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페이스북 심리학 - 페이스북은 우리 삶과 우정, 사랑을 어떻게 지배하고 있는가
수재나 E. 플로레스 지음, 안진희 옮김 / 책세상 / 2015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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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래서, 좋아요?! 



쉽게 물든다


  어떻게든 눈을 뜨고 보아도 좋은 일 하나 없는 세상이다. 좋은 일이란 건 보는 것인가, 보이는 것인가. 그것을 발견해내지 못함은 내 탓인가. ‘좋다’가 객관적 상황의, 사실이 아니라 감정의 발현이라 한들 달라진 건 없다. 거듭 생각해도 부닥치는 현실에서 ‘좋은 일’을 만나기는 쉽지 않고 다른 이들의 좋은 일들을 바라만보다가 이룬 것 없는 삶에 대한 씁쓸함을 더욱 자각한다. 자학에 이르는 길을 이토록 빨리 찾기도 쉽지 않을 텐데 쉽게 그 길을 알려주시는 가히 놀라운 2015년이다.

  결핍이 충족되어야 한다면 그래서 쉬이 욕구를 충족시켜줄 디지털 세상이 존재하는 것으로 이 세상의 놀라움은 연장된다. 그 안에서 우리는, 얻으려 했던 좋은 것을 얻고 있는가. 내가 한만큼, 내 일상을 단지 게시하는 대가로, 타인들에게서 너의 삶이 ‘좋아요’라는 인증을 받는 순간 그토록 비어가기만 하는 삶의 욕구가 채워진 듯한 충족. 노력해도 이뤄지지 않은 것들에 대한 보상이듯 봇물 터지듯이 이뤄지는 좋아요는 자신의 가치가 회복되며 비로소 존중받고 인정받는 게 무엇인지를 알게 해준다. 이미 좋아요에 강화된 ‘나’는 좋아요를 생산해내느라 밤낮없는 노동에서 헤어나지를 못한다.

  그래서, 좋아요가 계속될 때 행복감과 충족감이 지속된다면 얼마나 좋으랴. 결국 디지털세계의 삶에서도 충족되지 못하는 결핍은 생기기 마련이다. 밤낮을 잃은 노동에 감각은 마비되고 충분히 재단된 나의 일상에서 더 이상 좋아요를 획득하지 못할수록 고통은 고스란히 쌓이게 된다. 강박처럼 헤어나지 못하는 이 세계에서 자신의 존재를 인정받기 위한 행동들이 오히려 자신의 존재를 잊게, 잃게 만드는 길이었음을 깨닫게 되는 순간, 북받쳐 오르는 고통을 어찌 할까. 아직 그 고통을 알지 못한다면 차라리 다행이라고 해야 할까.

  저자 수재나 플로렌스는 강박처럼 페이스북 세계에 빠진 이들의 이야기들을 들려준다. 그녀가 들려주는 사례들은 실례임에도 불구하고, 아니 실례이기 때문에 전해지는 충격이 크다. 저자가 3년 동안 인터뷰한 페이스북 이용자들은 이처럼 쉽게 페이스북 세상에 물들어 자신을 잃고, 심각한 고통 속에서 헤어나지 못하고 있다.


 간단히 말해서, 중독 행동은 그 순간에 우리를 괴롭히고 있는 문제를 개선하는 것처럼 보인다. 페이스북은 자신에 대한 느낌을 바꿀 수 있다. 자신의 삶이 문제투성이거나 스트레스로 가득 차 있다고 생각될 때 페이스북은 훌륭한 탈출구가 되어준다. 하지만 너무 오랫동안 페이스북 세계로 탈출하면 삶의 다른 중요한 측면들―가족, 인간관계, 현실 세계의 우정―을 잊어버릴 수 있다. (p220~221)


  페이스북에 물들어 중독된 이들. 저자는 이들의 사례들을 통해 페이스북이 미치는 영향에 대해, 그 위험성을 경고하고 있다.



그 물에서 벗어날 수 있을까


  물론, 페이스북의 긍정적인 측면은 있다. 무엇보다 ‘정보’라는 측면에서의 이 기능의 유용성은 두말할 필요 없다. 그러나, 정보의 취사선택이라는 측면에서 과연 우리는 얼마나 통제적으로 정보를 선택할 수 있을까. 개인정보가 원치 않는 곳에 퍼져가는 상황이나 원치 않는 정보를 무의식중에 습득하게 되는 상황을 맞닥뜨린다. 페이스북이라는 도구 자체의 문제가 아니라 그것을 이용하는 사람의 방식이 문제를 양산해내는, 부정성을 확산해 가는 요인이 된다.

  저자는 페이스북에서 만날 수 있는 부정적 이용자들을 감정조종자라 칭하며 파괴자, 나르시시스트, 순교자, 유혹자, 스토커라 명명한다. 자신이 아무리 페이스북의 건전한 이용자라고 하더라도 이러한 유형을 만나 자신의 감정이 그들로 인해 통제되는 일이 일어날 수 있다. 자존감과 생활의 리듬이 깨지며 한껏 충족되었던 감정이 파괴되고 있음을, 애써 찾은 디지털 세계의 안락함도 무너짐을 경험하는 것이다.

  어느덧 우리는 얼굴을 보며 대화를 나누기보다 디지털 세계에서 글을 읽고 사진을 보는 것에 더욱 열광하고 있다. 만나서도 각자의 핸드폰을 들여다보는데 시간과 마음을 쓰고 있다. 과연 우리는 누군가와의 관계맺음을 원하는 것일까. 이러한 관계맺음이 디지털 세계의 변화에 맞추어진 것이라면, 디지털 세계에서도 무너지고 파괴되는 관계맺음은 계속 이어가야 하는가.   



그러나


  삶의 균형을 유지하는 것은 행복의 열쇠이고, 균형을 회복하는 한가지 방법은 최신 기술을 잠시 멀리하는 것이다. (p262)


  페이스북으로 인해 겪게 되는 부정적 사건에 대한 경각심은 저자가 충분히 알려주고 있는데, 어찌 탈출구가 안 보인다. 저자가 제시하는 처방전은 어찌 보면 가장 완벽한 해결책이 될 것 같지만, 그렇기에 전혀 해결될 기미가 보이지 않는 것도 같다. 저자는 현명하게 페이스북을 이용할 것을 제시한다. 하지만, 이미 페이스북에 중독된 이들이 중독에서 벗어나는 방법이 ‘페이스북 이용하지 않기’가 결론이라면, 이것은 오랜 시간 공들여 책을 읽은 독자의 입장에선 김빠지는 일이다.

  페이스북에서 잠시 멀리하기 위해서 페이스북에 심취되어 나타나는 여러 사례들이 ‘당신에게도 생길 수 있는 일’이라는 경각심을 통해 두려움으로 페이스북의 접속을 끊게 만들겠다는 의도라면, 사례가 주는 경각심은 충분히 인지된다. 이 책의 차별점은 대부분의 심리학책이 그렇듯이, 수많은 사람들의 사례이다. 그 사례를 모으고 재구성하며 분석함으로써 심리학이라는, 사람들에 대한 해석에 대한 당위성이 올라간다.

  하지만 이 책은 페이스북 심리학을 읽기 전 내가 생각했던 내용이 전개된다. 특별한 통찰도 특별한 해결책도 제시되지 않는 듯 보인다. 인터넷 중독에서 늘 보던 기사의 내용 이상이 아니었다는 말이다. 그래서, 제법 실망스럽다. 인터넷에, SNS에 중독되는 이유에 대해서는 수없이 논의되어 왔다. 다만, 이 책은 페이스북을 한정해서 제시했을 뿐이다. 어느 특정 분야에 대한 심리학적 원인에 대한 분석이 이미 익숙하다는 것은 그 해결방법 또한 전위적이라기보다는 익숙한 것이면서 해결되지 않는다고 봐야 할 것이다. 그렇기에 그럼에도 불구하고, 되지 못하는, 페이스북을 끊지 못하는 많은 사람들이 있다는 것을 거듭 생각하면 왜 이렇게 단편적인 형태로 심리학적인 접근이 이루어졌을까란 생각이 거듭 든다. 물론 가장 빠른 해결을 위해선 가장 큰 원인을 파악하는 것이 중요하다. 방법적인 차원에서 페이스북 중독에서 놓여 날 수 있었던 사례들이 첨가되었다면 어땠을까.

  이 책은 쉽고 상당히 가독성이 좋다. 어려운 심리학적 용어로, 이론적이고 학구적으로 나열한 책이 아니기에 더욱 그렇다. 임상심리학자가 제시하는 페이스북 중독에서 벗어나는 방법을 기대했기에, 페이스북 심리학이란 이름으로 뭔가 ‘한방 있는’ 통찰과 해결책을 기대했기에 아쉬울 뿐이다. 인터넷에 중독되면, 페이스북에 중독되면 이렇게 돼라고 말하는 선생님에게 ‘도와주세요!’라고 말했다가 ‘끊어!’라는 답변을 들은 기분이 들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확실히 저자의 수많은 사례연구와 거기에서 분석한 페이스북 중독의 원인들을 보면 페이스북을 끊어야겠다는 결심을 하게 만들거나 적어도 페이스북 중독인지 아닌지 스스로를 체크하게 한다. 그래서 어떤 식으로든 경각심을 가지고 페이스북 이용방법에 대해 생각해 볼 것임은 분명할 것이다.

 




*알라딘 공식 신간평가단의 투표를 통해 선정된 우수 도서를 출판사로부터 제공 받아 읽고 쓴 리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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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불안과 함께 살아간다 - 희망과 회복력을 되찾기 위한 어느 불안증 환자의 지적 여정
스콧 스토셀 지음, 홍한별 옮김 / 반비 / 2015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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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불안한 삶을 살아가는 이들에게 



매력적인 불안증 환자를 만나다


  이런, 책을 읽으면서 몇 번이나 저자를 만나고 싶어졌다. 한번도 보지 못한 이국 남자가, 저널리스트라는 일반적인(다분히 고정관념이기도 한) 이미지에도 불구하고 유쾌하게 그려졌다. 그의 글을 읽으며 웃으며 그의 부글거리는 아랫배에 관한 이야기를 더욱 듣고 싶어졌다.

   

나는 의사도 심리학자도 사회학자도 과학사가도 아니다. 이런 직업을 가진 사람이 불안에 대해 글을 쓴다면 나보다 훨씬 학술적 권위가 있는 글을 쓸 수 있을 것이다. 다만 이 글은 종합이자 르포르타주다. 역사, 문학, 철학, 종교, 대중문화, 최신 학술 연구에서 불안에 대한 탐구들을 한데 모으고, 이걸 정말로 나의 전문 분야라고 할 수 있는 불안의 직접 경험과 함께 엮으려 한다. (p41)


  그는 불안한 심경을 토로하고 있는데, 고통의 강도가 점증되어 괴로워하는데도 웃픈 얘기로 듣고 있는 나는 예의가 아닌 것 같지만, 열성적인 청강생, 아니 열성적 독자가 되어 그를 응원할 준비가 충분히 되어 있다. 불안에 대한 개인의 경험이야기라고 하기에는 시사적이고 학술적이고 문학적이고 고발적이기도 한 그의 글은 부글거리는 그의 아랫배만큼이나 매력이 부글거리기 때문이다.

  일상이 불안으로 점철된 삶, 약을 먹어도 나아지지 않는 이 신경증 환자에게 내려진 처방은 계속 ‘불안에 대해 생각할 것!’이다. 고지식한 신경증 환자에게 정신과 의사는 간단히 ‘약’을 처방하는 대신 불안에 대한 글을 쓸 것을 권유한다. 극심한 불안 공포증에 시달리는 이 순진한 환자는 그때부터 불안의 의미에 대해 생각하고, 불안의 경험에 대해 기억하며 불안 속으로 깊이 들어간다. 불안에 대해 사색했던 이들의 글귀들과 불안을 경험한 이들은 누구인지, 불안에 대한 유전학, 불안증에 대한 의학적 명명까지를 깊이 탐구한다. 불안이 언제부터 병이 되었는지, 불안의 역사와 함께 전개되었던 무수한 ‘약’의 행진들에 대해서도 말이다.

  우선, 한글판 제목이 상당히 끌리게 정해졌다. 원제를 변경하는 경우 생뚱맞거나 유행하는 형태의 제목을 만드는 경우가 대부분인데, 이번 책의 경우 한글판 제목이 딱 어울린다. 훨씬 친근감과 공감이 느껴지며 그의 문체와 내용과 잘 맞는 제목이다. 또한, 개인의 경험을 엮은 이 책은 상당한 분량임에도, 불안증 ‘환자’의 글임에도 가독성과 설득력이 있다.




불안을 어떻게 할까


  불안은 병인가. 불안이 단지 예민한 신경증의 발현이었던 시대에서 치료약이 발명됨으로써 ‘병’으로 간주되는 시대에 이르기까지. 그래서 불안증 환자가 더욱 증가되어 이 세상엔 불안한 환자들이 넘치는 시대가 되기까지. 여전히 논란은 지속되고 있고 사람들은 불안증을 진단받고 약을 처방받고 치료가 되거나 치료가 된다고 생각한다.

  불안증이 의학적 병명이든 정신적인 것이든, 현대는 불안증 환자들이 넘쳐난다. 약 하나로 금세 불안증상이 완화된다 하더라도 불안의 경험은 일회성으로 끝나거나 완전히 치유되지 않는다. 이름도 알기 힘든 무수한 불안증 약들을 목구멍으로 넘기며 병의 증세가 완화되는 듯한 느낌들을 가지지만, 어쩐지 불안의 경험은 반복된다. 그래서 저자는 불안은 영원한 인간의 조건이라고 말한다. 왜냐하면 불안의 형태는 바뀌었으나 불안의 경험은 거의 달라지지 않았기에.

  그래서 철학자들이 이야기하듯이 불안은 심리 치료나 약물 치료가 ‘필요’하다 하더라도 불안은 피하거나 약으로 없애야 할 것이 아니라 자아 발견을 위한 길, 자아실현의 길(p292)로 삼아야 하는 건지도 모른다. “불안은 어떤 관점에서 보면 제거해야 할 증상이지만, 다른 관점에서 보면 진정한 실존으로의 부름이며 어떤 희생을 치르더라도 귀 기울여야 하는 메시지(퍼시, 예수회 주간지《아메리카》, 1957.)”니까 죄책감, 자의식, 슬픔, 수치, 불안 등의 세계와 우리 영혼이 보내는 중요한 신호를 신체적 병증으로 생각하고 약으로 달랜다면 더욱 심한 인간 소외가 일어난다(p295).


  사색이 되게 만드는 불안증상을 없애기 위해 사색적으로 불안에 접근한 저자는 결국 불안이라는 고통을 경험하지만, 그로부터 자기 성찰과 자기 발견의 기회를 삼고자 한다. 그리고 불안이 용기를, 보다 도덕적일 수 있는 힘을 가지고 있다고 말한다. 물론, 그렇게 용기와 도덕적인 불안을 나타낸 이들에 대한 사례를 덧붙임으로써 단지 의견이 아니라 누구에게도 가능할 수 있는 일임을 말하는 것도 잊지 않았다.

  물론 불안증은 고달프다. 그 증상의 강도는 사람마다 다를 것이고 약으로 완벽히 치료된다는 보장은 없지만, 또한 병이 아닐지도 모르지만, 이것이 어느 시대에나 있어 왔던 것이라면 불안은 더 깊이 끌어안고 있어도 좋다. 적어도 저자처럼 불안을 생각할 수 있다면 말이다.


내 불안은 낫지 않는 상처처럼 가끔은 나의 삶을 막아서고 나에게 수치심을 안겨준다. 그렇지만 동시에 어떤 힘의 원천이자 은총이기도 하다. (p422)

    

  불안에 대해 이러한 글로 마침을 할 수 있다면 저자의 불안을 치유하기 위한 글쓰기는 성공한 것이 아닌가. 부분 부분 이름을 줄줄 꿰고 있는 알약을 삼키며 증상을 완화시키면서도 여전히 지속되는 불안을 안고 있지만, 처음 의사에게 달려갔던 불안증 환자의 모습에서 얼마나 달라진 채로 저자는 불안을 마주보고 있는가. 이러한 치유책을 알려주는 의사가 있다면 당장 달려가 진료를 받고 싶다. 이런 환자만 있다면 당장이라도 의사를 하고 싶다. 이런 식으로 사색할 수 있다면 나도 당장, 불안증 환자가 되고 싶다.




*알라딘 공식 신간평가단의 투표를 통해 선정된 우수 도서를 출판사로부터 제공 받아 읽고 쓴 리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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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기 신간평가단 발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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표준 : 현실을 만드는 레시피 (양장)
로런스 부시 지음, 이종삼 옮김 / 한울(한울아카데미) / 2015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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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vs        

 

 

표준: 현실을 만드는 레시피

 

 표준이란 알고보면 보이지 않는 권력이자 현실을 창조하는 메커니즘이라고?

 표준을 정하는 것은 결국 권력의 산물이라고 저자는 말한다. 이러한 논의에 분석철학과 윤리학을 접목하고 다양한 사례를 곁들여 얘기한다.

 생각하면 사회에서 살아간다는 것은 표준, 기본에 매인, 집착하는 삶인 것도 같다. 이러한 메커니즘으로 만든 것이 사실은 권력에 의해 길들여지고 있는 것인지도 모른다. 우리는 어떻게 권력의 메커니즘에 순응하게 되었는지를 파헤쳐 보는 책이라니, 읽어보고 싶다. 

  

일탈

 

 표준이라는 제목과 대비되는 일탈.

 이 책은 성 인류학의 선구자라 불리는 게일 루빈의 논문 선집이다. 문화인류학자로서 그녀가 선구적으로 개척한 성적 하위문화에 관한 민족지학적 연구들로 채워졌다고 하는데...

 왜 일탈이라고 제목지었을까?

 

 

 

가난은 어떻게 죄가 되는가

 

 지금, 많은 사람들이 빈곤하게 살고 있다.

 우리나라만이 아니라 다른 나라도 많은 가난한 이들이 힘겹게 살고 있는데, 어느덧 가난한 이에 대한 멸시가 강화되고 있다. 오래전 빈곤은 개인의 책임으로 했는데, 다시 가난이 죄가 되고 가난한 이는 죄인이 되는 세상이다.

 이 책은  미국 사회가 가난을 죄악시하는 것을 넘어 실제로 처벌하는 데까지 나아갔음을 여러 사례를 통해 생생히 보여주고 있다. 저자 타이비는 경제 논리에 잠식된 사법 시스템과 그 지배를 받는 디스토피아 미국 사회를 그리고 부의 양극화가 집어삼킨 미국의 사법 시스템을 해부한다.
 이것은 우리 사회에도 바로 적용되는 부분일 것이다. 

 

 

소모되는 남자

 

 남녀차에 대한 새로운 사회진화적 해석을 하는 책이다. 저자 로이 바우마이스터는 남성과 여성은 근본적인 차이점이 있고, 성공한 문화들은 다른 경쟁문화를 능가하기 위해 이런 남녀차를 더욱 부각시켜왔다고 주장한다. 하지만 문화는 남성의 역할을 성취하고 생산하며, 다른 이들을 부양하고, 필요하면 자신을 희생하는 것이라고 강요함으로써, 결국 남성을 착취한다. 저자는 남성들이 자신들이 만들어낸 문화로부터 상당한 이점을 얻는다는 점과 동시에, 그로 인해 그들이 얼마나 고통 받는지도 함께 보여준다.

 최근, 여성혐오에 대한 논의가 증가하고 있다. 이러한 상황에서 이 책은 또다른 시각을 보여주는 책이라 읽어볼 만하다. 영원한 전쟁, 여성과 남성이여!

 

 

 

 

나는 불안과 함께 살아간다

 

 저자는 불안증과 평생 싸워온 환자이자 저널리스트 스콧 스토셀이다. 에세이로서 거의 모든 분야와 시대의 불안에 관한 지식을 강박적일 만큼 완벽하게 망라하고 있다고 소개되어 있다.

 현대는 여러 형태의 불안속에 살고 있다. 저자가 보는 불안의 요인이 무엇인지에 관해 광범위한 탐구와 구체적인 사례들을 찾아, 불안의 개념과 치료에 대해 탐구하고 있다.

 과연, 우리의 불안의 이유는 무엇때문이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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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이없게도 국수 - 인생의 중심이 흔들릴 때 나를 지켜준 이
강종희 지음 / 비아북 / 2014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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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살다보면 나도 모르게 서글퍼지는 날이 있다. 누군가 대놓고 내 등짝을 후려치는 것이 아닌데도  나는 늘 등짝을 후려맞고 있는 기분이다. 하루 하루가 그렇게 이어가지는, 가느다란, 삶. 어이없게도...

  이런 삶을 알아주는 것마냥, 누구나가 다 그렇게 살고 있다는 외치듯이 이런 제목이 눈에 띄었다. '어이없게도'. 그래 삶은 어이없지. 국수가닥들이 모여 삶을 위해 기도하듯 한자리에 모여 있다. 자주 먹던 구포국수같은 표지에 정말 내 삶보다 어이없구나 싶게 웃음이 나왔다. 이건, 국수를 소개하는 책인가.

  그러나 '인생의 중심이 흔들릴 때 나를 지켜준 이'라는 문구에서 이건, 국수종류를 소개한다거나 어느 맛집따위를 소개하는 책이 아니구나 싶었다. 그리고 마주한 모리국수에서 원초적인 삶의 느낌과 마주했다. 아, 점점 작가의 이야기에 빨려 들어간다.

  작가는 자신이 면식범이라 '면'에 대한 이야기를 한다고 했지만, 어이없게도 이것은 삶에 관한 이야기였다. 그러니까 삶은 국수였다. 작가는 인생의 곳곳에서 무수한 사람들을 만났고 그들과 함께 인생의 희노애락을 겪었다. 작가는 줄기차게 자기는 국수를 좋아해서 그 날의 국수들을 기억하는 것이라고 이야기하지만, 결국 그녀는 사람을, 그 추억을 기억하고 싶었던 거다. 그녀는 짐짓 그립고 가슴 아린 어느 날을, 그리고 누군가를 떠올리며 자신의 지난 인생들을 다독이고 있지만 드러내놓고 그들이 그립다, 그때의 기억이 생생하다 말하지는 못하는 거다. 국수를 빌려 그 이야기를 전한다.

  삶의 어느 고개에서 마주한 그들과 그들과 함께 나눈 국수 속에 작가의 인생이 녹여난다. 그들이 국수가 작가의 인생에서 어떠한 힘이 되었는지 위로가 되었는지 이 어이없는 국수를 통해서 만날 수 있다. 그리고 돌아보면 작가가 먹는 국수 한그릇마다 나의 인생도 실려 있다는 생각을 들게끔 한다.  뜨거운 국수이든 차가운 국수이든 인생의 누군가와 만나 후루룩 면발을 삼키며 이야기 속으로 젖어들고 싶게 만드는 책이다. 긴긴 밤, 끝없이 면발이 생각나게 하는 책이다. 그러니까, 삶은, 국수다.  


p21. 누군가가 그랬다. 생선은 낯설고 잔인하다고. 육지의 생명인 나와 다른 세계, 비밀의 바다에서 온 생명을 먹는 행위는 나라는 존재의 생명을 직시하는 행위다. 낯설고 원초적인 바다의 존재, 생선이 그득한 국수 냄비 안에서 우리는 무엇을 발견했던가.
`버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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히스테리아 시베리아나


그만둬도 괜찮아

- 하루에도 열두 번씩 그만둘까 버텨볼까 고민하는 여자에게, 

유재경, 북포스, 2013.


  여름의 긴 휴가를 즐기고 난 다음, 아 가기 싫어!

  직장인이라면 휴가 첫날부터 시작해 마지막까지 내뱉는 말이다. 아, 회사가기 싫어!

  그럴 때 누가 “그래 가지마, 그만둬”라고 말해준다면 감사…잠깐 그렇겠지만 또 이성을 끈을 붙잡고서 왜 그만두면 안되는지를, 그만 둘 수 없는지를 주절주절 늘어놓게 된다. 직장인의 삶에서 벗어나는 것은 내 의지일 것이니까 타인의 ‘그만둬’라는 말은 결정적 한방일 수 없는 이유이기도 하다. 그만둠으로 인해 단절되는 그 지폐와의 연결이 삶을 지탱하는 것이라….

   

   히스테리아 시베리아나라는 병이 있는데 이 병은 시베리아

   농부들이 걸리는 병이라는데 날마다 똑같은 일을 반복하다

   더 이상 견딜 수 없을 때 곡괭이를 팽개치고 지평선을 향해

   서쪽으로 서쪽으로 걸어간다는데 걸어가다 어느 순간 걸음을

   뚝, 멈춘다는데 걸음을 멈춘 순간 밭고랑에 쓰러져 죽는다는데


   오르다 말고 걸어가다 마는 어떤 일생

     - 천양희, 어떤 인생 중  


  저자가 인용하고 있는 천양희 시인의 <어떤 인생> 속 히스테리아 시베리아나병에 걸려 서쪽으로 서쪽으로 걸어가는 사람들의 잔상이 머릿속에 남는다. “더 이상 견딜 수 없을 때”를 안다는 것. 그 견딜 수 없음을 알아챌 수 있다면.

  헬조선, 열정페이. 이 나라에서 직장인으로 산다는 건 히스테리아 시베리아나병에 걸린 삶을 살아가는 것이다. 정해진 휴가일을 사용하는 일이 불법인양 이뤄지는 문화, 휴가보상금으로 만족하는 문화, 휴일없이 연장근무를 강조하는 문화, 휴식이 게으름인 문화… 그런 문화속에서 경쟁에서 이기기 위해, 성과를 내기 위해 쉼없이 살아가다 보면 어느 순간 멈춰지는 삶을 맞게 될 것이다. 특히 이 땅에서 워킹맘으로 살아가는 여성들은 가사일 또한 여성에게 온전히 짐지워진 상황에서 더욱 더 자신을 옥죄며 살아가야 한다. 그러다가 저자처럼 소진되어 삶의 의욕을 상실한 채 쓰러지는 날이 있게 되리라.

  완벽한 커리어우먼이 되기 위해 누구보다 열정적으로 일하던 저자는 그것에 만족을 느꼈고 그러한 삶이 행복인줄 안다. 하지만 정신과로 찾아가 울면서 상담을 받으러 갈 정도의 상태를 경험하고 난 후 삶에 휴식이 필요함을 느낀다. 쉰다는 것이 잘못된 것이 아님을, 그 속에 활력과 전진이 있음을 만족이 있음을 행복이 있음을 알게 된다. “삶에서 무엇을 덜어내고 무엇을 더할지, 무엇을 강화하고 무엇을 변화시켜야 할지”를 저자는 깨우쳐 가며 더 행복한 삶으로의 전진을 한다.

  물론 완벽한 커리어 우먼이 되기 위해 살았던 저자의 스타일은 이 휴식이라는 것, 삶에서 멈춰 내고 덜어내는 것을 찾기 위한 방법도 일하는 느낌과도 비슷한 면이 있었다. 쉬지 못하는 이유라거나 쉬어야 할 이유, 그 당연성에 대해서 어느 순간 강박적으로 찾으며 자신이 쉬고 있은 것에 대한 타당성을 찾으려 보여서 안타까운 느낌이 들기도 했다. 하지만 그것이 인생의 생활방식이 줄곧 자신이 채찍질해가는 스타일이던 저자가 삶의 변화를 받아들이기 위한 자신만의 방식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렇게 저자는 자신의 스타일로 자신이 살아온 생활방식, 자신을 이끌어가던 신념을 조정해 갔다. 그 노력이 놀라웠고 응원하게 된다. 우리에게 오랜 세월 체화된 암묵의 방식들을 바꾸는 일은 얼마나 힘든가. 하지만 저자는 그렇게 했다. 그 노력으로 저자는 쓰러지기 전, 아니 쓰러져서 다시 일어났다.

  사실 세상은, 아니 직장은 내가 없으면 안될 듯이 굴어도 없어도 잘 돌아간다. 그것을 알게 될 때 은근한 씁쓸함이 든다는 것도 사실이다. 어쩌면 그렇게 존재감을 획득하고 싶었는지도 모른다. 없다고 없으면 안된다고 하는 것은 결국 끊임없이 일을 ‘시키기’ 위한 방식이었을 지도 모른다. 그것에 걸려 나 없으면 일이 되지 않는다는 생각에 나의 취미와 욕망을 누르며 너없음 일이 돌아가지 않는다는 거짓 회사의 소리에만 귀기울였는지 모른다. 어쩌면 더욱 열심히 일하거나 적절하게 쉬면서 일하거나, 그 모든 것에서 중요한 것은 ‘자아’를 잘 조정하는 일이 아닐런지. 그리고 언제든 “그만둬도 괜찮다”라는 생각을 마음속에 전제하고 있을 때 자유로운 생활을 더 구가하며 직장인의 삶도 잘 누릴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 이 책은 쉼, 그것이 가지는 의미를 일깨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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