밀레니엄, 수천년 습득된 증오


 


  여자를 증오한 남자들을 선택한 건 순전히 제목 때문이었다. 여성혐오와 페미니즘을 담은 사회인문학책인 줄 알았던 것이다. 그런데, 소설이라니. 동명의 영화가 있는 건 알았는데도 영화의 원작이라는 것을 매치시키지 못했다. 어쨌든, 여자를 증오한 남자들을 비롯, 밀레니엄 시리즈를 다 읽고 든 생각은 왜, 스티그 라르손은 그렇게 빨리 세상을 떠났는가,였다. 밀레니엄 시리즈를 완결하지 못한 채.......소설의 마지막을 알고 싶은 먼 나라의 독자가 작가의 죽음을 애도했다.

  흥미있고 가독성있는 이 소설은 스웨덴 소설이다. 어느 순간 스웨덴 작가들의 책들이 서점계를 휩쓸고 있는 듯하다. 창문을 넘으신 할아버지나 오베 할아버지 감옥에 가신 할머니들. 이 작품들이 유쾌함에 조금 더 다가가 있다면 밀레니엄 시리즈는 치밀하고 진중하다. 저녁 나절의 찬기 머금은 느낌의 북유럽이 느껴진다. 어둡고 음습하며 시린 느낌의 밀레니엄 시리즈에서 이야기를 이끌어 가는 중심은 미카엘과 리스베트이다. 일단 미카엘이 ‘정의’를 불태우는 기자라면 리스베트는 어디로 튈지 모르는 예측불가의 천재 해커다. 그나마 미카엘이 어느 정도 보아 온 캐릭터라면 리스베트는 특히 한국에서는 찾아보기 힘든 캐릭터다. 성격이나 외모나 재능이나 모든 면에서.

  밀레니엄 시리즈의 첫 번째, 여자를 증오한 남자들의 중심 사건은 유명한 기업가 방예르가의 손녀의 실종이며 두 사람이 이를 파헤치면서 전개된다. 실종의 단서를 찾아가는 과정의 치밀한 추리는 흥미진진하고 거듭 밝혀지는 충격적인 실종의 이유에는 경악을 금치 못한다. 1부인 여자를 증오한 남자들만 해도 1권고 2권으로 나눠져 있고 한권의 분량도 상당하다. 하지만 일단, 이야기에 발목 잡히면 밤이라는 게 뭔지, 잠이라는 게 뭔지를 잊게 된다. 마치 나의 일 같아서, 내가 아는 이에게 벌어진 일 같아서 마음 졸이며 실종의 이유와 실종자의 생존을 걱정하게 된다.

  여자를 증오하는 남자들이라는 제목은 적절한가. 거대 재벌 방예르가 손녀의 실종사건과 함께 많은 여자들이 연쇄 사망하는 일들을 함께 풀어 가는데 그 사건들에서 여성들의 죽음이 ‘증오’에 의한 것이라고 할 수 있을까. ‘증오’라는 이유로 살인의 이유가 정당화될 수 없다는 점과 함께, ‘증오’에는 조금이라도 상대방에게 책임을 전가하는 뉘앙스가 담겨 있다는 느낌을 가지는 탓에 여기서 껄끄러움에 주춤하게 된다. 가해자에게서 살인의 동기로 ‘증오’라는 말을 듣는다면 돌아버릴 것 같다. 아무런 일면식이 없는 이에게 대해 가지는 ‘증오’, 단지 그대가 여자라서라는, 존재 자체를 부정당하고 있는 잔혹하고 악랄한 범죄들.

  그 모든 비도덕적이고 부도덕한 악랄함이 인식과 생각에서 멈추지 않고 행동으로 옮겨진 기가막힌 사건들은 1부에서 그치지 않는다. 개별적인 사건들로 독립적인 이야기를 만들어 가기도 하지만 밀레니엄 시리즈의 전반에는 여성에게 ‘증오’라 이름붙이는 기계적이고 도식적인 악랄하고 추한 범죄들이 가해진다. 밀레니엄이 되었어도 수천년 동안 문명을 쌓고 지식과 지혜와 합리적인 이성들을 축적해 나갔다고 하는 인간들의 의식 속에 여전히 버리지 못하고 당연하게 인이 박힌 여성들에 대한 인식. 작가가 밀레니엄이라 제목을 정한 것은 수천년간 이어져오고 이어져가는 여성들을 대하는 사회의 이야기를 하고 싶었던 게 아닐까.

  여자를 증오한 남자들에서는 대대로 이어지는, 상습적이고 습득된 잔인함과 폭력이 어떻게 확장되어 가는지를 보여준다. 어쩌면 개인적인 것처럼 보이는, 한 개인의 잘못된 일탈, 악마적 행위가 개인을 벗어나서 가족을 벗어나 지역을 벗어나 사회로. 그리고 사회구조가 지역사회로 가족으로 개인으로 침투해나가는 상호적인 모습들을.

  작가는 어린 시절 반파시스트로서 제2차 세계대전에 나치에 의해 수용소에 수감된 외조부에게 많은 영향을 받았다고 한다. 작가 또한 반파시스트였고 반전 활동을 꾸준히 한 사람이다. 그로 인해 살해 위협에 시달리기도 했다 한다. 파시스트의 이야기가 녹여 있는 것은 그 때문이기도 할 것이다. 작가의 이력이 이 소설이, 이 시리즈가 단순히 흥미를 겨냥한 추리소설이 아님을 보여준다. 전세계가 이 책에 열광한 이유는 흥미있는 이야기에 흡인력있게 빨려들어가면서도 이 사회가 가지고 있는 문제를 예리하고 적나라하게 보여주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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꿈에 기댈 수밖에 없는 날들에는...

    

 

 

『꿈의 해석』. 프로이트. 조대경 완역.

   

   꿈을 재생하려 할 때 우리는 느슨하게 연관된 꿈의 요소들에 질서를 부여한다. 즉 우리는 꿈에 결여된 논리적 연결의 과정을 삽입한다. 우리의 기억의 타당성을 검증하는 유일한 길이 객관적인 확인이고 이러한 이 회상인 꿈에 관하여는 얻어질 수 있는 것이 아닌 이 마당에서 우리는 꿈의 기억이라는 것에 어떤 가치를 부여할 수 있을 것인가?

 

   자고 일어나 지난 꿈이 생각나지 않을 때 가끔은 답답함을 느낀다. 특히 무언가 나의 현재 생활에 암시를 주는 듯한 꿈이었다고 느껴지는 경우라면 더욱 그렇다. 때문에 아주 생생한 꿈이거나 혹은 가물가물한 꿈의 기억이거나, 어느 때라도 내가 꿈을 의식하고 있다는 것을 느끼게 된다.

   꿈에 관한 인간의 무의식을 서술하는 프로이트의 저작이 흥미가 당기는 것은 이러한 평소의 생각들과 체험들에서 비롯되었다고 본다. 당연히 왜 꿈을 꾸고서 이를 잊어버리는지 꿈이 가지고 있는 여러 학자들의 의견들을 살펴보는 것은 흥미로운 일이다.

   프로이트의 꿈의 분석 제1장은 꿈에 관한 학술적인 문헌들에 관한 소개와 그에 대한 의견으로 이루어지고 있다. 꿈에 관한 많은 다른 학자들의 의견과 이에 대한 비판들, 프로이트의 견해 등을 종합적으로 알 수 있기에 서장은 읽기에는 딱딱하였어도 여러 가지 방향에서 생각해 볼 수 있게 한다. 무엇보다 프로이트의 꿈의 분석이 실제 꿈 해몽과 같은 착각으로 사례를 분석하고 이에 대한 설명을 하고 있는 것이라면 이를 통해 나의 지난 꿈들에 대한 해몽을 해 볼 수 있을 것이란 생각도 물론 조금은 있었을지 모른다. 그러나 이 책에서 오히려 학술적인 부분에 관심이 더 집중된 것은 프로이트의 꿈의 분석이라는 실질적인 분석들이 전적으로 성적인 문제에서부터 해석하고 있다는 것에 대하여 느끼는 거부감 때문이기도 했다.

   프로이트가 가지고 있는 생각 외의 꿈에 관한 다른 학자들의 의견을 통해서 한쪽으로 치우친 나의 생각들에 대하여 정리할 수 있는 계기가 되었다. 항상 무엇이든 대립된 의견이 있다는 것은 안다. 다만 이러한 상반된 의견 속에서 이론에 대한 근거와 논리를 알고 분명하게 접근하는 것이 짧은 나의 견해를 정리하는데 보다 큰 도움을 제공한다.

   그러나 책을 읽으면서 나 역시 오랫동안 무의식적인 사고에 꿈의 분석에 관한 프로이트의 절대적인 견해가 세뇌되어 있음을 알 수 있었다. 다르게 생각해 보기 전부터 꿈에 관한 프로이트의 견해는 거의 지배적이었고 이것이 단순한 그의 견해이며 이론이라는 것을 인식하기 전 완전한 진실로 사실로 여기고 있는 것이었다. 그러한 점에서 비록 비판하는 능력이 크게 있지는 않지만 치우친 사고를 멀리하고 다른 이들의 의견과 각각의 논지는 사고의 확장에 큰 도움을 주었다는 것을 부인할 수 없다. 대표적으로 꿈에서의 도덕적인 부분에 대한 접목이 그러했다. 꿈과 도덕적 의식의 작용과는 무관하다는 의견도 타당하게 여겨지기도 하고 또한 이에 대한 반대의 의견도 동조되는 부분이 있다. 어느 하나를 정확하게 논리적으로 입증하고 주장하기는 어려우나 꿈에 관한 한 도덕적인 부분의 작용에는 어느 정도 이들의 연관성이 있다는 것이 보다 수긍이 간다.

   물론 이는 꿈의 기능일 수도 있고 지극히 도덕적 생활에 대한 각인에서 비롯된 생각일 수 있다. 그러나 무엇보다 사람의 마음속에 도덕적 생활이라는 부분에 대한 인식과 인지가 작용하는 한 인간은 이에서 벗어난 사고가 힘들기 때문으로 보인다. 실제로 무언가 심리적으로 불안정하고 죄를 지었다는 생각을 가지고 있는 경우 이는 꿈에서까지 이어지는 상황으로 이루어진 경험을 가지고 있다. 어떠한 경우라도 꿈과 심리적인 것의 연관성이 있다고 본다면 인간이 도덕적이어야 한다고 교육받아 온 의식은 꿈에서 충분히 활용될 수 있다고 본다.

 

꿈의 도덕성에 관한 의견의 대립을 넘어서 이 두 저자들은 부도덕한 꿈의 원천을 밝히려고 노력하며 이 원천을 정신생활의 기능에서 찾는가 신체적인 원인이 정신에 주는 해로운 영향에서 찾는가에 의하여 새로운 대립이 발전한다. 도덕성이 꿈으로 연장된다고 믿는 사람들도 꿈에 전적인 책임을 과하는 것은 유보하는데 그러나 사람들은 죄악스러운 꿈에 대해서도 책임이 있는 것으로 보며 사람은 특히 수면 전의 마음을 정화할 의무가 있다. 

   마음대로 되지 않는 관념들의 출현은 어떠한 의미를 지니며 이러한 양립될 수 없는 도덕적 충동들은 눈을 떴을 때와 꿈을 꿀 때의 마음의 심리를 어떠한 결과로 이끄는가?

 

   꿈이 무엇인가, 꿈의 역할이나 기능에 대한 이론들에서처럼 꿈이 가지고 있는 기능에서 논의하고 있듯 꿈과 심리적, 정신적인 부분에 있어서의 연결을 타당하게 본다. 결국 꿈이란 심리적인 부분의 정화작용이라고 볼 수 있지 않을까. 즉 일상의 생활 속에 꿈이 관여하고 있는 형태는 내가 가지고 있는 생각과 사고들, 내가 행한 행동들에 대한 일종의 심리적 연결고리가 꿈으로서 뱔현되고 있다는 점에서 볼 때 그러하다. 내가 특정한 행동을 하고 거기에서 죄의식을 느끼고 이에서 벗어나고 있지 못할 때 꿈은 나의 심리를 알고 이를 반영한다는 것이다. 이러한 꿈의 반영은 나의 도덕적 생활에 대한 더욱 강한 의무를 지우게 되고 이는 생활에 적용이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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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은 몇 차원적 인간인가

    

   마르쿠제는 현대를 부르주아지와 프롤레타리아트를 공통 존재로 하는 일차원적인 '고도산업사회'라고 명명한다. 이러한 사회에서 인간은 억압된 현실을 비판하는 힘이 되는 내적 차원을 상실하고, 의식의 일원화에 이른다. 결국 인간은 문화가치와 기성질서가 동일화하는 일차원적인 문화와 사고에 도달하는 것이다. 이처럼 마르쿠제는 점점 사회에서 인간 소외와 인간 상실이 되는 상태를 그리고 있다.

   3부 10장으로 구성된 이 책은 1부에서 고도산업사회의 모습인 1차원적 사회의 모습을 그려낸다. 2부에서 이러한 사회에서 획득된 1차원적 사유의 상태를 그리고 마지막 3부에서 이 사회에서 새로운 철학의 가능성에 대해 논하며 이 사회를 개조한 새로운 세력에 대해 논하고 있다. 다만, 확실하고 분명한 해답을 제시하고 있지는 않다.

   선진산업사회에서의 인간은 모든 “과학적・기술적인 합리성과 조작은 새로운 사회 통제의 형식으로 함께 결합”되어 인간을 소외시킨다. 1차원적 인간은 이렇게 다차원적 사고를 배제한 채 기술적 합리성에 의해 노예화되어 가는 인간이라고 할 수 있다.

   마르크스뿐만 아니라 마르크스주의자들의 논리 전개는 비슷한 패턴을 보이는 듯하다. 저자에 대한 이해없이도 목차를 훑어보거나 몇 장을 읽고 나면 아, 이 사람은 마르크스와...라는 생각이 절로 든다. 전반적으로 거의 모든 철학과 정치, 경제사가 마르크스의 생각과 저작에서 뗄 수 없는 영향을 받고 있음을 생각하게 된다. 그것은 일단 마르크스주의자들의 논거의 방식이나 마르크스와 마르크스주의자들의 기본적 사상의 이해, 개념에 대한 이해가 필요하다는 것을 말한다. 그래서인지 일단 마르크스주의자들의 책이나 프랑크푸르트 학파들, 그러니까 독일 출신의 철학가들의 책을 읽으려면 일단 숨을 크게 들이쉬고 읽어야 한다. 1차적인 내용의 흐름을 알고 세세한 것까지를 완벽히 습득하기 위해서는 시간이, 시간이 부족하다. 핵심적인 한 문장만을 뽑아내기 위해 무수한 페이지를 넘기지 않는다는 것을 생각할 때 더욱 그러하다.

   마르쿠제의 저작들은 1968년의 혁명에 어떠한 역할을 했을까. 그때의 학생들은 무엇으로부터 행동력의 힘을 얻었을까. 어떠한 형태로든 ‘필요’가 발명을 낳는다는 말처럼 ‘필요’한 이들의 힘은 그것의 어려움을 상관하지 않을 것이다.

   20세기 후반에 정치적 좌파에 대한 강력한 영향력을 가진 사상가,라고 마르쿠제를 말한다. 그의 생애를 들여다보려니 온통 공부와 연구한 이력만이 넘쳐난다. 그의 일생은 학자적인 관심과 연구의 나날인 모양이다. 특히 그는 헤겔, 마르크스, 프로이트의 연구가, 고도산업사회의 비판적 이론가로 알려져 있다. 그리고 러시아와 소련 연구에 집중하기도 했다.

   어느 특정한 시대를 살았다는 건 그 시대에서 벗어날 수 없는 영향을 받았다는 이야기이기도 하다. 그 역시 독일 베를린에서 태어난 유대인이었다. 그의 철학이 그의 사상이 그의 생애가 어떠했을지는 어느 정도 짐작을 할 수 있을 것 같다. 그 역시도 이주와 망명의 연속된 생활이었음을 보건데....

   1968년 일어난 세계적 학생 운동의 분노 물결에 마르쿠제의 영향력이 강했다고 한다. 그의 저서들의 영향력이 컸음이다. 그런 것을 보면 ‘운동’ 역시도 ‘사상과 철학’이 동반되어야 함을, 행동력에 미치는 ‘인식’의 역할을 다시 한번 생각하지 않을 수 없다. 그 시대의 사회에 대한 비판적 철학자로서 그의 대표적인 저서인 『일차원적 인간』은 현대의 고도산업사회가 기술적 진보에 매몰되어 인간에 대한 몰가치화를 양산하고 있는 것을 비판한다. 결국 자본주의 사회에서 인간은 물질적 풍요 속에 정신적 풍요를 잃어버리고 몰살당하면서 욕구마저도 제거된 채 그것을 모르며 살아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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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 정치가들의 모든 모순과 아이러니

   

  오랜기간 동안, 우리는 마르크스주의 및 혁명적 투쟁사상에 관하여 거부감을 가지도록 길들여져 왔다. 이러한 환경속에서 길들여진 사람에게 있어 마르크스주의적 내용은 두가지 반응을 낳게 한다. 첫째는 반동적인 도서로서의 취급이며 둘째는 그 내용의 논리적인 전개 및 사물을 꿰뚫는 학자의 통쾌한 시각에 대한 경이와 새로운 글에 대한 호기심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이처럼 모순되는 감정을 가지고서 글을 읽는 과정이었다면 모순론의 내용에서처럼 반드시 주요한 모순이 결정적인 역할을 하면서 글을 읽도록 이끌어 나갔을 것이 분명하다. 아마도 나에겐 후자쪽이 조금은 강한 듯하다. 다만 마르크스주의에서 주장하는 부분과 모순론의 차이점, 마르크스주의론을 어떤 식으로 해석하고 마오쩌둥이 이를 수용, 확장하였는지를 중점으로 내용을 살펴보게 되었다.

  중국의 정치가이자 공산주의 이론가 마오쩌둥은 빈농의 아들로 태어나 어린시절에는 농사일을 도우며 아버지의 반대로 진학하지 못했고 16세때 학교에 갈 수 있었다. 양창지에게 유물론적 철학과 윤리학 강의를 받았고 비밀학생단체들과 접촉하면서 무정부주의에 관한 책을 많이 읽으며 그의 사상은 마르크스주의로 기울게 되었고 또한 러시아혁명에 관한 책을 많이 읽었다. 중국공산당에 가입하여 이후 국가주석이 되었고 국가주석을 사임하고 죽을 때까지 당주석으로만 있었다. 1964년 《마오쩌둥어록》을 간행시켰고, 1965년 10월 이후에는 당내에서 완전 고립되어 연금상태에 있었으나 문화대혁명을 지휘하였으며, 1960년 이후의 중소논쟁과 문화대혁명 기간을 통하여 마오쩌둥사상을 높이 내걸었다. 1970년 헌법수정초안을 채택하여 1인체제를 확립하고 중국 최고지도자로 군림하였지만 사망하기 직전인 1976년 4월 천안문사건으로 완전히 고립된 채 사망했다.

  모순론에서 마오쩌둥은 이론적인 부분에 대하여 중국의 상황을 예로 들어 설명을 함으로써 당시의 중국상황에 대한 이해와 함께 보다 이론을 쉽게 이해할 수 있게 해 주었다. 마오쩌둥에 의해 정의·정리된 이른바 마오이즘 사상의 기본은 교조주의자들에 대한 비판인 것으로 보인다. 마오쩌둥은 교조주의자들의 이론과 사물에 대한 해석이라는 것이 상당히 왜곡되고 본질을 제대로 바라보지 못하는 것으로 간주하고 있다. 따라서 하나의 이론과 상황에 대한 해석에 대하여 교조주의자들의 해석을 질타하고 있다.

  일반적으로 자신의 논지를 주장하는 자들의 특징이 무조건 “나는 옳다. 네가 그르다”는 식의 논리를 편다는 점을 생각할 때 어느 정도 자신의 주장에 대한 설득력 있는 근거와 예는 주장에 대한 동조를 떠나 일부분 타당성을 인정할 수 있게 하고 또 다른 반박을 할 수 있도록 함으로써 보다 발전적인 토론을 할 수 있게 한다.

  발단은 변증법적 유물론의 기본인 모순의 운동법칙에서 시작한다. 모순은 모든 현상에 존재하며 또한 모순 속에는 특수성이 존재한다. 이 특수한 모순은 다른 사물과 한 사물을 구별할 수 있게 하는 본질을 구성한다. 모든 사물에는 모순의 보편성과 특수성을 모두 포함하고 있으며 보편성은 특수성 속에 존재하고 있는 것이며 양자는 서로 연결되어 있다. 그런데 교조주의자들은 보편성만 앞세우고 있다. 모든 사물에 내재하는 모순의 해결방식은 당연 다를 수밖에 없으며 그 사회의 특수성에 기초하여 달라져야 한다.

  중국사회의 경우 특수한 모순은 제국주의-특히 일본-와 중국인민간의 모순이다. 따라서 이 모순을 해결하기 위한 방법은 국내의 각 계급의 단결로서 민족해방전쟁을 행하여야 하는 것이다. 이와 같은 다른 점을 마오쩌둥이 정통적마르크스주의라고 부른다면 결국 이것은 마르크스주의에 대한 해석을 달리하는 것이 된다. 따라서 결국 마오쩌둥의 사상은 마르크스주의에서 기초한 수정된 마르크스주의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마르크스주의가 그렇지만, 일반적으로 명철한 논리를 펼치는 이론들에 대한 관심은 그것이 실질적으로 적용되는 부분이다. 따라서 『모순론』에서 마오쩌둥이 주장하는 내용들이 그가 중국사회에 대한 적용을 어떤식으로 이루어갔느냐였다.

  이에 대하여 여러 책에서는 마오쩌둥이 『모순론』에서 얘기한 이론들을 실질적으로 1940년대 중국 공산당 내부에서 전개하였다고 하고 있다. 이른바 정풍운동으로서 그의 지위에 위협이 되는 인물들을 제거하는데 성공하였다고 한다. 또한 마오쩌둥의 이론은 전파되어 다른 사람에게도 영향을 미쳤다고 하고 있으므로 마오쩌둥의 저술의 영향력과 그의 주장의 어느 정도의 실효성을 얻었다고 볼 수 있을 것이다.

  이처럼 단순한 논리적 전개뿐만 아니라 그의 생활과의 접목에서 이 글을 이해하면서 마오쩌둥의 부분적 논거에 수긍하는 점이 없잖아 있다고 생각하면서도 적극적인 지지자로서의 나를 설득하지는 못했다. 다만 그가 마르크스주의라는 거대한 사상가의 이론을 자기 나름의 해석틀로 수용하고 이해하였고 이를 변화시켰으며 또한 자기화한 것을 적용하였다는 것만은 기억한다. 

  마오쩌둥에 대한 평가는 극과 극이다. 그에 대해 좋은 것을 기억하는 자와 그의 독재를 기억하는 자들이 엉키어 있다. 난 모른다. 그의 생애에 대해서나 그가 만든 것들에 대해서나 그가 파괴한 것들에 대해서나. 독재에 조금 더 방점이 찍혀 있는 것 같긴 하다. 그의 생의 마지막처럼 자기 속에 고립된 정치가들에 대해서 도대체 사람들이 그리워하는 것은 무얼까 궁금하다. 그가 자기이론을 전개하고 적극 실천한 것은 중국사회엔, 중국공산당에겐 독이었을까 힘이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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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을 사랑한다는 것, 어떤 일에도 집착하지 않는 것


『바가바드기타』. 마하트마 간디. 

 

 『바가바드기타』에서 두 가지에 끌림을 가졌다면 인도에 대해 가지고 있는 알 수 없는 매혹과 이끌림이 첫 번째요, 바가바드기타라는 낯선 용어와 내용을 그나마 익숙하게 들어 온 간디가 해설하였다는 점이다.

  어느 종교인들 그 심오한 진리와 믿음에 대하여 자랑치 않겠냐만 바가바드기타는 종교적이자 철학적인 느낌이 강조되는 듯했다. 물론, 한두 번 읽고서 이를 이해한다는 것은 어려웠다. 특히 무교인 사람의 특징으로서 신에 대한 맹목적인 존경을 보낸다는 것은 쉽지 않은 일이다. 그러나 한편으로 특정 종교가 없기에 그 포괄적인 의미에 대해 이해하는데 쉬울 수 있다는 생각이 들기도 했다. 자신의 종교와의 괴리를 경험하지 않기 때문이다.

   누군가 신을 사랑한다는 것이 어떤 일에도 집착하지 않는 것을 의미한다라고 했다. 물론 난 이 말에 대해 공감하지 못한다. 신을 사랑한다는 것은 어떤 일에도 집착하지 않는 것이 아니라 특정일 혹은 그 이상의 일에 집착하기 때문에 가능한 일 아닐까. 그것이 물론 베풂으로써 나타나는 경우도 있지만 신을 사랑하여 집착하지 않는 경우가 집착하기 때문에 신을 섬기는 경우를 능가하진 못할 것이다. 물론 그러한 집착들, 탐욕과 이기심을 비우기 위해 신에 대한 사랑을 갈구하고 신에게 의지하는 지도 모르지만 말이다.

  바가바드기타는 ‘지존의 노래’라는 뜻을 가지고 있으며 크리슈나 신의 가르침을 담은 시가이다. 이는 결국 인도 힌두교의 정신이라 할 수 있는데 비교적 간디의 해설로서 내용의 이해를 겨우 한다고 해도 깊이 깨닫지 못하는 것이 아쉬움으로 남는다.

  그러나 아마도 이렇게 어렵게, 이해하기 어렵게 느껴지는 것은 이 경전의 내용이, 크리슈나의 가르침이 표현하고 있는 이중적인 언어 표현 때문이라는 생각이 든다. 모순적인 표현은 항상 그러한 느낌을 가지게 한다. 내 안에 있으면서도 있지 않은 것, 선하면서 동시에 악한 것, 가짜인 것이 진짜인 것 등의 말들은 항상 끊임없이 생각하게 만든다. 이를 통해 나 역시 나라는 존재가 무엇인가에 대해, 내가 가지고 있는 익숙하게 여기고 있는 진리라는 개념에 대해, 또한 경건한 마음과 진실한 마음으로 무언가에 대해 누군가에 대해 가질 수 있는 믿음의 정도는 어느 정도인가에 대해 생각해 보았다.

  바가바드기타에서 11장은 전체 중에서도 가장 시적인 중요한 부분이라는 것 때문에 특히 다른 장에 비해 이들 장에 집중해서 읽게 되었다. ‘비판하지 않는 그대에게’라는 소제목이 달린 9장도 어떻게 내용을 전개시킬지 호기심이 당긴 부분이다.


내 이제, 비판하지 않는 그대에게, 이 신비스런 지식과 아울러 특별한 지식을 일러주리니. 이를 앎으로써 그대는 악에서 풀려날 것이다.

이는 학문의 왕이요, 신비스러움의 왕이요, 순수요, 다스림이요, 곧장 알 수 있는 것이요, 다르마의 본질이요, 실천하기 쉬운 것이요, 변하지 않는 것이로다.


  물론 종교적인 부분, 믿음이라는 것은 비판적인 시각으로 보는 것이 아니라고 했으나 그러나 믿음에 대한 스스로의 무지에 대해 비판해 보는 것은 필요하다고 본다. 나아가 나의 믿음이라는 것 또한 어느 정도 종교적인 신념에 공감할 때 비로소 나의 마음 속에 진실한 믿음이 생겨나리라 본다. 그러한 이유로, 나는 비판이라는 것은 맹목적인, 헌신적인 믿음과 같은 의미에서 중요하게 다루어져야 한다고 본다. 따라서 이를 통해 지속적으로 나를 비판할 수 있는 힘이 주어지기를 바란다.

  우선적으로 내가 가지고 있는 욕망으로 인해 생겨난 고통에서 해탈할 수 있는가. 물론 이에 대한 것은 집착을 버리라는 것으로 일관된다. 그러면 집착을 버린다는 것은 무엇인가. 어느 종교에서나 집착에 대한 경계와 집착을 버리는 것이 곧 새로운 믿음에의 길임을 강조한다.

  바가바드기타 역시 이에 충실하다. 그러나 바가바드기타도 단순한 진리에 대한 경전을 이해하는 것을 넘어서 진실한 실천이 매우 중요한 것임을 강조한다. 특정한 문구에 대한 경배나 감탄을 넘어서 그것이 행위로서 이루어질 때 비로소 신에 이르는 길이 보여 지고 신 안에 있게 되는 것이라고 말한다. 결국 진리란, 그것이 내포하고 있는 지식이란 실천과, 행위와 함께 하게 될 때 진실한 빛을 발휘하는 것이며 그것이 결국 신에 이르는 길이다. 결국 가장 중요한 것은 논리가 아니라 그 길이 내면적인 변화로써 신적인 삶의 환희와 자유, 즉 해탈로 인도하는 길인가의 여부라고 이야기 하고 있는 것이다.

  사람으로서 겪게 되는 무수한 이율배반적인 사건들, 그 속에서 겪게 되는 딜레마는 개인의 이익과 진리, 보편적인 타당성과의 갈등이라는 점에서 결국 이를 벗어나는 것은 그 모든 집착을 버리는 것이 된다. 다시 집착을 버리는 것은 신의 뜻에 따르는 것, 신의 말씀을 깊게 이해하며 그를 실천하는 방법이다. 신은, 인간의 삶에서 신에게 이르는 길은 결국 ‘신’을 알고 그를 이해하는 것이다. 이를 위한 방법은 오로지 ‘바크티(헌신)이다.

  바크티를 얻을 수 있는 길은 오로지 지식을 아는 것도 아니요, 지식을 알고자 하며 이를 실천함으로써 이루어진다. 바가바드기타에서 이야기하듯 지식은 경전 이전에 마음을 여는 것에서 출발한다. 나의 해탈은, 비판 이전에 열린 자세를 견지하는 것에서 시작하여야 한다. 바가바드기타는, 나에게 이것을 깨닫게 해 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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