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출처 : 아영엄마 > [퍼온글] 금척고분
경상북도 월성국 서면 금척리 경주 근교에 있는 신라 시대의 고분군으로 사적 제43호이다. 이곳에는 약30여기의 대소 고분이 밀집되어 있는데 외형상으로는 대부분 원형토총이며, 원형토총2기가 맞붙어 있는 표형분도 있다.
이 고분들 중 한 곳에 신라의 세 가지 보물 중의 하나인 금척 즉, 금으로 만든 자를 묻었다고 하는 전설이 있어서 금척리라는 동리 이름이 붙여지기도 하였다.
모두 경주 시내의 평지 고분들보다는 규모가 작다. 아직 이 고분들에 대하여 본격적인 학술적 발굴 조사가 이루어지지는 않았지만 1952년에 국립박물관에 의하여 파괴된 고분 2기가 조사 되어 금귀걸이, 곱은옥 등이 출토된 바 있고, 1976년에는 고분군 사이의 밭에서 소고분들이 발견되어 문화재 관리국 경주사적 관리사무소가 주관하여 발굴한 바 있다.
이어 1981년에도 민가 보수중 파괴된 소고분들이 발견되어 국립박물관에서 발굴하였다. 이와 같은 조사 결과 이 고분들은 경주식의 적석목곽분으로서 출토 유물도 세환식 금귀걸이 1쌍, 호박환옥 1점, 기타 철편토기편 등이 나왔을 뿐 새로운 자료는 제공하고 있지 않다. 그리고 이러한 유물들은 경주지방의 고분들에서 나오는 것과 같아 축조 시기도 대체로 경주고분군과 비슷한 시기일것으로 추정된다.
◆ 금척에 관한 이야기
신라가 건국되고 박혁거세 거서간이 첫 임금으로 위에 올랐다. 열 세살밖에 안되는 어린 임금이었으나 나라를 바르게 다스리려고 언제나 깊은 생각에 잠겨 있었다.
어느날 어린 임금이 대궐 뜰에서 생각에 잠겨 있는데 웬 사람이 나타나서 말했다. "저는 하느님의 사자입니다. 하느님께서 지금 지상의 동쪽에 신라라는 나라가 이루어졌는데 새나라를 축복하기 위하여 이 금자를 선물로 갖다 드리라 하므로 가지고 왔습니다. 이 금자는 앓는 사람을 재면 병이 낫고 죽은 사람을 재면 다시 살아나는 보물이오니 잘 간직하시기 바랍니다." 하고 사라져버렸다.
임금은 하늘에 절하고 금자를 받아들고 신하들에게 설명한 다음 창고에 소중하게 보관하도록 하였다. 박혁거세 거서관과 알영왕비는 어질게 백성들을 다스렸으므로 나라안이 화목하고 농사도 잘되어 태평 세월이 계속되었다. 임금도 백성들도 이것은 하늘이 축복해 준 금자의 덕인 줄로 알고 금자를 소중히 여겼다.
넓은 땅을 차지하고 있는 강대한 나라 한나라 왕이 신라에 금자라는 보물이 있다는 소식을 듣고 그것을 잠깐 보고 줄 테니 빌려 달라고 사신을 보냈다는 소식이 들려 왔다.
어린 임금은 신하들을 불러 '금자를 빌려주는 것이 좋겠는가? 안 빌려주는 것이 좋겠는가?' 하고 물었다. 한 신하가 나와서 말했다. "한나라는 국토가 넓고 인구가 많기 때문에 교만한 나라입니다. 금자를 빌려주면 우리 신하를 업신여겨 돌려주지 않을 것입니다."
또 한 신하가 말했다. "한나라는 자기네 나라가 부강한 것을 믿고 이웃 작은 나라들을 괴롭히고 있습니다. 만일에 그러한 보물을 한나라가 갖고 있다면 이웃 작은 나라들을 더욱 괴롭힐 것입니다. 금자를 보내서는 안됩니다." "그러나 아무리 귀중한 보물이라 하더라도 잠깐만 보고서 주겠다는데 그것도 못한다면 어찌 이웃간의 의리가 되겠소. 못 주겠다는 구실이 분명해야 하지 않겠소. 거기에 대해 좋은 의견이 있으면 말해 주오."
또 한 신하가 말했다. "그 금자를 땅속에 묻어 버리는 것이 좋을 것 같습니다. 사람의 목숨이란 한도가 있는 것인데 죽어야 할 사람을 인구가 차고 넘어 새로 세상에 태어날 어린 생명들이 크게 위협을 받을 것입니다. 그러한 보물을 가짐으로써 공연히 강한 나라의 욕심을 자극하여 침략을 받을 염려도 없지 않으니 땅속에 묻어 버리는 것이 상책인가 합니다."
어린 임금은 그 의견을 옳게 여겨 그 금자를 땅에 묻어 무덤을 만들었다. 신하들은 다시 임금께 말했다. "한나라는 넓고 큰 나라입니다. 만일에 금자를 땅에 묻었다는 기미를 알게 되면 곧 파내어 가지고 갈 것입니다. 금자무덤 주위에 많은 무덤을 더 만들어서 어느 무덤 속에 금자가 들어 있는지 알지 못하도록 하는 것이 좋을 것 같습니다." 하였다.
어린 임금은 또 그것을 허락했다. 그 후 한나라 사신이 와서 금자를 빌려 달라 하였다. 왕은 "이웃 나라에서 금자를 잠깐 빌려 달라 하시니 어찌 못한다 하겠습니까. 그러나 그 금자가 너무 귀중한 보물이라서 땅속에 묻어 두었습니다. 그래도 도적들이 훔쳐갈까봐 무서워서 그 주위에 많은 무덤을 더 만들었습니다. 그런데 그 금자를 묻은 사람이 죽었기 때문에 지금은 금자가 어느 무덤에 들어 있는지 아는 사람이 없습니다. 모처럼 오셨는데 빌려 드릴 수가 없어서 미안하게 되었습니다." 하고 금자를 보내지 못하는 이유를 자세히 설명했다. 한나라의 사신은 있는 무덤을 모두 파보면 될 것이 아니냐 하고 금자를 묻은 무덤으로 안내하라했다. 금자를 묻었다는 무덤이 너무 많은 까닭에 파보는 것을 단념하고 한나라의 사신은 돌아갔다. 그 후 무덤 속에 금자를 묻은 사람이 정말 죽었으므로 신라에서도 금자가 들어 있는 무덤을 알지 못했다. 지금도 금자는 월성군 건천읍 금척리 고분군 중 어느 무덤 속에 묻혀 있을 것이라는 전설이 전해지고 있다.
찾아가는 길:
경주시외버스터미널 정면에 형산강 줄기가 있다. 그리고 그 강을 건널 수 있는 다리가 하나 있고 그 다리를 건너자마자 오른쪽으로는 김유신 장군묘로 갈 수 있고 왼쪽으로는 태종무열왕릉으로 갈 수 있다. 태종무열왕릉을 지나 계속 건천방면으로 가다 보면 길 왼편으로 넓은 고분군을 만나게 된다. 진입로는 굉장히 좁다.
금척고분(金尺古墳)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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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재명 : 금척고분(삼국시대)
구 분 : 고분 - 사적 제 43호
위 치 : 경주시 건천읍 금척리 192-1
문 의 : 사적관리사무소(054-772-36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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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요 경주시 건천읍 금척리 앞을 지나는 대구-경주간 국도변의 양쪽에 30여기의 크고 작은 고분들이 분포하고 있다. 해발 65m 정도의 평지에 고분군(古墳群)이 조성되어 있는데 도로의 서쪽에 분포하는 고분군의 봉토는 비교적 그 규모가 큰 편이며 거의 완전한 형태로 보존되고 있으나 도로 동쪽의 고분들은 비교적 봉토가 작고 봉토의 훼손도 또한 심한 편이다.
서쪽의 고분들은 잘 정비된 상태로 관리되고 있으나 동쪽에 분포하는 고분의 주위로는 밭, 과수원 등으로 경작되고 있어 고분을 포함한 고분 주변의 훼손이 우려된다. 대형묘는 아니나 봉토들이 완전한 고분들이 있고 고분 중 하나에 금척(金尺)이 부장되어 있다는 속전이 있는 것으로 고 신라의 귀족묘로 추정된다. 1952년 대구-경주간 국도에 의해 봉토의 절반이 파괴된 2기의 고분을 국립 박물관에서 발굴조사한 바에 의하면 경주식의 적석목곽분(積石木槨墳)으로 금제세환식(細環式), 호박옥(琥珀玉), 곡옥(曲玉), 철도(鐵刀) 등이 출토되었다고 한다.
참고자료 : 전국 문화재 총람(문화재 관리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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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화에 얽힌 유래1 옛날 신라에 금자를 왕에게 바친 사람이 있었다. 죽은 사람이라도 이 금자로 한번 재면 다시 살아나고, 무슨 병이라도 금자로 한번 쓰다듬으면 그 자리에서 낫는다는 신기한 힘을 가지고 있다는 것이다. 왕은 이 금자를 국보로 여겨 매우 깊숙한 곳에 두었다.
이런 소문이 당나라에 전해지자 당나라에서는 사신을 보내 금자를 보내달라고 요청하였다. 왕은 국보에 해당하는 금자를 달라고 하는 무뢰한 당나라 사신에게 순순히 금자를 내줄 수가 없었다.
곧 신하에게 명하여 토분을 만들고 그 속에 금자를 파묻었으며 주변에 다른 토분을 만들어 어느 곳에 금자를 묻었는지 알 수 없게 하였다. 그리하여 당나라 사신은 그 많은 토분을 헤치고 금자를 찾아낼 기력이 없었던 듯 물러나고 말았다. 왕의 지략으로 금자를 당나라에게 빼앗기지 않았으나, 이후 어느 토분에 금자가 묻혔는지는 아무도 모르게 되었다고 한다.
참고자료 : 답사여행의 길잡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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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화에 얽힌 유래2 건천읍과 맞붙어 있는 고도 경주시에 가면 숱한 고분과 봉황대(鳳凰臺)가 시내 여기저기에 흩어져 있다. 삼국유사에 나오는 이야기를 보면 신라 서울 경주는 지리적으로 새 봉황(鳳凰)의 형국이라고 하였다. 이 새가 날아가지 못하게 하려면 장안의 여기저기에 봉황알을 만들어 놓아 봉황새가 알을 품고 있어 떠날 수 없도록 해야 한다고 했다. 그래서 봉황대가 만들어졌다고 한다. 그러나 신라가 망하자 경주는 봉황의 형국이 아니라 배의 형국인데 이 무거운 산더미 같은 짐을 배에 가득 실었으니 배가 물에 가라앉을 수밖에 없을 것이 아니겠느냐는 것이었다. 그래서 신라가 망했다고 한다.
금척리(金尺里)는 경주에서 국도를 따라 광명과 모량(毛良)을 지나 건천읍을 향하는 10Km지점에 있다. 도로변 양편에 작은 산같은 고분이 40여개 여기저기에 흩어져 있는 곳이기도 하다. 가까운 건천읍에서는 반대로 내려오는 오릿길 지점에 마을이 있는데 여기가 바로 금척리이다. 금척(金尺)이란 글자 그대로 황금으로 만든 자(尺)라고 하는 뜻이다. 그 옛날 신라 진평왕이 정사(政事)를 보다가 낮에 깜빡 졸고 있었다. 눈앞에 일곱 무지개가 곱게 나타나더니 금으로 된 황금자 하나를 건네 주고 홀연히 사라졌다. 왕은 졸음에서 번뜩 깨어났다. 그런데 그때 꿈속에서 신선으로 부터 받은 그 황금자가 거짓말처럼 바로 눈앞에 놓여져 있는 것이었다. 죽은 사람도 그 자로 재면 다시 살아나고, 가난한 사람이 소원을 빌면 무엇이든 소원대로 이루어 진다고 하는 그런 자였다. 나라의 모든 부귀와 영화도 그 자를 갖은 사람에게만 한한다고 하는 보물이다. 그 덕택인지 신라는 날로 번창해 갔다. 그러나 진평왕대에 이르러 신라에서는 하늘에서 내린 황금의 자가 있어서 날로 국력이 부강해진다고 하는 소문이 당나라 황제 귀에 들어가게 되었다. 황제는 이것을 자기 손에 넣고 싶어하였다. 그래서 신라에 사신을 보내어 신라왕이 거절을 하고, 갖다 바치지 아니하면 당장 많은 군사를 일으켜 신라를 처부수고 말겠다는 협박을 하였다. 이 소식을 들은 진평왕은 머리를 싸매고 자리에 누웠다. 그러다가 한가지 계책을 세웠다. 백성들을 충동하여 여기에 크고 작은 여러 개의 가짜 왕릉과 같은 고분을 만들게 하였다. 이것이 바로 황금자가 묻혀있는 금척이다.
왕릉같기도 하고 봉황대 같기도 한 큰 무덤이다. 왕은 이 어느 고분 속에 자신만 알고, 혼자 이 금자를 묻어 두었다. 이 일로 인하여 당나라 신하들과는 줄다리기를 하였다. 그로부터 얼마 후 진평왕은 급병으로 그만 세상을 떠나고 말았다. 결국 황금의 자를 묻은 고분은 진평왕밖에 모르는 영원한 비밀이 되고 말았다.
일제시대 때의 이야기다. 고증(考證)을 받은 역사학자들이 황금자가 탐이 나 발굴작업에 착수하였다고 한다. 그런데 이때 갑자기 맑은 하늘에서 우왕탕탕하며 뇌성 번개가 치더니 비가 쏟아졌다. 하늘이 노한 것이다. 사방에서 시커먼 먹구름이 몰려들고, 밤낮 1주일간 빗줄기가 끊일 줄 모르게 내리 퍼붓기 시작했다. 그래서 이 일대는 대홍수(大洪水)가 났다. 일본인 발굴단은 부득이 철수하는 길 밖에 없었다고 한다. 그 뒤로는 누구도 이 금척 고분에 대하여는 손을 대지 못했다고 한다.
해방(解放)과 6.25사변을 거쳐 반세기가 훨씬 지나도 금척리 고분은 말없이 그대로 있다. 전해 내려오는 이야기로는 그래서 이 근방의 동네 이름을 금척이라고 불렀다 한다. 지금의 기차선로를 중간에 두고 서쪽 단석산편은 곡산 한씨(韓氏)네가 많이 살고, 동쪽편은 영천 이씨(永川李氏)와 순홍 안씨(順興安氏)가 산다. 그래서 그런지 한씨와 이씨 사이는 연비연사간이 많다고 한다.
참고문헌 : 건천읍지 검 토 : 향토사학자 김태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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찾아가는 길 건천읍 금척리에 있다. 경주에서 두대리 입구에서 4번 국도를 따라 건천 쪽으로 5.5km 가면 길 양쪽으로 고분군이 있다. 길 한쪽에 잠시 주차하여야 한다. 버스를 타고 갈 경우 경주시내에서 건천행을 탄 후 모량에서 내리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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