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워드 가드너의 생애


 오랫동안 IQ에 길들여져 스스로를 한없이 무능함의 대명사로 여기며 지낸 많은 사람들에게 하워드 가드너의 다중지능이론은 빛이었을 것이다. 1등이 아니면 아무것도 아닌, 문제풀이식의 교육 현실에서 하워드 가드너의 이론은 많은 아이들의 능력을 일깨워주는 길잡이가 될 수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아직, 아직은 우리나라는 하워드 가드너의 이러한 이론들이 빛을 보기에는 IQ라는 지능검사가, 1등이란 단어가 갖는 힘이 더욱 크게 울리고 있는 듯해 안타깝다.

 하워드 가드너, IQ에서 벗어나 어떻게 다중지능이론을 창시하게 됐을까. 그에 의하면 다중지능은 인간은 IQ와 같이 인간의 지능D 하나가 아니라 최소 8개 이상 존재하는 교육과 훈련을 통해 성장할 수 있는 독립적 지능을 말한다. 처음 그가 다중지능을 제시했을 때에는 언어, 논리수학, 공간, 음악, 신체, 자기성찰과 인간친화 지능 등 일곱 가지로 지능을 구분했다. 그리고 15년 뒤에 자연 지능을 추가했다. 그리고 현재 그는 여기에 실존 지능이란 개념을 추가할 것을 고려하고 있다고 말한다. 실존지능은 좀 더 근원적인 질문을 할 수 있는 능력을 말한다. 그는 여전히 지능이란 그것과 같은 종류의 신경 구조를 발견할 수 있을 때 가장 설득력이 있다는 생각을 고수하고 있다고 말한다.

 그는 하버드 대학의 교육심리학과 교수, 보스턴 의과대학 신경학과 교수로  하버드 대학에서 인간의 예술적이고 창조적인 능력의 발달과정을 분석하는 Project Zero 연구소의 책임자이자 운영위원장이다. 30년 동안 연구소를 이끌며 인간의 지능과 창조성, 리더십, 교육 방법, 두뇌개발 등에 관한 저술과 연구를 하고 있다. 그가 제시한 교육심리 이론은 여러 나라에 도입되었고 다중지능이론을 교육 현장에서 실천하기 위한 학교와 연구소가 세계적으로 운영되고 있다.

 하워드의 부모 역시 학자라고 한다. 하워드는 미국 펜실베니아에서 태어났지만 그들의 부모는 독일에서 살고 있던 유대인이었다. 하워드의 부모는 나치의 박해를 피해 1938년 그의 형을 데리고 독일에서 탈출했다. 그리고 그의 형은 사고로 어린 나이에 죽었다. 하워드에게는 이 두 가지 사건, 즉 형의 죽음과 자신이 유대인이라는 정체성이 많은 영향을 미쳤다고 한다. 가드너는 어릴 때는 피아니스트를 꿈꿀 정도로 피아노를 잘 쳤고 책을 좋아하는 소년으로 처음에는 변호사를 꿈꾸던 소심한 유대인 소년이었다고 고백한다. 하워드의 강연에 참가한 이의 후기에 이런 내용이 있었다. 가워드가 강연 시작에서 한 말이다. “사람들은 저를 심리학자, 교육학자라고 부르지만 제 삶의 베이스는 음악입니다.”

  피아니스트를 꿈꾸었고 다시 변호사를 꿈꾸던 소년은 결국 역사학 공부를 위해 하버드에 진학한다. 그런데 프로이트 정신분석학에 끌려 심리학을 공부하게 된다. 그리고 에릭슨과 피아제 이론을 접하고는 인지 심리학을 공부하게 된다. 하버드대학에서 박사학위를 취득하고 그는 천재들만 받는다는 맥아더 펠로십(MacArthur Prize Fellowship)을 수상하며 연구지원금을 받는다. 이 외에도 다양한 상을 수상한다.

  하워드는 대학교수이자 학자로서 활동을 하고 있다. 특히 그의 대표적인 활동은 프로젝트 연구소 이외에도 1990년대 중반부터 심리학자 미하이 칙센트미하이, 윌리엄 데이먼과 함께 하고 있는 ‘굿 워크 프로젝트’ 활동이다. 이 활동을 통해 바른 사람, 바른 노동자, 바른 시민을 길러 사회를 변화시켜나가는 데 열정을 기울이고 있다. 또한 하버드대학교 프로젝트 제로의 책임자이자 운영위원장으로 활동하며 교육이론들을 연구하고 있다. 그는 다양한 연구결과를 바탕으로 29권의 책을 출한했고 그의 책은 전세계 32개 언어로 번역되고 있다.


*굿워크란 세 가지 E, 즉 Excellence(뛰어남), Engagement(참여), Ethics(도덕성)의 조합이다.



■ 하워드 가드너(Howard Gardner) ■

 

•출    생

1943.7.11. 미국 펜실베니아 스크랜톤 (72세)

 

•활동분야

교수, 다중지능이론 창시자, 심리학자, 교육학 이론가

 

•발 자 취

미국 하버드대학교 교육대학원 교육심리학 교수, 미국 보스턴대학교 의과대학 신경학과 교수

 

 

미국 하버드대학교 프로젝트 제로 연구소 책임자, 운영위원장

 

 

1990년 중반부터 굿 프로젝트 활동

 

 

1961. 역사 전공 위해 하버드 입학. 에릭슨 강의 수강 후 social relation으로 전공 바꿈

 

 

1965. 학사학위 후 런던대 경제학과에서 1년 수학

 

 

1971. 하버드대에서 발달심리 전공하여 박사학위 취득

 

 

하버드 의과대학과 보스턴대에서 Postdoc 과정(두뇌손상 환자들의 인지적 문제 연구)

 

 

1981. 맥아더 펠로십(MacArthur Prize Fellowship) 수상

 

 

 

1983. 다중지능이론 제안

……

제 삶의 베이스는 음악입니다.

……

 

 

1990. 미 교육 분야에서는 처음으로 그라베마이어상(Louisville's Grawemeyer Award)

 

 

2000. 2000구겐하임 펠로우십(Guggenheim Fellowship)

 

•저    서

1983. 마음의 틀: 다중지능(Frames of Mind: The Multiple Intelligences)》

 

 

1993.《다중지능의 이론과 실제(Multiple Intelligences : The Theory in Practice)》

 

 

《훈련된 마음(The Disciplined Mind)》

 

 

2009.《세계의 다중지능(Multiple Intelligences Around the World)》

 

 

<열정과 기질>, <통찰과 포용>, 

<체인징 마인드>, <미래 마인드> 

 

 

<마음의 틀> <비범성의 발견> <진선미> 등


참고 자료

•경향신문, [문명, 그 길을 묻다 - 세계 지성과의 대화](3) 하워드 가드너 미국 하버드대 교수, 2014.1.27

http://howardgardner.com/biography

http://infed.org/mobi/howard-gardner-multiple-intelligences-and-education

http://www.infed.org/thinkers/gardner.htm


“행복한 사람은 현재 가지고 있는 것을 사랑하고

불행한 사람은 가지고 있지 않은 것을 사랑하는 사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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치료중입니다


정희진처럼 읽기- 내 몸이 한 권의 책을 통과할 때



   누구나 자신만의 독서법이 있다. 그래도 때론 타인의 독서법이 궁금할 때도 있다. 빼꼼, 정희진의 독서법을 들여다보는데 재미있다. 같은 책을 읽고 같은 생각을 만나면 반갑고, 읽을까 말까를 망설이던 책에 대한 비평을 보면 그냥 편안하게 그 책을 읽을 수 있을 것 같다.

 이 책에서 작가는 2012년부터 2014년 봄까지 쓴 서평들 가운데 79편을 선정해서 다섯 가지 주제로 분류하여 읽고 있다. “고통, 주변과 중심, 권력, 앎, 삶과 죽음”이라는 이 주제 속에는 어떤 책이, 어떤 글이 놓여 있으며 이 글들에서 작가의 어떤 생각과 느낌을 만나게 될까.

  작가는 무엇보다 책읽기가 “삶에서 필연적으로 발생하는 자극, 상처, 고통을 해석할 힘을 주는 읽기 치료”라고 말한다. 그러면서도 작가는 예상가능하거나 가독성이 지나치게 좋은 책보다 ‘자극적인 책, 이상한 책’만 읽는다고 한다. 하긴, 가독성없는 책을 읽는 것만큼이나 고통스런 일이 또 있으랴. 그러나 이것을 달리 말하면, 작가는 자신의 ‘관점’에 따른 책을 읽는다.

  관점을 갖기 위해 책을 읽는 경우를 생각해보면 이미 자신의 관점이 명확하여 그것만을 골라 재미있게 읽을 수 있다는 것은 행복한 독서일 수 있겠다 싶다. 한편으로 어떤 책을 읽더라고 내 몸에 각인된 ‘시각’으로 수렴되는 경우다. 이렇게도 저렇게도 읽을 수 있지만, 한편으론 다양한 글읽기가 아니라 거듭 생각이 한정되는 것이 아닌가 염려되는 때가 있다. 많은 책을 읽으며 그것을 수정·보완하리라 생각했는데 오히려 강화되는 경우도 있고 미미하게나마 다른 관점이 생기는 경우가 있다. 작가의 관점에 따른, 시각을 찾아 읽는 방법의 긍정성을 생각하며 관점의 수렴에 지나치게 연연하지 않으리. 어쨌든, 많이 읽어 볼 일이다.

  타인의 글을 잘 읽고 잘 해석하는 일은 중요하다. 작가의 말대로 그것이 읽기 치료가 되려면 더더욱. 생각해보면 책을 읽는 것은 정보습득, 지적만족, 재미라고 하지만 알고 보면 책과의 교감이 빠질 수 없다. 책을 읽으며 내 감정을 정화시키는 것이 있다는 점, 물론 던져버리고 싶은 책도 만나지만, 그것은 책을 읽으며 내 속에 내 머릿속의 질문들에 답해 가는 과정이며 정리되지 않은 감정과 혼란스런 지성을 명확히 하는 방법이었다. 그러니, 나에게도 읽기는 치유와 치료의 과정이었다.


 내가 생각하는 독후감의 의미는 단어 그 자체에 있다. 독후감(讀後感). 말 그대로 읽은 후의 느낌과 생각과 감상(感想)이다. 책을 읽기 전후 변화한 나에 대해 쓰는 것이다. 그러므로 자기가 없다면 독후감도 없다. 독서는 몸이 책을 통과하는 것이다. 온몸으로 통과할 수도 있고 몸이 덜 사용될 수도 있다. 터널이나 숲속, 지옥과 천국을 통과하는 것처럼 어딘가를 거친 후에 나는 변화할 수밖에 없다. 독후감은 그 변화 전후에 대한 자기 서사이다. 변화의 요인, 변화의 의미, 변화의 결과……. 그러니 독후의 감이다. p305


  어떤 날은 책을 읽고 기록하지 않아 잊어버린 책의 내용에 감정에 쓸쓸하여 기록을 했다. 그러다가는 읽을 책도 많은데 뭘 하고 있는 것인가하는 생각에 멈추기도 했다. 사실, 책을 읽고 난 후의 감상이란 늘 같지 않다. 내가 읽은 상황에 따라서 또한 달라지는 것이기도 하다. 그러니 읽었다 해도 또 읽어 볼 필요가 있는 것이고, 기록을 하고 싶으면 그 마음을 기록하면 되는 것이고. 하지 않음은 또한 그것이 독후감인 것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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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자의 글쓰기


은유,  글쓰기의 최전선-‘왜’라고 묻고 ‘느낌’이 쓰게 하라  


   수유너머에서 강의를 하고 있다고 해서인지 제목 때문인지 은유의 글쓰기 강론에선 치열함이란 단어가 떠오른다. 글을 쓰고 싶은 수많은 이유가 있다. 그러나 글쓰기라는 작법을 배우고자 하는 이들의 열망엔 어느 정도 ‘미학적’인 부분에의 욕구가 있다. ‘글을 못 쓴다’라는 말 속에 잠긴 것은 그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글쓰기의 최전선>에서 느껴지는 은유의 강의를 듣는 사람들은 삶의 글을 이미 새기고 있는 듯이 보인다. 그래서 이제 몸을 움직이면 그 글들이 몸에서 빠져나와 책으로 옮겨갈 것만 같은 느낌이다.


우리 삶이 불안정해지고 세상이 더 큰 불행으로 나아갈 때 글쓰기는 자꾸만 달아나는 나의 삶에 말 걸고, 사물의 참모습을 붙잡고, 살아 있는 것들을 살게 하고, 인간의 존엄을 사유하는 수단이어야 한다고 나는 믿는다. p23


  그래서 이 책은 써야 하는 이유, 쓰고자 하는 열망을 끌어내기 보다는 보다 구체적으로 종이 위에 글을 만들어 내는 법에 대한 이야기다. 총 6장으로 구성되어 6장을 제외하고 5장에서 글쓰는 방법을 설명하고 있다. 은유는 글쓰기는 용기라고 말한다. 솔직할 수 있는 용기라고. ‘잘’ 쓰고자 우린 많은 거짓의 감정을 쏟아내어 글을 만든다. 하지만 내가 생각하고 느끼는 것이 글과 다르다면 진정성 여부를 떠나, 더 이상 글쓰기가 진행이 될까.


나는 억눌린 욕망, 피폐한 일상 같은 고통의 서사를 길어 올리는 학인들에게 새 가지를 당부했다. 삶에 관대해질 것, 상황에 솔직해질 것, 묘사에 구체적일 것. 결국 같은 이야기다. 어떤 일도 일어날 수 있는 게 삶이다. 뭐라도 있는 양 살지만 삶의 실체는 보잘것없고 시시하다. 그것을 인정하고 상세히 쓰다보면 솔직할 수 있다. 상처는 덮어두기가 아니라 드러내기를 통해 회복된다. p63


   지난 시절을 되돌아보면 즐겁고 좋았던 일이나 기분일 때보다 고통스러울 때 글을 찾았던 일이 많았다. 이런 일은 주위를 둘러봐도 그런 것 같다. SNS가 발달하면서 사람들은 종이 대신에 그곳에 마음을 기록한다. 그들이 마음을 강하게 표현하는 날들은 그들 신상에 뭔가 좋지 않은 변화가 있었을 때가 대부분이었던 것 같다. 그런 것일까, 불행이 우리의 글쓰기의 욕망을 부추기는 것일까. 그래서 이때의 상황에 잘 감응하다 보면 나만의 언어를 가질 수 있는 것일까.

   고통을 마주하여 그 고통을 끌어내는 방법으로 은유는 더 많이 생각하고 느낄 것을 권유한다. 좀더 많이 읽으면서. 그것이 “감수성의 근육을 키우고 타인의 고통에 감응하는 능력”을 찾아준다고 말한다. 함께 글을 읽고 강독하며 글을 쓰고 합평하며 생각을 키우는 그것이.

  

 이 세상에는 나보다 학식이 높은 사람, 문장력이 탁월한 사람, 감각이 섬세한 사람, 지구력이 강한 사람 등 ‘글을 잘 쓰는 사람’이 많고도 많다. 이미 훌륭한 글이 넘치므로 나는 글을 써야 할 이유가 없다. 그런데 내 삶과 같은 조건에 놓인 사람, 나와 똑같은 생각을 하는 사람, 나의 절실함을 대신할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내가 쓸 수 있는 글은 나만 쓸 수 있다고 생각하면 또 기운이 난다. p132


   은유의 글쓰기 강의는 이렇게 감수성의 근육을 키우는 방법을 함께 한다. 나만의 글쓰기에 자신감을 북돋우며 여전히 강의를 지속하고 있다. 특히 은유는 자기의 글쓰기에서 타인의 이야기를 듣고 쓰는 르포나 인터뷰에 관한 글쓰기를 제안한다. 그리하여 이 책에는 실제 은유의 강의를 듣는 학인들이 쓴 글이 실려 있다. 은유는 르포나 인터뷰가 서로의 삶을 보듬는, 그리고 지탱하는 매개라고 말한다. 이들의 글을 읽으면 은유가 말한 글쓰는 방법에 대한 강의의 말들이 다시 떠올려진다. 


 약자는 달리 약자가 아니다. 자기 삶을 설명할 수 있는 언어를 갖지 못할 때 누구나 약자다. p6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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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탈의 계보


넬레 노이하우스, 여름을 삼킨 소녀

  

  "그동안과는 완전히 다른 이야기를 쓰고 싶었다".

  그동안 타우누스 시리즈로 범죄 추리 소설을 써오던 작가의 ‘완전히 다른 이야기’란 어떤 것일까. 완전히 다를 수 있는 이야기라는 것은 장르적인 특성을 말하는 것일지 이야기를 말하는 것일지 생각했는데, ‘완전히 다른 이야기’란 보이지 않았다. 여기에 피아와 보덴슈타인이 등장해서 범인을 추리한다면 얘기의 전개는 같아 질 것이다. 그러니까 비슷한 이야기가 될 것이다. 그것도 그럴 것이 신고만 들어갔다면 청소년보호법을 위반한 범죄자들을 찾는 이야기가 될 것이니까. 아니면 시체만 발견된다면.


 이제 나는 그 친구들이 낯설었다. 그들은 축 늘어져서는 한없이 불평하며 예정된 삭막한 미래로 느릿느릿 걸어가고 있었다. 그 미래 역시 축 늘어져 있고 불만스러울 터였다. p98


  나 역시 이 이야기가 낯설지 않다. 미국을 배경으로 한 독일 작가의 소설인데 작가 특유의 추리와 미스터리가 가미되어 있지만 꽤 익숙하다. 방점은 ‘청소년’에 있다. 이 책은 15세 소녀 셰리든의 성장 소설이라고 할 수 있다. 청소년의 성장 소설이란 늘 방황과 혼란과 반항과 일탈이 상징처럼 따라다닌다. 그리고 그것은 규율에 답답해하고 익숙한 공간을 벗어나고자 하는 욕구 때문이다. “그들은 축 늘어져서는 한없이 불평하며 예정된 삭막한 미래로 느릿느릿 걸어간다”. 덧붙여 가장 힘들어하는 것은 가족의 주는 억압이다. 이 책 속의 셰리든 역시 이 모든 것을 갖췄다. 하나 더 있자면 출생의 비밀이다. 그녀는 자신이 입양되어 온 것을 알고 있고 양엄마는 자신이 하는 모든 일을 못마땅해 한다. 그러니 이 아이의 반항의 이유는 이 모든 것이 골고루 결합된 것이다. 그래서 결국 이 소설 역시도 익숙한 ‘청소년’ 소설의 계보를 따르게 된다.

  작가는 자신이 미국 네브라스카를 여행한 기억을 살려 이 소설을 썼다 한다. 독일 타우누스와는 조금 다른 느낌이 드는 것은 지역적인 차이도 한몫하는 것 같다. 매력적이고 활력적인 이 소녀를 못마땅해 하는 이가 바로 자신의 엄마라면, 그런데 알고 보니 친엄마가 아니라면, 그래서 그렇구나라는 생각을 하게 될 것이다. 이 소녀는 자신을 괴롭히는 엄마와 막내 오빠와의 힘겨루기에서 그나마 아버지와 다른 오빠들의 사랑으로 버티고 있다.

  셰리든의 처음의 일탈은 어찌보면 가벼웠다. 친구들과 사유지에서 음악을 들으며 노는 것 정도. 그것이 보다 자유로움을 느낄 수 있는 공간이고 활동이었다. 그러나 반복된 이 행동으로 경찰에 연행된 이후의 금지된 외출과 좋아하는 음악을 할 수 없게 된 소녀는 더욱 더 강도 높은 일탈과 반항의 욕구를 가지게 된다.

  왜 반항의 형식은 성적인 일탈로 나아가는 걸까. 그것은 반항과 일탈의 틀이 너무나 정해졌다는 생각이 들게 한다. 사회문화적인 배경의 차이가 인간에게 미치는 영향에 대해 생각해 보기도 하지만 강도의 차이만 있을 뿐 다른 나라나 우리나라다 청소년들의 일탈의 궤도는 정해진 듯하다. 어쩌면 그 나이의 셰리단의 성적인 호기심이 아니겠는가 하는 생각도 하게 된다. 사랑의 감정과 성적인 호기심은 다른 것이고 이후 셰리든 역시 그것을 안다. 물론 주체적인 듯이 보이지만 딱히 그렇지도 않아 보이는 셰리든의 격정적인 여름은 그렇게 모든 것이 성적인 일탈로 향해간다. 

  한여름은 일탈과 동의어가 아니다. 여름은 너무 뜨겁고 작열하는 태양 때문에 격정적인 활동에의 욕구를 가지는 것처럼 얘기한다. 하지만 여름은, 그저 여름이다. 다시 돌아올 여름이고 다른 계절로 향해 갈 뿐이다. 작가가 타우누스 시리즈의 넬레 노이하우스였기에 이 책에 대한 ‘관심’과 ‘찬사’가 다르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어쨌든 그 여름을 세 번 삼키고서 출생의 비밀을 알고서 자신은 더한 비밀을 만들어 놓고 셰리단은 이 곳을 떠난다. 그 많은 일들을 겪고서 자유를 찾아 떠나고자 했던 셰리든에게 더 이상의 일탈과 반항은 없게 되는 것일까. 자유를 찾게는 되는 것일까. 청소년들에게, 롤러코스터 같은 감정을 지니고 있는 그 시기의 아이들에게 가족이라는, 부모라는 역할이 미치는 영향력. 그것을 알면서도 부모와 자녀들은 늘 그렇게 대립한다. 결국 모두가 제 감정을 우선하여 여기기 때문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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타우누스 시리즈6. 사악한 늑대


늑대는 억울하다



  시리즈의 여섯 번째다. 나올 때가 되었다. 범죄를 다루는 추리소설이라면 당연 빠지지 않는 이야기, 그 사건이 <사악한 늑대>에 담겨 있다. 제목에서 벌써 어떤 감이 느껴진다. 동화를 연상시키는 제목, 프롤로그의 분위기. 그리고 학대당한 흔적이 온 몸에 가득한 채 강에서 발견된 소녀의 시체. 방송의 힘을 빌렸음에도 시간은 속절없이 흐르고 피해자인 소녀는 여전히 제 이름을 찾지 못한 채 ‘인어공주’로 지칭된다.

  작가의 글쓰기 특징은 이번 책에서도 나타난다. 많은 등장인물이 나타나는 것이다. 차이가 있다면 이전 시리즈에선 용의자가 무수히 많았다면 <사악한 늑대>에선 피해자의 신원을 파악하는 것조차 쉽지 않다. 사건을 해결해야 할 형사들이 능동적으로 문제를 해결하지 못하는 동안 여러 인물들의 이야기가 펼쳐진다. 형사에 의한 용의자로서가 아니라 그냥 등장인물로서다. 결국 이 인물들이 한 지점으로 모아지는 일이 벌어질 것이다. 그것이 무엇이며 언제가 되는지 사건의 크기는 어느 정도인지가 관건이 될 것이다. 

  작가는 <사악한 늑대>를 ‘지금까지 썼던 소설 중 최고의 작품’이라 했다 한다. 형식을 말한 것일까, 스토리를 말한 것일까. 시리즈 다섯 편을 읽은 후 몇 년 만에 <사악한 늑대>를 읽었더니 지루함과 예측가능함이 생겼다. 항상 이 작가의 이야기는 ‘범인’을 찾아내는 것보다 ‘왜’에 더 집중되기에 충분히 범인들이 예상되는 것 같긴 하다. 그리고 대략 ‘왜’의 이유도 가늠할 수 있다. 다만 다단계처럼 이루어지는 범죄의 계보에서 꼭대기에 있는 일의 시초가 되는 이의 ‘왜’는 알 수가 없다. 다른 이들은 그에 의해 길러졌기에 전염되고 그 상황에서 살아가기 위한 방법을 터득한 채 성격이 형성되었다고 하자. 그러면 푸른 수염의 첫 번째 아내가 죽은 이유처럼, 도대체 처음의 이 일을 시작한 이들은 왜 그런 것인가. 단지 성격이 지랄같아서?

  <사악한 늑대>는 아동학대를 다루지만 아동학대 중에서도 여아들에게 주로 해당되는 아동성폭력을 다루고 있다. 변태적이고 비이성적인 경악할 범죄가 혈육에 의해 자행되고 있다는 놀라움은 그것을 혼자서가 아니라 조직적으로 공유하고 있다는 데 대한 경악으로 바뀐다. 제 딸을 제 친구들과 함께 하는 변태적 성행위에 들이미는 권력과 재력을 가진 자의 표피는 미혼모와 아이들을 위한 복지활동을 위한 재단을 운영하는 사람이다. 그러나 그가 운영하는 재단이란 자신의 변태성향을 충족시켜줄 지속적인 아동공급처일 뿐이다. 악은 악을 양성한다. 그가 양육한 버림받고 갈데 없는 아이들은 일찌감치 그의 노예가 되었다가 그 위에 군림한다. 아동포르노와 스너프 사업으로 확장되어 전세계에 조직적으로 움직이고 있는 이 집단이 믿는 것은 그들이 가진 폭력성과 또한 그 험악한 취향에 발을 담그고 있는 재력과 권력을 수두룩 가진 이들이다. 그리하여 그들의 취향은 안정적으로 유지되었고 그들의 끔찍한 범죄는 폭로되지 않으며 오히려 다른 이를 범인으로 둔갑시키는 능력까지 갖추었다.

  작가가 처음부터 의심스럽게 몰아간 이는 이 끔찍한 집단을 폭로하려다 억울하게 아동성범죄자로 몰린다. 그리하여 수감되고 인생이 나락으로 떨어진 채 10여년을 살아온 킬리안 로테문트. 환경이 사람에게 영향을 미치는 것이라서 그렇다고 한다면 그럼에도 영향을 받지 않는 이들에 대해선 어떻게 말할 것인가.  


겉으로 볼 때는 삶이 많이 바뀌었지만 사람 자체는 변하지 않았다. 비밀스러운 욕망과 꿈, 동경은 그대로였다. 평상시에는 잘 참고 지냈다. 하지만 가끔은 이성보다 내적 열망이 강하게 치고 올라와 그것들을 통제하기 어려울 때가 있었다. p106


  오래도록 그리고 또한 전세계적으로 이 끔찍한 아동포르노 마피아 일당이 검거될 수 있었던 것은 삶이 추락하는 가운데에서도 지킬 것은 지키며 삶을 이어온 이들 덕분이다. 끔찍한 상황, 생명의 위협 속에서도 그것을 이겨내고 더 나은 삶을 살기 위해 애쓰는 킬리안, 한나. 사랑을 위해 제가 살아온 삶의 방식을 버리고 아내를 위해 사악한 집단과 맞선 베른트 프린츨러의 굴복하지 않는 노력이, 그들의 꿈이 이뤄낸 결과이다.

  <사악한 늑대>에서 함께 경악하며 가슴을 쓸어내리는 장면은 역시 아이가 “이제 나쁜 늑대가 죽은 거야? 다시는 나한테 아무 짓도 못하는 거야?”라고 말하는 부분일 것이다. “늑대가 잡아가”라는 말에 무서워하는 순진한 어린 아이들에게 끔찍한 짓을 저지르고 늑대를 이용해서 입다물게 하는 사악한 놈들. 아이들은 왜 그다지도 늑대보다 더 무섭고 사악한 놈들보다 늑대를 무서워하는 것인지.

  끔찍스럽게도 가장 악랄한 놈이 끝까지 살아남은 것은 이 타우누스 시리즈가 계속될 것임을 알리는 것일까, 아니면 아동성폭력이 계속될 것임을 말하는 것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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