롤점검은 날마다 필요하다


 

    중학생 조카가 <제인 에어>를 들고 나왔다.

    “그 책은 너 취향 아니잖아? 읽으려고?”

    “어. 지금 롤점검 중이야. 게임을 할 수가 없어”

   그래도 게임 대신 선택한 것이 책이라니, 그나마 다행이다. TV가 없던 시절엔 나름 열심히 책을 읽더니, 중학교에 들어가고 핸드폰도 생기면서 책하고는 거리를 쌓았다. 특히나 감성적인 애도 아니라 문학책에 대해서는 더욱 더 관심이 없는 남학생이다. 그래도 책갈피가 반페이지에 있는 것으로 봐선 거기까진 읽은 모양이다.

  

  “고전을 읽으라 해서 읽는데 재미없어. 초반엔 그나마 재밌는데 갈수록 더 그래”

  “좀 더 읽다 보면 재밌을 거야. 연애 얘기도 나오고”

   “뭐? 연애?”

  여학생들이라면 제인 에어와 로체스터의 사랑이야기에 관심을 기울였을 텐데, 그 말에 더 이상 읽을 이유가 없다는 듯 도리도리 고개질 하는 조카를 보며 급 방향을 선회했다.

  “읽다 보면 재밌어. 추리도 좀 나올 거고”

  제인 에어를 추리라고 소개하다니. 웃음이 나왔지만 어쨌든 덕분에 제인 에어가 생각나고다시 들여다볼 마음이 들었다. 여학생이라면 제인 에어는 몇 번을 읽었을 텐데. 제인 에어의 어릴 적 학대에 마음 아파하고 로체스터와 제인 에어의 사랑이야기에 마음 졸이고, 돈필드 저택을 상상해 보기도 하면서 어떤 운명을 향해 나아갈지를.

  책을 소유하고 있다는 장점은 생각이 날 때 펼쳐볼 수 있다는 점인 것 같다. 제인 에어를 읽을 당시엔 <폭풍의 언덕>과 비교하며 작가 샬롯 브론테와 그녀의 동생 에밀리 브론테의 생애에 대해서도 상당한 관심을 가졌다. 책 속의 주인공들의 성격이 각자의 성격을 반영한 것이란 이야기를 들은 것도 같다. 브론테 자매들은 너무 일찍 세상을 뜨는 바람에 많은 작품을 남기진 못했지만, 오랜 시간 동안 사람들에게 잊히지 않는 고전에 자신의 작품들을 남겨놓고 있다. 1800년대의 이야기를 지금까지도 사람들이 읽고 있고 읽고 싶은 책, 읽어볼 만한 책으로 꼽고 있으니 얼마나 기쁘겠는가.

  중학생이던 때, 제인 에어를 읽고 세인트 존을 좋아한다는 친구가 있어 엄청 놀랐던 기억이 난다. 하지만 ‘내가 좋아하는 사람’과 ‘제인 에어에게 어울리는 사람’으로 분리해서 보면 그 친구의 선택이 전자였다는 생각을 하면서 이해가 된다. 자신의 선택이 아닌 선택해 주는 사람과의 결혼을 강요받던 시대, 강요받던 여성이 자신의 결정으로 사랑과 결혼을 이루는 이야기는 수많은 여성들에겐 얼마나 환상적으로 다가왔을지.

  제인 에어는 주체적인 여성으로 표현되고 있다. 고아이기 때문에 겪었던 수많은 어려운 상황 속에서도 독립적이고 당당하게 살아가는 여성의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또한 그것이 수많은 여성 독자들을 매료시킨 이유일 것이다. 지금 따져보자니 로체스터의 행동들은 많은 논란의 여지를 준다. 사실 세세하게 따져보면 매우 충격적이다. 자기중심적인 것을 떠나 로체스터의 행동은 현대에서는 비난에서 그치지 않는 범죄 수준이다.

  나이가 들어서 때때로 예전의 책들이 다시 읽고 싶어질 때가 있다. 그때의 느낌, 이미지, 문장, 이야기, 그리고 그 책을 읽을 당시의 ‘나’가 그리워 들여다보고 싶어지는 책들. 하지만, 어른이 되어 읽었을 때 머리가, 냉소적으로 문제를 지적하듯 보게 되는 책도 있었다. 제인 에어도 가끔 생각날 때, 다시 읽게 되면 중학생 때 느꼈던 로체스터에 대한 감정이 상당히 변해지겠거니 하는 생각이 들긴 했다. 1800년대라는 시대적 상황 속, 제인 에어의 시점으로 읽어 나가면 다시금 그 마음으로 보게 될지 어떨지.

  인생이란 어떤 책을 읽어야 되는 나이가 있긴 한가 보다. 지금 생각하면 학창시절 이 책을 읽은 것이 얼마나 다행인가 싶다. 그래서, 조카에게 제인 에어의 페이지가 조금 더 넘어가게 도와준 롤점검에게 큰 공을 돌리고 싶다. 나 또한 덕분에 제인 에어에 대해 추억에 잠기는 시간이 될 수 있었다.

  하지만 롤점검은 매일 하면 좋겠다. 특히나 방학 즈음, 그 시간만큼이라도 게임에 빠진 아이들이 조금이나마 책을 읽을 수 있는 시간이 되기를. 어떤 책을 읽고 감흥을 느끼는 건 개인차, 취향이기도 하지만 ‘시기’라는 것도 있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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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웃고 싶지 않은데 웃음이 나는.

 

 

웬만해선 아무렇지 않다  

 이기호 , 박선경 (그림) .

 

 

 

    의도한 것인지 이기호의 소설은 읽기 전부터 웃음이 유발될 것이라는 생각을 하게 된다. 물론 그 웃음이 길고 지속적이지 않다는 것에 함정이 있다. 이 책도 그 중에 하나다. 제목에서 주는 느낌, <웬만해선 아무렇지 않다> 속에 담겨진 웃다 앓을 이야기들. 그런 것 같다. 웃으면 안 되는데 웃음이 나는 소설.

   이 소설집도 최근 여러 편의 소설집의 계보를 잇는 짧은 소설의 묶음이다. 단편소설과 중편소설로 페이지가 정해진 소설의 흐름이 어느덧 짧은 이야기로 바뀌는 건가. 최근 출간된 여러 편의 소설에서 이런 경향을 봤다. 이것은 작가의 의도인지 편집자의, 출판계의 의중인지 모르겠다. 어쩌면 후자일 수도 있는 게 특정 출판사에선 아예 짧은 소설 위주의 시리즈를 기획적으로 출간하고 있는 것을 봐선 이런 분량의 소설을 작가에게 요구했겠거니 싶다. 이런, 그 출판사가 이 출판사였다. 정이현의 <말하자면 좋은 사람>과 같은 스타일. 소설의 분량인들 무슨 상관이랴. 글이, 이야기만 좋다면 그것에 마음을 주면 되는 것일 뿐.

  어쨌든, 이렇게 짧은 소설의 계보에 이기호도 참여했다. 이야기의 주인공들은 전반적으로 몸은 바삐 움직이고 있는데 그 움직임이 예사스럽지 않다. 움직이고 움직이며 무언가를 하고는 있는데 그 모습이 어째 뒤뚱뒤뚱 허둥지둥 위태롭기만 하다. 소설의 세계가 상상이 아닌 현실을 사는 사람들의 모습을 보여준다고 할 때, 이 소설 속 주인공들은 애타게도 안쓰러운 모습들을 보인다. 이기호의 전작 소설 제목이 떠오르는 건 그래서일 것이다. <갈팡질팡하다 내 이럴 줄 알았지>.

  현실적이기도 하고 오히려 그래서 더 현실적이지 않은 것도 같은 이야기들이 펼쳐지는 가운데 <낮은 곳으로 임하라>의 청년들의 이야기가 맴돈다. 소설집의 제목이 짧은 소설의 제목이 아니라 이야기 속의 문장이었다. 계속되는 취업의 실패를 겪는 청년들의 표정이 이 제목과 겹쳐진다. 그래도 웬만해선 아무렇지도 않아야 하겠지. 부모에게서 사업자금을 얻어낼 형편이라도 될 수 있다는 것 또한 다행이지 않은가, 라고 위안을 삼을 수 있으니까.

 

준수는 강원도를 향하는 내내 말없이, 어쩐지 비장해 보이기까지 한 얼굴로 앉아 있었는데, 나는 그게 단순히 우리 미취업자들의 일상 표정이라고만 생각했다. 눈높이를 낮추라는 말과 땀에서 배우라는 말, 그 말들을 들을 때마다 우리는 점점 무표정하게 변해갔고, 결국은 지금 준수가 짓고 있는 저 표정, 그것이 평상시 얼굴이 되고 말았다. 웬만해선 아무렇지도 않은 표정…… 나도 눈높이를 좀 낮추고 취업하고 싶었다. 하지만 어찌된 게 이놈의 나라는 한번 눈높이를 낮추면 영원히 그 눈높이에 맞춰 살아야만 했다. 그게 먼저 졸업한 선배들의 가르침이었다. 내 땀과 대기업 다니는 친구들의 땀의 무게가 다른 나라. 설령 눈높이를 낮춰 취업에 성공했다 하더라도 월급에서 학자금 융자 빼면 아무것도 남지 않는 나라…….

강원도에 갔다 온다 한들 아무것도 변하는 것은 없겠지만, 에라, 모르겠다, 거기 가면 눈높이 따윈 없겠지, 생각하며 나는 두 눈을 감았다. p25~26


  한편, 현대 사회 속에서 가상의 세계에 빠져 허우적이는 사람들은 많이 볼 수 있다. SNS의 세계에서 자신을 가상하고 드러내려는 사람들의 모습들. 이에 관한 이야기도 이 책에 실려 있는데 이 인터넷상에서 가상의 나로 살고 있는 사람의 모습에 관해서 정이현의 짧은 소설집에도 다루고 있는 이야기다. 그 두 이야기를 비교하는 맛도 좋을 듯하다.

 인생은 <초간단 또띠아 토스트 레시피> 같은 것일 게다. 누구나 할 수 있고 쉽다고 세상 모두가 이야기하지만, 그렇지 않다는 것을. 사람들은, 세계는 삶의 다른 이야기를 하지 않는다. 같은 이야기들만을 한다. ‘해야 하고, 할 수 있고’ 그러니 ‘넌 왜 그러고 있니?’ 같은 뉘앙스의 말을 아무렇지 않게 흘린다. 돌아보면 모두 힘겨운 삶에 허덕이고 있으면서도 웬만해선 아무렇지 않은 표정으로, “너만 왜 그래?”라고 말하고 있는 듯하다. 그래도 무언가 하고자 노력하고 있는 사람들 앞에 버팅기며, 들어갈 틈을 주지 않은 채.

 

하고 싶은 말은 많았으나, 그저 모든 것이 부끄러워졌을 뿐이었다. 나는 그저 무언가를 다시 해보려고 했을 뿐인데…… 그는 괜스레 케이블TV 속 셰프가 원망스러웠다. 누구에겐 초간단 요리가, 또 누군가에겐 그렇지 않음을…… 아무도 그것을 말해주는 사람은 없었다. p184

 

  힘겨운 삶을 버팅기며 살아가면서 듣고 싶은 말은 그것일까. <이젠 애쓰지 않아도 돼요>라는 말. 그것이 포기의 낙심의 말로써가 아니라, 진심어린 위로와 희망의 말로써 건네고 듣는 말로.

 

그 형 딸아이 말이야, 고등학교 교복을 입은 내 오촌 조카가, 제 아빠 얼굴을 쓱 한번 문지르더니 귀에서 뭔가를 쑥 빼내는 거야. 그러면서 “아빠, 이젠 애쓰지 않아도 돼요”라고 말하더라고. 그게 뭔지 알겠어? 나도 처음엔 몰랐는데…… 그래, 그게 바로 보청기였어. 알고 보니 이 형이 교통사고 당했을 때, 그만 청력도 많이 손상되었다나 봐. 그런데도 그 귀로, 그 청력으로, 이십 년 넘게 가수 생활을 한 거였지……. 그걸 이 세상에서 오직 딸만 알고 있었던 거고. 나? 나는 형한테 아무 말도 하지 못하고 나왔어. 그저, 그 형이 고장 난 귀로 살아온 이십 년을 생각했을 뿐이지. 그러니까 아무 말도 못하겠더라고. p216~2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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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명의 목소리



인류가 존재한 이래, 온 세상을 향해 자신의 목소리를 외치는 사람들은 항상 존재해왔다. 불합리하고 불공정한 신분제의 굴레를 벗어나기 위해, 소수의 지주들이 땅을 지배하고 착취하는 구습에 정하하거나 한 사람의 존재가 다른 사람의 존재만큼 평등함을 외치는 사람들은 늘 존재해왔다. 때로 그 외침은 생명을 담보로 하고, 젊은 나이에 수감되고 일신의 안락을 포기해야 하는 힘겹고 거친 삶이었다. p13


  그렇다. 이런 사람들은 늘 존재해왔다. 안타까운 건 이런 이들은 끊임없이 존재할 것이고, 이들이 저항할 수밖에 없게끔 하는 이들도 끊임없이 존재할 거라는 거다. 그들은 불합리와 부조리한 억압의 틀을 계속 만들어왔고 만들어 나갈 것이다. 이 틀을 깨부수기 위해 노력했고 다양한 방식으로 그 저항을 표현한 이들, 이름 없는 이들의 기록들이 이 책에 담겨 있다. 그들은 책뿐만 아니라 연설문, 법정에서의 최후 진술, 슬로건, 대자보, 낙서, 팸풀릿, 가요 등 다양한 형식으로 자신들의 분노를 표현했다. 이 책, <저항자들의 책>은 이들의 목소리를 역사적 상황 설명과 함께 연대기 순으로 엮은 것이다.


   백성을 억압하는 왕의 잔인한 통치는 살인자의 흉포함보다 더 가혹하다.

p31 티루쿠랄, 티루발루바르, BCE 200년경


   저항과 분노의 목소리가 있었다는 것이 꼭 좋은 일만은 아닌 것은 그러한 일이 발생하는 사회였다는 의미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역사에서 도대체 민중을 억압하지 않은 나라는, 권력자는 없었다는 점을 상기하면 한번이라도 이런 목소리가 없었다는 것도 안타까운 일일 것이다. 그렇다고 보면 대한민국의 저항의 기록을 외국인의 저서에서 만날 수 있는 것은 반가운 일이다. 만적의 난(1198), 동학농민운동(1894), 4·19혁명(1960), 광주민주항쟁(1980)에 관한 기록이 그리고 한국의 시인 박노해의 [노동의 새벽]에 실린 시가 이 인류 4000년의 역사의 기록에 포함되어 있다. 어쩌면 우리나라의 특정 교과서에서는 제대로 만날 수 없을 지 모르는 기록들일 것이다. 


 여기 그대와 나 외에 공범은 없소.

   그대는 압제자, 나는 해방자요.

p70 해방자가 압제자에게, 투팍 아마루 2세, 1781


   들여다보면 저항자들의 목소리는 그 울림이 같다. 억압의 이유와 방식이 같기 때문일 것이다. 억압하는 이들이 같기 때문일 것이다. 그렇기에 저항자들의 목소리는 그 아픔을 알기에 같고, 그들이 바라는 것이 다를 수 없기에 같다.


    말씀해보십시오. 어떤 것이 당신의 것입니까? 당신은 어디서 당신의 행복을 길어왔습니까? 당신은 마치 극장에서 자리를 차지하고 앉아, 다른 사람들은 들어오지도 못하게 하고 모든 사람들이 공동으로 사용하도록 만들어진 것들을 마치 자신만의 것인 양 다루는 사람 같습니다. 부자들이 바로 그렇답니다. 그들은 공공의 재화를 선점했기 때문에 그 재화를 마치 자신만의 것인 양 취하는 것입니다. 자신의 필요를 충족시키고 남은 것들을 부족한 사람들에게 돌려준다면 아무도 부자가 되거나 가난해지지 않을 것입니다. …부자는 도둑입니다. 

        p36 어떤 것이 당신의 것이오?, 카이사리아의 바실리오, 300년경.


  물론 압제자가 권력자만 있는 것은 아니다. 이 오랜 인류 역사에서 여성과 동성애자에 대한 탄압, 이민자에 대한 탄압, 유색인종에 대한 탄압, 그리고 어린 아이에 대한 탄압 또한 있었으니까. 그래서 그들의 저항의 목소리 또한 울린다.


    결혼은 고대 인간사회가 만들어낸 가장 큰 오류입니다. 결혼한다는 것은 곧 노예가 된다는 뜻입니다. … 따라서 결혼은 자유도시에서는 더 이상 묵인될 수 없습니다. 결혼은 범죄로 간주되어야 하며 가장 혹독한 수단에 의해 제압되어야 합니다. 누구도 자신의 자유를 팔아넘김으로써 다른 시민들에게 나쁜 본보기를 보일 관리는 없습니다.

p138 여성동맹에서의 연설, 파리코뮌 지지자


  인류의 멸망이 도래했고 위기라며 전세계가 협력해야 한다고 외치면서도 각 나라를 대표하는 이들은 자국의 이익을 우선하고, 자국내에서 자신의 입지를 우선시한다. 그들이 바로 혁명을 유도하는 이들이다. 위험과 위기를 극복하고 노력해야 한다지만 그 노력의 주체는 늘, 민중이다. 위험하니까 그 위험을 모두 감수해야 하고 모든 위험의 순간에 뛰어들어 위험을 몸으로 막아야 한다. 하지만, 자세히 알지 못할 때도 많다. 왜, 위기인가를. 무엇이 위기를 불러 왔는가를. 알고자 하지만 알 수 있는 것은 제한되었고 그렇게 수천년을 저항자의 이름으로 살아왔다. 무명씨의 기록처럼 “지식인이면 어떠냐 / 노동자면 어떠냐 / 농민이면 어떠냐 / 우리는 민주시민이다.”  이 하나의 문구로 민중은 뭉친다. 이 하나로 민중은 혁명가가 된다.


    혁명가가 된다는 것은 세상을 사랑하고, 삶을 사랑하고, 행복해진다는 뜻이다. 그러므로 혁명가는 삶으로부터 도피해서는 안 된다. 혁명가는 투쟁을 위해서 사는 것이 의무라는 것을 알아야 한다. 그리고 삶을 즐겨야 한다.

     p371 내 피는 붉은 투쟁의 강으로, 우고 블랑코, 1966 


  이 역사 속의 모든 기록들은, 결국 실제로 일어난 일들에 관한 기록이다. 그리고 그것은 언어로 기록되어 있지만 이 기록이 이루어지기 위해서는 ‘행동이 있었다’.


     나는 세상을 변화시킬 도구로서, 단결의 힘을 철석같이 믿는다. 또한 대화의 힘도 믿는다. 그러나 말을 증명하는 것은 행동이다.

      p523 말을 증명하는 것은 행동이다, 헤닝 만켈, 2010



저항자들의 책 

4000년 인류 역사에 울려 퍼진 분노와 저항의 앤솔러지


타리크 알리 서문, 앤드루 샤오・오드리아 림 공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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습관의 ‘네’, 성격의 ‘아니오’


이얼 프레스., 양심을 보았다-분노할 것인가, 침묵할 것인가 


   

  인생에서 나는 ‘예’와 ‘아니오’ 중 어느 단어를 자주 내뱉었을까. 습관처럼 ‘네’를, 성격처럼 ‘아니오’를 더 말했을까. 습관이든 성격이든 그 말은 진심이었고, 그 말이 나가기까지의 상황은 평범한 것이었을까. 바뀌었어야 할 ‘네’와 ‘아니오’ 때문에 잠들지 못한 밤은 없었을까. 후회로 뒤척이는 것을 떠나, 나의 그 대답으로 심각하고 심각한 어떤 일이 파생된 적은 없을까.

 

   이 글은 부드럽다. 하지만 내용은 강직하다. ‘아니오’라고 말하는 사람을 찾는 이야기이니까. 그 ‘아니오’는 이유없는 반대가 아니라, 지랄맞은 성격때문에 일단 무조건 ‘싫어’부터 내뱉는 것이 아니라 “도덕적으로 용납할 수 없는 행위를 강요받을 때, 위험을 무릅쓰고 내뱉는 ‘아니오’”니까.

  탐사보도 전문기자이기도 한 작가는 이렇듯 ‘집단의 획일성에 반대’하는, ‘초월적 행동을 하는’ 사람들에 관한 이야기를 찾아 나섰다. 어떤 경우라도 이런 행동을 하는 것은 쉽지 않은 일이기도 하고, 설사 그런 저항의 행위를 했다고 해서 그것이 큰 사회적 변화로 연결되지 않는다면 그것이 가치있는 저항이었을까라는 물음에 사로잡혀 버렸으니까. 저자는 집단의 지시를 거부하는 것은 쉽지 않지만 불가능하지 않다고 말한다. 그렇기에 평범한 사람들이 이런 행동을 하는 이유와 과정을 이해하기 위한 노력이 필요하다고 말한다. 


 대부분의 사회에서는 해소할 수 없는 긴장이 가득하다. 현실에서 우리는 모두, 마음속 깊은 곳에 세워둔 자신이 충성심 혹은 다른 사람들이 기대하는 의무와 충돌하는 상황을 마주한다. 우리는 양심을 깨끗하게 간직한 채 과연 어디까지 버틸 수 있을지 고민해왔으며 지금도 고민하고 있다. 솔직하게 말해보자. 우리 머릿속에 있는 어떤 목소리가 우리에게 말한다, 양심을 지키라고. 그러나 또 다른 목소리는 경고한다. 자신이 속한 공동체를 적으로 돌리지 말라고, 자신의 상관을 당혹스럽게 만들지 말라고. 혹은 자신의 경력과 명성, 나아가 가족의 평온함과 목숨을 위험하게 만들지 말라고. p13


   저자는 총4장에서 이 보통 사람들의 이야기를 건넨다. 1장에선 거부자의 삶이다. 이들은 당연히 집행해야 할 법을 의도적으로 어김으로써 무고한 사람들을 구한다. 2장은 1990년대 유고슬라비아의 인종적·민족적 분열 상황에서 경계를 초월하여 행동한 세르비아이인의 일화다. 저자는 이 이야기를 ‘법보다 결코 약하지 않은 공동체라는 압박에 저항’한 이야기로 전한다. 3장은 이스라엘 군대의 점령지 근무를 하지 않겠다 결심하는 보다 내면적 투쟁을 행한 군인에 관한 이야기이다. 4장은 투자전문가의 이야기다. 3장까지의 흐름을 볼 때, 투자가의 이야기에 아니, 이게 뭐지라는 생각이 들겠지만, 어쩌면 이 이야기가 자본주의 사회에서 가장 쉽게 맞닥뜨리는 상황일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든다. 금융상품이 고객을 위험에 빠뜨릴 수 있으리란 판단에 상품 판매를 거부한 투자전문가의 이야기니까.

  사실, ‘아니오’라고 말할 수 있는 것에 대해 많은 경우 직장과 군대와 국가의 권위에 대한 대항을 얘기한다. 전쟁을 얘기하며 특히, 특수한 상황이란 전제를 가지고 그 상황에서를 강조한다. 하지만, 어떤 상황이든 일상에서도 ‘예’가 길들여진 사람이라면 어떤 경우인들 ‘아니오’라는 말이 아닌 생각을 할 수 있을까. 양심의 문제이기 전에 개인의 신념과 정체성의 문제이기도 하다. 그리고 개인의 신념과 정체성이 너무도 사회에 길들여지고 제도화된 채 마음에 심어지는 까닭에 개인의 ‘참’생각을 알 수 없을지도 모른다.

  최근 반복되는 대한민국의 행정관료들이 행하는 그 모든 악행과 막말들이 분명히 보여준다. 그것이 당연하다고 생각되는 논리와 패권의식의 생활에 길들여져 ‘아니오’라는 말이 있다는 것조차 모른채 “예스맨”이 되고 있지 않은가. 개인의 신념이나 정체성이 보편성을 잃고 1%의 사회 속의 행동패턴에 길들여져 있지 않은가. 대한민국 행정관료들 중에선 대한민국의 사람들 중에선, 이 책의 주인공이 될 사람이 과연 얼마나 있을런지…. 바우만이 이렇게 주장했다. “잔인함은 개인의 개성보다 사회적인 상호작용의 특정한 유형들과 훨씬 더 놓은 상관성을 가진다.” 어째, 그런 종류의 인간들과는 상관없는 삶을 사는 것이 더 편하겠다는 생각이 들만도 하다. 하지만 상관을 할 수 없는 게, 그들이 내 생활의 모든 제도들을 만들고 있는데, 어떻게 무관심, 무심해질 수 있을까. 그냥도 아니고 엉망진창으로 만들어 놓고 있는데.

  그들은 똑똑하고 머리 좋다고 하는데 변화의 조짐이고 양심을 추스릴 기미가 보이지 않는다는 게 문제다. 심리학자 앙드레 모딜리어니와 르랑스와 로샤는 “권위에 저항하는 행위는 추상적인 대의명분을 따지는 장엄한 행동으로 시작되는 게 아니라 당사자들에게는 전혀 특별할 것도 없는 어떤 ‘작고 소박한 행동들’로 흔히 시작한다”고 한다는데, 그들은 “장엄한 행동”에 눈을 더 돌리고 있다는 게 문제다.

  소로는 이렇게 말했다. “우리 사회에 존재하는 온갖 기계 장치들이 성공적으로 잘 돌아가는 일에 대해 나는 아무런 책임을 지지 않습니다. 내가 생각하는 나의 유일한 의무는 언제든 내가 옳다고 생각하는 것을 행동으로 실천하는 것입니다.”

  엉뚱하고 어이없는 것을 옳다고 생각하는 것도 모자라 그것을 추진하는 능력을 가지고 있는데 그것을 추진할 위치에 있는 사람의 “옳다고 생각하는 것”이 정의와는 유리되어 있을 때 그것이 얼마나 심각한 문제가 될 수 있는지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물론 소로는 양심적 명령 거부자로서 였지만. 바로 이런 것 아니겠는가.


 법의 틀을 깨는 행위는 자기 목적에 부합할 때는 좋지만 다른 편의 목적에 부합할 때는 그렇지 않습니다. p213- 이스라엘 한 예비군


  대한민국은 양심에 따라 저항하는 이가 원체 없는 관계로 정치인, 관료와 권력가들 특정 소수만이 나날이 행복하게 살기 편한 곳이다. 그렇기에 양심에 따라 법을 거부하는, 저항하는 사람이라는 존재조차 되지 못한 채, 보다 보편적인 정의와 합리적인 법에 대한 요구를 하는 정말이지 평범한 보통 사람들은 그저 “찌질하게 정부에게 대드는” 별볼일 없는 특정세력으로 규정된다. 그래서 수전 손택은 저항은 아무런 가치가 없다고 말하는지도 모른다. 어찌 보면 가장 저항을 많이 하는 보통 사람들, 민중들이니까.


"우리가 국가의 법률을 부정할 수 있도록 권한을 부여하는 보다 높은 차원의 법의 존재를 요구하는 것은, 정의를 위한 고귀한 투쟁만이 아니라 범죄 행위까지 정당화하는데 사용될 수 있다. 저항의 가치와 저항의 도덕적 필요성을 결정하는 것은 저항의 내용이다.“ p237


  그렇다면 저항의 가치는 무엇일까. 어떤 경우에 ‘저항’이란 가치를 지닐 수 있는 것일지. 이 말이 와 닿았는데, 고통을 느끼지 않는 사람이 늘어간다는 생각이 든다는 점이 아이러니다.


 무엇이 사람의 성격을 결정하는지 알아요? 내가 가르쳐줄게요. 그건 바로 고통이에요, 고통. p283


물론, 현실에서 고통이 언제나 성격을 보다 나은 방향으로 개선하지는 않는다. 자신이 고통을 격고 나서 다른 사람이 겪는 고통에 무관심해질 수도 있다. 또 고통 때문에 독불장군이 될 수도 있고 원한을 품을 수도 있다. 그러나 레일라의 경우에 고통은 그녀를 강하게 만들었다. 유복하긴 했지만 은둔 생활을 해야 했던 어린 시절 동안 그녀의 내면에는 수동적인 기질이 생겼다. 그런데 고통이 그것을 말끔하게 털어냈다. p283


   이 책에서 저자의 관심을 따라가다 보면 불편한 진실과 맞닥뜨리면서도 마음이 평온하다. 이 책의 느낌이 그렇다. 편안하게 읽히는 문체가 그렇게 이끌어주고 생각을 하게끔 하는 지점의 여러 의문들이 점층적으로 나아가 단편적인 사고에 머무르지 않게 해준다. 그로 인해 복잡다단한 생각들이 더욱 많아지기도 했지만. 이 책의 원제는 양심을 보았다가 아니라 Beautiful Souls이다. 읽다 보면 힘차고 강건한 <양심을 보았다>보다 <Beautiful Souls>이 어울린다는 느낌을 받는다. 양심에 따라 저항한 이들의 이야기, 그들의 고뇌와 행동들에서 이 아름다움을 만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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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웃사이더 정신과 삶, 인생을 지배하다 


 아니타 로딕 Anita Roddick, <영적인 비즈니스><지구의 생명물의 위기> 저자


  


  영국의 리틀햄프턴에서 태어난 그녀의 부모님은 영국으로 이민 온 이탈리아인이다. 이러한 환경이 어린 시절부터 영향을 미친 것인지 사범대학을 졸업하고 교사생활을 하면서도 히피들과 떠돌이 생활을 시작했다는 그녀다. 히피들에게서 느껴지는 것이 자유로움, 아웃사이더, 방랑이 떠오르는 것처럼, 무언가에 정착하려 하지 않는 그녀의 기질은 ‘당연히 그렇게 되어야 하는‘ 것이 도드라진 우리 삶에서 자신만의 기질과 특성을 잘 버무려 살아낸 듯하다. 스스로가 선택하려 하는 것인지 깊이 내재되어 있는 아웃사이더 기질이 자연 발휘되는 것인지 모르겠지만. 그녀 자신도 인생의 기준에서 이 아웃사이더를 말한다. 이것은 자신이 되고 싶지 않은 것을 볼 수 있는 능력이라고.  


 아직도 왕이 존재하는 영국이란 나라에서 2003년 엘리자베스 2세로 부터 작위를 수여받다!

 2007년 9월 10일, 64세에 뇌출혈로 사망하자 영국 전체가 추모 열기에 휩싸이다!

 고든 브라운 총리가 직접 나서 추모하였고, 공영방송 BBC는 메인뉴스 두번째 꼭지로 보도하였고 영국 굴지의 기업 총수들이 TV에 나와 그녀를 애도하였고, 그린피스 사무총장은 ‘사업이란 어떤 것인가를 제대로 보여준 인물’이라며 로딕을 치켜세웠다.


  이렇게 아니타 로딕이 영국에, 세상에 유명해진 것은 그녀가 기업을 운영하면서이다. 그녀는 ‘바디샵’이라는 기업을 운영한 CEO이며 그녀의 바디샵은 영국에서는 두번째로 신뢰받는 기업이자, 세계에서 28번째로 높은 브랜드가 되었다. 그리고 전세계 1,800개 매장에서 24개국어로 운영되고 있다. 이러한 바디샵은 규모뿐만 아니라 바디샵의 운영방식으로 더 유명하다. 그녀의 바디샵은 ‘윤리적인’ 기업으로 알려져 있다.

  그녀의 바디샵은 1976년 시작되었다. 영국 해변 도시 브라이튼의 구멍가게가 첫 출발이었다. 어린 시절 그녀의 부모님은 이혼했고 새아버지의 죽음을 경험했지만 그 때마다 “남와 같은 길을 가지 말고 자신이 좋아하는 일을 해라”라는 어머니의 따스한 가르침을 생각했다고 한다. 그녀의 어머니는 먹고 살기 위해 해변에서 밥과 술을 팔며 딸 셋과 막내 아들을 키운 억척 어머니였고 10살에 돌아가신 그녀의 새 아버지는 알고 보니 자신과 남동생의 친부였다. 그녀는 선생이라는 안정된 생활을 그만두고 세계를 경험하고 싶어 배낭여행을 떠나고 그러한 생활 속에서 느끼고 배운 것이 자신의 신념을 만들었고 실제 생활로 이어졌다. 여행에서 남아프리카공화국의 인종차별에 충격을 받아 스위스에 가서 국제 비정부기구(NGO) 활동을 하다 고향으로 돌아왔다. 그때 완전 거지꼴로 나타난 딸을 보고 어머니는 찍어둔 사윗감 고든을 소개했고 그날로 그들은 같이 생활했다.

  어느날 그녀의 남편 고든이 2년 계획으로 부에노스아이레스에서 뉴욕까지 말을 타고 여행을 하고 싶다고 말을 했다. 이 여행계획은 그가 어릴 때부터 꿈꾸어 왔던 것이었기 때문에 로딕은 무작정 반대할 수만은 없었다고 한다. 그러나 그녀에게는 4세와 6세 아이를 양육해야 하는 현실을 안고 있었다. 남편은 어릴 적 낭만적 꿈을 펼치는 동안 아니타는 자녀 양육을 위한 생활비를 벌어야 했던 것이다.


  이렇게 시작된 그녀의 화장품 샵은 겨우 테이블 하나 들여놓을 만큼 좁은 점포였다. 물론 그녀는 여기에 익숙하다. 그녀의 부모님은 카페를 운영했던 것이다. 25파운드를 들여 디자인한 로고가 그려진 라벨을 전부 손으로 붙이고 내용물은 부엌에서 그녀가 직접 만든 것으로 프라스틱 용기는 병원에서 소변검사를 할 때 사용하는 것이었다. 화장품 용기에 대해 미적인 디자인을 요구하고 기대하는 사람들에게 이러한 그녀의 화장품은 충격이었을 것이다. 그러나 여기에서부터 바디샵의 창업자 아니타 로딕의 창업 이념과 기업 윤리가 드러난다. 그녀는 열악한 환경과 사업 비용으로 이러한 용기를 사용한 것이 아니었다. 한번 쓰고 나면 버릴 용기에 돈을 들이는 것이 바보짓이라고 생각했다. 나아가 화장품 산업을 ‘혐오’했다. 이 악마같은 산업이 여성들에게 허영과 이룰 수 없는 꿈을 팔고 속임수로 착취한다고 보고 있었다. 이러한 그녀가 화장품 샵이라니.

  그녀는 아름다움은 패션잡지에 나올 얼굴과 몸매라기보다는 건강한 활력과 자존심 같은 것이라 생각하며 자신의 사업이 이런 아름다움을 추구할 때 존재가치가 있다는 믿음을 가지고 있는 사람이었다. 인간답게 사는 것이 아름다운 것이며 돈을 벌기 위해 동물을 학대하고 자연을 파괴하며 환경을 오염시키는 것은 이기적이고 야만적인 것이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이러한 생각들은 그녀의 사업에 고스란히 적용되었다. 화장품을 만드는 과정에서 전혀 화학 원료를 사용하지 않고 코코아 오일, 아몬드, 알로에 베라와 같은 천연 원료를 사용하였다. 생산에서 폐기되는 과정에서 쓸데없이 에너지를 소비하는 상품을 만들지 않고 동물이나 개발도상국에 나쁜 영향을 주는 상품 등을 만들지 않는다고 선언한 ‘더바디샵 헌장’으로 발전했다. 새로운 제품의 아이디어를 얻기 위해서 아프리카와 남미의 밀림 속으로 들어가 그곳에서 살고 있는 여성들이 하는 것처럼 자연을 소재로 한 화장품을 개발해냈다. 환경을 파괴하지 않는 상품이라는 컨셉은 판매활동에서도 그대로 적용됐다. 더바디샵은 환경보호에 맞추어져 운영되고 있다. 꾸준히 환경보호에 관한 메시지를 전달하고 실천하고 있다. 화장품 실험에 동물을 이용하지 못하도록 하는 동물 실험 반대 캠페인을 벌였고, 천연 재료를 활용한 제품만들기, 화장품 용기의 리사이클과 리필 서비스들을 실시했다. 이와 같이 더바디샵은 기업의 경영목표를 달성하는 것과 사회적 책임을 다하는 것을 중요하게 생각하고 운영되고 있다.

  또한 아니타 로딕은 바디샵의 성장에 공동체의 성장을 함께 녹여 내고 있다. 그녀는 사회적 빈곤층과 소외계층, 사회적 약자, 여성과 인권을 존중하도록 이끄는 캠페인에 앞장서는 등 억압받고 핍박받는 사회의 부조리를 타파하기 위하여 노력하였다. 그녀는 이윤을 목적으로 기업을 운영하기 보다는 사회적 가치에 중점을 두는 비즈니스 방법을 펼쳤다. 이를 위해  재단을 설립해 180여 개의 단체에 350만 파운드 이상을 기부하였다(1990년 루마니아의 고아원에 방문한 뒤 COTE(Chiledren On The Edge)라는 기관을 설립해 열악한 환경에 처해 있는 아이들을 도움). 또 인권상을 설립하여 인권 단체에 상금을 수여하기도 하였다.

  이렇듯 아니타 로딕은 별볼일없는 여성 주부에서 비즈니스우먼으로, 인권활동가로, 환경보호운동가로 활동해 왔다. 당시 단지 그녀가 비즈니스 경험이 없다는 이유로 그녀의 창업에 대해 의문을 표한 듯하다. 하지만 그녀는 교사생활을 하였고 UN에서 일하기도 했다. 특히 그녀가 기업의 이념으로 제시하고 있는 생각들은 UN의 여성인권부에서 일했던 경험이 큰 것으로 보인다. 물론 어린 시절 어머니로부터 배운 근검절약 정신도 스며 있었을 것이고 평화를 부르짖으며 세계를 떠돌아다닌 히피 생활 덕분이기도 할 것이다.

                 

  

  그녀 스스로도 바디샵의 성공은 제품이 아니라 ‘이념’이라고 말하듯 그녀는 상거래에 관해 초짜였을 뿐이지 살아가는 삶에 대해서는 초짜가 아니었던 것이다. 그리고 그러한 측면에서 가치를 잘 판매한 기업가로 남을 것이다.

  2007년 그녀는 세상을 떠났다. 그녀의 나이 65세였다. 2004년 간경변증과 c형 간염 진단을 받고 c형 간염 예방운동을 벌이기도 했는데 그녀의 사망 원인은 급성뇌출혈이었다. 그녀는 자녀에게 유산을 남기지 않겠다는 생전의 약속대로 평생 모은 전제산 5,100만 파운드를 자선단체에 기부했다.


참고 자료 


•알라딘, yes24 저자소개

•바디숍의 전설, 아니타 로딕, 한겨레21 , 2005. 12.6

•http://www.changuptoday.co.kr/news/articleView.html?idxno=7650 

•http://ko.wikipedia.org/wiki/아니타 로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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