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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동화 깊이 들여다보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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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세상은 판타지 세계로 통하는 훌륭한 통로 |
이재복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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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기범 선생께
그래요. 보내 준 편지하고 책 잘 받았습니다. 그냥 둘이 할 얘기는 편지로 따로 부치고, 부탁한 대로 『부심이의 엄마 생각』 이야기는 같이 나누어 읽으면 좋을 것 같아서요. 이 책은 시중 서점에서도 구해 보기 힘드니, 이 책을 어떻게든 알려 달란 부탁을 하였지요. 그래서 우선 여기 ‘바끼통’ 카페에라도 써 봅니다. 마침 이번에 『열린어린이』에서, 세 달에 한 번씩 우리 어린이 문학 문제를 깊이 생각해 보는 얘기를 써 달라 그래서요. 그 글을 쓸 일도 있었는데, 무얼 쓸까 생각 중이었습니다. 일단 여기에 이런 저런 이야기를 되는 대로 써 보다가, 정리가 잘 되면 『열린어린이』에도 여기서 하는 이야기를 보내면 좋겠습니다.
막상 책 이야기를 하려니까 생각이 딱 막히네요. 무슨 이야기를 해야 할지. 『부심이의 엄마 생각』을 읽으면서는 참 웃음도 나고, 눈물도 나고 그러네요. 가슴으로 그냥 이야기하는, 그런 작품을 읽고 나면 사실 할 말이 거의 없어요. 영화를 보고 나서도, 뭔가 느껴지는 게 있으면 가슴이 딱 막히잖아요. 그냥 말할 수 없는, 말의 그물에 가두기 힘든 그 무엇이 있잖아요. 그걸 억지로 말의 그물에 가두어 두려 하다 보니까, 그게 비평이니 연구니 하는 글들이 참 오히려 작품의 맛을 떨어뜨리고 감상을 방해하고 하는 점도 있지요. 그래서 요즘은 책을 읽고 무언가 이야기하는 것도 참 조심스럽기만 하군요. 그래요, 뭔가 하고 싶은 가슴 속 이야기는 있는데, 그 놈이 말이 되어서 나오지 않을 때는 어떻게 하겠어요. 좀 쉬었다 해야지요. 그냥 가벼운 이야기나 하면서.
마침 이번에 낸 책 『어린이와 평화』도 잘 읽었습니다. 수고하셨어요. 무슨 일을 하든지 다 이 땅에 머무는 동안, 재미있게 한 번 살아 보자고 하는 거니, 역시 우선 건강이 가장 중요한 것 같습니다. 봉사활동을 하는 사람이 자기 몸 하나 제대로 챙기지 못하면서 남 위해 봉사활동 한다고 하기에는 어딘가 미안하고 쑥스러운 점이 있으니까요. 이건 내가 하도 몸의 변화가 심한 사람이라서, 그런 경험에서 하는 말입니다. 예, 정말 건강 조심하시기 바랍니다.
죽변에서 산다고 들었는데, 요즘 날씨도 추운데 뭐 먹고 삽니까. 이런 이야기나 합시다. 요즘은 날씨가 추워서 그런지 따뜻한 국 생각이 간절합니다. 그래서 얼마 전 동화 공부하는 사람들하고 이야기를 나누다가 무국 끓이는 걸 배웠어요. 오늘 양지 고기를 사다가 한 덩이 일단 물에 넣고 끓였습니다. 그랬더니 기름이 배어 나와서, 이 놈을 일단 쏟아 버리구요. 그리고 나서 다시 물을 붓고 끓였더니 기름기는 싹 가시고 구수하고 담백한 국물만 배어 나왔습니다. 거기에다 무를 넣어서 푹 끓였더니 그렇게 시원할 수가 없어요. 아, 이게 어릴 때 어머니가 해 주시던 그 국맛이구나. 그래서 그 놈하고 오늘 저녁을 잘 먹었습니다. 며칠 이 국만 있으면 반찬 걱정은 없겠습니다. 겨울에는 그저 뜨뜻한 국을 한 솥 끓여 놓으면 걱정이 없을 것 같습니다.
그래요. 밥을 먹는다는 것처럼 절절한 일도 없는 것 같아요. 밥을 먹으려고 상에 앉으면 저절로 기도가 돼요. 마음이 가라앉으면서 생각이 내면으로 열려요. 먹는다는 것, 그것처럼 상상력을 자극하는 일도 없는 것 같아요. 우리는 자연의 목숨을 먹고 사는 거지요. 먹는다는 건, 자연의 목숨이 우리 몸 안에 들어와 산다는 거지요. 그 목숨들은 몸 안에서 소화가 될는지 모르겠지만, 그 목숨이 담고 있던 영혼은 내 마음 속에 들어와 사는 거지요. 나란 사람은 내가 날마다 먹는 목숨의 영혼들과 형제가 되어 그들과 이야기 나누며 사는 거지요. 그래서 동학에서도 “하날님은 사람에 의지하고, 사람은 먹는 데 의지하니, 만사를 안다는 것은 밥 한 그릇을 아는 데 있다”고 했나 봐요. 밥 한 그릇의 의미를 안다는 것, 이건 곧 세상을 안다는 것이지요.
어쩌다 이야기가 이렇게까지 왔는지 모르겠네요. 그래요. 『어린이와 평화』 읽은 이야기도 좀 하고, 『부심이의 엄마 생각』이니 『플러그를 뽑은 사람들』을 읽다가 든 생각 이야기도 하면 좋겠는데요. 일단 이 이야기들은 가슴에서만 맴돌고 좀처럼 밖으로 나오려 들지 않으니 어떡하겠어요. 이런 이야기라도 그냥 해야지.
지난번 편지에서도 잠깐 이야기를 했는데요. 그 이야기를 다시 좀 더 하지요. 오랜만에 이현주 선생님을 뵈었습니다. 몇 년 만인지 모르겠어요. 얼마나 반갑던지요. 선생님이 이번에 일 년 동안 회갑을 맞아서 묵언수행을 하셨는데, 말을 안 하니까 날마다 꿈이 꾸어지고, 또 그 꿈이 생각이 나서 이거 참 이상타 하고, 그 꿈이 계속 이어져서 적기 시작했답니다.
그래서 일 년 동안 꾼 꿈 이야기를 간추려서 낸 책이 바로 『이현주 목사의 꿈 일기』였습니다. 법륜 스님도 마침 『붓다, 나를 흔들다』란 책을 내서, 두 분이 한 서점에서 독자와 대화하는 시간을 가졌습니다. 그때 가서 이현주 목사님도, 법륜 스님도 뵈었습니다. 두 분 다 어찌나 명쾌하게 말씀을 재미있게 하시는지요.
내 기억에 지금까지 남아 있는 말 가운데 이런 게 있어요. 사회자가 이현주 목사님하고 법륜 스님께 서로 대비가 되는 재미있는 질문을 하더군요. 먼저 이현주 목사님께는, 요즘 목사님은 너무 내면의 마음 공부 쪽으로만 달려가는 것이 아니냐, 세상 밖으로 좀 관심을 보여야 하는 것 아니냐. 뭐, 대충 이런 질문을 했던 것 같아요. 그러니까 이현주 목사님은 이렇게 답을 하시더군요. 나 혼자 살면 그게 나 혼자만의 문제가 아니다. 개인과 집단을 나누는 게 그게 관념이지, 그게 어떻게 나누어지느냐. 한 사람이 우뚝 서면 그게 소셜 액션 아니냐.
예, 이렇게 말씀을 하시더군요. 그렇지요. 한 사람이 홀로 서서 풍요로운 내면을 유지하면서 자연의 목숨들과 영혼의 형제로 살아간다면, 정말 그건 대단한 정신의 힘을 주위 사람들에게 나누어 주는 거지요. 그 고립된 삶 자체가요.
그 담에 또 사회자가 이번에는 법륜 스님한테요, 이렇게 묻더군요. 스님은 너무 사회적인 문제에만 몰두하다 보니까 내면으로의 공부는 조금 소홀히 하는 게 아니냐. 이러니까 법륜 스님은 또 아주 재치 있는 답을 하시더군요. 이래요. 예전에 내가 아프가니스탄에 난민 구제 운동을 하러 간 적이 있었다. 그 때 밖에는 총알이 난무하니까 군인들도 막사 안에만 있지 밖으로 좀처럼 나오려 하지 않는다. 그런데 나는 잘 돌아다니니까 군인들이 당신은 무섭지도 않느냐, 어떻게 이런 데서 그리 잘 돌아다니냐. 그러길래 내가 이렇게 말했다. 당신들이야 사람을 죽이러 온 사람이니까 무섭겠지만, 나야 사람을 살리러 온 사람인데 뭐 무서울 게 있느냐. 그래서 나는 그 때 즐겁게 그 일을 하였다.
예, 이 말이 참 감동적이었습니다. 그래요. 어떤 봉사활동이든지, 당위성 때문에 한다기보다는 그 일을 하는 사람이 즐거워서 한다면 그게 최고일 것 같습니다. 즐거워서 하는 사람한테는 당해 낼 재주가 없지요. 즐거워서 하는 사람은 일을 하면 할수록 지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에너지가 샘처럼 솟아나니까요. 즐겁지 않은 일을 억지로 당위성 때문에 명예 때문에 하다 보면 결국은 몸이 버티지를 못하고 병이 나고 말지요. 이게 참 중요한 것 같아요.
나는 그 때 두 분이 말씀하시는 모습을 보면서, 아, 그렇구나. 내면과 외면이 어디 따로 있으며, 개인과 집단이 어디 구분이 있는가, 하는 생각이 들더군요. 그러면서 이현주 선생님의 책 서문에 인용되어 있는 헨리 데이빗 소로우의 말이 정말 그럴 수도 있겠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어요. “나는 정말이지 깨어 있는 상태와 꿈이 어떻게 다른지를 모르겠다. 우리는 언제 어디서나 자기가 상상한 대로의 세상을 살고 있지 않는가?”
예, 그래요. 이 말이 참 가슴을 탁 치는 그 무언가가 있어요. 그렇지요. 홀로 우뚝 서서 살아가는 사람이나, 그저 즐거워서 남을 위해 봉사하는 사람들에게 깨어 있는 상태와 꿈이 어떻게 다르겠어요. 늘 꿈이면서 생시요, 생시면서 꿈이겠지요.
이번에 낸 『어린이와 평화』란 책도 앞에서부터 쭉 읽어 봤는데, 거기에 이런 얘기가 있더군요. 이라크에서 반전평화운동을 하던 사람들의 이야기를 했잖아요. 캐이시 켈리라는 사람은 얼굴에 주름이 많은 50대 여성인데, 말로만 듣던 IPT를 떠올리면 그 모임을 이끄는 사람이 어쩌면 저렇게 온화한 사람이라고 생각할 수 있는지라구요. 또 인도가 고향이라는 수녀님 이야기도 그랬어요. 수녀님은 전쟁이 무섭지 않다구요. 모든 것은 하늘에 달려 있으니 죽거나 살거나 하늘의 뜻에 맡긴다구요. 예, 그래도 죽음이란 참 무지 무지 무서운 것이지요. 그런데 그런 죽음을 넘어서 이렇게 평온하게 사는 분들을 보면, 그 삶 자체가 정말 많은 힘이 됩니다. 『어린이와 평화』를 읽으면서, 거기에 나오는 평화 운동을 하는 분들의 이야기를 듣다 보니 저절로 기도하는 마음이 생겼습니다. 이런 분들의 사는 이야기 자체는 많은 사람들에게 평화를 나누어 주는 것 같아요. 홀로 서는 힘을 주고, 즐겁게 이 삶에 직면하는 상상력을 불어넣어 주고, 그러는 것 같습니다. 동화의 힘이라 할까요. 동화의 본질도 여기에 있는 것 같아요. 이런 삶에 직면해서 살아가는 사람들의 모습이 감동적인 이야기의 옷을 입고 아이들에게 들려지면 좋겠는데요.
이번에 낸 「앗살라 알라이쿰」이란 노래 씨디 있지요. 그 씨디도 보내 주어서 요즘 참 잘 듣고 있습니다. 밥을 할 때도, 빨래를 할 때도 이 노래를 틀어 놓고 듣다 보면 그렇게 즐거울 수가 없어요. 나는 이 노래를 부른 별음자리표인가요. 목소리가 구수하고 힘 있고, 진지하고 뭔가 울림을 주는 것 같아서 좋았는데, 그 뒤에서 같이 노래를 하는 아이들의 목소리는 또 얼마나 좋던지요.
아이들이 총을 내리라고 외치고, 또 게임처럼 폭탄이 떨어지는 전장의 모습을 노래하는 장면에서는요, 그냥 가슴이 찡하고 눈물도 나고 그래요. 아, 저 아이들이 외치는 저 노래 소리가 바로 ‘분노 없는 분노’의 소리구나, 하는 생각이 들더라구요.
예전에 무위당 선생님하고 이현주 선생님이 ‘노자’ 대담을 하시는데, 그 때 노자의 어느 구절인가를 말씀하시며, ‘분노 없는 분노’란 표현을 하시더라구요. 나는 그 때 그 말이 참 가슴에 와 닿긴 하는데, 실제 삶에서 그런 분노 없는 분노의 목소리를 들어 보기가 힘들었어요. 그런 목소리를 참 만나기가 힘들었어요. 아, 머리로는 그 말이 이해가 되긴 하는데, 도대체 그 분노 없는 분노의 목소리를 한 번 들어 보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는데, 이번에 「앗살라 알라이쿰」에서 아이들이 합창하는 노래 소리를 듣고 알겠더군요. 아, 저게 바로 분노 없는 분노의 소리구나 하구요. 아이들의 목소리에는 뭔가 남을 향하는 그런 화살 같은 날카로움이 안 느껴지는데도, 그 안에 들어 있는 전쟁을 말리는 호소력은 참 뭐라 얘기해야 할까요. 하여튼 말의 그물에 가두어 두기 힘든 그런 울림이 있더군요. 하여튼 그랬습니다.
예, 아이들 노래 소리를 들으면서도, 여기서 또 동화의 본질 같은 것 한 가지를 느끼게 되더군요. 아이들에게 동화를 쓰는 사람들은 이 분노 없는 분노의 목소리로 험한 세상을 뒤집어 엎는, 전복의 캐릭터를 좀 만들어 보여 줄 수는 없는지요. 저도 물론 그렇지만요, 요즘 동화를 쓰는 사람들이 공부를 참 많이 해야 할 것 같습니다. 요즘 나오는 동화들이 재미있는 작품도 많은데요, 한 가지 뭔가 요즘 현실을 뒤엎는 그런 전복의 캐릭터를 만나기가 참 힘들어요. 그런 캐릭터를 좀 창조해 내면, 창조한다기보다는 우리 삶에서 발견할 수 있으면 참 좋겠습니다. 나오겠지요. 요즘 어린이 문학 판도 만만치 않게 발전해 가고 있으니까요.
얼마 전에 바끼통에서 회원들에게 보내 준 편지를 읽으면서 참 많은 생각을 하였습니다. 우리 나라는 지금 미국과 영국 다음으로 많은 군대를 이라크에 파병하고 있는 거지요. 내년에 다시 재파병을 하는데, 지금 사회적으로 어떤 논쟁도 없이 그냥 슬그머니 통과시키려 한다구요.
바끼통에서 보낸 편지에서 “재파병이 결정되는 것보다 더 큰 슬픔은 재파병이라는 돌이킬 수 없는 죄악조차도 그저 무감각, 혹은 무기력하게 받아들이며 그 슬픔조차 잃어 가고 있는 우리의 모습”이라고 하였는데요. 예, 정말 그렇습니다. 슬픔을 느끼는 힘이 우리에게는 언제부턴가 점점 사라지고 있습니다.
『부심이의 엄마 생각』은 백기완 선생이 자신의 어릴 적 이야기를 구수한 우리 말의 맛을 살려, 풍부한 이야기성의 맛을 살려 때론 낮은 목소리로, 때론 우렁찬 목소리로 들려주고 있는데요. 이 이야기에는 뭔가 가슴으로 읽게 만드는 하나의 큰 길이 나 있어요. 그게 뭔가 봤더니, 이 작품에는 슬픔을 느끼는 힘을 가진 캐릭터들이 많이 나와요. 부심이와 엄마 사이에 오고가는 이야기만 해도 그렇지요.
올해에 나온 동화 작품 가운데서 사람들이 『받은 편지함』과 『엄마의 마흔번째 생일』 같은 작품을 즐겨 읽는다고 하더라구요. 나도 이 작품을 읽어 보았는데, 그래요, 이 작품 안에는 슬픔을 느끼는 힘을 가진 캐릭터들이 살아 있어요. 동화의 본질, 어찌 동화만일까요. 사람은 다 관계의 그물망에서 살아갈 수밖에 없는데요. 그러니 사람과 사람, 자연과 사람을 이어주는 밥풀과 같은 힘은 역시 동정의 상상력에서 나오는 게 아닐까 싶습니다. 이 동정의 상상력이 바로 슬픔을 느끼는 힘이겠지요.
바끼통에서 또 전국을 다니면서 평화 공연을 한다는 소식을 전해 주었는데요, 예, 그런 게 다 사람들의 마음 속에 동정의 상상력을 불러일으키는 하나의 현대판 굿이다 생각하면, 참 신명나고 즐거울 것 같아요. 그러니 그런 일도 다 즐거움으로, 신명나게 하면 그래도 좀 덜 힘들지 않을까 싶습니다.
왜 앞에서 헨리 데이빗 소로우 이야기를 했잖아요. 어떨 땐 정말 우리가 사는 이 하루 하루의 삶은 꿈인지 생시인지 참 구별이 안 되는 것 같아요. 『플러그를 뽑은 사람들』이란 책도 읽다 보니까 요즘 현대인의 불행은 돈을 벌기 위한 노동이 삶의 전부가 되어 버린 데 있다는 거지요. 사람은 자연과 영혼의 형제로 살면서 즐거운 시간을 보내려고 노동을 하는 건데, 어떻게 된 게 주객이 전도되어서 노동이 목적이 되어 버린 거지요. 노동이 내면의 즐거움을 추구하는 수단이 되야 하는데, 그만 생산성에 가로막혀 점점 삶의 즐거움을 빼앗는 구실이 되는 거지요. 그래서 노동을 위해 사는 기계 같은 인간이 되고 말았어요. 노동이 삶의 즐거움이 아니라, 이제는 돌이킬 수 없는 병을 일으키는 짐이 된 것이지요.
이래서 지금 우리에게는 판타지가 필요한지도 모르겠어요. 판타지는 인간의 내면 현실(마음 속)에 대한 탐구라 할 수 있지요. 소년소설과 판타지는 똑같은 리얼리즘 문학인데, 소년소설이 겉으로 드러나 보이는 제도에 대한 탐구라면, 판타지는 밖으로는 잘 드러나 보이지 않는 인간의 무의식이 작동하는 내면 현실(마음 속)에 대한 탐구라 해야겠지요. 그렇지만 인간의 마음은 제도에 영향을 받는 것이고, 제도는 또 인간의 마음이 반영되어 나타나는 것이니, 어찌 다르겠어요. 결국에는 소년소설이나 판타지는 같은 현실 문제를 탐구하는 장르라 할 수 있을 겁니다.
『부심이의 엄마 생각』을 읽으면서는 나는 이게 소년소설도 되면서 판타지도 되는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몽실언니』를 읽을 때도 그랬어요. 『부심이의 엄마 생각』에서 한 구절 옮겨 볼까요.
“부심아, 저 바깥을 한 술(한 번) 내다봐 봐. 눈이 한없이 내리고 있지? 바람은 쌩쌩 불고, 온 들과 언덕이 몽땅 하얗게 덮여 있지? 그 때문에 나는 새도 없고, 짐승이란 짐승들도 모두 움츠리고, 마실 가는 사람들도 하나 없이 꽁꽁 얼어붙고 있잖아. 그런데 저 눈보라와 저 달달 떨리는 추위를 갈라 치러 가는 애가 하나 있어. 그런 애가 입는 옷이 바로 부심이야.
그 옷은 어떻게 된 것인 줄 알아? 하얀 옷? 아니야. 그러면 까아만 옷? 아니라니까. 그러면 어떻게 되었느냐. 파아란 풀빛 바지에 빠알간 대님, 그리고 빠알간 저고리에 풀빛 고름을 질끈 맨 옷이야. 그것을 입고 저 눈보라 속을 가노라면 어떻게 되겠어? 죽었던 뜰이 새파아랗게 살아 빠알갛게 피어오르는 것 같질 않겠어? 그러니 어떻게 되겠느냐 이 말이야.”
예, 정말 그렇지요. 파아란 풀빛 바지에 빠알간 대님, 빠알간 저고리에 풀빛 고름을 질끔 맨 아이가 걸어가는데, 그 걸음을 걸을 때마다 죽었던 뜰이 새파아랗게 살아 빠알갛게 피어오르는 장면을 한 번 상상해 보세요. 이거야말로 현실 세계이면서 또 판타지 세계(간절한 바람의 세계)인 것이지요. 현실과 간절한 바람의 세계가 경계가 없이 하나가 되는 거지요.
생산성을 앞세우면서 사람은 노동의 노예가 되고, 점점 자신의 내면으로부터도 멀어지기 시작하였습니다. 요즘 현대인들이 신화를 좋아하고, 판타지를 좋아하는 이유가 있는 것 같아요. 판타지의 세계, 신화의 세계에는 인간이 자연과 영혼의 형제로 살아가려는 간절한 바람이 들어 있어요.
우리 어린이 문학 작품에서 몽실이와 같은 캐릭터, 강아지똥과 같은 캐릭터, 위 『부심이의 엄마 생각』에서 부심이나 엄마와 같은 캐릭터, 『어린이와 평화』에 등장하는 평화운동을 하는 그 온화하고 평화로운 얼굴을 가진 사람들, 또 「앗살라 알라이쿰」에서 분노 없는 분노의 노래를 부르는 아이들, 이들은 다 자연과 영혼의 형제로 살아가려는 간절한 바람을 가진 캐릭터들이라 할 수 있겠지요. 헨리 데이빗 소로우가 말하는 것처럼 자기가 상상하는 대로의 삶을 살아가는 캐릭터들이겠지요.
그러니 이들에게 꿈이 어디 따로 있고, 생시가 어디 따로 있겠어요. 외부 현실이 어디 따로 있고, 내면 현실(마음 속)이 어디 따로 있겠어요. 소년소설이 어디 따로 있고, 판타지가 어디 따로 있겠어요.
새해에는 우리 어린이 문학 동네에도 이렇게 자기가 상상한 대로의 삶을 살아가는 감동을 주는 캐릭터들이, 많이 창조되었으면 하는 바람입니다. 이러한 캐릭터들은 관계의 그물망 속에서 살아가는 인간이 자기 삶에 기꺼이 즐겁게 직면하여 고백하는 언어를 쓸 때 그 삶 속에서 발견될 수 있겠지요. 그래요. 정말 우리가 사는 이 세상은 판타지 세계로 통하는 아주 훌륭한 통로란 생각이 절실하게 드는군요. 그래서 또 이 세상은 한번 즐겁게 살아 볼 만한 세상이란 생각도 들구요.
지금 쓴 이 편지는 그냥 『열린어린이』에도 보내야겠습니다. 『열린어린이』로부터 어린이 문학 작품을 깊이 읽는 이야기를 쓰면 좋겠단 말씀을 들었는데요. 새해도 되고, 이야기의 첫 시작이니 또 몇 달 뒤에 내 차례가 돌아오면 그 때는 요즘 나오는 어린이 문학 작품을 놓고 깊이 있게 읽은 이야기도 좀 해 보도록 하지요.
예. 그럼 다들 새해에도 건강하시구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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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쓴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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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재복 / 1957년 경기도 강화에서 태어나 서울교육대학교와 성균관대학교 영어영문학과를 졸업했습니다. 어린이 문학에 관심을 가지기 시작하여 한국 어린이 문학사 정리와 판타지 동화 공부에 열중하고 있습니다. 초등학교에서 10년 남짓 어린이들을 가르치다가, 한국어린이문학협의회에서 발행하던 월간 『어린이 문학』 일을 했습니다. 지금은 달마다 「이야기 밥」이라는 소식지를 내고 있습니다. 대표 작품으로는 『북한동화선집』 『뚱보 방정환 선생님 이야기』 『우리 동화 바로 읽기』 『우리 동화 이야기』 『우리 동요 동시 이야기』 등이 있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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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에 나온 책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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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린이와 평화 / 박기범 지음 / 창비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