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방한 망상


망상,어語, 김솔, 문학동네, 2017.


  망상,어(語)를 보고 읽음에도 머릿속에서는 자동으로 망상어(魚)로 전환하고 있다. 망상하는 물고기가 있을 리 없음에도 망상되는 망상이란 물고기. 망상어라는 제목에서 뜻보다 소리에 더 재빠르게 반응한 셈이다. 더구나 이 망상어라 불리는, 아니 생각한 물고기는 글을 읽는 내내 자유자재로 글 속을 뛰놀고 있었다. 망상이란 단어속 그 허황됨을 품고 있음에도 이 글에서 현실이 걷어 올려지는 건 망상이 너무나 잘 뛰노는 탓으로 봐야 하나. 아니, 그보다 작가가 뉴스에서 소재를 건져 올렸기 때문이기도 하다. 잘, 접해보기 힘든 사건들이긴 하나 엄연히 존재했던 사건으로서의 뉴스들을.

  여러 이야기가 짧게 끊어 묶어 엮어져 있다. 36편의 이야기는 서사가 있긴 하지만 짧은 글짓기같은 이야기다. 그래도 세상에, 이런 일도라며 진짠가 가짠가 하며 넘길 이야기들이 하나, 둘도 아니고 수두룩한 걸 보면 세상은 정말 수많은 사람들이 살아가는 곳이고 그만큼의 기이한 일도 다반사인 곳이다.

  익숙한듯 익숙하기 힘든 이야기들의 출처는 있었던 일이고 작가의 상상력과 더해져 뻗어 나가는데 신문기사로 몇단락 남은 이야기들의 이면이 작가가 그려낸 듯한 모습 그대로일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든다. 또한 그런만큼 이 이야기들의 길이는 작가가 만들어놓은 분량만큼, 딱 그만큼이 좋아 보인다. 더 길면 주절주절하게 느껴질 것이다. 그러니 뉴스라는 실제와 못믿을 뉴스라는 중간 그 어디쯤의 위치인 이 지점이 딱이다. 마치 아주 재밌는 거짓말같은 이야기를 누군가에게 들려주듯 딱, 그정도로. 맑고 밝은 날 들리는 천둥소리같은 기분도 간간히 느껴지는데 더러 재밌는 문장에 피식 웃음도 나고 만화같은 그림이 더해져 이야기의 재미가 좀 더 망상적으로 흘러간다.

  망상, 망상, 망상. 때론 망상은 유머의 끝에 도달하고 때론 경악의 끝을 향해 달려간다. 망상을 달고 다니는 물고기가 가지 못할 곳은 없어 보인다. 당연하다. 육지라고 가지 못할 이유는 없다. 다만, 일찍 숨이 끊어지겠지, 뭐. 내친 김에 하늘로…? 뭐, 누군가 집어 던지면 하늘로 올라갈 수도 있는 거지, 다시 내려오겠지만.


인간은 자신의 죽음을 수용하는 순간부터 비로소 삶을 시작할 수 있다. 유한하고 하찮은 존재라는 사실이 삶에 집중하도록 만든다. 죽음의 권위를 무력화하고 그것을 대체할 대상을 찾아 헤매는 게 인생이다. 삶의 의지는 탄생으로부터 시작된 파동 에너지가 아니라 죽음으로부터 건너오는 암흑 에너지이다. 에너지의 속도나 방향이 변할 때 사건이 일어난다. 그게 사랑이다. 그렇게 하찮기 때문에 인간에겐 너무 중요하다. 인간의 일생이 하찮지 않다면 우주는 그들을 모두 껴안고 있을 수 없을 것이고 결국 예정보다 서둘러서 자살하고 말 테니까. p171, 연꽃


  어쩌면 망상어의 세계는 작가가 누릴 수 있는 행복일 수 있겠다. 어떤 일들은 상상속에선 벌어져도 무방하니까. 뉴스일 때의 그 황망하기 그지없는 마음을 달래는데도 약간의 망상은 필요하기도 하다. 희망의 뉴스도 불운의 뉴스도 끔찍한 뉴스도 뉴스에서 전하는 삶의 희로애락을 더 잘 느끼려면 말이다. 또한 뉴스에서 알게 된 현실이, 벌어진 사건의 참담함이 가져다주는 마음의 상처를 아물게 하기 위해서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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꿈은, 계속되어야 한다


이유, 커트, 문학과지성사, 2017.



  자른 머리카락처럼 떨어진 머리통을 보면서도 놀라지 않는다. 이런 이미지에 무덤덤해지는 나이. 아니, 감성. 세월은 감정을 더욱 깊게 하지만 웬만해선 감정의 노출에, 표출에는 민감해지지 않는다. 불행하게도 불행한 시대를 거쳐 오며 표정이 굳어진 채인 지도 모르겠다.  웃지 않는 묘기 대행진 마냥 웃을 거리가 없던 시대의 게임. 오래도록 이 게임의 승자가 되어 승자의 얼굴을 하고 세상을 배회하던 얼굴들인지라 그 얼굴들이 떨어져 나간 것에 무어 그리 놀라겠는가.


 나는 손을 뻗었다. 딸아이가 뭘 또 잘라놓을지 알 수 없었다. 하지만 이미 늦었

다. 날카롭게 벼려진 가윗날이 허공을 가로지르며 유연하게 휘면서 다가왔다. 매서운 바람 소리와 함께 가건물이 붕 떠올랐다. 가윗날에서 뿜어지는 빛이 눈앞에서 부서졌다. 잘린 머리통 하나가 바닥을 굴렀다. 다름 아닌 내 머리통이었다.

 “엄마 아파?”

 아이가 태연스레 물었다.

 “목이 잘렸는데 안 아프겠어?”

 말은 그렇게 했지만 하나도 아프지 않았다. 온갖 잡냄새로 시달리던 머리통이 몸에서 분리되자 막혔던 숨이 트였다. 그렇다고 딸아이로 인해 치밀었던 화가 누그러지는 건 아니었다. p221~222, <커트>


  조금은 아플지라도 머리통을 분리할 수 있다면, 일단 굳어진 얼굴의 머리통을 단번에 날려버리고 싶은 마음이 가득하다. 역시나 막혔던 숨통이 트일 수 있을까.

  이 단편집은 곳곳에 멀쩡한 길을 걷다 갑자기 튀어나온 씽크홀을 맞닥뜨리게 한다. 잃어버린 기억처럼, 이제 막 잠에서 깬듯한 몽롱함 속으로 들이민다. 현실인듯하다 갑자기 환타지가 펼쳐져 몸을 어디 두어야 할지 모를 세계. 의식은 꿈과 현실의 경계에서 어디로 몸을 이끌지를 가늠하는 것만 같다.

  앞으로 더욱 전진하게끔 하는 힘이 꿈꾸는 것이라면, 꿈의 실패는 다시 꿈꾸는 것을 주저하게 한다. 그렇기에 다시 꿈꾸기까지는 현실이 아니라 환타지가 필요한 것인지도 모른다.  이야기속 비현실적인 요소는 실패한 꿈꾸기로 멈춤이 아니라 다시 꿈꾸기 위한 필수적인 요소로 작동하는 것이 아닐까. 반복적으로 꿈꾸고 실패하고 다시 꿈꾸는 이들의 이야기가 동병상련의 느낌을 들게 하는 것도. 그래서 환타지마저도 현실의 느낌이 들게 한다.

  꿈꾸기는 커다란 한덩이를 상상해 내는 것이라 그 한덩이를 이루는 작은 요소들은 꿈꾸는 당시에는 외면해버린다. 그렇게 닥친 작은 덩어리들이 모여서 큰 한덩어리를 구성함을 알 때, 작은 덩어리들에 일일이 대처하는데는 다른 방법을 써야 하기에 우리는 잊고, 잘라내고, 먼 곳으로 이동하고, 눈을 감아버리는 것은 아닐까. 그리하여 이것은 내가 진정 꿈꾸던 것이 아니었다고, 아니었다고 말하고 있는 것. 꿈꾸는 것 자체로 만족하고 그것을 이뤄가는 것은 생각하지 않기도 한다. 그렇기에 여진처럼 이런 생각을 품게 되는 것일 지도 모른다.


   사람들 꿈이 이루어지는 게 좋은 일이 아닌 것 같다고.

   차갑고 무뚝뚝한 말투였다.

   아니, 어떤 꿈도 이루어지지 않는 게 이 세상에는 더 좋은 일인 것 같아.

   필은 그녀가 하는 말을 이해할 수 없었다. p135 <꿈꾸지 않겠습니다>


  우리의 꿈꾸기는 세밀하지 않다. 뒤따를 것에 대한 책임도 상황도 모두 생각하지 못했다. 하지만 또한 그것 역시도 당면한 현실이 가로막은 것 아니었던가. 좀더 긴 미래를 생각하며 차분한 꿈꾸기로 표정있는 얼굴을 할 겨를도 없는 현실로 인해 마냥 도피와 같은 꿈을 꾸던 시대로 인해, 질적이지 못한 꿈들. 우리의 꿈꾸기의 바탕이 다져지지 않았다면 그 꿈의 질은 영원히 이루어지지 않았으면 좋았을 꿈이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이제 조금은 안정된 땅이 다져지는 현실 위에 서 있으니 이제 마냥 잘라내던 조금 길게 보는 꿈들을 그려내도 좋지 않을까. 하나의 머리통이 잘라져 이제 숨통이 트이기 시작했다. 잡냄새도 이제 덜 나는 것 같고. 그러니 꿈은, 계속되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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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9.12.6=2016.5.17


우리에게도 계보가 있다 - 외롭지 않은 페미니즘

이민경, 봄알람, 2016-09-30.


  몇 년 전 찰나 언니가 여성사에 대한 책이 필요하다고 했다. 얼른 여성운동사에 관한 책이 나오면 좋겠다고 했다. 필요하다고 해야 하는 일 아니냐고 했다. 2014년이었다. 그때만 해도 여성운동사에 관한 책은 있는데라는 생각만 했다. 이 책 <우리에게도 계보가 있다>를 읽고 나서야 그때, 찰나 언니가 말한 맥락이 무엇인지를 깨달았다.



나는 불청객 취급을 받으며 외롭고 공허하게 외치다가 어느 결엔가 묻혀버렸을 내 조상의 목소리를 찾아 헤맨다. 나와 닮은 얼굴을 한 그들이 원했을, 여전히 한탄스럽지만 제법 나아진 세상을 보여주고 싶다. 그러니 시간이 지나고 자신의 후세에게 금세 부정당할 이는 결국 누구인가? p145


  <우리에게도 계보가 있다>는 여성운동사의 계보를 이은 여성들의 이야기다. 일반적인 위인전과는 다른, 그러나 여성운동에 있어서, 차별받는 여성의 삶의 변화와 전환점을 가져오도록 노력한 이들의 이야기다. 결과만 기억하고 결과를 이루기 위해 노력했던 사람들은 깡그리 잊어버리거나, 알려 하지 않거나, 무심했던 사건에 새로운 기억을 새기는 작업이고 그렇게 잊혀지지 않을 여성들의 이름이 채워져 있다.

 우리나라 최초의 여성 변호사이자 호주제 폐지운동을 시작한 인물, 이태영 변호사. 함께 일한 스승인 유명한 임신 전문 한의사를 찾는 사람들이 전부 아들 낳는 처방만 바라는 것을 보고 남아 선호와 여아 낙태를 비판하며 호주제 폐지제를 위해 애쓴 고은광순 한의사. 강간과 성폭력 사건에서 여성에 씌어진 모멸적이고 부당한 법률을 개정하도록 노력했던 이들과 피해자들. 이들의 지난한 희생과 노력으로 변화를 위한 법률이 제·개정되었다. 그리고, 여전히 진행되지 않는 법률도 있고 그렇기에 노력하고 있는 이들이 또한 있다.

 계보를 살펴보면 느끼듯이 단 하루아침에 이루어지지 않았다. 기나긴 기간 동안 수많은 사건이 일어나고 그 사건으로 인한 무수한 피해자가 있었다. 그 피해의 터 위에서, 더 이상 피해를 당할 수 없다는 강한 의지와 문제의식을 가지고 적극적으로 노력한 순간과 세월들이었다.

  

이번 살인 사건에서 여성이 사망한 것은 우연한 일이지 여성을 일부러 범죄의 타깃으로 삼은 게 아니다. 또한 살인범도 사회구조의 희생자였고 정신병 때문에 일을 저지른 것이다. 이 일을 정치적으로 끌고 가서는 안 된다.“ p140 


  위 단락은 작년 벌어진 강남역 살인사건에 대한 논평이다. 그런가? 그렇게 보인다. 당연히 의심이 들지 않을 정도로 너무나 똑같다. 2016년 5월 17일 강남역 살인 사건이 벌어진 후 나왔던 말과 너무나 똑같다. 이 말은 1989년에 벌어진 캐나다 몬트리올 총기난사 당시에 나왔다. 캐나다 몬트리올 총기난사 사건은 1989년 12월 6일 캐나다 공과대학에서 여학생들만을 강의실로 몰아넣고 “페미니스트들을 증오 한다” 27명에게 총기를 난사한 사건이다. 14명의 여성이 사망했다. 여전히 캐나다 시민들은 이 사건이 발생한 날 추모식을 진행하고 있다. 그런 만큼 사건이 벌어진 당시에도 이 사건 이후의 파장은 거셌다. 총기규제 검토뿐만 아니라 여성폭력과 여성혐오에 대한 이슈가 확산되었다. 이때, 이 사건을 “여성혐오 범죄라 규정하기 꺼리던 이들이 내세운 주장”이 바로 위 단락과 같다.

  대한민국도 예외는 아니어서 강남역 사건이 발생한 후 일단, “절대 여성혐오 범죄”가 아니라는 목소리를 내기에 급급했다. 무엇이 그토록 강남역 사건이 “절대로 여성혐오 범죄가 아니어야 할 이유”가 있는 것인지 모르겠지만 그저 “묻지마 범죄”이고 그저 “정신병자의 실수”라는 주장이 단순 개인의 의견이 아니라 공식적인 형태로 규정되어 쾅쾅쾅 도장받듯이, 그러니 끝났다는 듯이 언론을 통해 쏟아져 나왔다. 개인 단위가 아니라 특정 단체, 정부, 언론 등을 통해 사건의 본질 규정과 이로 인해 벌어진 분위기에 대한 타당하고 명확한 추론과 분석은 차치하고 그저 “여성혐오 범죄가 아니라고 결론”냈으니 더 이상 그 말은 말라는 듯한 분위기는, 무엇을 위한 것이었을까. 오히려 그러한 분위기로 인해 여성혐오 분위기가 확산되었다는 생각을 했을 정도다. 그토록 여성혐오 범죄가 아니어야 한다는 성마른 논평과 주장들 때문에.

  이처럼 이 책은 비단 한국에서 일어난 사건에만 주목하지 않고 다른 나라에서 일어난 사건들도 주목한다. 그를 통해 보여주는 것은, 바로 여성문제에 관한 한 같다는 것이다. 다른 나라들에 비해 성차별에 관해 개혁적이고 차별이 덜하다는 나라들, 그냥 선진국이라는 나라들조차도 성평등과 관련해서는 여전히 개별 사안에 대해 먼저 관련 법개정을 이루거나 먼저 그 상황에 대한 변화를 이루었다 뿐이다. 어떤 부분에 관해서는 진보적이다 싶다가도 다른 사안에 관해서는 여전히 구시대의 관습을 따르고 있기도 하다. 그리하여 어떤 계기가 마련되지 않으면, 어떤 ‘사건’이 벌어진 후에라야 그 일을 다르게, 바르게 볼 시선과 의지를 가지는 것이다. 시간의 차이만 있을 뿐, 공간의 차이만 있을 뿐 여성과 관련한 사건들에 대한 반응은 어찌 이토록 시공간을 초월해 같을까.

  그러한 ‘사건’ 속에 있던 피해자들에게 위로를 ‘사건’을 통해 잘못된 점에 대해 온갖 모멸과 어려움에도 불구하고 바로 잡으려 노력했던 이들에게는 박수를 보낸다. 이러한 인물들이 계보가 아직 더 있으리라 본다. 계보는 계속되어야 한다.

  이 책과 전작 <우리에게도 언어가 필요하다>의 아쉬운 점이라면 이야기를 담는 형식에 대한 것이다. 편집이 매끄럽지 않다. 맛있는 음식을 돋보여주는 그릇의 역할을 생각할 때 교정과 편집에도 신경을 쓴다면 좀더 내용을 충실하게, 편하게 읽을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해본다. 들쭉날쭉한 글자크기, 의미없이 느껴지는 문장정렬 등이 사실 지나치게 급하게 인쇄를 한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마저 들게 했다. 특히 이런 주제의 책에 대해 일단 반감부터 가지고 보는 독자들도 있음을 생각한다면, 이 출판사에서 시리즈로 나올 다음의 책들은 조금 더 짜임새 있는 편집형태로 책이 나왔으면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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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은...


윤이형, 러브 레플리카, 문학동네, 016.


  대한민국 대통령보다 먼저 선출된 프랑스 대통령의 공식 취임식이 있었다. 마크롱 프랑스 대통령 기사와 더불어 영부인에 관한 기사도 무수히 쏟아져 나왔다. 77년생 최연소 대통령의 24세 연상 53년생 부인이기에 브리짓 트로뉴에 대한 시선은 여느 영부인에게 쏟아지는 관심을 넘어섰다. 마크롱 대통령이 15세일 때부터 서로 알아온 그들의 관계는 2007년 결혼으로 더욱 단단하게 묶여졌다. 마크롱 부인은 최근 조롱과 성차별에 시달리고 있다 한다. 이전의 대통령 역시도 부인과는 20세 이상의 나이차가 있었는데, 그 때엔 별말없던 언론들도 공격에 가세하고 있다. 미국 대통령도 부인과 나이차가 상당하지 않은가. 그런 부인을 둔 트럼프의 능력을 치하하던 이들은, 남편보다 연상이라는 이유로 마크롱 부인을 공격한다. 하나는 부러움과 시기의 대상이 되고 또다른 하나는 조롱과 멸시의 대상이 되는 이 어처구니없는 여성혐오의 행태가 소멸되는 의식수준은 언제쯤 오려나. 한편, 이런 일이 대한민국에서 벌어졌다 가정하면, 선거과정에서의 무차별적 공격의 소리들은 상상만해도 끔찍하다.

  프랑스 대통령 부부의 얘기가 길어졌다. 「대니」를 보면서 프랑스 대통령 부부가 떠올랐기 때문이다. 마크롱 부인의 자녀들은 마크롱을 “대디”라 부른다니 호칭도 유사하다. 대니는  24세의 안드로이드 베이비시터다. 아기를 돌보고 거기에서 행복을 느끼는, 그렇게 되어 있는 대니는 자신과 같이 아이를 돌보는 예순아홉살의 할머니를 만난다. 이 두 사람의 만남에서 마치 마크롱처럼 대니는 할머니를 향한 끊임없는 구애를 시작한다. 친절과 배려를 가득 담은 채. “아름다워요.”라고 말한 것은 시작이었다.  

  대니에겐 할머니의 손주를 돌보는 일은 “견디어 내는 것”으로 보였다. 슬개골연골연화증으로 늘 통증에 힘들어하는 할머니에게 딸과 사위는 떠맡기듯 제 아이를 보내며 할머니의 힘듦을 외면하고 있었다. 땀흘리며 힘들어 하며 “나는 기계가 아니다”라는 할머니의 외침은보육이 특정한 누군가의 ‘희생’의 몫임을 보여준다. 그런 할머니를 향한 대니의 친절과 연민을 사랑이라 불러도 좋을까. 멈출 수 없는 감정들로 손을 뻗어가는 할머니의 마음 역시도.


나는 수도 없이 대니에게 전화를 걸었다. 짐짓 단호한 척, 명령하는 어조를 골랐던 나를 후회하면서. 그때까지 한 번도 부끄러워한 적 없는 내 늙음을 부끄러워하고, 내게는 없다고 믿었던 감정들이 덩굴손처럼 집요하게 마음을 휘감고 뻗어가는 것에 당황했으나 멈출 수 없다고 생각하면서. p45~46


  사십년이 지나도 할머니와 얘기한 것을 기억하길 원하고, 할머니와 함께 살고 싶다 말하는 이 스물 네 살의 안드로이드에게 필요한 것은 할머니의 농담과 진담 섞인 말에서 튀어나온 ‘돈’. 끝을 짐작케 하는 이 자본주의 사회의 단어가 둘 사이에 놓여 둘의 나이차보다, 안드로이드와 사람이라는 차이보다 더 큰 걸림돌이 되어 버렸다. 사십년이 지나서도 지워지지 않을 기억을 갖겠다던 대니는 사라져갔고, 혼자만 안고 있는 사실에 기대어 할머니는 남은 나날을 견디어 간다.


말들은 장식이다. 혹은 허상이다. 기억은 사람을 살게 해주지만 대부분 홀로그램에 가깝다. 대니는 아무 말도 하지 않은 채 주어진 끝을 받아들였다. 나는 일흔두 살이고, 그를 사랑했고, 죽였다. 아무도 그것을 알지 못한다. 모든 것이 희미하게 사라져가지만 그 사실은 변하지 않고, 나는 여전히 살아 그것을 견딘다. p47


  윤이형 소설집 <러브 레플리카>는 어릴적 “공상과학글짓기”라는 주제로 쓴 글을 읽는 기분이다. 명징한 SF라 하기엔 부족한듯하면서도 딱히 아니다라고 하는 것이 어색한 이 소설속 세계는 현실과 잘 버무려진 SF 세계다. 세련되고 풍족한 물질의 세계, 자동화 시스템이 펼치는 찬란한 세계가 아니라는 점이 공상과학에서 기대한 바를 충족시키지 못할 뿐이다. 여전히 그 세계는 비루하고 비참하다. 그럼에도, 그래서, 관계맺음은 이어지고 단절되고 기억된다.

 「쿤의 여행」과 「루카」처럼 문학상을 받은 대표작품이 수록되어 있다. 제 몸을 지배하는 쿤을 떼어내고 새롭게 세상을 마주할 힘을 얻은 「쿤의 여행」속의 나처럼 이 소설집 속 인물들은 자신의 그림자같은 힘을 지닌 또다른 존재나 기계를 짊어지고 있거나 마주하고 있다. 「러브 레플리카」의 경 역시도 그러하다 생각된다. 이 소설 속에서 공상과학의 세계가 아닌 현실의 배경 속 인물이지만 경과 거식증 이연의 관계에서도 이 모습이 보인다. 결국 ‘경’은 타인의 경험을 제 것인양 하며 살아가고 있으니 실물을 얹고 사는 것은 아니지만 다를 바 없다고 볼 수 있을 것이다. 등장인물들은 제게 붙은 이 복제품의 실물을 떨쳐내려 한다면, ‘경’만은 실물로서의 복제품이 아닌 타인의 삶을 복제하고 있을 뿐.

  작가가 그리는 이 소설의 세계. SF의 세계. 미지의 세계인 것처럼 보이는 이 세계도 결국은 현실세계의 복제품이다. 잠시 외형이 변했다고 착각했을 뿐이다. 그곳에서 살아가는 인간의 삶은 전혀 달라지지 않았다. 이토록 같을까 싶을 정도의 현실이 가득 채워져 있다. 그렇기에 감정 역시도 다를 리 없다. 관계들에서 오는 슬프고 아릿한 이 감정의 흔적은, 기억은 그 어느 물적 토대 위에서도 근본적으로 다르지 않을 것이다.


변화는 어떤 사람들의 삶과는 아무 관계가 없다. 당신은 백 년 전의 어떤 사람들이 느끼던 것과 정확히 똑같은 두통을 느끼며 통속적인 삶에 매달려간다. 모멸감으로 말하자면 천 년도 더 전부터 이 땅을 흘러다니던 종류를 그대로 물려받았다. 당신이 이 도시를 떠나 자유로워지는 날은 아마도 오지 않을 것이다. p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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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벼웁게 훌쩍

 

여행자의 인문학-21명의 예술가와 함께 떠나는 유럽 여행

문갑식, 이서현 (사진), 다산3.0 | 2016-01-25.

 

    이런 여행이라면 좋겠단 생각을 했다. 잠깐, 이런 여행? 아니 이런 장소라는 것이 더 맞는 말일지도 모르겠다. 이런 여행을 생각했지만 준비부족이랄까, 딱히 인문학적인 여행은 되지 못했다. 그 아쉬움이 계속 남는다. 기인 연휴에 끼어 부랴부랴 여행을 다녀왔는데 첫 강렬한 인상은 비행기를 타면서부터 시작되었다. 황금연휴기간답게 공항 인파는 많았고 비행기 역시 예외는 아니었다. 비행기 안으로 사람들이 줄지어 들어서는데 젊은 사람들이 많았다. 좌석을 찾아 들어서는 사람이 많을수록 당연 소란스러웠고 선반에 짐을 싣는 소리들이 굉장했다. 가만, 이제 여행의 출발인데 짐을 싣는 소리라니. 부스럭 부스럭. 비행기를 꽉 채운 대다수의 젊은 사람들은 이제 막 여행에서 돌아온 사람들처럼 보였다. 그들 모두의 손엔 면세점 쇼핑백이 한가득 했다. 선반 위로 올라가는 짐은 이제 여행을 떠나는 이들의 손에 들린 면세품이었다. 나는 이 광경에 놀랐는데, 마치 면세품을 사기 위해 여행을 떠나는, 비행기를 타는 사람들인 것처럼 여겨졌기 때문이다.

   여행이 휴식이라면 여행지에서 만큼은 편안함을 즐겨야 하는데 인문학을 붙들고 있느냐 하겠지만 저자의 여행만큼 편안해 보이는 휴식은 없어 보인다. 장소가 주는 마음의 편안함일 것이다. 시끌벅적하고 화려한 볼거리가 있는 여행지가 아니라 고즈넉함과 여백이 있는 곳에서 느껴지는 긴장이 누그러지는 그런 느낌들 말이다. 문학속에서 또는 예술가들의 발자취를 보며 상상의 나래와 비교하는 맛 또한 추가되니 일석이조다. 저자는 그런 여행의 기록을 담아 <여행자의 인문학>을 썼다.

   예술가들과 문학작품 속 등장인물의 흔적이 있는 유럽의 스무 곳. 저자는 가는 곳에서 그들을 떠올리고, 아니 그들을 찾기 위해 그곳으로 찾아간다. 이미 유명한 곳이기도 하고 그렇게 조성해 놓은 곳도 있고 유달리 한국인의 방문이 잦다는 곳도 있다. 어쨌든 낯선 곳임에도 낯설지 않다. 내가 아는 누군가를 만나기 위해 그곳으로 찾아가는 느낌이 든다. 그래서 문학작품의 배경이 된 곳, 작가들의 흔적이 있는 곳을 찾는 기분은 좀 더 들뜨게 되는 모양이다.

 

고원에는 히스꽃과 잡초 외에 아무것도 없습니다. 아무것도 없는 무의 세계, 들리는 것은 바람 소리뿐입니다. 죽어서야 함께 할 수 있었던 캐서린과 히스클리프의 유령이 못다 한 사랑을 속삭이며 지금도 벌판을 떠돌아다닐 것만 같습니다. p15~18

 

   폭풍의 언덕에 등장하는 요크셔의 황량한 들판마저도 인상적이니만큼 어쩌면 조용한 곳에서의 휴식이 필요한 시기인지도 모르겠지만. 베아트릭스 포터의 유언처럼 자연이 그대로 살아 숨쉬는 땅에 대한 욕구일지도.

   “자연 그대로 이 땅을 잘 보존해달라.”

   그러고 보면 우리나라도 예술가들의 생가나 문학관 사업이 진행되고 있지만 유럽의 그것에 비해 부족하고 미흡해 보인다. 각 지자체의 관광 사업 수단쯤 여기는 행태도 보이고 그저 보여주기식으로만 건립되어 있어 안타까움을 더한다. 작가나 예술가에 대한 경외나 배려가 찾아보기 힘든 성장에 급급한 나라에서 살아온 터라고 이해하려 해도 씁쓸하다. 하긴 예술가들에 대한 블랙리스트나 만드는 나라이니만큼 뭘 기대하겠는가.

 

우리가 근대화한다며 모든 걸 싹 밀어버릴 때 샬럿과 에밀리 브론테가 걷던 워더링 하이츠 가는 길 돌담에 이끼가 낄 때까지 기다렸으며, 우리가 눈 돌리면 잊는 사이버 잡담에 한눈팔 때 종이신문을 들췄던 것이다. 그렇게 만들어진 게 바로 셜록 홈스와 스크루지와 햄릿과 피터 래빗과 해리 포터다. p58

 

  책 한 권에 스무 곳의 여행지를 돌아보고 관련 지역의 예술가의 생애나 작품들 에피소드, 감상들을 엮으니만큼 각 지역과 예술가에 대한 이야기는 소개 정도로 짧다. 조금 가볍게 예술가들에 대해 맛볼 수 있는 정도랄까. 그 감상에 더해 작가나 지역에 대한 매력과 궁금함이 일면 더 깊이 그곳에 대해, 예술가들에 대해 알이 위해 다른 책을 들척여봐야 할 것이다. 그래도 예술기행으로서 가벼운 산책정도의 느낌으로 읽으면 될 듯하다. 긴 연휴가 끝났는데도 사방 벽들을 보며 벌써부터 너른 들판이 그리워진다. 역시, 자연과 함께 하는 삶이 필요한 휴식이 필요한 나날인 모양이다. 그래도 쉬는 것 같지 않은 휴식을 맞이하지도 불편한 일상에 허덕이지 않아도 될 나날들이 될 거라는 기대감에 조금은 위안이 된다. 근원적인 분노와 답답함으로 새롭게 시작되는 날이다. 가벼웁게 살짝. 그동안 눌렸던 답답함을 조금은 버려도 좋으려나. 


나의 날들을 줄곧 따라다니는 저 샘물 소리. 샘들은 햇빛 밝은 맑은 들판을 거쳐 와 내 주위에서 흐른다. 이윽고 내게 더 가까운 곳으로 와서 흐른다. 그리하여 나는 이제 그 소리를 내 안에 갖게 되리라. 마음속의 그 샘, 그 샘물소리는 나의 모든 생각들과 함께 흐르리라. 그것은 망각이다.

  -알베르 카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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