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정의 항해 - 감정 이론, 감정사史, 프랑스혁명
월리엄 M. 레디 지음, 김학이 옮김 / 문학과지성사 / 2016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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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정과 사고


  오랜 시간 감정은 이성에 비해 열등한 것으로 취급받았다. 이성이 객관적이 분석적이고 문제를 해결하는 측면에서 얘기되는 것과 달리 감정은, 그것 자체로 문제를 ‘야기’하는 것이었다. 그랬기에 사건이 일어났을 때 “감정적으로 대응하지 말라”는 말을 수도 없이 듣거나 말했다.

  감정이 생각과 다르지 않다고 생각하는 입장에서, 나아가 감정이 생각에서 발현된다고, 감정이 사고의 영역이라고 생각하는 입장에서 만난 『감정의 항해』는 격하게 반가운 책이다. 저자 윌리엄 레디는 역사학 및 인류학 교수이다. 또한 행동주의 심리학 연구소 펠로로서 감정을 개념과 감정연구에 관한 역사를 분석하며 감정에 관한 새로운 이론틀을 제시하고 있다. 또한 역사학 전공자로서 ‘감정’의 연구에 역사를 활용한다. 그가 끌여들어온 역사적인 시기는 프랑스 혁명시기이다. 대체로 감정에 관한 연구는 심리학이나 인류학에서 주로 다루어져 왔다. 그런데 이러한 감정연구를 혁명시기와 접목하는 것은 어떻게 가능하고, 어떤 이론이 전개될 것인지 상당히 흥미진진한데 저자의 지식과 사료의 활용으로 인간의 감정에 관한 연구가 또다른 접근으로 생생하게 펼쳐진다.

  크게 2부로 나뉘어 1부에선 감정이 무엇인가에 대해 다룬다. 여기에서는 인류학과 심리학에서의 연구 내용과 함께 저자가 제시하는 감정의 이론틀을 제시한다. 2부는 프랑스 혁명시대의 감정을 저자가 제시한 이론의 틀과 함께 대한 분석하고 있다.

  이러한 분석을 통해 저자가 주장하는 바는 무엇인가. 서언에서도 밝히고 있듯이 “감정은 학습된 것”이라는 주장이다. 이에 관해서는 심리학과 인류학에서도 어느 정도 견해가 일치되었다고 보고 있다. 저자의 이 주장의 이유는 이렇다.


보편적으로 적용 가능한 감정 개념을 제공하기 위해서다. 감정 개념이 보편적이어야만 고통이란 무엇이며, 왜 우리는 모두 자유 속에서 살 자격이 있는지 말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래야만 역사적 변화도 유의미해지고, 역사가 인간의 감정 구조를 포착하려는 노력의 기록이요, 정치사회적인 질서를 그 감정 구조를 포착하려는 노력의 기록이요, 정치사회적인 질서를 그 감정 성격에 합당하도록 만들기 위한 노력의 기록이 된다. p9


  저자의 감정이 생각과 다르지 않다는 핵심적인 주장은 ‘인지’ 개념과 연관시켜 이야기된다. 감정은 상황에 대한 인지이며 인간은 특정 상황에 놓였을 때 목표가 정해진다고 본다. 그에 따라 생각 재료들이 활성화되고 그중 일부만이 의식에 입장하게 되는데 의식에 입장하지 못한 나머지 활성화된 생각 재료가 감정이다. 저자가 말하는 “이모티브imotive”는 바로 이 생각 재료를 활성화시키고 감정을 발동시키는 것이다. 저자가 주장하는 이모티브가 가지는 중요한 함의는 그것이 감정만큼이나 사회적이라고 보는 것이다. 한마디로 사회가 개개 구성원의 감정을 장악하고 있다고 보는 것이다. 사회적으로 규정된 감정의 의미가 변한다면 감정 역시도 변하게 되는 것으로 볼 수 있다.

  이런 측면 때문에 저자가 프랑스 혁명의 역사 속의 감정을 분석했을 것이다. 사회적으로 부여된 특정 ‘감정’이 어떻게 변화되는지, 어떤 영향으로 변화되는지를 이 분석을 통해 살펴볼 수 있다. 감정이 프랑스 혁명에 영향을 주었다는 저자의 주장은 단순하게 생각해도 당연하게 여겨진다. 대한민국을 들끓는 ‘분노’라는 감정이 촛불혁명을 일으키고 있는 상황과 맞물려 생각하면 더더욱.


  하지만 저자는 감정이 자유로웠다고 말하지는 않는다. 프랑스 혁명시기를 구분하여 분석하면 감정체제에 대한 반응을 더욱 확연히 알 수 있다. 저자에 의하면 자유로운 감정의 항해를 펼쳐나가야 국민들의 감정에 대해 오히려 경직을 강요함으로써 혁명으로 연결되었다고 본다. 감정 피난처란 “감정 규범으로부터 벗어나는 안전지대를 제공해주고 감정적 노력의 이완을 허용하는 의례, 공식 비공식 조직, 관계”라고 정의한다. 이 감정피난처는 기존의 감정체제를 뒷받침할 수도 위협할 수도 있는데 자유로운 감정의 허용이 이루어지지 않은 감정체제의 결과가 혁명을 초래했다고 보는 것이다. 사실, 누군가의 감정을 유도한다고 했을 때 의도한 감정을 이끌어낼 수도 있지만 오히려 반대의 감정이 나타날 수도 있는 것이다. 그런 면에서 프랑스혁명의 시기는 자유로운 감정의 발현이라기보다는 다양한 감정의 변화들이 나타난 것으로 볼 수 있다.


대부분의 역사가들이 인식하지 못하지만, 사실 프랑스혁명은 이타애적인 개혁 제스처를 수단으로 하여 프랑스 전체를 일종의 감정 피난처로 변모시키려던 노력으로 시작되었다. 감정이 무엇인지 오해하는 동시에 국가의 물리력을 투입하여 이타애와 박애를 확산시키려는 역설적인 시도가 전개되자, 1789년에 설계되었던 감정 피난처들은 4년 만에 공포정치라는 악성의 감정고통으로 귀결되고 말았다. p223~224


  감정이 감정체제에 의해서가 아니라 자유로워져야 한다는, 감정의 항해가 이루어져야 한다는 의미는 인간이 스스로가 자신의 감정을 만들어야 한다는 말이다. 저자가 프랑스 혁명시기의 정치가들의 편지나 연설문, 민사소송의 판결문 등의 사료를 통해 분석한 내용은 저자의 우려가 나타난다. 그 시대가, 사회가 억압하는 감정체제에 따라 사고하는 사람들의 모습이 그대로 드러나는 것이다. 

  제한적이고 길들여진 감정에 머물러 있는 것. 이것은 정치적이고 도덕적인 판단에서 자유롭지 못하다는 말과 같다. 감정이 자유롭지 못하다는 것, 사고가 자유롭지 못하다는 것, 사회를 살아가는 인간으로서의 기본을 누리지 못함과 같다. 감정이 사고와 다르지 않다면 감정을 규율하는 감정체제는 사고 역시도 통제하고 있는 것이다. 

  보다 자유롭고 합리적인 선의 감정과 사고가 이루어질 수 있는 시대, 감정의 자유로운 항해는 결국 그 사회의 문화와 규율의 수준이 어떠한가가 관건이다. 그러나 또한 통제적이고 억압적인 감정체제를 유지하려는 기득권, 권력층의 입맛이 아니라 ‘보편적’이고 합리적인 감정이 자유를 누리는 인간들이 이 사회를 굴러가게 한다는 것을 감정의 항해를 보며 느끼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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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애의 크기


상냥한 폭력의 시대, 정이현, 문학과지성사, 2016.


    “이런 시대에 이렇게 살아갈 수 있다는 것만으로 나쁘지 않다”고 「미스조와 거북이와 나」속 인물은 말하지만 그럭저럭 살아가야 하는 시대는 환희는 사라지고 온통 폭력이다. 무력을 동원하지 않은 폭력의 외관에 헷갈렸을 수 있겠지만 엄밀한 폭력이다. 그럭저럭 살아가게 만든다는 게, 폭력이 아니고 무엇이라 할 수 있겠는가. 삶에 대한 열의를, 정의를 빼앗겨 버리거나 지속할 생각이 없이 사는 시대. 그것을 드리운 것이 폭력적이고 억압적인 상황이 아니라고, 그러한 테두리가 아니라고 어떻게 말할 수 있을까.

 책의 제목을 단 단편은 없는 정이현의 소설집엔 일곱 편의 단편이 실려 있다. 도시를 바탕으로 한, 현실의 이야기가 펼쳐진다. 그런데 이전의 정이현 소설 속 인물들과 달리 소심하다고 해야 할까, 미적거리는 인물들의 모습이 눈에 띈다. 그들은 뚜렷하게 선악을 드러내지 않지만, 대놓고 타인에게 삿대질을 한다거나 무엄한 말을 늘어놓지 않지만, 그래서 어쩔 땐 약해보이는 듯도 하지만, 그렇게 함으로써 위해를 가한다. 의식하지 않든 아니든 그들은 결정을 미룸으로써, 책임을 선택하지 않음으로써 ‘그럭저럭 사는 삶’ 속으로 들어간다.


결정의 순간에 아무런 결단도 내리지 못하는 방식으로 결정해버리고, 전 생애에 걸쳐 그 결정을 지키며 사는 일이 자초한 삶의 방식이라고 양은 탄식했다. p139


  사는 게 중요한지 어떻게 사는 게 중요한지 따진다면 그것을 묻는다는 게 위선이라고 말할 수도 있겠다. 그 물음 속에선 이미 대답이 전제한 듯하니까 말이다. 생각해보면 어느 누구도 타인의 삶의 방식에 책임을 지지 않는다. 그렇기에 타인에게만 정의를, 배려를 강요하는 것은 또한 폭력일 수 있다. 그러나 면밀히 사회가 삶의 최선의 선, 안전선을 지켜나가는 방식으로 이뤄진다면 개인의 ‘행동’ 하나가 폭력인 시대가 될 수 있을까.


어떤 사람에게는 있는 그대로의 사실을 입 밖에 내는 일에 굉장히 큰 용기가 필요하다는 사실이 다른 사람들에게는 자주 무시된다.  p152


  ‘무시’는 타인과의 위계를 설정하는 방법이기도 하지만 관계치 않으려는 모습이기도 하다. 인간은 사회적 동물이라 끊임없이 배우고 가르치고 있음에도 관계맺음에서 멀리 떨어져 있으려 하는, 그 관계맺음의 틀을 규정하는 방식을 따로이 설정하며 살아가는 이 시대는 표면과는 다른 삶의 방식을 뻔히 드러내고 있다. 그럼에도 번지르르한 말로 포장된 위선의 이 세계. 그 어떤 아름다운 포장을 하고 있더라도 결국은 포장의 아름다움과는 달리 서글픔이 가득한 이 시대, 이 시대의 사람들, 그들의 말과 행동들.


어떤 사람이 제멋대로 나를 침범하고 휘젓는 것을 묵묵히 견디게 하는 건 사랑이지만, 또 그 이유로 떠나가기도 하지. 사랑을 지키기 위해서. p31


대화가 없어도, 음악이 없어도, 라디오 소리가 없어도, 사랑이 없어도, 세상 모든 소리와 빛이 사그라진 곳에서도 어색하지 않은 관계였다. p182


  이렇게 삶이 이어진다. 농도 짙은 애정을 확인할 길 없이 흘러가는 시대. 사랑이, 애정마저도 쉽게 폭력으로 치환될 수 있는 시대가 우리를 휘감는다. 예의없음을 상당히 예의있게 내뱉는 이 시대에 삶의 모든 것들에 쉽게 상처받으면서도 상처받지 않은 듯 무심을 가장하는 이들에게 삶은 흘러가고 이어진다.


단단하고 부서지기 쉬운 것들, 부서지지 않는 것들에 대하여 생각하는 동안 해가 완전히 사라졌다. p130 


  그렇게 남은 생애, 지금 드러난 이 모습이 화석화된다면, 이것이 당연한 일들인 양 삶의 표준으로 남는다면, 그때에 사람들은 그것에 적응한 채 살아가고 있을 것이다. 지금 이 소설 속 쉽게 만날 수 있는 사람들의 모습에서 먼 미래가 그려진다. 삶을 살아가는 동안 느끼게 되는 비애의 크기는 위선과 위악 그 중 어디에서 강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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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년의 워터십 다운을 향해

 

워터십 다운의 열한 마리 토끼 Watership Down 

리처드 애덤스, 사계절 2002.


    제법의 작가들이 출간을 거절당한 경험을 가지고 있다. 리처드 애덤스의 열한 마리의 토끼 이야기 역시도 그랬다. 그가 렉스 콜링스라는 편집자를 만나지 않았더라면 이 이야기는, 책으로도 애니메이션으로도 제작되지 못했을 것이다. 그러니, 작가만큼이나 책을 ‘보는’, 작가를 ‘보는’ 눈을 가진 이의 역할에 감사한다.

  그렇게 고전에 반열에 오른 <워터십 다운>의 작가 리처드 애덤스가 크리스마스에 사망했다. 그가 52세에 쓴 <워터십 다운>은 열한 마리의 토끼 이야기로 그가 환경 공무원으로 일한 경험을 살려 쓴 소설이라 한다. 이 작품에 대한 여러 출판사의 거절의 이유는 내용이 너무 길다는 것과 토끼들이 귀엽지 않다는 이유였다고 한다.

  독자의 입장에선 이야기가 ‘너무’ 긴 줄 모르겠고 토끼는 귀엽기도 했지만 안타까웠다.   이야기는 모두 4권이다. 1부는 택지 개발로 인해 살 수 없는 고향을 떠나 새로운 보금자리를 찾는 이야기, 2부는 토끼들에게 이상향이라 불리는 워터십 다운에 가는 과정, 3부는 에프라파 잠입 작전과 탈출담, 4부는 마을을 지키기 위한 에프라파 토끼들과의 싸움을 담고 있다. 이 모든 이야기의 핵심은 열한 마리의 토끼들이 새로운 집을 찾아가는 여정에 관한 것이다. 그래서 모험이라 불릴 수도 있지만 이 토끼들의 모험은 그들이 원해서가 아니라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다는 점에서 이 이야기는 모험 소설이 가지는 흥미진진함과는 다르다. 토끼들은 자신의 고향을 떠나고 싶지 않지만 더 이상 그곳에서 살 수 없기에 추위와 위험을 무릅쓰고 새로운 곳을 찾아가는 것이다.

  다양한 인간 군상을 보는 듯 열한 마리의 토끼들은 각각의 캐릭터가 확실하다. 그만큼 이야기 속에서의 역할들이 뚜렷하다. 예언능력을 가진 파이버, 지도력을 가진 헤이즐을 비롯하여 이름처럼 용맹스러운 빅웍, 이야기꾼 댄더 라이언, 지략있는 블랙베리, 굴 파기의 대가 스트로베리, 어리고 소심한 토끼 에이콘과 핍킨 등이 그렇다. 이들 토끼들은 서로 의지하기도 하고 대립하기도 하며 위험을 헤쳐 나간다. 이 상황속에서 지도자의 역할, 헤이즐의 활약이 눈에 띌 수밖에 없지만 예언가인 파이버도 탁월한 이야기꾼인 댄더 라이언의 역할에도 눈이 간다.

  두 토끼의 역할이 다른 듯하지만 일종의 종교적·정신적인 메시지를 전하고 있다. 파이버의 예언적이 능력은 샌들포드 마을의 위험을 감지하고 새로운 곳을 가야 한다는 계시를 전한다. 그리고 댄더 라이언은 토끼들이 힘들어 할 때, 지치고 두려워하고 불안해 할 때면 토끼들 사이에 전해지는 신화이야기를, 전사의 이야기를 전함으로써 토끼들에게 힘을 북돋는다. 어쩌면 이것은 인간에게도 해당되는 것일 게다. 삶을 살아가는데 길잡이가 되어줄 신념과 그 신념을 강화시켜줄 믿음을 주는 이야기들 말이다.

  토끼들이 각자의 성격을 가지고 위험하고 불안한 모험을 하는 과정에서 각자의 장점을 발휘할 수 있는 것은 리더 헤이즐의 역량 덕분이다. 헤이즐은 강압적인 카리스마를 지닌 지도자가 아니다. 자신과 함께 하는 토끼들에 대해 누구보다도 잘 파악하고 문제 상황에서 어떤 일을 해야 하고 무엇이 필요한 지를 잘 아는 리더이다. 인재를 적재적소에 잘 활용한다고 할까. 단순한 여행이 아닌, 목숨을 걸어야 하고 유혈이 낭자한 전장의 여정에서 순간적인 판단이 필요한 상황에서 헤이즐은 늘 고민하고 고뇌하며 적절한 해결책을 찾기 위해 고심한다.

  이러한 상태라고 한다면 헤이즐과 함께 하는 토끼들이 가는 곳은 그 장소가 어디인들 상관없이 민주적이고 안정적인 나라가 될 것이다. ‘어디’라는 장소적인 문제가 아니라 ‘어떤 이들이 어떻게 만들어 가는가’가 중요한 관건인 것이다. 그럼에도 그들은 더 나은 곳을 찾기 위해 나아간다. 위험한 곳 샌들포드를 떠나 공포가 법인 에프라파 마을을 지나 그들이 정착하게 되는 곳.

 토끼들이 조금 더 여정을 계속하고 정착할 마을을 찾게 되는 것은 ‘장소’를 찾기 위함이었지만 그 어느 곳이라도 각자의 역할을 잘 수행하고 서로에게 믿음을 가지며 잘 살아갈 수 있었을 것이다. 그럼에도 그들에게 물리적으로 조금 더 나은 환경을 찾아가는 여정이 필요했던 것은 토끼들이 자신들이 민주적인 사회의 구성원으로서의 역할을 익히고 배워나가는 것이 필요했기 때문일 것이다. 토끼들은 자신들이 두려움과 불안 속에서 길 위의 나날들을 보내는 과정 속에서도 서로에 대한 믿음과 해결해야 할 일에 대한 역할을 잘 수행해 나가는 법을 배웠다. 그것이 삶을 살아가기 위해 필요한 것임을 배워가고 있는 것이다. 그렇기에 길 위에서 토끼들이 익힌 삶에 대한 자세가 정착해서도 이어질 것이다.

  토끼들의 모습을 통해 보다 나은 곳이 물리적 환경의 요소만이 아니라는 것을 다시 한번 느낀다. 이제 저물어가는 2016년의 대한민국에 절실한 깨달음을 주게 할 열한 마리의 토끼이다. 특히 헤이즐의 지도력과 헤이즐의 진정한 조력자인 파이버의 관계는 국정농단이라는 이 유례없는 나라에 살게 된 대한민국 국민들의 눈을 정화시켜줄 것이다.

  토끼들이 나오는 우화, 어린이용 동화라는 생각으로 책을 읽기 시작하면 놀랄 것이다. 이 책은 토끼들의 생존의 이야기이며 정치와 체제에 관한 이야기이니까. 새로운 곳을 찾아가는 토끼들처럼 수많은 촛불들이 불을 밝힌, 뛰어난 국민들이 살고 있는 대

한민국이 2017년엔 새로운 나라로 정착할 수 있기를. 그리고 헤이즐과 같은 지도자가 탄생하기를. 라스푸틴이나 한국판 라스푸틴이 아니라 파이버와 같은 조력자가 탄생하기를. 각각의 장점을 펼칠 기회가 주어지는 사회이기를. 그렇게 할 수 있는 역할을 해 나가면 평안히 살아갈 수 있는 사회이기를.

  워터십 다운의 열한 마리의 토끼 이야기 속에 리처드 애덤스는 이 모든 것을 심어놓고 한세기를 마감하고 사라졌다. 그의 영혼도 평안하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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빨강의 자서전 - 시로 쓴 소설 빨강의 자서전
앤 카슨 지음, 민승남 옮김 / 한겨레출판 / 2016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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빨강의 로맨스


빨강의 자서전 Autobiography of Red-시로 쓴 소설 

  한국에서 빨강에 대한 공포와 금기가 사그라들기 시작한 것은 2002년 월드컵이라고들 말한다. 붉은 악마의 물결이 휩쓴 그때부터 “빨갱이”라는 말의 순화가 이루어졌다. 물론 여전히 빨갱이에 대한 노골적인 수사와 몰이는 유효하다. 빨강의 열정에 편승하여 빨강색 옷을 입고 빨강색 간판을 달고 빨강빨강 전도하던 이들이 그 몰이의 대표적 주자이다. 그것이 코메디 같아서 어떤 이들에겐 빨강이 종북의 상징이 되고 어떤 이들에게 야유의 대상이 될 지 모른다. 어쨌든 여러 모로 비난과 멸시의 대상이 되고 만 빨강이다.

  빨강이 의도치 않은 자의적 해석과 이미지 투영으로 빨강은 탄생 이래 영원히 그 상징에서 벗어나지 못할 지도 모른다. 서양에서도 마찬가지로 빨강에 드리워진 수많은 이미지 중 하나가 ‘괴물’이다. 그리스 신화 속 헤라클레스는 자신의 죄의 대가로 세 개의 머리와 몸을 가진 괴물이 키우는 소들을 훔치는 과업을 수행한다. 괴물의 이름은 게리온이고 붉은 섬이라는 뜻의 에리테이아(Erytheia) 섬에 살고 있다. 그가 키우는 소떼들 역시 붉다. 

  이 이야기에 상상의 나래를 더해 그리스의 서정시인 스테시코로스는 빨강 소떼를 돌보는 이상한 날개가 달린 빨강 괴물에 대한 이야기를 한다. 그의 시의 전문이 온전히 남아 있지 않은 현대에 노벨문학상 후보이자 T.S. 엘리엇 수상자인 작가 앤 카슨은 게리온의 이야기를 재창작한다. 빨강 괴물 게리온의 이야기를 시로 쓴 소설로 엮어 낸다.

  상상력이 스테시코로스에게 빚을 진 측면이 있겠지만 형식과 이야기의 구조와 완결은 오로지 작가의 몫이다. 이 이야기는 게리온의 시선에서 고전의 이야기와는 다른 형태로 흘러간다. 소설의 문장보다 시적 언어로 쓰여진 까닭에 함축적이고 미학적이다. 언어를 음미하며 이야기에 빠져들게 된다. 더구나 이 이야기는 어린 게리온의 이야기에서 시작하기에 ‘괴물’의 성장기를 지켜보게 된다.

  우리가 아이에게 ‘괴물’이라 칭한다면 그것은 아이가 사회가 원하는대로 살지 않기 때문일 것이다. 그러니까 성인이 행하는 그것처럼 광기적인 절대 악의 모습을 지니지 않아도 또래와의 사귐에 소극적이거나 학교 생활에 부적응하게 되면 그 선에서의 다름을 이유로 괴물이라고도 부른다는 말이다. 그렇게 어린 게리온은 악의 모습을 보여주고 행하는 이미지보다 그 나이의 아이들과는 ‘다른’ 이유로 괴물이라는 칭호를 부여받는지도 모른다.

  다르다. 외면적인 다름을 말하자면 어린 소년 게리온의 어깨엔 작은 빨강 날개가 있다.


네가 약한 아이라면

힘든 일이겠지만

넌 약하지 않아. 어머니는 그렇게 말하고는 그의 작은 빨강 날개를 가다듬어준 후

그를 문 밖으로 떠밀었다. p52~53


  게리온은 커다란 코트로 자신의 날개를 감출 수밖에 없다. 그래서인지 게리온은 내성적인 성격의 아이로 자라고 자신의 내면을 들여다보는 일에 흥미를 느낀다. 그렇기에 자신만의 ‘자서전’을 쓰기로 한다. 글자를 모르던 때부터 빨강 토마토 위에 10달러 지폐를 찢어 머리카락을 만들어 자서전을 만든 게리온은 자신의 자서전에 “내적인 모든 것들을, 특히 자신의 영웅적 자질과 공동체에 큰 절망을 안겨줄 이른 죽음에 대해 썼다.” 그리고 사춘기에 이르러 “헤라클레스를 만나게 되었고 삶의 세계는 몇눈금 하강했다.“

  다시 한번 제목을 보자면 앤 카슨의 <빨강의 자서전>엔 “로맨스”라는 부제가 있다. 이 로맨스가 말하는 바가 무엇일까를 생각해보건데 로맨스라는 단어에서 느끼는 그 의미를 생각한다면 필시 게리온의 로맨스라고 짐작할 만한데 그 어디에도 게리온의 이성의 대상이 등장하지 않는다. 그렇다면 ‘사랑’에 대해 좀더 한정적인 생각을 버리고 바라보면 명백히 헤라클레스의 존재가 눈에 들어온다. 삶의 세계의 눈금이 하강했다라고 할 헤라클레스와의 만남은 사춘기의 게리온을, 이후의 게리온의 삶을 변화시킨다. 둘은 사랑의 날을, 로맨스의 나날을 보낸다. 함께 화산을 보러 가며 여러 곳을 여행하지만 헤라클레스는 이내 무심해진다. 게리온에게 실연의 상처는, 단순한 실연의 상처가 아니다.


그의 얼굴에 비가 내리고 있었다. 그는 자신이 실연당한 걸 잠시 잊었다가

이내 기억했다. 토사물이 요동치며

게리온에게로 떨어지다가 그의 썩은 사과 속에 갇혔다. 아침마다 충격이 되돌아와

영혼에 상처를 냈다. p109


  오랜 시간을 지나, 대학을 졸업하고 성인으로 두 사람은 다시 마주치게 되지만 헤라클레스 옆에 앙카시가 있다. 헤라클레스의 새 연인. 우연한 만남 가운데에서도 세 사람은 서로 어울리고 게리온의 빨강 날개를 보게 된 앙카시는 빨강 날개에 관한 전설을 이야기한다.


빨강의 존재를 부정하는 건

신비의 존재를 부정하는 것이다. 그런 짓을 하는 사람은 언젠가 미칠 것이다. p173


  앙카시는 헤라클레스와의 삼각점에서는 연적이지만 게리온의 영혼에겐 구원이었다고 봐야 할 것이다. 태어난 그 순간부터 줄곧 빨강 날개를 감추었던 게리온이지만 앙카시를 통해 빨강 날개의, 자신에 대한 ‘특별함’을 깨달아가기 때문이다. 빨강 날개, 날개는 날아오르라고 주어진 것이 아니겠는가. 그러니 자신의 특별함을 깨달은 게리온은 날개를 움직여 날아오를 것이다.

  게리온은 자신의 자서전에 처음부터 자신의 영웅적 자질에 대해 썼다. 신화 해석학자 조셉 캠벨은 신화는 영웅의 여정, 모험담이라고 이야기했다. 영웅성을 부여받은 이가 온갖 고난을 헤치며 마침내 자신의 ‘소명’을 알고 진정한 영웅으로 거듭난다고 말한다. 영웅에겐 여행이 필수이다. 그러니 게리온 역시도 여행이 필연이라고 말하고 있다. 다시, “로맨스”의 의미에 한발짝 들어가면 서구문학에서 로맨스는 중세의 기사모험담을 말한다. 그러니까 앤 카슨의 <빨강의 자서전-로맨스>는 게리온이 자신의 소명을 받아들이며 영웅으로 성장하는 이야기인 것이다.


게리온을 절망에 빠뜨린 건

그가 날개 달린 빨간 사람으로서 인생 초년에 일상으로 받아들인

조롱에 대한 공포가 아니라,

지금과 같은 정신의 완전한 이탈이었다. p134~135


  게리온은 외면이 남과 다르다는 것보다 자신이 생각하는 방식, 자신의 이야기를 들어주지 않는 사람들에 힘겨워했다. 어린 게리온이 끊임없이 자신의 내면속으로 들어갈 수밖에 없던 것은 게리온의 예민한 감수성을, 그 언어를 이해하지 않으려는 사람들에게 놓여 있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의 언어와 세계를 이해해주는 사람들이 나타나자 게리온은 자신에 대한 자존감을 회복하고 긍정적인 상태에 이른다. 세상의 모든 다름에 대해 갖는 부정, 차별이 인간의 영혼을 얼마나 암흑으로 잠식하는지를 알고 있다. 그럼에도 여전히 ‘다름’의 세계에 대한 부정적인 수사는 이어지고 있다. 앤 카슨의 <빨강의 자서전>은 영웅 헤라클레스의 이야기의 주체를 뒤집음으로써 ‘영웅’과 ‘괴물’과 ‘다름’에 대한 생각의 전이를 하게 해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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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무 시끄러운 고독
보후밀 흐라발 지음, 이창실 옮김 / 문학동네 / 2016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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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독을 묻다


너무 시끄러운 고독 Prilis Hlucna Samota (1980년)

보후밀 흐라발, , 문학동네, 2016.


  고독보다는 가슴이 저려온다. 책 속 주인공 한탸에게 작가 보흐밀 흐라발이 얹어지면서 이야기는 더욱 더 깊은 울림을 더한다. 자조적이고 연민이 가득한 이 책에 대해 “재미있다”는 말보다 더한 말을 찾아야 하지만, 누군가 묻고 답해야 한다면 일단 급한대로 가장 간단한 말, “재밌어”라고 외치고서 누군가를 붙잡아 둘 것이다. 이것은 너무 한탸같은가. 상당히 매혹적인 소설이다. 장편 소설로는 분량이 짧은데 스토리와 문체와 어조가 모두 흡인력 있다. 여운까지도 쉽게 사라지지 않아 더욱 더 책을 붙잡게 된다. 많은 작가들이 보후밀 흐라발에게 찬사를 보내는 이유가 공감된다.   

  작가 이야기를 하지 않을 수 없다. 체코의 국민작가라 불리며 마흔 아홉에 처음 소설을 쓴 작가. 노동자, 철도원 점원, 보험사 직원, 단역배우, 폐지 인부 등 다양한 직업을 전전하며 삶을 이어간 작가. 정부의 감시와 검열에 출판금지를 당하면서도 체코를 떠나지 않고 글을 쓰며 지하 출판을 한 작가. 체코 출신 작가만이 아니라 다른 나라의 수많은 작가들에게 찬사를 들은 작가. 그리고 비둘기….


삼십오 년째 나는 폐지 더미 속에서 일하고 있다. 이 일이야말로 나의 온전한 러브 스토리다. 삼십오 년째 책과 폐지를 압축하느라 삼십오 년간 활자에 찌든 나는, 그동안 내 손으로 족히 3톤은 압축했을 백과사전들과 흡사한 모습이 되어버렸다. 나는 맑은 샘물과 고인 물이 가득한 항아리여서 조금만 몸을 기울여도 근사한 생각의 물줄기가 흘러나온다. 뜻하지 않게 교양을 쌓게 된 나는 이제 어느 것이 내 생각이고 어느 것이 책에서 읽은 건지도 명확히 구분할 수 없게 되었다. 지난 삼십오 년간 나는 그렇게 주변 세계에 적응해왔다. p9 


  ‘체코 소설의 슬픈 왕’이라 불린다더니, 소설을 다시 한번 읽으니 첫 문장부터 슬픔이 가득찬다. 시대가 만든 개인의 상황은 삶 모든 것에 영향을 미친다. 공산주의 체제 하의 체코 프라하. 법학을 전공한, 젊은 시절 시를 쓰기도 한 젊은이는 대학을 떠나 안정된 삶으로 정착하지 않았다. 그보다 더, 안전한 망명의 길을 선택하지 않았다. 금서로 지정되어 출판이 금지당하는 상황에서도 체코를 떠나지 않고 체코어로 글을 쓴 작가 보흐밀 흐라발은 삼십 오년째 폐지를 압축하는 삶을 살고 있는 책 속의 한탸와 너무도 닮았다.

  폐지를 꾸리는 일의 단순성에 대해 논한다면 이 일을 하고 있는 한탸는 절대적으로 부정할 것이다. 지하실로 수없이 떨어지는 폐지를 그저 ‘버리는’ 일 없는 한탸는 자기 나름의 기준으로 폐지를 분류하고 해체하여 묶어 내고 아름다운 그림으로 장식한다. 폐지를 압축하고 파쇄하는 것이 주어진 임무라면 그것을 ‘어떻게’ 버리든 그것은 한탸의 마음이다. 한탸가 그렇게 하면서 활자를 글자로 보지 않고 의미로 읽어 내며 많은 교양과 지식을 쌓는다. 그렇기에 그는 바퀴벌레와 쥐가 들끓는 열악한 환경 속에 물리적으로 갇혀 있으나, 갇혀 있지 않은 채 바깥 소식의 일들을 폐지로 들어오는 책들을 통해 접한다. 그의 작업장엔 수많은 책들이 방문한다. 제2차 세계대전 동안엔 프로이센 왕실 도서관 장서가, 전쟁 후에는 나치 문학과 사회주의 책들이 들어온다.     

  한탸의 고독은 선택이다. 한탸는 “생각들로 조밀하게 채워진 고독 속에 살기 위해” 혼자라고 말한다. 그에게 독서는 한낱 기분전환이아 소일거리가 아니다. 한탸는 책을 통해 배우고 사고한다. 자신은 책을, 글을 해체하는 일을 하지만 그 글들은 그의 고독 속에서 생생하게 살아난다. 그래서 한탸는 이 일을 벗어날 수 없고 책과 함께 하는 일에 만족한다. 퇴직해서도 압축기를 구입해 이 일을 하기를 꿈꾸기도 할만큼…. 그는 예수와 돈키호테와 노자와 니체와 괴테, 고갱과 노발리스, 실러, 횔덜린 등, 수많은 작가와 글들을 만나며 자신의 사랑하는 가족과 연인 만차에 대해서도 생각하기를 멈추지 않는다.

  한탸는 끊임없이 자신이 삽시 오년째 폐지 더미를 파쇄하고 있다고 서술하고 있다. 내년이면 삽시 육년째 이 일을 하고 있다고 서술해야 할 것이다. 그러나, 삽십 오년이라 서술하는 이유는 명확하다. 한탸가 삼십 오년째 이 일을 하고 있으며 아직 내년은 오지 않았으며, 지금은 삼십 오년째이니까. 그러니까, 내년은 오지 않을 테니까.

  산업혁명으로 인간의 노동력이 기계로 대체되던 때처럼 한탸는 도시로 나갔다가 자신의 것보다 수십배 큰 압축기를 보게 된다. 그 기계를 압축하는 사람들은 신식 시설에서 유니폼을 갖춰 입고 일하며 콜라를 마시며 휴식 시간엔 휴가에 대해서도 이야기하며 일하고 있다. 한탸의 세계에서는 너무나 놀라운 이 광경은 늘 폐지로 교양을 쌓아 온 한탸에게 새로운 깨달음을 제시해준다. 자신의 세계가, 끝나가는 구나, 라는…. 자신이 새로운 기계와 일하는 그들처럼 빠르게 효율적으로 일을 하는 게, 자신의 삶이 아니라는 것. 자신은 새로운 삶에 절대로 적응할 수 없을 것이라는 사실.

 

부브니의 거대한 압축기와 청년 사회주의 노동단원들 그리고 그들의 그리스 여행에 심적으로 팽팽히 대립해 있는 나는 멍청한 인간이었고, 내 작은 압축기보다 더 미미한 존재였다. 그날 오후 내내 나는 정신 나간 사람처럼 일했다. 부브니의 속도로 종이를 갈퀴로 퍼 담았고, 반짝이는 표지의 책들이 내 곁에서 수다를 떨어대도 마음을 굳게 다잡았다. ‘안 돼, 넌 그럴 수 없어, 단 한권의 책도 펼쳐볼 권리가 없어, 잔혹한 한국 형리처럼 냉정해져야 해’라고 쉴새없이 나 자신을 타일렀다. 내가 압축통 속에 집어넣고 있는 것들이 무감각한 흙덩이인 양, 그렇게 일했다. p98~99


  저항할 겨를없이 당연한듯 한탸의 지하실에도 변화의 순간이 찾아온다. 그때에 한탸의 선택을 이해하느냐고 아무도 묻지 않기를 바란다.


아무렴, 나는 여전히 쾌활한 사내다. 그런 내가 자랑스럽고, 한 점 부끄러움이 없다…… p131


  그렇다. 고독 속에 있었지만 한탸는 반복된 일에 찌들어 있지 않고 유머를 잃지 않은 노동자였다. 책을 읽으며 행복해하는 지식인이었다. 지저분하고 더럽고 냄새나는 그 지하실 폐지 더미 속에서 “선물과도 같은 멋진 책 한권을 찾아낼지 모른다는 희망”으로 매순간 살아온 한탸의 삶은 그 희망에 기대어 정말 고독마저도 감미로웠다. 현실에서는 바퀴벌레와 쥐의 등장에 나자빠질 것이 분명한데도 그 공간을 상상하며 한탸와 같은 몽상을 해보는 것도 재밌을 거라는 터무니없는 생각이 들 정도로 한탸는 그의 세계에 대한 연민과 더불어 흥미를 가미시켜주었다.

  삽십 오년 동안 폐지 속에 묻혀 있던 사나이. 그곳에서 가져온 책들이 자신의 아파트에도 넘쳐나는 책중독자가 되어버린 사나이. 책과 함께 하기에 늘 너무나 시끄러운 고독 속에 있던 사나이. 그가 마지막 순간에 한 책은 노발리스의 책이다. 노발리스는 <푸른 꽃>을 쓴 독일 시인이다. 낭만주의 시인으로 서른도 되기 전에 사망한 시인이다. 한탸가 읽은 수많은 책, 좋아하는 수많은 작가 중에서 왜 노발리스였을까. 현실과 꿈의 세계가 명확치 않은, 평범한 것에 고상한 의미를, 일상적인 것에 신비스러움을 잘 알려진 것에 미지의 존엄을 담음으로써 낭만화를 발견한다는 노발리스의 말처럼 낭만화고 있는 것이었을까. 여전히 쾌활한 사나이로서의 마음을 잃지 않기 위함일까. 


한 손에 들린 나의 노발리스를 꽉 쥔다. 내가 좋아하는 글귀에 손가락이 올라가고, 입술엔 지복의 미소가 떠오른다. 나는 만차와 그녀의 천사를 닮기 시작했으니까……이제 완전한 미지의 세계로 진입한다. 책을, 책장을, 쥐고 있다……사랑받는 대상은 모두 지상의 천국 한복판에 있다, 라고 쓰여 있다……멜란트리흐 인쇄소 지하실에서 백지를 꾸리느니 여기 내 지하실에서 종말을 맞기로 했다. 난 세네카요 소크라테스다. 내 승천은 이렇게 이루어진다. p131


  한탸는 자신이 좋아하는 책을 들고 좋아하는 글귀를 읽으며 지복의 미소를 짓지만 그 누구도 그의 미소를 볼 수는 없다. 한탸는 그가 좋아하던 폐지 더미처럼 파쇄되어 버렸다.

  이 소설은 책읽기에 대한 이야기로도, 묵묵한 성실하게 일하는 노동자의 이야기로도, 고통스런 사회현실에서 살아남는 것에 대한 이야기로도 읽힐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든다. 그러나 이 모든 것은 무엇보다도 작가 자신의 삶의 이야기이다. 소설이 필시 현실을 반영한 허구적이라는 사실을 알면서도 소설속 인물의 종말까지도 작가의 모습으로 오버랩된다. 물론 환상적인, 몽환적인 색채가 가득하다. 그러면서도 현실과 경계 어디쯤에 있는데도 작가의 능력이 지극한 현실적, 사실적인 느낌이 가득하게 만들었다. 그래서 그 모든 것에도 불구하고 그저 현실에서 일어난 일인양, 너무한 쓸쓸함과 아픔이 뒤따르는 것일 것이다. 한탸 자신이 너무도 쾌활한 사나이었기에 더더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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