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6.07.02

나는 그때 그곳에서
상상할 수 없을 만큼의 긴 시간을 흘려보내기 위해
이 세상의 모든 것과 싸웠다.
그러나 그 시간은 결국 끝났다.
기다리는 대상이 소중하면 소중할수록
그 시간은 아픔이 되고 슬픔이 되고
끝을 알 수 없는 우물이 된다.
지금도 나는, 그때의 그 시간을 떠올리면 아득해진다.
그래서 이렇게 이야기할 수도 있다.
그때 난 그곳에서 평생을 기다렸다, 라고.
하지만 불행하게도
그렇게 간절히 기다렸던 그 사람이 누구였는지는,

이미 오래전에 잊어버렸다.

 

 

- 그때 나는 그곳에서 평생을 기다렸다, 황경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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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로그인 2007-05-13 00:2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 왠지 저도 훗날에 저 대사를 읊어야 할지도 모르겠습니다.
지금 잔잔한 피아노곡을 듣고 있는데. 어쩜 이리도 잘 어울리는 글인지. (웃음)
 
입술
이명랑 지음 / 문학동네 / 2007년 4월
평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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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월 초에 읽었음에도, ‘나의 피투성이 연인’의 리뷰와 함께, 살짝 미뤄두고 있었다. 내내 머릿속으로 흐릿한 영상을 그리면서, 어떤 식으로 풀어야할 지 고민을 거듭했다.
작가와의 만남은 이번이 (실질적으로)처음이다. 슈거 푸시란 책을 구입했던 기억이 있는데, 읽다가 말았던 과거가 있다. 그때는 공감 코드를 발견하지 못했던 걸지도. 알라딘에서 소개를 우연히(의식적 우연인가, 새로 나온 책 코너는 늘 기웃거리니까/) 발견하고 궁금하여 얼른 책이 나오기를 기다렸다. 2007년 4월 26일 아침 매장 신간코너에 모습을 드러낸 것을 확인하고 찜해두었다가, 동행들이랑 헤어지고 나서 (누가 가져갈 세라) 냉큼 구입하고서 집을 향해 갔다. 그때, 동생이 선물로 주었던 문화상품권을 유용하게 쓸 수 있었다.
(0426~0505)기간 동안 하루에 단편의 반쯤, 혹은 단편 하나까지 읽을 때도 있었다. 느릿느릿 읽을 수밖에 없었던 단편이 있고, 후딱 해치운(?)단편도 있다. 더러 공감하거나, 눈동자가 데굴데굴 구를 정도의 솔깃한 표현을 찾고 환호하고, 나름 세심하게 밑줄 긋기 기록을 하면서 집중했다. 그리고 이미 밑줄 긋기 등록은 마쳤다. 리뷰는 여간 조심스럽지 않아서, 심적 부담이 컸다.
뒤의 해설 부분에서는 작가의 문학적 변화가 엿보인다는 이야기를 바탕에 깔아두었다. 사실, 작가의 이전 작품을 접하지 않아서 그것까지는 파악이 안 되었으나, 일단, 변화라는 영역 안에서는 내가 끌어갈 수 있는 단서를 하나 찾았다는 생각이다. 제자리에 머물기보다, 무언가 탈출구를 찾듯 뚫고 나갈 수 있는, 부지런히 움직일 수 있는 소설을 적극 선호하는 나로서는, 개인적으로 참 반가운 타입의 작가다. 앞으로 두 번째, 세 번째 단편집을 낼 터이고, 여러 번 파고들 수 있었으면 바라고 있다. 주목하는 작가 리스트에 포함되었음은 물론이고, 조만간 슈거 푸시를 통해 그녀의 세계를 재차 탐험해볼 계획이다.
개인적으로, 인상에 남은 단편은 [미니 초코파이]. 또한 개인적 판단으로 구성이 돋보였던 소설은 [누군가 목덜미를 잡아챘다] 한 문장, 거푸 되짚으며 읽었던 단편은 [정직한 너에게]. … 다 풀어낼 수 없는, 정리할 수 없는. 각각 단편들은 각양각색의 이미지로 다가왔으며, 충분히 값진 시간이었다.

- 아직 포장의 리본을 풀지 않았을 때에는 고개를 갸웃거리며 아니야, 아니야, 부정할 수도 있고, 그렇지만으로 시작되는 변명을 늘어놓을 수도 있고, 어제 연필로 휘갈겨 쓴 영어 단어 위에 오늘치의 영어 단어를 붉은색 볼펜으로 휘갈겨 써 어제의 시간을 지워버리듯 선물상자 바닥에 몇 번이고 다시 새로운 밑그림을 그려 넣을 수도 있다는 사실을 말이야.
누군가 내 앞으로 부친, 발신인이 분명하지 않은 그 선물상자를 앞에 놓고 나는 그 속에 들어있을 알맹이를 상상하며 상자 바닥에 밑그림을 그려 넣곤 했지.(199~200쪽)

미래는 구불구불 미로처럼 까마득하고 이렇다하게 정해진 것이 없기에, 몇 번이고 밑그림 수정이 가능하다. 나 또한 어릴 적 모험을 꿈꾸는 아이에서, 지금은 현실에 적응하고, 부당하다 생각하면서 어쩔 수 없는 선택을 할 시기도 있지만, 앞으로 어떻게 인생이 펼쳐질 지 장담하고 단정할 수 없다. 그리하여 스케치는 앞으로도 계속 이어지겠지. 흥미진진하게 도전하고, 배움의 묘미를 깨달을 생각이다. 이 열정은 쉬이 사그라지지 않을 것이라 믿고, 어디든 언제까지나.

- 흘러간 것들은 되돌릴 수 없다. 그러나 떠나간 시간을 저토록 아파할 수 있다면 아직 싸우고 있는 사람이 아닐까?(36쪽)

나도 아직은, 싸우고 있는 중이다. 나뿐 아니라, 내 주위 친구들, 그리고 혹 이 글을 보고 있을 여러분들도. 그리고 나에게 비상구랄 수 있는, 대학 때부터 쓰기 시작했던 소설, 작가의 말처럼 왜 쓰는지 더는 묻지 않게 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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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카타르시스】 [katharsis]

    정화. 배설을 뜻하는 그리스어.

 

    아리스토텔레스의 <시학(詩學)> 제 6장, 비극의 정의(定義) 가운데에 나오는 용어.
    '정화'라는 종교적 의미로 사용되는 한편, 몸 안의 불순물을 배설한다는 의학적 용어로도 쓰인다.

    아리스토텔레스의 진의에 대해서는 이 구절의 표현이 불명료하기 때문에 예로부터 이설(異說)이
    분분한 채 오늘에 이르지만, 요컨대 비극이 그리는 주인공의 비참한 운명에 의해서 관중의 마음에
    '두려움'과 '연민'의 감정이 격렬하게 유발되고, 그 과정에서 이들 인간적 정념이 어떠한 형태론가
    순화된다고 하는 일종의 정신적 승화작용(昇華作用)으로 해석할 수 있다.

    한편 정신분석에서는 무의식 속에 잠겨 있는 마음의 상처나 콤플렉스를 말. 행위. 감정으로써 밖으로
    발산시켜 노이로제를 치료하려는 정신요법의 일종으로, 정화법, 제반응(除反應)이라고도 한다.

    그러나 이와 같은 마음의 상처, 응어리는 상기하거나 말하기가 괴롭고, 전혀 생각나지 않는 수도 있다.
    이 방법을 처음으로 발견한 오스트리아의 생리학자 'J.브로이어'는 이 저항을 완화하기 위해 최면술을
    사용하였으나, 오늘날에는 마취제(아미탈, 펜토탈)을 사용하는 경우도 있다.
    그러나 이 방법을 사용하는 경우라도 치료자와 환자 사이에 어느 정도의 마음의 연결이 없으면 성공
    하지 못한다.  문제아의 치료에 쓰이는 유희요법(遊戱療法)도 【카타르시스】의 원리를 응용한 것이다.
    '블로일러'에 의한 이러한 【카타르시스】의 발견은 정신분석의 새로운 계기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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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자, 여기까지가 사전적 의미이고 -

    한 마디로 말 하면, '억압된 감정의 표출'을 영화나 소설 속의 주인공을 통해서 이루거나
    어느 날 무언가를 계기로 느끼게 되는 감정의 배설 - 오르가즘, 환희, 희열, 성취감, 충족감, 만족 등.

    '환희' 나 '희열' 혹은 '쾌락' 같은 감정/느낌의 최고봉에 달하는 감각들은 흔하게 접하는 문자들이지만,
    실제 현실에서 느낄 수 있는 경우는 극히 드물다.
    피부 속, 정말 발 밑에서부터 영혼이 끌어 올려지는 듯한 그런 느낌의 감각은 애당초 쉽게 느낄 수가
    없는 감각.
   

    그럼에도, 나는 운 좋게 - 딱 한번 '환희'를 느꼈던 적이 있었는데, 그 느낌은 정말로 -
    온통 하얀 것 밖에 없는 시.공간에 둥- 떠 있는 느낌이다.

    온 세상의 빛이 내 주위에 모여 있는 오로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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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의 마음에는 서로 모순된 두 가지 감정이 있다.
물론 누구라도 타인의 불행에 동정심을 품지 않는 이는 없다.
그런데 막상 그 사람이 불행을 어렵사리 극복해내면
이번에는 어쩐지 뭔가 아쉬운 듯한 마음이 든다.
조금 과장해서 말하자면, 다시 한번 그 사람을
똑같은 불행에 빠뜨리고 싶은 듯한 마음까지 든다.
그리하여 어느새 소극적이기는 하지만
자칫 그 사람에 대해 적의까지 품게 된다.

― 라쇼몽, 아쿠다가와 류노스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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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로그인 2007-05-11 12:2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글쎄. 시련을 극복하여 성공한 사람을 보면 내가 된 것처럼 기분이 좋고 자극이 되어
의욕도 약간 생기고 그러던데.
저 사람은 주관적인 불특정 소수에서 일어나는 심리를 마치 '인간의 모든 마음'에
있는 것처럼 표현했군요. 자신이 그렇게 생각한다고 남들도 다 그런 것은 아닌데
말입니다. 저 얼마나 작은 그릇의 생각입니까.

moon님의 생각은 어떻습니까? ^^

302moon 2007-05-11 22:4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앗, 그러게 말입니다. 좀 어이없다 싶어서, 밑에 의견을 단다는 게 그만 빠트리고 말았군요.
어제, 20분 동안 컴퓨터와 씨름하다가 겨우 페이퍼 3개 올려놓고/
이거, 성급한 일반화의 오류 아닙니까, 정말! 제가 좋아하는 작가인데, 순간 분노에 휩싸여서.
저 글은 웹에서 우연히 발견했는데, 예전에 제가 읽은 적이 있던 소설이었어요. 그런데 말입니다(-_-), 저런 구절이 있었나 싶습니다. 책을 다시 찾아봐야겠다는 생각에 슬쩍 기록해둡니다. ^^*

비로그인 2007-05-12 22:4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
 



잔재주를 부리는 기교는 필요 없다.
과장된 비평이나 해설도 필요 없다.
사는 것이 예술이다.
죽을 때 '나라는 작품'에 감동하고 싶을 뿐.

― 다카하시 아유무, LOVE&FRE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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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로그인 2007-05-11 12:3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헤. 멋있는 표현입니다.
결국 인생의 의미는 '나'를 만들어가는 과정, 어떻게 만들어냈냐에 따라 나중에
어떤 점수를 받고 죽는가 ... '왜 사는가' '인생이란 무엇인가' 라는 것에 대한 답을
항상 찾고 있었는데, 뭐랄까. 조금 힌트를 얻은 기분입니다. (웃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