욕망과 광기


육식이야기, 베르나르 키리니, 임호경 옮김, 문학동네, 2010.


   독특하다,라는 말에 걸맞은 베르나르 키리니의 두 번째 소설집이다. 이 작가는 여러 문학상을 수상했다고 하는데 독특한 스타일의 작가에게 주는 ‘스틸’상을 수상했다는 말에 어울린다는 생각을 갖는다. 베르나르 키리니. 이 작가를 프랑스문학계에선 환상 문학계의 대표적 작가인 보르헤스, 포 등을 잇는 작가로 거론하는 모양이다. 열네편의 단편이 수록되어 있는 「육식이야기」에는 여전히 현실과 환상을 넘나드는 작가의 스타일이 펼쳐진다.

  재밌다는 생각이 들기보다 일단, 기괴하군이라는 생각이 먼저 스쳐간다. 작품 전반의 분위기는 음산한 열대우림 속에 갇혀 있는 기분이랄까. 끝이 보이지 않는 이 길 속에서 서늘했다가 놀랐다가 나가고 싶어 했다가 포근함을 느끼기도 했다가 무엇이 튀어나올지 몰라 움츠러들기도 했다가, 별별 생각의 나래를 펼치고 있는 나 자신을 발견하게 된다. 작가의 상상력만큼이나 별개로 환상속으로 통과하게끔 하는 맛이 있다.

  베르나르 키리니의 단편은 현실에서 벌어질 개연성이 있긴 하겠지만 법적으로 문제가 되는 형태, 또는 등장인물의 절대 악과 같은 류의 이야기로 흘러가지 않는다. 당연 이상한 상황이 등장하는데 그 상황은 더 이상한 상황과 더 이상한 등장인물의 사고패턴으로 이어진다. 역시 적절한 말은 기괴하다, 정도일까. 유쾌하다는 말은 선뜻 나오지 않는다. 오히려 ‘아이구 머리야’라는 말이 나올 법하다. 이런 류의 상상이란, 이런 류의 환상이란 마법이란 단어에서 느끼는 귀엽고 유쾌하고 재밌는 종류의 환상과는 거리가 아주 멀다.

  생각해보니, 단편의 제목뿐만 아니라 단편집 전체의 이야기가 육식으로 가득찼다. 「육식이야기」는 거대 식물 이야기임에도 불구하고 작가가 굳이, 육식이야기라고 제목을 붙였는지 시간이 흐른 후에야 언뜻 알듯하다. 단편 「밀감」이 반복적으로 밀감과 오렌지를 꺼내들며 이야기해도 사그라지지 않는 강렬한 이미지, 피의 이미지와 같은 맥락일 것이다. 「밀감」은 그 껍질을 벗기고 상큼하거나 시큼하거나 달달한 과즙을 상상할 법한 이야기가 아니다. 시작부터 오렌지 주스에 피를 섞어 마시는 남자가 등장한다. 이것은 현실이라도 궁금한데, 하물며 소설이니까 적극적으로 이 남자의 사연을 궁금해 하는 이가 어떤 사연인지 물어준다. 그리하여 남자는 온몸이 오렌지 껍질로 되어 있었다는 아리따운 여인과의 만남을 이야기해준다. 오렌지 껍질을 까먹듯 그 여인과의 오렌지향 가득한 사랑을 나누지만 환상적 사랑이 지나고 난 이후에 오렌지 껍질로 가득찬 여인을 직시하게 된다면 과연 어떤 생각이 들까.

  침몰한 배에서 유출된 기름이 잔뜩 유출되어 그 덩어리로 출렁이는 바다를 찬양하는 학자도 등장한다. 기름 범벅인 바다에 대한 탁월한 찬양을 하는 자의 사고 또한 식물적이기보다는 육식의 이미지에 가깝게 느껴진다. 자신에 대한 이야기를 유독 잘 청취하는 놀라운 청력의 소유자도 등장한다. 육신이 늘어나는 주교도 등장한다.    

 「육식 이야기」속 식물학자는 식충식물에 반해 모든 것을 제껴두고 식충식물 연구에만 매달린다. 연구용으로 채취해 온 거대 파리지옥과 늘상 전투를 벌이며 살아가는 이 식물학자의 점점 더해지는 광기를 보며 조수는 식물학자를 떠나고 몇 년 후 식물학자가 의문사 했음을 전한다. 하지만 드러내지 않았을 뿐 짐작가는 범인을 가까이에 두고 있다는 걸, 잘 알고 있다.

  읽다 보면 유출된 기름냄새가 온몸을 휘감은 듯 머리가 아프다. 조금 신선한 공기를 쐬지 않으면 같이 미쳐버릴 것만 같다. 이 단편집 속에 등장하는 등장인물들처럼 광기에 빠지는 일은 욕망에 빠지는 일과 같다는 생각이 들었는데, 어떤 욕망은 내도록 머리가 지끈거리는 것이기도 하다 싶다. 욕망을 쫓는 일은 힘든 일이라는, 발목 잡힐 일이 한두가지가 아니라는 것을 생각하면 더욱 그렇다. 그러니, 완전한 욕망에 빠지는 일도 쉽지 않다. 온전히 욕망에 빠져 그 욕망을 과감하게 가감없이 발산하는 일은 더할 나위 없이 현실적인 선택인 것일까, 환상에 매몰되는 것일까. 문득, 욕망에 광기에 빠지는 일이라는 것은 신선한 공기를 쐬지 못하는 일과도 같다는 생각이 든다. 이 또한 욕망이란 옳지 않다는 이미지로 인한 생각일까. 어쨌든 육식이야기에서의 육식, 이 단편집에서의 육식이란 욕망을 욕망하는 이야기라는 머리가 지끈거리는 생각을 하며 작가의 수다스러운 이야기로부터 빠져 나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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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실 혹은 거짓의 문장

 

 첫 문장 못 쓰는 남자

 베르나르 키리니, 윤미연 옮김, 문학동네, 2012.

 

    한국의 단편은 정해진 분량을 대체로 가늠할 수 있다. 각종 공모전들이 소설의 분량을 일률적으로 정하고 있으니까. 단편이라면 원고지 몇 페이지, 책으로 몇 페이지 정도라는 것을 안다. 셜리 잭슨(뿐만 아니라 다른 나라의 단편은 이야기와 이야기를 하는 방식으로 분량이라는 것이 주어질 뿐, 한국처럼 천편일률적이진 않다)의 단편은, 분량이 자유롭다. 이것이 경향인지 최근 한국소설에도 짧은 이야기라 기획으로 책들이 출간되고 있다. 이야기는 이야기가 흘러가는 대로 나오는 것이지 특정한 분량으로 제재를 두어야 할 것은 아니긴 하다. 그래서 단편이라는 양에 길들여진 독자에겐 이야기의 분량에 가끔 당황하긴 한다.

   이런 짧은 분량의 이야기는 종종 유머와 풍자를 곁들인 경우에 자주 사용되는 것 같다. 내가 읽은 단편 소설들에서만 판단하건대 그렇다. 키리니의 작품 또한 예외는 아니어서 상당한 풍자와 유머들이 튀어나온다. 장편소설에 피에르 굴드가 나오는데 이 단편집이 키리니의 첫 출간작이었으니 피에르 굴드는 작가의 페르소나인가 싶다. 16개의 단편 곳곳에서 피에르 굴드를 만날 수 있다.

   단편집의 제목인 「첫 문장 못쓰는 남자」가 가장 인상적이다. 첫문장을 못떼는 이야기가 너무나 공감되어 요즘 유행말로 웃프게 느껴진다. 결국 첫문장을 쓰지 못하고 문장 속에 갇혀버리는 그런.

 

첫 문장, 그것이 문제였다. 수년 전부터 구상해왔던 책을 쓰기로 결심한 날, 굴드가 고민한 건 바로 그것이었다. 그는 백지를 앞에 놓고 완벽한 첫 문장을 찾느라 몇 시간을 흘려보냈다. 금방이라도 글을 써내려갈 듯이 끊임없이 만년필촉을 종이 위에 갖다대고 손목을 부드럽게 풀면서 첫 글자의 획을 그어보려 했지만, 글을 시작하기 위한 최고의 방법이 있을 거라는 확신 때문에 신경이 쓰여 매번 멈추고 말았다. 그가 앞으로 써나가게 될 모든 것은 바로 그 첫문장에서 비롯될 것이고, 따라서 첫 문장을 잘못 시작했다가는 책 전체가 망가져버릴 게 틀림없었다. p9

 

   굴드처럼 모든 문장을 쓰는 일은 어렵지만 첫문장은 유독 더 어렵게 느껴지는 것은 그것이 시작이라는 점에서 그럴 것이다. 아무 생각없이 시작을 하던 때도 많았는데 줄거리만큼이나 “문장” “첫문장”에 대한 관심도 증가한 것 같다. 이 단편에서 굴드는 첫문장을 써내기 위해 엄청나게 고심을 한다. 그래서 그는 글쓰는데 어려움을 느끼는데 결국 굴드는 작가가 되었다. 어떻게 되었느냐고. “첫 문장을 시작할 수 없어서 결국 아무 내용도 쓰지 못한 소설의 작가.”

   그럼에도 굴드는 계속 글을 쓰기 위해 노력한다. 단편집 곳곳에서 글을 쓰고 책을 출간하기 위한 피에르 굴드의 종횡무진 활약상을 만날 수 있다. 피에르 굴드는 단 한권의 책을 쓰고 영원히 글쓰기를 포기한 ‘이클립스들’에 매료되어 첫작품이자 마지막 작품을 쓰고자 하지만 쉬울 리가. 첫 문장을 못쓰는 남자 피에르 굴드가 마지막 작품 「단검에 찔린 유명인들에 관한 안내서」를 쓰고 성공하기 위해서는 누군가가 자신을 찔러야 한다는 아이러니가 있다.

   재밌고 독특하게 생각을 전개시킨 소설들을 만나다 보면 외국인들의 환상적이고 자유로운 생각의 세계들이 부럽게 느껴질 때가 있다. 이것이 개인적인 성향의 차이일 지도 모르지만 다소 ‘문화적인 영향’을 받는다는 생각이 들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야기 곳곳에서 글쓰기와 작가에 대한 정체성과 고민이 지속된 단편집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결국 더 좋은 글을 쓰기 위한 작가의 치열한 고민이 현실과 환상을 넘나드는 기괴한 이야기의 나래를 펼쳤다. 곳곳에 들어있는 피에르 굴드의 활약들이 글을 쓰기 위해 질주하는 것처럼 보였으니까.

   대부분의 작가는 거짓말하는 재능이 바닥나 이제는 진실밖에 이야기하지 못한다.

 

   진실과 거짓의 경계가 교묘하게 얽힌 이야기들을 보며 그럼에도 불구하고 계속 이야기들을 하려는 작가들이 있고 작가가 되려는 이들이 있다는 사실을 생각한다. 힘들고 어렵다는 문장들을 나열하며 이야기를 해야 한다고 느끼는 이들이 많다는 건. 거짓을 위함일까, 진실을 위함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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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료한 사고와 말


수전 손택의 말 - 파리와 뉴욕, 마흔 중반의 인터뷰

 수전 손택·조너선 콧, 마음산책, 2015


 수전 손택을 알게 된 건 수전 손택의 글을 읽어서가 아니었다. 다른 이의 책을 읽는 중에 수전 손택의 이름과 글과 책들이 수도 없이 튀어나왔다. 마침내 난 수전 손택을 알고 있다는 착각에 빠졌고 그녀의 글을 읽고 싶은 열망에 휩싸였다. 글을 읽고 나선 수전 손택의 생전에 더 많이 읽을 것을 후회했다.

  타인의 책에서 반복되어 나타났기에 수전 손택을 알게 된 처음엔 수전 손택의 글을 읽는 것에 막연한 두려움을 느꼈던 것 같은데 사실, 수전 손택의 책들은 책의 두께와 말의 무게에 긴 시간을 할애해야 한다. 소설 또한 예외는 아니어서 흥미롭게 페이지가 넘어가는 듯해도 다른 소설들에 비해 더듬거렸다.

  그에 비해 수전 손택의 사후에 나온 책들은 얼마나 쉽게 페이지가 넘어가는가 생각하면 놀랍다. 이 책 또한 인터뷰 형식이라서인지 글이 쉬이 읽혀진다. 역시나 수전 손택의 말이고 생각을 담고 있는데도 그렇다. 어쩌면 질문과 답으로 이어진 형식은 나홀로 묻고 생각하는 것보다 더 간명하게 보이기 때문일 것이다. 그러고 보니 수전 손택의 육성이 몹시도 궁금해진다. 글을 통해 생각하는 목소리가 있는데 실제 목소리는 내가 느낀 것과 너무 달라 놀란 작가들이 몇 있다. 그런 생각을 하며 내 느낌과 수전 손택의 실제의 괴리가 얼마만큼인가 알고자 하는 걸까.

  옛 사진이란 것이 항상 그렇지만, 더구나 흑백사진에서 풍기는 느낌이란 것은 사람을 참 인상적이게 만든다. 수전 손택의 젊은 시절과 그리고 생애의 마지막의 사진을 들여다보고 있으면 우습게도 타인같지가 않다. 오래 알고 있던 사람처럼 들여다본다. 안다는 말이 얼마나 허무맹랑한지 알면서도, 안다고 그렇게 느낀다.

  수전 손택의 일기에 남겨진 자신의 결점. 말이 많은 것이라는 일기가 생각난다. 말이 많다는 것은 수다스럽다는 것으로 통칭되는 경향이 강한데 그런 느낌은 없다. 하지만 글로 보는것과 또 다르니까. 1978년 파리에서의 12시간 인터뷰 전문이라고 하는데, 이때의 수전 손택의 말은 어떤 느낌일까 생각해보는데 “명료하고 권위적이고 직접적인 말투를 갖기 전에는 인터뷰 하지 않을 것”이라 선언한 후의 인터뷰로 그 완성의 결과라고 한다. 인터뷰 당시의 호흡 그대로라고 하는데도 정말이지 명료하다. 삶에 대한 확고한 자기 생각이 없다면 말로 명료하게 나와지지 않는다. 마흔 다섯의 수전 손택은 완결된 자신만의 생각을 가지고 있었다.


부분적으로는 나 자신을 변화시키기 위해서 글을 쓰거든요. 일단 한 가지 주제에 대해 다 쓰고 나면 더 이상 그 생각을 할 필요가 없도록 말이에요. 사실 글을 쓸 때는 그런 아이디어들을 없애버리기 위해서 하는 거죠. 대중을 경멸하는 소리로 들릴지도 모르겠네요. 왜냐하면 제가 그런 아이디어들을 없애버린다는 건 내가 믿는 바로서―글을 쓸 때는 물론 실제로도 믿죠―그걸 전달했다는 뜻이거든요. 그러나 다 쓰고 나면 제가 다른 관점으로 옮겨 가기 때문에 더 이상 믿지 않는 생각들이 되어버리는 거예요. 그래서 훨씬 더 복잡해지죠……. 아니, 어쩌면 더 단순해지는 걸지도 모르지만요. 그런 얘기에 관심이 있을지 모르겠는데, 실제로 글을 쓰고 나면 전 이미 어디 다른 곳으로 옮겨 간 뒤랍니다. p177~178


  수전 손택식의 사고와 글쓰기는 내게 유사점을 느끼게 하면서도 상당한 거리감 또한 준다. 이것은 여전한 사고속에 머물러 자기확신이 없는 나와 수전 손택의 차이점일까. 또한 지성의 한없는 부족의 이유도 있겠다. 아무도 내게 인터뷰하자고 조르지는 않을 테지만 나 역시 수전 손택처럼 생각들이 좀더 명료해질 때까진 말을 남발하는 일은 하지 않을 테다. 하긴 자신이 ‘말’을 함으로써 그것이 공표되었기에 해야 한다는 압력을 느낌으로써 일을 진행한다고 한 사람이 있었다. 반면 나는 내가 그것을 행한 이후에나 말을 해애 한다는 강박을 느끼긴 했는데, 그런 점에서 글은 또 다른 것 같다. 글이란 생각을 정리하는 과정 중에 있는 것도 같다. 말이란 조심스럽고 글또한 조심스럽지만 어떤 형태로든 모두가 생각을 정리하는 도구라는 생각도 하게 된다. 일상은 생각의 연속이니까.

  누군가의 질문에 “잘 모르겠어요” “글쎄요” “생각해 본 적이…” 등등의 말을 하고 있는 나를 상상해본다. 이것참 삶에서 내 확고한 생각하나 없다는 건 슬픈 일이라는, 나 자신에게 미안해야 할 일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 수전 손택처럼 지성을 바탕으로 한 강렬하고 열정적인 행동력이 주어진다면 참 좋을 텐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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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쓰기의 힘


다시 태어나다- 수전 손택의 일기와 노트 1947-1963


수잔 손택 / 데이비드 리프 엮음, 김선형 옮김, 이후, 2013.


 타인의 일기를 읽는 내밀함을 데이비드 리프는 허락했다. 자신의 글이 아니기에 결정이 쉬웠을까 잠시 생각해보지만 어머니의 일기엔 아들의 이야기가 필히 없을 수는 없다. 그러니 그 자신의 이야기도 함께다. 어머니의 일기를 아들은 공개했다. 어머니는 이미 유명인이었고 어머니의 삶과 글, 생각은 어머니의 입과 글로 사람들에게 전해졌다. 그러나 일기란 그와는 조금 다른 느낌과 형식을 갖게 되는데, 아들에게 어머니가 사망 전 일기의 존재를 알린 것을 아들은 어떻게 받아들였을까. 글을 읽다 보면 필연적으로 자신의 존재와 모든 면면들이 나타나는 것을 앎에도 아들은 어머니의 글을 출판했다. 그 자신, 어머니 수잔 손택의 아들이 아니라 저술가, 편집자로서 출간에 관여했음을 알 수 있다. 이런 저런 생각들을 해보면 그만큼 많은 이들이 수전 손택의 하나하나에 열광하고 있다는 말과도 같아 보인다.

  이 책엔 14세부터 30세 때의 수전 손택의 일기가 수록되어 있다. 전생애에 걸쳐 일기를 썼고 그 기록은 많다는데 이 유년과 청춘의 시기에는 어린 시절부터 자의식 강하고 지성적인 수전 손택을 만나게 된다. 아니면 그것은 그 나이 또래가 갖는 그런 감수성이라고 해야 할까. 좀더 깊고 처절한 감수성. 낙서처럼 끄적인 글귀 하나하나가 사춘기 소녀의 고뇌에 찬 외침이겠지만 어쩐지 그의 아들 말대로 자신감에 차 보인다. 또다른 표현, 자아도취라….

 어린 시절부터 수전은 많은 문학책을 읽고 그에 관한 생각들을 기록했다. 문학에 대한 감수성, 지성, 글쓰기에 대한 열망, 자아에 대한 생각, 그리고 성적 정체성과 연애, 결혼에 대한 환멸 등등등. 수전 손택의 동성애 성향을 좀더 이르게 자각했다는 사실을 알았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어린 나이에 결혼한 그녀이기에 결혼에 대한 환멸은 당연한 수순이 아니었나 싶기도 하다. 당시 17세는 이른 결혼이 아니었을까. 그리고 가정이지만 결혼 생활이 서로의 갈등과 다툼으로 귀결되지 않았다면 수전 손택의 삶은, 생각들은 다르게 영향을 받았을까 궁금해지기도 한다. 어쨌든 지성과 감수성의 홍수 속에 가득찬 사람이구나 싶었다.


    “일기는 자아에 대한 나의 이해를 담는 매체다. 일기는 나를 감정적이고 정신적으로 독립적인 존재로 제시한다. 따라서 그것은 그저 매일의 사실적인 삶을 기록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그 대안을 제시한다.”  -1957년 12월 31일


  일기가 사실적 삶의 기록이긴 하지만 그 사실로부터 자신을 이해하고 대안을 제시하는 것이라 수전의 이 고백엔 평생 수전에게 따라다니는 동성애에 대한 불편한 시선이 담겨 있다. 성정체성, 동성애에 대한 자신의 이해를 위해 그리고 그 문제를 어떻게 할 것인가가 이 시절의 일기 속엔 가득 차 있다. 아마도 그 때문에 삶의 기록이기보다는 자신에 대한 이해이고 대안의 제시라는 고민의 기록이 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그래, 수전 스스로 해결해야 할 문제다. 이 사회는 이성애자를 정상으로 간주하고 동성애를 비정상적인 것이라 간주하니까, 어린 소녀에게 그리고 결혼을 한 여자에게는 동성을 향한 연정들이 자아를 혼란스럽게 만드는 요인이 되었을 것이다. 이 일기들엔 그러한 언어들이 해방구처럼 쏟아져 있다.


오르가슴의 도래와 함께 내 인생이 바뀌었다. 나는 해방되었다. 하지만 그런 식의 이야기는 적절하지 않다. 그보다 더 중요한 건, 나는 더 협소해졌고 가능성들은 봉쇄되었으며 그 덕분에 대안들이 명료하고 날카로워졌다. 나는 이제 더 이상 무한하지 않다. 나는 무無다.

섹슈얼리티는 패러다임이다. 예전에 내 섹슈얼리티는 수평적이었다. 무한한 분화가 가능한 무한한 선이었다. 이제 내 섹슈얼리티는 수직적이다. 위로 올라가 넘어가 버린, 어쩌면 무無. p282


  수많은 일기를 썼다는 수전 손택. 그 일기들이 대안이라면, 그녀 스스로 만든 대안은 무엇이었을까. 그것은 그녀가 고백하듯이 그리고 보여주었듯이 글쓰기로 나타난다.


글을 쓰고자 하는 나의 욕망은 내 동성애와 연관이 있다. 나는 사회가 나를 향해 겨누고 있는 무기에 맞서기 위해 무기가 될 만한 정체성이 필요하다. 

그게 내 동성애를 정당화해 주지는 않는다. 다만―내 느낌이지만―일종의 면허를 발급해 준다. p286

 

  수전의 치열한 글쓰기가 동성애 욕망의 반동형성이라 생각한다면 약간 김이 새려 하지만 무엇이든 어떤 욕망은 이룰 수 없는 욕망에 반하여 형성되는 것이니까. 그리고 그렇다고 그것이 전적으로 모두 동성애로 인해서는 아니기도 하고.

  어쨌든 수전에게 있어 이 동성애에 대한 욕망이 자신을 보다 새롭게 자각하고 인식하는 힘이 되었다는 점은 중요하다. 그리고 그 욕망을 사회가 바라보는 눈 사이에서 매우 적절히, 아니 그 자신은 괴로웠을지 모르지만, 조화시키고 있지 않았나 싶다. 단순히 생각하면 이성애자들이 연인과 헤어지고 나면 늘 작가가 된다고 하지 않던가. 그런 측면으로 수전 손택을 보게 된다. 마찬가지로 나의 글의 바탕이 실패한 연애 경험이었어라고 말하면 호기심과 김이 빠지는 것이 열렬한 투쟁가들에게 느끼는 더 큰 대의를 말하리라 생각해서인지 모른다. 사실, 더 큰 대의라는 말도 웃기거니와 모든 인간은 제 삶을 살아내는 거 자채에서 벌써 치열함을 내장하고 있다.

  또한 욕망에 좌절한 수많은 이들이 반사회적인 형태로 욕망을 해소하거나 좌절된 욕망에 대한 분노를 펴는 것을 생각한다면 수전 손택의 욕망의 해결 방법, 그 자신의 대안은 매우 긍정적인 형상을 보여준다.

  그러고 보니 누군가가 그랬다. 책을 한번 쓴다는 것은 다시 태어나는 것과 같다고. 수전 손택은 수없이 달라질 수 있었던 또다른 요인이 여기에 있는 모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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떨림


문학은 자유다 At The Same Time, 수잔 손택 , 이후, 2007.


  동시에At the same time와 문학은 자유다라는 제목을 보면서 나라면 이 책에 어떤 제목을 붙였을까 생각한다. 저자가 아니니, 편집자의 입장에서라도 말이다. 문학은 자유다라는 제목은 이 책이 문학 관련 내용이 가득찬 것으로 느끼게 한다. 반면 동시에라는 제목은 그 내용을 예상하는데 어려움을 준다.

  이 책은 저자 수잔 손택의 마지막 생애에 쓴 평론과 연설을 모은 책이다. 소설가로 평론가로 에세이스트로 이름을 날렸던 수잔 손택의 글들이 빛을 발한다. 암투병 중에도 수잔 손택 자신이 직접 구상과 계획으로 쓰고 정리한 차례라고 한다. 총3부로 1부는 문학평론으로 문학작품에 대한 해설,  2부는 미국의 9·11 테러 직후의 글과 포로수용소 학대 등 수잔 손택이 관심을 둔 정치사회문제에 대한 글, 3부는 수잔 손택의 문학에 관한 연설들을 모았다.

 미국 편집자는 동시에를 한국 편집자는 문학은 자유다라는 제목을 선택했다. 한국판은 스스로 ‘소설가’로 불리기를 원했던 손택의 뜻을 담았다 했다. 미국판은 “이 책의 다양성과, 손택의 문학세계와 정치 활동, 미학과 윤리학, 내적 삶과 외적 삶의 분리 불가능성에 대한 경의의 뜻으로.”라고 제목 선정의 이유를 밝혔다.

  미국 편집자의 말이 길어서가 아니라, 동시에라는 제목에 더 끌린 것은 수잔 손택에 대한 인상 때문이다. 수잔 손택은 평론가, 소설가, 에세이스트 등 작가로서 명성이 드높다. 하지만 수잔 손택은 또한 정치사회문제에 대한 참여의식이 높고 실제 활동가였다. 그 활동가적인 사회참여의식을 생각하면 동시에란 제목이 수잔 손택의 모든 것을 더 적절하게 담는 느낌이다. 단지 수잔 손택이 쓴 글과 여러 뉴스, 타인의 글을 통해서 수잔 손택을 접할 수밖에 없는데, 수잔 손택은 상당히 매력적이다. 수잔 손택의 지적이고 활동적인 모든 면모가 부러움과 경외감을 안겨준다. 그래서 수잔 손택의 글을 읽을 때면, 뭔가 모르게 떨린다.


자기 수양 자체에 가치가 있다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이타주의, 다른 사람에 대한 배려라는 기준이 없는 문화(문화라는 단어는 표준적인 의미로 썼습니다.)가 있다고도 생각하지 않습니다. 인간의 삶이란 어떤 것인가에 대한 우리의 감각을 확장하는 것은 가치가 있다고 믿습니다. 처음에는 독자로서, 나중에는 작가로서 문학이라는 기획에 제가 몰두하게 된 것은 문학이 다른 자아, 다른 영역, 다른 꿈, 다른 언어, 다른 관심사에 대한 공감의 확장이기 때문입니다. p202


  수잔 손택 스스로 문학인이라 불리기를 원했다고 하는데 수잔 손택의 ‘문학’은 사회문제, 사회참여와 떨어질 수 없는 관계를 가지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그렇기에 소설가이든 평론가이든, 에세이스트이든 글을 쓰는 작가로서 수잔 손택의 활동은 끊임없는 사회활동의 연장선이자 상호작용이다. 수잔 손택의 문학관이 곧 그가 쓴 글과 유리될 수 없음을 보여준다. 


저는 소설이나 희곡을 쓰는 작가를 당연히 도덕적 행위자로 생각합니다. 실제로 작가에 대한 이런 개념은 나딘 고디머의 문학관과 제 것 사이의 여러 연결점 가운데 하나지요. 저는 나딘 고디머도 그렇게 생각한다고 보는데, 문학에 매달리는 소설가는 도덕적 문제를 고심하는 사람이라고 생각합니다. 무엇이 옳고 그른가, 어떤 것이 낫고 어떤 것이 나쁜가, 혐오스러운 것과 존경스러운 것은 어떤 것인가, 개탄할 일은 무엇이고 기뻐할 것은 무엇이고 인정할 것은 무엇인가. 직접적으로 생경하게 교훈을 주는 것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진지한 소설가는 도덕적 문제를 구체적으로 생각합니다. 이야기를 들려주는 것이지요. p278~279


  수잔 손택에게 느끼는 동경이 그저 지식인으로서 활동가로서 그녀의 외적인, 보여지는 측면에 대한 것은 아닌가라는 생각도 하지만, 난 그녀의 삶 전체에 대한 동경에 빠져 있진 않다. 그녀의 삶은 오로지 그녀의 삶인 것이고 현재 세상에 있지 않은 작가라는데 대한 안타까움이 있을 뿐. 그 삶에서 느껴지는 열정에 대한 동경이 더 강하다고 할까. 그러나 이런 글들을 만나면 같은 생각을 마주할 때의 반가움, 통찰력 있는 예리한 시선, 거침없는 비판들에 주체할 수 없는 떨림을 갖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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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나무 2017-04-07 09:4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2년 전인가 한 출판사가 주최가 되어 수전 손택의 <수전 손택에 관하여(REGARDING SUSAN SONTAG)>란 다큐영화를 볼 기회가 있었습니다. 그 다큐를 통해 미처 몰랐던 수전 손택의 민낯이라고 해야 하나 일상을 보게 되었고 그 덕분에 그의 글을 더 잘 이해할 수 있게 된 계기가 되었던 것같아요. 간만에 저도 이 책을 다시 읽어보고 싶어집니다. ^^

모시빛 2017-04-07 23:23   좋아요 1 | URL
마침 수전 손택의 목소리가 넘 궁금하던 차였는데 이런 다큐가 있군요.
한번 찾아봐야겠습니다. 다큐를 보고 나면 글만 볼 때와는 느낌이 또다를 것 같네요. 막 설레지네요. 또 다른 이해의 문을 만난 것 같아 좋습니다. 감사합니다.
다큐를 꼭 찾아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