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숲에 가고 싶네


 안보윤, 알마의 숲


   소년은  삶을 접으려 한다. 어느 숲 속 소나무에 밧줄을 매달고 소년은 머리를 넣는다.

  힘겹게 발목이 빠지는 눈 덮인 산을 오르며 소년이 챙겨간 것은 밧줄과 이어폰. 이승에서의 마지막 교신처럼 소년은 라디오 방송을 듣는다. 유명 청소년 심리상담사의 말은 이승을 떠나는 소년에게 전해진다. 


 “그럼에도 우리는 아이들을 이해해야 합니다. 다그치고 비난하면 아이들은 더욱 과격해지죠. 화해와 용서의 움직임으로 먼저 손을 내밀면 아이들은 틀림없이 제자리에 멈춥니다.”

 “웃기고 있네”


  이승과의 교신을 거부하듯 이어폰을 눈 속으로 집어 던진 소년은, 그렇게 고리 안으로 머리를 집어넣으며 그 어떤 유서도 남기지 않음으로써 왜 소년이 자살했는가에 대한 의문을 갖게 하리라 생각한다. 더불어, “유명 청소년 심리상담사, 아들 자살도 못 막아”라는 기사들이 실리도록. 소년이 고리 속으로 머리를 넣는 이유는 바로 이것이 목표다.

  눈을 떴을 때는 어느 산장이었다. 죽은 것인지 산 것인지 모호한 어느 지점, 소년은 숲 속 알마의 산장에서 알마라는 소녀와 소녀의 삼촌과 올빼미를 만난다.

  

 나는 아침마다 반 뼘씩 자라난 감정의 가지들을 쳐내는 일로 하루를 시작했다. 그래야만 이어나갈 수 있는 생이었다. 혹독하게 감정을 잘라낼수록 삶의 가능성이 커졌다. 원인을 알 수 없으니 증후군이라 이름붙이는 겁니다. 따님의 증상이 워낙 특이해서요. p38~39 


 알마는 눈물을 흘리지 않는다. 눈물을 흘려서는 안된다. 알마는 감정을 키우지 않는다. 기쁨에서 슬픔에도 눈물은 나오니까.


 늘 궁금했었다, 왜 하필 눈물일까. 분노로 뇌압이 상승하면 죽는다든가 웃음소리의 데시벨이 기준치를 초과하면 죽는 방법도 있는데 왜 하필. 그런데 알았다. 알게 되었다. 나의 슬픔은 거세되었다. 나는 누구도 애틋해하지 않고, 무엇도 아쉽지 않다. 누구도 동정하지 않고 무엇도 깊이 들여다보지 않는다. 그러므로, 나는 텅 비었다. 나를 지키는 엄마에게 고마워하지 않고, 엄마의 병을 눈치채고도 놀라지 않고, 엄마와 헤어질 때도 아쉬워하지 않았다. 이윽고 엄마가 가래떡이 되어 나타났을 때조차, 울지 않았다. 울 수 없었다. 이 병이 내게서 빼앗아간 건 인간의 영역이었다. 나로 하여금 짐승의 영역에서 살도록, 이기심과 본능 외에는 필요치 않은 황폐한 영역에서 살도록 했던 것이다. 비겁하다, 비겁하다. 나는 그렇게 외치며 눈밭을 뛰었다. 그럼에도 나는, 살고 싶었던 것이다. p123~124 


  이런 알마이기에 소년의 행위는 이해할 수 없는 것이었다. 삶을 두려워하는 소년과 언제 죽을지 모르는 삶을 지탱하는 알마 사이에 유대는 형성이 될까.  같은 공간 안에서 그들은 서로를 이해하게 될까.


죽음이 왜 두려워? 무섭고 두려운 건 삶인데. 버티는 게 힘들지 끝은 무서울 거 없어, 사실은 알마도 그렇잖아, 혹시라도 눈물이 날까봐, 그래서 죽어버릴까봐 조마조마하잖아, 맘껏 웃지도 울지도 못하고 책 읽는 걸로 시간을 때우고 있을 뿐이잖아. p128


  알마는 언제 죽을 지 모른다는 불안과 절박감으로 삶을 더욱 소중히 여기며 산다. 오히려 알마에겐 정열적으로 살아갈 수 없이 ‘적당히 시큰둥하게 살 수밖에 없는’ 것을 안타까워할 뿐이다. 소년은 그토록 청소년의 마음을 잘 아는 ‘엄마’가 자신의 아들 마음은 모른 채 자신의 뜻만을 강요하는 엄마로 인해 힘겨워한다. 삶에 대한 생각을 달리 가지게 되는 것은 알마가 될까. 소년이 될까. 소년의 힘겨운 삶은 알마가 겪는 것에 비하면 사치스럽게 여겨진다. 또한 어리석고 멍청하고 성급하게. 하지만 알마의 숲으로 가게 된 것은 소년의 힘겨운 마음과 상처 때문이다. ‘누구에 비해서 부족하기에’ 소년의 상처가 가벼운 것이 아니라, 소년의 상처는 소년에게는 그 상태 그대로 절대적으로 힘겨운 일이다. 


네가 뭘 선택하든 후회는 반드시 따라붙어. 발 빠른 놈이거든. 차라리 그놈이랑 정면으로 맞닥뜨려. 실컷 후회하고 속 시원하게 털어버릴 수 있는 쪽을 택하는 거다. p132


   알마의 삼촌은 소년에게 말한다. 그 숲에서 소년은 ‘노루’로 불렸고 다시 소년으로 불리기 위해서는 ‘문’이 열려야 한다. 소년 자신도 모르는 새 통과해 온 그 문이 언제 열릴지 알 수 없지만 소년은 언제 죽을 모르는 알마가 생을 절박하게 즐기는 것처럼, 그 숲에서 자신의 상처를 드러낸다. 상처를 드러낸다는 것은 상처를 치유하기 위한 첫걸음 아닐까. 새삼 알마가 삼촌이 존재하는 알마의 숲이 있기는 한 걸까. 그곳으로 들어가는 문은 있을 순 있는 걸까. 어쩌면 소년의 환상에서 만들어 냈을지 모르는 몽환의 그 숲에서 소년은 어떤 모습으로 되돌아오게 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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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의자 방인영


 이재찬, 펀치


  자칫 오해가 이 책을 선택하게 했다. ‘오늘의 작가상’ 수상작이여서도 아니고 오로지 ‘펀치’라는 제목을 보고, 드라마 ‘펀치’의 원작인 건가?

   여고생이 화자로 자신의 이야기를 펼친다. 이 고3 여고생 ‘방인영’은 여느 여고생과 다른가, 비슷한가를 생각했다. 결론은, 청소년이라는 정체성을 가진 여고생, 우리가 익숙하다고 생각하는 불안정한 고교생의 모습을 보여준다고 내렸다. 이에 대해 말도 안된다고, 방인영은 일반적인 고등학생이랑은 확연히 차이가 있는 독보적 존재라고 반대하는 이의 말도 그렇다고 수긍한다. 하지만, 후자보다 전자에 더 방점을 두는 것은 사회를 살아가는 이 땅의 고교생의 불안정한 상태와 정립되지 않은 가치, 여차하면 삐뚤어지거나 부정적인 감정에 더 매몰되는 모습들을 ‘방인영’이 그대로 보여주고 있기 때문이다.

   요즘 사회면의 기사를 보면 ‘방인영’과 같은 어른들은 수두룩하고, ‘방인영’과 같은 학생들을 만나는 것도 어렵지 않다. 그렇기에 굳이 놀랍다거나, 새롭다거나 하지 않았다.

  어른이 되어, 가르치는 입장에서 ‘방인영’을 바라봤을까. 내 시선은 객관성을 유지한다고 생각했지만 어느 시점에서 분명 ‘방인영’을 분리해냈는데, 그것이 어느 지점인지 모르겠다. 콕 찍어 특정한 사건과 시기가 있었던 것이 아니라 그저 점층적으로 그렇게 된 것 같다.

  일탈이란, 사회에 부적응함에서 오는 것이다. 사회 속에는 가정이 포함하고 이 어린 학생들을 가르치며 사회화하도록 돕는 것은 일차적으로 가정의 역할이라고 얘기한다. 늘 당연하듯 청소년기는 ‘질풍노도의 시기’이므로 불안정한 심리 상태를 가지고 있다는 것이 모든 ‘사건’ 발생 후의 전제가 된다. 그리고 이어지는 것은 가정환경이다.

  엄밀히 따져보면 19세나 20세나, 1세나 22세나 생각의 차이는 얼마나 날까 싶기도 하다. 개인차가 있다는 점은 당연하지만 특정한 ‘틀’로 구분지어 해석하려는 이유 때문도 아닌가 싶다. 섣부른 틀을 끼워서 이야기하나 한다면, 청소년들의 일탈과 반항, 범죄 행동은 같아 보이지만 가정환경의 차이에 따라 사건을 바라보는 차이가 확연하게 다르다는 것을 느낀다.   같은 형태의 사건을 두고서 빈곤가정 청소년들의 일탈과 범죄는 ‘잔인한’ ‘악랄한’이, 부유한 환경의 경우엔 ‘불화와 갈등’ ‘청소년기의 반항’ ‘부적응’이라는 수식어가 붙는다. 펀치의 주인공은 부유한 경제환경에 부모는 학벌이 높다. 방인영의 부적응은 국회의장의 폭생 사주 사건을 맡을 정도로 잘나가는 변호사 아버지와 자신을 달달 볶으며 정신적으로 억압하는 엄마, 그리고 주말이면 가야 하는 구원교회에서 구원받지 못하고 있기 때문이다. 구원교회 역시 소위 ‘급’이 되는 이들의 끼리끼리 모임일 뿐이다. 경제적으로 풍족하게 살고 있지만 결국은 계급사회를 만들어 내는 사회, 이 모순의 구렁텅이에 대해 냉소적인 시선을 가지는 방인영은 이 구렁텅이를 탈출하기를 고대한다. 이 탈출이 가정에서 벗어나는 것을 말하는 것일까. 어쨌든 과정인지 결말인지, 방인영이 내린 선택은 살인계획이다.

  철저하게 허위적이고 모순된 세계에 대해 냉소적이며 육두문자를 날리는 방인영은 허위적이고 모순된 세계의 방법을 따라 계획을 세운다. 절대 자기 손으로가 아닌, 청부의 방법을 ‘기획’하면서. 19세 여고생의 살인계획에 동참된 이는 40대의 계약직 공무원 ‘모래의 남자’다. 이 어린 소녀는 40대의 심리를 요리 조리 휘둘러가며 자신의 계획에 이용한다. 자신은 부모에 의해 이리저리 휘둘리며 소모품이 되기 싫었던 이 소녀는 자신도 이 ‘모래의 남자’를 자신이 휘두르는 소모품으로 만들어 버렸다.

  그러니, 방인영의 이 살인계획에는 어떠한 이해를 가할 부분도 아픔을 공유할 틈도 없다. 오로지 어쩌면 경제적으로는 풍부한 아이의 학업 스트레스가 극에 달한 일탈과 반항으로만 비춰지는 것이다. 부유한 가정에서 겪게 되는 낮은 자존감을 원인이라고 할 수도 있긴 하겠다. 어쩌면 철저하게 ‘안타깝지만 그럴 만도 했어’라고 방인영을 이해할 지점이 전혀 없다는 것이 ‘방인영’이 가진 특징이 되는 건가. 작가의 의도이겠지만, 그렇기에 어떤 면에선 ‘펀치’를 강하게 맞은 것이기도 하고 어떤 면에선 전혀 펀치가 없기도 하다.


모래의 남자는 작고 빼빼 말랐다. 패션에는 전혀 관심이 없는지 후줄근하다. 파란색 남방에 쥐색 점퍼가 도통 어울리지 않는다. 싸구려다. 패션에 관심이 없는 남자는 두 부류다. 자신감이 넘치거나 포기했거나. 모래의 남자는 분명 후자다. 언젠가는 자신감이 넘쳤던 적도 있었을 거다. 나는 언제 잃어버렸을까. 처음부터 없었던 건 아니다. 학교 성적과 비례하는 얕은 자신감 따위가 아닌, 깊은 곳에 저장된 자신감이 옛날 옛적에는 있었다. 나를 바라보는 사람들의 시선과 그 시선 속의 직유가 깊이 침범해 내 자존감을 조금씩 갉아 냈다. 성교육 시간에 본 낙태 동영상에서 태아를 긁어낸 것처럼. 아이가 기계를 피해 도망가듯 내 자존감도 달아나려 안달했다. 이젠 더 이상 도피하지 않아도 된다. 내 자존감은 내 안에 있는 거지 사람들이 볼 수 있거나 그들에게 보여 주는 게 아니란 걸, 엄마의 장례식장에서 깨달았다. p187


   자, 그럼 방인영의 계획에서 대상은 누구에게 향해 있는가. 내신도 외모도 모두 평범한 5등급 소녀의 평범하지 않은 ‘살인계획’의 대상은 부모다. 결국 자신을 이렇게 만든 건 부모들이라 소녀는 항변하지만, 그래서 반성도 후회도 슬픔도 아픔도 없지만 문제적인 시스템에 대해 비웃음을 날리지만, 이 모든 것이 그녀가 날리는 ‘펀치’인가? 분명 정의로운 펀치는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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풍선을 불다가 터졌어



김중혁, 가짜 팔로 하는 포옹



 

 김중혁 소설을 읽으면 대체로 나쁘지 않은 억양으로 “이게 뭐야”라며 킥킥거리게 된다. 이것을 단어로 표현하면 김중혁의 이야기는, 글은 재치가 있다라고 하면 되는 건가? 그래서인지 제목을 보고 작가의 이름을 보면서 떠올린 건 ‘나와라 가제트 만능 팔!’이었다. ‘가짜’는 진실하지 못한, 거짓이란 단어인데 가제트 팔이라니. 하지만 첫 이미지는 중요한 모양이다.   어느새 소설속 인물들에게서 가제트를 본다. 다양한 도구들을 뽐내며 열심히 사건을 해결하려 하지만 가제트 자신의 마무리는 사실 허무하게 끝나 버리는 마는 것. 그렇지만 가제트는 그것을 모른다. 서툴고 엉뚱한.

  여러 권의 소설집을 출간한 작가가 이번 소설집 <가짜팔로 하는 포옹>을 자신의 첫 번째 연애소설집이라고 말한다. 연애소설,집. 특별히 ‘연애소설’이라 말하는 이유가 다른 소설집과는 다른 차이가 있다는 얘기겠지. 여덟 편의 이야기가 어떤 ‘연애’를 품고 있을지. 김중혁 소설은 대화체가 많은 데다가 엉뚱함을 품고 웃을 수 있는 경쾌함으로 상당히 빨리 읽힌다.

 

사랑을 시작하는 사람들의 설렘에는 앞날에 대한 기대가 들어 있다. 설레며 고백하는 사람은 앞에 앉은 사람과 겪게 될 수많은 경험을 짐작하고 떠올리며 미리 행복해한다. 막연한 기대는 꿈꾸는 사람의 특권이다. 다가올 시간을 가늠해보는 일, 행복이라는 덩어리의 무게를 미리 재어보는 일, 그게 사랑의 시작일 것이다. p222 <보트가 가는 곳>

 

  연애소설이라 이름 붙였으니 더욱 재밌고 엉뚱한 연애소설이겠거니 생각하면, 역시 안된다. 연애가 뭐 별거냐, 사랑하는 이야기가 연애소설인 게지라고 한다면야 또 모르지만. 그런 설레임과는 마냥 다른 연애소설의 이야기이다.

 

아무런 애정 없이 그냥 한번 안아주기만 해도, 그냥 체온만 나눠줘도 그게 한 사람을 살릴 수도 있대. 나는 그때 네가 날 안아주길 바랐는데, 네 등만 봤다고. 등에는 가시가 잔뜩 돋아 있었고. p96 <가짜 팔로 하는 포옹>

 

  표제작 <가짜 팔로 하는 포옹>은 시종일관 술주정뱅이의 이야기를 듣고 있는 기분이다. 그래서, ‘네가’ 지금 얼마나 힘들고 괴롭고 외로운지는 알겠지만 네가 그것을 술을 빌어 이야기하기에 나의 진심은 ‘네가 한 이야기’보다는 ‘네가 술을 먹고 하는 이야기’라는데 집중되는 듯하다. 말의 진실성이 말을 표현하는 방식에 묻혀 버리는 느낌. 그러니까 다 맞춰진 퍼즐처럼 퍼즐을 맞춰가는 과정이 있었음에도 처음부터 그냥 퍼즐이었던 상황이 되는 기분을 경험한다. 그러니, 그런 상태로 아무리 떠들어도 처음부터 우리에게 ‘과정’은 없었던 것이다.

 

그림을 다 맞추고 나면 새로운 걸 완성했다는 기분이 들지 않고, 그냥 원래 있어야 할 것들을 제자리에 놓아둔 기분이야. 아버지는 밥상 뒤집어엎고 나가고, 나 혼자 남아서 반찬이며 밥이며 국물이며 사방에 엎질러진 걸 다 정리해놓고 소주 마실 때의 기분이랄까. 내가 지금 여기서 대체 뭐하고 있지? 그런 기분이 갑자기 들어. 다 맞춰진 퍼즐을 보고 있으면. p93 <가짜 팔로 하는 포옹>

 

  풍선을 크게 불고 있는데 갑자기 바람이 빠져 쪼글쪼글해진 풍선을 보고 있는 기분이 이 책을 다 읽고 난 내 상태를 나타내는 말 같다. 분명 책을 읽는 과정은 있었는데 여전히 완성된 퍼즐을 보고 있고 그 과정은 어딘가 뿌연 기분이 마냥 드는 것. 이것은 먹먹함과는 다르다. 약간 모호함이라고 해야 할까. 아니, 가만 생각해 보면 그저 무심함인 것도 같다. 그래, 사는 게 그런 거지라고 내뱉어 지는.

 

바닷물 속에 자연스럽게 녹아드는 것, 바닷물의 일부가 되는 물의 심정. 그런 게 한 개인의 종말일 것이다. 바다는 연신 물을 받아들이면서도 시치미 뚝 떼고 늘 변함없다는 듯 출렁이고 있다. 생명이란 저렇게 무심한 것인지도 모른다. p222 <보트가 가는 곳>

 

  그런들 저런들 어떠리. 정말로 그렇대도 나쁘지 않을지 모른다. 감정이란 늘 격랑이니까. 관계란 멀어지기도 하고 가까워지기도 하고 그런 것. 오랜 시간이 지나서 되돌아볼 때는 나쁘지 않을지 모른다. 하지만, 지금 이 시간에서 겪는 사랑의 감정이란 폭풍과도 같은 것이기에 가짜 팔로 해주는 위로라도 필요한 것일지도. 가짜 팔로라도 건네는 위로로 폭풍을 잠시 잊을 수도.

 

그래, 요요로 하자. 가까워지고 다시 멀어지고 다시 가까워지는 시간. 영원을 향해 직선으로 흐르지만 결국 다시 돌아오는, 요요의 시간으로 하자. 그래 나쁘지 않아, 나쁘지 않아. 돌아갈 수는 없지만 그 시간을 떠올리는 것만으로도 나쁘지 않아. p300 <요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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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대에게 보내는 제의


   최진영, 구의 증명


   ‘구의 증명’에 당연하게 수학적인 논리의 전개를 생각했다. 수학을 좋아하지도 않고 푸는 것은 더 더욱 좋아하지 않고, 잘 풀지 못하면서, ‘증명하라’를 떠올리다니. 그런데 구가 구임을 증명하는 문제는 어떻게 풀릴까. 왜 흥미있게 느껴지는가. 그런데...


  터무니없는 것을 받아들여야 할 때 믿음은 아주 유용하다. 말도 안 돼, 라는 말이 튀어나오는 일에야 믿음이란 단어를 갖다 붙일 수 있다는 말이다. p10


  소설책 제목을 보면서 수학, 논리, 증명을 생각했는데 그 ‘구’가 그 ‘구’가 아니라니. 수학적 사고, 논리적 전개를 생각한 나는 저 문구가 눈에 딱 들어온다. 나처럼 생각한 사람을 위한 문구가 전혀 아니긴 하지만, 그 간극이 너무 크기에 “말도 안 돼”를 외쳐야 할 지, 무조건 “믿음”을 끌어들여야 할 지 망설이는 동안, 한가지가 확실해졌다. 어쨌든 이 터무니없는 이야기의 어조가 아리고 쓰린 탓에 일단 믿어 보자고.


불행해도 행복해도 구를 생각할 텐데, 그런 삶을 살고 싶지는 않았다. 구를 생각하면서 살기는 싫었다. 구와 같이 살고 싶었다. 우리는 결코 좋은 사이가 아니라고 구는 말했다. 멍청한 집착이라고 했다. 분명 더 큰 불행이 올 거라고 했다. 불행이 커지면 함께 있어도 외로울 것이고, 자기와 같이 있다는 것 자체만으로도 괴로울 것이고, 그때가 되면 아무것도 돌이킬 수 없을 거라고. p151


  그 애들의 이름은 왜 ‘구’이고 ‘담’인가. 왜 어릴 적부터 인연으로 맺어져 돌고 돌아도 서로가 되게 만들었을까. ‘구’의 이름에선 오래라는 말이, 돌고 도는 순환의 의미가 떠오른다. 그러면 ‘담’은, 담담하다인가. ‘넓고 큰 도화지를 두 손으로 구깃구깃 구겨 아주 작은 공처럼 만들어 놓은 것 같은 구’를 ‘담’은 사랑한다. ‘구’도 담을 사랑한다. 그들은 서로 사랑한다라고 말할 수 있을까. '이건 사랑이 아니야‘라고 말하지만, 뭐든 상관없는 덤덤하게 보이는 사랑. 덤덤하지 않다는 말이 더 적절할지 모른다. 불행해도 같이 있고 싶다는 담인데, “만약 네가 먼저 죽는다면 나는 너를 먹을 거야”라고 말하는 구인데 어떻게 사랑이 아니라고, 덤덤한 사랑이라 말할 수 있겠는가. 그들의 사랑은 그들의 힘겨운 삶 가운데 “영원이 변질되지 않을 따뜻한 밥과도 같은 것”이다.


몸은 고되고 앞날은 곤죽 같아도, 마음 한구석에 영영 변질되지 않을 따뜻한 밥 한 덩이를 품은 느낌이었다. p73


  구의 말처럼, 담은 조각조각 구를 먹는다. 어둠이 깔린 길 위에서 담은 구를 붙잡고 먹는다. 풍경으로 길바닥 위의 두 연인의 모습이 비쳐진다. 사람을 먹는 사람은 식인종이고 우리는 그들을 ‘야만적’이라고 칭한다. 하지만, 인육을 위해 살인하는 식인종과는 달리 죽은 이를 먹는 식인종에게는 그것은 제의와도 같다. 그러니, 구를 죽여 먹고 있는 게 아니라 이미 죽은 구를 먹는 담의 행위는 일종의 제의라고 볼 수 있는 것일까. 구가 죽으면 따라 죽으리라 생각하면서도 자신들의 시체를 걱정하는 담이기에 마치 죽은 동물을 태우듯 형식적이고 의미없이 처리되고 말리라는 걱정을 하던 담이니까. 태우기도 묻기도 싫었던 서로이니까, 담의 이 행위는 구가 죽기 이전부터 구에게도 얘기했듯이 죽은 후의 제례의식인 것이다. 야만적이라고 말하기엔 먹먹한. 또한 경건한.

   

여기 네가 있다.

    나는 너와 있는데, 너는 나를 느끼지 못한다. 그러니 네가 여기 없거나 내가 여기 없거나 둘 중 하나 아닐까 싶다가도, 고통스럽게 나를 뜯어먹는 너를 바라보고 있자니 있고 없음이 뭐 그리 중요한가, 그런 생각이 들었다. 있든 없든 그건 어디까지나 감각의 영역일 텐데, 나는 죽은 자다. 죽어 몸을 두고 온 자에게 감각이라니 무슨 개소리인가. 하지만 느껴진다. 나는 분명 너를 느끼고 있다. p172


   소설의 시작부터 담은 구를 먹고 있었다. 그러니까 이것이 환상인지 농담인지, 이것이 가능한지 가늠할 수 없었던 시작에서 논리따위는 멀리 치우고 ‘믿음’을 이끌어냈어야 했던 거다. 지금은 믿는다. 담은 오래도록 살아남아 구의 시체를 완전히 사라지게 만들었으리라고.

  작가는 애인과 같이 잇을 때 그의 살을 손가락을 뜯어 씹어 먹는 상상을 했다고 했다. 그러니까 담이 구를 먹는 것은 이 이야기는 그 상상에서 발현된 것이다. 작가의 말을 읽지 않았더라면 좋았겠지만, 작가는 그 상상을 하며 혼자 좋아 웃곤 했다고 말하는데 담의 처절한 행위가 작가의 말을 입으면서는 그냥 그런 연인들의 애정행각으로 느껴졌기 때문이다. 연인들의 애정이 비극적이고 처절하기를 바라다니, 무슨 가학적인 심보인가 싶긴 하지만, 여튼 그랬다. 그래서 여운이라는 것이 지속된 것이겠지만.

  최진영 작가의 장편소설 <나는 왜 죽지 않았는가>도 독특한 스타일의 구성이었다. 구성과 느낌이 구의 증명과 비슷하다. 내용의 차이와 좀 더 긴 장편과 짧은 장편의 차이. 어떤 책은 스토리에 집중하게 되고 어떤 책은 스타일에 집중되기도 한다. 이 책은 스토리보다는 이야기를 하는 방식에 눈이 더 간다. 제목과 등장인물의 이름까지 더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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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의 빛과 그림자


꽃그림자놀이 2015년 제11회 세계문학상 우수상 수상작


 박소연 저, 나무옆의자. 2015.


  

   어떤 종류의 소설을 읽는지는 개인의 취향이니까 진지함을 깔고 왜 읽는 거냐고 물어본들 그 대답에 특별히 반박할 이유는 없다. 또한 아무리 진지하게 물었다 해도 “재밌다”가 절반 이상의 답으로 돌아올 테니까.

   하지만, 소설을 왜 읽느냐라는 물음엔 좀 진지해질 필요가 있다. 간혹 그 물음은 ‘소설을 읽지 마’라는 전제를 깔고, 그것을 결론으로 하기 위한 질문일 수도 있으니까. 지금이 어느 때인데 그런 일이라고 할지 모르겠지만 어쩌면 한번씩은 들어보기도 했을 것이다. 가만 생각해 보면 그런 소리들은 사실은 ‘책을 읽어야 된다’라고 가르치던 학교에서 가장 많이 들었던 말이기도 하다. ‘학교에서는 읽지 마’, ‘자율학습 시간엔 읽지 마’, ‘시험기간엔 읽지 마’ ‘이런 소설은 읽지 마’ ‘그거 읽을 시간 있으면 교과서나 봐’.

   읽어야 한다고 말하지만 읽어야 할 책은 정해져 있고, 늘 목록화된다. 취향과는 상관없이, 취향을 찾을 여력도 없이 ‘읽어야 한다’는 책을 만나서 왜 그 책을 읽어야 하는지를 암기하고 나면, 내가 읽고 싶은 책을 찾을 수 있게 되는 건가.

  과거에나 지금에나 여전히 소설을 금기하고 천시하는 분위기는 있다. 지금은 성적에, 대학 진학에 ‘방해’된다는 이유였고 과거엔 ‘위험’하다는 이유였다. 여기, 이 책은 조선 정조 시대 소설을 금지하던 때, 소설을 읽고 쓰는 사람들을 둘러싼 이야기를 미스터리와 액자 소설 형식으로 담고 있다.


소설가는 세속의 지기(知己)라지 않나? 문체가 시대를 반영하는 그림자라면, 소설은 조선이 변하고 있다는 증거일세! 난 그 변화를 소설이란 방식으로 기록하고 싶어. p13


  정쟁이 심화되고 사회의 변화가 가속화되는 때, 사회의 사람들의 변화를 표현하고 싶어 하는 친구 최린의 얘기에 시골에서 스승의 조언에 따라 소설을 멀리 한 선비 조인서는 친구를 극구 말린다. 그러나 운명은 오히려 조인서로 하여금 소설을 읽고 쓰게 만든다.    

  조인서가 소설을 읽게 된 계기는 귀신이 나오는 집에 갇혔기 때문이다. 자발적인 갇힘이긴 하지만. 우연히도 겨울날 매화꽃에 홀린 조인서는 폐가를 방문하고 한 노인으로부터 그곳에 귀신이 없다는 걸 밝혀 달라는 제안을 받는다. 그곳에 얽힌 비밀을 밝힐 마음에 ‘유현당((幽玄堂)’이라는 폐가에서의 생활이 시작되는데 생계 때문에 소설을 써 세책점에 팔거나 중국 소설을 번역하게 된다.

  그의 일과는 소설을 읽고 쓰는 일과 집 안의 비밀을 밝히는 것이다. 그을린 소설책을 발견하면서 빈집에 얽힌 이야기와 자신이 왜 빈 집에 살게 되는지를 알게 되는데 모든 것은 ‘역모 사건’과 얽혀 있었다. 그리고 이 역모사건과 유현당의 이야기를 다룬 소설 『아수라』가 세간에 나온다. 이 큰 틀의 이야기 속에 조인서가 읽는 여러 종류의 소설이 실려 있는데 그 이야기들은 우리가 알던 설화, 민담, 소설 등의 이야기를 새로 각색한 형태다. 주된 이야기와 맞물려 이런 소설 속 소설을 읽는 느낌이 이 책의 핵심이기도 하다. 작가가 『천일야화』 속 셰에라자드처럼 이 소설을 썼다고 한 것처럼, 소설 속 이야기들이 과거와 현재의 옷을 입고 글 속에 잘 녹여 들어 있다. 작가는 이것을 제목의 꽃그림자놀이로 표현한다.


소설은 일종의 그림자놀이예요. 현실이 실체를 드러낼 수 없으니, 대신 그림자로 보여주는 거지요. 실체가 없으면 그림자도 존재하지 않지만, 그림자는 실체를 그대로 반영하지 않아요. 이 손으로 토끼도 되었다 여우도 되었다 하잖아요? 이런 묘미가 나를 소설로 이끌었나 봐요. 내가 살고 있는 현실을 비추면서도, 때로는 의도하지 않았던 그림자만의 재미있는 세계가 펼쳐지니 말이에요. p207


  누구에겐가 소설은 ‘도구’가 된다. 그것은 비밀을 드러내기 위한 욕망으로 이용되기도 하며 그럴 때 또 다른 누군가에게는 재앙이 된다. 소설 속에 ‘이야기’를 담으려는 자와 이야기의 재앙을 피하려는 이가 맞붙을 때, 그것은 소설의 박해로 이어진다. 그것은 언제나 소설의 형식을 빌려 이야기를 담으려는 자는 억울하거나 소망을 가진 자이자 민중들이고, 억압하려는 이는 권력을 가진 자이기 때문이다. 이 책에서 소설을 읽는 폐인 중에 기생 계심과 최린의 여동생 란의 소설읽기는 남다르다. 계심은 소설 읽기를 통해 자신의 허한 마음을 달래고 자 하며 최란은 소설을 통해 사내들이 암글이라 천시하는 한글로 ‘조정에서 주도하는 문체반정과는 다르게, 수컷이 지배하는 조선의 문체를 바꿔보고 싶은 꿈’을 갖는다.


소설은 보잘것없는 것에 의미를 부여하고, 섬세하고 부드러운 것의 힘을 증명하려는 문장일세. p12


  이 보잘것 없는 것에 의미를 부여하는 이들이 많을수록 탄압이 거세어진다. 탄압이 거세다는 것은 또한 소설이, 이야기가 가진 ‘힘’을 반증한다.


『아수라』가 큰 인기를 얻으면서, 유현당의 옛 제자들이 사건의 진상을 규명하려고 움직이고 있단 얘기를 들었어요. 유현당을 역모죄인으로 몰았던 노론은 긴장하고 있을 거예요. 오빠, 노론에는 소설 폐인이 많아요. 그들이 이 소설을 지켜보고만 있진 않겠지요. 『아수라』를 쓴 사람은, 유현당 집안과 사건의 내막을 훤히 아는 이가 틀림없어요! 노론이 손을 쓰기 전에 우리가 먼저 그를 찾아내 위험을 알려야 해요! p 174~175   


  소설이 가진 ‘힘’ 있다면 계속 이야기를 읽어야 하는 이유다. 문학이 죽고, 소설을 읽는 이가 시를 읽는 이가 점점 사라져간다고 해도. 어떤 이야기는 ‘금지’당한다 해도 그 금지의 이야기를 해나가야 한다.

  한강 작가의 맨부커상 수상 이후 소설 독자들이 증가하고 있다는 기사를 봤다. 어쩌면 특정 작가에 한정된 이야기일 수도 있지만, 오랜 세월의 박해를 견뎌온 소설이 다시금 그 명맥을 이거나가고 사람들마다마다 가진 꿈들이 소설 속에서 펼쳐질 수 있기를. 소설을 통해서 펼쳐질 수 있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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