꼭 화해를 권하는 당신에게


백설공주는 왜 자꾸 문을 열어 줄까 동화로 만나는 사회학, 박현희, 뜨인돌,


    백설공주가 자꾸 문을 열어 주는 것은 외로워서라고 그래서 낯선 이들에게서 접촉 위안을 얻는 것이라고 심리학에서는 말한다. 사회학에서도 같은 맥락으로 이야기한다. 난쟁이들이 백설공주에게 얼마나 잘해 주었나와는 관계가 없이 친구 없이, 친밀한 경험을 공유한 사람과의 교류 없이 지내는 백설공주의 일상. 지독한 정신적 허기가 백설 공주로 하여금 위험을 잊게 하고 문을 벌컥 열어 제키게 했으리라고.

  이 책에서 저자는 관용, 일탈, 지혜의 3장으로 나누어 16개의 동화를 선택해 인간을 둘러싼 관계에 대해 이야기한다. 1장 관용에서는 어른들의 가르침대로 살지 않거나 가르침대로 살았어도 곤경에 빠진 주인공들의 이야기를 2장 일탈에서는 규범을 벗어던진 토끼와 거북이, 빨간 모자, 황금알을 낳는 거위, 분홍신에 대한 이야기를, 3장 지혜에서는 관계맺음에 서투른 이들의 이야기를 들려준다. 이들의 이야기를 사회적 동물로서 인간의 관계맺음 속에서 일어나는 다양한 양상들, 욕망과 결핍과 연대와 우정 등에 관해 이 책에서는 말하고 있다.

  예를 들어 여우와 두루미 이야기를 한번 보자. 우리가 그동안 여우와 두루미에서 당연히 ‘생각해야 할 것’이라고 별표치고 반성하고 익혀야 했던 것을 뒤트는 이야기를 한다. 한 식탁에서 밥을 먹지만 각자 먹기 불편한 접시로 인해 제대로 먹지 못하는 여우와 두루미 이야기에서 작가는 화해에 대해 말한다. 그러나 화해를 해야 한다가 아니다. 오히려 “어떤 경우, 화해는 나쁘다”라고 한다.


사이끼리 강요된 화해는 나쁘다. 화해를 무조건 좋게만 보는 것은 잘못이다. 사이좋을 이유가 없는 사이끼리 사이좋으라고 하는 것은 살짝 변장한 폭력이다.

여우와 두루미가 꼭 사이좋게 지내야 하는가? 여우와 두루미가 왜 같은 밥상에 둘러앉아 밥을 먹어야 하는가? 그렇게 상대방이 먹을 밥그릇 모양새까지 머리 아프게 따져 보지 않아도 기쁘고 편안한 마음으로 함께 밥을 먹을 수 있는 친구도 얼마든지 있을 터인데, 꼭 여우와 두루미가 친구가 되어야 할까? p19

 

  그래, 여우와 두루미는 꼭 화해하고 친구가 되어야 하나? 그들이 서로 사과하면 화해가 될까. 마음의 상처가 다 아물어질까. 섣부른 화해가 가져오는 부작용에 대해선 아무도 생각하고 있지 않다. 작가는 그래서 이렇게 부르짖는다.


우리는 싫어할 이유가 충분한 누군가를 싫어할 권리가 있다. 용서하고 싶지 않은 누군가를 용서하지 않을 권리가 있다. 화해는 무조건 좋은 것이라는 우리의 관념이 때로 누군가의 가슴에 지울 수 없는 상처를 남기고 계속해서 문제를 유발시킨다. 모두와 사이좋게 지내겠다는 것은 얼마나 무모한 욕망인가. 또 모두와 사이좋게 지내라는 것은 얼마나 무리한 요구인가. p22


  서로 ‘화해하고 친하게 지내’라며 오랫동안 강요받았던 우리에게 얼마나 낯설게 마음을 드러내는 말인가. 이 세상 마음이 맞는 친구들과 더 좋은 이야기를 나누기에도 모자라다. 애당초 싸움이란 것이 없는 것이 좋은 것이긴 하지만.

  아기 돼지 삼형제의 집짓기 현장으로 가보자. 작가는 이 이야기를 지어낸 사람들은 벽돌집을 짓는 사람일 것이라 말한다. 왜 그렇게 생각을 할까. 그런 벽돌집을 짓고 사는 이들은 서유럽 사람들이고 그들 눈에 나무나 짚으로 집을 짓는 것은 게으름 때문이다.


그러므로 그따위 엉성한 집을 짓는 아시아나 아프리카, 남태평양 등지에 사는 사람들은 게으르다는 결론으로 이어질 수 있다. 이제 이들의 가난 혹은 ‘비문명’은 게으름 탓이 된다. 게으름이 외부의 침입을 부른다. 이들은 외부의 적에 대응할 능력이 없다. 게으른 첫째 돼지와 둘째 돼지가 부지런한 셋째 돼지의 집으로 피신하여 목숨을 구했듯, 아시아나 아프리카 사람들은 유럽인의 집으로 피신해야 한다. 그런데 아시아, 아프리카 사람들이 유럽인의 집으로 모두 들어가는 것은 현실적으로 불가능하니까 유럽 사람들이 아시아, 아프리카로 가서 유럽인의 집을 지었다. 그 이후 이어진 식민지 지배의 살벌한 역사에 대해서 우리 모두 잘 알고 있다. p58


  빨간 모자에게 큰 길로 가라고 하는 것은 사회가 부여한 질서에 맞게 살라는 이야기이다. 그 질서를 깨지 말라는 것이다. 분홍신에 대한 금지 역시 같은 맥락이다. 자본주의 사회가 부당한 규제에도 묵묵히 따르는 순종적인 인간상을 학교에 바란다면 학교는 복장 규제로 답을 주고 있는 것이다. 부당한 규제에 참고 견디도록 길들여진 아이는 자라서도 부당한 것이 묵묵히 일하는 노동자가 될 수밖에 없다고 말한다.

  익히 들어왔던 ‘교훈’ 은 결국 사회적인 억압에 관한 다른 전달이다. 이 책은 좋은 이야기로 감춰놓은 드러내지 않은 한뼘에 관한 이야기를 들려준다. 변화하는 사회에서 우리가 동화 속에서 환상을 품지 않게 되는 탓도 있지만 동화의 환상을 깨버리는 어이없는 교훈의 덧씌우기가 즐겁게 읽는 동화의 여운을 가시게 하는 이유가 되기도 한다. 그런 점에서 또다른 시각으로 우리 사회를 짚어 보는 것, 동화를 짚어 보는 맛이 있다.

  작가는 ‘왜’라고 묻는 것을 세상이 불편해 한다고 말한다. 하지만 ‘왜’라고 묻지 않으면 우리는 지배자의 논리에 따른 삶을 살게 되리라 말한다. ‘왜’라는 한마디는 어른들로부터 쉽게 낙인찍히고 소외당한기 쉽다. 하지만 이들의 ‘왜’가 세상을 보다 밝게 이끄는 힘이 된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이 세상을 살아가는데 ‘왜’라는 물음이 가진 힘을 함께 알고 나누는 것이 이 책을 쓴 목적임을 작가는 분명히 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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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녀가 될 수밖에 없는


셜리 잭슨, 힐하우스의 유령



   이 소설이 읽을 맛이 난다면 문장의 맛도 크다. 문장이 좋다. ‘고딕 미스터리’, ‘고딕 호러’의 대가라 불리는 작가 셜리 잭슨의 이 소설을 스티븐 킹은 지난 백 년간 등장한 초자연적 소설 중 가장 훌륭한 작품으로 꼽았고 이 소설에서 영감을 받아 스티븐 킹은 자신의 작품 <샤이닝>을 썼다.

   저자는 자신의 성격과 상황이 닮은 주인공을 만들었다. 자신의 분신을 만들어 내어 자신의 심리를 표현하고 싶은 것이었을까. 그렇다면 그토록 작가 자신은 공포와 광기 속에 있었나 싶다. 소설을 소설로 읽고 작가의 생애를 살펴보면서 그렇지 않아도 강렬했던 소설에 대한 느낌이 더욱 배가되었다. 작가 셜리 잭슨이 악마의 소리를 듣는다는, ‘마녀’라는 소문이 있었다니! 셜리 잭슨은 남편이 발령받아 간 노스 베닝턴이란 마을에서 주민들과 잦은 다툼이 있었다고 한다. 소설 속에 등장하는 힐즈데일 사람들이 상당히 불친절하게 묘사되어 있는데 작가가 이 마을 사람들에게 느끼는 감정일 것이다.

  힐 하우스의 유령은 주인공 엘리너가 자신의 자유를 찾기 위해 찾은 힐 하우스에서 겪는 이야기다. 이 소설에서 다루는 ‘공포’는 일반적인 공포 소설과 다르다. 그 점이 이 소설에 빠지게 되는, 비교불가한 공포를 느끼게 되는 원동력이다.

   

그 어떤 생명체도 절대적 현실에 갇힌 채로 살아간다면 광기에 빠져들 수밖에 없다. 심지어 종달새나 베짱이도 꿈을 꾼다고 주장하는 사람이 있지 않은가. 어둠을 품은 채 언덕을 등지고 서 있는 힐 하우스는 광기에 물들어 있다. 지금까지 팔십 년간 자리를 지킨 이 건물은 앞으로도 팔십 년은 우뚝 버티리라. 벽은 똑바르고 벽돌은 차곡차곡 쌓여 있으며 바닥은 탄탄하고 문은 꼭 닫혀 있다. 힐 하우스를 이루고 있는 목재와 석재 위로는 항상 침묵이 내려앉는다. 무엇이든 저택 안을 걸어갈 때는 항상 혼자이다. p35


  광기에 물든 힐 하우스는 진짜일까. 그렇게 보이는 것일까.

  엘리너는 11년 동안 간호한 어머니가 돌아가시자 언니와 소유권이 반반인 차를 타고 집을 떠난다. 방황과 정체된 삶에 언니 부부와의 갈등이 한몫했고 또 하나는 힐 하우스의 심령 현상을 연구하기 위해 조수가 필요하다는 몬터규 박사의 편지 때문이다. 한없이 초라해 보이는 지난 생애에 대해 자책하지만 32살에 비로서 자신의 결정으로 힐 하우스를 찾아가는 엘리너의 마음은 경쾌함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곧 엘리너는 자신보다 더 젊고 매력적인 시어도라를 만나 더욱 열등감을 느끼게 될 뿐이다. 힐 하우스 상속자 루크 샌더스와 몬터규 박사 부부와 함께 힐 하우스에서 생활하면서 이들이 겪는 기이한 현상들은 실제인 걸까.


힐 하우스의 선과 공간은 불행한 우연으로 인해 집의 정면에 악마적 분위기를 드리웠다. 그 원인을 눈치챈 사람은 없었으나 광기 어린 배치와, 고약하게 비틀린 각도와, 하늘을 등진 지붕을 보노라면 절망이 밀려들었다. 게다가 힐 하우스는 살아 있는 것만 같았다. p73


  이 어둡고 음산한 집이 주는 공포를 엘리너는 사람들에게서 위로받고 싶지만 엘리너는 사람들에게서 소외되는 느낌을 받는다. 12살에 폴터가이스트 현상을 겪은 엘리너는 자신의 예민한 성격 때문에도 이 현상들에 몹시 두려워하고 공포의 강도도 거세진다. 폴터가이스트는 독일어러 ‘시끄러운 소리를 내는 영’이란 뜻이며 이유없이 이상한 소리가 나거나 집이 흔들리거나 물체가 움직이는 현상을 말한다.


두려움에 떠는 것은 이성을 포기하는 것입니다. 합리적 사고를 기꺼이 버리는 짓이죠. 두려움에 굴복하거나 싸워 이기거나 둘 중 하나이지, 그 중간을 택할 수는 없는 법입니다. p244


  엘리너는 벽에 피로 쓴 자신의 이름이며 돌아가신 어머니가 부르는 소리들을 들으며 더욱 공포와 광기에 휩쓸린다. 그러면서 힐 하우스가 가진 힘이 이것을 만들어 내는 것인지 끝없는 자신의 불안이 이런 현상을 보게 하는 것인지를 구분하지 못한다.


두려울 때면 세상의 이성적이고 아름다우면서 두려움이 없는 면이 분명하게 보여요. 의자와 탁자와 창문은 어떤 영향도 받지 않고 그대로 있죠. 꼼짝하지 않아도 카펫의 섬세한 짜임새를 볼 수 있어요. 하지만 동시에 이런 세상과 단절되는 느낌을 받아요. 사물들은 두려워하는 법이 없기 때문이 아닐까 싶어요.

우리는 단지 우리 자신을 두려워하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아뇨. 우리는 자신을 아무가식 없이 있는 그대로 보는 것을 두려워하는 거죠.

우리가 진실로 무엇을 원하는지 알기를 두려워하죠. p245


  엘리너가 힐 하우스에서 겪는 공포를 보며 오래전 한국영화 알포인트가 떠올려졌는데 점점 죄어오는 공포 속에 미쳐버리는 심정이 고스란히 전달이 되었다. 나를 둘러싼 공간이 주는 공포, 그것도 가장 편안해야할 집이 주는. 힘이 되고 위로가 되어 줘야 할 가족이 주는 소외감, 손을 내밀고픈 이들에게서 받는 외면. 이 모든 것들이 심리적인 방황의 이유가 되어 한 인간을 더욱 더 폐쇄적이게 만든다. 인간이 광기에 빠질 수밖에 없는 것은 힐 하우스가 가진 힘일까, 내 자신이 만들어낸 환상인 걸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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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빵냄새 가득한 책 


 

 동네에 천연발효종을 사용한 건강빵집이 생겼다. 지나는 길에 맡는 빵냄새가 빵의 이미지를 떠올리게 하면서 "빵 향" 가득한 책들이 떠올랐다.


▷ 위저드 베이커리


  제2회 창비청소년문학상 수상작이다. 상당히 흥미롭게 읽은 책이다. 아니, 우리나라에도 이런 류의 청소년문학이? 라며 놀랐던 기억이 나는데 한강의 채식주의자의 맨부커상 수상 이후 한국문학의 '번역'에 관한 기사를 읽다 보니 <위저드 베이커리> 역시 외국에 번역되었다고 했다. 특히 프랑스 쪽에서 유명하다고 하는데, 파리바게트 때문인지 나 역시 위저드 베이커리를 읽으면서 프랑스를 느꼈던 기억이 난다.

  빵집은 미스터리하고 환타지가 섞여 있으면서도 현실적인 심각한 문제를 다룬다. 재밌는 책이다.

  



▷ 식빵굽는 시간


  1996년도 제1회 문학동네 작가상 수상작이다. 이때 김영하의 <나는 나를 파괴할 권리가 있

다>와 공동수상한 책이다. 김영하의 책은 검은 표지, 식빵 굽는 시간은 다크레드의 표지였다.  

  소설의 목차가 빵이름을 되어 있어 빵 이름에 무지했던 내게 빵에 대해서까지 궁금해지게 만들었던 책이다. 덕분에 브리오슈와 크루아상 빵이 어떤 것인지를 확실히 알게 되었던.......빵만드는 일에 호기심이 당겼던.... 하지만 빵이야기는 아닌 소설.

  잊고 싶은 기억과 찾고 싶은 기억의 평행선. 남의 빈 방에 들어가 앉아 있는 여주인공의 행동이 떠오르고 그보다 더, 이상한 관계들과 행동들이 맞물려 있는 이야기.

 

  


▷ 시골 빵집에서 자본론을 굽다


  정말로 시골 빵집을 운영하는 와타나베 이타루의 이야기. 이스트에 물든 빵이 아니라 천연균을 찾아 자연 속에서 살아 움직이는 건강하고 착한 빵을 만드는 빵집 주인의 이야기. 자본주의의 경제와 경영 체계를 뒤집고 마르크스주의의 자본론을 깨치며 이윤을 남기지 않고 지역경제를 활성화하며 보다 행복하게 살며 행복한 빵을 만들고자 하며 ㄱ렇게 살아가는 이야기가 담겨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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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구본형의 책 ◀



 구본형1.JPG




 

•출    생

1954.1.15. 충남 공주

 

•활동분야

변화경영사상가. 변화경영연구소장. 강연, 칼럼, 저술 활동

 

•발 자 취

서강대학교와 대학원에서 역사학, 경영학 공부

 

 

1980년~2000년 한국 IBM 근무(경영혁신 기획과 실무 총괄)

 

 

1991년~1996년 IBM 본사의 말콤 볼드리지(Malcolm Baldrige) 국제 심사관

 

 

2000. 1인 기업 ‘구본형 변화경영 연구소’ 설립

 

 

2005.~ 연구원 제도 운영

 

 

EBS 라디오 <고전읽기> 진행

 

•저    서

1998. 익숙한 것과의 결별

 

 

1999. 낯선 곳에서의 아침

 

 

2000. 월드 클래스를 향하여 / 떠남과 만남

具本亨 Bon-Hyung Goo

 

 

2001. 그대, 스스로를 고용하라 /오늘 눈부신 하루를 위하여

<사진출처:yes24.com, 예스인터뷰>

 

 

2002. 사자 같이 젊은 놈들(미치지 못해 미칠 것 같은 젊음)

……

삶을 시처럼 살고 싶어하는

변화경영사상가

……

 

 

2003. 내가 직업이다

 

 

2004. 나 구본형의 변화이야기(마흔 세 살에 다시 시작하다) / 일상의 황홀

 

 

2005. 코리아니티 경영

 

 

2006. 공익을 경영하라

 

 

2007. 아름다운 혁명, 공익 비즈니스 / 사람에게서 구하라

 

 

2008. 세월이 젊음에게

 

 

2009. 더 보스 : 쿨한 동행

 

 

2010. 구본형의 필살기

 

 

2011. 깊은 인생

 

 

2012. 신화읽는 시간

 

 

 

2013. 그리스인이야기   

2013. 구본형의 마지막 편지

2013. 나는 이렇게 될 것이다

2014. 구본형의 마지막 수업    

2016. 나에게서 구하라



   그는 1954년에 태어났고 2013년 4월 어느 날, 59세의 나이로 이 세상과 결별했다. 그가 익숙한 이 곳과 결별하게 된 것은 폐암이 결정적 원인이었다. 마지막까지 아픈 몸을 숨기고 EBS 라디오에서 『고전읽기』를 통해 ‘변화경영’의 메시지를 전하였다. 그리고 마지막까지도 온전히 그의 생을 ‘축제’로 승화시켰다. 

  그가 남긴 저작들......



◐ 유고집


    

  


◐ 신화이야기


   


◐변화를 위한 생각들

     

    

   

  

  

◐ 자기경영


   


 ◐ 직장과 재능


   


◐ 공익경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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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엇보다 위험한 행위

 

 

읽다

 -김영하와 함께하는 여섯 날의 문학 탐사  

 

  

     <보다> <말하다> <읽다> 삼부작의 세 번째 산문집이다. <읽다>는 작가의 독서경험과 그동안 읽은 작품에 대한 이야기로 가득하다. 우리는 왜 책을 읽는지, 어떤 책을 읽는지, 그 책에서 무엇을 보는지, 어떻게 생각하고 느꼈는지 작가의 경험은 같은 듯 다르게 전달된다. “만약 어떤 형벌을 받게 되어, 읽기와 쓰기 둘 중 하나만 해야 한다면 뭘 선택하게 될까를 생각해본 적이 있다. 쓰지 못하는 삶도 편치는 않겠지만 읽지 목하는 고통이 더 클 것 같다”라고 말하는 이 작가의 독서 경험은 그가 말하는 감성근육을 키우는데 도움이 될 것이다.

   독서는 왜 하는가에 대한 수많은 이유들 중에 작가의 이유는 뭘까. 작가는 “독서는 우리 내면에서 자라나는 오만(휴브리스)과의 투쟁”이라고 말한다. 자신은 『오디세이아』,『오이디푸스 왕』을 읽으며 모르면서 알고 있다고 믿는 오만과 자만을 발견하게 되었는데, 이렇게 독서는 우리가 굳건하게 믿고 있는 것들을 흔들며 “독자라는 존재는 독서라는 위험한 행위를 통해 스스로 제 믿음을 흔들고자 하는 이들”이라 말한다.

 

소설을 읽는다는 것, 그것은 인간이라는 어떤 우월한 존재가 책이라는 대량생산품을 소비하는 과정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인간이라는 이야기가 책이라는 작은 틈을 통해 아주 잠깐 자신을 둘러싼 거대한 세계와 영겁의 시간에 접속하는 행위입니다. 그러므로 인간이 바로 이야기이고, 이야기가 바로 우주입니다. 이야기의 세계는 끝이 없이 무한하니까요. p69

 

   작가는 좋은 독서는 끊임없이 헤매는 경험이라고 말한다. 소설을 읽으면 하나의 세계가 내면에 겹쳐지며 새로운 세계, 광대한 우주를 탐색하는 것과 같고 또한 소설을 읽는다는 것은 투쟁이라고 한다. 책을 읽으며 전개될 이야기를 예측하며 맛보는 스릴과 작가의 의도와 나의 해석에 따른 괴리를 조율하는 정신적 투쟁. 그래서 읽기는 기쁨과 고통이 공존하고 있다. 그리고 이렇듯 기쁨과 고통을 경험하기에 책을 통해서 감각의 근육을 키울 수 있는 것 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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