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자르 사전 열린책들 세계문학 183
밀로라드 파비치 지음, 신현철 옮김 / 열린책들 / 2011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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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로의 즐거움


하자르 사전,  밀로라드 파비치.


  의도치 않게 미로에 들어섰다가 미로를 빠져나온 쾌감에 다시 미로를 들어갔다. 한번에 그치지 않고 또다시 미로 속으로 들어가고 싶은 기분. 이것이 하자르 사전에 대한 느낌이다.

 신화와 종교, 역사, 우화가 섞인 듯한 하자르 사전의 묘미는 이야기와 더불어 이야기를 담고 있는 글의 형식이 정점으로 이끈다. 각각의 이야기가 조금 더 큰 줄기와 맞물리고 그것은 다시 더 큰 줄기 안으로 이어지며 마침내 모든 줄기들이 연결되어 있는 것을 발견하게 될 때의 즐거움이란. 작가는 독자의 새로운 즐거움에 관대했음이 분명하다. 이토록 새로운 독서법을 위한 글쓰기에 힘을 쏟았으니 말이다.

  이야기의 큰 줄기는 간단하다. 하자르 민족의 종교 개종에 관한 이야기다. 하지만 여기에서 파생한 이야기는 1982년의 이스탄불 킹스턴 호텔의 살인사건으로까지 이어진다. 등장인물 하나하나에 연결지어 보면 이야기의 갈래가 많아서 책을 놓을 틈이 없다. 지금은 사라진 하자르 민족 자체에 대한 궁금증, 하자르 논쟁 결과에 대한 궁금증, 책 속에 등장하는 꿈사냥꾼에 관한 기묘한 이야기, 그리고 악마들의 이야기가 흥미롭게 펼쳐진다.

  이야기의 촉발은 이렇다. 하자르 민족의 군주가 어느날 꿈을 꾸고 난 뒤 기독교, 이슬람교, 유대교를 대표하는 철학자들에게 꿈의 의미를 묻는다. 그리고선 가장 마음에 드는 해석을 한 사람의 종교로 개종하겠다고 발표한 것이다. 책 속에선 어느 종교로 개종하였는가에 대한 이야기는 명시하지 않았다. 그러나 각각의 대표들이 자기들 나라의 종교로 개종하였다고 하고 있으니 이들 세 명의 현자들이 꿈에 관한 열띤 해석과 토론을 벌였음은 분명하다. 그 이야기, 각각의 대표자의 관점에서 풀어 나간 하자르 개종에 관한 논쟁은 그들 나라의 입장에서 쓰여진다. 하나의 사건을 두고서 주장과 사실이 맞물린 세 가지 버전의 이야기가 있는 것이다.

  하자르 논쟁의 당사자들과 하자르 논쟁에 대해 서술한 기록자가 다른 이 내용은 하자르 사전이란 이름 아래 기독교, 이슬람교, 유대교의 레드북, 그린북, 옐로북으로 나뉜다. 지금은 사라진 『하자르 사전』이지만 하자르 논쟁이 시작된 후부터 현재까지, 하자르 민족과 하자르 논쟁에 대해 관심을 갖는 수많은 이들이 있다. 작가는 처음 편찬자가 누구인지, 하자르 논쟁에 참여한 자, 그것을 기록한 자, 책을 만든 자, 하자르 민족에 대해 연구하는 자 등 수많은 등장인물들을 알파벳 순으로 정리하여 하자르 사전의 이야기를 재현해 냈다.

  하자르 민족의 언어는 소멸되었으나 하자르 민족은 존재하였다. 그러니 이 사실적인 사건에 작가는 상상력을 곁들여 사전소설로서 모험과 미스터리를 전개시킨다. 아무리 가보지 않은 세계라 한들, 꿈 사냥꾼의 존재나 지옥에서 온 악마나 한두명이 아닌 시공간을 초월한 인물들의 이야기를 역사적 실제로 믿기엔 난 너무 커버렸기에 그것을 작가의 탁월한 상상력이 만들어낸 ‘환상소설’이라며 놀라워한다. 그럼에도 문득 문득, 작가의 상상력이 실제인 것만 같은 착각을 한다.

  거듭 읽어도 미진한 느낌이 드는 이 퍼즐같은 이야기에 작가는 하나를 더 추가한다. 이 사전이 남성판과 여성판으로 나누어진다는. 이 복잡한 이야기가 하나 더 있다는 이야기 끝에 하나의 사실을 알게 된다. 그 판본의 차이는 10줄이 채 안되는 문단이라는. 이 서로의 차이가 나타내는 바는 무언가 또한 심오하게 들어가게 되는데, 작가는 이러한 판본에 대해 독특한 의사를 표함으로써 유쾌하기도 하며 김빠지게(?) 만들기도 한다.

  하자르는 세 개의 종교를 둘러싼 논쟁이 이루어졌는데 스페인에서도 세 개의 종교가 공존했던 시기가 있다. 12세기의 스페인의 코르도바. 이때엔 잠시이긴 하지만 기독교와 유대교와 이슬람교가 조화를 이루었다. 곧 개종과 종교박해가 이루어졌지만. 이러한 실제의 상황에 더해 모험과 살인 사건이 더해지며 『절대적 영원에 대한 논고』를 찾아 가는 소설이 자크 아탈리의 『깨어 있는 자들의 나라』이다. 하자르 사전을 읽으며 이 책이 생각난 것은 이러한 유사성과 그 분위기 때문이다. 자크 아탈리의 소설에서도 그랬듯 최종적인 승리는 유대교인들의 몫인 모양이다. 최근의 연구는 하자르 민족이 유대교로 개종했다고 이야기하고 있다. 그리고 하자르 민족의 소멸이 이 개종과도 관계된다고도 한다.

  하자르 사전은 여러 가지로 생각들을 뻗게 한다. 소설의 이야기를 찾아나가는 것뿐만이 아니라 언어와 종교와 민족에 대해서도. 또한 죽음에 대해서도 마찬가지다. 하자르라는 나라는 자신만의 언어와 종교를 이어가지 못했다. 소설 속에서 나타난 하자르인들은 그들 나라의 언어를 사용하는 것을 부끄러워했다. 그랬기에 그 언어가 소멸된 것일까. 아니면 하자르 민족 자체가 힘이 없는 것이었을까. 이 이야기를 그대로 믿는다면 하자르 군주는 꿈을 이유로 종교를 선택하려 할 때 일찌감치 제 나라의 종교는 배제시켰다. 하자르 민족의 종교에서 말하는 꿈의 의미는 들어볼 생각조차 없었던 것일 테니.

  역사는 승리자의 기록이라고 했던가. 책을 읽으며 일찌감치 유대교가 승리했다는 느낌이 들었기에 꿈 해석에 대한 각 나라의 대표들의 해석을 거듭 읽었다. 하자르 군주는 어디에 끌렸을까, 그가 결정짓도록 한 것은 무엇일까를 생각하며.

  어떤 생각의 갈래들은 너무도 뛰쳐나와서 이 애들을 끌어모아 정리할 새가 없다. 물론 명징한 하나로 귀결되지도 않을 것이다. 하자르 사전이 대표적이다. 다만, 명쾌하게 말할 수 있는 것은 이 책은 외국어를 공부하며 반복해서 뒤적여야 하는 사전처럼, 반복해서 들여다볼 수밖에 없겠다는 것이다. 그리고 이 작가의 글쓰기로 인한 새로운 책읽기는 아주, 마음에 든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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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멸 풍경

 

  모멸감 - 굴욕과 존엄의 감정사회학

   김찬호, 유주환, 문학과지성사, 2014.

 

    한 해를 살아가면서 수많은 감정 스펙트럼을 경험하지만 2016년 한 해에 끝자락에 걸린 최고의 단어는 ‘자괴감’일 것이다. 그 자괴감을 아래로 내리고 오래도록 한국사회가 한국인에게 안겨준 감정은 모멸감이다. 자괴감마저도 모멸감 후에 오는 감정일 테니까. 모멸이 만연된 한국사회에서 이 책이 가져다 준 성과라면, 거듭된 모멸의 현장을 맞닥뜨리는 거랄까. 모멸은 모멸감을 낳는다. 거침없는 모멸의 현장은, 오래도록 한국사회가 그것을 당연시해왔다는 것을 반증한다. 저자는 감정이란 일정한 사회문화적 조건 속에 형성된 마음의 습관이라 말한다. 그래서, 모멸감에 대해 이해하는 것은 모멸받지 않는 생을 위한 사회문화의 모습을 그릴 수 있는 기회가 될 수 있을까. 적어도 저자는 “감정의 행복을 도모하는 문화”를 구상하기를 바란다.

   이를 위해 저자는 모멸감의 기본적 속성과 그 감정의 뿌리인 수치에 대해 먼저 살펴보는데 수치심이 사회통합과 자아파괴라는 양면성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모욕이 바로 이 수치심의 촉발제이다. 이 모욕이 삶과 인간관계를 왜곡하고 폭력하고 있는 사례에 대해 저자는 무수히 보여준다.

   이 모멸 만연 사회에 대해 누구나 같은 진단을 내릴 것이다. 한국사회의 경쟁구조. 불균형 시스템, 경제성장을 강조하지만 분배정의는 나 몰라라 하는 사회. 학력은 높지만 지성은 쇠퇴하는, 혹독한 경쟁에서 치러야 하는 사회적 부작용과 개인적 피로감이 그 원인이리라. 저자는 말한다. 사소한 차이들에 집착하면서 경쟁에 민감한 한국인은 그렇기에 모멸을 일상화한다. 단지 사람만이 아니라 제도와 문화도 모멸감을 준다. 열등한 집단에 대한 범주화, 비인격적 관료제도 들에서 쉽게 찾아 볼 수 있다. 문자해고통보, 갑을관계 등등 모욕할 거리에 대해서 너무도 쉽게 찾아낸다. 무엇마다 ‘충’을 붙이며 비하하는 것에서도 그렇다.

   저자는 이것이 시민사회와 인권의식의 미성숙때문이라고 말한다. 한국은 너무도 ‘경제성장’ 위주로 사회를 이끌어 나갔다. 늘 경제성장을 외치고 기치로 내걸지만, 언제 경제가 정말로 성장한 적이 있던가. 그러면서 늘 인권과 시민사회 문화의 성장에 대해 외면한다. 어쨌든 저자는, 우리 사회는 모욕의 실체를 규명하고 모멸감을 성찰하는 언어가 빈곤하다고 말한다.

 

수치심이 다른 사람들의 눈에 비친 자기의 모습에서 유발되는 감정이라면, 모욕감은 다른 사람이 자기를 대하는 태도나 방식에서 느껴지는 감정이다. 따라서 수치심에는 죄책감이나 미안함이 섞일 수도 있지만, 모욕감은 전혀 그렇지 않다. 오히려 모욕감을 유발한 사람이나 집단에 대해서 분노나 원한 같은 감정을 갖게 된다. p64

 

   언어가 생각과 문화를 담아낸다고 할 때 한국 사회에선 무형의 폭력에 대해 둔감하다. 한국인은 타인을 모욕하는 말을 쉽게 내뱉고 또한 타인의 시선과 평가에 과민하다. 과시적이며 인정 욕구 또한 강하다. 심지어 악플 반응에서 기꺼이 즐거움을 느끼려 한다. 갈수록 만면해지는 개인주의와 인종주의 또한 모멸을 가하는 원인이 되고 있다. 모멸은 사람을 비하하는 것, 인간으로서의 존엄성을 존중하지 않는 것이다. 그렇기에 모멸감을 느끼는 순간, 조롱과 멸시와 차별과 오해와 동정의 시선속에서 살인충동을 느끼게 되는 것이다.

   사람을 사람답게 존중해야 한다고 당연히 말하고 중요성을 안다. 하지만 현실은 그렇지 않다. 우리 모두가 행복한 사회를 위하여, 행복한 감정을 영위하고 살기 위해서 정말 필요한 것은 무엇일까. 저자는 자존감의 중요성을 강조한다.

 

인간에게 생명보다 중요한 것이 자존감이다. 품위를 훼손당했다고 생각할 때, 목숨을 걸고 보복하거나 그것을 회복하려고 몸부림친다. 아니면 삶의 의욕을 잃고 무기력 상태에 빠지거나 극단적인 선택을 하기도 한다. 그런 일이 일어나지 않거나 일어났을 때 적절하게 대응하는 사회를 가리켜, 철학자 아비샤이 마갈릿은 ‘품위 있는 사회’라고 말한다. 정확한 정의를 내리자면 ‘구성원들이 자기가 모욕당했다고 간주할 만한 이유가 있는 조건에 맞서 싸우는 사회, 또는 그럴 만한 이유를 제공하지 않는 사회’다. p210

 

   자존감이 향상될 수 있기 위해서는 ‘감수성’이 필요하다고 말한다. 저자는 ‘모욕 감수성’을 길러야 한다고 제안한다. 이러한 담론을 만들고 사람들의 성찰을 이끌어낸 운동과 정책이 필요하다고 말한다. 타인을 동등한 인격체로 보지 않는 습관화된 문화에 대한 제동이 필요하다고 말한다.

   나아가 인간의 자존감이 정체성이 사회적 지위와 동급으로 삼는다면 자존심이 쉽게 무너질 수 있는 이유가 된다. 그렇기에 회복 탄력성이 강한 긍정적 자아존중감을 형성할 필요가 있다. 또한 우리의 행복감을 우월감과 동일시하는 것도 지양해야 할 부분이다. 마치 행복강박관념자인 듯 행복에 집착하고 살지만 그것을 잘 들여다보면 타인과 비교한 우월감을 행복으로 인식하고 있다. 하지만 이것이 곧 불행의 원천이 된다는 것일 인식해야 한다.

 

모멸감을 줄이려면 이러한 문화와 사회 풍토를 바꿔가야 한다. 가치의 다원화가 핵심이다. 인간과 삶을 바라보는 시야를 여러 차원으로 틔워야 한다. 그럼으로써 잘난 사람과 못난 사람, 평범함과 비범함을 나누는 기준 자체를 상대화하는 것이다. 한편으로 인간이라면 모두가 지니고 있는 보편적인 바탕과 존엄함에 눈을 떠야 하고, 다른 한편으로 저마다 지니고 있는 다양한 잠재력이 개발되고 꽃피울 수 있는 기회가 열려야 한다. 이를 위해서는 나를 있는 그대로 승인해주면서 도전과 성취를 북돋아주는 관계와 공동체가 다양하게 형성되어야 한다. p305~306

 

   결국 개인의 노력에서 끝나는 것이 아니다. 개인 하나의 변화로 행복해줄 수 있기도 하다. 자신 스스로의 마음가짐을 바꿈으로써 변화를 이끌어내는 것도 좋다 그래 좋다. 그러나 언제나 무너질 수 있는 토대속에서 이 행복감을 유지시키기 위해서는 더한 노력이 필요한 것이다. 그렇기에 개인의 변화는 사회의 변화와 함께 나아가야 한다. 개인의 변화가 사회의 변화를 이끌어 간다. 사회의 변화가 개인의 보다 많은 변화를 이끌어 낼 수 있다. 모든 것은 사회다. 그 사회를 만든 것도 개개인의 사람이다. 다시 이 상호관계의 작용을 생각하며 ‘나 혼자’ 만의 변화가 아니라 함께하는 문화를 만들어가는 것이 필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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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대 희랍.로마의 분노론 (반양장) - 분노하는 인간, 호모 이라쿤두스 연구
손병석 지음 / 바다출판사 / 2014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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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모 이라둔쿠스에게 박수를


고대 희랍·로마의 분노론 : 분노하는 인간, 호모 이라쿤두스(Homo Iracundus) 연구


정의로운 분노가 부정되는 사회는 고대 희랍인들이 말하는 것처럼, 자유인인 아닌 노예들의 사회다. p542


  오래도록, 이러한 상태에 놓인 사회에 살고 있다. 차라리 신화속 야만의 사회가 질서있고 더 정의롭게 느껴질 만큼이다. 분노란 정의롭지 못함에서 기인하다는 생각을 갖기에 분노의 긍정성에 높은 점수를 부여한다. 그러나 사회는, 아니 정확히 권력은 체제에, 권력에 반한 분노를 평가절하하며 위험 요소로 ‘처리’한다. 그렇다. 권력에 의해 분노는 늘 처리되어야 할 대상이 되었다.

  분노하는 인간, 호모 이라쿤두스(Homo Iracundus)여 일어나라!

  

  『고대 희랍·로마의 분노론』은 제목 그대로 고대 희랍과 로마의 철학자들에게서, 신화에서 배우는 분노에 대한 연구다. 왜 수많은 인간 감정 중에서 분노를 끌어왔는가. 그것은 분노가 인간의 삶에 영향을 미치는 중요한 감정이기 때문이다. 그것은 인간의 영혼, 인간 본성을 이해하는 통로이다. 물론 분노의 결과가 폭력으로 나타나기도 하지만 “부당함에 대한 영혼의 분노를 느끼지 못한다면 그 사회는 부정의만 만연된다”는 점에서 아주 자연스러운 감정이다. 다만 분노가 이성의 통제를 벗어난다면 그것은 자연적 분노로 보기는 어렵다고 저자는 말한다. 분노에 대해 우리가 느끼는 바가 저자와 같을 것이다. 통제를 벗어난 개인적 분노가 부당함에 대한 분노가 지극히 자연스러운 것이며 필수적인 것이라고 인식하는 것, 그러한 점을 알고 있는 우리는 이 책에서 이 자연스러운 분노라는 감정에 대해서 고대의 철학자들의 책들을 통해서 다시 한번 확인하게 되는 것이다.

  이를 위해 저자가 선택한 텍스트는 호메로스의 『일리아스』와 『오뒷세이아』속 영웅, 그리스 신화 속 프로메테우스와 에뤼뉘에스, 철학자 소크라테스, 플라톤, 아리스토텔레스, 스토아학파, 에피쿠로스 학파에 관한 내용을 텍스트로 정한다. 이들 텍스트를 통해 분노가 무엇인지, 분노의 통제와 제거는 가능한지를 탐구한다.

  사회·정치적으로 ‘분노’의 발현에 대해 살펴보기 위해 이 책을 들었지만 이것 외에 텍스트를 통해 신들과 영웅들의 ‘분노’를 보는 것도 충분한 재미가 있다. 가령 전쟁 중의 아킬레우스의 분노의 측면을 자연스러운 것으로 본다. 아킬레우스는 자신의 전리품인 브리세우스를 빼앗기고 분노한다. 긴박한 상황에서 그 일에 대한 분노로 더 큰 문제를 초래하는 아킬레우스의 분노는 (현재의 눈으로 보건대 쪼잔한, 미친 x 소리가 나오게 하지만) 영웅시대 명예를 중시하는 사회에서 명예 박탈에 의한 것으로 본다. 그렇기에 아킬레우스의 분노는 그것이 비록 공동체 전체의 비극을 야기하게 되었긴 하지만 당시의 사회에서는 적합한 감정의 표출이라고 말한다.   

  잦은 분노를 하는 복수의 여신들의 분노에 대한 해석, 그리스 신화에서 악녀로 평가받는 메데이아의 복수에 대한 해석 또한 흥미있다. 최근의 신화해석이나 인문학 책들에서 메데이아에 대한 시선을 다르게 보는 것이 제법 있긴 하다. 이 책에서도 메데이아의 분노에 대해 이렇게 이야기한다.


메데이아의 분노는 여성에게 남성과의 결혼은 불평등한 조건 하에서 이루어짐으로써 여성의 불평등과 부자유에 대한 항변을 대변한다. 여성은 아리스토텔레스가 말하는 것처럼 일생에 걸쳐 가정에서만 활동이 이루어진다. …메데이아는 여성의 목소리가 공적 영역에서는 침묵당하고 있으며, 그렇기 때문에 여성은 온전한 의미의 자율적이며 평등한 존재가 아님을 항변하는 상징적 인물인 것이다. p374


  이 책에선 사회·정치적 맥락에서의 분노와 개인적 차원의 분노의 결과에 주목하면서 공적인 영역에서의 분노의 긍정적 기능이 있음을 명확히 한다. 또한 감정이 인간성에 대한 이해를 더욱 깊이 있게 해준다고 말한다. 그렇기에 특히 분노에 대한 부정적 평가에 대해(이러한 평가는 주로 세네카 학파의 주장이었다) 바로잡고 우리가 더 나아질 수 있는 방향, 즉 더 행복해 질 수 있는 방법으로 분노에 대해 다루어야 한다고 제안한다.

 

분노는 잠들어 있는 공동체를 깨울 수 있는 계몽된 영혼의 외침이 될 수 있는 것이다. 따라서 한 사회가 보다 더 나은 공동체로 거듭나기 위해서는 그 구성원들의 분노에 눈을 감거나 눈을 돌리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다. 정당한 분노에 눈을 감는 사회는 곧 그 사회의 불의와 부정 그리고 도덕적 타락을 용인하는 사회이기 때문이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기뻐해야 할 때 기뻐할 수 있어야 하는 것처럼, 분노해야 될 때 분노할 수 있어야 한다.p542


  지속적인 촛불혁명에서 나타난 바는 국민들은 분노해야 될 때 분노했다. 최대한 정의로운 분노를 구가할 줄 아는 사람들이었다. 그러나 여기에서 또다시 드러난 바는 국민들은 바르게 분노할 줄 아는데 ‘권력자’들은 이 분노를 이해하는 방식이 정의롭지 못하다는 것이다. 오랫동안 답습해온 그대로의 사고로만 ‘분노를 바라보고 처리한다’. 최대한 자신에게 유리한 해석을 끌어들이고 역시나 평가절하하며 ‘부정의한 분노’라는 ‘특정인의 분노’라는 프레임을 씌운다. 그러니까 결국 분노에 대해 배워야 할 이들은 일반 국민들이 아닌 것이다.

  사회·정치적인 맥락에서의 분노의 의미에 대해 배우고 깨달아야 할 사람은 언제나 ‘권력을 쥔 자“의 몫이다. 그 권력을 국민이 주었다는 사실을 언제나 선거 기간에만 인식하는 이들에게 ’정치공학‘이 아니라 ’분노론‘에 대해 학습할 의무를 주고 싶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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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정의 인문학 - 감정의 프리즘: 열정과 분노, 슬픔과 공포, 위안과 기대, 평온과 광기
소영현 외 지음 / 봄아필 / 2013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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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정민주주의


감정의 인문학 - 감정의 프리즘: 열정과 분노, 슬픔과 공포, 위안과 기대, 평온과 광기


  우리는 감정을 드러내는 것에 부정적인 사회에 살고 있다. 희노애락의 인생사에서 ‘감정’의 자연스러운 발현이 통제된다면 과연 인간은 살아가고 있는 걸까. 그렇다고 감정을 드러내지 않으면 그에 대한 비난 역시도 존재한다. 어쩌란 말인지. 상투적이고 원론적인 말이 대안이 되겠다. “적당히”. 그 적당의 수준은 누가, 어떻게 정할 수 있단 말인가. 이래저래 치이고 마는 ‘감정’인 까닭에 오히려 적절한 상황에서 기를 펴지 못한 감정들이 분출되거나 분출되지 못하여 문제를 양산하고 있는 것 아닌가. 그러게, 웃음도 눈물도 분노도 왜 그토록 타인의 눈치를 봐가며 학습된 감정을 표출해야 하는 건지. 감정의 자연스러움이 곧 진실이라면 이 비극적 감정의, 조작된 감정의 주인은 누구란 말인가.

  이 책은 감정에 관한 인문학적 탐구다. 각기 다른 전공의 세 명의 저자들의 말대로 하면 ‘감성적 사회비평’이다. 이것은 위로와 공감에서 더 나아가 “인식과 행동의 변화를 이끌 수 있는” 비평이란 얘기다. 저자들의 목적은 이것이니 독자로서의 나는 그들의 의도에 맞는 변화가 있는가를 살펴보면 되겠다.

  상당히 재미있게 읽은 책이다. 책에 대한 사전 정보없이 제목으로 끌렸고 책 표지도 매력적이었다. 새해 들어 ‘감정’에 대한 새삼스런 고찰을 하다 여지없이 생각난 책이다. 이래저래 생각해보니 인문학과 사회학이 가미된 글에 대한 호감은 내 개인적 취향이구나 싶다. 그러니 감성적 사회비평 역시도 취향 저격된 셈이다.

  감정의 가장 대표적 성격이라고 할 수 있는 열정과 분노, 슬픔과 공포, 위안과 기대, 평온과 광기를 중심으로 감정에 대한 탐구가 이루어진다. 우리가 겪는 일련의 상황들, 영화이거나 소설이거나, 점성술 등 우리의 모습을 비춰주는 모든 것이 감정을 탐구하는 자료가 된다.


감정에 대한 탐색은 단지 주체가 경험적으로 인지하는 신체적 반응이나 직관의 문제만이 아니라, 주체와 타자의 관계론, 의식과 무의식의 작용, 표상된 것과 감춰진 것의 역학, 역사와 현재의 연계와 상호 간섭 방식, 욕망과 가치의 충돌, 윤리와 관습이라는 사회적 요소들이 다선적이고 중층적으로 관여하는 복잡계에 대한 총체적 탐색임을 인정할 필요가 있다. p26


  중요한 점은 이것이다. 왜 감정에 대한 통제나 억압이 주로 이루어지는가, 자기계발서 속 감정에 대한 조언들은 왜 억제와 통제가 아니라면 특정감정에 대한 지향인가. 감정에 대한 교육은 그것만이 지향하는 특정한 방식이 있는 것인가. 어쨌든 ‘감정’을 표출하는 주체가 정말 ‘나’가 맞는가. ‘나’의 감정표출에 대한 권리도 없다면 타인의 ‘감정’에 대한 이해는 과연 가능한가. 감정의 주체가 되지 못해 나타나는 영향은 무엇인가.


감정을 드러내는 것은 어떤 면에서는 자신의 모든 것을 ‘거는 것’이다. 감정 표현은 미숙하거나 유치해서가 아니라, 진정한 자기 자신으로 세상과 대면하기 위한 결의이자 선택이다. 감정의 ‘집단적 표현’이 곧 저항의 제스처일 수 있는 것은 이 때문이다. p26~27


  “‘가정폭력’은 가부장제 위계가 은폐할 수 없었던 구조적 폭력의 일면이자 한국사회 전반에 뿌리내린 위계구조의 폭력적 분출(p58)”이다. 가정폭력만이 그런 것이 아니다. 수치와 분노의 감정에서 보면 인종적-국가적-계급적-젠더적 차원의 위계적 폭력 구조가 연관된다. 사실 모든 감정의 면면에 계급과 성별이 가득 차 있다. 이에 대한 경험은 사실 너무도 일반화되어 있다고 할 수 있다. 갑을관계를 생각하면 될 것이다. 사회에 만연한 갑질 속에 잘 드러난다. 또한 ‘남성의 화는 합리적인 분노‘로 ‘여성의 화는 성격이상’으로 치부하는 것도 마찬가지다.

  이러한 위계에서 보듯이 사회는 여러 방식으로 인간의 자연스런 감정을 막고 있다. 그것의 이득이 없지 않다면 적극적인 개선을 해나갔을 것이다. 그럼에도, 여전한 분위기 형성을 보건대 우리가 해야 할 일은 “내 감정의 주인이 되는 일”이다. 그것은 사회적으로 관습화된, 위계적인 이 구조에서 벗어나는 일이 필요함을 보여준다. 이러한 노력, 이것을 저자들은 “감정민주주의 실현”이라 말한다.


우리가 살아가는 사회는 결코 인간답지 않으며, 그런 위험사회 속에서 인간다움을 지켜나가는 것이야말로 성자라는 것은, 인간성에 대한 옹호라기보다는 인간성에 대한 패배주의적 탄식으로 다가왔다. p228


  어쩌면 너무나 익숙해서 그러려니 했던, 아니면 익숙하지만 그래서 불편했던 감정의 표현 방식들에 대해 저자들이 비평은 공감을 준다. 일상의 모든 감정들에 대한 명철한 탐구를 통해 감정의 민낯과 포장된 감정에 대해 가늠하게도 된다. 감정표출마저도 자유롭지 못한데 무슨 인간다움을 말할 수 있겠는가. 잃어버린 나의 인간다움이 통제된 감정교육만큼이나 억압되어 있구나를 생각하게끔 되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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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 2017-01-04 11:1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 역시 감정을 드러내는 것은 일단 지고 들어가는 것이라고 생각하곤 해서인지... 책 내용이 마음에 와닿네요.
 
감정의 항해 - 감정 이론, 감정사史, 프랑스혁명
월리엄 M. 레디 지음, 김학이 옮김 / 문학과지성사 / 2016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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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정과 사고


  오랜 시간 감정은 이성에 비해 열등한 것으로 취급받았다. 이성이 객관적이 분석적이고 문제를 해결하는 측면에서 얘기되는 것과 달리 감정은, 그것 자체로 문제를 ‘야기’하는 것이었다. 그랬기에 사건이 일어났을 때 “감정적으로 대응하지 말라”는 말을 수도 없이 듣거나 말했다.

  감정이 생각과 다르지 않다고 생각하는 입장에서, 나아가 감정이 생각에서 발현된다고, 감정이 사고의 영역이라고 생각하는 입장에서 만난 『감정의 항해』는 격하게 반가운 책이다. 저자 윌리엄 레디는 역사학 및 인류학 교수이다. 또한 행동주의 심리학 연구소 펠로로서 감정을 개념과 감정연구에 관한 역사를 분석하며 감정에 관한 새로운 이론틀을 제시하고 있다. 또한 역사학 전공자로서 ‘감정’의 연구에 역사를 활용한다. 그가 끌여들어온 역사적인 시기는 프랑스 혁명시기이다. 대체로 감정에 관한 연구는 심리학이나 인류학에서 주로 다루어져 왔다. 그런데 이러한 감정연구를 혁명시기와 접목하는 것은 어떻게 가능하고, 어떤 이론이 전개될 것인지 상당히 흥미진진한데 저자의 지식과 사료의 활용으로 인간의 감정에 관한 연구가 또다른 접근으로 생생하게 펼쳐진다.

  크게 2부로 나뉘어 1부에선 감정이 무엇인가에 대해 다룬다. 여기에서는 인류학과 심리학에서의 연구 내용과 함께 저자가 제시하는 감정의 이론틀을 제시한다. 2부는 프랑스 혁명시대의 감정을 저자가 제시한 이론의 틀과 함께 대한 분석하고 있다.

  이러한 분석을 통해 저자가 주장하는 바는 무엇인가. 서언에서도 밝히고 있듯이 “감정은 학습된 것”이라는 주장이다. 이에 관해서는 심리학과 인류학에서도 어느 정도 견해가 일치되었다고 보고 있다. 저자의 이 주장의 이유는 이렇다.


보편적으로 적용 가능한 감정 개념을 제공하기 위해서다. 감정 개념이 보편적이어야만 고통이란 무엇이며, 왜 우리는 모두 자유 속에서 살 자격이 있는지 말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래야만 역사적 변화도 유의미해지고, 역사가 인간의 감정 구조를 포착하려는 노력의 기록이요, 정치사회적인 질서를 그 감정 구조를 포착하려는 노력의 기록이요, 정치사회적인 질서를 그 감정 성격에 합당하도록 만들기 위한 노력의 기록이 된다. p9


  저자의 감정이 생각과 다르지 않다는 핵심적인 주장은 ‘인지’ 개념과 연관시켜 이야기된다. 감정은 상황에 대한 인지이며 인간은 특정 상황에 놓였을 때 목표가 정해진다고 본다. 그에 따라 생각 재료들이 활성화되고 그중 일부만이 의식에 입장하게 되는데 의식에 입장하지 못한 나머지 활성화된 생각 재료가 감정이다. 저자가 말하는 “이모티브imotive”는 바로 이 생각 재료를 활성화시키고 감정을 발동시키는 것이다. 저자가 주장하는 이모티브가 가지는 중요한 함의는 그것이 감정만큼이나 사회적이라고 보는 것이다. 한마디로 사회가 개개 구성원의 감정을 장악하고 있다고 보는 것이다. 사회적으로 규정된 감정의 의미가 변한다면 감정 역시도 변하게 되는 것으로 볼 수 있다.

  이런 측면 때문에 저자가 프랑스 혁명의 역사 속의 감정을 분석했을 것이다. 사회적으로 부여된 특정 ‘감정’이 어떻게 변화되는지, 어떤 영향으로 변화되는지를 이 분석을 통해 살펴볼 수 있다. 감정이 프랑스 혁명에 영향을 주었다는 저자의 주장은 단순하게 생각해도 당연하게 여겨진다. 대한민국을 들끓는 ‘분노’라는 감정이 촛불혁명을 일으키고 있는 상황과 맞물려 생각하면 더더욱.


  하지만 저자는 감정이 자유로웠다고 말하지는 않는다. 프랑스 혁명시기를 구분하여 분석하면 감정체제에 대한 반응을 더욱 확연히 알 수 있다. 저자에 의하면 자유로운 감정의 항해를 펼쳐나가야 국민들의 감정에 대해 오히려 경직을 강요함으로써 혁명으로 연결되었다고 본다. 감정 피난처란 “감정 규범으로부터 벗어나는 안전지대를 제공해주고 감정적 노력의 이완을 허용하는 의례, 공식 비공식 조직, 관계”라고 정의한다. 이 감정피난처는 기존의 감정체제를 뒷받침할 수도 위협할 수도 있는데 자유로운 감정의 허용이 이루어지지 않은 감정체제의 결과가 혁명을 초래했다고 보는 것이다. 사실, 누군가의 감정을 유도한다고 했을 때 의도한 감정을 이끌어낼 수도 있지만 오히려 반대의 감정이 나타날 수도 있는 것이다. 그런 면에서 프랑스혁명의 시기는 자유로운 감정의 발현이라기보다는 다양한 감정의 변화들이 나타난 것으로 볼 수 있다.


대부분의 역사가들이 인식하지 못하지만, 사실 프랑스혁명은 이타애적인 개혁 제스처를 수단으로 하여 프랑스 전체를 일종의 감정 피난처로 변모시키려던 노력으로 시작되었다. 감정이 무엇인지 오해하는 동시에 국가의 물리력을 투입하여 이타애와 박애를 확산시키려는 역설적인 시도가 전개되자, 1789년에 설계되었던 감정 피난처들은 4년 만에 공포정치라는 악성의 감정고통으로 귀결되고 말았다. p223~224


  감정이 감정체제에 의해서가 아니라 자유로워져야 한다는, 감정의 항해가 이루어져야 한다는 의미는 인간이 스스로가 자신의 감정을 만들어야 한다는 말이다. 저자가 프랑스 혁명시기의 정치가들의 편지나 연설문, 민사소송의 판결문 등의 사료를 통해 분석한 내용은 저자의 우려가 나타난다. 그 시대가, 사회가 억압하는 감정체제에 따라 사고하는 사람들의 모습이 그대로 드러나는 것이다. 

  제한적이고 길들여진 감정에 머물러 있는 것. 이것은 정치적이고 도덕적인 판단에서 자유롭지 못하다는 말과 같다. 감정이 자유롭지 못하다는 것, 사고가 자유롭지 못하다는 것, 사회를 살아가는 인간으로서의 기본을 누리지 못함과 같다. 감정이 사고와 다르지 않다면 감정을 규율하는 감정체제는 사고 역시도 통제하고 있는 것이다. 

  보다 자유롭고 합리적인 선의 감정과 사고가 이루어질 수 있는 시대, 감정의 자유로운 항해는 결국 그 사회의 문화와 규율의 수준이 어떠한가가 관건이다. 그러나 또한 통제적이고 억압적인 감정체제를 유지하려는 기득권, 권력층의 입맛이 아니라 ‘보편적’이고 합리적인 감정이 자유를 누리는 인간들이 이 사회를 굴러가게 한다는 것을 감정의 항해를 보며 느끼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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