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행기를 쓴다는 것


매혹의 러시아로 떠난 네 남자의 트래블로그, 서양수·정준오, 미래의창, 2015.


  긴 연휴가 시작되었다. 이를 증명하듯 인천공항에는 무수한 인파가 가득했다. 수많은 사람들이 지친 몸을 이끌고 이 나라를 떠나 휴식을 취하기 위해 떠나고 있다. 그래, 그동안 너무도 지쳤다. 지난 겨울부터 봄까지 너무도 힘들었던 시간이다. 일 때문이기도 하지만 일을 할 수 없도록 만드는 나라 때문에 아직 회복되지 않은 채 바짝 긴장된 몸과 마음. 이 기회를 맞아 힐링을 하고 돌아오면 5월엔, 5월엔 상쾌한 몸과 마음으로 새로운 정권을 볼 수 있을까.

  

 “시베리아 자작나무가 부르는 소리가 들리지 않아?”

  여행은, 홀리듯이 가더라도 몸이 지쳐 돌아와도 다시 가고프다. 여기 네 남자가 떠난 러시아여행처럼, 여행에서의 잊지 못할 기억이 자꾸 불러댄다. 여행 책들의 결론은 한결같다. 어쨌든 떠나라!

  이 책은 갑작스럽게 떠나게 된 네 명의 남자들의 러시아 여행기이다. 네 명의 남자들은 2008년 시베리아 횡단열차에서 만난 인연으로 다시 한번 러시아를 떠난다. 갑작스럽게. 네 명이지만 두명만이 여행 서술을 담당하고 있고 그들이 방문한 러시아의 감상과 겪은 여행 에피소드를 곁들이고 있는 여행기다. 네 명의 왁자지껄한 여행의 일상이 담겨 있다.

  여행기를 읽는다는 것은 타인의 경험을 통해 여행에 대한 욕구를 충독질하는 일이다. 가고자 하는 곳에 대한 정보를 얻는 것이기도 하지만 그곳에 대한 인상을 타인의 경험을 통해 간접경험하며 절실하게 나도 여행을 가겠다는 마음과 그들이 예찬하는 장소 어딘가를 선택하는.

  수많은 사람들이 여행을 하고 여행기 또한 넘쳐난다. 어떤 이는 여행을 가고 시리즈로 여행기를 발행하기도 한다. 세상에 여행할 곳은 너무도 많으니까 여행기는 사람들과 장소에 비례하여 기하급수적이 될 것이다. 그 많은 여행기 중에서 어떤 여행기를 선택한다는 것은 내 여행에 영향을 미칠 수도 있음을 감안할 땐 중요한 일일 거다.

  이 책의 특징은 뭐랄까. 편하게 읽히는 만담같다. 여느 여행기나 블로그에서 보듯 방문한 곳의 유명한 장소에 대한 소개와 그곳에 대한 인상이 담겨 있는데 이를 통해 “아, 나도 가고 싶어”라고 할만한 장소는 선뜻 와닿지 않는다. 그만큼 특정한 장소에 대한 묘사와 강렬한 인상을 담고 있진 않다.

 기억에 남는 건, 이 책을 쓰게 된 동기와 그들의 이력이다. 어떤 여행기는 “여행을 떠난 이유” 자체가 여행의 내용보다 차별화된다. 여행을 떠나는 일이 일생일대의 선택을 하는 일인듯 ‘과감’하게 일상의 일들을 접고 떠난 이들의 여행기가 주를 이뤘다. 그들은 과감하게 일을 그만두거나, 전세금을 빼거나, 전재산을 몽땅 들고서 여행을 간다. 그런 일들은 쉽지 않은 일이기에 그러나 한편으로는 로망이기에 그렇게 해서 떠난 여행이 어떤 매력으로 가득했는지, 그들이 후회를 하는지가 궁금해서 그들의 여행기를 보게 된다.

  그다음 작가나 학자의 여행기다. 그들은 학술적인 정보를 감상과 함께 섞어 준다. 문학가의 감상은 남다른 언어를 통해 특정한 장소에 대한 기억을 일깨우고 학자들은 그 지역의 역사와 사회문화적 배경을 잘 설명해준다.

  일반인들이 여행을 하지만 여행기를 쓰는 경우 저런 ‘과감한 행동과 이력’이 있어야 눈에 띄는 게 보통이다. 그런 점에서 이 네 남자의 여행기는 직장 생활하거나 공부하거나 일상을 누리다가 많은 사람들이 그러하듯 주말과 휴일을 이용해 여행을 떠났다. 아주 특별할 것도 없이 그렇게 떠났다. 그리고 그들의 기록을 책으로 만들었다. 아니다. 더 정확히는 여행을 가는 멤버를 영입하기 위해 ‘책으로 쓰자’는 아이디어가 먼저 나왔다. 어쨌든 보통의 사람들이 여행을 갈 때 하는 방법 그대로, 그 전날까지 일에 치여 있다가 날짜에 맞춰 허겁지겁 떠나는 여행이다. 그렇게 돌아와 일상으로 복귀하고 또다시 휴가에 여행을 떠나는 그런.

  여행을 떠나는 일이나 혹은 여행을 가서 여행기를 글로 쓰고, 책으로 내는 건 특별한 사람들만이 하는 일이라 생각하는 이들에게 이 여행기는 일상과 평범이 그대로 녹여있는 여행기이다. 여행을 하고 싶고 여행기를 쓰고 싶은 이들에게 새로운 욕망을 씌워주는 책이라고나 할까. 물론 몇 박 며칠의 휴가를 다녀온 이야기를 책으로 쓴다고 해서 출판사해서 즉각 환영하며 출판해 줄 거라는 보장은 없다. 다른 책들과는 다른 ‘차별성’이 필요한 법이니까. 한편으로는 이들 네명의 독특한 이력이 한몫했다는 생각을 부인할 수 없을 것 같다. 우주비행사에 도전하기도 하고 공모에 당선되어 갈라파고스를 촬영하기도 하는 사람들, 이미 20대에 연해주 역사탐방단에서 시베리아 순례를 하던 이들 네 명. 그러나, 지금은 30대 직장인이거나 아직 공부중인 채로 지난 날의 여행의 기억을 마음에 품고 언제든지 그 여행 속으로 달려나갈 준비를 하고 있는 사람들.

  여행은 그리고 여행기는 정해진 누군가의 몫은 아닌 것이다. 누구든 도전하는 자의 몫이라는 생각이, 긴 연휴를 앞두고 든다. 도전하고픈 연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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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unsun09 2017-04-28 22:4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예전 모 항공사 광고에서 본 듯한 사람들인데 맞는지 모르겠네요.
이들의 이력이 여행서 출판에 한몫했다는 얘기가 의미있게 다가오네요. 많은 이들이 꿈꾸지만
여건이 허락해주지 않은 현실에 살짝
서글퍼지려하네요^^ 의미있게 잘 읽고 갑니다..

모시빛 2017-04-29 22:14   좋아요 0 | URL
동감이요. 서글픔...출판에 있어 콘텐츠도 중요하지만 저자 프로필이 우선하기도 한다더군요. 심지어 프로필이 70%라는 얘기도들은 기억이 나네요... 그래도! 즐겁게 열심히 책읽고 좋은 콘텐츠를 쌓아보자구요. 화이팅입니닷!
 


스트롱맨에겐 의식 정화가 필요하다.


우리에겐 언어가 필요하다 - 입이 트이는 페미니즘

이민경, 봄알람, 2016-08-02.


  “집에서는 안 그래요. 부드러운 남자에요.”

  집에서 부드럽든 말든 무슨 상관인가. 집에서는 안 그런데 왜 밖에서는 그렇게 행동하는가. 어떤 행동은 집에서 하는 것은 전혀 문제되지 않는다. 사회적 동물로서의 인간이 밖에서 해서는 안되는 말과 행동이라는 것은 있다.

  여러 가지로 두 부부의 발언에 적잖이 놀라고 있다. 나랏일을 하겠다고, 큰일을 할 사람이라 자청하며 목소리 높이고 있는 누군가의 ‘언어’는 개인의 언어로서도 부적절하다. 하물며 한 나라를 이끌어갈 대통령 후보의 언어라니.

  이제 얼마 남지 않은 투표일을 앞두고 뱉은 말들을 주워 담기 위해 ‘이해시키려’ 쏟아내는 말들은 오히려 앞의 언어가 ‘한번 삐끗’한 것이 아님을 보여준다. 그 언어가 빠져 나온 통 속에는 동종의 언어가 가득함을, 언어통을 지배하는 ‘인식세계’의 수준이 어떠함을 드러낸다. 이 인식체계에서 주워 담은 언어통 속 언어로 이야기하는 것은 같은 의미의 무한재생일 뿐이다. 그들이 이해를 시키려 노력하면 할수록 이해하기 힘들어지는 상황이다. 이 책 작가의 말대로 이해란 ‘시키는 것’이 아니라 ‘하는 것’이니까.


생각해 보면 ‘이해를 시키려 노력한다’는 말, 묘하게 모순입니다. 이해란, 원래 시키는 게 아니라 하는 겁니다. 대화를 마치고 ‘이해시키느라 힘들었다’는 소리가 나온다면, 상대가 해야 할 이해를 도와주는 노력을 했는데 그게 힘에 부쳤다는 뜻 아니겠습니까? 그럼 힘을 키우면 될까요? 물론 그럴 수 있습니다. 계속 말하겠으나 당신의 선택입니다. 하지만 잠깐, 이해가 누구 몫이어야 하는지는 짚어둡시다. ‘이해’가 성립하는 데 필요한 노력을 누가하고 있는지도 봅시다. p21


  “설거지를 어떻게…. 남자가 하는 일이 있고, 여자가 하는 일이 있다.

 남녀 일은 하늘이 정해준 것이다”


  사람들은 시대착오적이라고 비판했다. 여성 비하, 성차별 발언이라며 비판의 소리가 높아지자 아들은 “아버지는 집에서는 설거지, 청소, 빨래도 자주 하시고 라면도 잘 끓이시는 자상한 분”, 부인은 “빨래도 잘하고 설거지도 잘한다”라며 아버지를 두둔했다, 가 아니라 아버지가, 남편이 말한 것이 거짓말임을 밝혔다. 거짓말하는 대통령은 안된다면서 참 쉽게도 거짓말 하는 대통령 후보를 만난다.

  이 발언이 ‘여성혐오적 발언’이라고 사과하라는 요구를 받자 후보는 “스트롱맨이라서 웃자고 한 소리다” “센척할려고 한 소리다” 라고 변명했다. 웃자고 한 소리라는 말에 정작 웃을 수 없는 사람이 얼마나 많은지 알지 못하는 건가. 더 정색할 말이 이어진다. 두말할 것도 없이 이 말도 자당 후보를 향한 비판에 유권자들을 ‘이해시키기 위한 언어’를 구사한다. 아니 수습의 언어라고 해야 하나. 같은 통에서 꺼낸 말로 당 대변인은 한마디 덧붙였다. “설거지 발언은 이 시대 남성 심경을 대변한 것이다.”

  이 말이 여성혐오의 표현만이겠는가. 남성차별의 언어이기도 하다. “강한” “멋진” 남자의 모습을 보여주는 것이 “여성을 폄하”하는 데 기대어 이루어지는 것이라면 그 강함의 진정성은 있는 것인가. 그 강함은 자립할 수 있는 것인가 하는 의문을 가진다. 여성을 비하하고서야, 여성을 깔아뭉개고서야 비로소 제 위치를 형성한다고 생각하는 것은 절대적으로 여성에게 의지하고 있음을 보여주는 것 아닌가. 또한 그 속에는 “여성”에게 잘 보이기 위해 “여성혐오”의 표현을, 행동을 감행하는 이율배반적인 행태도 분명 포함되어 있다. 이 잘못된 언어의 중심에는 결국 잘못된 전제와 잘못된 인식이 바탕에 있는 것이다.

  이 “강한”남성들의 세계관은 여성비하, 폄하 못지않게 남성 자신들의 비하와 폄하를 일삼고 있다는 사실을 알아야 한다. 강한 남자에 대한 집착을 버리지 못해 여성혐오를 하용하면서 “남성적이지 않은 남자들”을 지적하고 걸러내 또한 차별하고 있음을 정녕 모르고 있는 건가. 아니, 모르는 것이 아니라 그러기 위해 행하는 행동이라는 데 더욱 분노할 수밖에 없다. 알면서도 의식적으로 행하는 행동, 절대 바꾸고 싶지 않아 외면하는 행동 패턴들이 있기 때문이다.

  문제는 영원히 그렇게 살아가고 싶어 하는 그 인식세계다. 굳이 가부장제를 끌어 오고 싶지 않지만 가부장제에서 벗어나지 않고 그것으로부터 얻어낸 기득권을 유지하고 싶은 마음 때문일 것이다. 가부장제 사회가 여성만이 아니라 남성에게도 스트레스와 공포를 주는 제도임에도 불구하고 일단 “여성집단”을 차별함으로써 이 무한 경쟁 사회에서 경쟁 대상을 줄이고 싶은. 정의와 평등의 언어가 아니라 혐오의 언어로 제 존재적 증명을 펴려는 그들만의 언어의 세계. 이 혐오의 언어가 ‘개인’의 언어가 아니라 점점 집단화되어 가고 있다는 생각이 든다. 배제하려는 이유는 결국 제 것을 더 갖기 위한 발악이다. 한편으로 이 여성혐오의 언어는 물론 주욱 이 나라에서 이어져오고 잘 써먹어 온 말이다. 그러나 변화하지 못하는 소멸되는 언어로 만들지 못하는 건 헬조선 사회가 움켜쥐고 있기 때문이며, 특정한 권력이 그것을 더욱 부추기는 이유 아닐까.

  

 이 책 <우리에게도 언어가 필요하다>는 사실, 다른 페미니즘 책보다 그렇게 흥미를 당기진 않았다. 최근 페미니즘 관련 책들이 너무 쏟아져 나와서 비슷한 경험과 이야기들을 반복해서 보기 때문일 수도 있겠다. 그러나 어딘지 모르게 분명, 환호할 정도의 공감이나 끄덕거림보다 뭔가 아쉽다는 느낌이 들었다. 그러나 오늘 문득, 한 대선 후보의 발언에 반응하는 내 언어가 이 책에서 말하는 바와 별 다르지 않구나 하는 생각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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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계, 경제, 정체성


그저 좋은 사람 Unaccustomed Earth, 줌파 라히리, 박상미 옮김,, 마음산책. 2009-09-05.


  개인의 정체성을 형성하는 것은 여러 가지다. 확고한 정체성이 삶을 더욱 안정적으로 이끈다고 삶의 추진력을 얻는다 하기도 한다. 정체성을 구성하는 요인 중 하나라고 할 수 있는 민족과 국가. 과연 개인에게 어느 정도의 강도로 영향을 미칠까. 특히 타지에 살고 있는 경우라면 더더욱.

  줌파 라히리는 미국에 살고 있는 인도인이다. 그런가? 여기서 미국에 살고 있다는 것은 국적을 이야기하고 인도인이라는 것은 종족을 이야기하는 걸까. 줌파 라히리는 영국 런던에서 태어났고 곧 미국에서 살았다. 부모에게 인도인의 문화를 몸에 익히며 미국의 사회와 문화를 헤쳐 나가야 했다. 어쨌든 그런 작가의 삶의 궤적이 나타나는 소설에서 이민 세대들에 대한 공감과 연민을 한참 느끼다가 불현듯 궁금해졌다. 소설 속 인물들은 어떻게, 이토록, 미국에 ‘비교적’ 잘 정착하고 있는가,라는.

  이 책은 ‘반대의 이야기를 하고 있는데’라는 반박의 소리가 들린다. 그렇다. 이민세대와 2세대의 내적인 혼란과 방황이 곳곳에 묘사되어 있다. 그들은 일상에서 그것을 느끼고 그들 스스로의 생에 대한 질문이 된다. 그런 그들에 대한 질문이 스친다. 그들을 규정해 나가는 그냥, 소설적 질문이라기보다 일반적인 시선의 질문이라고 생각해보면 되겠다. 그들의 내밀한 삶을 들여다보지 못한 경우 우리는 물을 수 있다. 한국인에게 자주 듣게 되는 질문일 수도 있겠다.

  “어떻게 그렇게 ‘미국에서’, ‘영국에서’ 공부도 잘하고 ‘좋은’ 대학에 들어갔는가.”

  인물들은 타국에서 겪는 고향에 대한 향수와 정체성, 일상에서의 고독에 휩싸이고 있다. 특히, 인도인의 문화와 관습을 명확히 지닌 채 미국 생활 정착에 집중하는 부모 세대들에 비해 상대적으로 안정된 바탕에서 살아가는 자녀 세대들은 인도와 미국의 관습과 사고, 생활에서 자기 자리를 찾아내는 데 집중한다. 서로 다른 나라의 문화 사이에서 일상의 행동을 장악하는 것은 인도인의 관습이기에 충돌할 수밖에.

  그래서 「머물지 않은 방」의 등장인물이 아밋은 자신의 삶에서 가장 큰 상처라고 한다면  랭포드를 보낸 것, 타지에서 생활하게 된 것뿐이라고 말한다. 그러나 이것은 이민자들이라면 누구나 가지는 보편적인 반응일 것이다.  


큰 상처를 겪으면 젊을 때 머리가 셀 수도 있다는 글을 어디선가 읽은 적이 있었다. 하지만 누가 갑자기 죽거나 사고를 당한 기억은 없었고, 삶에서 커다란 변화를 겪은 것도 아니었다. 부모님이 그를 랭포드로 보낸 것 외에는. p115


  일상이라 부르는 생활사건들에 대한 소설속 인물들의 감정적인 동요가 눈에 띄는데, 이것이 줌파 라히리 소설의 특징이라고 생각했다. 한편으로 생각하니 이들 삶의 피폐함은 정서와 정체성에 기반되어 있고 환경적인 요소와는 거리가 멀기 때문이다 싶기도 했다. 보다 구체적으로 말한다면 삶의 경제적인 어려움, 육체적인 고단함과는 거리가 먼 삶을 살아가고 있는 모습들이라는 것이다. 그래서일까, 이 섬세한 감정의 선들이 또렷하게 부각되고 있는 것은.

  반면 노동자인 이민 세대의 삶의 모습은 이와는 상당히 다르게 느껴질 것이란 생각이었다. 이들 삶은 내면의 고통 외에 현실적 고통의 강도가 더욱 세게 지배했을 것이다. 내가 누구인지를 생각할 겨를 없이 여전히 ‘생존’에 더 방점을 두지 않았을까. 이민자이진 않지만, 미국인 메간이 경제적인 어려움으로 다른 삶의 방향을 생각할 겨를 없이 일상을 버티고 있는 것처럼. 그러나 소설 속 인물들은, 이민세대로서의 인도인인 이들은 일상이라는 생활사건 속에서 ‘경제적 고민’은 뚜렷하게 보이지 않는다. 오히려 대부분의 인물들이 “먹고 살기 충분하다”라는 말을 내뱉는다. 물론 인도에서 살았다면 충분히 더, 비교할 수 없을 만큼 “잘 살았”다고 말한다. 그러니 지금의 삶은 상대적으로 가질 수 있는 것보다는 약할지 모르겠다. 하지만, 인물들 대부분의 삶에서 경제적 힘듦은 삶에 추가되지 않는다. 그들은 미국 사회 내에서도 충분히 ‘먹힐’ 직업적 지위를 가지고 있다. 이런 여러 면에서 그들은 타지에서도 충분히 뿌리내릴 여건을 가지고 있지 않은가. 

  <그저 좋은 사람>을 시간이 지나 다시 읽은 시점에서, 줌파 라히리 소설에 대한 끌림과는 별개로, 왜 이 점에 자꾸 집착하게 되었을까. 어쩌면 편견일지도 모르겠다. 삶의 괴로움을 더욱 가중시키는 것은 경제적인 어려움이라고. 그것은 정체성을 생각할 겨를도 없이 ‘인간성’을 상실할 파괴력을 지녔다고. 아니다, 편견이 아니라 그렇다고 말하고 싶은 거다. 경제적으로도 피폐해지면 어느 곳에서나 뿌리를 내리는 것이 어렵다고. 그래서 상대적으로 경제적인 안정을 바탕으로 둔 이들이 인생의 큰 상처로서 “경계에 있는 나”에 대해서 더 많은 생각을 하고 있는 것은 아닌가 하고.


집으로 돌아오는 길 차 안에서 아버지가 루마의 일 얘기를 다시 꺼냈다. “일은 중요하다, 루마야. 경제적인 안정도 주지만 정신적인 안정도 있다. 내 평생, 열여섯 살 때부터 난 쭉 일을 해왔다.” p50


  아버지의 의도는 다르게 말했지만 「길들여지지 않은 땅」의 아버지가 하는 말을 인용한다. 누군가에게는 경제적인 안정이 정신적인 안정을 주는데 주요한 일이 된다는 것을. 일상의 사건들 속에서 느끼는 감정적 상실과 혼란은 개인별로 차이가 있겠지만. 어쨌든 아련한 이야기 속에서도 한편으론 이들 방황이 처절한 고통에서는 한발짝 먼 느낌이 드는 것은 또다른 삶을 살아가는 이민자들의 정체성을 경험하지 못했구나가 느껴졌다. 그렇게 보니 줌파 라히리의 소설 속 주요 등장인물들은 하나같이 지식인층이다. 충분히 교육받고 충분히 안정된 삶을 살고 있지만, 더 나은 삶을 살기 위해 영국으로, 미국으로 가고 있다. 정치적인 이유로, 경제적인 피폐함을 타개하기 위한 이민과는 또다른 것이다. 이런 경험이라면 줌파 라히리의 소설에선 어떻게 다뤄질까가 궁금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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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06-18 08:47   URL
비밀 댓글입니다.
 
축복받은 집
줌파 라히리 지음, 서창렬 옮김 / 마음산책 / 2013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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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걸음 뒤에 둔 시선


축복받은 집 Interpreter of Maladies, 줌파 라히리, 서창렬 옮김, 마음산책, 2013.


  줌파 라히리의 글은 편하게 읽힌다. 섬세하다. 따뜻한 느낌과 아릿한 느낌이 오랫동안 머문다. 줌파 라히리의 소설을 처음 접한 건 장편 <이름뒤에 숨은 사랑>이기에 인도인의 정체성에 대한 계속된 질문을 단편집에서 느끼게 된다. 정체성이라고 할 수도 있고 그저 줌파 라히리가 관계하는 이민생활을 하는 인도인들의 삶의 모습이 이러할 것이라고 생각했다.

  인생에서 맞닥뜨리는 어느 순간의 감정들을 잘 포착하고 그것을 편안하게 내밀한 감정의 언어로 잘 묘사한다. 격정적인 사건을 보고 있지 않음에도 마음의 격랑이 크게 이는 것은 이 감정의 여운이 사그라지지 않기 때문이다. 세심한 관찰자의 시선이 소설의 공간적 배경을 충분히 떠올릴 수 있어서 문자 언어인 이 소설에서 시각적 이미지가 잘 떠올려졌다.

  이 단편집은 여러 문학상을 수상했고 평론가는 단편집의 전체 작품에 대해 찬사했다. 정말로 특정한 작품만이 기억에 남는 것이 아니라 단편 하나 하나가 뚜렷한 느낌으로 생생하다. 아이의 시선이 포착된 「피르자다 씨가 식사하러 왔을 때」, 「센 아주머니의 집」에선 따스한 느낌이 들었다. 그 뒤를 둘러싼 불안과 고독을 감지하는 그 시선때문이었고 미국에서 살아가는 인도인이 처한 현실 모습을 뼈저리게 느끼며 타인이 아닌, 낯선 자가 아닌 함께 살아가는 이의 아픔을 공감하고 위로를 건네는 모습 때문이기도 했다. 이 적응의 긴 버전이 「세번째이자 마지막 대륙」인 것 같다. 자알, 견뎌내고 버틴 그 삶들.


나는 이 신세계에서 거의 삼십 년을 지내왔다. 내가 이룬 것이 무척이나 평범하다는 것을 안다. 성공과 출세를 위해 고향에서 멀리 떠난 사람이 나 혼자뿐인 것도 아니고 내가 최초인 것도 아니다. 그럼에도 나는 내가 지나온 그 모든 행로와 내가 먹은 그 모든 음식과 내가 만난 그 모든 사람들과 내가 잠을 잔 그 모든 방들을 떠올리며 새삼 얼떨떨한 기분에 빠져들 때가 있다. 그 모든 게 평범해 보이긴 하지만, 나의 상상 이상의 것으로 여겨질 때가 있다. p309

 

  한편, 줌파 라히리의 소설에선 일상에서 한순간 급격하게 단절되는 순간의 감정들을 잘 묘사하고 있다. 마치 어느 순간 배가 부르듯, 물 한방울이 컵에 가득찬 줄 모른 채 마침 딱 한방울에 의해 흘러내리는 그 어떤 날의 감정들. 삶의 불편과 환희의 감정이 들어차던 순간을 터뜨리는 것보다 조용히 멈춰버리는 사람들의 모습 같은 것.

  이 대표적인 느낌이 「일시적 문제」다. 한국의 문학상 수상 작가의 표절 의심에 중심에 선 작품이다. 쇼바와 슈쿠마의 아이가 사산된 후 그들 사이에 생겨난 거리감에 관한 이야기인데, 한공간에 살지만 타인처럼 서로 마주하기를 꺼리는 두 부부의 모습이 줌파 라히리의 장편 <저지대>를 생각나게 했다. 그리고 드라마 「연애시대」가 생각났다. 아내가 사산한 아이를 낳은 날 남편은 늦게 왔다. 그 순간에 함께 하지 않은 남편에 대한 서운함이랄까, 끝까지 자신이 없었던 이유를 말하지 않는 남편과 자신이 사산한 아이를 낳았다는 실패한 느낌으로 힘들어하는 아내는 상처가 되지 않기 위해 이혼했다. 남편의 결혼식에서야 그날 남편은 죽은 아이를 품에 안고 장례 절차를 치르고 있었음을 알게 된다. 이때 아내는 남편에 대한 원망이 사르라지고 미안함과 고마움에 어쩔 줄 모르는데 이 연기를 한 손예진의 모습이 쇼바에게 겹쳐졌다.

  쇼바와 슈쿠마도 아이가 사산된 후 서로 최소한의 마주침만을 하며 견디고 있는 중이다. 정전을 틈타 서로에게 하지 않은 이야기를 건네는 모습에  이제 화해의 순간이 도래할 듯한 느낌을 풍긴다. 예상보다 빠른 단전의 복구처럼 그들은 촛불을 켜고 대화를 나누게 되는 것처럼 이제 일상의 대화를 나눌 듯이 보인다. 그러나 슈쿠마는 단전된 시간 속에 나누었던 이야기들은 쇼바의 보다 확실한 헤어짐을 말하기 위한 전초였음을 안다. 서로에게 상처를 새기기 위한 말들. 그때 남편, 슈쿠마가 내뱉은 말은, 그날 아이를 품에 안고 느낀 아이에 대한 묘사다. 함께 슬퍼하는 그들의 모습에서 소원했던 관계는 이제 일시적인 문제였다는 느낌을 받는다. 쇼바가 다시 전등을 껐다는 것에.

  「축복받은 집」 또한 그렇다. 새 집에서 여러 성물들, 십계명이 적힌 행주, 그리스도상이나 성모 마리아상을 찾아내는 트윙클은 집을 “축복받은 집“이라 칭한다. 하지만 정돈된 깔끔함을 원하는 산지브에겐 참을 수 없는 일이다. 더구나 그들은 기독교인도 아니니까. 불필요한 물건들에 관심을 두고 굳이 쓸모를 찾는 트윙클의 갈등은 쇼바와 슈쿠마처럼 어느 순간 소통하지 않는 모습이 되는 것이 아닌가 걱정하게 한다. 그러나 또한 사소한 트윙클의 모습 하나하나에서 이해를 넓혀가는 산지브의 모습이 인상적이었다.

 여기 등장인물들 모두가 그렇다. 쉽게 내뱉지 않고 마음속으로 자신이 가진 인상과 생각에 매몰되어 있다. 그리고 한순간 깨닫고 또 한순간 깨닫는다. 그들은 자신의 마음을 쉽게 내비치지 않지만 「질병 통역사」에서처럼 타인에게 기대어, 또다른 계기를 통해 문제에 핵심에 가 닿는다. 이 책의 원제가 이 단편이라는 것 역시 의미있다고 여긴다. 관광안내원이자 질병을 통역해주는 직업을 가진 카파시에게 자신의 문제를 터놓고 마음을 편하게 해줄 말을 요구하는 다스 부인의 요구처럼.

  마치 스스로 문제의 원인을 알지만 그것에 가 닿지 않으려 빙빙 돌다가 다시 그 자리에 서 있는 모습을 보게 된다. 그때의 느낌과 감정은 이제 처음에 느꼈던 그때의 느낌과 감정과는 다르다. 해결의 방식은 항상 의미의 재발견이다. 상황에 대한 다른 시선. 그것은 타인에 의지해 혹은 먼 훗날의 내가 이 모습을 서술하는 듯한 느낌으로 진행되는 듯하다. 내가 과거의 모습을 보면서 느끼는 감정처럼 줌파 라히리의 등장인물들이 갈등을 해결하기 위한 방법은 그렇게 돌고 돌아 한걸음 뒤에 서서 바라보는 시선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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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덕의 물리학

 

중력의 법칙, 장 퇼레, 성귀수 옮김, 열림원, 2008.

 

   이 소설이 연극이라면, 영화라면 등장인물은 몇 명 출연하지 않아도 된다. 이야기를 이끌어가는 중심인물은 단 두 명이다. 두 명의 대화로 이어가는 소설의 전개는 흥미진진하다. 작가 장 퇼레는 『자살가게』에서도 블랙 유머를 가득 구사하는데 프랑스가 자랑하는 이야기꾼이라 불린다. 그의 소설을 읽을수록 이 말에 동감하게 된다.

 

한쪽 눈이 여자를 무죄방면하는 동안 다른 쪽 눈은 여자를 단죄하는 것인가……그렇다면 질이 지금 처해 있는 정확한 위치는 두 눈 사이가 되는 셈이다. p137

 

   경찰관 질 퐁투아즈의 두 눈 사이에 있는 여자. 여자는 10년 전 지은 자신의 죄를 고백하러 경찰서에 와 있다. 공소시효 3시간 정도를 앞두고서. 여자의 죄는 12층 아파트에서 남편을 떠민 것이라 말한다. 12층 창문에서 떨어진 남편은 양팔을 옆구리에 붙인 채 사망했다. 그 사건은 자살 시도 전력이 있는 남편의 자살로 결론 났다. 이 떨어짐, 이에 대한 중력을 이야기하는 것인가 생각했다. 하지만 떨어짐은 잠깐이고 경찰서에서 경찰관과 여자의 대화만이 진행된다. 머릿속에 막연히 ‘중력’과 ‘중력의 법칙’이 무언가에 대한 물음을 희미하게 붙잡고 소설을 읽는데 두 사람의 대화속에 빨려 들어가 지켜보는 내내 긴장하게 된다. 그런데, 그런데 중력은?

   경찰관이라면 자수하는 이에 대해 인간적인 연민을 가지더라도 정확한 사항을 파악하고 적절한 조치를 취할 직업적인 의무가 있다. 그러나, 이 경찰관은 사건경위를 듣고 범죄혐의를 파악하고도 ‘절대로’ 체포하지 않겠다고 결심한다. 그리고 그 결심을 실천에 옮겨 적극적으로 여자를 설득하기 시작한다. 여자는 ‘절대로’ 10년 동안 자신의 죄의식에서 벗어난 적이 없노라며 감옥에 들어가기를, 합당한 벌을 받기를 원한다.

   오래도록 죄의식에 시달려 온 여자의 입장을 이해한다면, 경찰관은 도대체 왜 이토록 여자를 무죄로 만들기 위해 애쓰는가. 남편은 술주정뱅이에 자주 여자와 아이들을 구타했고 자살 시도로 잦은 치료를 받고 있기도 했으며 그날도 역시 창문에 매달려 자살하겠다고 외쳤기에 여자는 그럼, 소원대로 해주겠다며 남편을 밀었다고. 그러나 당시에 경찰관들에겐 남편이 자살했다고 진술했다는 이 여성의 주장에 대한 근거가 없기 때문에 더더욱 체포할 수 없다고 말할 수도 있겠다만. 그전에 우리의 경찰관은 3시간 후의 당직에서 벗어나 휴일을 맘껏 즐기고 경찰업무를 잊고자 하는 열망에 가득 차 있다. 그러니 3시간만 참으면 경찰관은 아무런 일처리를 할 필요없이 휴일을 향해 걸어나갈 수 있는 것이다.

   이런 이유라고 하더라도 질 퐁투아즈 경찰관에게 이 여자의 자백과 행동은 도대체 이해의 차원을 넘어선다. 실로 멍청하기 그지없는 결정이다. 어쨌든 남편은 아내와 자식에게 폭력을 휘두르는 망나니같은 놈이고, 그런 놈이 이 사회에 없는 것이 훨씬 좋은 일 아닌가.

 

책상 위의 텅 빈 성모마리아는 여전히 감색 의상을 걸친 채 꼿꼿한 자세로 서 있다. 그 발치에는 고전적인 윤곽을 갖춘 머리 모양 마개가 책상에 볼을 댄 채 누워 있다. 자세히 보니, 성모마리아의 한쪽 눈에 묻었던 수의와 약물 한 방울이 방금, 마치 베게처럼, 자기 머리 밑으로 미끄러져 들어온 한 장의 얼굴사진을 슬그머니 적시고 있다.

마리아가 지미를 애도하고 있는 셈이다……. 리지외 출신의 경찰관은 도대체 이 현상이 왜 일어났는지, 그 신호의 의미가 무엇인지를 알 수가 없다. 무얼 뜻하는 걸까? 그럼에도 죄지은 여자를 체포하지 말아야 하는가? p149

 

   처절하게 여자를 설득하기 위한 경찰관의 노력은 여자의 삶의 이야기를 이끌어내고 경찰관 자신의 인생을 끄집어내게끔 한다. 탈법과 타락의 비루한 제 이야기 하나하나, 낱낱이. 마치 경찰관의 자백, 고해성사 같다. 이제 체포되어야 할 사람은 경찰관인 것만 같다. 이 쉽지 않은 이야기들을 털어놓을 수 있는 것, 경찰관에게 여자의 위치는 성모마리아, 신부와 같았을 지도 모른다. 죄를 지었으나 언뜻 무결해 보이기도 하는 여자의 상태, 그 도덕심에 대해 경찰관의 자기고백이 나왔을지 모른다.

   아무리 범죄자들을 조사하고 체포하는 그런 좋지 못한 일상만을 접하는 경찰업무에 시달린다 한들 그 조서 하나를 피하기 위해 몇 시간 동안 절절하게 이야기를 내뱉는 경찰관의 이 노력이 처음엔 웃기다가 차차 경건해보이기도 한 까닭은 그래서일지도 모른다.

 

집에 돌아오자마자 침대 위에 몸을 던진 경위는, 축 늘어진 양팔을 옆구리에 붙이고 손바닥을 위로 향한 채 가만히 누워 있다. 붕대를 감은 왼손의 반지 속 어금니가 마치 작은 수도원처럼 보인다.

이제 그는 그 어떤 꿈의 기억도 지니지 않는 죽음의 형제, 깊은 잠 속에 빠져든다……. p187

 

   그 어떤 노력을 해도, 압박을 가해도, 공포를 심어줘도 여자는 물러나지 않는다. 그날 이후 여자의 온 생은 죄의식으로 가득 차 있었다. 곳곳에서 남편의 얼굴을 만났고 이제 공소시효가 얼마 남지 않았기에 더 이상 시간이 없는 것이다. 결코 여자를 떠나지 않을 죄의식이라는 중력장. 그리고 경찰이지만 경찰이라는 업무에서 벗어나고자 하는 경찰에게 되돌아오는 경찰업무라는 중력장. 그리고 그들에게 잔잔히 파동치는, 그러나 전체를 휘감는 ‘도덕’이라는 중력장. 알 수 없이 흐르는 중력이 인간의 생을 결정짓는다. 그 어떤 발버둥으로도 벗어날 수 없는 중력의 집결지는 경찰관의 손가락에 끼어진 반지가 쥐고 있는 듯하다. 수도원처럼 보이는 반지. 결국 중력의 법칙은 도덕의 또다른 이름인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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