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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복의 성자
아룬다티 로이 지음, 민승남 옮김 / 문학동네 / 2020년 2월
평점 :
인도는 Mother가 아니다
지복의 성자, 아룬다티 로이, 문학동네, 2020.
인도인은 갠지스 강을 ‘Mother Ganga’라 부른다. 이 강물을 마시고 강물에 기도하고 몸을 씻는다. 생명의 원천, 번영과 구원의 강가가 모든 잘못을 씻어 주어 영혼을 맑게 해주기를 기원한다. 강가는 살아있는 자들만이 아니라 죽은 이들에게도 신성한 곳이어서 기꺼이 죽은 이들의 묘지가 된다. 갠지스 강에 대한 의식은 오래도록 인도의 상징처럼 알려졌다. 이건 잘못되었다. 이 책을 읽으며 그것을 알게 되었다.
언젠가 인도에 간다 해도 갠지스 강에 손 담그는 일은 없을 거라 확신한다. 인도에 대한 나의 이해도 여기서 더 나가지 못하리라 인정해야 한다. 인도를 이해하기가 버거워 책을 읽는 내내 덜컥거렸다. 내가 살아온 삶의 방식 위에서 종교도 관습도 사회를 지배하는 그 모든 체제를 이해하는 건 위태롭다. 그럼에도 더 이상 넘어갈 수 없는 선, 그 선에서 빙빙 돌며 피상적으로 인도를 생각하게 된다. 종교적으로 갈등을 빚으며 파키스탄과 카슈미르로 나뉘어 전쟁을 벌이는 나라. 신이란 무엇인가, 생각을 거듭해도 영원한 난제이며 신의 이름으로 벌이는 학살과 전쟁은 신의 뜻인지 인간의 뜻인지 늘 헷갈린다. 빙고 게임을 하듯 이해할 수 없는 것과 마음이 쓰이는 것을 하나하나 쓰고 지워나간다. 무수한 사람들의 이름이 지워진다. 이해하지 못할 인도가 남는다. 반복하여 책을 읽어갈수록 인도는 지워지고 잔나트가 Mother가 잊힐 수 없는 존재들의 이름이 가슴에 꽉 들어찬다. 이해할 수 없는 세계, 인도는 그 체제 그대로 늘 강건할 것이다. 그 불변의 틀 안에서 수많은 사람들이 고통과 상처를 다독이며 살아간다. 이 책은 그 사람들의 이야기다.
Mother Ganga는 인도의 힌두교인이 부르는 말이라는 것이 더 적확하다. 그렇게 보면 상처입은 이들이 강이 아니라 잔나트로 모여들었는지를 이해할 수 있다. 무슬림과 힌두교인의 끝없는 싸움은 인도를 파키스탄과 카슈미르로 분리하여 여전히 지속되는 싸움을 벌이고 있다. 힌두교의 계급, 종교, 성, 인종을 구분짓고 나누어 차별하는 인도에선 그 세세한 구별이 폭력의 당위성을 가진 듯 하위 계층을 향한 폭력이 끊이지 않는다. 잔혹한 학살이 무슬림과 힌두교인 사이에서 인도와 파키스탄, 카슈미르에서 끝없이 발발한다. 이러한 인도에서 개인은 한 인간으로서의 존재가치를 인정받기보다는 특정 집단에 속하는 계층으로서 명명되기를 강요받는다.
그리하여 태어나자마자 구별되는 성(性). 그 이분법적 성에 속하지 않은 제3의 성, 히즈라라가 차별과 소외를 경험하며 규정 밖으로 떨쳐진다. 남성과 여성 생식기 모두를 갖고 태어난 안줌 역시 히즈라다. 안줌은 아들로 키우고자 하는 부모의 뜻에 따라 남자로 키워진다. 당연하다. 여성은 남성에 비해 열등한 존재로 취급받고 학대와 폭력 속에 살아간다. 딸이 되든 부인이 되든 여성이라는 존재는 남성의 종속적인 노예, 부속물이기에 그 자체로 권력인 남성의 삶을 원할 것이다. 소설 속에선 차지하는 가장 빈번한 폭력의 희생자는 여성이다. 그러나 안줌은 여성의 정체성을 선택하고 히즈라가 살고 있는 공동체 콰브가에서 삶을 시작한다.
“신이 왜 히즈라를 만들었는지 알아?”
“일종의 실험이었어. 신은 행복할 수 없는 생물체를 만들어보기로 결심한 거야. 그래서 우리를 만들었지.”
신의 실험대상은 안줌만이 아닌 듯 수많은 사람들이 행복할 수 없는 이유들을 안고서 소설 속을 누빈다. 행복하지 못한 이유들은 여러 가지가 있겠지만 큰 범주로 모은다면 결국 계층 때문이 아닌가. 나뉘고 나뉘어 가난하고 차별당하며 병든 이들에게 신만이 아니라 국가도 따스하게 품어주지 않는다. 국가 인도는 그들에게 어머니가 되어 주지 못한다. 반면에 여성으로서의 본능적 정체성인지 안줌은 엄마 되기를 꿈꾼다. 마침내 버려진 채 울고 있는 여자아이를 데려와 사랑으로 키우던 안줌은 몸이 아픈 아이의 건강을 빌기 위해 구자라트 지역의 사원으로 갔다가 이슬람교도를 향한 힌두교인들의 폭동에 휘말린다. 2002년 인도 구자라트에서 벌어진 이 폭동에서 안줌과 동행한 자키르 미안을 비롯한 수많은 사람들이 목숨을 잃는다. 자키르 미안의 시신 위에 죽은 척 누워 있던 안줌은 발각되지만 살아남아 외쳐야 했다. “어머니 인도에게 승리를! 어머니에게 경의를!”
학살자-힌두교인-들이 안줌을 살려준 건 히즈라를 죽이면 불운이 따른다는 미신때문이었다. 학살자들의 행운이 되어 살아남은 안줌은 고통과 굴욕을 잊지 못하고 마을의 낡고 피폐한, 안줌의 가족이 묻힌 공동묘지로 간다. 그곳에서 허름한 집을 짓고 살아가던 안줌은 점점 거주지를 넓혀 잔나트라는 이름의 게스트하우스를 만든다. 파라다이스라는 뜻의 잔나트엔 가난하고 갈 곳 없는 이들과 아무도 받아주지 않는 시신들의 장례식장이 된다. 산 자와 죽은 자의 몸과 영혼이 함께 하는 곳. 마치 Mother Ganga처럼.
소설 속에서 지복의 성자는 안줌의 어머니가 안줌을 사랑하게 해달라고 빈 페르시아 출신의 성인인 하즈라트 사르마드를 가리킨다. 그는 일생의 사랑을 찾아 인도로 와선 유대교를 버리고 이슬람교를 받아들였다가 힌두교인 소년과 사랑에 빠졌고 알라신만이 유일신이라는 고백문을 외라는 황제의 명을 거부하고 처형당하는 순간에도 사랑의 시를 외웠다. 그래서 “지복(至福)의 성자이자, 위로받지 못한 자들의 성인이며, 정확히 규정될 수 없는 자들, 신자들 속의 신성모독자, 신성모독자들 속 신자”가 되었다. 하즈라트 사르마드는 종교에 대해 참으로 유연하다. 하지만 그가 전하는 메시지는 묵직하다. 가볍고 쉬운 마음으로 종교를 넘나든 것이 아님은 황제의 명을 따르지 않는 것에서 드러난다. 그가 보여준 종교에 대한 포용성은 하나의 종교만을 강제하며 학살과 분쟁을 일으키는 인도가 ‘보아야 할’ 존재다.
“우리에게 가장 힘든 일이 뭔지 알아? 가장 싸우기 힘든 상대가? 연민이야. 우린 자기 연민에 빠지기가 너무 쉽지…… 우리의 사람들에게 그런 끔찍한 일들이 일어났으니까……집집마다 끔찍한 일을 당했어…… 하지만 자기 연민은 너무도…… 너무도 심신을 쇠약하게 만들어. 너무 굴욕적이고. 이제 싸움은 아자디보다도 존엄을 위한 거야. 우리가 우리의 존엄성을 지키는 길은 맞서 싸우는 것뿐이야. 설명 패배한다고 해도. 설령 죽는다고 해도.
잔나트에서 안줌은 행복할 수 없는 생물체의 표본이 아니라 행복을 주는 여신처럼 버티고 있다. 잔나트는 우울하고 음울한 분위기가 아니다. 행복할 수 없을 것 같은 생물체들의 실패 사례를 모아 놓은 듯 기묘하게도 따스하고 정감어린 기운들이 넘쳐흐른다. 한 개인의 삶의 역사를 따지고 들어가면 슬픔과 절망과 분노가 폭발할 사연들이 넘쳐나지만 그들은 앞으로의 삶을 희망과 행복에 더 두기로 한 듯 의연하다. 판도라의 상자에 마지막 남은 것이 희망이라는 것이 과연 긍정인 걸까 생각해 보지만 그들이 펼쳐가는 행복의 미소에 비소를 날리고 싶진 않다. 애잔함이 아직 마음 깊은 곳에 가득하지만 희망은 정녕 선물이 맞다고 응원해주고픈 마음이 든다.
아룬다티 로이는 이 책 속에서 답없는 인도의 답답함을 보여주지만 결국 희망은 ‘사람’임을 보여주고 있는 듯하다. 인간에겐 희망이 있어야 한다. 잔나트의 사람들이 신이 아니라 안줌에게서 위안을 얻으며 서로 믿고 의지하며 함께 하는 것이 인상적이다. 인도라는 체제가 사람들을 비극속으로 몰아붙이지만 그 체제에 잽을 날리는 사람들의 이야기가 많아질수록 사람을 사람으로서 연민하고 존중하고 포용하는 이들이 많아질수록 경계들이 조금이라도 허물어지지 않을까. 다양한 상징을 갖는 수많은 성자들이 탄생할수록 계층 밖의 사람들이 꿈꾸는 희망의 크기가 달라지지 않을까. 여전히 비극은 진행형이지만 잔나트가 지니는 가치 속에서 성장할 미스 우다야 제빈 2세의 등장처럼 새로운 세대가 내일을 기대하게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