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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려운 여자들
록산 게이 지음, 김선형 옮김 / 사이행성 / 2017년 7월
평점 :
절판
쓸데없는 여자들에 대하여
어려운 여자들, 록산 게이, 2017.
록산 게이의 소설.
어려운 여자들은 여성을 보는 입장에서 어렵다는 것일까. 여성들 스스로가 세상을 보는 일이 어렵다는 것일까. 이 어렵다는 말이 무겁게 느껴지는 것은 그 어떤 경우라도 해당되기 때문이다.
록산 게이는 그동안 에세이에서 보여준 외침들을 21개의 단편소설로 묶어 이 책을 썼다. 줄곧 록산 게이가 제기한 세상을 살아가는 여성들의 힘겨움이 소설화되어 있다. 지금까지 개인적인 경험을 이야기했다면 이 책에는 개인에서 더 확장된 수많은 여성들의 삶이 집약되어 있다고 볼 수 있다. 형식적으로 소설이라는 장르를 택하고 있지만 익숙하게 봐온 소설에서는 좀 비껴난 스타일로 자신이 줄곧 전한 메시지를 담아낸다. 그래도 개인적으로는 록산 게이의 소설보다는 에세이가 더 좋다. 소설보다는 더 직접적인 메시지, 그 어투가 더 좋다.
어려운 여자들, 삶을 살아가는데 어려움이 끝없이 놓이는 여자들의 삶은 개인에겐 특별(?)하지만 여성들 전체에게 평범화된 일이라 이 일들은 쉽게 잊히고 또한 쉽게 반복된다. 힘겨움을, 어려움을 극복한다는 것은 어려운 일이며 하나의 상황이 종료되었다고 해서 그 유사한 상황이 다시 일어나지 않으리라 장담할 수 없기에 여성들의 삶 자체에 늘 어려움이 깔려 있다. 그리고 카인의 표식처럼 명명된다. 헤픈 여자, 불감증의 여자, 미친 여자…. 여자일 뿐인 여자들….
어린 소녀였을 때 우리 아버지는 여자들은 별로 쓸데가 없다고 말한 적이 있다. -[우리 아버지의 죽음에 부쳐]
나는 지금 어리지 않지만 수많은 아버지들이 여자들은 별로 쓸데가 없다고 자주 말하는 것을 듣는다. 하지만 그들은 늘, 여자들을 필요로 한다. 어리거나, 젊거나, 늙었거나 가리지 않는다. 그 상태 그대로 그들은 쓰임을 달리 한다. 잘 모르는 모양인데 엄청, 쓸모있다. 그렇기에 그들은 납치도 불사한다.
[언니가 가면 나도 갈래]의 어린 두 자매가 피터에게 끌려가 당한 고통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는 자매에게 피터는 가석방을 앞두고 새롭게 거듭났다며 용서를 구한다. 가석방을 받기 위해 자매의 용서가 필요하니 얼마나 여자들이 쓸모있는가. 두 어린 소녀를 납치하여 오랜 시간 성적학대를 일삼아 온 피터가 가석방 대상이 된다는 사실은 굳이 놀랍지 않다. 한국의 법은 가석방 받을 형량이 없는 경우가 더 많으니까, 그것을 너무 많이 봐 온 까닭이다. 이 단편에서 더 놀라는 건 동생의 덤덤한 말이다.
나는 열 살이고 캐롤리나 언니는 열한 살이었다. 우리는 피터 씨한테 모든 걸 구걸했다. 음식, 신선한 공기, 단 한 순간만 뜨거운 물을 혼자 쓰게 해달라고도 빌었다. 우리는 자비를 구걸했고, 이러다가는 완전히 몸이 망가져버린다고, 제발 잠깐만 쉬게 해달라고도 빌었다. 그는 우리의 애원을 묵살했다. 우리는 애원하지 않는 법을 배웠다. 그도 결국은 그렇게 될 것이다. -[언니가 가면 나도 갈래]
태어나지 않은 아이들이 어떻게 살아갈지를 가정하여 걱정할 것이 아니라 걱정하지 않기 위해 현재를 살아가는 이들의 삶을 변화시킬 방법을 생각하고 행동해야 한다. 그런 생각과 행동을 하는데도 예의와 미소를 지을 수 있다. 언제나 행동은 과격한 것이라 생각할 필요는 없다. 지금 당장 갈색 피부의 여자를 ‘내 눈 아래’로 보지 않으면 된다.
당신 어머니는 나를 미워하지 않지만 당신이 아버지와 장작을 패러 나갔을 때 나를 따로 불러 세운 적이 있어. 거실로 데리고 들어가서 와인 한 잔을 주셨지. 예의 바르게 미소를 지으며 불안하게 의자에서 들썩거리며 한 손을 내 무릎에 얹고 세상의 모든 백인 엄마가 당신의 귀한 백인 아들이 갈색 피부의 여자와 어울릴 때 하는 말을 했어. 우리가 낳지도 않은 아이들이 걱정된다면서, 그 애들이 얼마나 힘들게 살겠느냐고, 또 당신은 얼마나 힘들겠느냐고 말했어.
[물, 그 엄청난 무게]는 태어날 때부터 물을 몰고 다니는 여자에 관한 이야기다. 뭔가 신비로운 것 같지만 비앙카를 따라다니는 물은 환상과 신비로움 아니라 삶을 그늘지게 하고 힘겹게 하는 족쇄다. 세상의 모든 여자들이 비앙카처럼 물과 수해가 따라다니는 삶을 살고 있다. 라 네그라 블랑카도 예외는 아닌데다 또다른 무게가 따라다닌다.
물과 수해가 비앙카를 따라다녔다. 눈을 들면, 눈을 들어 보이는 곳마다 수해가 따라다녔다. 물 얼룩이 점점 더 시커멓게 번지고 마른 벽과 유리섬유 패널을 가로질러 꿈틀거리면서 썩은 자국과 곰팡이를 남겼다. 굵은 빗방울이 그녀의 팔뚝에, 목에, 이마에, 아랫입술에 떨어졌다. -[물, 그 엄청난 무게]
[라 네그라 블랑카] '흰 피부의 흑인 여자'를 뜻하는 스페인어다. 소설엔 흑인 여성이 주인공으로 등장하는 이야기들이 많다. 여성이며 흑인이라는 이유로 인한 이중의, 가중된 차별은 록산 게이가 겪은 일이니 자신의 투사일 것이다. 또한 거의 모든 흑인 여성들의 삶이기도 하다. 여성이 아닌 그들은 여성의 몸을, 자궁을 탐하면서 당연하게도 그것을 파괴하는데 힘쓴다. 소설속에 쌍둥이나 자매들에 관한 이야기가 많다. 록산 게이는 파괴된 몸과 마음을 알아주고 위안이 되어 주는 존재로 쌍둥이들을 내세운 것은 아닌가 싶다. 함께 고통받으며 치유하기 위해 함께 힘을 낼 수 있는 존재. 비록 내가 당하여 죽어버릴지라도 같은 몸과 마음의 고통을 아는 ‘정신을 집중하여 진술할 수 있는 존재’로서, ‘의식을 잃지 않으려 애쓰는 존재’로서, 이 세상 모든 여성들이 당하는 고통의 피해자이자 목격자이자 증언자로서의 존재. 고통을 참아가면서 의식을 잃지 않으려 애쓰는 소설 속 그녀가 록산 게이가 전하고픈 말일 것이다.
윌리엄의 주먹이 세라의 턱을 강타하자 날카로운 고통이 뼈저리게 가라앉는다. 뜨거운 눈물이 얼굴에 줄줄 흘러내리지만 그녀는 참으려고 애쓴다. 자기 몸을 덮친 윌리엄의 물컹한 몸뚱어리 너머에 정신을 집중하려 애쓴다. 나중에 진술할 수 있도록 의식을 잃지 않으려고 애쓴다. - [라 네그라 블랑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