를 써라. 그녀의 남편과 친구가 되면 너와 그녀의 관계에서도 손해보다는 이득이 많이 생길 것이다. 술자리에서 제비를 뽑아 네가 마실 차례가 되었어도 그에게 양보하라. 네가 먼저 받은 화관도 그의 머리에 씌워주라. 신분이 너보다 못하든 같은 개의치 마라, 그가 모든 일을 항상 너보다 먼저 하도록 하라, 대화에서 발언할 기회도 그에게 먼저 양보하라“ - 사랑의 기술
그러나 위에서처럼 사랑이 기술은 자유분방한 연애를 다루며 마치 아우구스투스의 이 법을 조롱하듯이 기술되어 있다. 그리고 그 내용 역시 연애의 기술을 알려주지만 실제로는 간통을 부추기는 말들을 하고 있기도 하다. 하지만 추방의 원인으로 지목된 이 책은 법 제정 이전부터 발표되었으니 오비디우스의 추방의 이유에 대한 논란이 가속화된 건 당연할 지 모른다.
▷ 유배지에서 보내는 편지
그는 추방당한 뒤, <비가>와 <흑해로부터의 편지>를 쓰게 되는데 여기에는 변방으로 유배된 시인의 불행과 도시에 대한 귀환을 바라는 간절한 소망이 표현되고 있다. 그러나 끝내 귀국은 허락되지 않았다.
이 책에서 그 스스로 추방의 원인에 대해 언급하고 있다. <비가>에서 자신의 추방은 ‘시와 실수’ 때문이라고 언급하고 있다. 이 중 자신이 저지른 ‘잘못’이 살인보다 더 나쁘고, ‘시’보다 더 해롭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자신의 이 잘못은 대해서는 누구도 알고 있는 문제이지만 아우구스투스의 상처를 건드리지 않기 위해 언급하지 않겠노라 말하고 있다. 그는 <비가>에서 발생한 악재들 중 일부는 자신과 더불어 소멸할 것이라며 본인 스스로 그것을 감출 것임을 분명히 하고 있다. 모든 비밀들을 다 얘기해왔던 옛 친구에게조차 자신을 파멸시킨 그 비밀에 대해서만은 함구했다는 오비디우스는 그 자신의 죄에 대해 언급하는 것이 간단치도 안전하지도 않은 일이라면서 자신이 입은 상처의 성격에 대해서나 원인에 대해서 묻지 말 것을 요구한다. 하지만 이러한 침묵이 사람들의 호기심과 상상력을 부추기는 요인이 되어 버린다.
그리하여 추론된 이야기 중의 하나는 오비디우스가 유배될 당시 로마 황실에서는 차기 대권과 관련하여 암투가 일어나는 과정에서 오비디우스가 보아서는 안되는 아우구스투스의 외손녀 율리아의 간통 현장을 우연히 목격했거나, 혹은 아우구스투스 자신이 황제 음모에 간접적으로 연루되었다거나, 율리아와 연애를 일으켰다고 보는 추론들이 있다. 어떤 이들은 황실 내부의 수치스런 사건을 목격했다고 유배를 당한 것은 설득력이 떨어져 정치적 음모에 그 자신이 가담한 것이 아니냐고 하기도 한다. 특히 아우구스투스의 뒤를 이은 티베리우스 황제가 오비디우스의 사면 복권 요청을 묵살하고 그를 로마로 다시 불러들이지 않은 것도 이런 주장에 힘을 보태는 것이라 한다. 그러나 이보다 더 자주 거론되는 것은 시에서 표현하고 있듯이 황제의 공공연한 왕실 위상을 세우는 데 애를 쓰는 있음에도 공공연히 오비디우스가 황제의 손녀 율리아와 연애를 일삼고 황제를 조롱하였다는 것이다.
ㅊ어느 이야기가 정확한 사실인지는 알 수 없다. 하지만 중요하진 않다. 그저 매우 궁금할 뿐이다. 다만, 황제의 근엄한 사회분위기 조성에도 불구하고 자유분방한 영혼으로 당 시대를 살았던 오비디우스가 있었고, 그의 작품이 있었고, 오늘날까지 읽혀지고 있다는 것만은 사실이다.
참고 자료
•오비디우스, 사랑의 기술
•최혜영, 오비디우스 추방 원인과 언론 자유의 한계, 역사학보, Vol.172, No.0, Startpage 249, Endpage 278, Totalpage 30 , 200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