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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은 것들의 신 (무선) ㅣ 문학동네 세계문학전집 135
아룬다티 로이 지음, 박찬원 옮김 / 문학동네 / 2016년 1월
평점 :
작은 것조차
작은 것들의 신, 아룬다티 로이, 문학동네, 2016.
한증막에서 들어선 것처럼 물기 가득한 계절이, 6월의 비가 떠올려지는 소설이다. 그 짙은 아예메넴의 기후가 잊혀지지 않기에 오늘처럼의 물기없는 추위가 거센 날에 떠올릴 소설이 아닌데 아룬다티 로이의『작은 것들의 신』가 불쑥 스쳐간다. 인도라는 공간적 배경과 시간적 배경이 비슷하고, 또한 낙살라이트가 등장해서이기도 하겠지만 줌파 라히리의 『저지대』와 비슷한 느낌이 드는 이 소설. 작가의 삶이 반영된 자전적 소설 같이 느껴졌던 이 소설에서 왜인지 아예메넴의 기후 묘사가 좋았다. 좋았다기보다는 그 기후로 인해 더 쓸쓸했다는 것이 더 맞겠다.
오래 여운이 남았던 이 소설이 뜬금없이 <조선일보> 사주의 열 살짜리 손녀의 폭언에 의해서 되새겨진다. 전우용 교수의 이 사건에 대한 “어린아이까지도 ‘한국인 고용인’에게 패악을 떠는 고용주 가족 문화는, 일제강점기 악질 일본인 가정에나 있던 것”이라는 논평 때문이다. “자국민을 식민지 노예 취급하는 자들이, 나라에 보탬이 될 리 없는 자들이 이 나라의 경제, 사회, 문화를 지배하고 있다는 사실이, 이 시대의 비극입니다.”
이 나라는 어찌하여 친일의 청산이 이다지도 제대로 이뤄지지 않은 채 흘러왔는지, 그런 채로 발전이니 진보니 하며 흘러온 이 나라의 비극에 종결은 있는 것일까. 어떤 문화를 떠올리는 일, 이 글을 보며 식민지, 갑질, 비극, 이런 단어 끝에 무수한 ‘벨리아 파펜’의 모습이 떠올려졌다는 말이 정확할 것이다. 그리고 그 벨리아 파펜이 등장한 건, 바로 이 소설이었다.
벨루타의 아버지 벨리아 파펜은 ‘구시대’의 파라반이었다. ‘뒷걸음질치던 시절’을 보았기에 맘마치와 그 가족이 베풀어준 모든 것에 대한 감사의 마음이 범람하는 강물처럼 넓고 깊었다. 돌조각으로 인한 사고가 났을 때, 맘마치가 의안을 알아봐주고 값도 치러줬다. 그는 아직도 그 빚을 갚을 만큼 일하지 않았다고 생각했고, 그에게 빚을 갚으라고 하는 이도 없었지만 자신은 결코 갚을 능력도 없었기에, 그 눈이 자기 것이 아니라고 여겼다. 감사함에 미소는 절로 커졌고 허리는 더욱더 굽혀졌다.
혁명적이며 시대의 변화를 앞서 이끌어 가는 아들 벨루타에게는 버거운 짐이자 방해꾼이었던 벨리아 파펜. 그는 갑질 문화를 반박하지 않는, 순응하며 철저하게 감사하는 인물이다. 벨루타와 그에게는 영원한 아가씨 암무의 관계에 극도로 두려워하며 불가촉천민으로서의 철저한 삶을 벗어나지 못하고 감사하며 감사하는 벨리아 파펜들이, 현재 이 나라에도 제법 존재하지 않는가. 때론 시대의 비극은 ‘기꺼이 내어주신 그분’을 영원히 받들어 모시는 불가촉천민이기를 자처하는 이들 때문은 아닌가, 생각한다. 이 아름답고 슬픈 소설, 그 작은 것 하나하나의 아름다움과 조용히 밀려오는 슬픔을 느끼게 만든 이 이야기에서 벨리아 파펜으로 인해 분노가, 슬픔이 배가되었던 기억이 좀체 사라지지 않아서 기억해야 할 인물들을 두고서도 벨리아 파펜의 행동과 말들이 먼저 떠오르는 일이 생겨 버리고 말았다.
자국민을 식민지 노예 취급하는 자들이 더욱 더 그들을 위하여 만들어내는 경제, 사회, 문화적 형태에서 쉬이 벗어나려 하지 않는 벨리아 파펜같은 인물이 시대의 비극을 더욱 타오르게 한다는 생각 때문일까. 갑질 부류들이 등장할 때마다 제법 언론이 시끄러웠건만 이번만큼은 조용하다는 것이 그들 갑에 기생하는 어떤 을들 때문이겠지. 열 살이라는 작은 아이조차도 이 나라의 생태를 너무도 잘 알아가는 모습, 한국식 카스트, 그 아이가 재력과 권력을 쥐고서 형성해갈 문화가 아찔해진다.
소설에 등장하는 아이들의 할머니가 자신의 소녀 시절 카스트제도가 계급에 따라 행동을 달리 해야 하는 모습을 이야기하는 부분은 한국 언론사 대표의 열 살짜리 딸이 하는 말들과 참 닮아 있다. 인도의 그 유명한 카스트제도에 의해 지주의 딸 암무와 불가촉천민 벨루타의 사랑에 제약이 있다면 암무는 가촉민임에도 여자라는, 거기에 대해 이혼녀라는 이유로 행동의 제약이 더해진다. 그리고 혁명이란, 그 혁명을 위하여 또다른 제약을 가한다. 세상은 온갖 제약을 만들어내는데 중독된 이들이 지배하는데 재미들린 듯하다.
1969년 인도 케랄라 아예메넴에서 지배했던 규범과 관습들이 23년이라는 시간을 오가며 펼쳐진다. 과거와 현재가 오가며 인도와 영국, 힌두교와 시리아 정교도, 불가촉천민과 가촉민, 남자와 여자라는 그 차이가 인간을 어떻게 지배하며 사랑을, 가족을 파괴하는지를. 그럼에도 굳건하게 사랑을 이어가게 하는 것이 무엇인지를 보여준다.
더 나중에도, 이날 이후 이어진 열세 번의 밤 동안에도, 본능적으로 그들은 ‘작은 것들’에 집착했다. ‘큰 것들’은 안에 도사리고 있지도 않았다. 자신들에게는 갈 곳이 없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아무것도 가진 게 없었다. 미래도 없었다. 그래서 그들은 작은 것들에 집착했다.
서로에게 혹은 자신에게 인정하지는 않았지만, 그들은 자신들의 운명, 미래(그들의 ‘사랑’, 그들의 ‘광기’, 그들의 ‘희망’, 그들의 ‘무하아하 기쁨’)를 거미와 결부시켰다. 매일 밤 (갈수록 커가는 두려움을 안고) 거미가 그날을 견뎌냈는지 살폈다. 자기파괴적으로 보이는 자만심에. 그들은 거미의 다양한 취향을 사랑하게 되었다. 거미의 어기적대는 위엄도.
그들은 덧없는 것을 믿어야만 함을 알았기에 거미를 선택했다. ‘작음’에 집착해야만 함을. 헤어질 때마다 서로에게 단 하나의 작은 약속을 얻어낼 뿐이었다.
“내일?”
“내일.”
그들은 하루 만에 모든 것이 바뀔 수도 있음을 알았다. 그 점에서는 그들이 옳았다.
감정을 배가시키는 문체로 쓰여진 소설이지만 단지 사랑에 대한 서사가 아니라 인도가 처한 현실과 문제를 적확하게 보여주고 있다. 인도 역시 그 과거의 관습이 말끔히 걷어지지 않은 사회인 탓에 23년 전의 일들이 과거의 일로만 여겨지지 않는다. 세상의 그 거대한 규칙에, 혹은 신이 내린 운명이라 말하는 것들에 맞서 그들이 세상을 바라보는 그 마음들이, 그 시간들이 애틋할 수밖에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