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어공주를 위하여


   김민웅, 동화독법


  동화의 재해석. 사회학자이며 목회자가 선택한 동화의 해석은 “유쾌하고도 섬세하게 삶을 통찰하는 법”이다. 김민웅 교수는 열 개의 동서양고전 동화에서 삶을 통찰하는 자신만의 방식을 풀어놓는다. <미운 오리 새끼><신데렐라><솔로몬의 지혜>인어공주><토끼전><이솝우화><헨젤과 그레텔><바보 이반><바보들의 나라 켈름><심청전>은 많이 알려진 이야기이고 또한 수많은 사람들이 이 얘기 속에서 자신만의 동화 읽기로 타인들에게 자신의 시선을 이야기한다. 그런 지점에서 저자 김민웅의 동화이야기는 어떤 차별성이 있을까.

  우선 열 개의 이야기를 다루고 있기 때문에 동화 하나의 이야기에 대한 분석이 깊다. 동화의 주인공의 역할을 뒤집는 이야기도 새롭게 탄생하고 있는데 이러한 반전의 이야기가 증가하는 이유는 삶의 형태가 워낙 다양하고 ‘주인공’이 아닌 등장인물들에게 우리의 현실적 삶의 모습을 보게 되기 때문일 것이다. 저자는 이러한 삶의 모습이 개인을 둘러싼 사회의 구조 속에 어떻게 드러나고 있는지를 꼼꼼하게 들려준다. 저자 자신도 “이야기를 꼼꼼히 읽는 일”이 독법의 시작이라고 말하고 있듯이 ‘아는 이야기’라고 해서, 다르게 읽는 법 역시도 특별할 게 없을 거라는 생각에, 적당히 흘려 보거나 듣는 것이 아님을 생각하게 한다. 새로운 눈으로 다시 보면 아는 것 중에서 새로움이 발견된다. 익숙하다고 넘긴 것에서 낯선 것을 발견할 수 있다.  

   

미운 오리 새끼는 현실이 낙오자, 또는 열패자로 취급하는 이들의 아픔을 함께 나누는 이야기입니다. 문제는 이런 이들의 재능과 진실을 알아보지 못하는 세상의 시선이라고 반격합니다. 또한 본래 백조인 존재를 몰라보고 괴롭히며 멸시하고 추방한 세상을 향한 보복과 과시이기도 하지요. p49


  미운 오리 새끼에서 일차적으로 이야기하는 것은 위와 같다. 내면은 외면하는 사회에 대한 비판과 역경 속에서도 재능을 펼치며 노력하는 일의 중요성 같은 것을 미운 오리 새끼는 전한다. 결국엔 백조로 밝혀진 오리에 우리는 희열을 느끼면서도 이 차별이라는 현실에 대해서는 분개하고 차별하지 않아야 한다는 것을 미운 오리 새끼를 통해 수없이 읽어 왔다. 하지만 저자는 다시 이 얘기를 꼼꼼히 살핀다.


 이 이야기는 오리와 백조에게 신분차이가 있다는 전제에서 출발하고 있습니다. 오리는 아무리 애를 써도 백조보다 못한 오리일 뿐이고 백조는 그 성장과정에서 이정을 받지 못한다고 해도 고귀한 백조입니다. 서로 다른 생명체로 어울려지는 존재들이 아니라 누구는 못나고 누구는 잘난 겁니다. p50


 엄마 오리가 세상을 처음 보여줄 때 세상이 결코 만만치 않다는 것을 알게 되지요. 그러나 끝끝내 이 미운 오리 새끼는 그런 세상과 마주하는 의지와 지식을 길러내지 못합니다. 그가 관심갖는 것은 오직 하나, 자기가 못생긴 오리라는 낙인에서 벗어나는 일뿐입니다. 농장의 오리 집단에서 쫓겨나듯이 도망나올 때 그는 깊은 열등감에 사로잡힌 상태였습니다. 이 피해의식은 나중에도 지속되면서 새로운 세계를 경험하는 가운데 극복되기보다는 사실상 더욱 예민해지고 말았습니다. p54


  그렇다. 우리는 그동안 너무나 힘든 ‘미운’ 오리의 역경에 공감한 나머지, 같은 가족 안에서도 구박받는 그의 삶에 너무 이입한 나머지 잊고 있었다. 백조와 오리를 차이 짓는 저 구분을. 그리고 당연하게 받아들이고 있었음을. 결국 되돌아보면 오리는 ‘재능’과 ‘가치’를 발견하고 키워간 것이 아니라 태초부터 정해져있던 ‘자격’을 타인들이 그제야 보았을 뿐인 것이다. 더 아름답게 자라난 오리일지라도 결국엔 백조에게는 비견되지 못할 ‘태초’에 '애초‘에라는 낙인. 언제부턴가 ’헬조선‘이라는 용어가 만들어낸 사회 속에서의 우리의 상황이 ’오리‘이다. ’미운‘오리가 아니라 그냥 오리. 백조인 ’미운 오리‘가 아니라 백조가 될 수 없는 오리. 그렇게 사회가 이 명명 속에서의 부당함을 인식하기를 바라지만 그 부당함이 오히려 제 정체성이라는 듯 변함을 꾀하지 않는 사회 속에서 결코 피해가지 못할 피해의식을 안고 살아가는 오리들의 역사.


  인어 공주의 이야기를 종교와 연결짓는 것 또한 특이하여 눈여겨봐졌다. 목회자이기 때문에 이런 해석이 있는 것인지 내가 보지 못한 이와 같은 인어 공주에 대한 해석들이 있는 것인지 궁금해졌다.

  

인어공주의 질문은 성서 안의 종교적 질문과 통하고 있습니다. 그것은 물론 인간이 되고 싶은 언어의 마음을 표현한 것이나, 이는 죽음으로 끝나는 인생의 허무함을 해결할 방법을 찾는 모든 인간의 질문과 다를 바 없습니다. 종교는 이에 대해 신을 믿고 그 구원의 손길에 의지하라고 가르칩니다. 그런데 할머니 인어의 이야기는 그런 가르침과 같지 않습니다.

영원한 생명을 가진 영혼이 생겨나는 것을 신에 대한 믿음이라고 하는 게 아니라 사랑하는 이들 사이의 사랑이라고 말하고 있네요. 남자와 여자가 서로에게 가장 귀중한 의미를 가진 존재가 되고 사랑하는 이의 영혼과 하나가 되는 순간, 인어는 인간이 된다는 겁니다. p147~148


  동화 속 많은 공주들이 자신의 특기를 가지고 있다고 해도 결국엔 ‘왕자’를 만나 잘 먹고 잘 살았습니다라고 끝맺는 이야기 중에 유독 인어공주만이 슬픈 결말을 맞았다. 인어 공주의 이야기를 뒤집어 보면 왕자와 결혼하게 된 공주의 입장에선 다른 동화 속 공주들의 해피엔딩 결말이 성립한다. 같은 신분, 계급에서만 가능한 일인가. 그러니까 인어공주는 결국 그들 사회 속에선 같은 신분이 아니니까. 아무리 육지보다 몇 배는 넓은 바닷속의 공주라 한들, 그것을 밝힐 수 없고 그래서 공주가 아닌 그저 말못하는 시녀일 뿐. 적극적으로 자신의 사랑을 찾아 육지로 경계를 넘어선 인어 공주의 ‘변화’와 ‘변혁’을 결국 죽음으로 귀결지어졌다. 신분을 넘는 사랑, 국적을 넘는 사랑 이야기의 주인공이 되지 못했다.


종교가 지배하던 시대에 더군다나 성에 대한 적극적 표현을 하는 것은 음탕한 악녀의 짓거리로 지탄되었습니다. 그건 마녀의 가슴을 찔러 흘러나오는 검은 피를 먹은 여자들의 소행으로 받아들여졌지요. 성, 쾌락, 여자의 육체를 거론하는 것은 금기의 대상이었고 그걸 여성이 주체적으로 욕망하는 것은 지옥에 떨어지는 일이었습니다.

    서구 중세의 종교는 근대에 이르기까지도 이런 자세를 가지고 여성의 성적 갈망과 성적 정체성의 성장을 억압했어요. p159~160


  그래, 동화라고 해도 인어공주는 적극적으로 왕자에게 다가간다. 바다가 생활터전이 인어공주에게 옷이란 거추장스러운 것이고 그렇기에 자연스러운 것은 옷을 입지 않는 것일 테지만 또 누군가 보기에 그것은 그렇게 곱게 보이지 않을 모습이다. 성스러운 공주와 비교해서 더욱 더.


인어공주의 비련은 여성의 성적 정체성과 그 적극적 실현 그리고 사랑의 진실이 억눌리고 외면되는 현실의 슬픔을 폭로하고 있습니다. 인어공주의 마지막은, 우리에게 이런 현실을 계속 용납하겠는가, 라고 묻습니다. 그렇지 않은 세상을 만들기 위해서 어떻게 300년이라는 긴 시간을 기다릴 수 있는가, 라고 또한 묻고 있지요. 인어공주와 같은 아픈 이야기가 되풀이되지 않으려면 무엇이 필요한지도 말해주고 있습니다.

  무엇보다 먼저 들리지 않는 목소리를 들을 수 있어야 한다는 겁니다. 인어공주가 잃어버린 목소리는 바로 그 희생당한 이들의 존재를 일깨우고 있지 않나요? 그에 더하여 이 세상 도처에 생명의 기쁨을 만끽할 수 있도록 해주는 기운을 확산시켜나가야 한다는 거예요. p186


    수많은 시간이 지나도 동화는 만들어 질 것이고 읽힐 것이다. 그리고 수많은 시간이 지나도 동화 속엔 여전히 꼼꼼히 읽어봐야 보일 억압된 민중과 여성의 이야기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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변명’과 ‘자기 방어’에서 더 나아가


왜 아무도 성냥팔이 소녀를 도와주지 않았을까 -동화로 보는 심리학


류혜인, 이가서, 2013


  

  동화로 보는 심리학이란 타이틀을 달고 있는 이 책은 많이 보아 온 동화에서 심리학 이론을 이끌어 낸다.  심리학을 전공한 저자는 동화를 읽으며 자신의 전공을 적용시켰다. 한번쯤 의아하게 생각해 봤을 동화 속 궁금한 지점에 익숙하게 행하고 있는 ‘이론’으로 명명한 행동들이 나타나 있다.

  가령 백설 공주는 왜 자꾸 문을 열어 줄까?라는 질문은 나쁜 일을 당하면서도 계속 낯선 이를 맞아들이는 백설 공주에게 갖게 되는 답답함 중 하나다. 나쁜 사람일지 모른다고, 제발 문을 닫고 열어 주지 말라고! 라고 외치지만 이미 백설 공주는 냉큼 달려 나와 기어이 낯선 이와 만나고 또다시 해를 입는다.

 이러한 백설 공주의 행동을 저자는 '접촉 위안‘이라 말한다. 인간은 신체적 접촉을 하면 마음의 안정감을 느끼게 된다. 이것은 피부에 있는 C-촉각 신경섬유가 신체접촉 시 가장 활성화되어 뇌에서 엔돌핀과 옥시토신이 분비되어 안정되고 좋은 기분을 느끼게 하기 때문이다. 오두막에서 홀로 외로운 백설 공주는 낯선 이의 방문에서 이러한 접촉위안을 받고 싶었던 것이다.

  떡 하나 주면 안 잡아 먹지로 유명한 해님 달님 이야기에서 어머니는 왜 호랑이의 부탁을 들어주었을까. 그것은 문간에 발 들여놓기 기법으로 설명한다. 이것은 상대가 거절하지 못하는 작은 요구에서 시작해 점점 큰 부탁을 하게 되면 상대방이 역시 거절하지 못하는 전략이다. 

  성냥팔이 소녀를 아무도 도와주지 않은 것은 방관자 효과로 설명한다. 우리 사회에서 많이 보게 되는 현상이다. 내가 아니어도 누군가가 도와주겠지라고 생각하게 되는. 어려움에 처한 사람을 목격한 사람이 많을수록 도움을 주는 사람이 적어지는 현상이다.

  벌거벗은 임금님을 보자. 한 아이가 벌거벗었다라고 외치기 전까지 사람들은 모두 임금님의 옷이 멋지다는 동조 현상을 보였다. 이 현상은 ‘인간의 옳게 행동하고 싶은 욕구’와 다수의 의견이 곧 하나의 압력이 되어 ‘집단 규범’으로 작용할 때 일어난다. 전자의 경우 자신이 잘 모르는 상황에서 다른 사람을 따라 하면 손해는 보지 않을 거라는 생각 때문이다. 특히 내가 가진 정보가 부족하고 그래서 정확한 판단을 내리기 어려울 경우 강하게 일어나게 된다. 후자는 그 규범을 따르지 않으면 소외당할지 모른다는 생각 때문이다.

  온달이 장군이 될 수 있었던 것은 피그말리온 효과로 설명한다. ‘믿는 대로 실현된다’ 이것이 피그말리온 또는 로젠탈 효과다.

  같이 밥먹기에 실패한 여우와 두루미 이야기를 보자. 여우는 왜 두루미에게 납작한 접시에 음식을 주었을까? 이것에 대해 저자는 여우가 단지 ‘착각’한 것이라 말한다. 바로 자신의 생각이 보편타당할 것이며 따라서 다른 사람들도 나처럼 행동하리라는 잘못된 믿음 ‘허구적 합의 효과’ 탓이다. 이것은 인간이 다른 사람이나 상황을 이해할 때 자기를 기준이로 생각하는 경향이 있다는 것을 보여준다.

  어부와 마신에서 마신은 자신을 구해준 어부를 죽이려 한다. 이것은 좌절-공격 가설로 설명한다. 자신이 예상치 못할 때, 그리고 자신이 원하는 바가 부당하게 차단될 때 좌절감을 느껴 공격성을 나타낼 확률이 높아진다는 것인데 이러한 심리가 여기에 적용된다.

  우리가 어떤 행동을 할 때 ‘아, 지금 나는 방관자 효과’ 때문에 이렇게 하는 거야, ‘난 접촉 위안이 필요해서’ 이렇게 이야기 하지 않는다. 그때 그 행동들은 나도 모르게 ‘하고 있는’ 것이다. 심리학이란 행동이 일어난 이후의 결과에 대한 해석이고 어쩔 땐 변명같이 들리기도 한다. 심리학을 통해 어떤 행동을 예측해서 그 심리를 피해 갈 거야라고 할 일은 없으므로. 왜 아무도 성냥팔이 소녀를 도와주지 않냐고! 방관자 효과라서. 그때서야 ‘맞아, 맞아 그래서 그랬어’라며 우리의 행동에 대해 변명하고 뒤늦은 안심을 하는 일이 얼마나 많은가. 동화속에서 이끌어낸 심리학이론이 낯설지 않은 건 너무 많이 들어왔다는 얘기다.

  이렇게 읽어 내는 심리학이 누군가에 대한 또는 나 자신에 대한 이해의 차원을 달리할 수 있다는 점은 분명 있다. 하지만 이것이 어떤 행동에 대한 ‘변명’이나 ‘자기 방어’가 아니라 어떤 행동을 이끌어내는 힘으로 전개될 수 있었으면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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떠돌아다니는 왕자들의 정체


마 탄 왕자들은 왜 그렇게 떠돌아다닐까-명작 동화에 숨은 역사 찾기

박신영, 페이퍼로드, 2013.


 

    책을 읽으며 특정 부분에 중점을 두게 된다면 그 부분이 전공이거나 관심두는 부분이거나. 보통 작가가 들려주는 이야기에 집중을 하게 되는데 내 관점에 따라 책을 선택하거나 이야기를 뽑아낼 수 있다.

  작가는 고전 동화와 소설에서 자신의 관심 분야를 이끌어 내어 집중한다. 책에 쓰인 27개의 이야기는 그 자체로 자기만의 줄거리와 주제를 가지고 있다. 작가는 자신의 주제와 줄거리에 맞게 이야기를 선별하고 배치한다. 작가의 이 책에서 말하는 주제는 ‘역사’다. 동화와 소설이 쓰여진 당대의 인물과 역사적 배경과 상황에 관한 이야기다. 구전되어 온 동화가 어떻게 탄생되고 변형되는지를 사료들을 제시하고 있어 동화와 소설을 환상과 허구가 아니라 타당한 역사적 현실로 인식하게끔 한다.

  책의 제목 『백마 탄 왕자들은 왜 그렇게 떠돌아다닐까』가 담고 있는 내용을 보자. 잠자는 숲 속의 공주뿐만 아니라 백설공주 등 많은 동화 속에 등장하는 왕자들은 백마를 타고 참 많은 곳을 돌아다닌다. 그 과정에서 위험한 일도 겪지만 공주를 만나 행복한 결혼을 하는 걸로 마무리된다. 어쨌든 모험을 통해 성공과 사랑을 거머쥐는 수많은 백마 탄 왕자님들은 왜 그렇게 떠돌아다니는 걸까. 저자는 이들 왕자가 “신분 상승을 꿈꾸는 떠돌이 구혼자”라고 말한다.


작은 나라에 후계자가 될 왕자가 많은 경우 문제가 생긴다. 영토를 분할하여 상속하면 국력이 약해지기 때문이다. 그래서 왕위를 계승하는 한 왕자를 제외한 나머지 왕자들은 스스로 자기 인생을 개척해야만 했다. (……) 가장 좋은 방법은 바로 이웃 나라 외동 공주와 결혼함으로써 처가의 왕국을 물려받아 공동 왕이 되는 것이었다. 그래서 왕자들은 공주가 한눈에 반할 수 있도록 현란한 말솜씨와 에티켓, 기사도를 몸에 배도록 수련해야 했다. 유리관 속의 백설 공주가 자기 스타일의 여성이 아니어도, 심지어 100살쯤 연상인 잠자는 숲 속의 공주가 100년 동안 이를 닦지 않아 입 냄새가 진동해도 꾹 참고 키스를 해야만 했던 것이다. 아아, 슬프지만 이것이 바로 소녀들이 한 번쯤 꿈꾸던 백마 탄 왕자, 프린스 차밍의 정체인 것이다. p16~20


  이 목적을 명확히 해주는 대표적인 왕자가 딱 떠오른다. 영화 겨울왕국의 열두번째 왕자인 한스. 많은 동화책에서 왕자들의 이러한 목표가 드러나지 않아 수많은 세월 동안 백마탄 왕자님에게 환상을 품고 산 이들에게 뒤통수를 딱 때리는 역사적인 상황이 알려주는 진실을 작가를 통해 알게 된다.

  잔혹한 늑대로 잘 알려진 빨간 모자 속 늑대에겐 어떤 역사적 상황이 있을까. 이는 실제  ‘평화상실형’을 받은 인간이다. 중세에 중죄를 범해 평화상실형을 선고받은 사람을 누군가 죽여도 죄가 되지 않기에 불안한 이들은 숲으로 도망가게 된다. 평화상실자는 바르구스라고 했는데 늑대를 뜻하는 말이며 실제로 죄인에게 늑대 머리를 덮어 씌워 추방하기도 했었다고 하고 몸에 털이 많은 사람을 늑대인가이라 여겨 추방하기도 했다 한다. 그러니까 동화 속 늑대는 평화상실형을 선고받은 죄인이었던 것이다.

  많이 알려지고 또 많이 해석되고 있는 백설 공주 속에서 찾아보는 역사적인 이야기는 뭐가 있을까. 작가는 백설 공주 속 못된 왕비에 초점을 맞춘다. 그러니까 농경 사회 속에서 여성은 생산력이 중요하기에 나이가 들어갈수록 젊은 여성에 비해 쓸모없는 취급을 받게 되었다. 늙은 왕비의 이야기는 결국 이 땅의 여성들이 인구 생산의 도구로 인식하는 시대에 살던 여성들의 애환이 가득 담긴 이야기라는 것이다.

  빨간 구두 이야기에서 왜 그토록 빨간 구두를 신고 춤추는 것이 금기가 되고 죄악이 되는가. 여기에는 종교 개혁이라는 역사적 사실이 그 답을 알려준다. 종교 개혁 이후 사회는 엄격하고 금욕적인 풍조가 팽배했다. 그렇기에 춤추고 술 마시고 극장에 가는 것은 큰 죄악이다. 특히 빨간색은 사치와 방종의 상징이기도 했고 여전히 검은 양복에 검은 스타킹과 검은 구두만 착용하는 칼뱅주의자 신도들이 네델란드에만 50~60만 명이 있다고 한다.

  이런 형태로 작가는 동화 속에 등장하는 역사적 사건이나 상황을 들려준다. 그렇게 해서 더욱 깊은 이해로 이야기에 몰입할 수 있게 해 준다.

  그렇게 가만히 들여다보고 있으면 동화들이 교훈을 가득 담은 이야기가 아니라, 그러니까 우리는 동화에서 너무 교훈을 이끌어 내려고 하는데, 변화무쌍한 사회 속에서 살아온 이들의 안쓰러운 인생사가 고스란히 담겨 있음을 알게 된다. 마냥 환상적이고 재밌는 이야기가 아니라 우리들 각자가 감내하고 인내해야 했던 무수한 날들의 기록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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꼭 화해를 권하는 당신에게


백설공주는 왜 자꾸 문을 열어 줄까 동화로 만나는 사회학, 박현희, 뜨인돌,


    백설공주가 자꾸 문을 열어 주는 것은 외로워서라고 그래서 낯선 이들에게서 접촉 위안을 얻는 것이라고 심리학에서는 말한다. 사회학에서도 같은 맥락으로 이야기한다. 난쟁이들이 백설공주에게 얼마나 잘해 주었나와는 관계가 없이 친구 없이, 친밀한 경험을 공유한 사람과의 교류 없이 지내는 백설공주의 일상. 지독한 정신적 허기가 백설 공주로 하여금 위험을 잊게 하고 문을 벌컥 열어 제키게 했으리라고.

  이 책에서 저자는 관용, 일탈, 지혜의 3장으로 나누어 16개의 동화를 선택해 인간을 둘러싼 관계에 대해 이야기한다. 1장 관용에서는 어른들의 가르침대로 살지 않거나 가르침대로 살았어도 곤경에 빠진 주인공들의 이야기를 2장 일탈에서는 규범을 벗어던진 토끼와 거북이, 빨간 모자, 황금알을 낳는 거위, 분홍신에 대한 이야기를, 3장 지혜에서는 관계맺음에 서투른 이들의 이야기를 들려준다. 이들의 이야기를 사회적 동물로서 인간의 관계맺음 속에서 일어나는 다양한 양상들, 욕망과 결핍과 연대와 우정 등에 관해 이 책에서는 말하고 있다.

  예를 들어 여우와 두루미 이야기를 한번 보자. 우리가 그동안 여우와 두루미에서 당연히 ‘생각해야 할 것’이라고 별표치고 반성하고 익혀야 했던 것을 뒤트는 이야기를 한다. 한 식탁에서 밥을 먹지만 각자 먹기 불편한 접시로 인해 제대로 먹지 못하는 여우와 두루미 이야기에서 작가는 화해에 대해 말한다. 그러나 화해를 해야 한다가 아니다. 오히려 “어떤 경우, 화해는 나쁘다”라고 한다.


사이끼리 강요된 화해는 나쁘다. 화해를 무조건 좋게만 보는 것은 잘못이다. 사이좋을 이유가 없는 사이끼리 사이좋으라고 하는 것은 살짝 변장한 폭력이다.

여우와 두루미가 꼭 사이좋게 지내야 하는가? 여우와 두루미가 왜 같은 밥상에 둘러앉아 밥을 먹어야 하는가? 그렇게 상대방이 먹을 밥그릇 모양새까지 머리 아프게 따져 보지 않아도 기쁘고 편안한 마음으로 함께 밥을 먹을 수 있는 친구도 얼마든지 있을 터인데, 꼭 여우와 두루미가 친구가 되어야 할까? p19

 

  그래, 여우와 두루미는 꼭 화해하고 친구가 되어야 하나? 그들이 서로 사과하면 화해가 될까. 마음의 상처가 다 아물어질까. 섣부른 화해가 가져오는 부작용에 대해선 아무도 생각하고 있지 않다. 작가는 그래서 이렇게 부르짖는다.


우리는 싫어할 이유가 충분한 누군가를 싫어할 권리가 있다. 용서하고 싶지 않은 누군가를 용서하지 않을 권리가 있다. 화해는 무조건 좋은 것이라는 우리의 관념이 때로 누군가의 가슴에 지울 수 없는 상처를 남기고 계속해서 문제를 유발시킨다. 모두와 사이좋게 지내겠다는 것은 얼마나 무모한 욕망인가. 또 모두와 사이좋게 지내라는 것은 얼마나 무리한 요구인가. p22


  서로 ‘화해하고 친하게 지내’라며 오랫동안 강요받았던 우리에게 얼마나 낯설게 마음을 드러내는 말인가. 이 세상 마음이 맞는 친구들과 더 좋은 이야기를 나누기에도 모자라다. 애당초 싸움이란 것이 없는 것이 좋은 것이긴 하지만.

  아기 돼지 삼형제의 집짓기 현장으로 가보자. 작가는 이 이야기를 지어낸 사람들은 벽돌집을 짓는 사람일 것이라 말한다. 왜 그렇게 생각을 할까. 그런 벽돌집을 짓고 사는 이들은 서유럽 사람들이고 그들 눈에 나무나 짚으로 집을 짓는 것은 게으름 때문이다.


그러므로 그따위 엉성한 집을 짓는 아시아나 아프리카, 남태평양 등지에 사는 사람들은 게으르다는 결론으로 이어질 수 있다. 이제 이들의 가난 혹은 ‘비문명’은 게으름 탓이 된다. 게으름이 외부의 침입을 부른다. 이들은 외부의 적에 대응할 능력이 없다. 게으른 첫째 돼지와 둘째 돼지가 부지런한 셋째 돼지의 집으로 피신하여 목숨을 구했듯, 아시아나 아프리카 사람들은 유럽인의 집으로 피신해야 한다. 그런데 아시아, 아프리카 사람들이 유럽인의 집으로 모두 들어가는 것은 현실적으로 불가능하니까 유럽 사람들이 아시아, 아프리카로 가서 유럽인의 집을 지었다. 그 이후 이어진 식민지 지배의 살벌한 역사에 대해서 우리 모두 잘 알고 있다. p58


  빨간 모자에게 큰 길로 가라고 하는 것은 사회가 부여한 질서에 맞게 살라는 이야기이다. 그 질서를 깨지 말라는 것이다. 분홍신에 대한 금지 역시 같은 맥락이다. 자본주의 사회가 부당한 규제에도 묵묵히 따르는 순종적인 인간상을 학교에 바란다면 학교는 복장 규제로 답을 주고 있는 것이다. 부당한 규제에 참고 견디도록 길들여진 아이는 자라서도 부당한 것이 묵묵히 일하는 노동자가 될 수밖에 없다고 말한다.

  익히 들어왔던 ‘교훈’ 은 결국 사회적인 억압에 관한 다른 전달이다. 이 책은 좋은 이야기로 감춰놓은 드러내지 않은 한뼘에 관한 이야기를 들려준다. 변화하는 사회에서 우리가 동화 속에서 환상을 품지 않게 되는 탓도 있지만 동화의 환상을 깨버리는 어이없는 교훈의 덧씌우기가 즐겁게 읽는 동화의 여운을 가시게 하는 이유가 되기도 한다. 그런 점에서 또다른 시각으로 우리 사회를 짚어 보는 것, 동화를 짚어 보는 맛이 있다.

  작가는 ‘왜’라고 묻는 것을 세상이 불편해 한다고 말한다. 하지만 ‘왜’라고 묻지 않으면 우리는 지배자의 논리에 따른 삶을 살게 되리라 말한다. ‘왜’라는 한마디는 어른들로부터 쉽게 낙인찍히고 소외당한기 쉽다. 하지만 이들의 ‘왜’가 세상을 보다 밝게 이끄는 힘이 된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이 세상을 살아가는데 ‘왜’라는 물음이 가진 힘을 함께 알고 나누는 것이 이 책을 쓴 목적임을 작가는 분명히 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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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녀가 될 수밖에 없는


셜리 잭슨, 힐하우스의 유령



   이 소설이 읽을 맛이 난다면 문장의 맛도 크다. 문장이 좋다. ‘고딕 미스터리’, ‘고딕 호러’의 대가라 불리는 작가 셜리 잭슨의 이 소설을 스티븐 킹은 지난 백 년간 등장한 초자연적 소설 중 가장 훌륭한 작품으로 꼽았고 이 소설에서 영감을 받아 스티븐 킹은 자신의 작품 <샤이닝>을 썼다.

   저자는 자신의 성격과 상황이 닮은 주인공을 만들었다. 자신의 분신을 만들어 내어 자신의 심리를 표현하고 싶은 것이었을까. 그렇다면 그토록 작가 자신은 공포와 광기 속에 있었나 싶다. 소설을 소설로 읽고 작가의 생애를 살펴보면서 그렇지 않아도 강렬했던 소설에 대한 느낌이 더욱 배가되었다. 작가 셜리 잭슨이 악마의 소리를 듣는다는, ‘마녀’라는 소문이 있었다니! 셜리 잭슨은 남편이 발령받아 간 노스 베닝턴이란 마을에서 주민들과 잦은 다툼이 있었다고 한다. 소설 속에 등장하는 힐즈데일 사람들이 상당히 불친절하게 묘사되어 있는데 작가가 이 마을 사람들에게 느끼는 감정일 것이다.

  힐 하우스의 유령은 주인공 엘리너가 자신의 자유를 찾기 위해 찾은 힐 하우스에서 겪는 이야기다. 이 소설에서 다루는 ‘공포’는 일반적인 공포 소설과 다르다. 그 점이 이 소설에 빠지게 되는, 비교불가한 공포를 느끼게 되는 원동력이다.

   

그 어떤 생명체도 절대적 현실에 갇힌 채로 살아간다면 광기에 빠져들 수밖에 없다. 심지어 종달새나 베짱이도 꿈을 꾼다고 주장하는 사람이 있지 않은가. 어둠을 품은 채 언덕을 등지고 서 있는 힐 하우스는 광기에 물들어 있다. 지금까지 팔십 년간 자리를 지킨 이 건물은 앞으로도 팔십 년은 우뚝 버티리라. 벽은 똑바르고 벽돌은 차곡차곡 쌓여 있으며 바닥은 탄탄하고 문은 꼭 닫혀 있다. 힐 하우스를 이루고 있는 목재와 석재 위로는 항상 침묵이 내려앉는다. 무엇이든 저택 안을 걸어갈 때는 항상 혼자이다. p35


  광기에 물든 힐 하우스는 진짜일까. 그렇게 보이는 것일까.

  엘리너는 11년 동안 간호한 어머니가 돌아가시자 언니와 소유권이 반반인 차를 타고 집을 떠난다. 방황과 정체된 삶에 언니 부부와의 갈등이 한몫했고 또 하나는 힐 하우스의 심령 현상을 연구하기 위해 조수가 필요하다는 몬터규 박사의 편지 때문이다. 한없이 초라해 보이는 지난 생애에 대해 자책하지만 32살에 비로서 자신의 결정으로 힐 하우스를 찾아가는 엘리너의 마음은 경쾌함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곧 엘리너는 자신보다 더 젊고 매력적인 시어도라를 만나 더욱 열등감을 느끼게 될 뿐이다. 힐 하우스 상속자 루크 샌더스와 몬터규 박사 부부와 함께 힐 하우스에서 생활하면서 이들이 겪는 기이한 현상들은 실제인 걸까.


힐 하우스의 선과 공간은 불행한 우연으로 인해 집의 정면에 악마적 분위기를 드리웠다. 그 원인을 눈치챈 사람은 없었으나 광기 어린 배치와, 고약하게 비틀린 각도와, 하늘을 등진 지붕을 보노라면 절망이 밀려들었다. 게다가 힐 하우스는 살아 있는 것만 같았다. p73


  이 어둡고 음산한 집이 주는 공포를 엘리너는 사람들에게서 위로받고 싶지만 엘리너는 사람들에게서 소외되는 느낌을 받는다. 12살에 폴터가이스트 현상을 겪은 엘리너는 자신의 예민한 성격 때문에도 이 현상들에 몹시 두려워하고 공포의 강도도 거세진다. 폴터가이스트는 독일어러 ‘시끄러운 소리를 내는 영’이란 뜻이며 이유없이 이상한 소리가 나거나 집이 흔들리거나 물체가 움직이는 현상을 말한다.


두려움에 떠는 것은 이성을 포기하는 것입니다. 합리적 사고를 기꺼이 버리는 짓이죠. 두려움에 굴복하거나 싸워 이기거나 둘 중 하나이지, 그 중간을 택할 수는 없는 법입니다. p244


  엘리너는 벽에 피로 쓴 자신의 이름이며 돌아가신 어머니가 부르는 소리들을 들으며 더욱 공포와 광기에 휩쓸린다. 그러면서 힐 하우스가 가진 힘이 이것을 만들어 내는 것인지 끝없는 자신의 불안이 이런 현상을 보게 하는 것인지를 구분하지 못한다.


두려울 때면 세상의 이성적이고 아름다우면서 두려움이 없는 면이 분명하게 보여요. 의자와 탁자와 창문은 어떤 영향도 받지 않고 그대로 있죠. 꼼짝하지 않아도 카펫의 섬세한 짜임새를 볼 수 있어요. 하지만 동시에 이런 세상과 단절되는 느낌을 받아요. 사물들은 두려워하는 법이 없기 때문이 아닐까 싶어요.

우리는 단지 우리 자신을 두려워하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아뇨. 우리는 자신을 아무가식 없이 있는 그대로 보는 것을 두려워하는 거죠.

우리가 진실로 무엇을 원하는지 알기를 두려워하죠. p245


  엘리너가 힐 하우스에서 겪는 공포를 보며 오래전 한국영화 알포인트가 떠올려졌는데 점점 죄어오는 공포 속에 미쳐버리는 심정이 고스란히 전달이 되었다. 나를 둘러싼 공간이 주는 공포, 그것도 가장 편안해야할 집이 주는. 힘이 되고 위로가 되어 줘야 할 가족이 주는 소외감, 손을 내밀고픈 이들에게서 받는 외면. 이 모든 것들이 심리적인 방황의 이유가 되어 한 인간을 더욱 더 폐쇄적이게 만든다. 인간이 광기에 빠질 수밖에 없는 것은 힐 하우스가 가진 힘일까, 내 자신이 만들어낸 환상인 걸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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