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범의 공포



 선량한 시민

 2013년 제9회 세계문학상 우수상 수상작

 김서진. 2013.


 그것은 누명임이 분명했다. 평범한 주부이자 교통 법규도 한번 위반해본 일 없는 모범적이고 선량한 시민이었던 

은주가 어느 날 아침 경찰에 의해 체포된 것이다. p7


  이것이 사실이라면 또 한명의 평범한 시민이 공권력에 의해 억울함을 당했다. 그것도 살인 사건 용의자로. 그렇기에 이 ‘선량한’ 시민을 보호하기 위해 사건을 더 내밀히 파악할 필요가 있다. 그러나, 결론부터 얘기하자. 그 평범하고 모범적이고 선량한 시민, 은주는 명백히 살인자이다. 더 정확히는 연쇄살인자가 된다. 그녀가 아닌 다른 선량한 시민이 은주에 의해, 은주로 인해 희생된다.  

  시민 강은주. 평범한 40대 전업 주부. 시아버지와 남편, 아들, 딸과 함께 살고 있다. 시아버지는 한때 큰 교복공장을 운영했고 남편은 사업이 망한 후 백수이다. 그렇기에 은주에게서는 그 어떤 살인의 동기를 찾을 수가 없었다. 은주 역시 동네 개천에 만취한 60대 남자가 죽은 사건은 자신과 무관하다고 적극적으로 부인한다. 실족사로 결론 내리려던 사건이 은주가 살인자라는 목격자로 인해 조사가 이뤄지지만 역시 경찰도 다른 증거를 찾지 못한다.

  은주는 고교 동창 모임을 마치고 집으로 돌아가던 중 개천에서 오줌을 누는 남자의 뒷모습을 보고서 등을 밀어버린다. 왜 그랬는지 모르지만 사건은 실족사로 처리되었고 자신은 기억을 잊고 일상의 삶을 잘 살아가고 있었다. 그렇기에 목격자가 있다는 말에 바짝 긴장한다. 그리고 목격자로부터 살인의 이유를 재촉받자 그의 정체를 알아내어 마시던 막걸리에 농약을 타 넣음으로 그를 제거한다. 이제 다시 은주는 선량한 시민으로 살아갈 것이다. 그러나, 은주의 오해로 목격자가 아닌 다른 사람이 살해된다. 여전히 목격자는 남아 있다.

  목격자는 살인 현장을 보고 두려움과 공포보다 ‘궁금함’이 더 차오른다. 관련없어 보이는 이를 살해하는 이유를 알고 싶은 소설가를 꿈꾸는 논술강사 윤창수. 그는 은주의 모든 것을 목격하고 관찰하며 은주로부터 살인의 동기를 알기 위해 애쓴다.

  알고자 하는 자와 알리고 싶지 않은 자의 싸움이 시작된다. 과연 누가 승리할 것인가? 독자의 입장에선 윤창수의 편에서 은주의 살해동기를 알고 싶다. 그러나 은주 자신도 그것에 대해 뚜렷이 알지 못한다. 심지어는 살인을 하고서도 멀쩡히 일상을 살고 있고 그 자신도 그것에 대해 무심하다.


설명할 수 없고, 이해할 수 없는 것을 설명하고 이해하려고 하지 말자. 단지 받아들이면 되는 것이다. 그렇게 생각하자 은주는 마음이 편안해졌다. 왜 가공의 연쇄 살인범이 현실로 나타났는지, 자신은 왜 아무런 이유 없이 사람을 죽였는지, 사람을 죽이고도 왜 아무렇지도 않은지 이해하려 하지 말자. 단지 받아들이면 되는 것이다. 그뿐이다. p195


  생각해보면 선량한 시민을 힘들게 하는 것은 경찰이다. 동네에서 일어난 두 건의 살인에 대해 경찰은 전혀 범인을 밝히지 못하는 것이다. 첫 번째 살인이 동기없이 일어난 것이라면 두 번째 살인은 명백한 동기가 있다. 그러나 두 사건의 관련성을 찾지 못하는 경찰은 여전히 첫 번째 살인 용의자가 아닌 은주에 혐의점을 두지 않는다. 그러기에 은주는 너무나, 평범하다.

  사람들은 동네의 연속적 살인에 공포를 느끼지만 은주는 예전처럼 별일없이 산다. 단지, 윤창수와의 밀당만이 있을 뿐이다. 하지만 윤창수는 다르다. 그는 삶이란 우연과 충동에 의해 이해할 수 없이 흘러간다는 생각을 가지고 사는 사람이다. 그러면서도 은주의 살인 동기를 알고 싶어하는 그는 살인 사건으로 조사를 받은 적이 있다. 고교 시절 과학실 수은 중독으로 과학교사가 사망했는데 그날 창수가 수은을 쏟았던 것이다. 과학 교사의 죽음이 창수의 실수 때문일 수도 있고 아닐 수도 있지만 창수에게 그 기억은 오래 남아 있다. 창수는 그 죽음의 이유를 여전히 이해하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그때의 그 사건에 대한 이해를 풀고 싶은 욕구이듯 은주에게 집착하는 그로 인해 결국 창수가 두 사건의 용의자가 되어 경찰에 잡혀가게 된다. 그리고 그는 알다시피, 너무나 평범하지 않다.


동기가 정말 중요한 것일까. 창수는 의심스러웠다. 어떤 결과에는 반드시 어떤 이유가 있고, 엄청난 일에는 그만큼 엄청나고 절박한 이유가 있을 것이라는 생각은 우리의 착각일지 모른다. 사람들은 누구나 때로 절박한 심정이 되곤 하지만, 그 절박함들은 대부분 아무것도 남기지 못하고 사라진다. 반대로 아무것도 아닌 사소한 이유가 때로는 엄청난 결과를 가져오기도 하는 것이다. 무엇이 이러한 차이를 만드는 것일까. 그것을 동기라는 말로 설명할 수 있을까. p93 

  

  왜? 왜 그랬습니까?

  뉴스를 보아도 드라마를 보아도 무엇을 하는 것에 대한 중요 질문은 항상 “왜”다. 얼굴을 가린 범인들에게 묻는 기자들의 질문은 항상 “왜 죽였습니까?” “미안하지 않습니까?” “사과한마디 하십시오.” 가끔 이런 말들이 너무나 공허하고 무의미하게 느껴질 때가 있다. 체포되어 경찰서로 이성되는 범인들을 향해 미안하냐고 물은들, 사과하라고 말한들…. 그럼에도 말이라도 그렇게 해야 된다고 보는 것일지도 모른다. 그것이 도리라고 생각하는 것도 같다. 그러면서 범인이 “죽을 죄를 지었습니다.”라고 말을 해야 비로소 심신의 안정을 느끼는 듯하다. 그리고 범인이 묵묵부답이면 그것대로 또 비난을 쏟으며 참을 수 없어 한다. 어떤 경우라도 잘못한 사람에게서 그것의 진정성을 떠나 입 밖으로 “잘못했다”는 말을 듣고 싶어하는 ‘선량한’ 시민인 우리.


지극히 평범한 아줌마의 껍질 아래 비인간적인 공격성과 철저한 이중성, 사람을 죽이고도 눈 하나 깜빡하지 않는 무심함이 자리 잡고 있다고 생각하니 창수는 거의 전율을 느꼈다. 그 전율은 기막히게 아름다운 여자를 발견했을 때 느끼는 충격과도 유사했다. 평범한 말만 골라 하면 할수록 은주는 더 신비롭게 보였고, 은주 앞에서 자신은 너무나 평범한 인간인 듯한 겸손한 마음이 들었다. p133

 

  선량하게 살고 있고 선량한 이웃과 살고 있고 선량하고 싶은 시민은 ‘선량하지 않은’ 이들은 따로 있다고 생각한다. 그들은 이미 몸속에 그러한 기질이 내재되어 있고, 그러한 기질을 드러낼 환경 속에서 살거나 자라 와 ‘선량하지 않은’ 시민이 된다고 생각한다. 결국 이러한 편견이 그 옛날부터 범죄자의 얼굴은 따로 있다, 같은 생각을 만들고 신념화한다. 실체를 알아보기 보다는 외면에 표피에 집착한다. 우리들 살고 있는 곳곳에 속속들이 진실을 감추고 선량함을 가장한 ‘은주’와 같은 시민이 아주 평범하게, 아주 우아하게, 아주 별일없이 살아가고 있을 것이다. 그들을 바라보는 눈을 키우지 않는 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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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희



 너무 한낮의 연애, 김금희, 문학동네, 2016.

  

  소설이나 영화 속 인물은 캐릭터의 특성이 어떠한 경우라도, 현실적이지 않다고 비난받지 않는 것일 게다. 현실 가능성을 가늠한다 해도, 우선은 실존 인물이 아니라는 것을 항상 전제하기에 그럴 것이다. 그런데도 김금희 소설에선 이야기는 사라지고, 아니 조금 뒤로 가고 인물이 부각되어 남는다.

  가령, 「너무 한낮의 연애」에서 양희가 어쨌다거나 필용이 어쨌다거나 하는 것 없이 통째로 ‘양희’가 생각나는 것처럼. 굳이 연관성을 짓자면 양희는 캐릭터는 드라마 <연애시대>의 ‘지호’ 캐릭터가 떠오른다. 떠올라 가만 생각하니 드라마 속에서 지호 역시, ‘양희’와 같은 톤으로 사랑을 고백했고 고백을 들은 남자는 필용과 같은 반응을 한다. 그래, 이렇게 유사 캐릭터가 생각났으니 “독특한” 이란 수식어를 빼도 되겠다. “조중균”이나 “세실리아” 역시도 그들의 특징이 너무나 뚜렷하여 현실세계에 없을 듯한 인물인 듯 보였다가 점점 그들의 행동이, 사고가 뭐가 그리 다른가, 하는 생각을 하게 된다.

  반대로 그들을 제외한 다른 이들이 너무나 똑같은 것일 수도 있다. 특별한 ‘다름’은 ‘나’와 같지 않음이 우선하고 ‘내가 아는’ 선에서의 다름이 되니까. 누군가의 다름이 내가 쫓고 싶은 것이라면, 지양하고자 하는 바라면 그 인물의 ‘다름’은 각각 다르게 다가오지 않겠는가.

  누구에게나 여러 가지 모습의 ‘나’가 있다. 그 많은 면면 중에서 우리는 보고 싶은 것만을 본다. ‘세실리아’에 대해 수많은 이들이 각자의 시선으로 ‘세실리아’를 기억하며 그것이 ‘세실리아’라고 자신하는 것처럼. 끊임없이 내 기준으로 구별하고 그것에 의지하여 사람을 판단한다. 같지 않음의 이유로 ‘판단’의 대상이 되는 양희의, 조중균의, 세실리아의 다름은, 어떻게 ‘나’의 세계와 가까워질 수 있는가.


양희와 필용의 허무하고 특별한 것 없던 관계가 다른 색채를 띠게 된 건 양희의 느닷없는 사랑 고백 때문이었다. p20



  나와의 거리가 어떻게 형성되고 있는지 ‘아직’ 정해지지 않은 사람과의 관계가 변하게 되는 가장 큰 이유는 타인의 ‘고백’이다. 양희만이 갖는 고백의 특별함이란 그것이 느닷없고, 상대방의 반응에 ‘영향’을 받지 않는 듯해 보인다는 것이다. 사랑 고백임에도 건조하고 무심하고 또한 지극히 일상적인 이 고백의 힘은 오히려 고백받는 이를 당황하게 하며 마침내, 강한 힘을 부여하게 한다.

 

시설들에게는 말이 없고 시설들에게는 응시가 없다. 시설들에게는 관계가 없고 시설들에게는 터치가 없다. p17~18


  시설관리로 인사이동 조치된 ‘필용’이 내뱉는 말을 인간관계로 돌려서 이야기하면 같은 이야기가 되지 않을까. 우리는 타인을 이와 같이 ‘시설들’로 바라보다가 고백과 같은 일들, 조금도 명민하게 갖는 관심, 열린 시선으로 바라보면서 관계의 전이를 이루게 된다는 것. 양희가 독특하며 유일한 캐릭터라 생각하다 이내 비슷한 ‘지호’를 떠올리게 된 것처럼, 결국엔 조금씩의 유사성을 찾아 관계를 맞추어가는 것이라는 것.

  「너무 한낮의 연애」의 연애가 제목처럼 양희의 이름처럼 ‘양’의 기운이 샘솟아 전체적인 서술의 분위기가 같을 줄 알았더니, 그렇진 않았다. 그럼에도 여전히 양희의 기운만이 남아 책의 느낌을 지배한다. 서정적인 느낌이 드는, 나도 모르는 새 내 등을 누군가 토닥여 주는 느낌이. 물론 그것은 양희일 거고. 양희의 고백을 받은 듯, 고백한 당사자는 이미 저 멀리에 있는데 뒤늦게 양희를 쫓아가고 있다. 물론, 이때의 양희는 작가 김금희일 거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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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개는 아직 걷히지 않았다



 최은영, 쇼코의 미소, 2016


  소설집 『쇼코의 미소』에서 외면적으로 눈에 띈 건 등장인물의 공간적 위치다.  20대의 청년들이 당연하다는 듯 어딘가, 아니 구체적으로 다른 나라에 있거나 가려거나 갔다 왔다. 작가가 교환학생이나 외국 생활의 경험이 있나 하는 생각이 먼저 들 정도로 나는 왜 그많은 이야기들을 제쳐두고 이게 제일 눈에 띄었을까.

  소설집의 전체적인 분위기는 ‘낮게 깔린 안개가 아직 걷히지 않은 상태’처럼 느껴졌다. 정서적인 느낌을 말함인데, 정적인 이 분위기는 배경에도 영향을 미쳐 이국의 지명이 등장함에도 그곳이 국내인지 국외인이 구분이 되지 않을 정도다. 어찌 보면 지명이란 부수적인 것일 뿐, 본질적인 아닐 것이다. 그것이 내용을 압도하는 공간적 배경이 되지 못한다고 할 수도 있겠지만 이제 소설 속 이국은 마냥 낯선 곳이고 먼 곳이라는 이미지가 약해지고 있다는 얘기일지도 모르겠다.


그때만 해도 내가 다른 사람들과는 다른 삶을 살 수 있으리라고 생각했다. 나는 비겁하게도 현실에 안주하려는 사람들을 마음속으로 비웃었다. 그런 이상한 오만으로 지금의 나는 아무것도 아니게 되어버렸지만, 그때는 나의 삶이 속물적이고 답답한 쇼코의 삶과는 전혀 다른, 자유롭고 하루하루가 생생한 삶이 되리라고 믿었던 것 같다. p31. 쇼코의 미소 


  또한 우리의 청년들은 한국에서나, 외국에서나 그 삶이 비슷한 일면을 보이고 있다는 얘기일지도. 그들은 희망하거나 절망을 이유로 한국을 벗어나 있지만, 희망이나 절망의 근원은 ‘내적인 것’이 더 주요한 해결책일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그것을 알기 위해서는 ‘거리’가 필요한 것일지도 모르겠다. 심리적이든, 공간적이든.

  

시간이 지나고 하나의 관계가 끝날 때마다 나는 누가 떠나는 쪽이고 누가 남겨지는 쪽인지 생각했다. 어떤 경우 나는 떠났고, 어떤 경우 남겨졌지만 정말 소중한관계가 부서졌을 때는 누가 떠나고 누가 남겨지는 쪽인지 알 수 없었다. 양쪽 모두 떠난 경우도 있었고, 양쪽 모두 남겨지는 경우도 있었으며, 떠남과 남겨짐의 경계가 불분명한 경우도 많았다. p89. 신짜오, 신짜오


  또하나, 걷히지 않은 안개의 느낌은 타인에 대한 ‘나’의 태도다. 제 이해의 틀에서 생각하고 타인에 대해 적극적으로 이해하려고 애쓰지도 않지만, 그렇다고 굳이 외면하진 않고 있구나, 라는 느낌. 그래서 희미한 안개 속에서 그들은 손을 내밀 수 있을 것이라고.  베트남 전쟁과 세월호, 그리고 민주화 운동을 소재로 하면서 엮어 가는 이야기들이 시대적인 우울을 주면서도 그래서 무거움을 인식시키면서도, 사람에 기대어 희망의 느낌을 갖게 하는 것일지도 모르겠다. 조금씩 아픔을 보아가도록 하면서. 그래서, 이 안개 속을 벗어나기 위한 방법은 서로 의지하는 것일 거라고.

  이것이 우울에 내려앉는 느낌이 들다가도 되살아나도록 이끌어 주는 힘인 모양이다. 최은영의 우울은, 퇴폐적이고 무겁지 않은 우울이라고 해야 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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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르침이 필요한 사람들


남자들은 자꾸 나를 가르치려 든다, 리베카 솔닛, 창비, 2015.


폭력은 타인을 침묵시키고, 타인의 목소리와 신뢰성을 부정하고, 내게 타인이 존재할 권리를 통제할 권리가 있다고 주장하는 한 방법이다. p18~19


  성차별과 인종에 대한 편견이 크게 문제로 부각된다. 충격적인 일들과 함께 접하기도 하지만 coincidence와 같이 황당한 상황과 함께 전해지면 이젠 웃어야 할지 울어야 할지 모르겠다. 그런데 그런 이야기들이 넘쳐난다.

  어두운 밤 외국 여성에게 다가가 coincidence의 발음을 어떻게 하는지 요청했다는 이 남학생에게 외국 여성은 밤9시에 인적이 드문 곳에서 낯선 이에게 그런 것을 물어보는 것은 이상한 일이라고 거절한다. 이에 남학생은 소리를 지르고 욕설을 한다. 물리적 위협까지 느낀 이 여성은 경비원을 부르고 큰길로 나갔다. 마침 지나던 여학생들이 달려와 괜찮냐며 두 사람 사이를 오가며 상황을 진정시킨다. 이 와중에도 남학생은 “영화를 보면 다 그렇다고, 외국인들은 다들 잡담을 한다”라는 말을 했다고 한다. 이 비상식적이고 이기적인 남학생의 행태만큼이나 나를 비탄에 빠지게 한 것은 두 여학생에 관한 것이다. 이 외국인 여성의 눈에는 남성이 마구잡이로 화를 내는 상황에서 두 여학생이 남학생에게 거듭 사과를 하는 듯이 보였다는 것이다.

  정확하지 않을 수도 있다, 그렇게 보였다고 했으니까. 이 상황에서 남학생이 자신을 ‘성추행범’ 혹은 그 이상으로 오해하는 듯해 격분했다라고 말을 했다면 차라리 이해가 더 쉬웠을 것이다. 저런 황당한 말을 하면서 잘못을 외국인 여성에게로 돌리며 제가 화를 계속 내고 있다는 사실에 기가 찰뿐이고, 그런 남학생에게 여학생들이 사과를 하는 맥락은 도대체 뭐인가? 이것은 너무나 익숙한, 자주 보아야만 했던 모습 아닌가. 폭력을 휘두르는 남편, 남자친구에게 빌고 있는 풍경. 아무런 안면없이도 폭력을 휘두르는… 이들.


 남자는 욕망과 그 욕망이 퇴짜 맞을지도 모른다는 노여운 전망을 함께 품고서 여자에게 접근한다. 분노와 욕망은 늘 함께 존재하며, 두 가지가 마구 뒤엉켜 한덩어리가 된 상태에서는 언제든 에로스가 타나토스로, 사랑이 죽음으로 바뀔지 모르는 위험이 존재한다. 가끔은 정말 말 그대로 된다. p46 


 남자들이 자신의 감정적, 성적 욕구를 충족시키지 못하는 상황에 분노로 반응하는 것은 너무나 흔한 현상이다. 다른 여자들이 자신에게 했거나 하지 않은 일을 갚아주기 위해서 엉뚱한 여자를 강간하거나 처벌해도 된다는 생각도 마찬가지다. p193~194


  한국의 대학교에서 일어난 이 ‘coincidence’ 사건에서, 외국인 여성은 러시아 출신, 이 학교 외국인 교수였다. 남학생은 이 여성이 교수임을 알았으면 달리 행동했을까? 많은 사람들이 경찰에 신고하라고 조언하였지만 이 교수는 학생에게 공개 서한을 보내기로 했다. 이 학생의 행동이 “왜 용납할 수 없는 것인지를 교육하는 것”은 교수로서의 의무라고 생각한다며.


 나는 학생의 행동이 성차별적이라고 생각합니다. 왜냐하면 밤 9시에 외진 곳에서 영어를 가르쳐 달라고 요구하면서 낯선 백인 남성에게 접근하지는 않았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이 사건이 성차별적이라고 생각하는 또 하나의 이유는 다음과 같습니다. 이 일은 대중 매체에 보도된 사건들을–한국에서, 그러나 한국 외의 다른 곳에서도 마찬가지로 벌어지는 사건들을- 떠올리게 합니다. 바로 남성의 불쾌한 접근을 여성이 거절했을 때, 그 여성에게 소리를 지르거나, 여성을 괴롭히거나, 여성을 폭행하는 사건들 말입니다. 이러한 일들은 “강간 문화”라고 비판을 받아 왔습니다. 즉, 여성에 대한 남성의 권리 주장과 폭력을 제도화하는 사회 안에 배태된 여성혐오적인 문화인 것이죠. 

        - 서울대학교 인류학과 페도렌코 올가 조교수의 공개서한 중(中)


   이 공개서한에 남학생이 어떤 행동을 보였는지는 아직 보도되지 않았다. 그러나, 이 교수가 감정적으로 일을 처리하지 않은 것은 매우 감탄스러운데 남학생 역시 그 감탄을 안다면, 제 잘못을 깊이 깨닫는다면, 다시는 이와 같은 행동을 하지 않을까. 의식 깊이 쟁여놓은 이 여성에 대한 편견과 정형과 폭력성을 완전히 소거시킬 수 있을까. 올가 교수가 지적한대로 외국인 남성이었으면 그런 식으로 접근하지 않았을 것이다. 나아가 남학생이 올가가 ‘교수’인 것을 알았다면 이런 일이 벌어졌을까. 올가 교수가 말하는 바대로 좀더 예의를 갖추어 질문을 할 수는 있겠다. 그러나 남학생의 의도는 정말 저 단어의 발음을 궁금해 했을까를 의심케 한다. 그의 이어진 반응이 그것을 보여주고 일단, 올가 교수가 이 학생의 접근에 불쾌함과 공포감을 함께 느꼈다는 점이다.

   이 기사를 보고 이 책, 『남자들은 자꾸 나를 가르치려 든다』가 떠오른 것은 “가르침을 받아야 할 남자에게 가르치는” 상황때문일지도 모르겠다. 리베카 솔닛의 이 책은 페미니즘을 다루고 있지만 일상생활에서 겪는 이런 차별적인 상황을 먼저 이야기하며 흥미와 공감을 이끌어 낸다. 그리하여 이 유사한 상황들에 웃음까지 나온다. 전세계적으로 같은 이 상황들, 현상들을 어쩌랴.

  수없이 세상은 변했고 수많은 이들이 사고방식이 변화되었다고 주장하지만 도대체 그 ‘수많은’은 어느 정도를 이야기하는가. 이 남학생처럼 자기만의 사고방식에 갇혀 제 행동의 정당성을 폭력적으로 주장하는 상황을 반복해 맞닥뜨리게 되니, 이 세상의 페미니즘은 아직도 멀었다고 말할 수밖에 없다. 더구나 성차별의식이 높아졌다고 말하는 동시에 반작용인지 여성혐오는 확산되고 있지 않은가.

 페미니즘을 여전히 여성도서라고 인식하고 있는 것도 변화를 더디게 하는 요인이 되는 것 같다. 페미니즘이 포함하고 있는 양성적인 개념을 외면하고 ‘여성’에 한정지어 생각하기 때문이기도 하다. 사고의 전환은 인식의 전환은 이런 책을 외면하지 않는 것에서 출발한다. 마치 금기의 도서를 보는 듯이 하지만, 이 책은 상당히 재미있다. 그것이 리베카 솔닛의 장점이다. 유쾌하게 이야기를 이끌어가면서 통찰력있게 상황을 간파한다. 수전 손택과 버지니아 울프, 그리고 신화 속 등장인물 카산드라의 이야기에서도 보다 생각할 거리들을 전개시킨다.

  그리고, 이 책은 짧다. 페미니즘의 개념 설명도 상당히 쉽다. 그녀가 주창하는 맨스플레인이라는 단어에서 보듯, 리베카는 설명을 아주 잘한다.


남성권리운동과 대중적으로 퍼진 숱한 오보들 때문에, 사람들은 요즘 성폭행 무고가 만연했다고 여기곤 한다. 집단으로서 여성은 신뢰할 만하지 못하고 오히려 거짓된 강간 고발이 진짜 문제라는 암시는 개별 여성을 침묵시키고, 성폭행에 관한 토론을 회피하게 만들고, 남성을 주된 피해자로 부각하는 도구로 쓰인다. p169~170


   물론 이 모든 이야기들의 중심이 여성의 억압적인 상황과 여성성을 비하시키는 상황과 침묵의 세계에서 허덕이는 여성을 향한 정체성 정립이 주가 되고 있기에 흥미 유발이 안된다고 생각할 수도 있겠다. 페미니즘은 다 거기서 거기이니까, 생각할 수 있겠다. 하지만 그렇다면 새로운 담론을 찾아낼 수도 있지 않을까. 왜 거기서 거기인 이야기를 수많은 이들이 하고 있는지, 그럼에도 수많은 이들이 하고 있는 만큼 아는데도 왜 여전히 현실은 이 모양인지 말해 줄 수 있지 않는가. 계속 들으면서도 무시하는 이유는 무엇인지를. 리베카가 이야기하는 이 여성혐오와 폭력의 구조들에 대한 전개에 반론이 있다면, 그 모든 것들을 ‘가르쳐주지’ 않겠는가. 충분히 들을 의향이 있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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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incidence


Synchronicity 리더란 무엇인가

- 싱크로니시티, 미래를 창조하는 리더십 내면의 길

조셉 자보르스키, 에이지21 , 2010.


 

 실검에 등장한 coincidence를 보면서 감정과는 별개로 떠올린 몇 가지 생각 중 하나는   Synchronicity였다. 의미의 차이가 있음에도 이 단어가 연상된 것은 한국번역본의 제목 때문이었을지도 모르겠다.

  그러니까 coincidence의 발음을 빙자로 발생한 이 ‘우연한’ 사건을 보면서 단순한 우연의, 일회성이 아니라 사건 당사자의 내면에 깊이 잠재된 의식의 분출이라는 생각을 하며 홀로 경악하고 있는 중이었다. 당연, 기사와 댓글들은 놓치지 않고 여기에 이 학교를 거론한다. 왜냐면 우리나라 최고의 지성으로 불리는 곳에서 벌어진 일이고 우리나라에서 이 최고의 지성, 서울대가 차지하는 위상은 단순하지 않기 때문이다. 이런 인간이 지성인이라며, 공부를 잘했네라며 사회에 나와서 어떤 꼴로 군림할까를 생각하다보니 울화가 치밀어 올랐다. 지금 대한민국을 흔드는 이 난리의 중심을 잡고 줄줄줄 연달아 있는 사람들 대다수가 학력과 학벌의 위용을 자랑하고 있으니까. 같은 꼴. 소위 엘리트라는 인간들의 저열함이 미래에까지 연장되는 것을 보았다고 하면 비약인가. 연장될까봐 걱정이다가 더 적합한가.

  Synchronicity는 한국에서 「리더란 무엇인가」라는 제목으로 번역출간되었다. 타인의 리더십을 생각하게 되는 때는 언제일까. 누구라도 리더십을 발휘해야 하는 때가 있다. 내 자신에게도 리더십을 발휘해서 내 삶을 이끌어가야 하기도 하고. 그래서 이 책은 「미래를 창조하는 리더십 내면의 길」이란 부제가 붙었나보다. coincidence, Synchronicity, 리더란 무엇인가로 이어지는 연결고리는 사실 이렇듯 간단하다.

  해괴망측한 리더와 그 리더십에 따라 삶이 나락을 치는 상황에서 리더의 역할과 자질에 대한 요구가 특히나 부각되는 이때, coincidence로 인해 이 책의 내용이 되살아나는 이런 우연이 놀라운 건, 이 책의 출발이 워터게이트사건이라는 점이다.

  이 책은 리더십에 대해 이야기하면서도 여느 리더십 역량책과는 다른 특이점을 보인다. 리더십은 무엇인가, 리더의 자질이 어떠해야 하는가라며 첫째, 둘째, 셋째, 이런 도식화된 나열을 하지 않는다. 그리고 ‘외면’적 리더의 역량에 대한 것보다는 끊임없는 진정한 리더의 자질에 대한 조건을 탐구해가는 여정이라고 보면 된다. 이런 내용을 전개하기 위해 저자는 두 명의 대표적인 학자를 생각나게 한다. 한명은 동시성이라는 개념을 전개시킴 칼 융이며 또다른 사람은 신화학자 조셉 캠벨이다. 그러니까 이 책은 내용적으로는 칼 융의 ‘동시성’을 형식적으로는 조셉 캠벨의 ‘영웅의 여정’에 따라 서술하는 것이다. 

  칼 융은 “둘 혹은 그 이상의 의미심장한 사건들이 동시에 발생하는 현상으로, 여기에는 우연한 가능성 이상의 뭔가가 작용하고 있다.”라고 동시성을 정의한다. “믿기지 않을 정도로 모든 상황이 딱 맞아떨어지는 순간들, 예상치 못한 일들이 일어나 우리에게 확실한 길을 알려주는 그런 순간들”에 딱 어울리는 말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럼 이 동시성이 어떻게 리더십과 연결되는 것일까.

  저자는 변호사이다. 그는 한국의 박근혜 게이트보다는 덜 추악한 사건이라고 하는 미국 역사상 가장 추악한 워터게이트 사건을 겪으며 ‘리더’에 대해 다시 생각한다.


그리고 나는 지금 은밀한 닉슨의 모습을 보고 있었다. 리처드 닉슨이라는 사람의 진모를 헌법을 아무렇지 않게 여기고, 터무니없이 권력을 남용하는 모습이 충격적일 뿐만 아니라 속이 다 메스꺼릴 정도였다. 충격과 혐오감이 솟구쳤다. 나라 전체가 걱정스러웠다. 인격이라곤 손톱만큼도 없는 그런 사람이 지금까지 나라를 이끌어왔다는 사실을 깨달은 뒤에 국민들이 느낄 공포와 불안이. 도덕성과 윤리의식이 저렇게 형편없는 사람이 어떻게 세계 최강대국의 수반 자리에 오를 수 있었을까? 어떻게 이런 일이 일어난 걸까? 누구의 책임인가? 이런 일이 재발하지 않게 하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 p54


  다행히 저자는 이런 ‘리더’가 잘못했다는 생각을 하는 상식적인 사람이었고 대통령의 거짓말에 경멸감과 환멸을 느낀다. 저자는 “권력을 남용하는 파렴치한 리더들과의 악순환 고리”가 문제라고 인식하며 촛불을 든 대한민국의 국민들과 마찬가지로 무엇을 해야 하는지를 진지하게 고민한다. 이런 상황을 바꾸지 못하리라는 무력감이 자신을 괴롭혔지만 진정한 변화를 가져오기 위한 방법을 고민하며 '진정한 리더란 무엇인가'를 찾기 위한 여행을 떠난다.

  여행에서 그는 철학자, 물리학자, 경영자 등 다양한 사람들과의 만남을 통해서 “리더의 자질”에 대한 진실한 접근과 결론에 이른다.

  이 여행을 하면서 그는 자신의 이 여행이 단순한 일이 아니라 ‘모험에의 부름’을 받은 것이라고 ‘소명’이라 생각한다. 조셉 캠벨은 영웅이 길을 떠나는데 그것은 영웅으로 하여금 그 길을 떠나도록 만드는 사건들이 존재하기 때문이라고 설명한다. 그리하여 그 모험에 따라 영웅은 온갖 역경을 겪으면서도 마침내 목적과 꿈을 찾고 제가 있던 곳으로 돌아오는 패턴을 보인다는 것이다. 저자 역시, 이 영웅의 귀환의 패턴을 따라 길을 떠나고 역경을 겪고 결론을 찾고 되돌아오는 것이다.

 그렇게 저자가 찾은 리더는 어떤 것인가. 저자는 리더십을 다음과 같이 이야기한다.


리더십이란 사람들이 내부에서 계속 현실에 대한 이해를 심화시키고, 세상의 펼쳐짐에 참여할 능력을 키우는 그런 영역을 만들어내는 일이다. 리더십이란 새로운 현실을 창조하는 일이다. p19~20 


  이와 같이 저자는 새로운 사고방식이 미래를 변하게 하리라 생각하며 이것을 가능케 하는 것을 리더십의 진정한 역할이라고 말한다. 변화를 주도하는 창조적인 리더십이 되기 위해서는 강한 헌신과 광대한 비전을 갖춘 리더십은 환경에 얽매인 리더십 조직이 아니라 우리가 살고 있는 공동체, 우리가 살고 싶은 세상을 선택할 수 있다는 것을 자연스럽게 받아들일 것이라고 얘기한다. 특히 성공적인 리더십을 발휘하려면 행동이 아니라 존재방식을 근본적으로 바꿔야 한다고 말한다. 타인에 대한 깊은 헌신, 애정이 필요하다고 말한다. 이것이 사람들의 마음을 움직이게 하고 용기를 북돋는다고 그리하여 실천으로 이끌 수 있다고 말한다.

  그러나 이런 리더십을 위한 헌신의 노력의 과정엔 당연 어려움들도 따른다. 그러나 이러한 것에 흔들리지 말고 내면의 부름에, 목소리에 따라 힘껏 나아가라고 말한다. 이러한 저자의 러더십에 대한 자질을 잘 들여다보면 그것은 끊임없는 내면탐구의 과정임을 알 수 있다. 전혀 별개의 일들이 진행되는 것처럼 보이지만 결국엔 그것은 하나의 관계된 힘을 만드는 연결고리를 짓는다고 말한다. 얼핏 미래의 창조를 위해 열린 사고를 갖는 일은 더불어 순간순간의 일들에도 충실할 것을 주문하는 것처럼도 보인다. 어느새 그것을 조직적으로 연결지어 미래를 창조하는 힘으로 이끌어가는 것이라면 말이다.


삶이라는 여정에서 무시할 수 없는 부분이 내적인 투쟁으로 채워진다. 이런 내적인 투쟁을 통해서 누적된 부담감을 극복해야만, 다시 펼쳐지는 생성적 질서의 흐름 안에서 움직이게 된다. 내적 투쟁에서 승리하는 유일한 방법은 글자 그대로 그것을 ‘겪는’ 것이다. 말하자면 함정들을 만나고 겪으면서 거기서 새로운 교훈을 배우고 성장하는 것이다. 이는 값을 매길 수 없는 귀중한 경험이다. p234


  워터게이트로부터 충격받은 저자의 깊은 내면탐구와 미래 변화에 대한 욕구가 얼마나 간절한지는 저자의 개인적인 이야기와 불투명하게 흩트려지는 융의 이론에서 드러나는 것 같다. 사고방식이나, 내적인 진실성에 더 깊이 의미를 부여하는 듯한 느낌, 내가 이해하는 명확성과는 별개로 약간은 초자연적인 것에 대한 기대도 깃든 듯해서 하는 말이다. 그러니까, 잘못 이야기하면 지금 대한민국에서 벌어지고 있는 “우주의 기운”으로 이해될까 염려스러운 바도 없지 않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리더’의 자질엔 사명감도 포함하여 심리적인 ‘확신’, 그 역할에 대한 ‘확고한 믿음’ 또한 필요하리라는 것이다. 아니다. 최고로 간단한 말은 그냥 이럴 것 같다. “도덕적이어라, 끊임없이 배워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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