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의 발자국
L의 운동화
김숨, 민음사, 2016.
뜬금없이, 놓인 물건을 보며 감상에 젖을 때가 있다. 그것이 그 장소에 새로이 놓인 것이 아님에도 갑자기 과거의 기억속으로 빠져드는 것이다. 그것은 밥일 때도, 간단한 필기도구일 때도, 달력이라도, 운동화라도 상관없다. 물건이 상기하는 것은 물건 자체가 아니라, 과거 경험한 사건과 감정들이니까.
여기 김숨은 소설을 통해 한 사람의 과거가 모두에게 공유되는 매개물을 놓아둔다. 그리하여 수많은 사람이 그 과거속으로 들어가게 된다. 결국 이 소설은 실화라는 이야기다. L의 운동화가 실재하듯 L은 실재하는 사람이었고 그가 살았던 시대가 살아 있고 존재한다. 이야기는 그 과거를, 그 시대를 불러오고 현재는 그 기억으로 들어가기 위해 애를 쓰고 그 기억을 통해, 그 과거로 돌아가 과거의 이야기를 끄집어내는 것이 어떤 의미가 있는지를 생각하게끔 한다.
그러고 보면 그 어떤 존재를 가장 강렬하게 느끼는 때는, 그것이 죽어 갈 때가 아닐까. 희미해져 갈 때, 변질되어 갈 때, 파괴되어 갈 때, 소멸되어 갈 때. p33
최근 한달여 사이 수많은 운동화가 전국 곳곳에서 한 공간에 발자국을 남기고 있다. 촛불을 들고 움직이는 광장의 발자국과 마찬가지로 1987년의 6월에도 L이 제 신발을 이끌고서 촛불을 들 듯 자신의 신념을 들었다. 청년 이한열. 최루탄이 공식적으로 언제 사라진지는 모르겠으니 적어도 1997년에도 최루탄은 있었다. 그때에도 최루탄을 얼굴에 맞은 사람이 있으니까. 시위대를 향해 최루탄은 끊임없이 발포되었다. 민주항쟁이 일어난 10년 뒤에도 상황은 그랬다. 10년 전 1987년 6월, 최루탄은 이한열의 머리로 날아든다. 2015년 11월에 물대포가 백남기 농민의 머리로 날아든 것처럼. 두 사람은 기인 시간 생명을 붙들기 위해 싸우다 결국 사망한다. 이한열은 당시 22살이었다.
피격 당시 이한열은 오른쪽 운동화 한짝을 남긴다. 270㎜ 흰색 ‘타이거’ 운동화. 28년이 지나는 동안 밑창은 100여 조각으로 부서졌고 2015년 미술품 복원 전문가인 김겸 박사는 이한열의 운동화를 3개월 동안 복원한다. 이 복원의 과정이 이 소설의 핵심이다.
하지만 운동화가 어떻게 복원되는지를 그리는 것이 소설의 전부는 아니다. 물건으로서의 운동화의 복원과정과 더불어 ‘왜’ 그것이 복원되어야 하는가를, 그리고 그 운동화가 지닌 물건 이상의 가치를 생각하게끔 이끈다. 운동화를 기억하는 이들의 기억을 모으고 그 시대를, 그날의 이야기를 들려준다.
더불어 복원 진행과정을 이야기하면서 다양한 미술품의 복원 이야기를 곁들인다. 마크 퀸의 자화상이 대표작이다. 마크 퀸은 자신의 두상을 모형으로 한 석고 거푸집에 자신의 피를 부어 응고시킨 「셀프」를 제작했다. 그런데 청소부가 작품을 보관한 냉동고의 전원 코드를 실수로 뽑는 바람에 피가 녹아내려 작품이 훼손되었다. 이 작품이 마크 퀸이 죽은 뒤 훼손된다면 어떻게 복원할 것인지, 마크 퀸의 피를 대체할 물질이 있는지, 타인의 피를 넣으면 그것은 마크 퀸의 자화상이라고 할 수 있을지를 묻는다.
내가 복원해야 하는 것은, 28년 전 L의 운동화가 아니다. L이 죽고, 28년이라는 시간을 홀로 버틴 L의 운동화다. 1987년 6월의 L의 운동화가 아니라, 2015년 6월의 L의 운동화인 것이다. 28년 전 L의 발에 신겨 있던 운동화를 되살리는 동시에, 28년이라는 시간을 고스란히 담아내야 하는 것이다. p100~101
‘L의 운동화’를 복원하는 복원가 역시 끊임없이 질문한다. ‘L의 운동화’를 복원한다는 것은 어떤 의미인가를. 운동화가 생산된 때, L이 운동화를 처음 신은 때, 최루탄을 맞을 때, 얼마만큼, 최대한, 최대한, 보존 처리만 할 것인지, 운동화끈을 풀 것인지, 묶을 것인지 등등 운동화를 복원하기 위한 기술적인 것부터 개념적인 것을 고민하며 복원의 의미를 되새긴다.
L의 운동화를 그대로 두는 것이, 운동화를 신화화하는 것일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든다.
L의 운동화는 시위 현장에서가 아니라 보관 과정에서 파손되었다.
L의 운동화가, L을 넘어서서는 안 된다.
L을 집어삼켜서는. p110
L의 운동화가 L을 넘어선다는 의미는 어떤 것일까. L의 운동화가 보관되고 복원되는 것은 그것이 운동화 자체의 가치가 아니라 ‘L’의 운동화이기 때문이라는 말로 이해될 수도 있다. 또한 복원이란 단어를 역사로 대체해도 의미가 된다. 복원은 곧 역사로서 우리가 역사를 기억하는 과정인 것이다. 우리가 역사를 기억해야 하는 것은 반복된 역사를 통해 배우고 미래지향적인 세상을 위해서라고 했던 교과서적 답변이 생각난다. 그날 왜 누군가는 그 사건이 벌어진 현장에 있었고 소중하게 L의 운동화를 줍고 보관하고 있는지, 우리가 그것에서 배우고자 하는 것은, 배울 것은 무언지를 L의 운동화가 보여주고 있다. 또한 미군 장갑차에 의해 사망한 효순이와 미선이 산건, 제주4.3사건, 일본군 위안부 사건에 대해서도 이야기한다. 여전히 규명되지 않고 규명할 의지도 없는 사건으로 이를 바라보는 정부와 대비해 독일 정부의 홀로코스트에 대한 대응을 비교한다.
이러한 내용들을 담고 있어서인지 구성과 이야기의 방식에서 소설보다 약간 르포, 다큐 느낌이 든다. 그래서 역사에 대한 인식 방식이나, 그 역사의 현장에서 늘 정부에 희생되었어도 민주주의를 위해 힘을 쏟은 국민들에 대한 생각들이 더욱 난다. 아마도 현시국과 맞닿아 있어서일 것이다. 불행한 건 우리가 기억해야 할 역사는 지금도 거짓을 들이미는 정부에 의해 강제로 이뤄지고 있다는 것. 희망은 우리는 또한 여전히 L처럼 운동화를 남기고 있다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