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춘문예가 늙어 간다?!
새해 벽두에 일제히 발표된 올해 신춘문예 결과에서는 한 가지 특이 징후가 만져진다. 당선자들의 연령이 높아진 것이다. 20대 당선자가 없진 않지만 30, 40대가 주축을 이루고 있다. 특히 40대의 약진이 두드러진다. 신춘문예를 시행하고 있는 서울의 종합일간지 7곳의 시·소설 당선자 14명 가운데 무려 6명이 40대였다. 한 신문의 소설 부문 당선자는 심지어 회갑의 ‘할머니’이다!
이들이 젊고 힘 있는 경쟁자들을 물리치고 일약 당선의 영예를 안은 사실 자체는 경하할 만하다. 육체적으로 취약하고 정신적으로도 피로하며, 아마도 밥벌이와 일상의 압박에 시달리는 가운데 이뤄냈을 성취이기에 기쁨과 보람도 한층 클 것이다. 그러나 한국 문학의 지형도 속에서, 거리를 두고 사태를 관찰하자면 얘기는 조금 달라진다. 신춘문예 당선자들의 연령이 높아지는 현상이 곧 한국 문학 자체의 노쇠화를 방증하는 것일 수도 있기 때문이다.
위험한 추정일 수도 있지만, 40대 당선자들이 거둔 쾌거는 젊은 유망주들의 ‘공백’을 틈탄 결과일지도 모른다. 명민하고 발랄한 젊은이들이 문학을 멀리하고 영상과 오락 쪽으로 내달려 간 빈 자리를 40대 이상의 ‘중늙은이’들이 차지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문학과 문학인의 처지에서 보자면 사뭇 우울한 가정이겠으나 동시에 아예 터무니없는 상상만도 아닐 것이다.
문학을 새로 시작하기에 마흔이란 나이가 너무 늦은 것은 아니다. 잘 알려진 대로 박완서씨가 장편소설 <나목>으로 <여성동아> 장편공모에 당선했을 때 그 이의 나이가 마흔이었다. 복거일씨가 문제적 장편 <비명을 찾아서>를 단행본으로 출간하며 곧바로 등단했을 때는 마흔둘, 김훈씨가 장편소설 <빗살무늬토기의 추억>을 <문학동네> 창간호에 연재하며 작가로 새출발한 것은 마흔일곱이 되어서였다. 이들이 이 시대를 대표하는 작가로 우뚝 섰음은 두 말할 나위도 없을 테다.
그렇지만 박완서씨나 복거일·김훈씨는 어디까지나 예외적인 경우라 해야 옳을 게다. 어쩌다 한번씩 그런 늙다리 신인들이 등장할 수는 있겠지만, 올해 신춘문예는 그와는 경우가 다르다. ‘늙은 신인’들의 지배화라는 현상의 배면에는 분명 문학 안팎에 걸친 필연적인 이유가 있을 것이고 그것이 문학에 대해 던지는 분명한 메시지 또한 있다고 보아야 한다.
신춘문예의 본디 취지가 문단의 ‘새 피’ 수혈임은 재론의 여지가 없다. 문학 역시 일종의 생명체와도 같아서 적어도 그 세포 차원에서는 신생과 성장과 노화와 죽음을 끊임없이 반복한다. 문학이 건강을 유지하며 생존을 지속하기 위해서는 새로운 피의 수혈, 새로운 세포의 생성이 보장되어야 한다. 신춘문예는 바로 그런 기능을 위해 마련된 제도라 할 수 있다.
늙다리 신인들 역시 새 피요 새로운 세포임은 물론이다. 생물학적인 나이에 상관 없이 젊고 발랄한 상상력과 문제의식, 문체로 무장한 신인들은 역시 문단의 새 피라 할 법하다. 그러나 작가 또한 피와 살과 뼈로 이루어진 인간인지라 생물학적 늙음과 체력의 약화가 어떤 식으로든 작용을 미치게 마련이다. 늦은 나이에 등장한 신인들이 얼마나 오랫동안 육체적·정신적 긴장을 유지하며 제 몫을 해 낼지 두고 볼 일이다. 더구나 모르긴 몰라도 이들은 대부분 문학 이외의 다른 직업을 가지고 있기 십상이다(전업주부를 포함해서 하는 말이다). 반드시 ‘전업’이 문학적 최선이라 하기는 어려울 게다. 그러나 문학을 필생의 업이 아닌, 일종의 여기 내지는 부업으로 삼는 신인들이란 문학 쪽에서 보자면 그닥 반가운 존재는 아닐지도 모른다. 신춘문예라는 사회적 축제에 기꺼운 마음으로 동참하지 못하고, 우울하고 미심쩍은 눈길을 보내야 하는 현실이 얄궂다.
(한겨레신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