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명훈의 <화성과 나>를 읽었다. 얼마 전에 <타워>를 재미있게 읽었던 터라 이것도 기대하면서 읽었는데 역시나 좋았다. 


<화성과 나>는 소설을 구상하게 된 계기가 매우 독특하다. 먼 미래에 인류가 화성으로 이주하게 된다면 어떤 일이 벌어질 지 알아보고 싶다는 연구 의뢰를 받고 화성 연구에 착수한 것이 시작이었다. 그 의뢰는 생각보다 좋은 반응을 얻었지만 의뢰자인 외교부 공무원이 다른 부서로 옮기게 되면서 공식적인 연구 자체는 거기서 끝이 난 듯 하다. 하지만 연구 보고서를 본 과학자들이 강의 요청을 해왔고 그렇게 해서 계속해서 화성 이주에 대한 연구자로서의 호기심을 키워나갈 수 있었다고 한다. 그렇게 해서 나온 것이 바로 이 소설이다. 우리나라 정부 기관이 화성 이주에 관한 연구를 의뢰한다는 것도 놀라웠고, 그걸 SF소설가에게 의뢰했다는 것도 놀라운 일이다. 물론 외교학으로 석사까지 마친 소설가여서 그런 연구 의뢰가 가능했을 것이다.


이 책 안에서 가장 좋았던 작품은 <붉은 행성의 방식>과 <위대한 밥도둑>이다. <붉은 행성의 방식>은 화성에서 벌어진 첫 번째 살인 사건에 대한 이야기다. 어디로도 도망칠 수 없는 화성에서 벌어진 살인사건이라니, 말만 들어도 재미있다. 하지만 이 소설은 살인사건 자체에 대해 깊이 들어가지는 않는다. 살인사건을 어떻게 다룰 것인가, 지구의 법을 따를 것인가 화성만의 법을 만들 것인가, 이런 논의들이 주를 이룬다.


화성에는 정치인이 거의 없기 때문에 이런 문제를 논의할 사람이 별로 없다. 사람들은 정치인이 화성에 가면 전쟁을 벌일 것이라고 생각해서 보내지 않았다고 한다. 조종사, 엔지니어, 의사, 생물학자와 같이 즉각적이고 가시적인 성과를 낼 수 있는 과학자 및 공학자 집단들이 주로 이주 초기에 화성으로 왔다. 하아...이래서 '문송합니다' 소리가 절로 나온다. 지구가 망하고 화성으로 가게 된다면 그 우주선에 날 태워달라고 설득을 해야 하는데 도대체 어떻게 설득할 수 있을까? 웬만한 기술로도 안 되고(미용사도 안 태워준다) 인간의 삶에 획기적으로 도움이 되는 기술을 갖고 있어야 하는데 그런 기술이 하루아침에 나한테 뚝딱 생길리가 없다. 망해가는 지구에서 행복하게 사는 수밖에.


아무튼 화성에 몇 없는(아마도 유일한?) 정치인인 '희나'는 화성에서 벌어진 살인사건에 대해 '상식적으로 처리하자'는 과학자들의 말을 듣고 열이 받아 버린다. 상식적으로 처리하는 게 도대체 뭔데?! 그들은 모든 걸 너무 단순하게 생각하는 경향이 있다. 정치인인 희나의 입장에서는 이건 보통 문제가 아니다. 화성으로 이주한 사람들이 어떤 법을 따라서 살아가야 하는지를 정할 수 있는 아주 중요한 계기였다.


【"어느 상식? 눈에는 눈 이에는 이로 할까? 거주지 내규가 벌거벗겨서 곤장을 치는 거면 받아들일래? 설마 군법을 말하는 건 아니지? 에이, 설마. 그래도 민간 형법이 낫겠지? 그럼 어느 나라 법으로 할까? 당신 나라 법, 아니면 우리 나라 법? 피살자 출신지 법으로 해. 아니면 피의자 출신지로 해? 그런데 이 법들은 관할 지역이 전부 지구 대기권 안이지? 피의자가 이의를 제기하면 어떻게 할래? 판단은 누가 하지? 지구 법정에 원격으로 세울까? 화성에 변호사는 한 명도 없으니까 지구 변호사를 선임하게 할 거지? 단심제로 해, 아니면 삼심제로 해? 항소 기간에 피의자는 어디에 머물러? 집행은? 형이 정해지면 해당 거주지 구성원들이 직접 집행하게 해? 살인이니 똑같이 사형시켜? 30년 형쯤 나오면 어디에 수감해? 전문 교도관을 화성으로 보내나? 감옥은 새로 하나 짓고? 아니면 우주선 태워서 지구로 보낼래? 그러다 중간에 사고 나면 누가 책임지지? 이송 비용은 누가 부담해? 이송 기간은 수감 기간으로 계산하나? 화성 거주 기간 전부를 수감 기간으로 쳐달라고 주장하면 어쩌지?"】


화성은 완전히 다른 행성이고 다른 자연법칙의 지배를 받고 있다. 화성에서 살인을 저지른 범인은 도망가지 못한다. 지구라면 그야말로 '지구끝까지'라도 도망갈텐데 화성에서는 갈 곳이 없다. 인간이 살 수 있도록 만들어진 구역은 (비유적으로)한뼘 정도의 공간밖에 되지 않기에 도망가고 싶어도 갈 수가 없다. 역설적으로 보면, 도망치지도 못 할 정도로 좁은 공간에서 살아가는 인간들 사이에서 도대체 무슨 일이 벌어질지 지구인의 시각에서는 도저히 예측하기가 어렵다. 배명훈 작가는 이 소설에서 '희나'의 예측보다는 좀더 늦게 살인사건이 발생했다고 쓰고 있지만 과연 그럴까. 화성에 이주하자마자 살인이 발생할지도 모를 일이다.


<붉은 행성의 방식>을 굉장히 재미있게 읽었는데 단편이라서 아쉽다. 도대체 범인은 왜 피해자를 살해했는지(물론 책 안에 이유가 나오기는 하는데 그것 말고 좀더 자세하게 알고 싶다!!!), 그런 일을 저지르고 나서 도망갈 곳이 없다는 걸 깨달았을 때 어떤 심정이었는지, 화성에서 벌어진 첫 번째 살인 사건 소식을 듣고 나서 다른 사람들 사이에서 어떠한 심경 변화가 있었는지 등등 알고 싶은 것들이 너무 많다. 이래서 단편소설집은 너무 좋아도 막 심각하게 좋아지지는 않는 것 같다. 궁금한 게 많은데 풀리질 않아서 아쉬운 마음이 크다.


그 다음으로 좋았던 건 <위대한 밥도둑>이다. 뭔가를 먹고 싶다는 생각을 평생토록 해본 적이 없는 사람이 있다. 그는 화성에 이주해서도 별로 힘들지 않다. 다른 사람들이 '이거 먹고 싶다, 저거 먹고 싶다'하는 걸 이해하지 못한다. 평생 뭔가를 먹고 싶어 해본 적이 없는 사람이었으니까. 하지만 그가 어느 순간 지구의 어떤 음식을 강렬하게 갈망하게 되는데.......그후에 과연 어떤 일이 벌어졌을까.


<위대한 밥도둑>은 플롯이나 주제보다도, 주인공이 자신이 먹고싶어하는 음식을 설명하는 그 대사가 너무 좋았다. 이 소설이 해외로 번역되어 나간다면, 외국인들이 저 부분을 보고 당장 저 위대한 밥도둑을 먹어봐야겠다고 생각하지 않을까. 그리고 또 한 번 반성했다. 끼니마다 '오늘 뭐 먹지' 고민하는 것도 귀찮고 나를 위해서건 누구를 위해서건 요리하는 것 자체를 싫어하기 때문에 한동안 포만감 느껴지는 알약 개발을 강력하게 원한다고 떠들고 다닌 적이 있었다. 하지만 화성으로 이주할지도 모르는 미래 인류를 생각한다면, 내가 한 말은 그야말로 있는 자의 배부른 소리에 불과했을 것이다. 화성으로 보내져서 맨날천날 아무 맛도 없지만 생명은 유지하게 해주는 식량들을 먹으면서 살다보면 뭐 먹을지 고민하면서 사는 지구에서의 삶이 얼마나 좋았는지 뼈저리게 반성하게 될지도 모른다. 


이 책을 읽으며 얼마 전에 봤던 영화 <다운사이징>이 떠올랐다. 어떤 과학자가 생명체의 몸을 아주아주 작게 만들 수 있는 기술을 개발한다. 그 과학자는 인간의 몸을 아주아주 작게 만들어서 환경 문제를 해결하자고 주장한다. 거기에 뜻을 같이 하는 사람들은 기꺼이 다운사이징 수술을 받는다. 사람의 몸이 작아지니까 환경 문제뿐 아니라 경제적인 문제도 자연스럽게 해결된다. 몸이 작아졌으니까 한달 식비도 엄청나게 줄어들고, 당연히 엄청나게 작은 집에서 살아도 되니까 집세 걱정도 완전히 사라진다.(작은 집이라고 해도 다운사이징한 사람들에게는 대궐 같은 집이다.) 다운사이징 수술은 지구의 환경 문제와 개인의 경제적인 문제를 일거에 해결할 수 있는 획기적인 해결책처럼 보였다.


하지만 그 사회에서 다운사이징 수술을 받은 사람은 5%에 불과하다. 집 문제, 돈 문제 한꺼번에 해결이 되는데도 그 수술을 선뜻 받겠다고 결정한 사람들이 극극극소수에 불과했다는 뜻이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아무리 대궐 같은 집에서 살게 해준다고 해도, 너무나도 작고 연약한 존재가 되는 것에 겁을 먹는다. 게다가 원래 크기의 인간들은 다운사이징 수술을 한 사람들을 비난하기도 한다. 그렇게 작아지는 수술을 받고 세금도 덜 낼 거라면 투표권도 줄여야 하는 것 아니냐는 말들을 한다. 영화에서는 깊게 다루지 않지만 다운사이징 인류와 非다운사이징 인류의 갈등은 불보듯 뻔한 일이었다.


<화성과 나>에서도 지구에 사는 사람과 화성으로 이주해온 사람들 사이에 생기는 미묘한 알력 다툼이 등장한다. 지구에서 화성으로 우주선을 보낼 때마다 매번 더 힘 있는 사람을 보내서 화성에 대한 권력을 유지하고 싶어한다는 것이다. 그런데 그렇게 화성으로 온 권력자들은 처음에는 화성 사람들과 섞이지 않으려고 하지만, 다음 번 우주선이 올 쯤이 되면 갑자기 화성 친화적으로 바뀐다. 그 우주선에는 자신보다 더 권력이 센 사람이 타고 있을 것이기 때문에 그 힘 있는 지구인에게 지지 않으려면 화성인들끼리 대동단결 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다운사이징 수술이든, 화성으로의 이주든, 결국은 인간 집단 간의 갈등이 문제다. 인간이 '화성'에 가서 산다는 게 중요한 게 아니라, '인간'이 화성에 가서 산다는 것이 중요하다. 화성이 문제가 아니라 결국은 인간에 방점이 찍히게 된다. 기후 문제로 인해 인류의 앞날이 계속해서 힘들어질 거라는 우울한 전망이 곳곳에서 들려오는 요즘, 화성으로 가거나 다운사이징 수술을 받아야 하는 순간이 온다면 나는 과연 선뜻 나설 수 있을까. 이런 소설을 보고 이런 영화를 볼수록 쉽사리 답하기가 어려워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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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Book] 뱀이 깨어나는 마을
샤론 볼턴 지음, 김진석 옮김 / 엘릭시르 / 2019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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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인공 캐릭터가 사람과 접촉하는 걸 싫어하면서도 또 이웃이 부르면 달려가고, 굉장히 용기있다가도 또 급소심해지는 성격인데 그게 엄청 매력적이었다. 꽤 두꺼운 책인데, 클래라를 응원하면서 끝까지 읽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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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Book] 뱀이 깨어나는 마을
샤론 볼턴 지음, 김진석 옮김 / 엘릭시르 / 2019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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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을 어디서 알게 됐더라. 김혜리 기자가 진행하는 팟빵에서 정세랑 작가가 책 세 권을 추천한 적이 있었는데 이 책이 그 중 한 권이었다. 배명훈의 <화성과 나>, 타야리 존스의 <미국식 결혼>, 그리고 이 책이었다. 그때 이 책을 보관함에 담아두었다가 이북 적립금을 모아모아 구매했다.


주인공은 수의사인 클래라 베닝이다. 수의사 하면 동물병원에 앉아서 개나 고양이 같은 반려동물을 고치는 사람을 떠올리기 쉬운데 클래라는 야생동물 전문병원에서 일하는 수의사여서 내가 일반적으로 생각해오던 동물병원 수의사랑은 활동 범위가 완전히 달랐다. 야생 올빼미 새끼들을 집으로 데려가서 돌보기도 하고, 야생 토끼나 오소리를 수술하기도 한다. 게다가 뱀까지 잡아야 한다. 극한직업이 따로 없다.


클래라가 사는 마을 곳곳에서 갑자기 뱀이 출몰한다. 근처에 살던 여성이 어느날 갑자기 클래라에게 전화를 걸어 아기 방에 뱀이 있으니 빨리 좀 와달라고 말한다. '뱀 모양 인형인데 착각한 것 아닌가' 하는 생각을 하며 그 집에 도착했는데 진짜 자고 있는 아기 위에 뱀이 똬리를 틀고 있다. 게다가 아기가 꿈틀꿈틀 하면서 잠에서 깨려고 한다. 이대로 아기가 일어나서 울기 시작하면 놀란 뱀이 아기에게 무슨 짓을 할지 모르는 일촉즉발의 상황. 클래라는 가죽 장갑을 끼고 뱀을 생포하고 아기를 무사히 구출해낸다. 다행히 클래라는 뱀에 대해 어느 정도 지식이 있다. 한때 도마뱀을 공부하면서 뱀도 같이 공부한 적이 있기 때문이다.


마을에 더 많은 뱀들이 출몰하면서 클래라가 가진 파충류 지식이 빛을 발한다. 누군가가 클래라에게 동물원 같은 곳에서 일하는 게 낫지 않겠냐면서, 왜 파충류 전문가가 야생동물 전문병원에 있는 거냐고 묻는다. 클래라가 야생동물 병원을 선호하는 이유가 있다. 그녀의 얼굴 한쪽에는 흉터가 있다. 그래서 클래라는 사람들과의 접촉을 극도로 꺼리고 이웃의 식사 초대를 모두 쳐낸다. 하지만 마을에 나타나는 뱀 때문에 클래라는 어쩔 수 없이 동네 사람들과 계속 엮이게 되고 그 과정에서 불편함을 느낀다.


【내가 고슴도치, 토끼를 돌보는 일을 선택한 이유가 정말 궁금할까? 야생동물들에게는 뻔뻔하거나 호의를 품은 주인이 없으며, 수많은 방문객이 야생동물을 멍하니 구경하러 오지 않았다. 내게는 야생동물들을 돌보는 일이 사람과의 접촉을 피하도록 보장해주는 가장 쉬운 방법이었다. 이렇듯 사람들과의 관계가 무척 서투르니까.】


【내가 아는 사실은 이 영국 마을의 자연 질서가 완전히 어긋나버렸다는 점이었다. 조용한 영국 마을에서 사람들이 뱀에 물려 죽는 경우는 없었다. 잠에서 깼을 때 열대 지역의 독사를 발견하는 일도 있을 수 없는 경우였다.】


솔직히 이웃에 뱀이 나타나거나 말거나 신경 끄고 살면 그만이지만 그래도 클래라는 관심을 쏟는다. 직업적인 소명일 수도 있는데, 사실 나타나는 뱀들이 너무나도 범상치 않아서 신경 끄고 살기가 어렵다. 가끔씩 출몰하는 영국 풀뱀들이라면 무시하고 지나칠 수도 있었으리라. 하지만 세계에서 가장 강력한 맹독을 가진 타이판 뱀까지 출몰하는 지경에 이르자 도저히 신경을 끄고 살 수가 없다. 타이판은 파푸아뉴기니나 호주 같은 더운 지역에서 서식하는 뱀인데 그게 어떻게 영국 가정집에 나타나는지 클래라는 이해할 수 없다. 


사건은 뱀에서 시작하여 더 큰 스토리로 이어진다. 클래라는 처음엔 이 뱀들이 어떻게 영국에 들어왔는지, 누가 도대체 이 뱀들을 가정집에 풀어놓는지 궁금해서 조사를 벌이다가 이 사건에 아주 깊숙이 관여하게 된다. 그 과정에서 아주 오랫동안 숨겨져 있었던 이 마을들의 비밀이 밝혀진다.


처음 이 소설을 읽기 시작했을 때, 수의사가 주인공이라는 사실이 신선했다. 경찰이나 탐정이 아닌데도 사건 해결을 할 수 있을지 궁금하기도 했다. 그런데 사실 뱀에 대해서라면 경찰도 형사도 무쓸모다. 뱀을 다루는 일은 매우 어려운 일이라서 훈련된 파충류 전문가가 아니라면 함부로 나설 수 없다. 클래라는 자신이 대단한 파충류 전문가는 아니라고 말하며 겸손을 부리지만, 무시무시한 독사를 만났는데도 결코 물러서지 않는 용기를 지녔다. 맹독을 가진 타이판을 보고서 자신이 처리하겠다고 나서는 장면에서 클래라에게 반했다. 함께 있던 남성이 다른 전문가가 올 때까지 기다리자고 클래라를 설득하는데, 클래라는 단호하게 거절한다. 그 사이에 이 뱀이 집 안의 어떤 구멍들을 통해 빠져나갈 가능성이 있다면서 지금 자신이 잡아야만 한다고 말한다. 진짜 멋져.


그렇게 멋지게 타이판 뱀을 생포해놓고서는 영국에서 가장 유명한 뱀 전문가에게 자신이 잡은 것을 보여주러 가는 길에는 또 소심해진다.


【노스는 덮개를 살짝 열어 틈을 벌렸다. 나는 숨을 멈췄다. 만약 저 뱀이 전혀 위험하지 않은 뱀이라면 어떡하지? 무려 숀 노스가 전혀 위험하지 않은 애완용 뱀 한 마리를 보려고 지친 몸을 이끌고 시차에 시달리며 브리스톨까지 온 것이라면, 멍청한 나는 무슨 낯으로 그를 본단 말인가?】


주인공이 이렇게 멋짐과 소심함을 오가는 캐릭터여서 이 소설이 한층 더 재밌었다. 사람들이 자신의 얼굴 흉터를 보고 외모보다 내면의 아름다움이 더 중요한 거라고 말할 때, '외모에 결함이 있으면 내면이 반드시 아름다워야 하는 거냐고' 반문하는 장면은 정말 통쾌했다. 


【많은 사람들은 평범한 미래를 이야기하며 나를 격려하려 했다. '사람들이 전부 외모에만 집착하지는 않는단다, 클래라. 너의 내면의 아름다움을 볼 줄 아는 누군가를 만나게 될 거야' 마치 볼썽사나운 외모를 가진 사람은 저절로 더 좋은 내면을 지니게 된다는 듯, 아니면 외모의 결함을 내면의 뭔가로 당연히 보충해야 한다는 듯이 말했다.


주변 인간들에게 마음의 문을 걸어 잠근 은둔형 캐릭터가 프로페셔널하게 활약하는 이야기가 정말 좋았고 뱀에 대한 여러 가지 지식들(?)도 얻을 수 있어서 좋았다. 뱀은 무조건 징그럽다고만 생각했는데 생각보다 뱀을 추종하고 숭배하는 사람들이 많다는 걸 알게 되어서 깜놀했다. 그리고 뱀은 끈적거리지 않는다고 한다. 오히려 실크처럼 부드럽다고. 으아아아악, 상상하지 말자. 상상하지 말자. 살면서 읽게 될 뱀 이야기는 이 책에서 다 읽은 것 같다. 더이상 뱀은 그만(ㅠㅠ) 샤론 볼턴의 다른 작품들도 기대가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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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Book] 풀잎 하프 트루먼 커포티 선집 2
트루먼 커포티 지음, 박현주 옮김 / 시공사 / 2023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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깨어지고 부서질 듯 아슬하면서도 반짝거리는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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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Book] 프라이드 그린 토마토 민음사 모던 클래식 39
패니 플래그 지음, 김후자 옮김 / 민음사 / 2024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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패니 플래그의 <프라이드 그린 토마토>를 읽었다. 동명의 영화가 있는 것으로 알고 있는데 영화는 아직 보지 않았고 책으로 먼저 읽게 되었다. 한동안 절판이었던 모양인데 최근에 새 표지를 입고 다시 나왔다. 전자책도 나왔길래 냉큼 구입했다.


이 책은 1980년대, 에벌린과 니니 스레드굿 부인의 대화로 시작이 된다. 에벌린은 시어머니를 만나기 위해 로즈 테라스 요양원에 왔다가 니니를 만나게 된다. 니니가 에벌린에게 자신의 이야기를 들려주기 시작하면서 둘의 관계가 시작된다. 에벌린은 처음에 니니의 이야기에 큰 흥미를 보이지 않았는데 자신도 모르게 서서히 니니의 이야기에 빠져들게 된다.


니니가 해주는 이야기가 바로 이 소설의 핵심이라고 할 수 있는 휘슬스톱 카페 사람들의 이야기다. 이지 스레드굿과 루스 제이미슨이 운영하는 그 카페는 기찻길 부근에 위치하여 오고 가는 손님들이 많았다. 이지가 그 카페를 열었을 때는 대공황이 미국을 휩쓸던 시절이었다. 가난하고 배가 고픈 떠돌이 손님들이 휘슬스톱 카페로 찾아와 먹을 것을 주면 허드렛일을 해서 갚겠다고 말하기도 했는데, 이지는 그런 손님들을 단 한 번도 문전박대하지 않았다. 흑인이 음식을 팔아달라고 찾아와도 무시하지 않았다. 그 시절, 흑인은 백인과 함께 어울릴 수 없었다. 흑인은 철저하게 고립되고 분리되어 백인들의 눈에 띄지 않는 곳에서만 활동해야 했다. 이지는 흑인들을 위해 뒷문에 메뉴판을 새로 달았다. 그들을 앞문으로 들여 테이블 위에 앉혀 음식을 먹이고 싶지만 그랬다가는 자신들은 물론 그 흑인들마저 위험해지는 상황에 처해질 수 있어서 할 수 없이 뒷문으로 음식을 팔게 된 것이다.


작은 마을을 배경으로 한 소설이라고 해서 그저 소소하고 일상적인 일들로만 채워지진 않는다. 시대가 시대이니만큼 비일상적인 일들이 일상적으로 벌어진다. 철길에서 놀다가 목숨을 잃거나 팔을 잃기도 하고, 2차대전에 참전하여 비극적인 사건으로 생을 마감하기도 한다. KKK단이 돌아다니면서 흑인들을 위협하고는 했고, 남편이 부인을 때려도 아무 일이 벌어지지 않는 시절이었다. 이지와 루스를 비롯한 휘슬스톱 카페 사람들은 그 시절을 그저 무기력하게 흘려보내지 않았다. 개인이 사회 전체를 뒤바꿀 수는 없지만 적어도 자신의 주위에 있는 몇 사람만은 구할 수 있다는 것을, 이 소설 주인공들은 알고 있었다. 이지와 루스, 그리고 십시와 온젤, 빅조지 가족은 각자가 할 수 있는 일을 하면서 때론 잔인하고, 때론 따뜻했던 그 시절을 헤쳐나간다.


작가는 미스터리한 사건 두 가지를 던져주고 끝까지 궁금증을 유발한다. 하나는 대공황 시절 기차에서 물건을 훔쳐 흑인들이 가져갈 수 있도록 길바닥이 던져주던 도둑 ‘레일로드 빌’이 누군인가 하는 것, 그리고 또 하나는 이 마을에서 벌어진 살인사건의 범인을 찾는 것이다. 특히 살인사건과 관련된 진실을 알아가는 과정에서는 괴이하고 으스스한 분위기마저 풍기니...이 소설을 작은 마을에서 벌어지는 소소하고 감동적인 이야기들이라고만 말하기는 어려울 듯 하다.


이 소설에서 느껴지는 주요한 정서 중 하나는 ‘쓸쓸함’이다. 1980년대, 요양원에 들어와있는 니니 스레드굿이 과거를 회상하면서 스토리가 진행되기 때문에 아무래도 이 책을 읽는 독자들은 휘슬스톱 카페가 존재했던 과거 그 시절을 추억할 수밖에 없게 된다. 니니의 이야기를 듣는 에벌린 역시 휘슬스톱 카페 사람들을 한 번도 본 적이 없는데도 그들을 마치 친구처럼 느낀다. 그들이 살았던 시대는 비록 역사가 개인에게 잔인했을지언정 개인은 서로에게 친절하려고 노력했던 시대처럼 느껴진다. 그래서 에벌린은 자신이 살아가는 1980년대가 짜증이 나기 시작한다. 정숙한 여자 프레임에 갇혀서 정작 자신의 인생은 제대로 살아보지도 못했다는 생각을 하기도 하고, 가족들은 전부 남처럼 느껴지고, 마트에서 웬 양아치 청년에게 욕을 먹기도 한다. 에벌린은, 도대체 세상이 왜 이따위로 망가져버린 건지 모르겠다며 분통을 터트린다.


‘과거와 현재’의 대결은 불공평한 싸움이다. 과거는 언제나 힘이 세기 때문이다. 고대 이집트 파피루스에도 '요즘 것들은 예의가 없고 어른을 공경할 줄 모른다'는 말이 적혀있다는 이야기가 있다. 파피루스에 진짜 그런 내용이 있었는지 진위 여부는 모르겠으나, 중요한 것은 '현재는 거지 같은 것이며, 요즘 애들은 언제나 예의가 없고, 세상은 계속해서 망가져 가고 있다'는 인식이다. 돌아갈 수 없는 시절을 가장 좋았던 시절이라고 규정해버리면 나머지 삶은 가치를 잃어버리게 된다. 그런 후에 남는 것은 '쓸쓸함'이라는 감정 뿐이다. 이 소설을 읽으면서도 그런 함정에 빠질 뻔했던 순간들이 몇 번 있었다. 과거는 이렇게나 아름다운데 현재는 왜 이렇게 거지 같은 거람?!!!


하지만 이 소설은 지나간 시절에 대해 추억하면서도 마냥 쓸쓸하게만 끝나지는 않는다. 1980년대를 살아가는 에벌린 카우치라는 인물 덕분이다. 에벌린은 니니의 이야기를 들으면서 서서히 변해간다. 비록 현재를 구성하는 그 모든 요소들이 짜증이 나긴 하지만, 에벌린은 자신에게 남겨진 나머지 삶을 어떻게 살아야할지 고민하고 자신이 할 수 있는 일들을 하기 시작한다. 니니로 인해 변화하게 되는 에벌린 카우치 덕분에 이 소설은 과거에만 머무르지 않고 한 단계 도약하게 된다. 소설은 계속해서 과거의 휘슬스톱 사람들 이야기를 하고 있는데, 역설적이게도 ‘가장 소중한 것은 현재가 아닐까'라는 생각을 하게 만드는 것이다.


【"에벌린 카우치, 무슨 말을 그렇게 하우. 당신은 아직 젊어요. 마흔여덟 살이면 아직 아기일뿐이라고요! 앞으로 살아갈 날이 더 많잖아요! 메리 케이는 나이를 상관 안 해요. 그녀 역시 햇병아리는 아니거든요. 자, 내가 에벌린이라면, 그리고 에벌린처럼 피부가 곱고 에벌린 정도 나이라면, 캐딜락에 도전해 보겠어요. 물론 운전면허를 따야하겠지만 어쨌든 도전은 해 볼 거예요. 생각해 봐요, 에벌린. 에벌린이 나처럼 오래 산다면 앞으로 살 날이 37년이나 남아 있어요."】

 

【에벌린은 스레드굿 부인에게 이곳에서 외로움을 느낀 적이 없느냐고 물었다.

"음, 있어요, 가끔 느껴요. 가까운 사람들은 모두 떠나버렸으니....가끔 교회 사람들이 보러오긴 하지만 그저 안부 인사나 나누고 가 버리죠. 인생이란 게 다 그런 거니까. 만나고 작별하는 거죠. 가끔 클리오와 어린 아들의 사진을 보면서 지난 일들을 그려 본답니다. 지금쯤 무얼 하고 있을까 생각하면서."

스레드굿 부인은 에벌린을 향해 웃어 보이며 말을 이었다.

"그것이 지금 내가 살아가는 힘이에요,에벌린. 꿈, 내가 보낸 시절에 대한 꿈이죠."】


두꺼운 책인데도 흡입력이 굉장해서 이틀 동안 쉬지 않고 읽었다. 다 읽고 나서 여행 버킷 리스트에 '미국 남부에 가서 프라이드 그린 토마토 먹기'를 추가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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희선 2024-04-08 02:1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는 이 책 안 읽어봤지만, 여러 사람이 이 책 좋다고 하는 말은 본 듯합니다 어려운 시절에 사람은 마음을 나누고 살았네요 한국 사람도 예전이 좋았어 하는 말 하기도 하네요 좋았던 때도 있지만 그런 때만 있었던 건 아닐 텐데... 정말 지나간 날이 더 힘이 센가 봅니다

좋은 날이 있었던 걸 기억하고 지금을 살아야죠 지금도 좋게 만들어가면 되겠습니다 그게 쉬운 건 아니겠지만...


희선

Laika 2024-04-13 15:37   좋아요 1 | URL
맞아요, 좋은 날을 기억하고 현재를 살아야죠! 이 책을 보고나면 그런 마음가짐이 드는 것 같아요...^^책을 보고나서 영화도 봤는데 책이 훨씬 좋았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