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천염천 - 거센 비 내리고, 뜨거운 해 뜨고
무라카미 하루키 지음, 서영 옮김 / 명상 / 2003년 10월
평점 :
절판


언젠가는 소피아 성당을 꼭 찾아 가리라, 고 생각만 하고 있다. 하지만 터키는 그저 먼곳이니, 아테네의 박물관을 꿈의 여행지 목록에서 지우지 않는 것과 마찬가지. 언젠간 가보고 싶지만, 쉽게 가지 못할 곳. 

하루키는 그런 먼 두 곳 (그 두 나라에서도 관광객들이 찾을듯 싶지 않은 곳들만을) 의 힘든 일정을 덤덤하게 적어내려갔다. 전에 <먼 북소리>와는 사뭇 다른 느낌인건 왜일까. 세상을 등지고 척박한 산 등성이에 자리잡은 수도원들을 찾아가서 갑작스런 비에 젖은 몸으로 (하루키 표현에 따르자면, 종교에 귀의하기 일보 직전인 상태에서) 찡한 우조를 마시고, 곰팡이가 핀 마른 빵을 물에 불려서 씹고, 흙바람이는 뜨거운 터키의 길 가에서는 뜨거운 차이를 들이켰다.  

역자의 후기에도 언급되는 것처럼 하루키는 많은이들에게 젊은날의 책이다. 하지만 이번 '고행기'는 그저 젊은 날의 쿨함으로 지나기엔 아까운 무언가가 남는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손톱이 자라날 때 문학동네 청소년 4
방미진 지음 / 문학동네 / 2010년 3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실은, 난 밉살스러운 아이였어요. 중학교 입학 후, 구 교복 시대의 마지막 세대에  검정색 교복, 나팔 치마, 커다랗고 어깨를 덮는 하얀 칼라를 달고 네모난 가방을 들고 다녔지요. 양갈래로 땋아내린 머리에 앙 다문 입술. 그게 나였어요. 아, 그래도 사진은 칼라였답니다.  버스를 타고 학교를 오가면서 내 몸에 닿는 사람들, 눈에 거치는 사람들, 내 주위에 숨쉬는 것들이 다 싫고, 밉고, ... 그러면서 혼자있기는 무서웠어요.  

점심시간이면 후다닥 점심을 먼저 먹고 고등학교 언니들이 공부하는 학교 도서관으로 뛰어가서 앉았더랬지요. 그 틈에 고고하게 앉아서 앙드레 지드를 읽는거예요. 등 뒤에 꽂히는 언니들의 눈총이 따갑지요. 쟤, 뭐냐?  

어느덧 나도 그 언니들 처럼 자라서 고등학생, 또 대학생, 어른이 되었어요. 그리고 내 큰 아이의 입술 위로 거뭇 거뭇한 그림자가 생겼어요. 아직은 어벙한 교복을 입고 등교길에 나서는 내 아이의 모습 위로 그 옛날 고집불통 제 모습이 떠올라요.  그 땐, 나도 그랬다, 고 아이와 말을 하려고 보면 그 아이의 눈동자에 언뜻 언뜻 분노가, 아니 비웃음 같은 게 비치는 것 같아요. 그땐 입을 다물고 문을 닫아야지요.  

여기 이 책 속에서 만난 아이들도 다르지 않아요. 내 속을 들킨 것 같아서 흠칫 놀랐을 뿐이에요. 여고괴담이 묻어나는 하얀 벽, 그저 벽처럼 남의 말을 들어주고, 선생님이나 아이들의 관심에서는 벗어나 있던 아이들이 사라졌다가 뒤늦게 그 존재를 느끼는 민희를 그 속으로 초대하지요. "너도 이제 혼자구나." 등을 돌려 눈을 맞추기가 이리 힘들었을까요. 왜 우리는 계속 견주고 미워하고 무서워했을까요. 다 똑같은 마음이었을텐데.
 
쌍둥이로 자라면서 언니에게 한없는 질투를 느꼈던 지영이는, 주영이가 되면 행복할거라고 믿었어요. 엄마와 아빠를 다 보내놓고 삼촌과 선생님들도 속이면서, "난 네가 되고" 만 이루어 진다면, 주영이는 없어지겠지만 지영이도 사라지는 걸 그 아이는 알까요?  

경제적으로 무능한 부모와 함께 반지하 연립주택으로 이사하면서 만나는 곰팡이는 눅눅한 벽 뿐이 아니라 소녀의 아빠의 팍팍한 목, 동생의 여린 살, 엄마의 얼굴에도 번지고 있지요. 어디로 도망쳐도 할 수 없어요. 그저 내가 붉은 곰팡이 처럼 악착스레 살아낼 수 밖에요. 아마 주인공 아이도 어른이 된 다음에, 엄마처럼 곰팡이 기미를 얼굴에 쓰고 목소리를 높일지도 몰라요. 너무한가요? 하지만  도망갈 수가 없어요. 영화 '링'의 복수처럼 저주는 계속되는 기분이에요.  

얄미운 동급생의 얼굴을 손톱으로 내리 쳐서 생채기를 내고, 두 손을 쫘악 펴서 내 힘을 보여주고 싶을 때가, 아, 저에게도 있었다구요! 다만 나는 얄궂은 책상만 볼펜으로 콩콩 찍어서 곰보를 만들었지요. 아이들이 내 뱉는 욕설들은 둥둥 떠다니면서 전염이 되나봐요. 욕을 안 쓰면 욕을 먹는거야. 그게 싫으면 욕을 뱉고 괴물이 되어야해. 손톱이 자라날 때 괴물로 변하는 유지를 보면서 내내 마음이 불편했어요.  

괴물이 아니라면 아주 독살스러운 가짜가 되는 방법도 있어요. 나 혼자라도 나에게 둘! 하면서 손가락을 고누(다) 고 그 일을 해 내는 거예요. 그럼 난 새롭게 될거예요. 지금의 나는 다 필요없으니 아무리 아프더라도 잡아 먹히고 새롭게 태어나는는 거예요. 이런게 사춘기인가요? 진짜의 흐릿하고 멍한 상태 따위는 다 없어지고, 남들처럼 뻔뻔해지고 싶어요.  

진짜? 진짜 그럴까요? 어른이라고 다 아는것 처럼 말하지 말라고요? 다섯 편의 이야기를 다시 열 다섯 소녀로 돌아가서 읽었어요. 단순한 이야기 속에서 아이들과 그 아이들이 생생하게 겪는 공포와 환상이 펼쳐졌어요. 아이들에게는 학교, 선생님, 집, 친구, 부모, 공부, 언니나 동생, 모두 다 공포였어요. 슬프게도 이야기들 속에 믿을만한 어른은 단 한명도 없었어요. 그래서 더 진짜 열 다섯에 겪었던 내 이야기 같았어요. 아이들이 좀 편한 마음을 먹었으면 좋겠는데, 해 줄 말이 없어요. 내가 어떻게 견뎌왔는지, 기억이 하나도 안 나요. 나도 이미 진짜를 잡아 먹어버렸나봐요.

댓글(0) 먼댓글(0) 좋아요(2)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내가 좋아하는 동물원 - 세밀화로 그린 어린이 동물원 도감 세밀화로 그린 어린이 자연 관찰
유현미 글, 이우만 그림 / 호박꽃 / 2008년 4월
절판


기린은 늘 서서 지내요. 다리가 튼튼하지요. 잠도 서서 자고, 새끼도 선 채로 낳아요. 새끼는 태어날 때 2m 아래 땅바닥으로 쿵 하고 떨어지지만 괜찮아요. 20분이 지나면 일어나서 어미젖을 빨아 먹고 돌아다녀요. -42쪽

[콘도르는] 먹을 것이 없으면 며칠씩 굶어요. 그러다가 먹이가 생기면 엄청 먹어대요. 너무 먹어서 날아오르지 못할 때도 있어요. -55쪽

[코뿔소는] 뿔로 똥을 쌓아 올려서 자기 땅이라고 표시하기도 해요. 동물원에서도 똥을 꼭 한 곳에 눠요. 깨끗이 치워도 다음날 또 같은 자리에 와서 눈대요. -36쪽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서재 결혼 시키기
앤 패디먼 지음, 정영목 옮김 / 지호 / 2001년 12월
구판절판


18세기의 잉크스탠드 - 깃촉펜 보관대, 펜나이프, 잉크통, 가루 상자(건조용 가루가 담겨 있었다). 풀 상자(봉함지를 붙이는 풀이 담겨 있었다) - 는 글쓰기라는 물리적 행위의 기념물이었다. 그러나 잉크스탠드가 옆에 없으면 임기응변으로 대처할 수도 있었다. 어느 날 월터 스콧경이 사냥을 나갔는데, 아침 내내 쓰려고 했던 문장이 갑자기 머리에 들어왔다. 그는 그 문장이 희미해 지기 전에 까마귀를 쏴서 깃털 하나를 뽑은 다음 끝을 뾰족하게 갈아 까마귀 피를 묻혀 그 문장을 붙들어 놓았다. -131쪽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갈팡질팡하다가 내 이럴 줄 알았지
이기호 지음 / 문학동네 / 2006년 10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이기호의 이름은 익히 들어왔지만 근간 <사과는 잘해요>에서 '사과'가 과일이 아니라는 것 말고는 그의 작품 세계나 문체에 대해서 아는바가 없었다. 그의 작중 인물들 마냥, 나도 미안하게도 (신형철의 비평대로) 그에대한 개념이 없었다.  

그래서 '원주통신'을 읽으면서 그의 발랄함과 순진무구함, 그리고 난감함에 피식 웃었다. 그런데 '나쁜 소설'과 '수인'에서는 가벼워보이던 이기호의 다른면, 소설가와 문학, 좀더 거창하게 '창작론' 같은 것이 느껴졌다. 하지만 좀 황당한 이야기들을 내 입맛에 맞게하자고 그 속에 담긴 의미를 따지기도 부질없다. 이기호는 내가 너무 심각한 얼굴을 하고 앉자있자면, 멀뚱멀뚱 쳐다볼 것만 같다. '할머니, 이젠 걱정 마세요'에서 보인 그의 모습이 어쩜 가장 편안할지도 모르겠다. 내가 듣고 싶고, 읽고 싶은 것만 알아서 쉽게 받아 먹기. 속 편하게. 루저면 어떻고, 위너면 어때.  

책 말미에 실린 신형철의 평론은 정말, 다시 한 번, 아름답다. 어쩜 내가 알쏭달쏭했던 것들을 이렇게 딱 꼬집어 쓸 수 있는지. 그의 "육체파 소설가"라는 표현에 무릎을 탁 칠 수 밖에 없다. 그리고 상상해 본다. 광화문 교보 (곧 내부 수리로 문을 닫는다지) 후문을 곡괭이로 내리 찍는 이기호를.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