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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국 ㅣ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61
가와바타 야스나리 지음, 유숙자 옮김 / 민음사 / 2002년 1월
평점 :
눈이 보는 눈
설국, 가와바타 야스나리, 민음사, 2002.
겨울에 눈이 오지 않으면 3월에 내리는 봄을 기대하게 된다. 어쩐지 봄에 내리는 눈을 보면 한겨울에 눈이 오지 않았음을 잊게 된다. 봄눈에서 느껴지는 감정은 겨울과는 너무도 달라서 환상과 몽환이 약간 섞여든다. 국경의 긴 터널을 빠져나왔을 때, 이런 느낌일까.
국경의 긴 터널을 빠져나오자, 눈의 고장이었다. 밤의 밑바닥이 하얘졌다. 신호소에 기차가 멈춰 섰다.
1968년 노벨상 수장작인 이 책의 첫 문장은 많은 이들에게 감탄할 첫문장으로 꼽힌다. 그러나 전반적으로 가와바타 야스나리의 <설국>은 이미지를 극대화시키는 감각적 문장으로 쓰여 있다. 이야기, 줄거리는 모호한 잔상이 남는 소설이다.
가와바타는 일본인으로 첫 번째, 아시아에서 두 번째 노벨문학상 수상작가가 되었다. 첫 번째는 인도의 타고르라서 어쩐지 인도는 서양에 더 가깝게 느껴지기도 하는 까닭에 아시아에서의 첫 번째 수상작가처럼 여겨지기도 한다. 그렇게 보면 서양인의 동양, 더 나아가서는 일본에 대한 호기심이 작가의 노벨상 수상에 영향을 미쳤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설국>에서 느껴지는 이미지는 흑백이다. 어떤 칼라보다도 흑백이 강렬하다는 생각을 하게끔 되는데 가만 생각해보니 눈쌓인 풍경은 있었는데 직접적으로 눈이 내리는 묘사는 기억나지 않는다. 일본의 목조 가옥 위로 쌓인 눈, 서린 냉기속에 피어나는 온천의 하이얀 김, 작가가 반복하여 말하는 깨끗하다, 깨끗하다, 순수하다…. 일순간 맑고 청아한 느낌이었다가 한없이 퇴폐적인 느낌에 휩싸이게도 된다. 일본문학에서 느껴지는 이미지가 퇴폐미로 선입견처럼 쌓여 있기 때문일지도 모르겠다. 1950년 이전의 소설로 그 시대적 배경을 감안한다 해도 정감가지 않는 주인공 시마무라이기에 그의 시선의 끝에서 어떤 과오, 퇴폐의 말을 기다리고 있었던가도 싶다. 시대적 배경 고려는 무슨, 한량으로 시종일관 감탄만 해대는 시마무라와 남성의 보호자이거나 일만 하는 요코와 고마코의 모습을 그저 그 시대는 그러하였노라, 그렇게만 말할 수 있을까. 그러하기에 시종일관 풍경에 압도되는 듯이 탄식하는 시마무라의 그 표현들이 깨끗하다, 순수하다, 아름답다 외치는 그 모든 시마무라의 말들이 공허하게 느껴진다. 그의 말처럼 헛수고로.
여자들 역시도 풍경이 된 느낌이었다. 고마코와 요코에 대한 시선이 풍경을 보는 것과 다르지 않다. 창밖을 바라보며 설국의 풍경을 감상하는 시마무라의 눈이 은근슬쩍 고요코와 요코에 대한 시선으로 바뀔 때 언뜻 관음증적 강박이 느껴진다. 소설 속 등장인물 모두 예사스럽지 않다. 그렇게 살지 않아도 되건만 그렇게 살아가는 그들의 모습은 거대한 자연에 짓눌린 공허한 인간의 노력 같아서 애달프다. 고마코와 시마무라가 은하수를 보는 풍경이 눈에 띄었는데 풍경화된 요코의 모습, 그렇게 쳐다보는 시마무라의 시선에서 인간에 대한 애정과 연민이 아닌 물화된 것으로 대체되는 듯이 보였다. 영화상영이 있어 많은 사람이 모여인 고치창고에서 불이 나 부상자를 구해내고 아이들을 2층에서 마구 던져내린다는 얘기를 들은 고마코와 시마무라가 고치창고를 향해 달려가다 멈춰 서서 하늘을 보며 은하수의 아름다움에 감탄한다. ‘허위의 마비’에 걸린 듯한 시마무라의 묘사가 절정에 이르는 지점이 아닌가 싶다.
올려다보고 있으니 은하수는 다시 이 대지를 끌어안으려 내려오는 듯했다.
거대한 오로라처럼 은하수는 시마무라의 몸을 적시며 흘러 마치 땅끝에 서 있는 것 같은 느낌도 주었다. 고요하고 차가운 쓸쓸함과 동시에 뭔가 요염한 경이로움을 띠고도 있었다.
풍경과 두 여인에 대한 순수와 아름다움에 대한 반복되는 예찬만큼이나 ‘헛수고’란 말도 반복된다. 무위도식(無爲徒食)하는 남자에게 고마코와 요코의 모든 행동들이 무위로 보일 순 있겠다. 서양무용에 관해 글을 쓰는 시마무라는 직접 서양인의 춤을 본 적이 없다. 보려고도 하지 않는다. 직업없는 그의 심리적 위안으로 존재하는 글. 그의 글은 오로지 인쇄물에 의지한 상상이다. ‘겪어보지 못한 사람에 대한 동경심을 품는 것과 흡사하다’고 말한다. 시마무라의 세계는 도쿄에 있고 그는 거의 일년에 한번쯤 기타마현으로 그러니까 설국의 세계를 찾아온다. 그곳엔 게이샤 고마코와 요코가 있다. 도쿄와 설국의 세계, 시마무라에게 심리적 위안으로 붙잡아 두고 있는 세계와 허위의 세계는 어디일까.
“소용없죠.”
“헛수고야.”
그토록 아름답게 풍경을 바라고보 순수와 깨끗함과 아름다움을 강박적으로 찬양하는 시마무라의 말은 잠시 내 맘을 흔들기 충분했으나 마지막을 향해 가는 어디쯤에서 나는 위의 두 말을 반복하게 된다. 이제껏 시마무라가, 작가가 묘사한 설국의 세계는 모두 ‘허위의 마비로 가득찬 위험’ 가득한 곳이었으며 순수를 외치는 말끝에 오염되어 버렸다. 깨끗함, 눈처럼 흰, 순수한, 아름다움이라는 단어를 반복·강박적으로 듣다 보니 반작용을 일으킨 것이다. 그 세계가 눈처럼 깨끗한 곳이었는가에 대한 의문이 아니라 정말로 그 풍경을 바라보던 시마무라의 눈(目) 속에 하얀 눈(雪)이 보였던가, 시마무라가 아름답고 순수한 풍경만을 보고자 했는가에 대한 의문이랄까, 이렇게 되고 보니 역시나 나는 시마무라에게서 퇴폐적인 인간상을 기대했던 모양이다.
<설국>은 1937년 출간하여 12년 동안 여러 번의 수정작업을 거쳐 1948년 최종적으로 완성되었다고 한다. 김승옥의 <무진기행>이 강력히 생각나는데 무진기행이 1964년 발표되었으니 <설국>이 영향을 끼쳤으리라 짐작하게 한다. 때때로 어떤 소설을 읽을 때 그 시대적 배경, 당대의 사회현실을 생각하며 읽으라고 말한다. 그런데 내 보기에 이 말의 함의는 여성을 (성적)대상화하는 것이 당연했으니 그것을 불편하게 여기지 말라는 말이다. 지금도 마찬가지이니 불편하지 않을 수 있을지언정 굳이 그런 시대이니 불편히 여기는 것을 문제시하는 말은 때때로 너무 이상하게 들린다. 수천 번을 양보한다 해도 그 시기는 일본이 침략전쟁을 일으키고 반인륜의 모범을 보여주던 때이다. 그런 시대적 배경 속에서 유일하게 참고 넘어가야 하는 것, ‘이해해줘야’ 하는 것이 오로지 여성을 (성적) 대상화하는 시각뿐이어야 하는지에 대해서도 질문을 던진다.
그런 일본이었으니 섬세하고 예민한 작가가 현실이 아닌 풍경 속에 압도되어 살고 싶었을까, 현실의 피폐함과 인간의 야만성에 대한 반대급부로 풍경으로 매몰되어 간 것일까, 생각해보기도 한다. 나는 가와바타 야스나리를 모른다. 그의 연보에는 태어나자마자 몇 년 동안 그의 어머니, 아버지, 조부모의 잇따른 사망이 적혀 있다. 74세의 그는 급성맹장으로 수술·퇴원한 한달 후 가스관을 입에 물고 자살했다고 한다. 허무와 무용, 쓸쓸함의 정서가 작가 자신의 인생에서 연유한 것이었다는 생각이 드는 즈음 이 소설은 이미지와 감각만이 남아 한없이 덧없음으로 뒤덮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