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손톱이 자라날 때 ㅣ 문학동네 청소년 4
방미진 지음 / 문학동네 / 2010년 3월
평점 :
실은, 난 밉살스러운 아이였어요. 중학교 입학 후, 구 교복 시대의 마지막 세대에 검정색 교복, 나팔 치마, 커다랗고 어깨를 덮는 하얀 칼라를 달고 네모난 가방을 들고 다녔지요. 양갈래로 땋아내린 머리에 앙 다문 입술. 그게 나였어요. 아, 그래도 사진은 칼라였답니다. 버스를 타고 학교를 오가면서 내 몸에 닿는 사람들, 눈에 거치는 사람들, 내 주위에 숨쉬는 것들이 다 싫고, 밉고, ... 그러면서 혼자있기는 무서웠어요.
점심시간이면 후다닥 점심을 먼저 먹고 고등학교 언니들이 공부하는 학교 도서관으로 뛰어가서 앉았더랬지요. 그 틈에 고고하게 앉아서 앙드레 지드를 읽는거예요. 등 뒤에 꽂히는 언니들의 눈총이 따갑지요. 쟤, 뭐냐?
어느덧 나도 그 언니들 처럼 자라서 고등학생, 또 대학생, 어른이 되었어요. 그리고 내 큰 아이의 입술 위로 거뭇 거뭇한 그림자가 생겼어요. 아직은 어벙한 교복을 입고 등교길에 나서는 내 아이의 모습 위로 그 옛날 고집불통 제 모습이 떠올라요. 그 땐, 나도 그랬다, 고 아이와 말을 하려고 보면 그 아이의 눈동자에 언뜻 언뜻 분노가, 아니 비웃음 같은 게 비치는 것 같아요. 그땐 입을 다물고 문을 닫아야지요.
여기 이 책 속에서 만난 아이들도 다르지 않아요. 내 속을 들킨 것 같아서 흠칫 놀랐을 뿐이에요. 여고괴담이 묻어나는 하얀 벽, 그저 벽처럼 남의 말을 들어주고, 선생님이나 아이들의 관심에서는 벗어나 있던 아이들이 사라졌다가 뒤늦게 그 존재를 느끼는 민희를 그 속으로 초대하지요. "너도 이제 혼자구나." 등을 돌려 눈을 맞추기가 이리 힘들었을까요. 왜 우리는 계속 견주고 미워하고 무서워했을까요. 다 똑같은 마음이었을텐데.
쌍둥이로 자라면서 언니에게 한없는 질투를 느꼈던 지영이는, 주영이가 되면 행복할거라고 믿었어요. 엄마와 아빠를 다 보내놓고 삼촌과 선생님들도 속이면서, "난 네가 되고" 만 이루어 진다면, 주영이는 없어지겠지만 지영이도 사라지는 걸 그 아이는 알까요?
경제적으로 무능한 부모와 함께 반지하 연립주택으로 이사하면서 만나는 곰팡이는 눅눅한 벽 뿐이 아니라 소녀의 아빠의 팍팍한 목, 동생의 여린 살, 엄마의 얼굴에도 번지고 있지요. 어디로 도망쳐도 할 수 없어요. 그저 내가 붉은 곰팡이 처럼 악착스레 살아낼 수 밖에요. 아마 주인공 아이도 어른이 된 다음에, 엄마처럼 곰팡이 기미를 얼굴에 쓰고 목소리를 높일지도 몰라요. 너무한가요? 하지만 도망갈 수가 없어요. 영화 '링'의 복수처럼 저주는 계속되는 기분이에요.
얄미운 동급생의 얼굴을 손톱으로 내리 쳐서 생채기를 내고, 두 손을 쫘악 펴서 내 힘을 보여주고 싶을 때가, 아, 저에게도 있었다구요! 다만 나는 얄궂은 책상만 볼펜으로 콩콩 찍어서 곰보를 만들었지요. 아이들이 내 뱉는 욕설들은 둥둥 떠다니면서 전염이 되나봐요. 욕을 안 쓰면 욕을 먹는거야. 그게 싫으면 욕을 뱉고 괴물이 되어야해. 손톱이 자라날 때 괴물로 변하는 유지를 보면서 내내 마음이 불편했어요.
괴물이 아니라면 아주 독살스러운 가짜가 되는 방법도 있어요. 나 혼자라도 나에게 둘! 하면서 손가락을 고누(다) 고 그 일을 해 내는 거예요. 그럼 난 새롭게 될거예요. 지금의 나는 다 필요없으니 아무리 아프더라도 잡아 먹히고 새롭게 태어나는는 거예요. 이런게 사춘기인가요? 진짜의 흐릿하고 멍한 상태 따위는 다 없어지고, 남들처럼 뻔뻔해지고 싶어요.
진짜? 진짜 그럴까요? 어른이라고 다 아는것 처럼 말하지 말라고요? 다섯 편의 이야기를 다시 열 다섯 소녀로 돌아가서 읽었어요. 단순한 이야기 속에서 아이들과 그 아이들이 생생하게 겪는 공포와 환상이 펼쳐졌어요. 아이들에게는 학교, 선생님, 집, 친구, 부모, 공부, 언니나 동생, 모두 다 공포였어요. 슬프게도 이야기들 속에 믿을만한 어른은 단 한명도 없었어요. 그래서 더 진짜 열 다섯에 겪었던 내 이야기 같았어요. 아이들이 좀 편한 마음을 먹었으면 좋겠는데, 해 줄 말이 없어요. 내가 어떻게 견뎌왔는지, 기억이 하나도 안 나요. 나도 이미 진짜를 잡아 먹어버렸나봐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