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78년 늦가을, 파죽지세로 전국을 평정 중인 오다 노부나가에 대항해 지금의 오사카 근처의 아리오카성에서 아라키 무라시게가 반역을 일으킨다. 하지만 동맹을 약속했던 인근 성들의 성주들은 하나둘 오다측에 투항한다. 무라시게는 오다 측의 전령으로 온 구로다 칸베에를 죽이거나 돌려보내는 대신 지하 감옥에 가두어버린다.
그 겨울, 봄, 여름, 가을, 한 해에 걸치도록 믿었던 반-오다 쪽 모리의 원군은 오지 않고 전세는 불안하다. 성에 모인 다양한 무사들의 소속 부대들 사이에는 갈등이 생기고 무라시게 자신도 리더십에 위험을 느낀다. 매 계절 하나씩 생기는 살인 사건과 괴이한 일이 마치 부처님의 징벌이라도 되는듯 성 안에는 소문이 돈다. 무라시게는 지하 감옥의 칸베에와 독대를 통해 해결의 실마리를 얻고 범인을 찾아낸다. 하지만 시간이 흐를수록 성 안의 기강은 흔들리기만 하며 잡히지 않는다. 그런 무라시게에게 위안이라면 폭력적인 오다에 대항한다는 명분, 다도(茶道)에서 얻는 평온함, 그리고 아름답고 불심이 깊은 처 지요호의 응원이다. 그것이 응원이었나?
이미 역사와 다른 여러 창작물을 통해 무라시게는 시간과 군력을 낭비하고 개인적인 덕질(차기 모으기)에 빠져 패배하고 혼자 도망친 무능하고 비겁한 무사의 대명사가 되어버렸다. <흑뢰성> 소설 전체도 어찌 보면 그 오명을 빌드-업하는 과정이라 할 수 있다. 칸베에의 지략이 도왔지만 결국 자기 손으로 망쳐버린 무라시게 자신의 명예. 하지만 작가는 처음부터 끝까지 매우 호의적으로 ‘억울한’ 무라시게의 얼굴에서 똥칠을 닦아준다. 문장은 간결하고 비장해서 지요호가 나오는 장면은 패왕별희를 연상시키기도 하지만 바꿀 수 없는 역사에 무라시게는 항우가 되지 못하며 명석한 칸베에(또 다른 다도인)은 임진왜란의 악역일 뿐이다.
서장은 칸베에 등장과 하옥으로 아리오카성의 상황을, 네 개의 장은 계절별로 벌어지는 사건과 해결, 마지막 가을과 종장은 아리오카성의 함락 과정과 칸베에의 이후 이야기다.
소설 중반쯤 가면 조금 지루해 지는데 그쯤 책을 덮고 영화 <한산>을 보았다. 초반에 칸베에 역의 윤제문 배우가 히데요시의 사자로 나와 일장 와키자카 야스하루(변요한 분)에게 전쟁을 독려한다. 아리오카성 지하
감옥 시절에 다친 다리는 비단 옷에 가려 보이지 않고 얼굴엔 세월과 지방이 많이 쌓여있었다.
"자네의 책략을 따르면 나는 천년이 지나도록 천하에 악명을 남기겠지. 자네는 내 목을 치는 대신 내 이름을 치려 했나." - P489
"나는 ‘도라사루‘가 아깝다. 천만 병사에게 목숨을 걸라고 명령해 온 내가, 내 물건은 차항아리 하나가 이토록 아쉽구나." - P303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