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르헨티나 할머니
요시모토 바나나 지음, 나라 요시토모 그림, 김난주 옮김 / 민음사 / 2007년 4월
품절


아주 평범했던 하루하루가 순식간에 달라질 수도 있는 거네,
그 지지부진하고 따분했던 감정들이 모두 착각이었어.
깊은 슬픔 속에서도 매일, 신선한 발견이 있었다.-- (7쪽)쪽

하지만 내 눈동자에 늘 깃든 어떤 빛으로 표현할 수 있다.
거울을 보면 내 눈에 전에는 없던, 무언가를 받아들이는
커다란 힘이 깃들어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래서 나는, 커다란 선물을 받았다고 생각한다.
가슴이 찢어지는 아픔과, 이가 덜덜 떨리는 공포와,
평생 뇌리에서 떠나지 않을 병원 복도의 어두운 풍경을 본 대가로.-- (12쪽)쪽

우주는, 평면이 아니고, 시간도 없어.
그리고 무수한 층으로 이루어져 있고.
그 겹겹의 층 안에 시간과 온갖 것이 다 들어 있고, 전부 이어져 있어.
마치 요술 상자처럼 말이야.
이건 어떤 이치로도 설명할 수 없고 그림으로 그릴 수도 없어.
어떤 부분이든 모든 부분과 통하게 돼 있어.
깊숙한 공간이 한없이, 하염없이 겹쳐 있는 거야.-- (19쪽)쪽

그립고 애틋한 마음과, 지금 여기에 이렇게 있다는
신비로운 감동이 내 온몸을 비추고,
그 빛은 내 안에 쌓여 있던 쓰잘 데 없는 것들을 말끔하게 씻어내 준다.-- (24쪽)쪽

그렇기에 더더욱 무언가에 감싸여 있는 듯한 체념과
기쁨이 있는 것이라고 생각되었다.
뒤로 멀어져 간 화려한 시절의 모습 그대로
남아 있는 것들과 함께, 소박하고 조용하게 존재하는 기쁨.-(47 ~ 48쪽)쪽

그리움이란, 모든 것이 달라진 후에야 비로소 싹트는 것, 이라고 나는 생각했다.
(---)
이 인생을 선택하면서 내던져야 했던 수많은 요소들이
지금 아빠의 내면에서 거대한 힘으로 뭉쳐 그 싹을 틔우고 있는지도 모르겠다.-(49쪽)쪽

그 옥상에, 정말 신비로운 것이 만들어져 있었다.
그것은 색상이 선명하지 않은 갖가지 돌을
모자이크한 거대한 만다라 같았다.
옥상 한쪽에 벽돌로 틈을 만들고 촘촘히 돌을 박아
시멘트로 고정시킬 계획인 듯했다.
한 옆에는 시멘트 부대와 접착제도 쌓여 있었다.
쇠락한 옥상 콘크리트 바닥에서 그 부분만 도드라져
뭐라 말할 수 없이 느낌이 묘했지만, 서툰 솜씨는 아니었다.
손재주가 많은 아빠가 밑그림을 구상한 후에
조금씩 질서를 부여해 가며 만들고 있다는 것을 넉넉히 알 수 있었다.-(50쪽)쪽

"이 원이 우리가 사는 그냥 보통 세계고,
이 바깥쪽으로 가면 갈수록 공간의 색이 엷어진단다.
색은 엷어지는데 밀도는 높아지고, 투명한데 강해지지.
여기는 식물의 세계고,
여기는 지구를 지키는 투명한 사람들의 세계."-(51쪽)쪽

그런 때는 안심하고, 지금은 없는 집의 문을 열고 또 여는 공상에 젖었다.
내가 어렸을 때 살았던 그 집.
마음으로 몇 번이나 열다 보니,
문이 그리는 선이 가슴에 예쁜 잔상으로 남았다.
(---)
그 모든 것이 없어지고 말았다.-(58쪽)쪽

아르헨티나 빌딩 안에는 아무것도 '없어진 것'이 없으니까,
시간이 사람의 머릿속 힘으로 완전히 멈춰져 있으니까,
시간이 특별하게 흐르는 그곳에서는 과거와 현재의 나뉨이 없어서
그런 꿈도 꿀 수 있는 것이라고 나는 생각했다.-(61쪽)쪽

그 슬픔은 어찌 보면 다가가기 어려운 무언가를 발산하는
황홀한 것이어서, 현실로 돌아오게 해서는 안 될 것 같은 생각이 든다.-(71쪽)쪽

오래 계속되면서 저절로 메말라 버린 생활이 있고, 역사가 있고,
독특한 세계가 반짝반짝 살아 있다.
처음 갔을 때, 나는 저 낡은 건물이 비석 같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지금은 아니다. 오랜 꿈을 품고 지금도 살아 있는
저것은, 유적이다. -(72쪽)쪽

(---) 이 인생에서, 나는 나를 위한 유적을
스스로 만들어 나가야 한다.-(83쪽)쪽

한없이 먼 이국을 여행하는 것이나
자기만의 유적을 만드는 것이나
그 시도의 근원은 같다고 생각한다.
어떤 시대에서 어떤 시대로 여행을 하고,
끝내는 사라진다.
영원 속에 소박한 저항을 새기는 것, 그뿐이다.-(84쪽)쪽

"사람이 왜 유적을 만드는지 알아?"
옛날에 둘이 옥상에서 내가 사 온 참깨 과자를 먹을 때, 유리 씨가 내게 물었다.
화창한 5월, 동네 여기저기에서 잉어 드림이 팔랑팔랑 헤엄치고 있었다.
그때 먹었던 과자의 참깨 맛을, 그때 마셨던 우유의 시원한 맛을 지금도 분명하게 기억한다. 우리는 옥상 난간에 기대어 아래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상쾌한 바람이 불어오고, 봄볕에 몸이 따끈따끈했다.
"모르겠는데요. 자신의 기록을 남기고 싶어설까요?"
젊은 날의 나는 말했다.
"그런 이유도 있겠지만, 아마 아빠가 모자이크를 만드는 이유하고 같을 거야."
유리 씨는 웃었다.

"좋아하는 사람이 영원히 죽지 않고, 영원히 오늘이 계속되었으면 좋겠다고,
그렇게 생각해서일 거야."-(86~87쪽)쪽

그대가 살아 있다는 사실에 감사합니다
인생은 부서지기 쉬운 것이므로-(*표지)쪽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뭍이 없는 바다에서 혼자, 방향도 모른 채,
이유도 목적도 없이,
헤엄칠 줄 모르는데 헤엄쳐야 하는 것과 같았다.
그리고, 더욱 비장한 것은
나는 뭍이 있다는 것조차 몰랐다는 것이다.
--------------------------------------------------------------------------------

어렸을 때, 내가 좋아하는 놀이 가운데,
한 자리에서 빙빙 도는 것이 있었다.
나는 혼자, 집 앞 골목길에서 그 놀이를 했다.
두 팔을 옆으로 좍 벌리고, 최대한 빨리, 빙빙 돌았다.
더 빨리, 더 더 빨리.
사방의 경치가 흐르고 흘러 가로줄 무늬가 되면서,
금방 몸의 중심을 잃었다.
뻗은 두 팔은 뻣뻣하고, 제멋대로 오르내리고, 내리려 해도 내릴 수 없었다.
그리고 한 자리에서 돌았다고 생각했는데
알지도 못하는 새 엉뚱한 곳으로 이동해 있었다.
그러다 벽이나 전신주에 부딪힌 일도 몇 번이나 있었다.
아아, 부딪히겠다, 부딪히겠다, 다가간다, 다가간다, 고
먼 의식으로는 알고 있는데, 멈출 수가 없었다.
부딪히거나 넘어진 후에는,
눈을 뜰 수가 없어 감고 있어도 주위가 빙빙 도는 것 같았다.
---
자신의 몸을 제어할 수 없어지는 순간과,
실제로 꿈틀거리는 세계를 몸으로 체감하기 전에는,
그 후의 불쾌함 따위 아무것도 아니었다.
---
제멋대로 돌아가는 세계에 아무도 손 댈 수 없고,
내 몸마저 내가 제어할 수 없는
강렬한 감각이 재밌었다는 것만 기억할 뿐이다.

 
- 웨하스 의자, 에쿠니 가오리.
--------------------------------------------------------------------------------

 
*나도 어렸을 적 저런 놀이를 많이 했던 것으로 기억한다.
다만, 나는 혼자가 아니라 내 동생이랑 동네 친구들이랑 어울려서 놀았다는 것.
새삼 그리워지기도 한다.
자전거 질주 & 마당 & 숨겨진 골목 & 비가 오는 풍경.

2006.12.11 23:03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댓글저장
 

나는 그저 놀랄 뿐이다.
어제와 엊그제를 구별할 수 없다는 사실에.
내가 새긴 발자취가 그것을 확인할 틈도 없이,
눈 깜짝할 사이에 바람에 날려
어디론가 사라지고 만다는 사실에.


- 잠, 무라카미 하루키.


+ 언뜻 보면, 전혀 다를 바 없어 보이는 일과.
(스토리라인을 만드는 것, 노래 틀어놓고, 노래 부르고,
아트 잡지를 뒤적이는 취미생활& 일에 휘둘리는 것)
소소한 일상에서 조금 몰두해서 발견되어지는
어제와 오늘의 자그마한 차이(이를테면,
어제는 소설의 진전이 없었는데 오늘은 미량이 있었다는 것&
어제는 D의 노래를 들었는데, 오늘은 Wizard의 노래를
틀었다는 것& 문제집을 풀어야지 다짐했다는
타인이 보면 사소할 것들)를 생각했다.

2006.09.11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댓글저장
 

가랑잎 색깔의 논이 평평하게 펼쳐져 있었고,
한참 먼 곳에는 하늘과 땅 사이에 선로가 있었다.
도화지에 그린 그림에 장난으로
지퍼를 그려놓은 것처럼 쭉 뻗은 직선이었다.
하얀 바탕에 빨간색 전철이 지나갔다.
마치 지퍼를 여는 것처럼.
열린 지퍼 건너편으로
뭔가 다른 경치가 펼쳐져 있지 않을까 하는
어린아이 같은 기대를 가지고
나는 눈을 크게 뜨고 바라보았지만,
전철이 지나가자
익숙하게 보아 온 경치가 그 자리에 있었다.

- 공중정원, 가쿠타 미츠요.

 

 

--------------------------------------------------------------------------------

 


*표현과 영상이 너무 좋아서, 몇 번이고 곱씹으며 되짚었다.
개인적 견해로, 주제의식은 [전체적으로, 변함없는 일상]을
전철이 지나가는 장면으로 오버랩 시켜 담은 것 같다.
환상이 가득한 배경, 번쩍하는 풍경,

혹은 짜릿한 감각을 원하지만,
유유히 흘러가는 일상이 펼쳐지는 것처럼.

2007.01.02 22:18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댓글저장
 
도쿄 타워
에쿠니 가오리 지음, 신유희 옮김 / (주)태일소담출판사 / 2005년 10월
평점 :
구판절판


내 리뷰.

    내 친구가 전해 준 이야기가 있다.

   에쿠니 가오리 씨 팬이라고 할 수 있는 다수의 독자들은 도쿄타워에서 적잖이 실망을 했다는 리뷰를 많이 접했다고_ 나는 그때 심드렁한 반응을 보였던 것 같다. 사실, 이제껏 그녀의 소설에서 엄청난 감동을 받은 것까지는 아니라서- (단 하나, 호텔 선인장은 진짜 좋았다. 너무나도 익숙한 세 주인공^^) 내 친구의 말을 빌리자면, 나는 대개의 대답이 심드렁하단다(-_-)

   리뷰는 많이 늦었다. 그냥 책장을 훑다가 어? 리뷰 안 썼네? 이런 식으로 발견했기 때문. 책 읽은 그 당시에는 시험 준비를 한다고 꽤 버둥거렸던 것 같기도 하고. 아무튼, 갑자기 마음이 끌렸다고 해두자.

   사실, 처음에는 작가보다는, 그 제목보다는, 일러스트에 더 끌렸다. 그러니까, 예쁜 책에 혹하는 버릇이 있다. 큼직큼직한 글씨는 조금 거슬렸다. 웃긴 게, 나는 중간 크기의 글자가 읽기에 편해서 안정을 찾곤 한다.

   어처구니없는 사항만 잔뜩 펼친 거 같은데, 이 소설은 3번 정도 읽었던 것 같다. 그저 손에 집기 쉬운 곳에 있었단 어이없는 이유로 3번이나(?) 읽었다. 달리 감동이라거나 책에서 받은 감흥은 (이렇다 할 감흥이랄 게 없지만) 변하지 않았지만.

   토오루의 일상 중, 책을 읽고 그 이야기를 나누거나, 음악을 배경으로 하고, 생각에 골똘히 빠져든다거나, 전화를 기다린다거나 하는 장면들이 좋았다. 그런 담담한 필치의 자그마한 그런 소품들을 좋아하기도 해서. 타인이 보기에는, 지극히 일상적일 뿐인, 그리 흥미가 당기지 않는 요소들일 가능성이 크지만 말이다.

*시후미는 작고 아름다운 방과 같다고, 토오루는 가끔 생각한다. 그 방은 너무 편해서, 자신은 그곳에서 나오지 못하는 것이라고.

   시후미라는 사람에 관해서는 내가 겪어보지 않아서 공감이 안 가지만, 다른 시선으로(우리의 인연이나, 추억 등등)너무 편해서 쉽사리 빠져나오지 못한다는 그 생각은 적극 동감(;)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댓글저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