닭치고 정치

 

  김어준은 자신의 이름 자체로 자신의 정치적 성향을 드러내고 있다. 기승전결이 일관되어 그와의 정치성향이 맞지 않다면, 스킵하면 된다. 그의 책도 팝캐스트도 그의 말도. 대부분 그렇다. 교류가 잦고 친한 경우라도 특정한 부분이 맞지 않으면 굳이 그 부분을 꺼내어 함께 하지 않는 경우가 많다. 업무적인 부분이나 사적인 일에서나. 아마도 후자의 경우는 보다 맞는 사람과 어울리려 하지 굳이 맞지 않는데 어울리려 애쓰지는 않을 것이다. 어떤 ‘이유’가 있지 않고서는. 그 맞지 않음을 감내할 필요가 없다.

   하지만 감내하는 것도 한계가 있는 일이다. 내가, 감내해야 할 ‘이유’는 과연 있는가. 정치라는 것은 특정 정치인의 정치행위가 아니다. 그 정치로 인해 파생된 결과를 내가 온 몸으로 받기 때문에 나와 맞지 않는다는 이유로 ‘스킵’할 순 없는 일이다. 집권 정치인의 정치행위를 ‘무시’할 수 없는 이유다. 관심 없다고 보기 싫다고 클릭하지 않는 기사와는 차원이 다르다. 그래도 몇 개쯤은 클릭하지 않는다. 대략 내용과 결과가 예상되는 기사는 ‘스킵’. 그럼에도 온 몸으로 받는 기사는 수두룩하고 그 결과는 참담하다. 최근에도 끊임없이 각종 사고와 사건 소식이 상위를 오르내리고 있다. 교통사고, 화재 및 안전사고, 자살, 성폭행, 아동학대·유기, 살인….

  아무리 정보사회라지만 지나치게 사고가 잦다. 하루에도 몇 번이나 대형 사고가 빗발친다. 오늘을 장식한 사고가 어제의 사고가 아니라 지명을 달리한 채 전국에서 들끓고 있다. 마치, 폭정의 시대 농민봉기처럼. 차라리 봉기라도 되면 좋겠다. 안타까운 사고들을 볼수록 안쓰럽고 답답하다. 안전한 대한민국은 점점 멀어져간다. 부주의라고 말하지만 공사 현장의 잦은 사고들이 과연 우연일까. 개인의 안전이 위협받고 보장되지 않는 사회, 사회면의 무수한 기사들은 정치면의 허무개그식의 ‘정치행위’의 결과라고 말한다면 지나친 비약이 되나?

  기사들을 보다 역시 김어준이라는 생각이 든 것은 ‘닥치고 정치’라는 제목이 어쩜 이리 어울릴까라는 생각때문이었다. 물론 김어준은 어쨌든 ‘정치에 관심을 가져야 한다’는 주장을 이 제목 하나로 표현했다. 하지만 정치권도 이에 답하고 있다. 그냥 ‘닥치고’ 막가는대로 정치행위에 몰두하고 있다. 집권시기도 얼마 남지 않았으니 더욱 더 그러할 것이다. 사실, 기가막힌 일들이 한두어개가 아님에도 불구하고 어쩌면 사소한 하나에 폭발이 되고 마는 것은, ‘닥치고’ 정치에 익숙해져서이다. 하지만, ‘으레 그렇지 뭐’라는 말이 나오는 엄청난 사건들에 반초연했다가 ‘반’을 떼어버리도록 울분이 터진 것은 장관 임명 사건이다.

  어쩌면 집권 정권 통틀어 반복된 일이기도 하고 다른 일들에 비해 아주 사소한 일이다. 그럼에도 이 시점에, 여전히 신뢰를 주지 못하고 있는 이 정권에서 한 나라의 장관을 선발하는 일에 여전히 ‘닥치고’를 실현하다니. 기본이고 예의다. 이럴 거면 인사청문회의 필요성이 있는가.

    

박근혜의 사사롭지 않음은 사사로울 필요가 없어서 사사롭지 않은 거야. 아버지가 국가고, 정치는 제사고, 생활은 관념이니까. 사사로울 이유가 없는 거야.

생활을 전혀 겪어보지 못했어. 정치는 결국 생활이 대상인 건데. 생황이 관념이니 정치도 관념인 거지. 사람들은 그걸 결국 구분해낼 거라고 봐. 우리 모두는 생활인이니까. p69.70 


  이렇게 나의 일상은 사소하지만 사소하지 않은 일로 사소해소는 안되는 일로 파열을 맞는다. 오구아 에이지는 <사회를 바꾸려면>이라는 책에서 “사회운동이 어떤 이슈로든 대대적으로 공론화되는 계기가 있다”고 했다. 이상하게도 지난 정권도 마찬가지로 그럴만한 ‘이슈’는 무수히 많았음에도 ‘공론화’되는데 실패했다. 실패했다고 본다. 생각하는 지점들이 너무도 달랐던 것일까. 그 이슈들이 구조적 쌓여 있던 불만이나 감정을 표현하는 수단이 될 정도가 아니었던 걸까. 김어준이 5년 전에 이 책에서 말한 것들이, 5년이 흐른 지금도 여전히 나와야 하는 이 암울함. 아주 시국이 엄중하거든. 그렇네.


그냥 다이렉트하게, 폼 잡는 이론이나 용어 빌리지 않고, 일상의 언어로 정치를 이야기해보자고. 평소 정치에 관심 없는 게 쿨한 건 줄 아는 사람들에게, 그 놈이 그 놈이라는 사람들에게, 좌우 개념 안 잡히는 사람들에게, 생활 스트레스의 근원을 모르는 사람들에게, 정당들 행태가 이해 안 가는 사람들에게, 이번 대선이 아주 막막한 사람들에게, 그래서 정치를 멀리하는 모두에게 이번만은 닥치고 정치,를 외치고 싶거든. 시국이 아주 엄중하거든, 아주. p29~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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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택은 니 맘이야


오구마 에이지 저, 사회를 바꾸려면

  저자 오구마 에이지는 일본에서 가장 영향력 있는 인문학자라고 한다. 저자의 <사회를 바꾸려면>은 일본의 자유민주주의 체제가 갖는 사회문제에 주목하는 책이다. 이 책 역시도 일본에서 폭발적인 반응과 인기를 얻었다고 한다. 그만큼 일본인들도 사회를 바꾸고 싶은 갈망이 강했다고 볼 수 있을 것이다. 더불어 일본인들이 책도 많이 읽는 모양이고. 많은 이들이 주목한 책, 그리고 영향력 있는 학자가 말하는 사회를 바꾸기 위한 방법은 무얼까.

  사회를 바꾸려한다는 것은 지금 현재의 사회에 ‘바뀌어야 할 요인’이 있다는 말과 같다. 즉 지금 현재 처한 상황이 문제를 안고 있고 보다 나은 사회를 갈망하는 욕구가 있다는 말이다. 일본 사회는 왜 이토록 변화를 갈망하는지, 변화에 대한 갈망이 한국사회에는 어떻게 적용될 수 있는지를 살펴보는 것이 이 책을 통해 얻고자 하는 바라고 할 수 있다.

  저자가 영향력있고 이 책이 인기있다고 하더니 그 이유를 알 것 같다. 재미있고 쉽게 쓰여진 글이다. 그래서 이해가 빠르게 되고, 같은 문제를 공유하고 있어서인지 감정이입도 잘 된다. 선동기도 다분하고.

  총8장으로 나누어 저자는 이야기를 풀어나가고 있다. 먼저 “제1장 우리 사회는 지금 어디에 있는가?”라는 소제목에선 현재 일본 사회의 현황과 문제점을 파악하고 있다. 정치, 경제의 모든 부분에서 문제가 드러나고 있다. 사실 일본뿐만 아니라 전세계의 문제이기도 하지만 일본은 고용, 교육, 사회보장 등의 여러 부분에서 한계에 이르렀다. 특히나 일본은 세계에서 고령화가 심각한 나라로 손꼽힌다. 이런 문제들은 산업이 탈공업화로 변화하는데 적절히 대응하지 못한 원인이 크다. 심각한 경제상황으로 빈부 격차는 심해지고 이에 따라 사람들이 소외감이 증가되는 상황이 나타나고 있다. 사회를 바꾸기 위해선 현재의 상황을 잘 아는 것이 중요하다.

  “제2장 사회운동의 변천”에선 선진국의 사회운동의 형태를 살펴보고 있다. 공업사회 초기에는 노동운동 형태가 주를 이루었으나 후기에 이르러 학생운동, 여성해방운동, 소수자 운동 등 다양한 사회운동으로 발전했다. 사회운동은 사회를 바꾸는 대표적인 방법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자유를 누리는 사람들이 증가할수록 연대는 옅어져 간다. 탈공업화 사회 불안정한 사회는 이처럼 연대의 부족이 낳는 것이라고 볼 수 있다. 


사람들이 저마다의 ‘자유’를 누리면서 연대 의식이 옅어져 ‘우리’라는 생각을 갖지 못하며, 자연히 통합이 이루어지지 않는다. 탈공업화 사회에서는 가족이나 정치 또한 통합을 이루지 못하고 불안정해지는데, 운동 또한 같은 문제에 직면하게 된 것이다. p50 


  제3장에선 “민주주의란?” 제목으로 민주주의 체제에 대해 살펴보고 있다. 고대 그리스는 시민 전원이 참여하는 직접민주주의 체제였고 현대는 대의민주주의다. 민주주의의 기원에 대해 살펴보는 것은 왜일까. 저자가 말하고자 하는 것은 ‘민주주의의 위기’에 대해 말하기 위해서이다. 현대의 투표로 대표를 뽑는 것이기에 다른 정치행위, 특히 데모에 대해 소용없음, 부정적 의견이 더해진다는 것이다. 여기에 더해 저자는 소속감, 함께한다는 것 집단의식의 중요성을 말한다. 통합력이 강력한 사회에 소속되어 있으면 자살이 줄어든다는 뒤르켐의 실증 내용을 거론하며 저자가 말하고픈 바는 이것이다.

 

데모에는 왜 사회를 바꾸는 힘이 있는 걸까? 설명 10만 명의 데모대가 모였을지라도 “저들은 별스러운 일부 사람들일 뿐이야.”, “비례대표로 그저 한 사람 당선시킬 정도의 숫자에 불과해.”라고 형용하는 것이 가능하다. 그러나 설령 소수일지라도 “저 사람들로 우리 사회의 의견이 대변된다고 봐.”, “저기에 내가 느끼는 분노심도 대표되고 있어.”라고 인식될 때에는 사회에 대한 영향력이 현저히 다르다. 책임 있는 정책대안을 내놓고 있는가 아닌가는 그다지 관계가 없다. p72


  제4장에선 “근대 자유민주주의와 그 한계”를 다룬다. 시대마다 사상이 있었고 기술의 발전은 세계관을 변화시키는 계기가 되기도 했다. 민주주의, 자유주의, 경제자유주의 등 그 시대의 사조가 변화하며 흘러 왔고 최근에는 자유민주주의가 대세인 듯이 형성되어 있다. 그러나 이 또한 오일쇼크, 리먼 브라더스 사태 등으로 한계에 부딪혔다.


기술이라는 것은 그것을 쓰는 발상과 사회기반이 없으면, 사회를 바꾸는 힘이 없다. 다만 일단 그것이 굴러가기 시작하면, 기술을 손에 넣은 사람의 발상이 바뀌고, 사회를 바꿔나가게 된다. p121


새로운 발상이 등장하는 시대는 대체로 불행한 시대이다. 인간은 심각하게 생각하지 않고 살 수 있는 때가 행복한 경우가 많다. p124~125


  하지만 끊임없이 사회에는 새로운 발상이 나타나고 있다. 관건은 누가 그 ‘발상’을 주도하고 있느냐는 것이다. ‘대표’에 대한 주체가 누구인지가 핵심이 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어떻게든 변화해 가는 사회에서, 사회구조에서 ‘우리’라는 개념이 형성되고 있고 그 속에 포함되지 않는 이들의 목소리가 나타나고 있는 것이다.


  제5장 “또 다른 세계를 향한 사색”은 대의제 자유민주주의의 한계를 극복하기 위한 사상적인 모색이 필요하다고 지적한다. 민주주의 사회에서 대화와 참여가 중요하지만 그것만으로, 선거만으로 사회가 바뀔 수 있을까? 의문을 가지는 사람이 많다. 하지만 정권을 잡고 정책을 선언한다 해도 그것만으로는 아무것도 바뀌지 않는다. 왜 그런가.


오늘날의 사회는 어딘가에 중앙제어실이 있어서 거기를 점령하면 사회 전체를 조작할 수 있는 구조가 아니다. 구체적으로 이 법률이 바뀌면 이렇게 된다는 것 정도는 말할 수 있겠지만, ‘자유’와 재귀성의 증대에서 생기는 문제를 해결할 수 없다. 설사 효과가 곧바로 나오지 않는다 해도 의회와 지역에서, 행정과 운동을 통해서, 즉 사회의 모든 곳에서 발상과 행동과 관계를 바꿔나가 그것이 연동해가며 사회를 바꾸는 수밖에 없다. p252


  제6장 “일본 사회문제의 상징, 원자력발전”은 일본 사회운동의 주된 의제로 확산된 후쿠시마 원전 운동에 대해 이야기한다. 일본에서 원전 운동이 확산된 이유와 그 상징성은 이것을 계기로 사회를 바꾸는 경험을 한 이들이 많다는 것이다. 부당한 것에 대해 항의하고 그리고 그것이 어렵지 않다는 것을 알게 됨으로써 그것이 체화되는 사람들이 늘어나면 그만큼 사회는 바뀌게 된다는 것이다.

  제7장 “전후 일본의 사회운동”에서는 전후 일본 사회운동의 역사와 현대에 필요한 사회운동은 어떤 형태여야 하는가에 대해 기술한다. 저자는 사회운동이 어떤 이슈로든 대대적으로 공론화되는 계기가 있다고 말한다. 특히 이슈가 사회 속에서 구조적으로 쌓여 있던 불만이나 감정을 표현하는 수단이 될 경우라는 것이다. 그러니까 한국사회에 대입해보면 이른바 “갑질”사건이나, 고위층의 기만적인 행위들을 생각하면 될 것이다.

  그래서 이 모든 것을 종합하여 제8장 “사회를 바꾸려면”에서 결론을 내린다. 선거가 한창이기도 했고 그래서 대안이 선거뿐이었기도 했다. 그래서 지속적으로 “투표가 해답이다”하고 한국사회는 외쳤다. 하지만, 저자는 단순히 선거만으로 정권을 바꿨다고 사회, 또는 세상이 바뀌지는 않는다고 말한다. 한편으론 수긍이 되기도 한다. 선거를 통해 ‘희망’을 가졌다가 크게 변한 것을 느끼지 못할 때 ‘절망’하게 되고 이것은 ‘분노’와 ‘외면’으로 바뀌니까.

  또한 현대사회에서는 “사회를 바꾼다”라는 것에 대해 100% 맞출 수가 없다. 사람들은 각자의 욕망이 있기에 그렇다. 하지만 누구나 공유하는 문제의식, 그것을 바꾸는 것이 ‘사회를 바꾸는 것’이 되지 않을까라고 저자는 말한다. 그리고 누구나 공유하는 문제의식, 그것은 바로 ‘나는 무시당하고 있다’라는 것이라고 주장한다.

  저자는 이 공유된 문제의식을 발판삼아 “대화와 참가를 독려하며 사회구조를 바꿔 ‘우리’를 만드는 운동으로 연결”시켜 나가야 한다고 강조한다. 그리고 그 운동의 방식 또한 다양하다. 거기엔 틀은 없으니까. 그저 사회를 바꾼다는데 부합하면 되는 것이다. 투표, 로비활동, 데모, NPO, 인터넷이나 신문 등 방식은 무한하고 다양하다.

  저자는 사회를 바꾸는 것이 필요한 일이고 그러므로 즐거운 일이 되도록 하라고 말한다. 하지만 이런 사람, 꼭 있다. “필요없는 데요?” 혹은 “안 바꾸고 싶은데요”라고. 이에 대해 저자는 사회를 바꾸고 싶지 않다는 생각이 들어도 바꾸어야 한다고 단호하게 말한다. 그리고 이미 사회는 바뀌고 있다고, 피해랄 수 없노라고. 침묵하다 침몰하거나 대파국을 맞이하거나 그건 니 맘이라고.


 몸소 나서는 것, 활동을 벌이는 것, 타인과 함께 사회를 만드는 것은 즐거운 일이다. 훌륭한 사회, 훌륭한 가족, 훌륭한 정치는 기다린다고, 그저 바꾼다고 나타나지 않는다. 스스로 만들어나가는 수밖에 없다.

    귀찮다, 이상론에 불과하다, 믿을 수 없다, 두렵다는 사람도 있을 것이다. 그렇게 생각하는 사람은 지금처럼 살아갈 수 있고, 이대로 견뎌낼 수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일 것이다. 그렇다면 앞으로도 줄곧 그렇게 지내기 바란다. 그것이 언제까지 지속될 수 있는지는 알 수 없다. 당신의 미래는 당신이 결정하는 것이다.

    사회를 바꾸기 위해서는 당신이 바뀌어야 한다는 것. 당신이 바뀌기 위해서는 당신이 나설 것. 낡아빠진 말 같지만, 지금으로서는 이 말의 의미가 새롭게 재활용되어야 할 시대로 접어들고 있다. p427~4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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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용 무용한 시간


 시를 읽는 즐거움은 오로지 무용하다는 것에서 비롯된다.

하루 중 얼마간을 그런 시간을 할애하면 내 인생은 약간 고귀해진다.


 김연수, 우리가 보낸 순간 :시


   안도현 시인은 시를 읽는다는 것은 시를 읽는 즐거움을 아는 사람이 된다고 했다. 김연수 소설가는 시를 읽는 즐거움은 오로지 무용하다는 것에서 비롯된다고 말한다. 김연수 작가가 쓴 <우리가 보낸 순간-날마다 읽고 쓴다는 것>은 각각 시와 소설로 나누어 시와 소설을 소개하고 있다. 시편은 시인이 읽은 시에 대해 소개하고 그에 대한 감상들을 적었다. 김연수 작가가 소개하는 시를 만날 수 있다. 그런데 이 시에 대한 감상을 보고 있노라면 갑자기 웃음이 나온다. 얼핏 소개하고 있는 시와 그의 감상이 따로 논다는 느낌이 들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꼭 소개한 시에 대한 감상이나 시인에 대해 아는 얘기들을 말하고 있지 않다. 마치  시를 읽는다는 것이 “무용하다”라고 말하지 않았냐는 듯 그 말을 다시 새기게끔 한다.

  그러니까 자유연상, 의식의 흐름이 느껴진다. 나 역시도 시를 읽거나 글을 읽다 보면 그것이 말하는 바와는 상관없이 나만의 상상이나 기억 속에 빠지게 되는 일이 있다. 거기에서 가리키는 것과는 상관없이 특정한 이미지, 특정한 단어가 불러일으키는 환기라고 할 수 있다. 이 책에서 작가의 그런 모습을 자주 만나다 보니 웃음이 나오면서 좀 편안해지는 느낌이 든다고 할까. 그러니까 시를 읽는데 “쫄” 필요가 없다라고 해야 하나.

  막상 작가들의 독서법은 다를 것이라 생각하기에 그들의 글쓰기나 독서법을 궁금해하고 읽는 경우가 많다. 그들이 하는 방식은 특별하게 보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들이 읽는 것도 나와 별반 다르지 않다는 것을 알고 난 후 너무 나의 방식에 소극적이었구나, 한편 타인의 방식에 너무 민감하구나 생각하게 된다.

  타인의 독서법을 배척할 필요는 없지만 “누구의 방식”에 너무 매몰되어 매달리지 않아도 좋은 것을. 그리고 편안하게 내 식대로 읽어가며 마음을 느끼는 것이 얼마나 좋은 일인가를 다시 한번 깨닫게 된다. 정말로 시를 읽는다는 것은 즐거운 일이기도 하고 한편으론 무용함을 달래주는 것이기도 하다. 인생이 얼마만큼 무용해야 시를 읽을 마음이 들게 될까라는 생각도 조금 하면서 김연수 작가의 말대로 그럼에도 시를 읽고 난 날이면 소설이나 다른 글을 읽은 날들보다 오히려 더 쾌감이 느껴지는 때가 있다. 그런 것 같다. 한뼘쯤 고귀해지는 느낌. 그것은 시어를 되뇌며 조금 더 머언, 머언 시간을 돌아보기 때문인 것 같다. 그것은 급박하고 여유없는 맘을 한번씩 누그러뜨리는 그런 역할을 한다.

  시에 대한 감상평을 보다가 정말로 소리내어 웃은 부분이 있다. 바로 이 부분이다.


어느 날, 텔레비전을 보는데 경주 양동마을 소식을 전하더군요. 기자는 올해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에 등재된 그 조용한 시골 마을로 관광객들이 몰려들고 있으나, 제대로 된 부대시설과 볼거리가 없어서 대부분 마을만 둘러보고 황급히 발길을 돌린다면서 대책이 시급하다고 진단하더군요. 옛 정취가 고스란히 보존됐다는 이유로 세계문화유산이 된 마을에서 부대시설과 볼거리를 찾는 사람들이라니. 그렇게 고요하고 적적한 마을에 가서도 그리운 사람 하나 떠올리지도 못하고 황급히 발길을 돌려야 하는 사람들이라니. 경주 양동마을은 아무런 문제가 없으니까 대책을 마련하지 않아도 좋겠습니다. 언제나 그렇듯이 대책이 시급한 것은 대책이 시급하다고 말하는 사람들입니다. 이분들, 정말 대책이 시급합니다. 나라에서는 그리운 사람 하나씩 만들어주세요. p72


  이것은 서안나 시인의 <병산서원에서 보내는 늦은 전언>에 대한 감상이다. 시인은 이 시를 읽으며 경주 양동마을을 떠올린다. 하지만 병산서원은 경북 안동에 있는 곳이다. 이 시를 떠올리며 생각이 나아가 경북 경주의 양동마을로 이어지고 양동마을에 관한 기사를 떠올리고 “그리운 사람 하나씩 만들어 주세요”라는 마지막 글을 읽을 때까지 나는 계속 웃었다. 즐거운 웃음이었다.

  그렇다. 이 책을 다 덮고 나서야 무용하다와 고귀해진다의 말의 의미를 절로 실감하는 중이다. 그리고 김연수 소설가가 시들을 소개하며 적은 감상의 말들이 왜 그렇게 내 ‘갈 길로 가리오'의 형태를 띠는지도 알겠다. 이 책은 비평집이 아니니까. 문학이론 책이 아니니까. 그러니까 일상생활 속에서 시와 함께 하는 방식은 이렇게면 충분하다. 내가 시를 읽다 딴 생각에 빠져도, 그것도 될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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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운


 

 안도현, 그 작고 하찮은 것들에 대한 애착


   <그 작고 하찮은 것들에 대한 애착>이란 제목이 와 닿는다. 찌질함과 함께 애잔함이 섞여 있다고 느낀다. 비오는 새벽녘 창문을 열어 들어오는 빗소리와 바람 소리를 함께 맞이할 때 떠올린 말한 제목이라고 해야 하나. 제목마저 시답다.

  이 책은 시인 안도현이 시를 읽으며 노트 한쪽에 적어 두었거나 다시 읽고 싶어 시집 한 귀퉁이에 적어둔 71편의 시를 묶은 것이다. 초판이 1999년이니 여기에 실린 시는 모두 1999년 이전 출간된 것이다. “열 몇 살 무렵 문학에 눈뜨기 시작할 때 좋아하던 시”, “스물 몇 살 무렵 문학청년 시절에 좋아하던 시”, "내가 사랑하는 아름다운 시", "내가 사랑하는 감동적인 시", "내가 사랑하는 젊은 시인들의 시"로 나누어 시를 소개하고 있다. 그렇기에 이들 시에는 안도현 시인이 이 시를 읽을 무렵의 감상과 이 시와 얽힌 개인의 이야기를 들려 준다.

  가령 청년 시절 좋아한 김경미 시인의 <비망록>에 관해서는 이렇게 말한다. 감정이 많다고. 신춘문예에 투고하고 나서 당선 소감도 미리 써 놓고 상금을 받으면 갚을 생각으로 외상 술을 마시며 신문사로부터 연락을 기다렸는데, 결과는 낙선이었던 것이다. 그리고 그 신문에는 이 시가 실렸다. 그날 시인은 괴롭고 외로웠지만 시를 다 읽고 나서는 괴로움과 외로움이 봄눈 녹듯 사라졌다고 그날의 기억을 이야기한다.

  안도현 시인은 시인이 된다는 것은 시를 읽는 즐거움을 아는 사람이 된다는 뜻이라고 말하고 있다. 시인이지 않아도 시를 읽는 즐거움은 있다. 다만 시는 다른 글들과 달라서 늘, 여유라는 게 있어야 잘 느껴지는 것 같다. 시행과 시어를 읊조리며 점점이 퍼지는 여운, 어느 순간 가슴에 와 닿는 문장들. 그래서 시는 각을 잡고 읽는 것이 아니라 어느 날 문득 만났을 때 심장에 전달이 되고 머릿속에 남는다. 그래서인지 만나기 어려운 시들을 다른 이의 감상과 사연과 함께 소개받는 일은, 여운을 느낄 수 있어서 좋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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벗들에게


    슈테판 츠바이크


   츠바이크의 글을 읽고 있다 보면 깊이 빠져든다는 것이 어떤 것인지 알게 된다. 안타까운 건 그의 평전을 읽다 보면 평전의 ‘대상’에 집중하는 것보다 그의 글에 홀린다. 그렇게 그 대상에게 츠바이크가 생각하고 느끼는 그대로를 자연스럽게 받아들이게 된다. 철학을 공부하고 문학과 역사, 심리학 등에 두루 관심을 가지고 써내려간 그의 글은 딱딱하고 건조하지 않고 부드럽고 강단있다. 평전의 대상의 실제의 생활과 생각들, 느끼는 바를 생생하게 포착하고 있는 듯 감정과 이성이 마구 휘몰아치며 감정이입하게 된다. 문학적인 느낌도 강하다. 그래서인지 츠바이크는 전기 작가로 유명하지만 그의 소설 또한 상당히 매력적이다. 아무튼 츠바이크의 글을 읽을 때면 마냥, 마음이 아련해진다.

  <우정, 나의 종교>는 츠바이크가 쓴 글들의 묶음이다. 장례식장에서 발표한 글도 있고 발표하지 못한 글도 있다는데 핵심은 츠바이크의 글들 중에서 ‘인물’에 관한 글을 추린 것이다. 로맹 롤랑은 츠바이크에 대해 “그에게 우정은 종교와 같다”라는 말을 했다는데, 책의 제목은 이 말에서 따온 모양이다.


로맹 롤랑은 츠바이크에 대해 “우정이야말로 그의 종교”라고 말한 적이 있다. 츠바이크처럼 우정과 의리를 중시한 사람은 보기 드물다. 그는 말만 하는 게 아니라 행동으로 실천하는 사람이었다. p11~12


  수많은 평전을 쓰게 된 것은 츠바이크 자신이 거기에 재능이 있기 때문이기도 하겠지만, 그 자신이 많은 이들과의 교류를 좋아하기 때문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츠바이크가 많은 언어를 익힌 것도, 여러 나라를 다닌 것도 그렇고. 평전을 쓸 때도 인물과 작품과 자료들을 깊이 연구하고 심리를 분석하는 만큼 사람들과의 교우에서도 섬세함과 감성으로 사람들을 대했을 것이다.


츠바이크는 부유한 집안 출신으로 사업에 성공하고 이름이 널리 알려졌으면서도 겸손했다. 스승에게는 늘 제자의 예를 갖추었고, 스승이나 벗한 선배들에게 존경, 앙모, 감격의 정을 품었다. 이는 그의 성품뿐 아니라 그가 큰 스승들에게 받은 가르침을 자양분으로 삼을 수 있는 사람이었음을 보여 준다. 그는 프로이트는 물론이고 베르하렌, 고리키, 로맹 롤랑에게도 같은 태도를 취했다. p11


  그의 인물 평전은 특정한 분야에 한정되어 있지 않다. 그만큼 많은 사람들과 나눈 우정들이 그가 삶을 살아가는데 힘이 되었을 것이다. 츠바이크는 동시대를 살아가는 예술가들을 둘도 없는 친구로 여겼고 이 책 속에서도 그의 우정에 찬 마음을 느낄 수 있다. 여기엔 프루스트, 프로이트, 베를렌, 롤랑, 톨스토이, 호프만, 슈바이처, 바이런, 말러, 발터, 토스카니니, 릴케, 열 두 명의 이야기들이 있다. 벗들에 대한 짧은 글에서도 이 인물들의 생애와 그들의 감성과 그들에게 가지는 츠바이크의 마음이 섬세한 필치 속에 생생하기에 이들에 대한 평전에 대한 관심으로 이어진다.

  시대가 그러했던 것이 너무나 안타깝다. 츠바이크의 마지막 선택 역시도 너무나 아쉽고 안타깝다. 그래도 조금만 더 힘을 내어주었으면 하는 바람이 드는 건 어쩔 수 없다. 그의 고통을 어찌 가늠하겠냐만 그 시대 수많은 이들이 그와 같은 상황에 있었던 만큼 지식인의 나약한 모습으로도 비춰진다. 츠바이크의 자살을 알고 엄청난 충격을 받았던 것이 생각난다. 이미 그가 사망한 것을 알고 있음에도 그러할진대 그와 함께 우정을 나누었던 그와 함께 했던 수많은 이들은 나보다 더했을 것이다. 더 이상 친구이자 풍부한 감성과 지식을 지닌 작가를 만날 수 없음에, 그 안타까운 선택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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