킨케이드의 <루시>가 <빌레트>의 변주곡이라는 설명을 읽었다. 열아홉에 서인도제도의 고향을 떠나 1960년대 미국 대도시 백인 가정의 보모로 들어가는 여자 아이 루시 이야기.
Critics have also focused on the many intertexts on which the novel draws. Diane Simmons details the way in which the novel draws on John Milton's Paradise Lost and Charlotte Brontë's Jane Eyre, noting that Brontë was Kincaid's favorite author. David Yost observes that Lucy contains many correspondences to another Brontë novel, Villette—including the names of its primary couple (Lucy and Paul), its plot (an au pair adjusting to a foreign culture), its themes (sexual repression of women and self-recreation through art), and its setting (Villette's Paul dies returning from his Caribbean slave plantation)--arguing that Lucy acts a postcolonial reworking of this earlier text. <위키피디아>
소설은 신랄한 유머로 지독한 현실을 짚어내며 시작한다. 다크 유머를 입은 시트콤같은 에피소드들이 이어지고 플래시백처럼 하나씩 드러나는 루시와 가족, 특히 엄마와의 이야기, 더해서 겹쳐지는 주변 인물들과의 관계는 초반부의 어조를 점차 바꾸면서 끈적거리는 커다란 덩어리를 가슴 위에 쌓아간다. 하지만 계속 부딪히려는 루시, 이 아이가 이름 말고, 출신지 말고(빌레트의 폴 선생이 서인도 제도 농장주가 되어 몇 년 돈벌러 떠난다), 자기 정체성과 욕망에 대해 목소리를 내기 시작하는 것 말고, 날라리 여친말고, 애인의 이름(또 폴. 하지만 이건 소설 중간에 나오는 폴 고갱과 더 연결되는 것 같다. '자연'의 여성들을 만나 해방감을 맛본 백인 예술가- 하지만 우리의 루시는 고갱의 그림을 보면서 가슴을 드러낸 자연의 여인들이 아니라 작가/예술가/남성에게 감정이입하며 깝깝한 고향을 떠나는 것을 이해한다. 정말 대단한 아이, 루시) 말고, 어떻게 빌레트의 백인 영국인 여성 루시와 연결된다는 말인가.
David Yost의 글을 찾아 읽었다. (복학생 아들의 대학교 도서관 사이트에서 논문을 찾아 프린트 할 수 있다) Yost는 <루시>와 <빌레트> 두 작품의 플롯이나 인물 하나씩 대응시키기 보다 킨케이드가 브론테의 주제 의식과 모티브를 어떻게 소화해냈는지 살펴보기를 권한다. 그리고 그 논문에는 우리의 <다락방의 미친 여자>도 많이 인용한다. (만세!!)
Yost의 비평 제목에는 '세 명의 루시'가 등장한다. A Tale of Three Lucys: Worthworth and Bronte in Kincaid's Antiguan Villette. <다락방의 미친 여자>에서 워즈워스의 루시가 어떻게 루시 스노우와 주변인물 (특히 마치몬트 여사님)로 반박되는지 읽었다. 자연이 곱게 키우는 여자 아이, 그러나 이름 없이 죽어 무덤에 누운 (그리고 남자 시인만 알아보고 노래 불러주는) 루시가 아니라 자기 두 발로 여행을 떠나고 사람들과 맞서고 과거를 돌아보고 자기 방식대로 해결, 해석하고 자기 이름과 이야기를 자신의 손으로 쓰는 루시. 이런 의미라면 킨케이드의 루시는 빌레트의 루시와 닮았다. 킨케이드의 루시는 한 발 더 나아가 워즈워스의 시가 얼마나 구린지 까발린다. (잠깐 여기에서 식민시대를 경험한 또다른 여성 <파친코>의 선자가 70대에 이르기까지 글을 깨치지 못했다는 것이 원통하다.)
"나는 루시라는 이름이 싫었다. 전혀 대단해 보이지 않는 시시한 이름이고 당시에 내가 되고 싶던 그런 인물과는 한참 멀어보였기 때문이다. 난 혼자서 에밀리나 샬럿이나 제인 같은 다른 이름을 지었다."
루시는 자신의 이름이 싫어서, 브론테가 되고 싶어서 (엄마는 루시더러 '응 니 이름 뜻 악마임'이라고 말해버린다) 동화작가 이니드 블라이턴의 이름을 따라 이니드가 되려 한다. 하지만 이니드는 아빠의 정부로 루시와 엄마를 죽이려했던 인물의 이름이어서 엄마는 불같이 화를 낸다. 그런데 Enid Blyton은 인종차별적 내용을 담은 어린이 책 작가였으니 이니드는 정말로 루시와 그 어머니를 '죽이는' 인물이었다고 Yost는 설명한다. (논문 찾아 읽기는 잘한 일입니다.) 어린 시절 이런 백인 작가의 책 말고도 루시가 가진 책은 성경과 <실낙원>이었다. (다미여를 읽는 자매님들 박수!!!) 백인 남성 '제국주의'의 책들에 눌려있는 킨케이드의 루시는 그래도 똑똑해서 그 지겨운 위선과 악의를 간파한다. 그런데 우리의 선한 이웃 머라이어, 백인 고용주이자 '친구'는 커다란 책을 루시 앞에 가져와 읽어주신다. (그 책이 보부아르의 '제2의 성'이에요!)
"머라이어는 방을 나갔다가 커다란 책 한 권을 들고 다시 들어왔다. 첫 장을 펼쳐 내 앞에 놓았다. 내가 첫 문장을 읽었다. "여자? 아주 간단하다. 단순한 공식 가운데 가장 멋진 것 하나를 들어보자. 여자는 자궁이다. 여자는 암컷이다. 이 한 마디면 여자를 정의하기에 충분하다." 난 거기서 멈췄다. 머라이어는 내 상황을 완전히 잘못 해석했다. 펼쳐 읽으려면 계속 누르고 있어야 해서 손이 아플 지경인 이 두꺼운 책으로는 내 삶을 제대로 설명할 수 없다. 내 삶은 그보다 더 간단하면서도 동시에 더 복잡했다."
누르고 있어야 해서 손 아픈 책, 우리 알지요. 제2의 성 말고도 다락방의 미친 여자도 있고. 그래서 우리 요새 문진 검색하고 있잖아요. 빌레트의 루시 만큼이나 킨케이드의 루시도 주변인들에게, 독자에게 말을 아끼면서 훗, 하고 혼자 씁쓸한 웃음을 짓는다. 그래서 마지막 챕터가 진짜 '루시'라는 인상을 준다. (이쯤되면 스트라우트의 '루시 바턴'이 바턴을 받아서 달려주기를 .... 바라는 마음이 듭니다) 루시의 배부른 애인 폴이 바람을 피던 말던 뭔 대수인가. '혀를 빠는' 경험에서 맛없다고, 하지만 "finds her tongue"을 하는 (논문에 이 부분을 읽으면서, 아! 원서 읽고 싶다, 생각이 들었다. 혀가 그 혀 말고 다른 의미가 있었어!) 루시. 남자 이야기들을 나열하면서 끝까지 '나 사랑에 빠진거 아닌데'라고 쓰는 루시. 고향의 성착취범 이야기를 비틀어 쓰는 루시. 할 말이 넘치고 넘치는데 고르고 골라 뭉쳐서 하나씩 놓는 루시. 생각보다 더 빌레트고, 더 다미여고, 더 찐했다.
'애니 존'을 읽어야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